칼빈과 개혁신학에 대한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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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 칼빈의 출생과 사상배경

 

스위스 도시들의 영향과 마찬가지로 비텐베르그의 파장에도 개방적이던 프랑스의 복음주의는 또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부쳐가 추구하던 교회갱신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안에는 개혁된 공동체들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프랑스인이던 요한 칼빈은 자신이 외국도시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조국의 종교개혁의 운명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1509710일 프랑스 노용에서 출생하였다. 코뱅이라는 감독 비서관이요 참사회의 법률자문관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고 항게라는 유력한 귀족 가문과의 친분을 통해 상류사회의 양식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아버지는 원래 신학과 사제교육을 시킬 생각이었다. 14세 때 성직록의 혜택을 받아 몽떼 귀 학교에서 (복음주의 사상을 저항하는 학교)1528년 학사학위를 받는다. 그 당시 칼빈은 신앙 때문에 처형당하는 사건을 목격하지만 아직은 종교개혁의 편에 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대성당 참사회와 싸운후 칼빈에게 법률공부를 시키기로 작정하여 당시 법대의 명문인 오를레앙 대학의 삐에르 드레스투와르 교수에게 법학을 공부시켰고 Bourges대학 안드레스 교수에게서 인문주의 및 그리스어를 공부하기도 한다.

 

1531년 프란시스 1세가 세운 인문주의 대학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웠고 1532[세네카 관용론 주석]이라는 책 출판과 더불어 그는 일약 인문주의자로 부상하게 된다.

매년 111일은 로마 카톨릭에서 지키는 만성절로서 이날은 개신교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역사적인 두 사건이 벌어진다. 1517년 이날은 루터가 면죄부의 오류와 교황청의 무지를 통박하는 반박문 95개 조항을 Wittenberg 벽에 내걸었던 날이었고 1533년 만성절에 친구이자 대학총장인 니콜라스 콥은 개학식 설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훈시했는데 이는 그 시대에는 들을 수 없던 개혁사상의 설교였다.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칼빈은 확고한 개혁신앙의 소유자로 바뀌게 된다.

 

니콜라스 콥은 프랑스 국왕 프란시스 1세의 궁정의사이자 파리대학교 의학부교수 이던 윌리엄 콥의 셋째 아들이었다. 칼빈보다는 네 살이나 위였으나 영특한 칼빈과 함께 동급생으로 수학하였고 새로운 사상을 호흡하면서 매우 절친한 친분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 만성절의 강연으로 소르본느 교수진과 고위 성직자들을 불쾌하게 만들었고 이로인하여 박해가 이들에게 박해가 가속화 되었다. 이때 당시 파리는 매우 긴박한 상황에 있었는데 프란시스의 명령에 따라 당국의 루터파이 사상에 동조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검거에 나서서 약50여명이 체포되었다.

리콜라스콥과 칼빈은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각기 파리를 떠나게 되었고 마치 포도농장의 과원지기처럼 변장을 하여 스위스 바젤로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로마 카톨릭의 전통에 입각한 엄숙함때문에 매여 있던 칼빈이 고향과 조국을 떠나게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제네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에 이때 칼빈이 스위스로 도피하지 않았다면 앞에서 체포된 50여명의 사람가운데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정진을 거듭한 칼빈은 개혁교회의 뼈대를 세운 신학이 건축가이자 위대한 선봉장으로 성경의 사상을 대변한 기독교 지성인으로 걸출한 금자탑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2. 칼빈의 갑작스런 회심

 

회심은 기독교 신앙세계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죄인이 자신의 인생 방향을 돌이켜서 어떤 순간에 극적으로 회심하여 새사람이 되어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돌아서서 빛의 세계로 전환하는 순간은 감동적이 아닐 수 없다.

회심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첫 번째 회심자로 유명한 사도 바울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그 후엔 어거스틴과 마티루터도 회심한 뒤에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서 쓰신 인물들이 되었다. 칼빈의 회심도 이와 비슷하다.

