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사업의 선구자로헌신한 일본인 소다(曾田) 부부


1905년 내한하여 한국 최초로 고아원을 설립한 일본인 소다(曾田)의 묘지가 양화진 제1묘역(자-8)에 있다 yanghwajin_042_01.jpg

40년간을 수천 명의 고아들의 아버지로 살아온 그는 서울 YMCA에서 교사와 원산교회 전도사로, 그리고 가마쿠라(鐮倉)보육원장으로 헌신하였다. 이 같은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문화 훈장을 1962년 4월 28일 추서하였다.


◇ 고아의 인자한 아버지 소다(1867-1962)

소다 가이치(Soda Gaichi, 曾田 嘉伊智)는 1867년 10월 20일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소네무라(曾根村)에서 출생했다. 오카야마(岡山)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893년 노르웨이 선박 선원으로 홍콩에 체재하다가 대만으로 건너가 독일인 경영의 공장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했다. 그 후 방랑 생활을 계속하다가 1899년에는 술에 취해 길에 쓸어져 빈사(瀕死) 상태에 있을 때 한국인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 한국에 은혜를 갚고자 1905년 6월 내한하였다.

서울 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있으면서, 이상재 선생의 감화로 1906년 기독교인이 되어 ‘백만명 구령운동’에 가담하였고, 경성(일본인)감리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3·1 운동과 105인 사건 때에는 한국인 청년지도자들의 석방에 앞장섰다.

특히 가마쿠라 보육원장으로 수천의 한국 고아들을 양육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거리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데려다 이집 저집 안고 다니며 젓 동냥을 하기도 했고, 밤새워 우는 아이들을 안고 꼬박 날을 밝히는 일이 많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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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가을 부인 우에노에게 고아원을 맡기고 원산(일본인)감리교회 전도사로 봉직하다가, 8‧15 광복 후 1947년 10월 13일 서울로 돌아와 부인을 잠깐 만난 뒤 부산으로 걸어가 1947년 11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자료:전택부,이 땅에 묻히리라,1986)

귀국 후에도 늘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의 사정을 안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1961년 5월 15일 다시 내한하였다. 서울의 옛집인 영락보린원에서 고아들과 함께 지내다가 1962년 3월 28일 96세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1962년 4월 2일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국민회당(의사당)에서 집례되었다. 2천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대광고교 밴드의 조악(弔樂)으로 시작하여 한경직목사의 사회로 기도와 성경 봉독, 그리고 재건운동본부장(柳達永), 보사부장관(鄭熙燮), 서울시장(尹泰日)의 조사가 있었다.

유족으로 조카딸 마스다(增田須美子)가 참석하였으며, 박정희 의장과 일본외상(小坂)은 조화를 보냈다. 유달영은 조사에서 “소다 옹의 생애는 어느 사회사업가보다 우리들에게 감격과 충격을 준다. 소다의 생애처럼 깨끗한 인류애와 사랑만이 한국과 일본이 단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료: 한국일보, 1962. 4. 2 기사)

묘비에는 “孤兒의 慈父 曾田嘉伊知”,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913년 가마쿠라 보육원을 창설하여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 수천 이러라. 1919년 독립운동 시에는 구금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하고 그 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다.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국민적 참회를 순회 연설하다. 95세인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와 영락보린원에서 1962년 3월 28일 장서하니 향년 96세라. 동년 4월 2일 한국 <사회단체연합>으로 비를 세우노라.”라 쓰여 있다.


◇ 여학교 교사와 고아원 보모로 헌신한 우에노(上野, 1878-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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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노 다끼(上野, Takiko)는 1878년 일본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나가사키 기독교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내한하여 소학교(日新) 교사로 봉직했다. 1908년 30세 때 41세의 소다 가이치와 결혼했다.

숙명여학교와 이화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1926년 퇴직하여 가마쿠라 보육원에서 남편을 도와 보모가 되었다. 1943년 소다가 원산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할 때에는 서울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아니하고 고아들을 돌보다가 1950년 1월 14일 74세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자-8)에 안장되었다.

소다(曾田)는 부인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는 나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라고 전택부는 기록했다.

묘비에는 “언 손 품어 주고, 쓰린 가슴 만져 주어, 일생을 길다 않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 이어늘”이라는 주요한 시가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