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어떤 이는 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운동에 성령이 역사하심을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하며, 개혁교회의 침체의 주원인은 전통적인 경직된 성령론으로 인해 성령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안영복, 성령론의 바른 이해, 3, 137, 131쪽). 미국의 기독교 개혁 교회(CRC)의 연구위원회는 성령의 초자연적 나타나심을 사도시대에만 제한시킬 만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없다고 진술하였다(데이빗 할워다, "성령과 목회사역," 기독신보, 1988년 8월 6일, 5쪽). 복음주의자 제이 아이 패커는, 은사운동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Calvary Contender, 1992년 8월 1일). 은사운동에 대한 이런 긍정적 평가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에 대한 개방적 태도는 오늘날 우리 나라의 보수적 장로교회들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에 대한 이러한 견해와 주장은 비전통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비성경적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도시대에 주신 현상이었고 신약성경의 완성과 더불어 사도시대가 끝났을 때 그 현상은 사라졌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계속적인 초자연적 은사들을 통해 일하신 역사가 아니고, 신구약 66권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일하신 역사이었다. 바울 사도의 증거대로, 기독교는 기적이나 인간의 지혜를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성경말씀과 그 중심 내용인 속죄의 복음을 통해 구원의 일을 행하신다. 성경에 기록된 복음의 말씀을 통해 죄인을 회개시키고 새롭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방법이다.

은사운동의 기원, 특징 및 세력

1. 기원

2. 특징

3. 세력

3-1. 알파 코스(Alpha Course)

3-2. 프로미스 키퍼즈(Promise Keepers)

3-3. 복음주의자들-CCC, NAE

1. 기원

은사운동은 20세기 초에 시작된 오순절주의에 뿌리를 둔다. 1896년에 미국 남동부 노스 캐롤라이나주에서 방언 현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01년 미국 중서부 캔사스주 토피카에 있는 베델 성경대학의 여학생 애그니스 오우즈맨이 성령 세례를 사모하다가 그것을 받고 방언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감리교 배경을 가졌고 성결교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이었다. 그 후 1906년 4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성결교 설교자 윌리암 시무어에 의해 소위 아주사 거리의 집회들을 통해 방언 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고, 여기서 오순절 교파가 생겼다(F. D. Bruner,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pp. 47-55). 그러다가, 20세기 중엽에 와서, 이 운동은 오순절 교파를 넘어서 다른 교파들 속으로 퍼져 나갔고, 1960년 말에는 심지어 천주교회에까지 들어갔다. 이것을 '신오순절주의'(Neo-Pentecostalism) 혹은 '은사운동'(The Charismatic Movement)이라고 부른다.

2. 특징

은사운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징적 주장들을 하고 있다.

첫째로, 은사운동은 신자가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성령 받는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둘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최초의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은사운동은 방언 운동에서 기원하였고 특히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고 있다. 북미 오순절 협회 헌법 제5항은 "순복음(full gospel, 충만한 복음)은 . . . 성령의 세례와 그것의 최초의 증거로서의 방언을 포함한다"고 진술하였다.

세째로, 은사운동은 성경에 증거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거나 회복되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병고침의 기적을 행한다고 알려진 인물들 중 하나는 베니 힌(Benny Hinn)이다. 그는 폴과 잰 크라우치(Paul & Jan Crouch)의 티비엔(TBN) 방송 프로그램에서 말하기를, 사람들은 티비엔(TBN)을 보다가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장례식들을 취소할 것이며 그들의 죽은 자들을 관 채 가지고 와서 텔레비젼 앞에 두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만지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는 그들이 수천명씩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Christian News, 1999년 11월 22일).

최근에 온 세계의 은사주의자들은 심지어 금 가루가 예배 시간 동안에 그들의 얼굴들, 손들 및 옷에 나타났다고 말한다(Charisma, 1999년 11월호). 어떤 경우들에는 그것이 일종의 플라스틱 필름이나 반짝이는 장식품이라고 한다. 또한 은으로 한 아말감 충전(充塡, 집어넣어서 막는 것)이나 크라운들과 전체 이[齒]들이 금으로 변한 초자연적 치아 치료들에 대한 주장들도 있다(Calvary Contender, 1999년 6월 15일). 교회성장 전문가요 은사주의자인 피터 왜그너는 이와 같은 기적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1월 15일.)