중세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무소불위의 권세를 자랑하며 약 천년동안 서구유럽을 휩쓸고 있었다. 아직 로마 카톨릭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있던 프랑스 파리에서 개혁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 그지없는 모험이었다. 16세기의 개신교는 목숨을 바쳐야만 할 박해 속에서 신앙을 형성해 나가며, 전파되었다.

 

1) 회심의 처음단계 : 1527년 사촌 삐에르 로베르 올리베당과의 교제로 성경을 접함

헬라어 선생 볼마르에게 처음으로 성경원어를 배울 때 교회의 잘못을 소개받음

( 어쩌면 이때 결정적인 영향을 입었는지 모른다.)

2) 둘째단계 : 1529- 1532년까지 오를레앙과 부르지에서 법학수학시간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교회의 개혁에 동조하는 휴머니스트들의 영향을 받음. 점차 복음의 참된 가르침에 흥미를 갖게 되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스스로 검증하게 되는 신앙의 발전단계

3) 셋째단계 : 1532년 개혁사상이 무르익어 가던 파리에서 루셀의 설교에 동조함

많은 개신교들이 순교하는 것을 목격함

4) 넷째단계 : 1533년초 친구 니콜라스 콥의 연설문 사건으로 더 이상 내면적으로만 감추어두지 못하고 공개적으로 드러냄. 마침내 개혁신악을 받아드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서 참된 신앙을 찾고 있는 사람들 에게 유익을 끼침

 

3. 기독교강요에 대하여

 

(1) 집필동기와 목적

 

기독교강요는 라틴어로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인데,institutio(강요)`원리들' 혹은 '주된 교의적 주제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강요는 신학의 모든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주요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자신이 가장 중시한 책이며, 칼빈주의의 전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안에는 칼빈 사상의 종합적인 이론이 나타나 있으며, 그 자체로서 충분한 이론서가 된다. 그러므로 칼빈과 칼빈주의에 있어서 기독교강요는 참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칼빈이 이 기독교강요를 집필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 칼빈은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낸 헌사에서 자신의 저술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제가 처음 이저술 작업에 착수하였을 때,지극히 영광스러운 왕이시어, 당신의 위대하신 통치에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려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의도도 없었습니다. 저의 목적은 신앙에 열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참된경건에 이르는 확실한 기초들에 대해서 전달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저술을 그리스도에 대해서 목말라하고, 사모하는 제가 본 많은 사람들, 특히 우리 프랑스 사람들을 위해서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젖어있는 사람이 매우 적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가르침을 위한 기본형태로 만든 이책 자체의 제 의도가 무엇인가를 입증하리라 믿습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을 작성하여 출판하게 된 해인 1536년에 그는 독일의바젤(Basel)에 있었다. 그가 자신의 고향인 프랑스의 노용(Noyon)을 떠나바젤에 머무르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아서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해오는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고자하는 욕망 때문이었고, 둘째는 당시 프랑스에 있었던 프로테스탄트의 박해의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편 칼빈이 바젤에 있는 동안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고 그러던 중 칼빈의 용감한 친구인 에띠엔 드 라 포르즈(Etienne de la Forge)가 사형에 처해 졌다. 이에 대해 프랑스왕(프란시스 세,1515-1547)은 희생자들에 대한 외국의 동정을 막기 위해 21일의 선언에서 처벌당한 자들은 단지 재세례파들과 내란음모를 꾸민 자들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그들은 신실하고 성도다운 사람들이었으며 거룩한 순교자들이었다. 왕이 잔인성 위에 중상의 죄까지 더했다는 사실은 절대 불문에 붙일 수 없는 일이었다. 래서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출판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므로 칼빈이 기독교강요(초판)을 출판하게된 목적은 동료 신자들에 대한 거짓된 비난을 옹호하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기독교강요가 쓰여진 목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강요 초판 자체에 칼빈 자신이 이 책을 집필했던 원래의 목적을 밝혀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어떤 기초적인 사실들을 전달함으로써 그것에의해 종교적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에 도달하게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기독교강요 초판의 원래 목적은 기독교의 기초적 사실을 전달하기위한 것이 였으나, 주변 상황에 의해 박해자들에 대한 옹호의 성격을 띄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기독교강요 초판에 대한 집필 동기와 목적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계속될 재판들과 최종판의 집필 동기(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1539년에 독일의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서 출판된 기독교강요 제2판에서 칼빈이 독자들에게 간단히 쓴 서문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원하는 신학 후보생들에게 준비를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교강요 최종판인 1539년판(제네바)에도 '신학생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읽기위한 준비를 하게'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었다.

