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展(にってん)は、官展の流れを汲む日本最大の総合美術展覧会である[1]。開催団体の定款では「日本美術展覧会」が正式名称であるが[1]、日展の呼称で広く知られる。

また、同展覧会を年1回で通年主催する開催団体の名称が、展覧会と同じ公益社団法人日展である[2]ため、ここでは団体の歴史的変遷と美術展覧会の開催歴を合わせて解説する。

概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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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年(明治40年)から継続して東京都で毎年11月に公募展を開催しており、来場者数は1か月間で16万人から18万人を数える[2]。また地方都市で巡回展も開催している。

かつては政府主催の官展であったが、1958年(昭和33年)に開催組織である日展が日本芸術院から独立分離し社団法人化したことに伴い完全民営の公募美術展覧会となった[1][2]

2006年まで上野の東京都美術館で開催されてきたが、老朽化のため同美術館の改修工事が行われたことと、より広い展示スペースを確保するため、2007年から六本木の国立新美術館で開催されている。展覧会期間中の11月12日(休館日や当該日が週末に当たる日はその前の平日)には無料開放されるほか、講演会も開催されている。

2017年(平成29年)の改組新第4回日展で1907年(明治40年)の第1回文展から数えて110年目を迎えた[1]

日展の正式名称は組織変更および公募展名称変更に合わせて幾度か変遷しており、かつては「文展」「新文展」「帝展」などの公称が使用されていた[2]

1879年(明治12年)に日本美術協会が創設され、以降、個展や各美術流派ごとの絵画や美術工芸品の展覧会が広く行われていた[3]

明治末期になると美術界ではこれら各美術流派を網羅した一大展覧会を開催したい、という機運が高まり、1907年(明治40年)6月に文部省が「美術審査委員会官制」を制定、その後「美術展覧会規程」を公布、年1回の全国美術展覧会開催を決定した[3]。これらに基づいて開催されたのが1907年(明治40年)開催の第1回文部省美術展覧会(文展)であり、政府の美術振興策の一環として施行された日本初の官展であり、明治時代の美術界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2]

1911年(明治44年)に文部省は文芸委員会官制および文芸委員会規則を定めて文芸委員会を設置、社会風潮の調整を目的に穏健優秀とされる文芸著作物の発達を目的として文部省美術展覧会に組み込んだが、森林太郎の『ファウスト』の翻訳と坪内逍遙に表彰したのみで企画としては失敗に終わり、1913年(大正2年)6月に文芸部門は廃止された[3]

最初期の開催公募展募集部門は「日本画」、「西洋画」、「彫刻」の3部門だった。

帝国美術院時代編集

明治時代に国内美術界に多大な影響を与えた文展だったが[2]、末期には審査員任命方式や授賞に際しての批判が内外にあり改革の声が高まったこと、および政府の美術行政として美術展覧会のみを開催することに対し不満の声が高かった[3]

それらの批評を反映し、文部省は1919年(大正8年)9月に「帝国美術院規程」を公布、院長1名、会員15名以内からなる帝国美術院が設立され、文展で審査員を担っていた美術審査委員会は廃止された[3]。同時に、帝国美術院が文部省に代わって美術展覧会を開催することとされ(帝展/帝国美術展覧会)、また審査員は半数が文部大臣推薦、残りの半数が帝国美術院推薦によるものと制定し公平性を保った[3]。1923年(大正12年)9月1日関東大震災が発生し、同年の展覧会は中止となった。

帝国美術院は末期の1930年(昭和5年)には会員数30人に増加、展覧会開催以外の事業も行った[3]。また帝展の時代、1926年(昭和元年)から「美術工芸」が加えられて4部門となっている[1][3]

1932年(昭和7年)、第13回帝展を迎え東京日日新聞は「官展は使命終えた」として社説で批判。審査が例年に比して厳選主義を採っている一方で無鑑査出品が極めて多いこと、第一部において審査主任者の系統に属する入選が多いことなどを指摘した[4]

