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주의 신학이 무엇인가?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학의 변질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말한다. 다수의 현대 신학들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고 고백해온 하나님의 진리들을 버리고 표류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틀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자유주의 신학은 한마디로 이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역사적 대교단들의 신학교들은 이런 자유주의 신학 사상들을 포용하거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평적 변론의 필요성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논하는 까닭은 그것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이단적 사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단을 분별하고 배격하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만일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은 죽고 말 것이다. 신자의 신앙 사상이 부패하면, 그의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도 부패할 것이다. 교회가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면, 죄 씻음을 받고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감격이 없다면, 사람이 구태여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탄은 교회들로 하여금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지 않고 은근히 받아들이게 하고 또 목사들의 사상을 변질시켜 마침내 교회 전체를 변질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는 사탄의 이러한 교묘하고 치밀한 배교(背敎) 운동을 분별하고 물리쳐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 얼마나 이단적이며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인가를 잘 분별하고 비판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대처해야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근원과 성장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비평적 연구 방식에서 나왔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순종했었다. 그러나 중세가 무너지고 개인의 자유와 인간 이성의 권위를 발견한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도 비평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고등비평이라고 불리우는 잘못된 성경연구방식이다.
또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성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 철학자 칸트(Kant)의 사상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과학의 발달이나 다윈의 진화론 등의 사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의심과 불신앙의 눈으로 보게 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고 성장하였다.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의 차이
성경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은 무엇이 다른가? 성경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은 단지 지엽적 문제들에서가 아니라 본질적 문제들에서 서로 다르다. 자유주의 잡지인 크리스챤 센츄리 1924년 1월 3일자 사설은 전통적인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을 근본주의와 현대주의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본주의에 의한 기독교는 한 종교요, 현대주의에 의한 기독교는 다른 한 종교이다. . . . 근본주의자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요, 현대주의자의 하나님은 다른 한 하나님이다. 근본주의자의 그리스도는 한 그리스도요, 현대주의자의 그리스도는 다른 한 그리스도이다. 근본주의의 성경은 한 성경이요, 현대주의의 성경은 다른 한 성경이다. 교회, 하나님의 나라, 만물의 종말--이것들이 근본주의자에게와 현대주의자에게 의미하는 바가 각각 다르다.”1)
성경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성경적 기독교는 기독교를 바른 교리들에 근거한 생활과 경험이라고 이해하며 그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라고 보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를 교리들과 별개의 어떤 경험이나 생활로 보며 교리들은 시대마다 변할 수 있고 변해야 한다고 본다.
자유주의 신학은 교리를 경시함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교리를 경시하는 이런 태도는 자유주의 신학의 초기로부터 볼 수 있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쉴라이엘마허는 종교의 핵심이 이성적 증명과 토론이 아니고 감정이며 하나님은 한 경험, 한 살아있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릿츨도 종교는 이론적이어서는 안 되며 구원받는 것은 새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하르낙도 사람이 경험한 종교만 고백될 수 있고 다른 모든 신조나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견해에 의하면 위선적이고 파멸적이라고 주장하였다.2) 그는 예수님의 기적들을 부정하며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하지 않았다.3)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요 모든 사람이 서로 형제라는 데 있다고 한다.
쉴라이엘마허, 릿츨, 하르낙은 모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이었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기독교의 본질을 교리와 별개의 경험이나 생활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현대의 철학적, 과학적 도전 앞에 변경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교리는 변경될 수 있으며 단지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이기실 것이라는 신념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본다.4)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에 대한 과학적 반론을 염려하여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들을 버리고 종교의 일반적 원리들을 기독교의 본질로 삼으려 하였다.5)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를 중시함
그러나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를 중시한다. 우리는 기독교가 바른 교리들에 근거한 생활과 경험이라고 이해한다. ‘교리’는 진리를 말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교리는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또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그것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교리가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은 기독교의 기원을 살펴볼 때 분명하다. 처음 기독교 전파자들은 어떤 경험이나 생활 교훈을 전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전했고 이 사실들의 설명이 곧 교리이다. 사도 바울은 지혜의 말이나 기적을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전하였다(고전 1:22-23; 15:3-4).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속죄의 교리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교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또 교리가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은 바른 교리를 보수하고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 교훈들에서도 증거된다. 디모데후서 1:13, “너는 . . .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로마서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기독교 교리의 확실성과 불변성
더욱이,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이 사실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속성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며 거짓 증거를 미워하시고(출 20:16; 잠 6:16-19) 또 불변하시다(시 102:26-27).
또한 기독교 교리들의 확실성과 불변성은 기독교 복음의 성격에 의해서도 확증된다.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에 기초하였고 그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 내용은 확실하고 불변적일 수밖에 없다. 또 기독교 복음은 많은 기적들과 목격자들의 증언들에 의해 확증되었다(행 2:22; 요 21:24). 기적은 어떤 진리를 확증하는 표가 되기 때문에 ‘표적’(sign)이라고 불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이 보고 전한 바를 순교의 피로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용인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성경은 복음 진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1:8-9,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기독교 복음은 명확하고 고정된 내용이며 아무도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교회의 의무는 단지 성경에 밝히 계시된 그 내용을 바르게 파악하고 후시대에 전하는 것뿐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본질
그러면, 자유주의 신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자유주의 신학은 결국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는 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들을 인정치 않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을 인정치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에 계시되고 증거된 모든 교리들을 인정치 않는다. 한마디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인간이 쓴 오류투성이의 책, 신화적인 책으로 보는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 중 비교적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칼 바르트도 아담의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는 거짓이라고 단언하였고6) 또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라고 담대히 말하였다.7) 또 그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단언하였다.8)
C. H. 다드는 성경의 외적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으며9) 하나님의 계시 진리는 객관적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했고10) 심지어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라고까지 말하였다.11)
성경 자체의 증언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성경 자체의 증언들과 정반대이다.
시편 19:7-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본문은 성경 말씀의 완전하고 확실함을 증거한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혹은 확실하게 믿어진 일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certainty)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성경은 확실하게 이루어진 내용들이며 목격자들의 증언이며 우리의 믿음의 확실한 근거이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sign)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1:24, “이 일[요한복음의 내용들]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은밀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히브리서 2:3-4,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과 하나님께서 주신 초자연적 기적들로 확증되었다.
마태복음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께서는 친히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글자의) 영감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 예수께서는 친히 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선언하셨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감동으로’라는 원어는 ‘하나님께서 숨을 내쉼으로’라는 뜻이다. 이 말은 성경의 영감뿐 아니라, 성경의 신적 기원과 권위도 증거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전해 들은 바]을 지키라.” 이 말씀은 사도들의 권위, 즉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요한계시록 22:18-19,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주께서는 신약 계시를 가감할 수 없는 신적 권위로 인치셨다.
성경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준인 신적 권위의 말씀이라는 것은 모든 개신교회들,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와 영국교회가 공통적으로 믿는 기본적 신념이다. 심지어 로마 천주교회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바른 성경관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고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가 포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은 사상이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않았던 사두개파적 불신앙과 같다(마 22:29). 그것은 한마디로 이단이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하고 이단을 배격해야 한다.
2. 배교의 시대
자유주의 신학은 20세기 초만 해도 작은 세력이었으나 20세기 말에는 큰 세력이 되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단지 몇몇 신학자의 문제가 아니고 대교단들의 목사들 다수의 문제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일찍이 배교적이었고 미국의 교회들도 1920년대 이후 점점 포용적이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며, 성경 말씀을 믿고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적 교회들은 수적으로 소수인 것 같다.
100년 전에 주로 미국 교회의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들의 영향을 받아 왔고 지금도 받고 있지만, 특히 미국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면 자유주의 신학은 오늘날 미국 교회들과 한국 교회들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신학자들
자유주의 신학은 유명한 신학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외의 여러 신학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1985년, 미국에서 약 125명의 개신교와 천주교 신학자들이 ‘예수 세미나’를 시작하였다. 1994년 초까지 이 세미나의 대략적 결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1) 예수의 말들의 20%만 실제로 그의 말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 그에게 돌려진다. (2) 예수는 자신을 메시야라고 공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3)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고 느꼈지만,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4) 예수는 결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5) 예수는 자신의 재림(再臨)을 약속하지 않았다.12)
1999년, 예수 세미나의 주도적 인물인 로버트 펑크는 미국의 한 연합그리스도교회의 강연에서 ‘예수 세미나’의 결론인 21개의 명제들을 배부하였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물질 세계 바깥에는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 (2) 다윈의 사상은 창조의 교리를 영원히 말살시켰다. (3) 신적인 기적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완전에 대한 모욕이다. (4) 저 밖에 있는 신에게 말해지는 기도는 무의미하다. 기도는 명상이다. (5) 예수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6) 예수를 구속자(救贖者)라고 하는 것은 낡아빠진 생각이다. (7) 예수가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현대 지성에 대한 모독이며 여성에 대한 모욕이다. (8) 속죄의 교리는 이성적이지 못하고(subrational) 또한 윤리적이지 못하다(sub-ethical). (9)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 (10) 모든 계시적 요소들은 기독교 주제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11) 예수 자신은 기독교 신앙의 적절한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비전이 그를 대치해야 한다. (12) 성경은 객관적 행동기준을 담고 있지 않다.13) 이러한 예수 세미나의 결론들은 지극히 배교적이며 이단적이다.
우리나라의 목원대 은퇴교수인 송기득(조직신학) 교수는 기독교 사상 2001년 1월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 교리들, 즉 성육신(成肉身)과 신인양성(神人兩性)과 대속의 진리들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고 심지어 부정할 수 있는 주제로 보았다. 또 그는 한신대 대학원장이었던 안병무 박사가 위의 교리들을 명백히 부정하였고 예수를 민중해방운동을 펼치다가 실패한 사람이며 단지 그가 민중해방운동의 길을 열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고 말했다.14)
신학생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은 신학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또한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76년, 노엘 홀리필드(Noel Hollyfield)는 미국 남침례교 신학교 신학석사 논문에서 남침례교 신학생들의 신앙 상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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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iv. 1학년 |
M.Div. 3학년 |
Th.M. &Ph.D. |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없이 믿는다. |
74% |
65% |
63% |
마귀의 존재는 확실하다. |
66% |
42% |
37% |
기적들이 성경의 증거대로 실제로 일어났음을 믿는다. |
61% |
40% |
37% |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확실하다. |
66% |
33% |
32% |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셨음은 확실하다. |
59% |
44% |
22% |
예수께서 신적인 하나님 아들이심을 의심치 않는다. |
87% |
63% |
63% |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다. |
85% |
60% |
59% |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믿는 것은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다. |
42% |
33% |
21% |
죽음 너머의 삶이 있음은 확실하다. |
89% |
67% |
53% |
예수께서 어느 날 실제로 지구로 돌아오실 것을 확신한다. |
79% |
56% |
53% |
이 설문조사는 비교적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남침례교회의 학생들에게까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이 미쳤음을 보인다.