 

그러므로, 종합해 볼때 기독교강요는 처음에는 기독교의 기초적인사실들을 설명하고 자기 동료들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학생들을 위한 성경교리의 요약으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개정판들의 구성과 특징

. 초판 (15363, 바젤)

초판은 15363월에 바젤(Basel)의 출판업자 토마스 플래터(Thomas Platter)와 발사스 라시우스(Balthasar Lasius)에 의해 출판 되었다.

이것은 포켓형의 단권으로 된 516페이지의 적은 분량이었는데, 1장은 율법, 2장은 신조, 3장은 주기도문, 4장은 성례전(세례와 성찬)으로서 루터의 요리문답의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5장은 거짓된 성례, 6장은 기독자의 자유로 총 여섯 장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권두에는 '왕에게 보내는 서간'(Epistle of the King)이 인쇄되어 있다.

 

형식에 있어서 5장과 6장은 1-4장의 요리문답 형식의 교훈과는 달리 변증적 형식의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5장에서 칼빈은 종부성사와 결혼예식, 그리고 견신례와 고해성사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6장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는 복음에 입각하여 형성된다는 사상을 피력하였는데, 이것은 1934년의 벽보비난사건의 대답이 되었다.

 

초판의 몇몇 특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것은 라틴어로 쓰여졌으며, 저자는 칼빈 자신의 이름 그대로 하지 않았으며 '마르티아누스 루카니우스'(Martianus Lucanius)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둘째, 이것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발행된 지 1년도 못되어서 완전히 매진되었는데, 라틴어로 출판되어 독자층이 비교적 소수의 지식층에 한정됨을 생각할 때 상당한 호응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기독교강요의 원천

 

앞서 우리는 기독교강요의 형성과정과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그런데, 모든 철학적, 도덕적, 신학적 이론의 역사는 가장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사상으로 보여지는 이론도 실제로는 그 주창자의 창조적인 힘보다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진 기존의 사상을 새롭게 배열하는 독창성에 더 많이 기인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칼빈 역시 이 일반적 법칙에 예외적인 인물은 아니며, 따라서 칼빈 역시 선대의 여러 업적과 사상을 참조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과업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칼빈이 자신의 기독교강요를 쓰는데 참조되었던 사상의 원천은 무었이었을까? 웬델(Wendel)은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종합하고 있다.

 

첫째, 다른 어떤 개혁가보다도 구약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초기 교회의 교부들의 많은 저서들에서 그 원천을 찾을 수 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미스티우스(Themistius), 키케로뿐만 아니라 존 크리소스톰, 오리겐(Origen), 어거스틴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하게 인용하였다. 초기에 칼빈은 그리이스 교부들 중에서 크리소스톰을 특히 선호한 것처럼 보이며, 점차 어거스틴의 영향이 증대하였다. 특히, 교리에 관한 문제는 전적으로 어거스틴에게서 차용하였다.

 

세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중세의 일부 사상에 보다 밀접해 있다.