歴史

帝国芸術院時代 編集

1935年(昭和10年)に再び帝国美術院改革が問題となったことを受けて文部大臣松田源治[5]の指示のもと[3]、会員定数を30名から50名に増員し在野美術団体の代表を組み込み美術家全員一致体制を目指した。これがいわゆる「松田改組」と呼ばれる改革である[3]

しかしこの改革は美術家の間に不満が起こり、翌1936年(昭和11年)にも再度の改組が行われたが紛糾が止まらず、政府は1937年(昭和12年)6月に芸術全般に関わる重要事項を審議、それらの発達に必要不可欠な事業を行うために文部大臣に意見陳述可能な芸術専門機関として帝国芸術院を設立した[3]

帝国芸術院の構成は院長1名、会員80名以内、部門構成は第一部に美術(絵画・彫塑工芸書道建築)、第二部に文芸、第三部に音楽・雅楽能楽とされた[3]

また芸術奨励事業の一環として帝国芸術院賞(現日本芸術院賞)を授与することとなり、第1回の帝国芸術院賞授賞は1941年(昭和16年)に行われた[3]

このとき、帝国芸術院の事業から美術展覧会開催は切り離され、開催所管は文部省へと移り、1938年(昭和13年)の第1回新文展(新文部省美術展覧会)より1944年(昭和19年)の戦時特別展まで続いた[3][6]

長年、帝展における審査は挙手により行われてきたため、審査員間で情弊を差しはさむという重大な欠陥があった。新文展に改組するの当たり、審査は投票で行われるよう改められている[7]

戦後編集

1945年(昭和20年)11月には開催が見送られた[6]。翌1946年(昭和21年)春に第一部日本画、第二部西洋画、第三部彫塑、第四部美術工芸の4部制を設定し第1回日本美術展覧会(日展)が開催され、また同年秋に第2回日展が開催された[1]。以降は再び通年開催に戻った[1][6]

1947年(昭和22年)になると帝国芸術院が日本芸術院に改称され、翌1948年(昭和23年)より日本美術展覧会の開催母体は再び日本芸術院管轄となり、また「」が加わり5部門となった[1]。1949年(昭和24年)になり日本芸術院令が制定されると共に日本芸術院会員有志によって日展運営会が組織され、同年開催の第5回日展より1957年(昭和32年)開催の第13回日展までは日本芸術院と日展運営会の共同開催の形を取った[1]

民営化編集

1958年(昭和33年)4月26日に前述の日展運営会が社団法人日展として日本芸術院から分離し、同年11月2日-12月8日開催の展覧会を「第1回日本美術展覧会」として回数をリセットし1968年(昭和43年)の第11回日展まで続けられた[1][6]

民営化した1958年より東京都美術館内に所在する日展美術刊行会より年5回のペースで美術雑誌である「日展美術」が刊行されている[8]

1969年(昭和44年)になり法人組織日展の役員改選を機に開催展覧会正式名称を「改組第1回日本美術展覧会(改組日展)」と改めたものの継続せず、翌1970年(昭和45年)には改組の文字を除いた第2回日展に名称を戻し、2013年(平成25年)の第45回日展まで続いた[1][6]

学生運動の影響編集

1969年多摩美術大学の学生だった堀浩哉により結成[9]された美術家共闘会議(美共闘)[10]は日展粉砕を目的としており[11]、これに影響を受け、1969年に社団法人日展として団体人事を刷新後行われた改組第1回日展においては11月1日から12月6日までの通年期間で美術展覧会が行われたが、美共闘および反戦美術家共闘委員会などの学生運動を警戒し、10月13日から始まった作品搬入時点から異例の警戒態勢を行い展示作品を保護した[11]

実際には、開会初日に彫塑の展示会場にて一部混乱を招いたものの全体としては無事に終了したことが報じられている[11]

不正審査問題編集

石材などに文字を彫る篆刻の2009年度の審査を巡り、有力会派に入選数を事前に割り振るという不正が行われたことが、朝日新聞調査報道で分かった[12]。関係者によると、流派有力者(日展役員職の人物)や上位の師匠に手土産を持参して、入選者の一席に加えてもらうのは日常茶飯事だという[13]