헬라정교회 대주교 드미트리 로이스터는 연합감리교 소속 퍼킨즈 신학교에서 헬라어를 가르칠 때의 일을 회고하며 말하기를, “나는 학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믿는지 물었다. 내가 말뜻을 정의하여 예수께서 단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선생이 아니고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임을 분명히 하자, 그 반의 학생들 중 한 명도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려 하였다”고 했다.16)
교회 지도자들
자유주의 신학은 또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몇몇 인물들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 감독교회(Episcopal Church)에 소속한 죤 스퐁(John Spong) 감독은 인격적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며 기도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하였다.17) 1999년 4월 26일자 뉴 아메리칸지에 의하면, 그의 판단에, 기독교가 생존하려면 기독교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성육신(成肉身), 처녀 탄생, 부활, 승천, 및 기적들과 같은 교리들을 치워버려야 한다. 또 스퐁은 “나는 자기 아들의 희생을 요구한 신을 숭배하기보다 증오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라고 말했고18) 모든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단언했다.19) 그는 6백명 이상의 감리교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경에서 읽는 모든 내용을 다 믿지 말라고 강조했다.20) 감독교회에서 감독은 목사보다 높은 고위 성직자인데, 미국 감독교회의 감독인 자의 사상이 이렇게 자유주의인 것이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대한감리회에 속한 박대선 감독은 1974년 6월 14일 고(故) 홍종철 특별보좌관 장례식 설교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에녹이나 엘리야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육신으로 죽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고, 성경이 그들을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표현한 것은 그들의 이미지가 그들의 제자들과 가족들에게 생생하게 심어졌다는 뜻이라고 하였다.21) 이것은 성경의 증언에 대한 불신앙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조향록 목사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사건 자체를 사건적으로 입증하든지 부정하든지 하는 논란은 큰 의미를 거두지 못한다,” “그리스도 부활 사건은 신앙의 창문을 열고야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고22) 이화여대 신약학 교수 허혁 교수는 “저는 성서에 부활의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부활의 보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 . . 이것을 학자들은 신앙의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 . . 그것은 신앙을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지요. . . . 저는 내가 믿는다는 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느냐 하는 생각입니다”라고 말하였다.23)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하다. 부활 사건을 말하지 않고 단지 부활 신앙만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다.
역사적 대교단들
자유주의 신학은 미국의 역사적 대교단들 속에서도 볼 수 있다. 미국의 장로교회의 배교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1923년 12월 26일, 미 북장로교회에 속한 150명의 목사들이 뉴욕주 어번시에 모여 한 문서를 발표하였다. 후에 어번 선언서(Auburn Affirmation)라고 불리운 이 문서는 곧 1,293명의 목사들의 서명을 받았다. 그 내용은, 총회가 1910년에 선언하고 1916년, 1923년에 재확인한 내용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총회가 1910년에 선언한 내용이란,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그의 대속(代贖), 그의 육체적 부활, 그의 기적들의 사실성 등의 다섯 가지 교리가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어번 선언서는 이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이론들일 뿐’이라고 말하였고, 특히 성경 무오의 교리는 성경 숭배에 빠지기 쉬운 교리라고 하였다. 이 어번 선언서는 1924년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1967년, 미 연합장로교회(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가 됨)는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는데, 그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유일 충족한 계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다. . . .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으로 수락되고 순종된다. . . . 성경은 성령의 인도 아래서 주어진 것이지만 역시 사람들의 말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장소와 시대의 언어, 사상 형식, 문학 형태들의 지배를 받는다. 성경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을 반영한다”고 진술하였다(1. 3. 2).24) 그것은 성경의 초시간적 진리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사상이다.
미 연합장로교회는 목사의 임직 서약도 변경하였다. 변경된 임직서약에서는, 성경이 더 이상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선언되지 않고,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 지도 아래 행한다고 선언된다. 1965년 5월 17일자 자유주의 잡지 크리스챠니티 앤드 크라이시스(Christianity and Crisis)는 말하기를, “새 신앙고백서는 1924년 어번 선언서의 교리적 노선으로 내려간다. 40년 전에 겨우 허용되었던 소수파 견해가 이제는 교회의 공식적 교리로 제안되고 있다”고 하였다.25)
1981년, 미 연합장로교회 총회재판국은, 그 총회 내에서 사역하던 연합그리스도교회 소속 맨스필드 케이스맨(Mansfield M. Kaseman)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무죄성(無罪性), 대리적 속죄, 육체 부활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지노회가 케이스맨의 견해를 새 임직 서약에 의해 허용된 ‘용납할 만한 해석의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함에 있어서 옳았다고 판결하였다.26) 미 연합장로교회는 이단을 제거할 뜻이 없음을 명백히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배교가 아니고 무엇인가?
미 연합감리교회(UMC)는 일찍부터 자유주의적이었다. 그 교단의 자유주의적 문제점들은 수없이 많이 열거될 수 있겠지만, 최근의 한 예를 보자. 미국 시카고의 연합감리교회 감독 스프라그(C. Joseph Sprague)는 2002년 덴버 신학교 강연에서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신화는 역사적 사실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의 물질적 몸의 회생을 내포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함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에게 그의 견해를 취소하든지 그의 직책을 사임하라고 요청하는 그 교단 내의 28명의 보수주의자들의 고소를 다룬 위원회는 그 고소가 잘못이며 그는 이단이 아니라고 판결하였다.27) 그것은 그 교단이 배교적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영국의 런던 주말 텔레비젼의 ‘크리도우(Credo)’ 프로그램은 1984년 영국교회 39명의 주교들 중 31명에게 질문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1)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으로 간주해야 한다(11명),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하나님의 최고 대리자로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19명). (2) 신약성경의 기적들은 후대의 삽입이다(15명). (3) 예수의 부활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그들 가운데 살아계시다”고 확신시켰던 그의 죽음 후의 ‘일련의 경험들’이다(9명).28) 이것은 영국교회의 배교적 상황을 보인다.
캐나다 연합교회(UCC)는 일찍부터 자유주의적이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 사상은 캐나다 연합교회가 파송한 서고도(William Scott) 선교사 같은 이의 영향이 컸다.29) 그러나 최근의 한 예를 보자. 캐나다 연합교회의 총회장 빌 핍스 목사는 1997년 10월 24일자 오타와 시티즌지와의 대담에서 “나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셨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과학적 사실로 믿지 않는다”라고 하였다.30)
우리나라의 감신대학의 학장이었던 변선환과 조직신학 교수이었던 홍정수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단의 좌경된 모습의 생생한 증거이다. 변선환은 기독교의 유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길 되심을 부정했다. 그는 기독교 사상에 기고한 글에서 “그리스도만이 보편적으로 유일한 구속자이신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저들의 종교[타종교들]도 그들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299호, 155쪽). 또 그는 “그리스도는 힌두교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같은 책, 156쪽). 그는 크리스챤 신문 1990년 12월 8일자에 기고한 글에서도 “기독교 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인 토리미의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의 우주는 기독교도 다른 종교도 아니고 신을 중심하여서 돌고 있다는 것을 기독교는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예수를 절대화, 우상화시키며, 다른 종교적 인물을 능가하는 일종의 제의의 인물로 보려는 기독교 도그마에서 벗어나 . . . 신 중심주의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31) 그러나 이런 사상은 명백히 종교다원주의의 이단이다.
홍정수는 첫째로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는 “만일 신은 계신가 하고 누가 묻는다면 ‘신은 없다’고 잘라 말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베짜는 하나님, 52, 56쪽). 둘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 죽음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한 정기 간행물에 기고한 글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신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또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속량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우리를 속량하는 것이다”라고 했다(한 몸, 7권, 16, 17쪽). 또 그는 그의 저서에서도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특정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던 한 설교자의 죽음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베짜는 하나님, 190쪽). 셋째로,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그는 크리스챤 신문 1991년 3월 30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부활 신앙은 이교도들의 어리석은 욕망에 불과하다”고 하였고, 같은 신문 6월 8일자의 글에서는 “[예수의 부활 사건은] 빈 무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한 잡지에서 “나는 단연코 육체의 부활을 부정한다”고 말했다(우먼 센스, 1991. 12월호).
1992년 5월 7일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 연회 재판위원회는 이들에게 출교를 선고했지만, 어떻게 이런 신학자들이 감신대학의 학장이 되고 조직신학 교수가 될 수 있었단 말인가. 또 이런 자들에 대해 감신대학의 교수들 중에는 비평하는 자들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의 감리교회는 신학적으로 너무 넓어졌고 변질되었다고 보인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는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 되어 있다. 그 교단의 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이 신정통주의적인 입장을 취해왔다는 것은 한국교계에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신정통주의’란 칼 바르트, C. H. 다드, 라인홀드 니이버 등의 사상에서 보듯이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 파이다. 장로회신학대학은 오래 전부터 성경의 무오성(無誤性)과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성을 부정하고 이사야 40장 이하를 이사야가 아닌 후대의 어떤 익명의 저자가 썼다는 사상을 용납한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통합측 신학교의 분위기는 합동측 신학교와 다르다고 알려져 왔다.
예장합동측 기관지 기독신보의 주필이었던 채기은 목사는 “필자가 진단하기에는 . . . 통합측은 반반으로 나뉘어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기장측은 절대 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고 증거하였다.32) 1984년 이동렬은 “한국교회와 신정통주의”라는 장로회신학대학 석사학위 논문의 결론에서 말하기를, “우리 입장은 신정통주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표류 중이다”라고 했다.33) 1994년 통합측 총회는 701대 612로 여성안수안을 통과시켰다. 그 총회는 사도적 교훈을 부정하고 성경이 명백히 금하는 여자 목사를 세우는 오류를 택한 것이다. 장로회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김명용은 1997년에 쓴 열린 신학 바른 교회론이라는 그의 책에서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옛시대의 신앙 사상이라고 말하며 오늘날의 개혁신학은 바르트와 브룬너와 라인홀드 니이버 등의 차원높은 신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4)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은 자유주의적이다. 물론 그 교단에도 성경을 믿는 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단의 목사 양성원인 장로회신학대학이 자유주의적이며 그 교단의 지도자들의 다수가 자유주의적이라면, 그 교단은 자유주의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장통합측은 건전한 교단이 아니다.
