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이후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사라졌을가? 

 

성현경 목사 글 출처: 빛과소금


이스라엘에는 크리스마스가 없다. 주변 모슬렘 국가와 팔레스타인에서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볼 수 있고 텔레비전에서 캐롤을 들을 수 있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에선 전혀 크리스마스를 느낄 수 없다. 끝없이 지속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부족한 앰블란스를 국제 적십자사에서 지원하기로 했으나, 정작 필요한 이스라엘이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앰블란스에 그려있는 십자가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유대인 산수책에만 더하기 부호를 십자가(+)로 쓰지 않고 (ㅗ)자로 표시한다. 유대인 어린이가 십자가를 그리지 않도록... 이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유대인들에게 복음은 이렇게 닫혀있다.

이스라엘 잡지에는 랍비들의 광고가 자주 실린다. 예수 믿지 말고 선교사 조심하라는 광고인데 그 중에 이런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지난 1900년 동안 예수에게 빼앗긴 유대인 동족보다 최근 19년 동안 빼앗긴 숫자가 많다”는 경고문이었다. 그렇다.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최근 유대인들이 예슈아(Yeshua)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주님께 돌아오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을 알게 된 이들의 질문은 사도행전의 주역이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성경에는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도록 되어져 있었다. 예수님이 예정되었듯이.


예수님이 돌아가시던 해에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말대로 ‘ 그 민족(유대인)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 자녀(이방 교회)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요한 11;51,52)’ 영적 장자인 예수께서 죽으신 것처럼, 육적 장자인 이스라엘도 역사에서 버려졌고 사라졌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구원이 이방에 이르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넘어졌고, 세상의 화목을 위하여 이스라엘은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버려졌다.(로마 11;11-15)

그런데 이런 성경 말씀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을까? 이방인인 우리를 위해. 첫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진 후, 이스라엘로부터 이방을 향해 교회가 세워지는 30여 년의 유대 그리스도인 중심의 교회사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AD 6년 분봉왕 아켈라오(마태2:22)가 죽고, 유대 땅에는 유대인 분봉왕 제도 대신에 로마제국의 직접 통치하의 로마인 총독 제도가 들어섰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 14명의 유대 총독이 있었는데, 5번째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 때에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하면서 사도행전의 기록이 시작되었다. 그 후 30년간의 유대 그리스도인 역사를 기록하고 사도행전은 마쳐진다.

특히 23-26장에는 유대 땅의 11번째 유대 총독으로 AD 52~60년 동안 있었던 벨릭스(Antonius Felix, 행23:24)와 12번 째 유대 총독으로 AD 60~62년까지 있었던 베스도(Porcius Festus, 행24:27)에게 한 바울의 설교가 자세히 언급되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연대기는 베스도 총독의 재임 기간인 AD 60 년을 적어도 더 지난다. 그리고 사도행전 끝(행28:30)에 로마의 셋방에서 2년간의 바울의 사역이 더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우연히 이스라엘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할 AD 66년 직전에 기록이 마쳐진다. AD 70 년까지 이어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를 잃고 역사 속에서 떠돌게 될 이 항쟁은 마치 사도 바울의 사명이 다할 때까지 보류된 것처럼.

1차 독립운동

사도행전의 스토리가 끝나는 그 무렵인, AD 66년은 로마의 14번째 유대 총독 플로루스(Florus)가 재임 3년째를 맞는 해였다. 빌립 집사가 사역했고 (행8:40), 이탈리아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 주님을 만났고(행 10:1-48), 사도 바울이 베스도와 벨릭스 총독에게 복음을 전하고 로마로 압송?던 지중해의 항구도시 가이사랴는 유대 총독이 늘 상주하고 있었고, 유대 땅에서 로마로 가는 배가 정박하는 곳이었다.

마지막 총독이었던 플로루스의 폭정으로 인하여 그 가이사랴 항구(행25)에서 봉기가 L.A. 흑인폭동처럼 우연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고, 열심당원들로 인해 그 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서는 전직 대제사장의 아들 엘르아살을 중심으로 로마황제를 위하여 정치적으로 매일 드려지던 희생제사를 중단하였다. 한편 현직 대제사장은 유대인 정치권력을 장악한 수구파 평화주의자들인 바리새파 인사들과 함께 플로루스 총독에게 열심당원을 진압하라고 원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열심당원들은 오히려 사해바다 앞에 있는 헤롯 왕의 요새 마사다를 습격하여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예루살렘 성에서 로마 군대를 완전히 내어쫓고 말았다. 예루살렘 점령으로 인해 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고 로마제국을 대항하는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제 어느편에도 서지 않던 유대인들도 운명을 함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로마제국을 향한 봉기는 AD 54~68 년간 로마의 6번째 황제였던 네로(Nero)가 죽기 불과 2 년 전에 제국의 서쪽 최전방에 접해있는 조그만 속국 유대 땅에서 일어났다. 한편 로마에서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복음이 로마인들에게 전파되며 그로 인해 네로(Nero) 황제의 핍박이 심화되어 순교자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로마의 변방 유대 땅 가이사랴 항구에서 베스도 총독(AD60-62)에 의해 로마로 압송되어 왔던 사도 바울을 죽이게 될 네로 황제는 그 가이사랴에서 시작되어 일어난 유대의 독립운동을 듣게 된 것이었다.

