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설교의 회복이 초래하는 유익
 

전도 설교의 회복이 초래하는 유익은 막대하다. 이 유익은 전도자 자신과 전도 공동체인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도래에 기여한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의 위임을 받았으며(마태6:9-13), 또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도록 위임을 받은 제자들이고, 이 명령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특별한 약속을 받았다.(마태28:18-20) 예수께서는 친히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후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24:14)고 증거하셨다.


1. 설교자의 정체성을 실현한다.

성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도록 구별된 존재들이다. 그중에서도 말씀을 위탁받은 전도자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말씀을 전파하라고 위임받은 자들이 아닌가.(딤후4:2) 바울은 그가 위탁받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부르짖었다.(고전9:16)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를 열면서 그는 이미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바로 이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것을 고백하지 않았는가.(롬1:1)그러므로 복음 설교자들에게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의 실현이요, 자기 소명을 이루는 것이다.

2. 전도 공동체가 형성되어진다.

교회는 에클레시아(ekklesia) 곧 세상으로'부터'(out of, from) ‘불러냄을 받은 공동체’(called ones)이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교회가 소극적인 성결 지킴이로 머물러 섬을 뜻하지 않는다. 교회는 다시 세상 한 복판‘으로’(into) 보내심을 받는 자들이다. 주 예수님은 유명한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문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되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나(요한17:16)그러나 그는 동시에 세상으로 보내어진 존재(요한17:18)라고 기도하셨다. 교회가 세상과의 접촉점을 상실하는 순간 교회는 세상에서 분리된 게토(ghetto)화를 면할수 없게 된다. 교회는 세속주의를 경계해야 하나, 동시에 도피주의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때 비로소 교회는 세상에 존재할 이유를 다하는 전도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3. 하나님 나라 확장의 비전에 동참한다.

존 스타드 목사는 그의 명저 ‘전도하지 않는 죄’(Our guilty silence)의 목차에서 복음 전도의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복음전도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복음이며, 복음전도의 대리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복음전도의 능력은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증거하였다. 여기에 만일 하나를 더 첨부한다면 복음전도의 비전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만하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메시지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이었고(마가1:15), 마태복음 13장에서 그가 무리들과 제자들과 가장 의미 심장하게 나눈 설교의 주제는 “천국은 마치--”라는 표현으로 나누어진 것이었다. 사도행전 28장에서 바울 사도가 로마에 도달하며 최후까지 전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였다.(행전28:31)

래미쉬 리챠드(Ramesh Richard)는 복음 설교를 포기한 설교자들을 ‘탕자 설교자들’(Prodigal preachers)이라고 부른다. 그는 우리 모두가 비록 전문적인 복음 전도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을 지라도 우리의 모든 강단 설교는 복음 전도적(preach evangelistically)이어야 하며, 그것은 심지어 우리가 양육 설교를 할 때에라도 그래야 한다고 도전한다. 우리의 강단에서 전도 설교가 회복되는 그날 우리는 초대 교회의 부흥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평양 대 부흥의 재현도 기대하게 될 만하다. 왜냐하면 복음 설교만이 영혼들을 각성시키고 에스겔 골짜기같이 오늘 우리 시대의 골짜기에 버려진 무수한 영혼들을 거대한 군대로 다시 일어서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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