전반적 상황
미국 교회의 전반적 상황을 증거하는 두 가지 자료가 있다. 첫째는 제프리 해든(Jeffrey Hadden)의 설문조사이다. 1967년, 제프리 해든은 미국의 성직자 10,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고 거기에 응답한 7,441명의 응답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35)
(1) ‘귀하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감리교회(UMC) 성직자들의 60%는 ‘아니오’라고 대답하였고, 감독교회(ECA) 성직자들의 44%, 연합장로교회(UPC) 성직자들의 49%, 침례교회(ABC) 성직자들의 34%도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2) ‘귀하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51%는 ‘아니오’라고 대답하였고,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30%,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35%,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33%도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3) ‘귀하는 오늘 세계에 악한 귀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62%는 ‘아니오’라고 대답하였고,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37%,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47%,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33%도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4) ‘귀하는 성경이 신앙과 역사와 세속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無誤)한 말씀임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87%는 ‘아니오’라고 대답했고,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95%,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82%,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67%, 미국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77%도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둘째는 바나 연구회(Barna Research Group)의 설문조사이다. 바나 연구회는 2004년 미국 개신교회 목사들의 49%가 다음과 같은 성경의 핵심적 신념들을 거부한다고 보고했다: (1) 성경에 기초한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가 있다, (2) 성경의 교훈은 정확하다, (3) 예수는 죄가 없으셨다, (4) 사탄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들을 믿는 목사들의 비율은 감리교회가 27%로 가장 낮았고 남침례교회가 71%로 가장 높았다.36) 이 설문조사들은 미국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의 큰 영향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이것이 배교(背敎)가 아니고 무엇인가?
주께서는 말세에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하셨다(마 24:11, 24). 바울은 주의 재림 직전에 먼저 배교, 즉 신앙의 변절이 있을 것을 예언했다(살후 2:3). 특히 신학자들과 목사들과 역사적 대교단들의 배교는 참으로 심각한 일이다. 자유주의는 누룩같이 온 교회에 많이 퍼졌다. 이 누룩은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말세에 배교가 있으리라는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고 있고 또 다 성취될 것이다.
단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깨어 현대교회의 배교를 직시하고 책망하고 구별하고 분리하여 참 교회들을 세우고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 주의 참된 종들은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 풍조를 분별하고 옛 길, 바른 길을 붙들고 성경의 모든 말씀에만 순종하고 진실한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할 것이다.
3.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1)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왜냐하면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성경의 핵심적 교리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대표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책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처녀 탄생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즉 ‘말씀이 육신이 되셨음’을 부정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그의 책에서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 . .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고 말했다.37) 또 폴 틸리히는 조직신학이라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라고 했다.38)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함은 바로 그를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적 사상이다. 요한일서 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이서 7, “이는 미혹하는[속이는] 자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음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라. 이것이 미혹하는[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 진리와 밀접한 또하나의 진리는 처녀 탄생의 진리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그의 모친이 젊은 부인으로 불리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39)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라고 말했고,40) 자아(自我)와 역사의 드라마라는 다른 책에서도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이다”라고 말했다.41)
그러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복음서에 밝히 증거된 내용이다. 마태복음은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으며, 남편 요셉이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으며, 요셉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고 증거했다(마 1:18, 20, 25). 누가복음은 처녀 마리아가 아들을 잉태하여 낳으리라고 전언(傳言)한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반문했고 천사는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말했다고 증거했다(눅 1:34-35).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믿음의 시금석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자는 처녀 탄생을 믿을 수 있다. 또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그의 신성(神性)과 연관되어 있다. 누가복음 1:35,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부활이나 천사나 영을 믿지 않던 사두개인들의 사상이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2:29).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또한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나 기적을 의심하는 성경의 비평적 연구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루돌프 불트만은 요한복음이라는 책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고 말했다.42) 폴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그리스도의 행적 전반에 대해 말하기를,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굴복시키고 본질적인 부분들뿐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굴복시킨다”고 했다.43)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신약신학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또 우리는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 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 주변 환경에서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에서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고 했다.44)
그러나 예수님의 기적들은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게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또 제자들은 주께서 행하신 기적들의 목격자들이요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말했다(행 10:39).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진실한 증인들에 의해 증거된 내용들이다(요 20:30-31; 21:2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라고 하신 말씀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합당하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부정한다
또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부정한다. C. H. 다드는 로마서라는 책에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가라앉힘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라고 말했다.45)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고 말했다.46) 루돌프 불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神話)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救贖)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영지주의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4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대속(代贖)하기 위한 죽음이었다. 속죄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성경적 속죄 개념은 속죄제물이 택함받은 자들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힌다는 것이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로마서 3:24-25,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 유화제물)로 세우셨으니.” 고린도후서 5:14, 21,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10, 12,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에게서 유전된 망령된 행실로부터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5:9,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고 말했다.48) 또 그는 로마서라는 책에서,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어떤 일(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이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은 아니다”라고 말했다.49) 또 그는 교회교의학에서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부활의 역사는 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 신화(saga)나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50)
루돌프 불트만은 그의 신약신학에서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한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이다”라고 말했고,51) 또 다른 토론에서 말하기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은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라고 했다.52)
폴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말하기를,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 “역사 연구는, 그것의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고 했다.53)
판넨베르크는 예수: 신인(神人)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을 바울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인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고 했다.54)
그러나 이런 사상은 신약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부정하는 이단이다. 사복음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충분하게 증거한다.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기록한다(행 1:3).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썼고(롬 1:4),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썼다(롬 10:9). 또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며(고전 15:3-4) 장차 죽은 자들의 부활의 근거임을 강조하였다(고전 15:12-13, 16, 19).
덧붙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승천과 재림과 관련된다. 만일 우리가 그의 부활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의 승천이나 재림도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매우 기본적 신앙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구원을 받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곧 그의 신성(神性)과, 처녀 탄생을 부정하고 그의 기적들을 부정하고 그의 속죄 사역을 부정하고 그의 육체적 부활을 부정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지라도 그것은 성경에 증거된 역사적 예수가 아니고 다른 예수에 불과하다(고후 11:4).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확실히 이단이다.
4.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2)
자유주의 신학은 이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핵심적 교리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표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책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장에서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곧 신성(神性)과 처녀 탄생을 부정하고 그의 기적들을 부정하고 그의 속죄 사역을 부정하고 그의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는 것을 보았다.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지라도 그 예수는 성경에 증거된 역사적 예수가 아니고 다른 예수에 불과하다(고후 11:4).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확실히 이단이다.
이제 우리는 추가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핵심적 진리들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몇 가지 더 살펴보자.
사람의 영혼 불멸을 부정한다
또 자유주의 신학은 사람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성경에 전제된 기본적 진리를 부정한다. 예를 들어,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영혼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 사상의 유산에 불과하다”고 했다.55) 폴 틸리히도 그의 조직신학에서 말하기를,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수는 있어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라고 했다.56) 또 오스카 쿨만도 영혼 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했다.57)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을 밝히 증거한다. 영혼 불멸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사람의 죽음에 대한 묘사이다. 성경은 사람의 죽음을 영혼이 몸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으로 묘사한다(전 3:20-21; 12:7). 또 성경은 죽은 자의 영혼을 “조상들에게로 돌아갔다”고 묘사한다(창 15:15; 25:8). 이것은 죽음 후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증거한다.
둘째, 사람의 죽은 후 상태에 관한 말씀이다. 시편 73:24은 성도가 죽은 후 영광 중에 영접되리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회개한 강도가 죽은 후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다(눅 23:43). 특히, 누가복음 16:19-31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이 문제에 대해 잘 증거한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는데 그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22-23절).
셋째, 부활에 관한 말씀이다. 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다(행 24:15). 죽은 자의 부활은 사람의 영혼의 불멸을 전제한다.
넷째, 심판에 관한 말씀이다. 악인에 대한 심판은 영혼의 불멸을 전제한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영혼 불멸은 성경적 진리이다.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부정한다
또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라고 했다.58)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기독교 교리 중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고 했다.59) 폴 틸리히도 그의 조직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하나의 상징으로 보았다.60) 상징은 신화와 비슷한 개념이며 역사적 사건과 구별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의 근본적 교리이다. 주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의 재림에 대해 밝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명백히 증거하였고, 특히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서 그는 매 장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언급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데살로니가후서 1:7-8,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불의 형벌을 주시리니"(원문).
사도 베드로는 말세에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이 나타날 것을 경고하였다. 베드로후서 3:3-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사도 요한은 주 예수의 재림과 그 전에 있을 사건들을 예언한 책을 저술하였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또 그는 자신의 재림을 증거하신 주 예수의 말씀에 진실히 화답하는 말로 그 책을 마쳤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도신경에 고백된 대로 모든 정통적 기독교회가 고백하는 성경적 진리요 복된 소망이다. 디도서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는 것은 명백히 이단이다.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한다
또 자유주의 신학은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넘어서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몸의 부활이라는 개념은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고 했다.61) 판넨베르크는 사도신경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이런 식으로 죽은 자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함은 우리가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라고 했다.62)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은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진리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의인들은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며 악인들은 부활하여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분명히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는 또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고 책망하셨다(마 22:29).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의 부활을 믿었다.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죽은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논증하였다. 고린도전서 15:12-13, 51-5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마지막 심판과 지옥을 부정한다
또 자유주의 신학은 마지막 심판과 지옥을 부정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인간의 본질과 운명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현대 기독교 안에 있는 감상적인 도덕 의식이 아마 심판 개념의 중요성을 일소했을 것이다”라고 했다.63) 폴 틸리히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말하기를,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말은 신학 용어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으로부터 결코 잘리워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64)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라고 했다.65)
그러나 마지막 심판의 진리는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성경은 마지막 심판에 대해 밝히 증거한다. 주께서는 마지막 심판에 대해 밝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13:39-40,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해설하면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증거하였다. 로마서 2:5-6, 16,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또 히브리서 저자는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이 그리스도의 도(道)의 초보에 속하며 그런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고 교훈하였다(히 6:1-3).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0:11-15에서 마지막 대심판에 대해 증거하였다.
또 지옥 교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진리이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특히 마가복음 9:43-48에는 주께서 지옥에 대해 증거하신 내용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43절). 그 외에도 그는 마태복음 25:41, 46에서 ‘영영한 불’ ‘영벌’에 대해 증거하셨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1:9에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에 대해 증거하였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1:8에서 악인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할 것을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마지막 심판과 지옥에 대한 진리는 두려운 진리이지만, 분명히 성경적 진리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인쳐진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주께서 말씀하신 이 진리들을 부정하거나 변경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진리를 부정하거나 변경하는 것은 분명히 이단이다.
