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오늘날 근본주의라는 말은 말하는 이의 분별력이나 입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일찍부터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를 근본주의적이라고 비난해 왔다. 감리교 신학교 교장이었던 홍현설 박사는 '극단적인 근본주의'가 한국 교회 내의 지배적인 신학적 추세이었다고 말했다(간하배, 현대신학해설, 153쪽).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인 김재준 박사는 한국의 '엄격한 근본주의' 신학 교육을 지적하고 공격하면서 "객관적 비판의 여지가 없이 일정한 근본적인 신조들의 주입이요 . . . 교회 지도자들의 시야(視野)는 극히 타계적(他界的)이며, 강한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었다"고 말했고, 장로회 신학대학장이었던 이종성 박사는 근본주의를 "신바리새주의"라고 불렀다(위의 책).

자유주의자들의 이런 비평과 같이 한국의 보수주의가 불건전하고 바리새주의적인 '극단적' 근본주의인가? 근본주의는 무엇이고 극단적 근본주의는 무엇인가?

한편, 보수주의 진영에서도 빈번히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볼 수 있다. 한국교회가 존경한 고(故)박윤선 박사도, 근본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구원을 더욱 강조하며, 성경을 비교적 단편적으로 보고 체계적으로 깊이 보지 못하며,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의 교리를 깊이 보지 못하며, 권위주의적이고 반(反)지식주의적인 경향이 있다고 비평한 적이 있다("개혁주의 소고," 신학지남, 1979년 가을, 13-24쪽).

근본주의가 과연 이런 사상인가? 만일 그렇다면, 보수적 장로교회들은 근본주의를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근본주의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비평은 침례교회 신학이나 세대주의에 대한 비판에 불과하다. 근본주의의 핵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침례교인들도 있고 세대주의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는 많은 장로교인들도 있다. 근본주의는 결코 침례교회 신학이나 세대주의와 동일시 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는 그것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이다. 근본주의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그러면, 과연 근본주의는 무엇이며, 그것들은 성경적으로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역사적 고찰

근본주의의 시작

'근본주의'는 19세기말 미국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1875년 제임스 브룩스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성경공부모임은 예언 사경회로 발전했다. 이 모임은 1883년부터 1897년까지 1884년을 제외하고 매년 나이아가라에서 모였으므로 '나이아가라 예언사경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강사들 중에는 제임스 브룩스 외에 윌리암 어드만, 아도니람 고든, A. C. 딕슨, 허드슨 테일러, A. T. 피얼슨 등이 있었다.

이 예언사경회는 1878년 부룩스의 지도 아래 14개 조항의 신조를 선언하였는데, 그것은 후에 '나이아가라 신조'라고 불리웠다. 그 내용은 ① 성경 영감, ② 삼위일체, ③ 아담의 타락과 전적 부패, ④ 원죄와 사람의 전적 부패성, ⑤ 중생(重生)의 절대 필요성, ⑥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 ⑦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책(罪責)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⑧ 구원의 확신은 모든 신자의 특권, ⑨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중심 되심, ⑩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자들로 구성됨, ⑪ 성령은 우리들의 영속적 위로자이심, ⑫ 성령을 따라 삶, ⑬ 신자와 불신자의 죽은 후 상태와 최종적 부활, ⑭ 심판의 때가 가까움과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재림 등이었다(David O. Beale, In Pursuit of Purity: American Fundamentalism since 1850 <1986>, pp. 23-33, 375-379).

그 후, 1910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①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②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③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④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⑤ 그리스도의 기적들의 사실성의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본질적 내용'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1916년과 1923년 총회에서 두 번이나 재확인되었다(A Brief History of the Bible Presbyterian Church and Its Agencies, ed. Margaret G. Harden, p. 15).

이러한 선언은, 19세기 후반 신학교들과 교회들에 불신앙적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 다섯 가지 교리들을 부정하였다. 1890년, 촬스 브릭스가 독일 유학후 당시 북장로교 소속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들어와 공공연히 성경의 오류를 주장했을 때, 1892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그를 징계했었다. 그러나 유니온 신학교는 총회에서 독립하여 브릭스를 계속 채용하였다. 그러므로 장로교회 총회는 이런 자유주의 신학 사상에 대한 경고로 다섯 가지 근본 교리들을 천명한 것이었다.

또한, 1910년부터 1915년까지 근본 교리들: 진리에 대한 증언이라는 12권으로 된 책자들이 무료로 약 300만부 배포되었다. 이 일은 캘리포니아주의 부유한 석유 자본가 형제 리만 스튜어트와 밀톤 스튜어트의 약 20만불의 헌금으로 가능하였다. 이 책자들의 내용들은 주로 진화론과 성경의 고등 비평에 대항하여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변호하는 것들이었다(C.T. McIntire, "Fundamentalism,"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pp. 433).

1920년 7월 1일, 컬티스 리 로즈는 미국 뉴욕의 침례교회 주간신문인 워치먼 익재미너(Watchman -Examiner) 사설에서 '근본주의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위해 싸우는 자를 '근본주의자'라고 묘사한 것이었다(박형룡, "근본주의," 신학지남, 25권 1호 <1960>, 13쪽).

1920년대의 근본주의

미국 교회에서 1920년대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신학적 논쟁의 시대이었다. 제이 그레샴 메이천은 1923년에 출간한 그의 책에서 말하기를,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 현대는 논쟁의 시대이다. 항상 기독교로 알려져 왔던 저 위대한 속죄적 종교가 완전히 다른 형태의 종교적 신념과 싸우고 있는데, 그 종교적 신념은 전통적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일층 더 파괴적일 뿐이다. 이 현대적 비(非)속죄적 종교는 '현대주의' 혹은 '자유주의'라고 불리운다"고 했다(J. Gre- 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p. 2).

예를 들어, 1923년 미국 북장로교회 안에는 소위 '어번 선언서'라는 것이 작성되었고 곧 1293명의 목사들의 서명을 받았는데, 그것은 1910년, 1916년, 1923년 3차례나 총회가 선언하고 재확인한 5개의 근본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이론들(학설들)일 뿐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어번 선언서는 또한 성경 무오(無誤)의 교리가 성경 숭배에 빠지기 쉽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장로교회 총회 안에는 서로 상반된 두 개의 입장이 있었고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해 총회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거나 어번 선언서의 서명자들을 징계하지 않았다. 교회들은 영적으로 잠들어 갔고, 진리의 싸움보다 평화를 원하게 되었다.

1924년과 1925년 미국 북장로교회의 보수 신학의 마지막 보루였던 프린스턴 신학교 안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한 중부 대서양 신학교 협의회와 관계를 단절하고, 보수적인 복음주의 학생 연맹 결성에 참여하는 문제로 갈등과 논쟁이 일어났다. 메이천과 다수의 학생들과 운영이사회는 보수주의적 강경 입장을 취하여 학생회의 그러한 조치를 환영하였으나, 교장 로스 스티븐슨은 그것에 불만했고 스티븐슨의 동료 교수들과 특히 학생처장 촬스 어드만, 그리고 재단이사회는 스티븐슨의 온건하고 포용적인 입장을 지지하였다고 한다.

이 때, 포용주의적 총회 정치가들은 신학교의 운영이사회와 재단이사회를 통합시킴으로써 자유주의적 세력을 우세하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프린스턴 신학교는 포용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929년 메이천을 비롯하여 로버트 딕 윌슨, 오스왈드 앨리스, 코넬리어스 반틸은 프린스턴 신학교를 떠났고 다른 이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였다(Harden, pp. 14-23).

1930년대의 근본주의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싸움은 외적으로 근본주의의 패배로 끝났다. 미국 내의 역사적 대교단들은 자유주의를 제거하지 않고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0년대의 근본주의는 포용적이고 자유화되고 변절된 대교단들로부터 분리(分離)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즉, 1930년대의 근본주의는 '분리'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 분리는 자유주의의 포용, 자유주의자와의 교제를 양심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던 신앙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소수의 신실한 목사들은 대교단들의 입장과 방향에 찬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母)교단들을 떠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이들을 모교단으로부터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미국에 많은 독립 교회들과 작은 새 교단들이 생겨났다. 1930년에 조직된 미국 근본주의 독립교회 협의회(IFCA), 1932년의 정규 침례교회 총회(GARBC), 1936년의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 등이 그러하다.

미국 장로교회의 설립을 잠시 살펴보자. 1932년 미국 북장로교회에서는 "선교를 재고함"이라는 보고서가 출판되었는데, 그 내용은 매우 자유주의적이었다. 그 보고서는 19세기의 선교 방법의 전면적 수정을 주장했고, 선교사들이 피선교지의 문화나 종교를 비판하지 말고 존중하며 타협적으로 선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33년 메이천과 그의 동료들은 총회의 선교 정책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되기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장로교 해외 독립선교부'(IBPFM)를 설립했다.

그러나 1934년 총회는 독립선교부에 관련된 자들에게 그 선교부로부터 탈퇴할 것을 명령했고, 1934-35년 동안 총회의 명령에 복종치 않았던 7명의 목사들이 각 노회에서 면직을 당하였다. 그러나 1936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메이천과 그 동료들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들의 상소를 기각하였다. 그러므로 1936년은 보수적 전통을 가졌던 미국 북장로교회가 실로 '배교적(背敎的)' 교회가 된 해이었다.

그 해, 미국 장로교회라는 분리된 작은 교단이 설립되었다. 1937년, 전천년설의 옹호와 금주(禁酒), 금연(禁煙)의 미국 장로교회 전통을 지키기 원한 목사들이 미국 장로교회에서 나와 따로 성경 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 Church)와 페이스(Faith) 신학교를 세웠다. 1939년, 미국 장로교회는 정통 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Beale, pp. 317-19).