(어떤 신학자는 그 근거를 로마법의 영향이라고 보기도 한다.)네째, 우리는 칼빈의 보다 동시대의 요인 중에서 인본주의자들과 개혁가들에게 당연히 촛점을 맞추게 된다. 칼빈이 영향 받은 인문주의자들로는 발라(Valla), 에라스무스(Erasmus), 부드(Bude)등이 있으며, 개혁파들로는 루터, 멜랑톤, 부처등이 있다.

 

4. 칼빈신학의 근본원리

 

1)이중적 지식

칼빈 신학의 구조와 특성을 점검하려는 첫 단계에서 우리는 참된 지식의 기초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그의 출발점을 대하게 된다.

그 기초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다.

칼빈신학의 구조를 배틀스 박사의 해석과 그의 제자 갬블 박사의 해석을 요약하면

1: 참된 지식의 기초는 무엇인가?

* 하나님을 아는 것과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다.

2: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기본적으로는 성경을 통해서이다.

3: 성경은 무엇인가?

* 하나님이 계시이다.

4: 그 계시의 본질은 무엇인가?

* 피조물의 한계까지 하나님께서 낮아지심이다.

5: 이상의 문답을 근거하여 볼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6: 인간은 무엇인가?

*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7: 하나님과 인간을 아는 지식의 윤리적 귀결은?

* 참된 경건, 즉 참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5. 신학의 원천 성경

 

1) 성경의 권위

칼빈이 개혁주의에 영향을 받게된 16세기 초엽은 최종의 권위로서 교황이나 교회가 아니오 성경이라는 가르침이 새롭게 강조되던 시태였다. 거의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은 혼혈이 일치된 견해를 발표하였으니 오직 성경으로만( sola scriptura )참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발견하기 때문에 교회내의 가르치는 직분이 최종권위라고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정리와 박해를 받았다.

 

2) 성경의 영감

칼빈의 성경관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신학의 유일한 원천으로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되, 이 성경은 성령이 역사하심이 함께 함으로서 참진리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6. 칼빈의 신학체계

 

칼빈의 신학은 체계적이다.이 점에 관한한 평생 비체계적 신학으로 살았던 루터와는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일에 태만하여서는 안될 것으로 본다. 그럼 칼빈의 신학 체계를 어떻게 파악하여야 옳은 것인가?

칼빈 자신의 저작을 읽는 것만큼 그의 체계를 바로 파악할 수 있는 길은 아마 없을 것이다.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1 장은 율법에 관하여 논술되었다. 이 부분에는 십계명 해설이 있다.

2 장에서는 신앙에 관하여 논술되었는데 그 내용은 사도신조의 강해이다.

3 장에서는 기도에 관하여 논술되었는데 주기도가 논술되어 있다.

 

1.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살기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할 것.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인생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인생의 참 의미와 목적이 어디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3:11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모든 것을 지으시되 떼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원을 사모하여 하나님을 믿으며 영원히 죽지 아니 하는 부활의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중대한 사실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인식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일 외에 또 다른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바로 인식한 사람에게 바른 신앙심이 주어지는 동시에 무한한 평화와 기쁨과위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14:1,27)

 

2.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가 다른 점

 

만일 인생에게 종교가 없다면 사람은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짐승보다 나을 것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가 그렇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며 또 누구든지 그렇게 인정할 수 밖에 없읍니다. 참된 종교는 사람이 임의로운 생각으로 부터 생겨진 것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께서 친히 내신 것이어야 합니다. 참된 종교의 출처는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참된 조교란 일평생을 통하여 참되고 살아계신 약속의 하나님을 위하여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믿음으로 봉사하는 일이며 거짓 종교는 인간적인 욕망과 허영심을 만족하게 하기 위하여신을 이용하려고 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3.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될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1:20,11:1)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하나님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하나님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창조하신 세계를 보존하시며 다스리시며 섭리하고 계십니다.