결론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처녀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속죄 사역, 그의 부활, 사람의 영혼의 불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부활, 마지막 심판과 지옥 등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들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확실히 이단이다.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들을 부정하는 사상은 확실히 이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임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 사상을 용납하지 말고 단호히 배격해야 하고,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과 교제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분별해야 하고 성경의 교훈대로 교제를 조심해야 한다.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10-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5. 잘못된 연합운동
역사와 세력
오늘날 교회의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연합운동이다. 교회연합운동은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들을 재연합시키려는 운동이다.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의 세계선교대회는 교회연합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25년 사회정치문제에 대한 기독교 원리의 적용에 관심을 가지고 세계적으로 시작된 생활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과, 1927년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역시 세계적으로 시작된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운동은 연합하여 1948년 WCC(WCC)를 조직하였다. 이와 같이, WCC는 선교, 사회 문제, 교회의 일체성 등의 관심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이 단체는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의 주요 결실인 동시에 주요 수단이다.
교회연합운동의 세력은 매우 크다. 2003년 현재, WCC는 세계의 약 342개 교단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구세군 등도 WCC의 회원이다.
한 세계교회를 지향함
교회연합운동은 하나의 세계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1954년 WCC 에반스톤 총회는 “우리의 의도는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1961년 뉴델리 총회는 “교회의 유형적 일체는 완전히 묶인 하나의 교제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1975년 나이로비 총회는 “우리는 한 세계적 공동체를 갈망하며 그것을 위해 싸운다”고 말했고, 1983년 뱅쿠버 총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한 거룩한, 세계적, 사도적 교회의 유형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런 진술들은 하나의 세계교회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뜻임을 보인다.
1993년 5월, 한국장로교협의회는 예장통합, 기장, 예장대신, 예장개혁, 예장고신 등 다섯 개 교단의 이름으로 교회 일치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 선언문은 한국교회의 분열이 신학적 정당성을 갖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항목들에 있어서 결코 분열될 만큼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남은 문제는 우선 협의회를 통하여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지향해야 하고, 결국은 하나의 한국 장로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66)
신학적 포용주의
비록 WCC 헌법이, “WCC가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의 공동적 부르심을 함께 성취하기를 추구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라고 진술하지만, WCC나 교회연합운동의 근본적 문제점은 교회 안의 다양한 신학들을 비평 없이 포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의 입장에 있다. 현대교회의 신학적 문제는 앞에서 말한 대로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이며, 또 다음 장에서 논할 천주교회의 문제이다.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WCC와 그 지도자들이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하는 데서 드러난다. WCC의 전 총무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말하기를, WCC의 공식적 신학이란 것이 없으며 또 결코 있을 수도 없고 우리는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67) 2000년 2월, 우리나라의 제1회 에큐메니칼 포럼에서 WCC 중앙위원인 박종화 목사는, 교회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는 부류와 교회의 사회참여적 역할을 강조하는 부류는 한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이 둘을 포함하는 통합적 에큐메니즘이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68)
교회연합운동은 그러므로 서로를 인정하고 성찬 교제를 나누기를 제안한다.69) 1993년 12월, 한국장로교협의회는 1994년 사업 계획으로 강단 교류, 연합 예배 등을 결의하였다.70) 교회연합운동가들은 심지어 교회의 일체성을 위해 교리를 포용적이게 작성하기를 제안한다.71) 이것이 신학적 포용주의이다.
기구적 연합
교회연합운동은 1948년에 WCC(WCC)라는 세계적 협의체를 구성하였고 각 나라의 교회협의회(NCC)들과 지역적 협의체들을 가지고 있다. 또 미국에는 9개 교단들의 교회연합협의회(CUC = Churches Uniting in Christ)가 있다.
우리나라의 개신교회 17개 교단의 대표들은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를 만들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협의회가 제안한 ‘한국교회의 통일된 연합체 구성 추진’ 헌의안은 거의 모든 교단들에서 통과되었다. 교단장협의회 소속 23개 교단 중 2002년 10월 2일까지 예장합동, 예장통합, 기장, 기성, 예성 등 16개 교단들이 총회 결의로 그것을 채택했다.72)
복음주의자들의 적극적 참여
또한,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은 교회연합운동에 적극적이다. 1983년 WCC 제6차 총회에서 “뱅쿠버의 복음주의자들”dl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복음주의자들의 다수파 선언문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들이 복음의 핵심을 믿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명백히 받으신’자들이므로, 복음주의자들이 그들로부터 물러나지 말고 그들을 기쁘게 영접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우리의 결심을 공적으로 선언할 압박을 느꼈다”고 결론을 내렸다.73)
WCC도 근래 복음주의자들에게 호의적 손짓을 보이고 있다. 1998년 12월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열린 WCC 제8차 총회는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죠지 반더벨드를 주요 연사로 세웠다.74) 또 최근 미국교회협의회(NCC)는 새 조직체의 시작을 탐구하기 위해 천주교인들과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만나고 있다.75)
바른 교리는 기독교에 본질적임
그러나 교회연합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인 신학의 중심적 내용은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신학들을 포용하는 것은 교회가 스스로 모순을 범하는 명백한 잘못이다.
교회의 일체성은 교리적 성격을 가짐
또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은 교리적 성격을 가진다. 성경은 교회의 일체성이 영적, 교리적, 유형적임을 말한다. 교회는 영적으로 이미 하나이며 그 일체성은 결코 파괴될 수 없다. 또 교회는 가능한 한 유형적으로도 일체성을 표현하고 유지하기를 힘써야 한다(고전 1장, 엡 4장). 그러나 오늘날 보다 중요한 점은 교회의 일체성이 교리적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바른 진리 안에서 하나이어야 한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21),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교회연합운동이 성경적이라고 말하지만, 요한복음 17장과 에베소서 4장에 계시된 교회의 하나됨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의 일체성,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의 하나됨이며(요 17:9; 엡 1:3-14), 또 하나님과 그의 진리 안에서의 하나됨이다(요 17:11, 21). 그러므로 워필드는 말하기를, “신약의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에 기초했다. 그리스도 안의 하나됨은 그리스도 안의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고 했고,76) 마틴 로이드-죤스도, “진리와 교리를 떠난 하나됨은 없다”고 말했다.77)
교회는 바른 교리를 보수해야 함
더욱이, 교회는 복음 진리를 보수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3,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교회가 받은 사도적 교훈들은 개신교회들이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근본 교리들을 포함하며, 그 교리들은 만국 교회의 일체성의 기초이다.78) 그러므로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존하지 않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교회는 이단을 배격해야 함
또한 교회는 이단들을 배격할 의무도 가지고 있다. 로마서 16:17, “너희의 [배운]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유다서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익히 알려진 이단 종파들 외에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중요한 이단이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초자연적 사실들과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 그의 형벌적 대속(代贖), 그의 육체적 부활, 그의 재림 등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교회 역사상 어느 이단 종파보다도, 심지어 천주교회보다도 성경으로부터 크게 탈선한 이단이다.79)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지 않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이단을 포용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그것은 명백히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다.
여기에 교회연합운동의 문제의 핵심이 있다. 건전한 교리와 정치원리에 입각한 연합운동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불필요한 분열을 극소화하고 필요한 연합을 극대화하는 연합운동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 가장 중요한 두 이단은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이다. 그런데 교회연합운동은 기독교계 안의 배교적 요소인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배제하지 않고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잘못인 것이다. 교회의 배교와 혼란의 상황 속에서, 교리적 순결성을 무시한 연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교회 일치라는 명분이 이단을 포용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하였다(고후 6:14-16). 칼빈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거짓이 종교의 성채 속에 침입해 들어오자마자, 요긴한 교리의 요점이 뒤집어지자마자, 교회의 죽음이 초래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 .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다면 . . . 그 교리가 파괴될 때 교회가 어떻게 계속 존속할 수 있겠는가?”80)
초교파적 교회는 바람직한가?
덧붙여서, 교파적 확신의 차이를 무시하는 초교파적 연합 교회가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야 한다.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 세례의 대상과 방식, 목사의 성격, 교회의 운영방식,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와 방식, 천년왕국과 휴거 등의 교리에 대해 심각한 견해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비록 교회 연합의 과정에서 이단적 요소를 배제한다 할지라도, 또 지리적, 언어적 간격으로 인한 불편은 놔두고라도, 이러한 교리적 견해의 차이를 무시한 연합 교회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물론, 교리적 견해 차이는 주로 진리에 대한 무지나 오해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교파들 간의 차이점들을 고려할 때, 초교파적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진리에 대한 충실한 고백이나 증거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어떤 설교자가 한 특정 교리에 대한 확신 있는 설교를 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어떤 회원들의 양심에 불편함을 줄 것이다. 또한 목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는 온전한 교리적 확신을 가르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교파적 차이를 무시한 초교파적 한 교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며 한 신앙고백이 없는 한 교회는 참으로 하나가 아니다. “단지 하나의 외면적 조직체 때문에 그들이 ‘하나’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단지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을 오해케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거짓말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81)라고 로이드-죤스는 바르게 말했다.