また、書道以外の洋画や工芸の部門でも事前指導が慣行として行われ、事前指導を受けた作品が多数入選してい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ている[14]。この影響により、2013年の日展は、直前になって日展側からの後援辞退の申し入れがあり、文化庁は後援を中止した。また、文部科学大臣賞の選出と副賞の賞金の支出についても取りやめになった。

2014年4月、幹部会員を減員(参事・参与・評議員を廃止)し、ピラミッド構造を改めるなどの改革を発表[15]

2014年9月、日展審査員の経験者を日本芸術院会員の新会員候補から除外するよう、文化庁が求めていることがわかった[16]

2014年12月、問題関与の指摘を受けた人物が、日展を退会[17]

これにより改組新として2014年に改めて第1回展覧会を開催したが、内閣総理大臣賞文部科学大臣賞の選出は取りやめとなった。2015年の改組新第2回展覧会で2つの賞が復活されるとともに、後援を取りやめていた文化庁の後援が復活した。

日展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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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텐(日展)은 관전(官展)의 맥을 잇는 일본 최대의 종합 미술 전시회이다[1]. 개최 단체의 정관에는 '일본미술전람회'가 정식 명칭이지만[1], 니텐이라는 호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전시회를 연 1회 연중 주최하는 주최 단체의 명칭이 전시회와 같은 공익사단법인 일전(日展)이기 때문에[2], 여기서는 단체의 역사적 변천과 미술 전시회 개최 역사를 함께 설명하고자 한다.

개요

1907년(메이지 40년)부터 매년 11월에 도쿄도에서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으며, 한 달 동안 16만 명에서 18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했다[2]. 또한 지방 도시에서도 순회전을 개최하고 있다.

과거에는 정부 주최의 관전이었으나, 1958년(쇼와 33년)에 개최 기관인 일본미술협회가 일본예술원에서 독립하여 사단법인화하면서 완전 민영의 공모 미술 전시회가 되었다[1][2].

2006년까지 우에노의 도쿄도립미술관에서 개최되었으나, 노후화로 인한 미술관 개보수 공사와 더 넓은 전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2007년부터는 롯폰기의 국립신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다. 전시 기간 중 11월 12일(휴관일 및 해당 날짜가 주말과 겹치는 날은 그 전 평일)에는 무료 개방되며, 강연회도 개최된다.

2017년(2017년) 개편된 제4회 닛전(日展)은 1907년(메이지 40년) 제1회 문전(文展)으로부터 110년째를 맞이했다[1].

닛전의 정식 명칭은 조직 변경 및 공모전 명칭 변경에 따라 몇 차례 변천해 왔으며, 과거에는 '문전(文展)', '신문전(新文展)', '제전(帝展)' 등의 공칭이 사용되었다[2].

개최 경위 및 첫 개최

개최 경위

1879년(메이지 12년)에 일본미술협회가 설립되었고, 이후 개인전이나 각 미술 유파별 회화 및 미술 공예품 전시회가 널리 개최되었다[3].

메이지 말기에 이르러 미술계에서는 이러한 각 미술 유파를 망라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1907년(메이지 40년) 6월 문부성이 '미술심사위원회관제'를 제정하고, 이후 '미술전람회 규정'을 공포하여 연 1회 전국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3]. 이를 바탕으로 개최된 것이 1907년(메이지 40년) 개최된 제1회 문부성 미술전람회(문전)로, 정부의 미술 진흥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일본 최초의 관전(官展)으로 메이지 시대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2].

1911년(메이지 44년) 문부성은 문예위원회 관제 및 문예위원회 규칙을 정하여 문예위원회를 설치, 사회 풍조 조정을 목적으로 온건하고 우수한 문예작품의 발전을 목적으로 문부성 미술전람회에 포함시켰으나, 모리린타로의 『파우스트』의 번역과 츠보우치 쇼요를 표창하는 데 그쳐 기획은 실패로 끝났다. 실패로 끝나고 1913년(다이쇼 2) 6월에 문예 부문은 폐지되었다[3].