신복음주의의 출현

1940년대에 들어와 '신(新)복음주의'(New Evangelicalism)라는 한 경향 혹은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소수파로 드러난 근본주의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기보다 평화와 안정을 더 좋아하였다. 또 그들은 신실한 소수의 보수주의자들과 보수주의 교회들 간의 교제와 협력보다 더 폭넓은 교제와 협력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따르기보다 일치와 화합을 원하였다. 1948년 풀러 신학교의 강연에서 학장 해롤드 오켕가(Harold Ockenga)는 '신복음주의'(New Evangelicalism)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신복음주의적 기관들로서, 1942년에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가 조직되었고, 1947년에 풀러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1951년에는 20개국의 복음주의자 협회들이 모여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EF)를 형성하였다. 또한 1956년에는 신복음주의의 대변지와도 같은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tianity Today)지가 창간되었다.

배교와의 분리를 주장한 근본주의자들은 1941년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CCC)를 조직하였고, 그 단체를 중심으로 1948년 국제 기독교회 협의회(ICCC)가 형성되었다. 국제 기독교회 협의회는 그 헌법 서문에서 현대를 이교적 현대주의의 물결이 범람하는 배교(背敎)의 어두운 시대라고 언급하고 "그의 백성에게 모든 불신앙과 부패로부터 분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들은 분명하고 적극적이다"라고 진술한 후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교리적 선언을 채택하였다: (1) 성경의 완전한 영감, 무오성(無誤性), 최종적 권위, (2) 하나님의 삼위일체, (3)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영원하신 신성과, 그의 참되신 그러나 죄 없으신 인성, (4) 그의 처녀 탄생, (5) 그의 대리적, 속상적(expiatory) 죽음, (6) 그의 육체적 부활, (7) 동일하신 그 분의 영광스런 재림, (8) 사람의 타락과 전적 부패, (9)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얻는 구원, (10)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복과, 잃어버린 자들의 영원한 형벌, (11) 그의 보혈로 구속받은 모든 자들의 영적 일체성, (12)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리와 생활에 있어서 교회의 순결성 보존의 필요성("Constitutio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in Program and General Information: The Ninth World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Nairobi, Kenya, 16-27 July 1975, p. 39).

1950년대 이후의 근본주의

신자들이 자유주의 교회들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비교적 쉽게 이해되었으나, 거기에 뒤따르는 보다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신복음주의자들과의 교제 문제이었다. 자유주의 교회에 머물거나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고 그들과 교제하는 신복음주의자들과 계속 교제해야 할 것인가? 그들의 잘못된 교제를 계속 용납해야 할 것인가? 그들을 책망하고 징계하며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들은 신복음주의자들과의 분리를 '2차적 분리'라고 불러 그 중요성이나 당위성을 낮추어 평가하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 예를 들어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 밥 죤스(Bob Jones) 2세, 이안 페이슬리(Ian R. K. Paisley) 등은 신복음주의자들과의 분리를 필요하고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국제 기독교회 협의회(ICCC)와는 별도로, 1976년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가 밥죤스 대학교의 명예 총장이었던 밥 죤스 2세와 북아일랜드의 보수적 교회 지도자 이안 페이슬리 등을 중심으로 모였다. 또한, 1987년 '성경을 믿는 교회 국제 협의회'가 근본주의적 지도자들에 의해 조직되었고, 1990년 그 단체는 '세계 성경적 교회 협의회'(WCBC)로 명칭을 바꾸었다.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는 다음과 같은 신조를 선언하였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重生)한 신자로서 다음과 같은 자라고 믿는다: 첫째, 무오(無誤)하며 글자까지 영감된 성경에 대해 요동치 않는 충성심을 가지는 자. 둘째,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그러하다고 믿는 자. 셋째, 성경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판단을 받는 자. 넷째, 다음과 같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들을 확언(確言)하는 자: ① 삼위일체의 교리, ②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육체적 부활과 영광스런 승천, 및 재림(再臨), ③ 성령의 중생(重生)케 하심을 통한 새로운 출생, ④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 ⑤ 불경건한 자들의 부활과 최종적 심판과 영원한 죽음, ⑥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의 교제. 다섯째, 이러한 신앙에 대한 충성을 실천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려고 애쓰는 자. 여섯째, 이러한 신앙에 대한 모든 단체적(교회적) 부인과, 오류와의 타협과, 진리로부터의 배교(背敎)를 폭로하며 그것들로부터 분리하는 자. 일곱째,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는 자."

한편 1980년대 이후에, 근본주의자로 자처하는 제리 팔웰이 신복음주의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함으로써 근본주의 진영에 다시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Jerry Falwell, Ed Dobson, and Ed Hinson, eds., The Fundamentalist Phenomenon: The Resurgence of Conservative Christianity <1981>). 그러나 그의 입장은 '가짜 근본주의'(pseudo- fundamentalism)로 불리운다. 그는 칼 매킨타이어의 옷을 입고 해롤드 오켕가의 목소리를 내는 자라고 묘사된다.

개념의 정의

근본주의의 개념 정의

자유주의자 커솝 레이크는 말하기를, "근본주의를 하나의 새롭고 이상한 사상 형태라고 상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모든 기독교인이 보편적으로 주장했던 신학의 잔존물이다"라고 하였다(Kirsopp Lake, The Religion of Yesterday and Tomorrow <1925>, pp. 61, 62). 근본주의에 대한 그의 개념은 정당하다.

예일 대학교의 교회사학자 케넷 라투렛은 말하기를, "1914년 얼마 전에 [자유주의, 사회 복음, 성경의 고등 비평, 진화론 등에] 반대하는 자들은 그들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 교리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수하는 것 때문에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불렀고 다른 이들로부터도 그렇게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했다(Kenneth 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ity, vol. 2, p. 1264).

해롤드 쿤은 근본주의를 정의하기를, "기독교 체계의 기초적 원리들을 보존하고 현대주의라 불리우는 운동에 있는 위험한 신학적 경향들로 간주된 것들을 저항하기 위해 의도된 최근 수십년 동안 일어난 신학적 운동"이라고 했다(Harold B. Kuhn, "Fundamentalism," Baker's Dictionary of Theo- logy, p. 233).

죠지 말스든은 말하기를, "미국에서의 근본주의는 전투적으로 반(反)현대주의적인 복음주의적 개신교 운동으로 가장 잘 정의된다"고 서술했다(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Eerdmans' Handbook to Christianity in America, p. 384).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적 지도자이었던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근본주의는 별다른 것 아니라, 정통주의요 정통파 기독교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적 정통적 신앙을 그대로 믿고 지키는 것 즉 정통 신앙과 동일한 것이니만치, 이것은 곧 기독교 자체라고 단언하는 것이 가장 정당한 정의일 것이다. 근본주의는 기독교 자체다"고 했다(박형룡, "근본주의," 신학지남, 25권 1호 <1960>, 16쪽).

근본주의에 대한 이러한 정의들은, 비록 부족하긴 하지만, 상당히 역사적 정당성을 가진다. 근본주의는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고 옛날부터 있었던 무엇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대로 믿고 따르고자 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입장인 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박형룡 박사의 말대로 '정통 기독교요 기독교 자체'인 것이다. 성경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를 굳게 보수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위의 역사적 고찰에서 증거된 대로, 근본주의에 대한 정의는 이런 근본 교리들에 대한 보수성(保守性)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전투성에 덧붙여 배교적 교단들과 타협적 신복음주의자들로부터의 분리(分離)의 입장이 첨가되어야 한다. 1930년대 이후의 미국 교계의 상황이 대교단들의 배교(背敎)로 진행되었고 1940년대에는 신복음주의가 출현했기 때문에, 성경적 보수주의는 배교된 교단들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타협적 신복음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정의는 (1) 근본 교리들의 보수와, (2)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라는 두 요소를 포함한다. 즉,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保守)하고, 자유주의의 배교와 신복음주의의 타협으로부터 분리(分離)하는 입장'이라고 정의된다.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는 1976년 다음과 같은 진술을 채택하였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重生)한 신자로서 다음과 같은 자라고 믿는다: (1) 무오(無誤)하며 글자까지 영감된 성경에 대해 요동치 않는 충성심을 가지는 자, (2)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그러하다고 믿는 자, (3) 성경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판단을 받는 자, (4) 삼위일체의 교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육체적 부활과 영광스런 승천, 및 재림(再臨), 성령의 중생(重生)케 하심을 통한 새로운 출생,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 불경건한 자들의 부활과 최종적 심판과 영원한 죽음,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의 교제 등의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들을 확언(確言)하는 자, (5) 이러한 신앙에 대한 충성을 실천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려고 애쓰는 자, (6) 이러한 신앙에 대한 모든 단체적(ecclesiastical) 부인과, 오류와의 타협과, 진리로부터의 배교(背敎)를 폭로하며 그것들로부터 분리하는 자, (7) 그리고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는 자." 이 진술은 1980년, 1983년, 1986년, 1990년에 계속 확인되었다.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CCC)는 근본주의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참된 근본주의 그리스도인은--비록 그것이 오늘날 반대로 표현되지만--하나님의 영감되고 무오한 말씀에 대한 견고한 충성을 주장하며 모든 것들을 성경의 잣대로 판단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중생한 신자이다. 근본주의자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들을 확신한다. . . . 참된 근본주의자의 다른 하나의 중요한 확인할 수 있는 표시는--그것은 실상 근본주의자와 신복음주의자를 실제로 구별짓는 표시인데--그가 교회의 배교(背敎)와 및 성경적 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타협하는 개인들과 단체들을 폭로하고 그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 . . 근본주의의 적(敵)들은 자유주의, 에큐메니칼 운동, 천주교회, 은사운동, 인본주의, 및 신복음주의이다. 성경에 대한 순종은 근본주의자들의 표어이며, 구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참된 증거이다"("ACCC Resolution in 1993," in Calvary Contender, 1993년 12월 1일). 북미 독립침례교 협의회(Independent Baptist Fellowship of North America)도 동일한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Calvary Contender, 1993년 7월 15일).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CCC)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여러 표준들에 적응시킴으로써 그리스도를 배신하였다.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을 '바리새인들,' '사랑 없는 자들', '분열을 조장하는 자들' 등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가르치기를,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성공하기 위해 배교적 교회와 협력하여 일해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無誤), 진화론, 심지어 교회의 사명을 재검토하는데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만이 오늘과 내일의 일들을 위해 충족하다고 가르치는 신실한 근본주의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1998년 10월 27-29일 미국 미주리주 모넷에서 모인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 57차 대회 결의문 중에서; Calvary Contender, 1998년 11월 15일).