전제주의적 교회를 경계해야 함
또 우리는 중세의 천주교회와 같은 전제주의적 교회를 두려워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여하튼 하나를 만드는 세계적 조직체는 모든 회원을 그것의 통제 아래 놓는 전제주의 교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사람은 교만하여 남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일체성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이다. 우리는 전제주의적 천주교회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피흘려 싸웠던 선진들의 투쟁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라는 종교개혁의 귀한 유산을 잘 보존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천주교회에 대해 우호적이며 포용적이다. 실상, 기독교계의 재연합이라는 교회연합운동의 비전은 천주교회를 포함하지 않고는 수적으로 큰 결함이 있을 것이다. 천주교 교인수가 개신교와 헬라정교회 교인수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세계기독교백과사전에 의하면, 1980년 중반 천주교 교인수는 약 8억 9백만명, 개신교 교인수는 약 2억 8천만명, 헬라정교회 교인수는 약 1억 2천4백만명, 영국교회(성공회) 교인수는 약 6천5백만명이다.82)
천주교회와의 우호적 관계의 예들
WCC(WCC) 초대 총무이며 명예 회장인 빌렘 비셜트 후프트는 WCC와 천주교회의 적극적 협력관계에 대해, “우리가 반복해 말하는 바는, WCC 내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는 이제 모두 한 동일한 교회연합운동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였다.83) WCC의 전 총무인 에밀리오 카스트로도 말하기를, “현재 WCC와 천주교회 간의 관계는 매우 긍정적이며 모든 종류의 우호 관계들이 있다”고 하였다.84)
천주교회는 1959년까지 교회연합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노력으로 연합운동에 적극적이게 되었다. 1962년에 시작된 제2 바티칸공의회는 그 특별한 전환점이었다.85) 천주교회는 아직 WCC의 회원이 아니고 회원권을 구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1968년 이후, 10-15명의 천주교 신학자들이 WCC 신앙직제위원회에 정회원으로 참여해왔다. 천주교회는 정규적으로 WCC의 주요 대회들에 참관인이었고 WCC의 프로그램 작성 간사 중에도 들어 있다.86) 1993년, WCC 신앙직제위원회 세계대회의 120명 회원 중 26명은 천주교인이었다.87)
1997년 8월 미국복음주의 루터교회(ELCA)는 수세기 동안의 천주교도들과의 분열의 싸움이 끝났고 과거의 정죄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88) 그 교회의 에큐메니칼 담당자 프랭크 센 목사는 말하기를, “우리는 16세기에 분리되어 나간 자들이며, 우리는 다시 함께 돌아가야 할 자들이다”고 했다.89)
1998년 1월 우리나라의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린 기독교 일치주간 연합예배에 개신교회, 성공회, 천주교회, 정교회 등이 참여하였다.90)
1999년 현재, 천주교회는 56개국 교회협의회들의 정회원이다.91)
1999년 5월 12일 ‘영국교회-천주교회 국제위원회’는 “로마 주교는, 교회의 세계적 수위권(首位權)의 표현으로서, 진리를 분별하고 밝히는 특별한 사목(司牧) 활동을 한다”고 명시했다.92) 교회연합운동에서 모종의 교황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경향은 처음부터 있었다.93)
미국의 교회협의회와 천주교 주교대회는 매년 문안과 사절단을 교환하는데, 그런 협력의 한 상징으로, 교회협의회 회장이며 미국의 전 유엔 대사 앤드류 영이 1999년 9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한 천주교 성당에서 그의 취임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보도되었다.94)
1999년 10월 31일, 루터교 세계연맹 크리스티안 크라우제 주교와 교황청 일치위원장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은 신교와 구교의 500년 만의 화해 사건으로 ‘칭의의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하였다.95)
2000년 1월 18일 로마의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2000년 대희년 교회일치기도회에 천주교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영국교회(성공회) 수장 조지 커레이 캔터베리 대주교와 동방정교회 대표 헬리오폴리스 수석대주교 등이 참여하였다.96)
2000년 4월 앨버타 에드몬튼에서 열린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천주교회 온타리오 주교인 안드레 발리를 새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천주교인을 회장으로 뽑은 것은 그 협의회 창립 56년 만에 처음이다.97)
또 오늘날의 은사운동은 천주교인과 개신교인 간의 접착제로 나타난다. 1983년 미국에서만 60만명 이상의 천주교인들이 은사주의적 기도회에 참여하고 있고, 온 세계에서는 약 5천만명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98)
교회연합운동은 이처럼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연합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심지어 복음주의 지도자들 가운데 천주교회를 용납하는 경향이 있다. 그 예들은 복음주의에 대해 논할 때 살펴볼 것이다.
천주교회의 치명적 오류들
그러나 천주교회는 개신교회가 교제할 만한 교회인가? 천주교회는 16세기의 모습과 달라졌는가?
교황의 권위에 관한 교리
천주교회는 교회와 전통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와 동등히 여기며 로마 교회의 우위성과 교황의 사도 베드로 계승성을 주장하며, 심지어 1870년 바티칸회의는 로마 교황이 그 직분에 따라 믿음과 윤리에 관한 교리를 정의할 때 그는 무오(無誤)하다고 선언했다. 소위 교황무오설을 선언한 것이다. 1964년 제2 바티칸공의회도 교황을 “베드로의 계승자,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전체 교회의 유형적 머리라고 부르면서” 교황의 머리됨과 무오한 교훈의 직분에 관한 교리를 “모든 신실한 자들이 확고히 믿어야 할” 교리로 변함 없이 강조했다.99)
그러나 천주교회의 교황의 권위와 무오성에 대한 교리는 성경에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 교리들의 기초인 성경의 신적, 절대적, 최종적 권위에 대한 교리에 가장 모순된다. 또 교황 무오의 교리는 교황의 칙령들의 실제 역사에도 모순된다. 역사상 교황들의 사상들과 선언들 간에는 차이점들과 심지어 상호 충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레고리 1세(590-604)는 누구든지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지려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말했으나, 보니페이스 3세(607)는 황제로 하여금 그에게 그런 칭호를 주도록 만들었다. 또한 씩스투스 5세(1585-1590)는 성경 읽기를 권장하였으나, 피우스 7세(1800-1823)와 여러 다른 교황들은 그것을 정죄하였다.
더욱이, 교황들 중에는 두드러지게 부도덕한 자들이 있었다. 요한 12세(955-964)는 살인, 위증, 신성 모독, 간음, 근친 상간 등의 죄로 로마 황제에 의해 처형되었다. 또 알렉산더 6세(1492-1503)는 여섯 아이를 낳았는데, 그 중 둘은 그가 교황이 된 후에 태어났다. 또한 교황들이 상당한 정치 권력을 가지는 것도 주님의 모습과 다르다. 주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말씀하셨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다. 그는 정치적 권력을 소유하지도 행사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교황은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머리나 무오한 지도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참되고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을 부당하게 탈취한 자이다.
마리아에 관한 교리
또 천주교회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 대해 여러 가지 교리를 선언하였다. 우선, 천주교회는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와 승천을 선언하였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1950년 피우스 12세는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하였다. 제2 바티칸공의회도, “마침내 원죄의 모든 더러움 없이 보존된 그 순결한 동정녀는 . . .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림을 받았다”고 선언하였다.100)
또 천주교회는 마리아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카톨릭 교리서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항상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에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각별한 공경과 기도를 드리고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도와주시기를 청해야 한다”고 가르친다.101) 천주교회에서 성자로 추앙된 알폰스 추기경은,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고 받지 못하지만, 마리아에게 구하여 받는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구하는 바를 예수께 기원함으로써보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더 신속히 얻는다”고 말했다.102)
또 천주교회는 마리아에게 부당한 많은 칭호를 돌린다. 제2 바티칸공의회는, “[마리아는]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림을 받았고 주님에 의해 만물 위의 여왕으로 존귀케 되었다”고 선언하였다.103) 카톨릭 교리서도, “마리아는 . . . 하늘에 오르시어 천상과 지상의 모후(母后)가 되셨다”고 가르친다(114쪽).
또 제2 바티칸공의회는, “하늘로 올림을 받은 후 그는 이 구원하는 직책을 버리지 않으셨고 여러 가지 중보사역에 의해 계속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선물들을 가져다 주신다. . . . 그러므로 그 복된 동정녀에게 우리는 교회에서 변호자[보혜사], 돕는 자, 은혜 베푸는 자, 그리고 중보자의 명칭들로 빈다”고 선언하였다.104)
추기경 알폰스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인들은 마리아를 통해서만 용서받는다”(83쪽), “마리아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는 실패하고 잃어버려진다”(94쪽), “마리아는 하늘의 문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를 통하지 않고는 저 복된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160쪽), “구원의 길은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열려져 있지 않다”(169쪽),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이 그에게 주어졌으므로 마리아의 명령에 모두가 순종한다. 심지어 하나님도 순종하신다. . . .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온 교회를 마리아의 통치 아래 두셨다”(180-181쪽), “그는 우리의 구원, 우리의 생명, 우리의 소망, 우리의 모사,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도움이시다”(257쪽).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기도해야 하며,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신적 경배와 기도를 올려서는 안 된다(출 20:3; 마 4:10). 또 우리의 구주와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마리아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에 불과하다. 누가복음 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높임을 볼 수 없고 도리어 그 반대의 예를 본다. 마태복음 2:11, “[동방박사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무리 중 한 사람이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고 예수께 말하였을 때,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11:27-28). 또 그의 모친과 형제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그의 모친을 다른 제자들보다 달리 높이지 않으셨고 오히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마리아 교리는 비성경적이며 우상숭배적이다.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그를 ‘보혜사, 중보자, 천국의 문, 구원의 길, 천상 천하의 어머니와 여왕’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우상숭배이다. 촬스 핫지는, 천주교회가 이론적으로는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기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피조물에게 전지와 전능의 신적 속성들, 및 기도 응답의 신적 사역을 돌리기 때문에 우상숭배적이라고 바르게 지적하였다.105)
칭의(稱義)에 관한 교리
또 천주교회는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에 대해 우리와 다르게 가르친다.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부정한다. 1563년 트렌트 회의는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사람이 공식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고,106) 또 “누구든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轉嫁)에 의해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하면, . . . 혹은 심지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호의뿐이라고 말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107)
또한 칭의와 관련하여, 천주교회는 신자들의 죄들의 속죄가 남아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에서 선행과 기도를 통한 속죄의 교리와 연옥의 교리 등이 나온다. 카톨릭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고백의 성사로 지옥의 벌은 언제나 사함을 받으나, 세상과 연옥의 벌까지 사함을 다 받는 것은 아니다. 이 유한한 벌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 신부는 보속을 정해준다. 고백 성사를 받는 사람은, 우리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죽으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자기 죄에서 오는 벌을 보상해야 한다(148쪽).
제2 바티칸공의회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죄는 속죄되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이생의 슬픔과 불행과 시련의 일들을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속죄는 내세에서 불과 고통들 혹은 정결케 하는 형벌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108)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하며 오직 그 공로에 근거하여 죄인이 죄씻음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것은 일한 것이 없이도 은혜로 받는 의이다. 로마서 4:4-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롬 5:1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義)이시다(고전 1:30).
또 사죄와 칭의는 완전하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성도들의 기도와 선행은 사죄와 칭의의 수단이 아니고 그 결과요 열매이다.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칭의론은 복음의 왜곡이며 변질이요 이탈이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갈 1:8-9).