초기 개최 공모전 모집 부문은 '일본화', '서양화', '조각'의 3개 부문이었다.

제국미술원 시대

메이지 시대에 국내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친 문전이었으나[2], 말기에는 심사위원 위촉 방식과 시상 방식에 대한 안팎의 비판이 제기되어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정부의 미술 행정으로 미술전만 개최하는 것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3].

이러한 비판을 반영하여 문부성은 1919년(1919년) 9월 '제국미술원 규정'을 공포하여 원장 1명, 회원 15명 이내로 구성된 제국미술원을 설립하고, 문예전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던 미술심사위원회는 폐지되었다[3]. 동시에 제국미술원이 문부성을 대신하여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기로 하고(제전/제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의 절반은 문부성 장관 추천, 나머지 절반은 제국미술원 추천으로 제정하여 공정성을 유지했다[3].1923년(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같은 해의 전람회는 중단되었다.

제국미술원은 말기인 1930년(쇼와 5년)에는 회원 수가 30명으로 늘어났으며, 전시회 개최 이외의 사업도 진행했다[3]. 또한 제전 시대인 1926년(쇼와 원년)부터 '미술공예'가 추가되어 4개 부문이 되었다[1][3].

1932년(쇼와 7년) 제13회 제전(帝展)을 맞이하여 도쿄 닛케이 신문은 사설에서 '관전은 사명을 다했다'고 비판했다. 심사가 예년에 비해 엄선주의를 채택한 반면 무심사 출품이 극히 많다는 점, 제1부에서 심사위원장 계통에 속하는 입선이 많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4].

역사

제국예술원 시대

1935년(쇼와 10) 다시 제국미술원 개혁이 문제가 되자 문부 대신 마쓰다 겐지(松田源治)[5]의 지시에 따라[3], 회원 정수를 30명에서 50명으로 증원하고 재야 미술단체의 대표를 포함시켜 미술가 전원일치 체제를 목표로 했다. 이것이 이른바 '마쓰다 개편'으로 불리는 개혁이다[3].

그러나 이 개혁은 미술가들 사이에 불만이 생겨 이듬해인 1936년(쇼와 11년)에도 다시 한 번 개편이 이루어졌지만 논란이 멈추지 않자 정부는 1937년(쇼와 12년) 6월에 예술 전반에 관한 중요 사항을 심의하고 그 발전에 필수적인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문부대신에게 의견을 진술할 수 있는 예술 전문기관 으로 제국예술원을 설립했다[3].

제국예술원의 구성은 원장 1명, 회원 80명 이내, 부서 구성은 제1부에 미술(회화-조소-공예-서예-건축), 제2부에 문예, 제3부에 음악-가악-노가쿠를 두었다[3].

또한 예술 장려 사업의 일환으로 제국예술원상(현 일본예술원상)을 수여하게 되었으며, 제1회 제국예술원상 시상은 1941년(쇼와 16년)에 이루어졌다[3].

이때 제국미술원의 사업에서 미술전람회 개최는 분리되어 개최 소관이 문부성으로 옮겨져 1938년 제1회 신문전(신문부성 미술전람회)부터 1944년 전시 특별전까지 계속되었다[3][6].

오랜 기간 동안 제전 심사는 거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심사위원들 사이에 정실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신문전으로 개편하면서 심사는 투표로 이루어지도록 개선되었다[7].

전후

1945년(쇼와 20년) 11월에는 개최가 보류되었다[6]. 이듬해 1946년(쇼와 21년) 봄에 제1부 일본화, 제2부 서양화, 제3부 조소, 제4부 미술공예의 4부제를 설정하여 제1회 일본미술전람회(일전)가 개최되었고, 또 같은 해 가을에 제2회 일전이 개최되었다[1]. 이후 다시 연중 개최로 돌아갔다[1][6].