네로 황제는 후에 황제로 오르게 될 베스파시안(Vespasian) 장군에게 이스라엘 반군 진압을 명하였다. 베스파시안 장군은 자기 아들 티투스(Titus)와 함께 AD 67 년 봄에 갈릴리를 재점령하였는데, 유대 독립군 갈릴리 사령관인 요세푸스(Josepus)가 베스파시안 장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는 후에 베스파시안 장군이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로 가서 로마 시민권과 이스라엘 땅에 토지를 하사받기도 했고 AD 70 년 즈음에 유대 전쟁사와 90 년대에 유대 역사를 기록하였다. 온건파였던 요세푸스의 투항으로 인해 그를 갈릴리 사령관으로 임명했던 예루살렘 지도층은 강경파 열심당원들과 유혈충돌에까지 이르게 된다.

베스파시안 장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며 군대를 집결시키는 즈음인, AD 68 년 6월 네로 황제가 자살을 하였다. 후임 황제 갈바(Galba)는 69년 1월에 살해되고 오토(Otho)황제가 다시 세워지면서 동시에 게르만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가 또 황제로 선포하며 로마의 권력투쟁이 치열해지자, 같은 해 7월에 베스파시안 장군도 최전방 유대 땅에서 황제로 선포하였다. 그로부터 석 달 후인 12월 20일에 비텔리우스는 로마에서 암살당한다. 그래서 AD 70 년이 시작되면서 베스파시안 장군은 황제가 되어 로마로 돌아가고 예루살렘을 에워싼 로마 군대는 그의 아들 티투스(Titus)에게 맡겨졌다. 70년 봄에 시작된 로마 3개 군단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은 그 해 여름에 함락되었다. 64 년 헤롯 왕에 의해 완성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불과 7년 만에 초토화 되었다.

그런데 네로 황제가 자살을 한 후에 베스파시안이 황제로 등극할 때까지 로마 제국은 권력투쟁으로 인해 군부의 힘이 광주항쟁 때처럼 안으로 향하면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던 로마 군대의 예루살렘성 공격은 지체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예루살렘 성내의 유대인 지도층도 온건파와 열심당원간의 유혈충돌로 이어지는 권력투쟁이 벌어지면서, 유대 땅의 독립전쟁은 우연히 공백 상태가 생기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북쪽 요단강 건너편 10 개의 로마식 신흥도시 데가볼리(Decapolis)중의 하나인 펠라(Pella) 라는 작은 마을로 피신하였다. 네로 황제의 핍박 하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로 신앙을 지켰으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째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다. 첫 번째는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후에 핍박으로 인해 사도 외에 많은 유대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나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행 8 ;1)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기 전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찌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누가21:20-21)


예루살렘의 함락은 처참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았다. (마태 24:2)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성소의 금촛대와 지성소의 보물들이 로마로 옮겨졌고 그때의 예루살렘 승전을 기념하는 개선문이 현재의 프랑스 파리에 세워졌다. 끌려간 유대인들은 로마시내를 행진한 후에 검투사로 넘겨져 로마인들의 유희거리로 죽어갔으며 처형되었다.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내던 반 세겔의 성전세는 베시파시안 황제의 의해 유대인 인두세로 로마의 쥬피터 신에게 보내지도록 했다. 유대인들은 경제적 부담을 넘어 이방신에게 우상숭배를 해야하는 치욕을 겪기 시작했고 나라를 잃었다.


로마의 공격에서 도망해 살아남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 배신자로 여겨졌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유대교의 한 분파로 받아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따라야했기 때문에 자기 민족으로부터 버림받게 된 것이다.