미사(Mass)에 관한 교리
또 천주교회는 성찬 교리가 우리와 다르다. 천주교회에서는 성찬을 미사라고 부른다. 천주교회는, 미사가 속죄 제사로서 거기에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며 그리스도께서 미사 때마다 반복하여 죽으신다고 주장한다. 트렌트 신앙고백은, “나는 미사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참된, 적절한 속죄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고백한다”고 말했다(6조). 또 트렌트 회의는, “누구든지 미사에서 참되고 적절한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언했다.109)
제2 바티칸공의회도, 미사는 “십자가의 제사가 계속되는 제사”이며 “미사의 제사에서 우리 주님은 제물로 죽임을 당하신다”고 선언하였다.110) 우리나라의 카톨릭 교리서도, “미사 성제는 예수님이 바치신 십자가의 제사를 새롭게 하고 되풀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제의 손으로 당신 자신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제물로 드리신다. . . . 따라서 미사 성제는 십자가의 제사와 완전히 같으며, 가장 완전한 신약의 제사이다”라고 설명한다(135-136쪽).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회의 미사 교리는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에 대한 왜곡이요 모독이다. 주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음을 나타낸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 말씀은 미사라는 가증스러운 것을 정죄한다고 하였다.111)
히브리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음을 강조하였다(히 7:27; 9:12, 26, 28). 히브리서 7:27,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위해 더 이상 속죄의 제사가 필요치 않다. 히브리서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상 네 가지의 비성경적, 이단적 오류들을 볼 때, 우리는 천주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며 신약교회 2천년 역사상 대표적인, 가장 강력한, 또 지금도 세계적으로 매우 활동적인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회를 적그리스도적이며 우상숭배적 단체라고 말하였다. 루터는 교황 제도를 마귀적이라고 하였다.112) 칼빈도 천주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치명적 대적자로 간주했고, 천주교회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 때보다 더 불순한 교리와 더 큰 우상숭배를 가지고 있고 다니엘과 바울이 예언했던(단 9:27; 살후 2:4) 바로 그 적그리스도이며113) 교황의 복음을 바울의 복음의 ‘무서운 변질’로 간주하였다.114)
천주교회의 기본 교리들은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고 그것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회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태도는 오늘날도 여전히 정당하고 유효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연합운동의 천주교회에 대한 우호적 관계와 포용적 태도는 종교개혁의 귀한 유산을 저버림이며 분명히 성경적 교제의 원리에 위반된다. 성경은 교리적 오류를 분명히 배격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천주교회와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
7. 종교다원주의의 비판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심지어 종교다원주의 경향을 띤다. 종교다원주의란 모든 종교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다양한 길이며 결국 다 천국에 이르게 한다는 사상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의 한 결과이다. 폴 틸리히는 말하기를, “기독교 자체는 최종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단지 그것이 증거하는 바가 최종적이고 보편적일 뿐이다. 기독교의 이 심오한 변증법을 잊어버리고 교회적인 혹은 정통적인 자기 주장들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자기 주장들에 대항하여, 소위 자유주의 신학은 한 종교가 최종성이나 심지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옳다”고 하였다.115) 이러한 사상은 종교다원주의의 길을 열어 놓았다.
특히, 오늘날의 교회연합운동은 종교적 다원주의의 경향을 보인다. 1983년 WCC 뱅쿠버 총회는 WCC 35년 역사상 최초로 힌두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다섯 개 세계 종교들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공식적으로 연설케 하였다.
WCC 뱅쿠버 총회는, “우리는 우리가 증거하는 예수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한편, 다른 종교들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의 종교적 진리의 추구에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선언하였다.116)
WCC 종교간의 대화위원회의 지도자인 죤 테일러(John Taylor)는 대표자들에게 말하기를, 모든 종교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데 협의회 회원들 가운데 일치가 있다고 하면서, “이슬람교도들과의 대화가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선교 활동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방해된다. 우리는 이슬람교도들 가운데서의 모든 선교적 노력을 중지해야 한다. . . . 많은 유대교인들이 제발 우리를 그냥 놔두라고 말한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그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17)
더욱이, WCC 인사들 중에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WCC 종교 간의 대화위원회의 의장인 더크 멀더(Dirk C. Mulder)는 “당신은 불교인이나 힌두교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물론이죠! 물론이죠!”라고 대답하였다.118)
WCC의 타종교들과 이념들과의 대화위원회 의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S. Wesley Ariaraja)는 1985년 WCC를 통해 출판된 성경과 타종교인들(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이라는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절대적 의미의 진리는 아무도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p. 27). 그가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성경이 서로 다르고 모순된 기독론을 가지고 있고(pp. 21, 22, 67) 성경의 언어가 신앙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pp. 6, 9, 24, 26). 또 그는 말하기를, “타종교인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형제 자매이며 순례자이지 이방인이 아니다. . . . 힌두교인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료 순례자이다”라고 한다(pp. 9-11, 56). 심지어, 그는 “만일 당신이 나에게 참된 증거의 가장 큰 방해거리이었던 한 가지 요인을 골라내라고 요구한다면,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주장하는 절대적 주장들이 그것이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말한다(p. 53).
1990년 1월, WCC의 살아 있는 종교들에 속한 사람들과의 대화위원회의 스위스 바아르에서의 모임은 15개국에서 온 21명의 헬라정교회, 개신교회, 천주교회 신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참여하였고 ‘종교적 다원성: 신학적 관점들과 선언들’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하였다.119) 그 문서는 선언하기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 외의 다른 길들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선함과 진실과 거룩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 . .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인격적 의탁에 제한시키는 신학을 넘어서서 나아갈 필요성을 인식한다는 것을 발견한다”라고 하며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적 신비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 성취를 향해 펼쳐질 때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들로 매개(媒介)되고 표현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우리 밖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고 감동하는 종교적 전통들의 구조 안에서 성실하고 진실한 삶을 살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들로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120)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WCC 7차 총회에서 한국의 정현경은 주제 강연에서 한(恨)을 안고 죽어간 영들, 예를 들어 하갈의 영, 우리아의 영, 입다의 딸의 영, 헤롯에게 죽임당한 어린아이들의 영, 잔다크의 영, 십자군 파병 때 죽어간 백성들의 영, 지구상의 토착민들의 영, 나찌 시대에 가스실에서 죽은 유태인들의 영, 히로시마와 나카사끼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죽임당한 자들의 영, 광주에서, 천안문에서, 리쿠니아에서 죽은 자들의 영, 심지어 인간의 탐욕으로 파괴되고 착취된 땅과 공기와 물의 혼 등을 부르는 샤마니즘적 행위인 초혼(招魂)적 행위를 하였다.121)
감신대학 전 학장 변선환 교수는 기독교 사상에 쓴 글에서 “저들의 종교[타종교들]도 그들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122) 또 그는 “그리스도만이 보편적으로 유일한 구속자이신 것이 아니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와 동일시할 때 거침돌이 된다”고 했다.123) 심지어 그는 “그리스도는 힌두교 안에 있다”고 주장하였다.124) 또 그는 크리스챤 신문 1990년 12월 8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기독교 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인 토리미의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또 “종교의 우주는 기독교도 다른 종교도 아니고 신을 중심하여 돌고 있다는 것을 기독교는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 “예수님을 절대화, 우상화시키며, 다른 종교적 인물을 능가하는 일종의 제의의 인물로 보려는 기독교 도그마에서 벗어나 . . . 신 중심주의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현대사조라는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에 말하기를, “교회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선행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으며 기독교의 선교사가 하나님 나라를 비기독교 세계에 가지고 오지 않아도 이미 하나님 나라는 거기서 역사하고 있다”고 말했다.125)
한신대학의 김경재 교수는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유일신(monotheism)’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종교들을 인정하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신(神)이란 모든 것을 통섭(統攝)하고 근원지우는 존재를 말합니다. 여호와, 야훼 등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체험한 신의 모습을 일컫는 것입니다. 로고스(Logos), 법(法), 도(道), 이(理)는 모두 진리를 가리키는 용어들로 문화권에 따라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이중 로고스만이 옳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는 것이지요”라고 말했다.126) 또 그는 그의 저서 이름 없는 하느님이라는 책에서, “각 역사적 종교는 서로 다양한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고백된 ‘구원의 길들’을 열고 있다”고 전제한 뒤, “타종교에 대한 열린 마음과 존경심을 갖되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 깊이 헌신한 것, 이것이 신앙의 자세다”라고 말하며, 또 “하느님은 이름 없는 존재로 인간이 자신이 살아온 역사와 문화와 풍토와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적실한 언어로 붙인 이름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기도, 알라이기도, 비로자나불이기도, 브라만이기도, 한울님이기도하며 신, 로고스, 태극이거나 혹은 이름 없이 가슴 속에 담아두며 흠모하는 우주적인 어떤 존재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127)
그러나 이런 종교다원주의 사상은 비성경적이며 이단적이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의 배교적 상황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구약시대에도 교회가 속화되었을 때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났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불성실하였고 바알과 아스다롯이나 또 다른 이방신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여호와 종교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도 섬기며 다른 이방신들도 섬겼다(왕하 17:33). 이것은 종교다원주의적 태도이며 현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진리는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확하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명기 4:39,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라.” 이사야 43:10,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이사야 45:6, “해 뜨는 곳에서[동방에서]든지 지는 곳에서[서방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또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도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확하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성경은 이방 종교들이 모두 헛됨을 밝히 가르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앞에 인용된 성경 말씀들은 다 이 사실을 내포한다. 특히,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예레미야 10:11,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심지어 성경은 이방 종교가 마귀적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말한다. 예레미야 51:44, "내가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리라." '벨'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바벨론적 이해가 아니라, 거짓신이다. 고린도전서 10:20,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에베소서 2:2-3,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요한일서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여기에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요한복음 8:24,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는 이단이다. 교회연합운동이 심지어 종교다원주의적 경향을 가지는 것은 대단히 잘못이다. 한 마디로, 교회연합운동은 매우 비성경적인 운동이다. 하나님의 교회들이 진리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은 좋지만, 오늘날의 교회연합운동은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포용하는 방식으로 하나됨을 추구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명백히 이단이며 또 천주교회도 분명히 기독교의 변질과 이탈이다. 그러므로 그런 이단 사상을 포용하는 연합과 일치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잘못이며 매우 악한 일이다.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심지어 이방 종교들까지 포용하려는 종교다원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현대적 바벨탑 운동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는 신실한 교회들과 성도들은 종교다원주의의 오류와 또한 오늘날 교회연합운동 전반의 문제점들을 깨닫고 그런 운동이나 활동들에 참여하지 말고 그것들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신실한 목사들은 성경적이고 보수적인 교회들을 세워야 하고 신실한 성도들은 그런 교회들에 가입해야 한다. 고린도후서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위태하게 되는 그런 사랑과 일치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
8. 복음주의의 문제(1)
오늘날 교회의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복음주의의 문제이다.
복음주의가 무엇인가?