1947년(쇼와 22년)이 되면 제국예술원이 일본예술원으로 개칭되고, 이듬해인 1948년(쇼와 23년)부터 일본미술전람회의 개최 주체는 다시 일본예술원 관할이 되어 '서예'가 추가되어 5개 부문이 되었다[1].1949년(쇼와 24년)이 되면 일본예술원령이 제정되고, 일본예술원 회원의 자발적인 참여로 일전운영회가 조직되어 같은 해 개최된 제5회 일전부터 1957년(쇼와 32년) 개최된 제13회 일전까지는 일본예술원과 일전운영회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형태를 취했다[1].

민영화

1958년(쇼와 33년) 4월 26일에 앞서 언급한 닛텐 운영회가 사단법인 닛텐으로 일본예술원에서 분리되어 같은 해 11월 2일~12월 8일에 개최된 전시회를 '제1회 일본미술전람회'로 개최 횟수를 재설정하여 1968년(쇼와 43년)의 제11회 닛텐까지 계속되었다[1][6].

민영화된 1958년부터 도쿄도립미술관 내에 위치한 닛텐미술간행회에서 연 5회 간격으로 미술잡지인 '닛텐미술'이 발간되고 있다[8].

1969년(쇼와 44년)에 법인 조직 닛텐의 임원 개선을 계기로 개최 전시회 정식 명칭을 '개편 제1회 일본미술전람회(개편 닛텐)'로 바꿨지만 계속하지 않고, 이듬해인 1970년(쇼와 45년)에 개편이라는 글자를 뺀 제2회 닛텐으로 명칭을 되돌리고 2013년(2013년) 제45회 닛텐까지 이어져 왔다. 1][6].

학생운동의 영향

1969년 다마미술대학 학생이었던 호리 히로야에 의해 결성[9]된 미술가공투회의(美共闘)[10]는 닛폰전 분쇄를 목적으로[11], 이에 영향을 받아 1969년 사단법인 닛폰전으로 단체 인사를 개편한 후 열린 개편 제1회 닛폰전에서는 11월 1일부터 12월 6일까지의 연중 기간 동안 미술 전시회가 열렸지만, 미공투 및 반전미술가공투위원회 등의 학생운동을 경계하여 10월 13일부터 시작된 작품 반입 시점부터 이례적으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전시 작품을 보호했다[11].

실제로 개막 첫날 조소 전시장에서 일부 혼란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무사히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졌다[11].

부정 심사 문제

석재 등에 글자를 새기는 전각의 2009년도 심사를 둘러싸고 유력한 유파에 입선 수를 미리 배정하는 부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사히신문의 조사 보도로 밝혀졌다[12]. 관계자에 따르면, 유파의 유력자(일전 임원직에 있는 인물)나 상위 스승에게 선물을 가져와 입선자의 자리를 늘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고 한다[13].

또한 서예 이외의 서양화나 공예 부문에서도 사전 지도가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전 지도를 받은 작품이 다수 입선한 것으로 밝혀졌다[14]. 이 영향으로 2013년 닛폰전은 직전에 닛폰전 측에서 후원 거절의사를 밝혔고, 문화청은 후원을 중단했다. 또한 문부과학대신상 선정과 부상 상금 지출도 취소되었다.

2014년 4월, 임원진을 축소(참사, 고문, 평의원 폐지)하고 피라미드 구조를 개편하는 등 개혁을 발표했다[15].

2014년 9월, 일본 문화청이 일본예술원 회원의 신규 회원 후보에서 니혼전 심사위원 경력자를 제외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다[16].

2014년 12월, 문제 연루 지적을 받은 인물이 닛폰전을 탈퇴[17]했다.

이에 따라 2014년 개편신으로 다시 제1회 전시회를 개최했지만, 내각총리대신상과 문부과학대신상 선정은 취소되었고, 2015년 개편신 제2회 전시회에서 두 상을 부활시킴과 동시에 후원을 중단했던 문화청의 후원이 부활했다.

일전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