 

4.사람에 관하여

 

사람은 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읍니다(1:27).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과 약속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사람에 관하여 아무 것도 올바르게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말은 또 한 번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한번 어머니의 태에서 육신적으로 태어난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생된 사람은 예수님을 믿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하나님께 거역하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생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생이 되어야 구원 받게 되며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5.사람의 자유 의지에 관하여

 

사람은 선택을 할 만한 자유스러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종종 사람을 죄의 노예라고 증언하고 있읍니다.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하여 죄를 짓는 행위만을 자유 의지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읍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일은 사람이 임의로 행하는 자유 의지의 능력에 의한 것 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를 멀리하는 일도 또한 자유 의지의 행위라야 합니다. 타락한 심성을 가진 부패된 사람은 자유 의지의 능력마저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선에로의 자유 의지 이것만이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자유 의지란 사람이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행해도 된다고 하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이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행할 수는 있으나 죄를 짓는 일은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결국 참된 자유를 상실하고 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6.어떻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으며 참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의 무능력과 가련한 것과 비참한 것과 가증한 것과 파멸을 깨닫게 되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불법자들로서 죽어 마땅한데 하나님께서는 풍성하신 긍휼과 자비로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사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무능력을 강한 것으로 바꾸어 주시며 우리의 그릇됨을 바르게 하시며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멸망으로부터 구원으로 ,악마의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이 직접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나라에로 인도하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율법 아래에 두시고 훈련시키시고 율법으로 하여금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 7 .율법의 요약

 

율법의 요약은 두개의 조항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치신 것입니다(10:26-28).첫째 조항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5)는 것이며 둘째 조항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19:18)는 것입니다.

 

8.율법만으로는 무엇이 우리에게 요구되는가?

 

율법에 명령되어 있는 것을 완전히 행치 아니하는 자에 대해서는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선고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늘과 땅을 불러서 증거를 삼고 율법을 공포하였으며(30:19) 그 백성앞에 축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을 두고 그 백성에게 생명을 택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고 명령하였읍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김으로써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입니다. 이에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분명히 나타내면 낼수록 우리의 불의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3:20,5:13). 율법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대신 영원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며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9.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예비적 단계

 

율법으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하여 조금도 어김없는 완전하신 공의로 보응하시는 분으로서 두터운 심판자로 나타나게 되십니다.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하려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이며 예비적 단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죄인)을 가르치는 방법은 먼저는 법이고 그 다음에는 사랑인 것입니다.

 

10.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알게 되는것

 

긍휼이 풍성하시고 깊으신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으로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알게하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접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읍니다.그러나 사실 많은 사람이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소경이 되어 있으며 몽매하여 하나님의 한없으신 은총을 업신여기고 있읍니다.오직 신앙인 만이 그리스도를 기쁘게 영접하고 있읍니다(3:17)

신앙자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사실을 깨닫고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신자는 자기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지 아니하며 그리스도를 따라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11.선택과 예정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계획,작정)이 어디에 있기에 신자와 불신자가 그렇게 다른 것인가

이에 관하여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뿌리는 비유로 가르치고 있읍니다 (13:1-22)

하나님은 자기의 영원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후사를 정하히시고 말씀의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리게 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깨닫지도 못하며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고후 2:16).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읍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비밀한 뜻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미천하고 조잡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55:8-9). 선택과 예정은 하나님의 주권영역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자비하심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 최상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9:21에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든 권이 없느냐"

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절대 주권에 의하여 모든 일을 행하심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1:4에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구속해 주셨고 우리의 보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12참된 믿음이란 ?

 

기독교의 참된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일인 것입니다. 즉 믿음의 정의는 약속에 의하여 확신되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했읍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며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야말로 영원하신 믿음의 대상이며 (4:12,24:2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닫게 되며 하나님을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3:16).

 

13.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볼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비밀에 대하여 무식하고 얼마나 맹목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생애(일평생)의 모든 역량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과 독특하고도 귀중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8:16).