복음주의는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개신교회를 복음주의라고 부른 것은,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 대신 성례나 신자의 공로적 선행을 가르쳐왔던 천주교회와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입장, 곧 성경적 기독교를 가리키는 용어이었다.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 교회에 퍼지기 시작하고 1940년대에 소위 ‘신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복음주의는 전통적 개신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수호하는 전투적 입장을 취했던 근본주의도 복음을 믿고 옹호한다는 점에서 복음주의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적 개신교회들 속에 들어와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변질시켰던 20세기 중엽 이후,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두 입장과 진영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포용적이고 타협적인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단절을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전자는 신복음주의128) 혹은 복음주의라고 불리웠고 후자는 근본주의라고 불리웠다.
미국에서 1920년대의 소위 보수주의(근본주의)와 자유주의(현대주의) 간의 신학적 논쟁에서 자유주의가 외형적 승리를 거둔 후, 1930년대에 성경적 교회들이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주의적 대교단들로부터 분리되는 일이 있었고, 1940년대에 와서 ‘신복음주의’라는 새 경향이 일어났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계속 싸우기보다 평화와 안정을 더 좋아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그대로 믿는 보수적 교회들 간의 교제와 협력보다 자유주의 교회들을 포함하는 넓은 교제와 협력을 추구하였다.
이런 입장을 처음으로 대변했던 인물은 미국의 풀러신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해롤드 오켕가129)이었다. 그는 풀러신학교 교장 취임시 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자기 신학교는 대교단들의 목회자들을 훈련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130) 그는 1948년 풀러신학교 강연에서 ‘신복음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1957년의 한 소식지에서 “신복음주의는 그 전략을 분리에서 침투로 바꾸었다”고 말했고,131) 또 후에 그는 “신복음주의는 분리를 거절함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달랐다”고 회고하였다.132)
1942년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가 조직되었고, 1947년 미국의 풀러(Fuller)신학교가 설립되었다. 1951년 20개국의 복음주의자협회들이 모여서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만들었다(2001년 WEA로 개명함). 1956년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지가 창간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신복음주의의 대표적 기관들이 되었다.
역사적 대교단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된 후, 거기에서 분리되어 나온 소수의 보수적 교회들이 과연 기독교회의 참된 계승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리의 입장을 포기하고 대교단들 속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것들을 개혁시키고 회복시키기를 원하는 소위 ‘침투’의 입장과 전략을 가지게 되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싫어하였고 ‘복음주의’라는 말을 전유물처럼 사용하였다. 각국의 ‘복음주의자협회’(NAE)나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는 다 ‘복음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죠지 마스든의 관찰과 판단대로, 신복음주의자들은 점차 자신들을 단순히 복음주의자로 부르기 시작하였고 신복음주의는 오늘날 흔히 단순히 ‘복음주의’로 불리운다.133)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는 신복음주의와 거의 동의어이며 신복음주의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윌리엄 애쉬브룩은 복음주의를 근본주의에 대해 혹평하면서 자유주의에 대해 동정적인 ‘신중립주의’라고 표현하였다.134) 개리 코우언은 신복음주의를, 자유주의자가 이단이 아니고 견해가 다른 형제이며 따라서 그를 전도의 일에 참여시킬 수 있다는 입장이라고 표현하였다.135) 박형룡 박사는 신복음주의를, 근본주의에 대해 가혹히 비판하고 어떤 전통적 교리들에 대해 양보하고 WCC의 사회복음운동에 따라가고 자유주의자들과 우호적, 협력적 관계를 가지고 배교적 교단을 떠나지 않고 거기 머무는 입장이라고 비평하였다.136)
자유주의 포용의 예들
오늘날 복음주의의 자유주의 포용의 대표적 예는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활동이다. 빌리 그레이엄의 본래 입장은 건전하였다. 그는 1951년 4월 파일롯지에 “우리는 어떤 형태의 현대주의도 너그럽게 보거나 교제하지 않는다”고 썼고, 밥 죤스에게 보낸 1952년 6월 3일자 편지에서도 “현대주의자들은 어디에서나 우리를 후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린스보로와 슈립포트 외에 어느 도시에서나 교회협의회(NCC)의 후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는 그 후 뉴욕,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컬럼버스 등에서의 전도 집회들에서 자유주의적 교회협의회의 후원을 공공연히 받았다.137)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전도집회시 제랄드 케네디 감독을 명예대회장으로 임명했는데, 케네디 감독은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라는 그의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명확히 부정한 자이었다.138)
데이빗 클라우드는 빌리 그레이엄의 문제점에 대해, 성경이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변호하지 않는 점,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 부분이 아니라고 말하는 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지 않는 점, 지옥이 불 붙는 고통의 장소라고 믿지 않는 점,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 신학이 더 이상 자기에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 점, 이단적인 로버트 슐러의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에 동의한 점,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을 칭송한 점, 수천명의 회심자들을 배교적 자유주의 교회들에 넘겨준 점 등을 열거하였다.139) 컬럼비아 국제대학교 명예총장 로벗슨 맥퀼킨은 빌리 그레이엄이 근본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 즉 천주교인, 헬라정교인, 자유주의자에게 따뜻한 에큐메니칼 포용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140)
신복음주의 기관인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는 처음부터 자유주의적 대교단들의 지교회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성경의 무오와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교리를 포함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마틴 마티는 1992년 미국복음주의자협회에서 강연하였다.141) 또 그 협회 회장 돈 아규는 그 협회가 창설된 이래 최초로 자유주의적 미국교회협의회(NCC) 총회에서 연설하였다.142)
풀러신학교는 처음부터 대교단들의 목회자들을 훈련시키기를 원했다. 그 학교는 프린스톤 신학교 전 교장인 신정통주의자 죤 매케이를 연사로 초청하였었다. 그 학교의 1984-85년 요람은 자유주의적 천주교 신부 레이몬드 브라운을 강사로 열거하였다.143) 아더 후크는 1999년 7월 27일 풀러신학교를 방문하여 죤 골딘게이 교수의 강의에 참석했는데, 골딘게이 교수가 “여리고성이 있었고 그 성벽들이 무너져내렸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 . . 아마 이것은 비유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거하였다.144) 이 학교는 처음에는 성경의 무오를 옹호했으나 오늘날에는 이 교리를 거부하고 은사운동을 조장하며145) 여성 안수를 강하게 지지한다.146)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회장 데오도르 윌리암스는 WEF 뉴스레터 1993년 8월호에서 “WCC(WCC) 소속 교단 내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대로 머물러 복음주의 입장을 취하고 그 교회 안에서 복음주의적 영향을 끼치려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147)
신복음주의 대변지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 1998년 9월 7일자는 레이몬드 브라운의 신약개론을 높이 추천하였다. 그러나 브라운은 예수께서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오류를 범하였다고 말한 자유주의적 천주교 신부이다. 그는 WCC에서 활동적이고 1971년 미국 뉴욕의 자유주의적 유니온 신학교에서 처음으로 종신직 천주교 교수가 되었다.148)
오늘날 복음주의가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우리나라에서의 예들을 보자. 1986년 9월 8일 한국장로교협의회는 새문안교회에서 노춘경씨 수세 100주년 기념 행사로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장, 예장고신, 예장대신 등 5개 장로교단 연합성찬예배 및 강연회를 가졌다.149)
1990년 11월,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홍콩 국립경기장에서 개최되는 빌리 그레이엄 홍콩 전도대회의 한국 위성중계 전도대회의 장소로 부산 수영로교회, 대구 서문교회, 대전 중앙교회 등 예장합동측의 큰 교회들을 채택하였다.150)
1991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총회는 “기감과 기장의 가입 문제는 일단 긍정적인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거듭 밝혔다.”151) 이 단체는, 자유주의 교단인 기감과 기장을 배제할 의사가 없다.
1993년, 한국장로교회 일치를 위한 특별좌담에서 예장통합 박성원 목사는 “개인 구원, 사회 구원을 각기 외치면서 교회가 진보, 보수로 나뉘어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한국의 진보교회와 보수교회가 일치하려면 타협이 필요하며, 예컨대 보수측에서 ‘성경이 유일한 계시이다’는 입장을 고수하면 장로교 일치는 대단히 어렵다고 주장했다. 기장 신학연구소장인 김원배 박사는 교회 일치는 진정한 교회 회복 운동인데, 교회 일치를 위해 도그마에서 벗어나 봉사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교리만 따진다면 끝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예장대신 총회 총무 김재규 목사도 한국교회가 교리를 따지지 말고 선교에 함께 참여함으로 일치를 이루자고 말하며 “신학에 대한 고집이 곧 한국장로교회 일치의 저해요인”이라고 주장했고, 또 과거엔 김재준 목사를 이단이라고 정죄했으나 오늘날 보수 신학에서 그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52)
1993년, 한국장로교협의회 소속 5개 장로교단 총회장 공동선언문은 한국 장로교회들이 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면서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은 신앙의 본질적 항목들에 있어서 결코 분열될 만큼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선언하였다.153)
1994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3·1절 기념예배 설교를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강원용 목사에게,154) 3월 8일 임원취임예배 설교를 기장측의 조향록 목사에게 부탁했고,155) 또 4월 9일 남북교회협력을 위한 세미나 강사 명단에 강원용 박사를 포함하였다.156)
1995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광복 5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움의 강사 중에 기장측 조향록 목사를 포함하였다.157)
1996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발표회에서, 홍순우 목사는 진보적 교회와 보수적 교회가 다 반성하고 한국교회 전체 정서에 맞는 연합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앞으로 NCC나 한기총 등의 연합기관이 합력하여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제안했다.158)
1996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발표회에서 한명수 목사(한기총 전 총무, 당시 합동측 기독신보 주필)는 진보와 보수는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어느 한 쪽을 강조하면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한기총과 교회협[NCC]이 새로운 이름을 가진 단체로 우뚝서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부회장 김명혁 목사(합동신학교 교수, 강변교회 목사)도 “양 기구는 기구적 통합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9)
1997년 3월,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대신, 예장개혁, 기장 등 장로교 9개 교단이 참여하고 있는 한국장로교협의회 토론회에서 예장합동측의 한명수 목사는 “개신교계의 분열은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들의 생각을 앞세운 데서 생긴 결과”라고 말했다.160)
1997년, 예장대신측 전 총무 조순태 목사는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 윤리적으로 위기상황일 때 교회연합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마땅치 않게 여기는 교파도 같은 사도신경을 믿고 있으며 . . . 교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161)
1997년, 예장고신 총무 심군식 목사는 사회 문제와 사이비 이단이 판치는 현실에서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여 힘을 약화시키지 말고 일치단합된 연합운동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62)
1997년 7월,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통합 등 3개 교단의 전국남전도회 혹은 남선교회 연합회 임원들은 교단 간의 화합과 일치운동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163)
1998년 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지 덕 대표회장은 기자회견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차이가 이제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말했다.164)
1998년 6월, 예장합동, 예장통합, 예장고신, 기장의 목회자로 구성된 한국장로교목회자협의회(회장: 옥한흠 목사)는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의 약화가 한국교회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기독교협의회(교회협)로 나눠진 것에서 연유한다”고 말하며 “한국교회 일치와 연합은 늦출 수 없는 긴박한 과제”라고 주장했다.165)
1998년,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의 회원교단 신임총회장과 총무 임원 축하예배에서 길자연 목사(예장합동 총회장)는 “장로교회가 하나되지 못하고 자기 입장만 고집해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며 “이제라도 우리 모두 하나 되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자”고 말하였다.166)
1999년 1월, 예장통합측 총회(총회장: 유의웅 목사)의 신년하례회에 초청된 예장합동측 총회장 길자연 목사(서울 신림동 왕성교회)는 “통합과 합동이 이심전심으로 장로교 연합과 일치 운동을 벌여 올해는 하나로 되어가는 분기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67)
1999년, 복음주의 장로교단인 예장합동측 총회총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0% 이상이 예장통합과의 강단교류와 신학교류, 연합사업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또 64%가 통합측과의 교단 통합에 대해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68)
1999년 6월 27일, 예장합동측의 역사적 승동교회(박상훈 목사)와 예장통합측의 대표적 교회인 영락교회(이철신 목사) 간의 강단교류가 양교단의 분열 40년 만에 승동교회에서 이루어졌다.169)
2000년 3월, 한국기독교교단총무회는 교회연합운동에 최선을 다하기로 하고 교회협과 한기총의 연합에 적극 협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교단총무회는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합동보수, 예장개혁합신, 침례교, 감리교 등이 속해 있다.170)
이상의 예들은 우리나라의 보수적 교단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무지하거나 고의적으로 타협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이것이 복음주의의 문제이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단지 복음을 믿는 입장이 아니고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이나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주의적 교단들과 교제를 끊지 않고 서로 교제하고 협력하는 포용적 입장을 나타낸다. 오늘날 보수적,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지 않고 포용함으로써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점점 더 해이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단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교훈하였다(딛 3:10). 복음주의는 성경의 이러한 교훈을 저버린다. 복음주의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잘못된 교제의 문제이다. 그것은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반대된다.