비록 정통 교리는 교파적 확신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들의 교리적 신념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물론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라는 근본 교리의 범위의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며 그것이 교파들이 생기게 된 한 주요한 원인이었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들의 공통적 신념이 근본 교리 안에 든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통적 근본 교리들의 공동적 고백은 현존하는 참된 교회들의 일치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죤 칼빈이나 죤 오웬은 기독교의 근본적 혹은 본질적 교리들을 그리스도인의 일치의 기초로 간주했었다(John Calvin, Institutes, IV. i. 12;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XV, 106).

근본주의는 적어도 기독교의 이런 공통적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출발되었기 때문에 그 성격상 초교파적이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를 좀더 정확히 정의한다면, 근본주의는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배교와 타협으로부터 분리하는 초교파적 입장 혹은 운동이다.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차이는, 요약하면,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를 용납할 수 없는 이단으로 간주하고 그것으로부터 분리해야 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그것을 용납하고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을 용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 문제의 초점이다.

성경적 평가: "분리의 원리"

성경은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를 강조하지만 또한 어떤 이들과의 교제의 단절에 대해서도 밝히 가르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권징의 성실한 실행'을 참 교회의 한 표로서 가르쳐왔다(스코틀랜드 신앙고백 <1560년>, 제18항; 벨직 신앙고백 <1561년>, 제28항, 제29항; Hermann Hoeksema, Reformed Dogmatics, pp. 617-621;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ics, pp. 668-671).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분리의 원리'는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권징의 교훈 속에 들어 있는 원리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제와 분리의 원리를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의 입장 중 어느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지 확인할 수 있다.

교제치 말아야 할 대상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를 강조하지만, 다음의 네 부류의 사람들로부터는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불신자들

첫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불신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제'란 교회적 교제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나누는 영적 교제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서 나누는 이 교제는 특히 성찬식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잘 표현된다.

고린도후서 6:14 -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세상과 교회,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있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이므로, 교회적 교제에는 어떤 한계선이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구든지 주께로 나오라고 초청되지만, 믿는 자만이 성도로서의 영적 교제를 서로 나눌 수 있다.

이단자들

둘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이단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로마서 16:17, 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너희가 배운 교훈 혹은 교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7-1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 . .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 4,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더욱이, 이단의 성격들을 생각할 때, 성도와 이단간의 교제의 단절이 필요함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첫째로, 이단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사상이다. 갈라디아서 1:8,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둘째로, 이단은 멸망케 하는 사상이다. 베드로후서 2: 1,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셋째로, 이단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다. 디모데후서 2:17, 18,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오늘날 이단에 속하는 것은, 우선 개신교회가 전통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이요 우상숭배적이라고 간주했던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주로 19세기 이후에 많이 일어난 각종 이단 종파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크리스챤 사이언스, 통일교, 천부교 등과, 특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포용적일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호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천주교회는 근본적으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특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 예를 들면,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無誤性), 하나님의 인격성과 형벌적 공의의 속성,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처녀 탄생, 신성(神性), 대리적 속죄, 육체의 부활, 승천 및 재림을 부정하는 무서운 불신앙적 이단 사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유주의 이단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되며,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마땅히 교회의 교제에서 배제되어야 하고 정통 교회로부터 출교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단절이 성경적이라면,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 입장이 바르고 분리를 반대하고 교제, 공존, 협력을 주장하는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 입장이 잘못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범죄자들

셋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윤리적으로 드러난 죄를 짓고 회개치 않는 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그런 자들을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5:11-13,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 . .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이 점에 비추어 볼 때도, 오늘날 참된 교회들은 윤리적으로 심히 부패한 교회들과의 교제를 단절해야 할 것이다.

불순종자들

넷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사도들의 교훈 곧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함으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 .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이것은 이 편지가 쓰이던 당시에는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교훈이었지만, 그 원리는 다른 일에서도 적용된다. 특히, 이 말씀은 오늘날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고 자유주의 이단자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교제하는 소위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비록 신복음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신학 사상의 변질이 있는 이단이 아니고 우리와 같이 복음을 믿는 참된 성도요 우리의 형제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고의적 불순종과 타협적 행위를 묵인하거나 용납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그것을 책망하고 만일 그들이 그 행위를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교제도 끊어야 할 것이다.

페이스 복음주의 루터교 신학교의 데오도르 슈브케겔 교수는 신복음주의를 '치명적 악'이라고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본적 문제는 . . . 교회 내에서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이다. 옛방식은 . . . 오류에 빠진 사람을 책망하고 그를 교정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잘못된 가르침을 고집하면, 우리는 그가 회개하고 그의 길의 잘못으로부터 돌아서기까지 그를 우리로부터, 혹은 우리 자신을 그로부터 분리시킨다. 이것이 성경적 방법이다. . . .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은 이 분리의 방침을 내버리고 그 대신 오류를 포용하는 침투라는 방침을 취했다"(Christian News, 1999년 5월 31일; Calvary Contender, 1999년 7월 1일).

마크 시드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적인 인물이 범하는 공적인 죄는, 속임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공적으로 책망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배교(背敎)와의 교제를 옹호하고, 거짓 교사들과 불신자들과 협력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공적으로 도전한 죄가 있다. 그가 잘못 인도하고 있거나, 또는 만일 성경으로부터 적절히 경고를 받지 못한다면 그에 의해 잘못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충성된 목사는, 비록 그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는 체하고 또 아마 어느 정도 그러할지라도, 그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 기껏해야, 이것은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거짓 교사처럼 행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이 입장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불행스럽다. 우리가 오직 입장에만 집중하고 성경적 불순종이나 타협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비성경적 입장의 주된 선동자요 촉진자요 옹호자일 때, 우리는 그가 촉진하고 있는 그 죄를 비난하면서 그 사람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다." (Mark Sidwell, The Dividing Line: Understanding and Applying Biblical Separation; Calvary Contender, 1998년 11월 1일.)

교제를 끊어야 할 이유들

성경이 성도들에게 위의 네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치는 이유들은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 때문에

성경적 분리의 첫번째 이유는 교회의 본질 때문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며, 참된 성도라면 성경적 교리를 믿고 성경적 교훈에 순종할 것이 기대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러한 본질적 성격에 배치되는 요소들, 곧 불신앙, 이단들, 회개치 않는 죄들, 고의적 불순종 등은 교회에서 마땅히 배격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의 연합 전도 활동이 겉보기에 큰 결실이 있는 것 같으나, 성경이 그러한 잘못된 교제를 금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구실도 용납하지 말고 그런 활동을 반대하고 배격해야 한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주의 명령에 대한 순종에 있다. 기독교는 물량주의, 숫자주의, 실용주의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경주의, 진리주의이다.

교회의 순결성 때문에

성경적 분리의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교회는 거룩하며 또한 거룩해야 한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윤리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에베소서 5:26, 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비록 지상에 완전한 교회가 없겠지만, 우리는 순결한 교회, 흠 없는 교회를 건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뻔뻔스런 불신앙이나 고의적 불순종을 교회 안에 용납해서는 안된다.

악의 전염성 때문에

성경적 분리의 세 번째 이유는 악의 전염성 때문이다. 교리적 오류이든지 윤리적 오류이든지 간에, 죄악은 누룩처럼 교회 안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악의 전염성 때문에 교회는 악을 제거하고 악과의 교제를 단절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곧 부패되고 속화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갈라디아서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디모데후서 2: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하나님의 명예 때문에

성경적 분리의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명예 때문이다. 교회가 윤리적 죄악을 포용하면, 세상이 교회를 비난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 성결성을 유지해야 한다. 로마서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교제를 끊는 방법들

성경은 성도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치는가?

오류는 지적되어야

우선,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교훈과 입장과 활동들은 지적되고 비평되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교훈들을 비평하고, 교훈하는 자들을 비평하지는 말라'고 하지만, 교훈과 교훈하는 자는 분리되기 어렵다. 밴가드(Vanguard) 1999년 6월호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했다:

첫째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성경적이다. 바울은 긍정적으로 활동들을 추천하기 위해 사람의 이름을 들었고(고전 16장; 빌 2:25; 골 4장), 부정적으로 활동들을 경고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였다(딤전 1장,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딤후 2장, '후메내오와 빌레도'; 딤후 4장, '알렉산더'). 요한도 또한 구체적으로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요삼 9, 10, '디오드레베').

둘째로,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칭찬하기를 기뻐한다면(예를 들어, 루터와 스펄전과 웨슬리의 전기들), 부정적으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논리일관한 일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가 되는 사람들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똑같이 정당하다. 더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미워하라고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다(딤후 4:15).

셋째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실제적인 문제이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흔히 설교들보다 설교자들을 따른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들어야 한다.

넷째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역사적인 후원이 있는 일이다.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사람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내용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인물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진술하기를 겁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흔히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교회적 교제를 단절해야

성경이 가르치는 분리는 일차적으로 교회적 교제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이 있을 경우, 성도들은 성경이 가르친 대로 그리고 교회 헌법의 권징의 규칙을 따라 권계(勸戒, 권면과 충고), 수찬 정지(受餐停止, 성찬식에서 제외함), 제명 출교의 절차를 행해야 할 것이다(마 18:15-17).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들간의 막힌 담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들 상호간의 막힌 담도 허물어 뜨리신 위대한 화해자이시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똑같이 주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 곧 우리의 진정한 형제들이요 자매들이겠지만, 비록 우리가 그들 중 어떤 이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성경적 분리는 성경적 원리요 성경적 교훈이다.