 

14.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받음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만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분입니다.

영생은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아는 것"입니다(17:3).그런데 이일이 이루어지려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인정받고 죄 사함을 받게 되는 믿음의 의에 의하여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따름입니다.

 

15.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며 신앙으로 말미암아 성화 되는 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인정하기 위하여 우리의 보증인이 되시고 자기의 의를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에 따라 우리가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성화의 사역을 따라 성화되어 가지 않는 자는 성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이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가 되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 뿐만아니라 성화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30).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일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3:31,5:16).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의 부패로부터 성결케 되며 심령이 온유하게 되며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7.칼빈과 설교

 

(1)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

 

칼빈은 설교할 때 스스로를 하나님의 대사로 여겼다. 그러므로 설교는 단순히 예배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든가 교회의 임무들 가운데 하나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현현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부언하여 말하기를 "말은 내가 하지만 교육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도 내가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만일 저 높은 곳으로 부터 내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사람들 (=복음을 듣고도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이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나를 유익되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소리는 허공에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칼빈에게 있어서 그의 사역을 수행케 했던 제일의 주된 확신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해석과 강해에 주력했고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기록된 말씀에 대한 진실되고 순수한 주해" 와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의 생활에 적용시키려" 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의 할 일 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

 

(2)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으로서의 설교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칼빈의 설교관은 설교가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임을 보여준다.

칼빈의 설교에서 특기할 만한 것 세가지 정도를 지적 할 수 있는데,

첫째로, 인간이 하나님과 만날수 있는 장소는 바로 성경의 말씀이 설교되어지는 곳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설교와 함께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칼빈은 설교에서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엄선된 수사학적 도구를 채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의도는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의 것을 인식한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로, 칼빈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책임을 가지고 그의 청중의 편에 서서 계속 일깨워 주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설교의 특징은 그의 설교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의 행위임을 의식한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성경이 설교자에 의해 설교되어질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 되며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칼빈의 눈에 비친 설교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현현, 혹은 하나님의 현현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목사가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은 실재로 임하시고, 임재하시되 성례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임재하신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서 먼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주고 그 후에 그 교훈이 사람의 심령에 생생하게 접촉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성령이 그 설교자 자신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로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인간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다고 명백히 가르쳤던 것이다.

 

(3)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으로서의 설교

 

설교는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심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인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수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 설교자가 설교할 때는, 비록 그가 우리와 동일하게 보이고, 대단한 존경을 받거나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하더라도, 어쨋든 예수그리스도는 여전히 이곳(=설교)에 계시고 그의 왕적 보좌를 그 곳에 두시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탄이 우리의 주인이니 타락과 비참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변형시킴으로 우리는 복된 왕국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 왕국은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다.

복음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반역자에서 시민으로 바꿔 놓으셨다. 말하자면 복음은 그것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복음이 우리에게 설교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지배의 세력아래에 두기 위함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라 불려 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서 복음이 설교 되든지 그것은 그 땅위에 그가 주되심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치하셔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의 설교를 통해 통치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왕실은 바로 복음이요." "복음의 교리가 아닌 것은 어떤 것도 그의 통치 수단이 될 수 없다." 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통치 수단인 성경에 주어진 내용을 단순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단순하게라는 부사를 통해 설교란 "청중들의 이해력에 부응하여" 각 신자가 그 설교에서 "자신의 몫과 분깃을"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고,

둘째는 간결하게 "평이한 간결성과 결코 애매모호함이 없도록 하여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야 한다" 고 했던 것이다.

셋째로 용기 있게, 하나님께 반항하는 악한 인간성에 대해 공격해야 한다.

말씀의 사역자는 "우물우물" 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주님께서 그의 교회가 알기를 원하는 모든 것을 가차 없이 혹은 꾸밈없이" 제시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자의 자세는 말씀의 선포를 통해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확실히 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당시에 설교는 번창할 수 있었다.