2차 독립운동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의하면 그때부터 2차 독립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예루살렘에는 15명의 유대 그리스도인 지도자가 있었다. 2차 독립운동은 AD 132 년 하드리안(Hadrian) 황제 때에 일어났다. 3년 동안 지속?던 독립은 135년 하드리안 황제가 보낸 당대의 명장 세베루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시몬 바르 코크바(별이라는 뜻)라는 인물이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였었는데, 그를 지지하고 그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당대의 영향력있는 랍비 아키바(Akiba)였다. 이것은 민수기에서 따온 메시야의 이름이다.(민 24:17) 그 3 년 동안에 기념 주화가 주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독립의 꿈은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50만 명 이상이 학살 당하였고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는 쥬피터 신전이 세워졌고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 성의 이름을 자신의 뒷 이름과 로마에 쥬피터 신전이 있는 언덕 이름과 합쳐서 아엘리나 카피탈리나 (Aelina Capitalina)라고 바꾸었다. 이스라엘 땅 이름도 고대에 유대 땅의 적이었던 블레셋의 헬라어 음역인 팔레스타인(Palestine)이라고 고쳐졌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출입은 금지되었다. 오늘날까지 이 두 이름의 싸움이 이스라엘 땅에서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첫 번째 독립운동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동족으로부터 민족적으로 버림받게 되었고, 두 번째 독립운동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종교적으로 끊어지게 했다.   왜냐하면 랍비 아키바가 독립운동울 주도했던 바르 코크바를 메시야라고 선포했기 때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 독립운동에 합류할 수가 없었다.  성전이 파괴된 1세기 후부터 이스라엘의 해안도시 야브네(Yavne)에서 랍비들은 날마다 드리는 18개의 기도문에 한가지 기도문을 첨가하였다. 그것은 유대 그리스도인을 배신자로 저주하는 기도문이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에 걸친 독립운동으로 인해 이렇게 자기 동족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역사 속에서 버림을 당하였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주역이었던 남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땅에서 헬라 그리스도인들을 섬기며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할 때까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AD 313 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말에 콘스탄틴은 한 가지 법령을 더 제정했는데 유대인에게 세례를 주는 사제는 사형이라는 법령이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은 짐승과 같이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대 명절을 지킬 수도 없었고, 할례도 금하였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건물과 책들은 사라져야 했다. 그때부터 교회는 유대의 뿌리를 스스로 잘라버리고(로마11:17) 철저히 헬라화되기 시작했고 이방 종교와 혼합되면서 더 이상 유대적 요소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이스라엘에 유대 디아스포라 기념관이 있다. 시대 별로 성전이 파괴된 후부터 나라를 잃고 떠돌았던 방랑사를 보여주는 역사관인데 거기에 유일한 이방인 조각상이 있다. 그것은 4세기 소아시아의 안디옥 교회의 명설교가였던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이라는 초대교회 교부의 형상이다. 그 밑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기독교의 초기에 그것은 유대적 기독교였다. 그때 로마 제국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유대인 사회에서 분리시키지 않았다. 시리아의 안디옥에선 유대인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함께 예배를 준비했다. 그런데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AD 344-407)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으로부터 분리되라고 꾸짖었다." 유대 디아스포라의 한 부류인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요한 크리소스톰으로 인해 이방 교회에 빼앗겼다는 아픔이 담긴 글이다.

3 세기까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소아시아 안디옥에서 토요일은 복음서의 예수님과 사도행전의 바울처럼 유대인의 한 분파로서 회당에 갔다. 그리고 주일에는 헬라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로 모였다. 그런데 4세기에 이르러 숫적으로 우세해진 헬라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영적 형제인 이방 교회와 육적 형제인 유대인 회당 사이에서 한 가지만 택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민족을 버리고 교회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때부터 유대적 뿌리로부터 끊어졌고, 철저히 헬라적 토양의 교회에서만 존재하게 되면서 사도행전의 주역이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요즘의 선교학에서 말하는 용어로 그들의 신앙이 유대인으로서 자기 고유의 유대 문화에 토착화(Indigeousity)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다.


2001년 봄에 돌아가신 유대 그리스도인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예수를 믿었을 때 내 동족 유대인들은 가상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라고. 그리고 내가 세례를 받으러 루마니아 정교회에 갔을 때 사제는 내게 개를 풀어주었다. 유대인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속에서 이중 고난을 받으며 그렇게 사라졌었다.  예수를 따랐기 때문에 자기 민족에게서 버림을 받았고,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육적인 교회로부터 또한 제외 되었다.

이방인인 우리가 접붙임을 받기 위해.

또한 이방 교회는 유대인을 주님께 인도하기를 거부해 왔기에, 유대적 뿌리로부터 스스로 잘려져 헬라화되어 자라왔다.  뿌리를 잃고 시한부 꺾꽂이 꽃이 된 셈이다. 유대인이 주께 다시 돌아올 때까지. 교회 성극이나 그림을 보면, 예수님 묻힌 무덤을 지키는 로마 병정 모습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보초를 세워달라는 대제사장들의 요청에 빌라도는 이렇게 답하였다. “ 너희에게 파수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마태 27:65)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 무덤을 지킨 자들은 로마군병이 아니라 레위지파의 유대인 성전 파수꾼이었다 ! 이 모습은 최근에 개봉된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에 나오는 유대인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무심코 로마병정의 모습에 익숙한 것일까? 로마병정에 익숙한 만큼 사도행전의 주역이었으면서도 역사 속에 조용히 사라져 버린 유대 그리스도인의 아픔에는 소홀한 우리의 역사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Joyful의 뜰 (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