불신앙, 이단들, 회개치 않는 악들, 고의적 불순종들에 대한 적절한 권징과 교제의 단절은 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다. 고린도전서 5:11-13, "[이런 자와는] 사귀지도 말고 . . . 함께 먹지도 말라 . . .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14,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는 합법적인 권징과 교제의 단절을 성실히 실행해야 한다.

특히, 교회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마땅히 출교되어야 할 이단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단의 신학교를 위해 교수를 청빙할 때 신학교 이사들은 먼저 청빙할 교수들의 신학 사상이 건전한 지를 신중하게 심사해야 한다.

또한 성경적 교회들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대 교단들이 자유주의화 된 상황이므로, 소위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각 나라의 교회협의회(NCC)들은 잘못된 단체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들은 이러한 단체들과 관련된 활동들을 반대해야 하고 거기에 참여치 말아야 한다.

특히,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활동과 같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전도 활동은 명백히 비성경적이고 인본주의적이므로 우리는 그러한 활동을 인정하지 말고 또 거기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후원하지도 말아야 한다.

또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망라한 초교파적 연합 집회들, 예를 들어 부활절 연합예배, 연합 성찬식, 그리고 성서공회, 기독교 방송국, 찬송가공회 등의 연합 활동들도 옳지 않다. 성경의 기본적 교리들을 믿는 교회들간의 초교파적 연합 활동들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지만, 보수적 교회들과 자유적 교회들간의 연합 활동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덧붙여서 생각할 바는, 한 교회 혹은 교단이 자유주의화 되었거나 자유주의자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할 때, 보수적 신자들 혹은 목사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는가? 우선, 그는 그 교회와 교단이 자유주의자들을 내어쫓고 성경적 교회와 교단이 되도록 말과 글로써 그리고 합법적인 절차를 따라 노력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나 교단이 자유주의자들이나 혹은 그들을 옹호하는 세속적 교권주의자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어서 자유주의자들의 권징 출교나 교회 정화 혹은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그는 그 교회와 교단을 떠나야 하고 바른 입장을 가진 성경적 교회를 찾아 거기에 속하거나 그러한 교회 혹은 교단을 설립해야 한다. 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고린도후서 6:17, "거기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계 18:4에도 같은 말씀이 있음).

개인적 교제를 조심해야

물론, 우리는 교회적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과의 개인적인 교제도 조심해야 한다. 때때로 그런 자들과 개인적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들이 우리의 가족들 중에나 우리의 친구들이나 이웃들 가운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무분별한 교제로 악을 용납하거나 공적으로 악을 승인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구약시대에 유다 왕국의 경건했던 여호사밧 왕은 이스라엘 왕국의 악한 아합 왕과 교제함으로써 하나님의 책망과 진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후손에게도 이스라엘 왕국의 우상숭배의 씨를 뿌리는 결과가 되었다.

역대하 19:2,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요한이서 7- 11, ". . . 그[이단자]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을 잃지 말아야

특히 오류를 범한 자들과 교제를 끊을 때, 우리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우리의 교제의 단절은 먼저 우리의 성실한 노력을 전제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의 잘못의 교정을 위해 먼저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권면하고 교회적으로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또 교제를 끊어야 할 때에도 지금이 불가피한 분리의 때인지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우리의 성급한 분리는 교회의 개혁이나 갱신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 더욱이, 신자 개인의 경우에는 교회적 대책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떠나야 할 교회를 대체할 건전한 보수적 교회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때때로 어려움이 많이 있다.

분리에는 항상 극단적 태도의 위험이 있다. 건전한 성경적 확신에서라기보다는 개인적 해석들이 분열의 문제점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 죤 애쉬브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리는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또 분리는 배교로부터 분리하기를 원치 않는 불순종하는 형제들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그러나 분리가 형제들 간의 모든 불일치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Calvary Contender, 1998년 11월 1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특히 이런 교회적 갈등과 결단의 때에, 겸손과 온유와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 미움이나 교만은 그 어떤 죄와 오류 못지 않은 큰 죄악이다. 사람이 성경적 분리의 명령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도 중요하지만, 그에게 좋은 성품과 삶이 있느냐 없느냐는 더 중요하다. 더욱이,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영적 분별력을 좀더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일 뿐이며,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교만할 수 없다. 갈라디아서 6:1,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범죄자]를 바로 잡고."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데살로니가후서 3:15, "그들[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을 원수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바른 입장의 필요성

어떤 운동이나 교회가 어떻게 배교에 떨어지는가? 클레이 나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는 배교(背敎)가 한 시대에 걸쳐 일어나고 하룻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여러분은 '교회가 오직 두 명의 목사를 거치면 자유주의화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첫번째 목사는 그 교회를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은 그것을 배교로 인도한다. 자유주의를 향해 움직이는 교회들을 확인하는 길들이 많이 있지만, 그 길에 있는 자들은 친구들로부터의 경고들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와 같이 배교를 향해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거기로 인도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여러분이 그들에게 그들의 교단이 장소적 천국과 지옥불이 없다고 하는 자유주의 교리들을 신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때에라도 그 명백한 사실에 직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충성된 경고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거짓 교리를 취급하고 있기보다는 개인적 문제를 논하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이 없다,' '천박한 정신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사람이 어떻게 배교에 도달하는가? 사사기 2:10은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말씀한다." (Shepherd's Staff, 2000년 1월 8일; Cal- vary Contender, 2000년 2월 1일.)

쥐를 죽이는 것은 98퍼센트의 햄버거 속에 넣어진 2퍼센트의 혼합물인 독약이다. 진리와 거짓의 혼합물은 격리되고 분간될 수 있는 순수한 거짓보다 보통 훨씬 더 치명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나 그 안에 좋은 점이 매우 많다"고 흔히 말한다. 모든 거짓 사상 체계들은 진리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사실상, 더 많은 진리가 치명적 오류와 섞여 있을수록, 그것은 속임을 위해 더 많이 위험하다. 효력이 있으려면, 속임수는 본질적으로 참되게 보여야 한다. 목표 지점을 향해 전달되는 내용의 90퍼센트 이상은 참되어야 한다. 그러나 심지어 미혹의 시대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속임 당함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우리 시대의 오류나 오류자들을 폭로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사 8:20). (Calvary Contender, 2000년 3월 15일.)

오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다. 스스로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정통적 기독교의 역사적 성경적 교리들로부터 심각하게 떠날 때, 우리는 게으르게 침묵함으로 서 있어서는 안된다(딤 1:9-11). 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이며 그 오류의 전파자들과 그것을 듣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Vantage Point, 1998년 7월). 침묵하는 파수꾼들은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파수군들이 의무를 다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의 목자들을 '눈 먼 파수꾼들'이라고 부르셨고 또 그들을 '벙어리 개요 능히 짖지 못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사 56:10).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교리를 비난하지 않으셨고, 오직 그들이 경고했어야 할 때 잠자고 있었음을 비난하셨다. (Calvary Contender, 1995년 9월 1일).

여러 가지 문제들로 혼란스러운 오늘날 교계의 현실에 사랑과 관용만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이롭게 하는 것뿐이다! 교회 내의 오류들은 지적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A. W. 토저는 '관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의 유행은 우리가 도량이 좁다는 평판을 얻지 않으려고 무엇이든지 관용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명령하셨던 아말렉의 왕 아각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으며(삼상 15장), 그래서 그들은 오류와 악을 용납함으로써 오는 시대를 위해 교회의 건강을 희생시키는 길을 택하며, 이것을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악의 자리들을 소란시킬 의무가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신실한 사랑에서 행해지는 곳에 큰 유익이 따를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일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는 심사(審査) 때문에 손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을 가장한 소심함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쓸데 없는 형식들과 비(非)성경적 행위들이 계속되도록 허용되었고, 그것들은 마침내 점점 교회의 생명을 질식시켰고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으로 . . . 교회 문제들을 심사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결점을 찾는 자가 되지 않고서는 결점을 찾기가 어렵다. . . . 그러나 우리가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일이 순수하게 보존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A. W. Tozer, Berean Call, 1998년 7월;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일.)

캘버리 컨텐더지는 이렇게 말했다: "참된 기독교적 일치는 공통적으로 믿는 고정된 성경 진리들을 믿고 주의하는 것을 포함한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의 거짓된 일치는 '다양성 속의 일치,' 다원주의, 그리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섞는 것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약 3:17). '외적 일치와 복음 진리 사이에 양자 선택을 해야 한다면, 진리를 위해 일치를 양보해야 한다. 오류 안에서 연합하는 것보다 진리에 의해 분리되는 것이 더 낫다.' 그러한 분열의 책임은 진리를 떠난 자들에게 있다. A. W. 토저는 말하기를, '타협은 압박을 제거할 것이다. 사탄은 싸우기를 중지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지의 댓가는 평화로운 침체의 삶일 것이다'라고 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4월 1일.)

테리 아놀드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썼다: "오늘날 '관용'이라는 말은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찬미를 받고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와 기독교 교리에서 관용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요구가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의미한 바와 성취된 바는 흔히 관용이라기보다 '타협'이다. . . .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말씀을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중요한 교리들과 타협하는 것도 또한 죄이다! 거짓 교사들과, 사람들을 건전한 교리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과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성경은 때때로 일치보다 분리에 관해 말한다. . . .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 관용하셨지만 결코 타협하지는 않으셨다. 사실 그는 흔히 논쟁에 휘말리셨다! . . . 나는, 그들이 뒤에 더 큰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작은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소위 '화평케 하는 자들'을 주의한다. 많은 목사들은 사람들이나 그들 자신의 지위나 인기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어떤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 . . 진리를 희생하는 관용은 타협에 이른다. 타협은 항상 본래의 표준을 낮춘다. 진리는 경계선을 가지고 있지만, 오류는 경계선이 없다. 불행하게도 타협은 오늘날 덕(德)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는 감정 상하는 일이 되었다."(Calvary Contender, 1999년 4월 15일.)