(4) 효력 있는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설교

 

칼빈은 교회나 세상에 있어서 설교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말씀이 연약한 인간에 의해 나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그의 명령과 약속 이행으로써의 전능한 힘을 지녔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려고 준비하실 뿐만 아니라,말씀을 통해 누구에게나 공평한 대가를 지불하시기 때문이다. , 그가 명하신 말씀은 바로 행하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증거자의 입을 통하여 용서를 베푸실 때에,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듣는 자는 진실로 그들의 죄를 용서 받을 것이다. 이는 선포된 말씀이 효력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효력있는 말씀의 능력이 바로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설교인 것이다.

 

"복음은 단지 들려주기 위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위한 씨앗으로써 우리를 거듭나게 하려 함이며,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증거가 되게 하기 위하여 전파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안식을 얻고 구원을 확신함으로써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고 하여 설교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설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경, 특히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주신 은총의 선물로서의 성경관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할 수 있다.

 

(5) 양면적인 효력을 발생시키는 권능으로서의 설교

 

따라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셈인데 여기에는 두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메시지를 반항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은 가혹한 형벌을 가중시킬 뿐이다. 반면 하나님의 은밀하신 능력에 이끌림을 받은 피선택자들은 성령이 말씀 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말씀이 신자들을 구원하는데 효과적인 것이라면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 고 그의 이사야55:11의 주석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게 갈 수 없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하나님과 약속을 굳게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선포에 덧붙여 그들로 하여금 그에게 올 수 있는 비밀의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주 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은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변명할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심판의 부정적인 면은 "복음의 본성이 아닌 우발적인 것들" 이라고 덧붙인다. "복음의 본성을 떠난 인간의 과오로 부터 발생되는 것" 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들고 강해하며 설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앞의 청중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설교되는 말씀을 통해 권능을 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칼빈을 '말씀의 종'으로 이끈 위대한 확신이요 강단 설교자로서의 설교 자세 였던 것이다.

 

(6) 성령의 능력의 현현으로서의 설교

 

칼빈이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성경을 중요시한 이유는 성경의 저자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이다.

칼빈은 딤후 19, 10절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오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거나 역사함이 없이는 또는 믿음으로 오지 않는다면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청중의 가슴 속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조명과 믿음의 수반 없이는 말씀의 성실한 설교일지라도 청중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칼빈의 설교관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대한 교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의 어느 부분이라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알게 하시는 이는 성령이시기 때문이라"는 성령의 내적사역을 강조하는 때문이다.

칼빈은 그래서 "단언하건데, 인간의 입에서는, 즉 단순한 소리 중에서는 어떠한 능력도 나올 수 없으며 이는 오로지 성령이 임하실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는 에베소서 314절의 주석 가운데서 설교의 신비를 고찰하는 가운데 그는 목사와 신도들을 하나의 동일한 태도(기도함) 가운데로 연합하는 초대를 하였다.

곧 설교를 효과 있도록 복을 부여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대의 표명은 칼빈의 주된 신학 사상을 적용케 하는데, 그것은 죄된 인간성 앞에 하나님만이 모든 은혜의 유일한 조성자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해 모든 목회자의 사역을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어 놓았던 것이다.

설교는 성경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설교는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지 못할 때 그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다. 설교에서 나타나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 자신이 가진 신학의 입장과 성경관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성경관에 따라 설교의 방법과 방향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과 만나신다. 그때는 인간의 말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의 백성을 깨우치며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며 이때의 설교자는 오직 말씀 증거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의 나타남과 능력만이 그의 설교를 통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령의 능력만이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자라게 하신다.

이러한 확신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권위와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에 대한 철저한 성경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관은 곧바로 그의 설교사역과 주석사역에 전적인 헌신을 가져다주었고 그는 자신을 '말씀의 종', '말씀의 사역자'로 인식케 했던 것이다

 

출처;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