9. 복음주의의 문제(2)
오늘날 복음주의의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것뿐 아니라, 또한 은사운동과 천주교회를 포용하는 것이다.
은사운동과 천주교회 포용의 예들
오늘날 복음주의는 은사운동에 대해 포용적이다. 아니, 포용적인 정도가 아니고 많은 은사주의자들을 포함한다. 1993년, 카리스마지는 오순절파가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 회원교회들의 약 51%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어떤 보고서는 약 80%라고 한다. 또 미국복음주의자협회 회장 케빈 매노이아는 자신이 복음주의 운동에서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 간에 일치의 다리를 놓기를 원한다고 말했고,171) 또 그는 복음주의자협회가 죤 윔버의 빈야드 운동 같은 은사운동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172)
오늘날 복음주의는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포용적이다. 이런 사실은 대표적인 복음주의자들의 말들과 행위들에서 확증된다. 1993년 6월,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1,050개의 교회들과 65개 교단들이 협력한 세 번째 전도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대회는 여섯 명의 천주교인들을 실행위원에 포함시켰다.173)
199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 이사 스털링 허스턴은 말하기를, “지난 10-15년간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천주교회의 참여가 크게 늘어났으며 소수의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전도대회 계획위원회들의 공식적 대표자들로 봉사한다. 천주교회 신자들은 안내위원들, 성가대원들, 심지어 상담위원들로 환영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174)
휴스턴 크로니클(Houston Chronicle) 1997년 3월 30일자는 빌리 그레이엄의 알라모도움에서의 전도집회에 대한 보도에서, “그 지역 천주교회도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교황의 1987년 성안토니오 방문 기간에 보인 그 침례교인의 후원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었다”라고 말했다.175)
복음 전파(Proclaiming the Gospel) 1997년 6월호는 말하기를, “천주교는 이제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대회들에 참여하고 있다. 전도대회를 선전하고 촉진시키고 천주교 상담자들을 사용하는 대가로, 빌리 그레이엄은 믿음을 고백하며 앞으로 나오는 모든 천주교인들을 그들의 천주교회로 돌려보내겠다고 그 지역의 주교와 약속한다”고 하였다.176)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8월 10일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구 약 백만명의 [오타와] 지역을 위한 지난 6월 25-28일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활동에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 간의 간격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 전도대회를 후원한 470개의 지역 교회들 가운데, 60개는 천주교회이었다. 천주교회의 참여는 모든 그레이엄 전도대회 가운데 가장 중대하였다.” 또 그 잡지는, 새 신자들 중 얼마는 천주교회에서 데려갔다고 말했다.177)
데이빗 클라우드는 빌리 그레이엄의 문제에 대해, 그가 천주교의 복음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과 동일하다고 말했고 수천명의 회심자들을 천주교에 넘겨주었고 천주교 주교들을 강단에 초청하고 그의 결신 초청시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축복하게 하였다고 말한다.178)
대학생 선교회(CCC)의 창설자요 총재이었던 빌 브라잇은 1969년 천주교회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는 천주교회를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 안에서 힘있는 역사를 하고 계심을 믿으며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일을 돕기 위하여 수백만의 천주교인들을 사용하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라고 하였다.179) 대학생 선교회에는 이미 1970년대에 간사들 가운데 천주교인들이 있었고180) 1973년의 ‘키(Key) ’73’이나, ‘여기에 생명 아메리카가 있다’는 주제의 1976년 집회들에는 천주교인들의 참여와 협력이 있었다.181)
빌 브라잇은 촬스 콜슨, 제임스 패커 등과 함께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상호 인정과 협력을 선언한 1994년의 선언서에 서명한 일로 비난을 받고 그의 입장을 취소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천주교인들 가운데 수천만명의 참된 신자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182)
또한 빌리 그레이엄 뿐만 아니라, 제리 팔웰, 잭 반 임페, 제임스 로빈슨, 에드 답슨 등의 복음주의자들은 천주교회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1985년, 에드 답슨은 말하기를, “교황 제도가 적그리스도적이라고 말하는 극단주의자들은 . . .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고 했다.183)
달라스 신학교 교장 척 스윈돌은 1997년 10월의 한 서신에서 테레사 수녀를 ‘주목할 만한 여자’라고 불렀다.184) 제임스 답슨은 테레사 수녀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했고 그것은 “그가 그의 생애에서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잭 반 임페는 그녀가 구원받지 못한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꾸짖었다.185)
그러나 빌 잭슨은 바르게 말하기를, “테레사 수녀는 누구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영혼이 연옥을 떠나기를 기도하였고, 성찬떡에 대한 사제의 축복이 아니면 예수를 소유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교황에게 마리아를 ‘그리스도인의 협력구속자, 협력중보자 및 보혜사라고 부르기를 공공연하게 간청하였다”고 하였다.186)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3월 2일자에 의하면, 잭 반 임페는 최근에 교황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변호하는 데 그의 전체 방송을 사용하였다. 또 그는 다음번 교황이 요한계시록의 그 거짓 선지자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경고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로서 결합되었다”고 말했다.187)
‘복음주의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문서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 간의 다리 놓기의 한 예이다.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의 전 회장 존 화이트는 그 문서에 서명했고 천주교인들을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라고 불렀다.188)
타협은 큰 잘못이다
신복음주의의 문제는, 비록 20세기 중엽에 미국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였지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경험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보수적,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신복음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신복음주의의 문제는 신학적 변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제에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의 교제의 문제이다. 복음주의자들의 다수는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을 비평하거나 배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교단들이 고의적으로 그들을 포용할 때도 그 교단들 안에 머물러 있으며 그들과 교제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구약시대의 유다왕 여호사밧은 신복음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성경은 유다왕 여호사밧을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 경건한 왕으로 증거하지만(대하 17:6), 그는 부귀와 영광이 컸을 때 우상숭배자인 이스라엘왕 아합과 더불어 교제하였고 서로 사돈 관계까지 맺었다(대하 18:1). 또 그는 아합을 도와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을 치는 일에 참여했다. 그런 일이 있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후를 보내셔서 그를 책망하셨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 19:2).
여호사밧 왕의 이러한 잘못된 교제와 연혼(連婚)으로 인해 북쪽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남쪽 유다 왕국에도 들어왔고(왕하 8:18; 대하 21:6) 그것이 유다 왕국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교제의 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유다 왕국의 멸망을 가져왔다. 이것이 오늘날 복음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복음주의적 목사들의 넓은 교제는 교회들을 점점 해이하게 만들고 사상적으로 부패시키고 마침내 배교에 이르게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보수적,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신복음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분별력 없는 많은 보수적 목사들은 화평과 일치와 사랑을 표방하면서 성경의 교훈을 실행하려 하는 자들을 오히려 비난한다. 많은 목사들이, 다른 여러 일들에 열심이 있으나, 교회의 교리적 순결성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순결한 교회를 원하시고 그것을 구원 계획의 목표로 삼으셨다는 것(엡 5:25-27)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교리적 순결에 대한 진지한 노력을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잘못이다.
성경은 분명히 교리적 이단을 분별하고 책망하라고 말하며 또 그것을 주장하고 전파하는 자들로부터 분리하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유다서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우리는 진리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고린도후서 6:14-17,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우리는 잘못된 교제를 피해야 한다.
로마서 16:17,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10-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우리는 이단자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우리는 주 안에서 형제라도 성경 교훈을 불순종할 때 그와 교제를 끊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첫째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성경에 밝히 계시되고 전통적으로 믿어온 성경의 근본적 진리들에 대한 확신이 없다. 둘째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이 무서운 이단이라는 바른 인식이 없다. 셋째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진리를 위해 싸우려는 거룩한 의지와 열성이 없다. 넷째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교제와 분리에 대한 성경의 교훈에 순종함이 없다.
잠언 28:4은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17:15은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했다.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는 명백히 이단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는 마땅히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배격해야 하며,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자들을 교회의 교제로부터 제명하고 출교해야 하고 천주교회와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 그들을 포용하는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성경의 고귀한 진리들을 양보하고 이단과 배교와 불신앙에 타협하는 비성경적 입장이다. 그것은 분명히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요 분명히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 그것은 분명히 주 예수께 대한 불충성과 불순종이다. 배교와 타협이 점점 가득해지는 때에,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배교로부터의 분리이다.
http://www.oldfaith.net/03modern.htm#20. 교회의 바른 진로(進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