역사적 후원

역사적 후원

16세기 종교 개혁은 20세기 근본주의 운동의 모본이 된다. 일반적으로 권징은 회개치 않는 범죄자를 교회로부터 배제하는 행위이지만, 16세기 종교 개혁 당시에는 서방 교회 즉 천주교회가 전체적으로 변질, 부패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은 그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분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종교 개혁 운동은 분파 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패된 교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악한 일이다.

20세기 기독교계의 상황은 16세기 종교 개혁 당시보다 더 어둡고 혼란스럽다. 역사적 대교단들은 자유화 되었거나 자유주의를 고의적으로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되었다. 다수의 교회들은 자유주의자들을 권징하거나 출교시킬 의사가 전혀 없다. 그리고 보수적인 교회들도 자유적 혹은 포용적 교회들과 점점 더 자유로이 교제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참된 성도들과 목사들은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회들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들의 속한 교회들이 어떤 방향으로 가든지 자신들만 보수적으로 믿으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마땅히 그 교회들로부터 나와야 하고 그런 잘못된 교제와 협력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이것은 분파주의적 관념이 아니고 성경이 명령하는, 그리고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정당한 분리이다. 참된 성도들이 죽은 교회, 배교적인 교회로부터 떠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며 또한 의무이다.

침례교 연맹의 교리적 탈선들을 지적하면서 1887년 그 단체로부터 탈퇴했던 촬스 스펄젼(Charles Spurgeon)은 말하기를, "나는 내가 아는 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했고, 그 독특한 내용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증거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앙이 잘못된 자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그들과 교제하는 자들로부터 내 자신을 분명하게 단절시켰다," "오류가 확립되었음을 내가 보았거나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심사 숙고하지 않았고, 즉시 그 단체와 결별했다. 그때 이후 나의 한가지 조언은 '그들로부터 나오라'는 것이었다," "오류에 연루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서 그 오류를 성공적으로 저항할 능력을 취하여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William E. Ash- 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p. 44; Calvary Contender, 1998년 9월 15일).

유명한 캠벨 모간 목사도 잘못된 관용이 선한 영향력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신 행위인 관용이 있다. 마비 상태를 낳는 화평이 있다. 교회가 일을 할 때 타협에 근거한 교제를 요청하는 자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들이 있다. 그렇게 떨어져 서 있는 것은 추방과 핍박을 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능력과 영향력을 유지할 것이다. . . . 오늘날 교회는 타협에 의하여 그 자신의 영향력을 파괴시켰다"(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5일).

20세기 미국 북장로교회의 배교에 대항하여 싸웠던 보수적 지도자이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메이천은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한가지 사실이 완전히 명백하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자유주의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은 여하튼 완전히 분명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그러하다면, 자유주의와 기독교가 계속 동일한 조직체 안에서 전파된다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회 안에 있는 그 두 부류들의 분리는 이 시대의 절실한 요구이다"(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lism, p. 160).

그는 배교적인 교회로부터의 분리의 정당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의 기관들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은 그 교회의 활동을 계속 후원할 수 없을 것이다. . . .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를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위의 책, 166쪽). 메이천은 신복음주의적 타협의 죄에 대해, "오늘날 가장 나쁜 죄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동의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 다음, 기독교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과 협력하고 타협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Ashbrook, p. 45).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이었던 죤 머리는,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신복음주의적 전도 방법에 관하여, 자유주의자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전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전도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분명하게 비평하였다(John Murray, "Cooperation in Evangelism,"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I, 161- 62). 또한 그는 신자의 교회 소속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소속한 교회의 집단적 증거는 곧 우리의 증거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신실한 교회에 소속해야 한다고 말했고, 집단적 관계와 책임을 무시하는 것은 악이라고 부언하였다("Corporate Responsibility," ibid., pp. 273-79).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이었던 코넬리우스 반틸은 신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약점들, 타협적 전도 활동, 및 신복음주의적 잡지들을 비평했다(Cornelius Van Til, The New Evangeli- calism). 예를 들어, 그는 타협적 전도 활동을 반대하는 메이천의 입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메이천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과 협력함으로 이루어지는 협력 선교, 협력 전파, 협력 전도를 반대했다. 메이천에게 있어서 그러한 협력은, 유대주의자들과의 협력이 바울 사도에게 불가능했던 것처럼 불가능하였다. . . . 그는 그 자신의 교회에서 선교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독립 선교부를 조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 . . 그는 협력 전도의 개념이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의 배신임을 명백히 했다"(Ibid., pp. 23, 24, 28).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 교수이었던 에드워드 영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문제에 대하여, 신복음주의가 전도와 학문과 교육을 강조한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사실, 그것[신복음주의]은 매우 중요한 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위한 활기찬 투쟁의 필요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강조한다. . . . 그러면 신복음주의가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해답인가? 우리는 아니라고, 강조해서 아니라고 대답한다. 여기에 한 일시적 현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빨리 지나갈수록 교회를 위해 더 유익하다. . . . 근본주의 안에는 훌륭한 많은 점들이 있고, 만일 우리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를 당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주저도 없이 근본주의를 택해야 할 것이다. 근본주의는 신앙의 변호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관심은 참으로 성경적이다. . . . 그것[근본주의]은 실수들을 범했으나, 외쳐야 할 적절한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저 조심성 있는 중도파들이 범한 것과 같은 그렇게 큰 실수는 아니었다"(E. J. Young, "Where Are We Going?" The Presbyterian Guardian, 10 April 1959, pp. 187, 188).

훌륭한 기독교 신학자요 변증가인 고든 클락은 배교적인 교회로부터의 탈퇴의 역사적 정당성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모든 교회들은 약간씩은 다 허물이 있으므로 교적을 바꾸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하는 그럴 듯한 변론은 루터와 칼빈 또는 청교도들에게는 결코 통하지 않았던 변론이다. 방종한 촬스 2세가 반기독교적인 법령을 제정하여 강요한 까닭에 약 2000명의 목사들이 1660년 영국 국교를 탈퇴했던 것을 기억하라. 이렇게 탈퇴함으로 해서 그들은 생활비를 받을 수가 없게 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 . . 금일에 적은 형벌이라도 기꺼이 받고자 하는 목사들이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 그리고 약간의 방해 외에는 전혀 아무런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과연 평신도 중에 몇명이나 배교적인 조직체를 탈퇴할 만한 확신들을 갖고 있을까?" (Gorden H. Clark, 장로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291쪽).

잘못된 비평들에 대한 비평

명칭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개념과 정신이다.

우리가 어떤 사상이나 운동을 논할 때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명칭이 의미하는 바가 중요하다.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근본주의'라는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의 수호와 배교적 교회들로부터의 분리라는 그 본질적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근본주의이다, 아니다'를 말하기 전에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그 입장이나 운동을 옹호할 필요도 없고 또는 그것을 비평할 필요도 없다. 만일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그것을 비평한다면 허수아비를 놓고 비평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계에 유행하는 근본주의 비평의 말들은 대개 근본주의에 대한 무지에서 나왔거나 아니면 신복음주의적 편견에서 나왔다고 판단된다. 역사적으로 정의된 바 근본주의는 성경적 입장이며 바른 입장인데, 그 동일한 정신을 가진 일부 보수적 목사들이 근본주의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로 인하여 근본주의를 비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주의라는 명칭에 대한 시비를 잠간 접어놓고 그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기를 원한다. 진실한 목사들은 양심적으로 이 질문들에 스스로 대답해 보기를 원한다.

첫째로, 당신은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참으로 믿으며 옹호하고 그것들을 부정하는 모든 사상들에 대항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고 인정하는가?

둘째로, 당신은 오늘날 대교단들(예를 들어, 기장, 기감, 예장 통합 등) 속에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목사들이 목사 후보생들을 교육하는 신학교들에 교수들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는가?

셋째로, 당신은 그 교단들이 포용주의적이어서 이런 사실을 통분히 여기고 그런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배제하려는 진지한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는가?

넷째로, 당신은 그런 자유적 혹은 포용적 교단들이 바른 말씀을 지키고 이단을 배격하라는 주의 명령을 저버린 불신실한 교회 혹은 배교적 교회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겠는가?

다섯째로, 당신은 그런 교단들 속에 있는 참된 목사들과 성도들이 교단의 갱신을 위해 성실히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여섯째로, 당신은 성경을 그대로 믿는 보수 교단들(예를 들어, 예장 합동, 고신 등)이 그런 포용적 혹은 배교적 교단들과 무분별하게 교제하거나 교류하지 말고 그런 교단들을 오히려 책망해야 하고 그들과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근본주의의 문제는 첫째로 성경의 근본 교리들의 보수(保守)와 옹호에 대한 문제요, 둘째로 포용적 혹은 배교적 교단들과의 교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에 대한 변론은 바로 이 핵심적 문제에 대한 논의이어야 한다. 그 외의 것들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고 주변의 문제이다. 누가 그 외의 것들을 열렬히 거론하고 비평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핵심적 문제는 남아 있다. 근본주의라는 명칭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정신이 문제이다.

성경의 근본 교리들의 보수와 옹호에 대하여는, 성경을 믿는 진실한 신자라면 아무 반론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했다(딤후 1:13). 이것은 우리가 사도들로부터 전달되어 내려온 '바른 교훈의 윤곽 혹은 개요를 지키라'는 뜻이다. 또 유다는 기록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했다(유 3).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바른 말씀 곧 근본 교리들을 지키고 그것들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다.

근본주의의 두번째 문제인 포용적 혹은 배교적 교단들과의 교제 문제는 어떠한가? 사실, 여기에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있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신복음주의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박형룡 박사의 지적대로, 자유주의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고 WCC 에큐메니칼 운동과도 우호적이며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전도활동을 펼친다. 많은 이들이 배교적 교단 안에 머무는 타협자들이며 그렇지 않은 자들도 배교를 지적하거나 책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에는 기독교계가 이미 너무 혼합적이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현실이 어떠하든 간에 무엇이 성경적으로 옳은 태도인가? 구약 시대에 노아는 어떠했으며 모세는 어떠했는가?(벧후 2:5; 출 32장) 엘리야는 어떠했으며 미가야는 어떠했는가?(왕상 19:10; 왕상 22:5-14) 에스라는 어떠했으며 느헤미야는 어떠했는가?(스 9, 10장; 느 2, 6, 13장) 신약 시대에 바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고후 11장; 갈 1장; 딤후 1-4장) 성도들이 이단자들로부터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 분명하다(롬 16:17; 딛 3:10; 요이 7-11; 유 3; 갈 1:8; 벧후 2:1; 딤후 2:17, 18). 아무리 오늘날 기독교계가 포용적이게 되었다 할지라도 주의 바른 종들과 교회들이 가야할 길은 분명하다.

근본주의는 개혁주의와 대립되는 신학 체계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입장은 근본주의가 아니고 개혁주의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은 근본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개혁주의라는 말은 역사상 루터파의 신학적 입장과 대조해서 표현된 말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신학 체계를 가리킨다. 그것은 주로 장로교회의 신학 체계이다. 반면에, 감리교회나 성결교회는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라는 신학 체계를 채용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그런 류의 신학 체계가 아니다. 근본주의는 20세기초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 강하게 불어닥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한 초교파적 태도와 입장이었다. 근본주의는 장로교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고 감리교회나 침례교회 등 각 교파들에서도 일어난 하나의 초교파적 운동이었다. 개혁신학을 따른다고 자칭하는 장로교 목사들 가운데서도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가 서로 달랐다. 어떤 이들은 강하게 반대하였으나 다른 이들은 포용적이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를 개혁주의와 대립시켜 말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이다.

김의환 박사의 비평에 대한 비평

김의환 박사는 1970년에 쓴 도전 받는 보수신학이라는 책에서 근본주의를 비평하면서 "우리의 입장은 근본주의도 아니요 신복음주의도 아니다. 우리의 입장은 역사적 칼빈주의 신앙 노선을 따른다. 역사적 칼빈주의는 근본주의적 요소도 있고 신복음주의적 요소도 있다"고 말하였다(114, 115쪽). 또 그는 "칼빈주의자는 근본주의를 받아 들일 수는 있어도 근본주의자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칼빈주의는 근본주의보다 훨씬 광범한 신학 체계이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115쪽).

그러나 우리가 그의 논의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근본주의에 대한 그의 개념이다. 그는 근본주의 운동의 시작을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주장하는 운동으로 보나(96-100쪽), 곧 신복음주의에 대해 논의하면서, 근본주의에 대한 신복음주의의 비평을 수용하는 것 같다. 그것은 근본주의 운동이 교리적 축소주의, 방법적 편협주의, 소아병적 부정주의, 고양이와 개의 싸움 같은 지엽적 논쟁, 학적 수준의 저조, 사회 도피적 경향, 독립주의의 위험 등을 가졌다는 비평들이다(100-114쪽).

무슨 문제의 논의에서든지, 용어의 정확한 개념은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는 먼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에 대한 자신의 개념들을 명확히 말했어야 한다. 본인이 알기에는 신복음주의자들이 지적하는 점들은 어떤 근본주의자들의 약점들일지는 몰라도 근본주의 운동의 본질이 아니며 근본주의 대회들이 지향하는 바도 아니다. 그렇다면 몇몇 약점들을 들어 어떤 운동이나 입장을 비평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오히려 바른 비평의 태도는 그 운동이 주장하고 지향하는 바에 대해 성경적으로 논의하는 것이다.

"우리의 입장이 근본주의가 아니요"라고 그가 말했을 때 만일 그 근본주의가 소위 그런 약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오늘날 근본주의자들도 그런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서 "역사적 칼빈주의는 근본주의적 요소도 있다"고 말하며 더욱이 "칼빈주의자는 근본주의를 받아 들일 수는 있어도 근본주의자는 될 수 없다"고 말하니 도대체 그의 '근본주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만일 그가 근본주의를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받아들이는 입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입장은 근본주의가 아니요'라는 말은 틀린 것이고, 그는 '우리의 입장은 근본주의이요'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아니고 그가 근본주의를 신복음주의자들이 비난하는 어떤 약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라면, '칼빈주의자는 근본주의를 받아 들일 수는 있어도'라는 그의 말은 틀린 말일 것이다.

또한, '근본주의를 받아 들이는 것'과 '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도 독자들을 혼동케 한다. '근본주의자'라는 말이 일반적인 정의가 '근본주의를 받아 들이는 자'를 가리킨다는 것은 상식적이다. 그런데 그의 발언은 혼란스럽다.

이와 같이 근본주의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않으면서도 그는 계속 말하기를, "극단의 근본주의 편에서 볼 때는 웨스트민스터나 커비난트 신학교의 입장이 신복음주의적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주의만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고 한다. 그는 '극단의 근본주의'가 무엇인지 먼저 개념을 분명하게 해설해야 했다. 또 '우리는 근본주의만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근본주의는 무엇을 의미했는지도 분명히 해야 했다.

만일 근본주의가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믿는 입장을 가리켰다면, 그는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따르는 입장을 왜 비난하는가? 그런 근본주의의 입장은 완전히 옳은 입장이 아닌가? 만일 그것이 아니고 근본주의가 어떤 인간적 약점들을 의미하는 말이라면 '우리는 근본주의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했어야 정당하지 않겠는가?

이런 모든 혼란과 모순이 생기는 것은 그의 논의에서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에 대한 기본적 개념 혹은 정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근본주의에 대한 모든 논의는, 근본주의 역사에서 고찰되고 확인되듯이, 근본주의가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적 배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초교파적 운동 혹은 입장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김의환 박사는 또한 근본주의의 결함들을 열거하면서 신복음주의자 칼 헨리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첫째로, 그는 근본주의가 교리적 축소주의의 약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116, 117쪽). 그는 말하기를, "미국의 근본주의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교리만을 안고 성경학교로만 돌아가 그것만 되풀이 하면서 지나는 동안 오늘의 신학적 판도에서 보수 신학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학자를 기르지 못하고 말았다"고 했다(116쪽).

그는 계속 말하기를, "과학에 대한 혐오, 지식에 대한 반감, 세속에 대한 기피, 이와 같은 근본주의의 경향은 필경 학적 세계에서 경원되고 신학 운동의 주류에서 배제되고 칼빈주의자들에게서 격리되게 하고 말았다. . . . 근본주의가 신학적 '이니시아티브'를 신정통주의에게 빼앗기게 된 것은 근본주의 신학 자체의 신학적 빈혈증 때문이었다"고 했다(117쪽).

그러나 이것은 근본주의의 핵심적 논의가 되지 못한다. 또 근본주의의 초교파적 성격을 이해하면 왜 근본주의 운동에서 근본 교리들에 대한 언급이나 강조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근본주의 운동에 속한 교파들은 자기들의 신학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몇 가지의 근본 교리만을 믿는 자들이 아니다. 또 과학에 대한 혐오나 지식에 대한 반감은 불경건한 과학과 지식에 대한 것이지 진정한 과학, 진정한 지식을 누가 반대하는가?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1920, 30년대에 훌륭한 신약 신학자이었던 제이 그레셤 메이천 박사를 그들의 모범으로 존경하고 있다.

가난하고 빈약한 집안을 가난하고 빈약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누가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하며 누가 빈약하고 싶어서 빈약한가? 근본주의자들의 중심이 바르다면 그들의 약점을 가지고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신학계에 학자로 말한다면, 단연히 자유주의적 학자들이 다수가 아닌가? 우리가 쓰는 히브리어 사전(BDB, KB)이 그러하며 신약신학 사전(Kittel)이 그렇지 않은가? 약점들을 비난하지 말고 본질적 주장을 성경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둘째로, 김의환 박사는 근본주의가 방법적 편협주의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117-119쪽). 이것도 그가 신복음주의자들의 생각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다. 그는 근본주의가 부정적 사고 방식이 체질화 된 운동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근본주의가 교리 문제가 아닌 지엽적 문제나 시행 방법의 차이 때문에 교파를 분열시켰고 불필요한 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그는 신복음주의자들이 묘사하는 대로 근본주의자를 '신학적 깡패, 연합 운동의 방해자, 문화의 낙후자, 반과학-반지식주의자, 극단적 세대주의자, 강단 위주의 선풍주의자, 과격한 감정주의자, 사회적 은둔주의자, 열광적 찬송주의자' 등으로 가혹하게 비난한다(118, 119쪽). 그의 말이 옳다면 아무도 근본주의자가 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근본주의 가까이도 가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논점을 흐려놓고 하나님의 귀한 종들과 사역을 순전한 독설로 비난하는 악한 일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근본주의의 그 중심적 주장과 입장을 논의함이 없이 단순히 어떤 근본주의자들의 약점들을 마치 그것들이 근본주의의 본질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논점을 흐려놓는 일이다. 설령 신복음주의자들의 비난이 다 옳다고 하더라도, 근본주의가 주장하는 '배교로부터의 분리'의 외침은 여전히 중요한 요점으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논점을 흐려놓지 말고 배교의 문제와 배교로부터의 교제의 단절 혹은 분리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진실하게 논의하고 확정해야 한다.

사실, 근본주의는 신복음주의자들이 독하게 비난하는 그런 점들을 옹호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혹 자신들에게 어떤 약점들이나 실수들이 있었다면 그것들을 뉘우치며 고치려 하는 자들이다. 약점과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다. 또 많은 경우, 그 책임은 어느 한 쪽에 있지 않다. 더욱이 오늘날 배교의 물결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탄의 활동이 너무 교묘하게도 교회들과 신학교들 안에서 승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이 바른 길 가고 좁은 길 간다는 것은 단순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배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자들을 '신학적 깡패, 연합 운동의 방해자'로 몰아붙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열심히 설교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자들을 '강단 위주의 선풍주의'니 '과격한 감정주의'니 '열광적 찬송주의'니 하고 비난하는 것은 진실한 형제들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김의환 박사는 또 그의 책에서 1936년에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면직되었던 보수적 신학자요 지도자인 제이 그레셤 메이천이 분리주의적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반틸의 글을 인용하였다(123쪽). 그러나 그는 메이천 당시의 북장로교회가 종교개혁 당시 칼빈이 떠난 천주교회보다 성경의 기본적 교리를 더 불신앙하였다고 말함으로써 메이천이 모교단을 떠난 것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옹호하였다(124쪽).

물론, 메이천은 1930년대 미국의 상황에서 먼저 교단 내에서 진리의 선한 싸움을 싸웠었다. 그러나 그 때에도 그는 이렇게 글을 썼었다.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의 기관들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은 그 교회의 활동을 계속 후원할 수 없을 것이다. . . .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를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기독교와 자유주의, 166쪽).

이것이 성경적 분리의 정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더욱, 교단이 자유화 되고 배교적이게 된 이후에 그 교단을 떠나고 그 교단과 교제를 끊는 것이 성경적으로 바른 태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그가 메이천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참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근본주의적 정신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에 가르친 대로 배교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입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는 오늘날의 배교와 혼동의 시대에 성경적인 바른 입장과 태도이다.

간하배 교수의 비평에 대한 비평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많은 영향을 준 또 다른 한 사람은 간하배(Harvie M. Conn) 교수이었다. 그는 미국 정통장로교회 선교사로서 한국에 나와서 10여년 동안 활동하였고 특히 예장 합동측 총신대학 신학연구원에서 강의하였다. 그는 지금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1973년 현대신학해설(한국개혁주의 신행협회 편찬)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것은 그가 예장 합동측 기관지이었던 기독신보(기독신문)에 여러 번 기고한 글들을 모은 것이었다.

그는 그의 책에서 1930년대 이후의 근본주의를 '신근본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이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칼 매킨타이어 같은 인물을 거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159쪽). 그는 근본주의의 문제점을 열거하면서 체계적인 교리 작성에 대한 무관심, 하나님의 전체적 뜻을 축소함, 비성경적인 부정주의와 독고(獨孤)주의로 빠질 위험 등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첫째나 둘째의 문제는 초교파적 운동 일반이 갖는 특성이며 근본주의의 약점이나 문제점이 될 수 없다. 초교파적 운동은 교파적 신학 체계를 추구하는 운동이 아니다. 체계적인 교리 작성이나 하나님의 전체적 뜻의 추구는 각 교파의 신학, 특히 장로교 신학에서 계속 추구되어 왔고 또 추구되어야 할 바이다.

또 셋째의 문제 즉 '비성경적인 부정주의와 독고주의로 빠질 위험'은 어디까지나 위험성이지 그것이 그 운동의 본질이 아닌 한 그 운동 자체의 문제점으로 열거되어서는 안된다. 근본주의자들도 그런 위험성을 인식하고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구한다.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로서 비성경적 오류에 떨어지기를 원하는 자는 없다.

간하배 교수는 후기의 근본주의 곧 신근본주의에 대하여 논하면서 그 운동을 세대주의와 동일시 하려는 경향을 보인다(163쪽). 그러나 그것은 정당하지 않다. 근본주의는 초교파적 운동이었고 그 구성원들 중에 세대주의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운동이 세대주의와 동일시 되는 것은 옳지 않다. 단적인 반증으로, 오늘날 달라스 신학교나 바이올라 대학교(탈봇 신학교) 등은 강한 세대주의 경향을 보이지만, 근본주의로 불리우지는 않는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세대주의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 때문에 근본주의가 세대주의와 동일시 된다는 말은 잘못된 판단이다.

간하배 교수는 신근본주의의 위험한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과도히 부정적인 자세, 사사로운 다툼, 질책의 언어,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의 무시, 과학 일반에 대한 불신적 태도, 반교파주의 등(165-169쪽).

그러나 이것들이 근본주의의 본질적 특징들인가? 아니다. 혹 어떤 근본주의자들이 이런 저런 잘못을 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불완전에서 온 실수들이요 그런 것 때문에 그 운동이 주장하는 본질적 입장이 흐려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배교의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들 안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 없어질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주의 진실한 종들은 배교의 문제의 논점을 흐리지 말고 배교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분리'의 태도이다. 배교와는 어떤 협력이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 배교와는 오직 교제의 단절 즉 분리가 필요하다.

그 외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는, 주의 모든 진실한 종들은 성경적 사상과 덕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무도 잘못된 것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지나치게 부정적인 자세를 좋아하며, 어떤 이가 사사로운 다툼을 좋아하며, 누가 은혜로움과 예의를 저버리고 질책만 좋아하겠는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 (만일 그것이 성경적이라면) 그것을 무시하겠으며 누가 참된 과학을 무시하겠는가? 어떤 이가 건실한 교파적 확신을 무시하며, 교회가 가능한 한 외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하겠는가? 건전한 정신을 가진 성도라면 이 모든 점들에 대하여 부정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들은 근본주의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간하배 교수는 근본주의 혹은 신근본주의를 논하면서 정작 중요한 '분리'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고 신복음주의자들이 열거하는 어떤 근본주의자들의 약점들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이것은 어떤 운동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방법이나 태도가 될 수 없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실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의 실수들이나 약점들을 그 사람의 사상이나 입장이라고 묘사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 실수들조차도 하나 하나 그것들이 정말 사실이며 얼마나 그러한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설사 그것들을 다 인정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배교로부터의 분리냐 아니냐'는 태도의 문제는 남는다. 거기에 근본주의의 본질이 있다.

박아론 교수의 비평에 대한 비평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영향을 끼친 또 한 사람은 박아론 교수이다. 그는 고(故) 박형룡 박사의 아들로서 다른 이들보다 비교적 보수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1985년에 쓴 보수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책에서 근본주의에 대해 부정확하고 잘못된 견해를 드러내었다.

그는 1930년대에 메이천의 동료들이 미국의 북장로교회를 떠나 새 교단을 설립한 것을 언급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은 '이탈과 분리'가 그 후의 미국 근본주의 운동의 특징처럼 되어 버렸다. 투쟁하기보다는 자유주의화 해가고 있는 신학교들과 교회들로부터 이탈하여 그들의 신학교들과 교회들을 별도로 세우는 것이 그들의 대(對)자유주의 전략의 패턴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대자유주의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대교단들과 신학교들을 자유주의자들의 손에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위의 책, 22쪽).

그의 글에는 제리 팔웰의 근본주의 현상이라는 책을 참고하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제리 팔웰은 근본주의자로 자처하지만, 신복음주의 정신을 가지고 활동하는 자로 알려져 있다.

박아론 교수가 근본주의자들이 성경적 분리의 원리를 좇아 불가피하게 행한 분리를 무책임한 오류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특히 1936년 북장로교회의 작은 분열이 각 노회가 메이천과 그의 동료들을 면직시키고 총회가 그들의 상고를 기각했을 때 이루어졌음을 생각하면 분명히 그러하다. 또 다른 경우들에서도 자유주의자들 혹은 포용주의자들이 교권을 장악했을 때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분리가 이루어졌다면 그 분리는 무책임한 오류로 비난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경우들에 보수주의자들이 그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단들 안에 머물며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악에 대한 타협이며 주께 대한 불신실이다. 사실, 근본주의 운동은 대교단들이 자유주의화 혹은 포용주의화 되었을 때 분리의 운동으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저 배교적, 포용적 교단들이 더 이상 신앙적 용사들의 도전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침묵이 곧 타협임을 잘 보여준다. 배교에 대한 성경적 바른 태도는 '분리'이다.

박아론 교수는 또한 근본주의 운동에서 세대주의에 대해 포용적 태도를 가지는 입장을 가리켜 '신근본주의'라고 부르면서 미국에서 칼 매킨타이어 박사, 페이스 신학교, 성경 장로교회, 밥 죤스 대학교 등이 거기에 속한다고 말한다(위의 책, 28, 29쪽).

그러나 이것은 그가 근본주의 운동이 초교파적 운동이라는 사실을 잊은 데서 나온 발언이다. 물론 우리가 교파적 확신을 가지고 교리적 토론을 하고자 할 때 초교파적 운동은 우리에게 거리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배교가 현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파적 토론을 넘어서서 자유주의에 대처하는 공동 전선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근본주의의 초교파적 성격이 있다. 20세기 초 보수적 지도자이었던 제이 그레셤 메이천도 초교파적 협동이 완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기독교와 자유주의, 71-75쪽).

또한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를 비평하면서 다음의 몇 가지 점들을 열거하였다: (1) 분리주의적 사고의 심화(深化), (2) 신학 연구와 문화적 관심의 쇠퇴, (3) 주제 의식이 불분명한 인물 본위의 운동, (4) 독고적 근본주의자들로 둔갑.

첫째로, 그는 신근본주의가 분리주의적 사고를 심화시킨 운동이라고 비평하였다(박아론, 29, 30쪽). 그는 신근본주의 지도자 칼 매킨타이어가 부정당한 분리의 원인자라고 비난하면서, "분리하라는 경고는 불신에서 분리하라는 것뿐 아니고 신근본주의 환상에 동참치 않는 자들로부터 분리하라는 요구가 되었다"는 간하배 교수의 논평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또 그는 신복음주의자 칼 헨리가 근본주의의 한 특징이 '부정적 사고 방식'이라고 비난한 것을 "일리가 있다"고 긍정한다(위의 책, 30쪽).

그러나 이러한 논평은 정당하지 않다. 만일 어떤 근본주의 지도자들에게 부족이나 약점이 있어서 부정당한 분열의 부분적 원인이 되었다면 그것을 옹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열이 그 운동의 본질인가? 또 커버넌트 신학교의 분리가 순전히 칼 매킨타이어 박사의 잘못이며 커버넌트 신학교나 그 학교가 속했던 교단(처음엔 RPCES, 지금은 PCA)의 입장이 옳았다면 왜 오늘날 그 교단이 신복음주의적인 미국 복음주의 협의회(NAE)에 소속하여 있는가?

둘째로,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가 신학 연구와 문화적 관심에 있어서 쇠퇴하고 있다고 비평하였다(위의 책, 30, 31쪽). 그는 신근본주의가 "다섯 가지 교리만을 안고서 성경학교로 돌아가 그것만 되풀이 하면서 지나는 동안 오늘의 신학적 판도에서 보수 신학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학자를 기르지 못하고 말았다"고 비난한 김의환 박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위의 책, 31쪽).

그러나 이러한 논평도 정당하지 않다. 이것이 근본주의 혹은 신근본주의의 본질인가? 그들은 다섯 가지 교리만 안고서 성경학교에 돌아가 그것만 되풀이 하는 자들인가? 그런 악한 비난이 어디 있는가? 그의 부친인 고(故)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근본주의자들은 기독교 교리 체계를 축소하였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적당한 비난이니 금일의 시대론자들이라도 다섯 가지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전통적인 신조들도 여전히 믿는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된다"고 하였다(박형룡, 신복음주의 비평, 23쪽).

셋째로,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가 주제 의식이 불분명한 인물 본위의 운동이라고 비평하였다(위의 책, 33쪽). 그는 말하기를 "오늘날의 '신근본주의 운동'은 주제보다는 인물을 중시한 결과 신학적 노선보다는 밥 죤스나 칼 매킨타이어와 같은 특출한 인격에 그 닻을 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같은 쪽). 심지어 그는 말하기를, "이런 점에 유의할 때 에드워드 죤 카넬이 근본주의를 '고전적'(classic)인 것과 '종파적'(cultic)인 것으로 나누고 '신근본주의' 또는 '후기 근본주의' 운동을 후자에 해당시킨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의 보수적 신학자라는 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귀한 종들과 바른 운동에 대하여 이런 무지하고 무책임한 비난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날 근본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들이 밥 죤스나 칼 매킨타이어 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이다. 오늘날 미국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근본주의자들 가운데는 국제 기독교 협의회(ICCC) 외에도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와 세계 성경적 교회 협의회(WCBC)에 속한 수많은 지도자들이 있다. 북아일랜드의 자유 장로교회의 지도자 이안 페이슬리 박사나 한국에 종종 나오시는 O. 탤매쥐 스펜스 박사 등도 거기에 속한다.

더욱이 그가 근본주의에 대한 에드워드 카넬의 악한 비난에 동감을 표현했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놀라운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에드워드 카넬은 신복음주의 신학교인 풀러 신학교의 교수이었고 신복음주의의 대변자로 짧게 활약했다가 별세한 분이었다. 그가 후기의 근본주의를 '종파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분명히 따져 보아야 할 점이다. '종파적'(cultic)이라는 영어 표현은 이단 종파 혹은 사이비 종파라는 의미이다. 만일 근본주의가 그런 운동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그리고 단호히 거절하고 반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근본주의가 그런 운동이 아니라면, 카넬과 박아론 교수의 그런 비난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악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신학자들 혹은 교회 지도자들이 근본주의에 대하여 이런 류의 비난을 하는 것에 대답하여, 탤매쥐 스펜스 박사는 근본주의: 이단 종파가 아님(O. Talmadge Spence, Fundamentalism: Not a Cult)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인 우리는 '옹고집들'로부터 '웃기는 자들,' '생각 없는 자들,' '변두리의 미치광이들,' '이단종파자들'까지 온갖 명칭들로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단종파자가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그런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글을 읽을 수 없거나 읽기를 거절하는 자들, 혹은 들을 수 없거나 듣기를 거절하는 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이단종파자가 아니다!"(Spence, p. 22).

넷째로,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자들이 '독고적(hyper) 근본주의자들'로 둔갑했다고 비평하였다(박아론, 32-35쪽). 그가 어떤 뜻으로 '독고적'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분명치 않으나, 영어의 '하이퍼'라는 접두어는 '과도한, 지나친'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극단적 근본주의자'라는 말로 이해된다. 그의 이 표현은 제리 팔웰의 근본주의 현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의 마지막 문제점을 이렇게 표현해 놓고서는 그 구체적인 점들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독고적 근본주의자들'이 제리 팔웰에 대해 신복음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비평한 것에 "극단적이며 무리한 면이 없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점에서는 "공감이 간다"고 말했다(박아론, 34쪽). 박아론 교수의 입장은 분명치 않은 것 같다.

칼 매킨타이어 박사나 밥 죤스 박사의 무엇이 극단적이란 말인가? '신근본주의'의 무엇이 극단인가?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과 교회의 배교에 대항하여 성경적인 교제와 분리의 원리를 주장하는 것이 극단인가?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 극단인가? 오히려 사실을 정확히 검토하고 판단함이 없이 주의 귀한 종들을 비난하는 것이 편협함과 극단이 아닌가?

박아론 교수는 근본주의자로 자처하는 제리 팔웰이 해롤드 린젤이나 W. A. 크리스웰 등의 신복음주의자와 교제하는 '처신술'을 정당하다고 보든지, 아니면 다른 근본주의자들의 표현대로 제리 팔웰이 '근본주의자의 옷을 입었으나 신복음주의자의 목소리를 내는 자'라고 비평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O. 탤매쥐 스펜스 박사는 팔웰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팔웰은 그가 쓴 근본주의 현상이라는 책과 근본주의 저널에서 근본주의를 '폭넓은 복음주의적' 연합과 기초로 확대시키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의 '폭넓은' 기초는 분리와 전투성에 대한 거부이었고, 이전의 근본주의자들, 신복음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은사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무시해 버리는 타협이었다. 팔웰은 근본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려 했지만, 결코 그것을 완수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그의 조합을 통하여 신복음주의자들, 개조적 신근본주의자들, 남침례교인들, 풀러 신학교의 자유적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은사주의자들 등과의 어떤 친척 관계를 볼 것이다"(Spence, p. 26).

결론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문제는, 비록 20세기 초엽과 중엽에 미국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이었지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경험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보수적 교회들은 근본주의보다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어떤 신학적 탈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탈선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신학적 탈선들은 이미 자유주의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고(故) 박형룡 박사는 신복음주의를 '신자유주의 내지 신이단운동'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던 것이다(박형룡, 신복음주의 비평, 47쪽).

그러나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에 대한 바른 개념은 그러한 신학적 변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제의 문제에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문제이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평하거나 배격하지 않는다. 복음주의자는 자신의 교단이 고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할 때도 그 교단 안에 머물러 있으며 그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약하면,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성경에 밝히 계시되고 전통적으로 믿어온 진리들에 대한 확신이 없고,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싸우려는 마음이 약하며,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 교훈을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이런 태도는 분명히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어기는 일이요 주께 대한 불성실과 불순종이다. 그러므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현대 교회의 배교와 불신앙에 대해 타협하는 비성경적 입장에 불과하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잭 스티븐스는 오하이오 바이블 펠로우쉽 비지터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신복음주의자의 마음가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복음으로 세상을 접촉하는데 관심을 가지며 그것이 더 빠를수록 더 좋다고 본다. 또 그는 그것을 하기 위해 그 밖의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하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는 너무 지나치게 많은 것을 포기하며, 그가 진전시키려고 하는 바로 그것을 파괴한다. 그는 외적인 성공을 거두며 참으로 형통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매우 진실하며 자기가 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의 형제이다. 그러나 그는 매우 잘못되어 있다"(Calvary Contender, 1998년 3월 1일).

오늘날 우리 나라의 많은 보수 교회들은 이러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분별력 없는 많은 보수적 목사들은 화평과 일치와 사랑을 표방하면서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확신하고 지키려 하는 자들을 비난한다. 많은 목사들이, 비록 하나님의 다른 일들에 대해 열심이 있어 보이나, 교회의 교리적 순결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순결한 교회를 구원 계획의 목표로 삼으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잘못이다.

한편, 근본주의자들의 분리의 확신은 많은 목사들의 오해와 비난을 받아왔다. 자유주의적 편견에서 나온 비난은 놔두고라도, 분별력 없는 많은 복음주의 목사들조차도 근본주의의 분리의 확신을 비난하였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다른 일에 대해 열심이 있는 것 같으나, 교회의 순결성에 대해 무관심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순결한 교회를 구원 계획의 목표로 삼으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바른 입장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명백히 이단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기독교는 마땅히 자유주의 이단을 배격해야 하며, 자유주의자들을 제명 출교해야 한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신복음주의는 악에 대한 타협이며 주께 대한 불충성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 배교와 신복음주의적 타협으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는 성경적으로 바른 입장이다.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동이 점점 가득해지는 때에, 하나님의 뜻은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우리가 근본주의를 옹호하는 이유는 근본주의가 성경적으로 바른 입장이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근본주의를 잘못 알고 잘못 비난하기 때문이며, 근본주의라는 용어 외에 오늘날의 바른 입장을 나타낼 적절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에는 근본주의적 교회들이 필요하다. 근본주의적 장로교단이 필요하고, 근본주의적 초교파 협의체가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단체에근거하여 바른 기관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근본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장로교 신학교, 성경공회, 방송국, 선교 단체, 신문사, 출판사 등이 필요한 것이다.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신념을 가진 목사들, 평신도들, 교회들은 대동 단결하여 이 악한 배교와 타협의 시대에 작을지라도 바르고 순수한 하나님의 교회들을 건립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바르고 충성되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바른 확신과 분별력을 가진 종들은 뜻을 함께하여 새 일을 시작해야 한다.

http://www.oldfaith.net/03modern/07근본주의.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