넷째로, 은사운동은 신앙생활의 강조점을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보다 은사 체험에 두고 때때로 그 체험은 매우 감정적인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캐시 우드(Cathy Wood)는 브라운스빌 '부흥'의 역사에 대해 쓴 그의 책(1997년 간행)에서 은사 사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직접적 진술들을 하였다. 예를 들어 병고침들, 사람들이 수시간 동안 집회 장소 바닥에 누움('완전히 의식이 없음'), '머리들을 흔듬 혹은 경련함,' '멍한 술취한 상태'에 있음, '머리가 희미함'(woozy), '성령 안에서 춤을 춤,' 기타 이상한 육체적 표현들이다. 또 우드는 말하기를, "완전히 무르익은 부흥은, 어떤 물결들이 와서 우리 모두를 깨끗케 하자 많은 사람이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한 일과 함께 터졌다"고 한다(1996년 2월 10일).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소동(row) 속에서 매우 비슷한 설교들 170편 이상을 들었다"고 한다(2월 16일). 그는, "성령 안에서 춤을 추는 것"과 "다른 한 장소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것"에 대해 말한다(2월 18일).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나는 내가 스키장의 언덕을 뛰어내려 하늘을 나르고 있었던 것같이 느꼈다. 자유로움은 매우 영광스러웠다. 나는 마침내 집회 장소 앞 부분 오른쪽 바닥에 던져졌으나, 나를 은혜로이 감싼 나의 남편 외에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억제되지 않은 예배에서 하나님에 의해 들림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인간적 경험과도 달랐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중재자들이 모두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하여 복도들에 쓰러졌고 심한 울부짖음과 신음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다(3월 17일). 그는 그 다음 날 오전 2시에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날은 우리가 도착했던 날과 같지 않은 것 같았다. . . . 그것은 우리가 그 건물 안에 있는 동안 우리가 실제로 어떤 곳으로 가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한다. 그는 한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번갯불 같은 것이 나를 쳤다. 나는 벽을 쳤고 미끄러져 넘어졌고, 얼마 동안인지는 몰라도 통제할 수 없도록 몸을 흔들었고 경련을 일으켰다. 숨이 거의 끊어졌고 계속 심히 헐떡거리고 있었다. . . . 나의 머리는 경련을 일으키곤 하였다. . . . 나는 성령의 신선한 기름부음으로 충만함을 얻고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서, 그는 "크게 부르짖기" 시작했다(7월 14일). 그는 킬패트릭 목사가 그의 손을 흔들며 그에게로 왔다고 말했다. "그가 나를 향하여 공기를 불었을 때, 그것은 나를 완전히 때려눕혔다"(9월 29일). 그는 말하기를, 그 다음 날 아침, 예배들이 마친 후에도, 만일 빈야드 음악이 연주된다면, 그는 "깊숙이 구부르고, 좌우로 흔들거리고, 비틀거리고, 반대쪽으로 뛰며, 때때로 바닥에 엎어지며 . . . 찬송하며 경배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10월 15일.)

3. 세력

오순절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은사운동은 오늘날 오순절교회 밖에서도 매우 활발하다. 그래서 그것은 때때로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에 이어 기독교의 '제3세력'이라고 불리운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전세계의 오순절주의자들 혹은 은사주의자들은 약 1억 9천만명인데, 그 중 오순절교인들이 8500만명, 개신교 은사주의자들이 1600만명, 천주교 은사주의자들이 5000만명, 그리고 중국의 은사주의자들이 4200만명 가량이라고 말한다(Kenneth Fore- man, "Pentecostals, the Largest Protestant Family," World Pentecost, 1987년 12월호; Christian News, 1987년 12월 28일, 16쪽). 오늘날 은사운동은 전통적 교단들에 속한 교인들에게서 많은 세력을 얻었고 또 여러 단체들을 통해 활발히 퍼지고 있다.

3-1. 알파 코스(Alpha Course)

알파 코스는 1990년 영국 런던의 성공회 소속 성삼위일체 브럼턴교회에서 니키 검벨(Nicky Gumbel)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브럼턴교회는 은사주의적 대교회이다. 알파 코스는 천주교인들, 침례교인들, 및 그 밖의 사람들 가운데서 산불처럼 퍼지고 있다. 그것은 영국에서 발전되었지만, 이제 또한 미국을 휩쓸고 있다. 그것은 온 세계에서 대영제국의 가장 빨리 증가하는 수출품의 하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씨알엔 뉴스레터(CRN Newsletter)가 지적하는 대로 그것은 묽게 된 죄책감 없는 복음과 유약한 그리스도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 핵심적 강조는 토론토 타입의 은사주의적 경험에 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4월 1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 4월 27일자 크리스챠니티 투데이는 레이톤 포드, 루이스 팔라우, 제이 아이 패커, 앨리스터 맥그래스 등 복음주의자들의 서명과 더불어 알파 코스에 대한 전면광고를 실었다.

1999년 8월 한국의 여러 기독교 신문들도 제2회 알파 코스 세미나 광고를 실었는데, '21세기 교회영성 목회를 리드할 성경공부!', '60개국 65개 교파 46,000여 교회 지도자 세미나 참석' 등의 선전 문구를 사용했다. 그 세미나의 강사는 워싱턴 새문안교회 조병철 목사, 한국의 교회성장연구소장 명성훈 목사, 우석교회 김철영 목사이다.

에반젤리칼 타임즈(Evangelical Times) 1999년 5월호의 한 글에는 성령 충만에 관한 내용의 절반이 방언에 관한 것이다. 성령의 성경적 역할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지만, 은사주의적 알파 코스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가리운다(Australian Beacon, 1999년 5월호). 전체적인 강조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주목의 중심인 성령에 의해 대치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1월 1일.)

미국과 영국의 로마 천주교회의 고위 성직자회는 점점더 호감을 가지고 알파 코스를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벌터머 시의 50개 교구들은 그 교과 과정을 사용했다. '천주교인들을 위한 알파' 프로그램의 북미 조정자는 말하기를, "알파 코스가 로마 천주교회 신앙에 대한 완전한 제시가 아니지만, 그 14개의 비디오 테이프 속에는 천주교인들이 반대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펀더멘탈리스트 다이제스트(Fundamentalist Digest) 편집자 돈 재스민(Don Jasmin) 박사는 논평하기를, "알파 코스는 성경 용어들을 약간 사용하지만 구원에 관한 명령적 성경 진리들을 지우거나 교묘히 변경시키는 '가짜' 전도 방법이다"라고 한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3월 1일.)

3-2. 프로미스 키퍼즈(Promise Keepers)

오늘날 프로미스 키퍼즈 집회들도 은사주의적이다. 이 집회들은 1991년 미국에서 빌 맥카트니(Bill McCartney)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콜로라도 대학교 축구 코치이었다. 또 랜디 필립스(Randy Phillips)는 그 운동의 책임자인데, 이 두 사람은 모두 불더 밸리 빈야드 교회의 교인들이다. 그 교회의 제임스 라일 목사는 극단적 은사주의파에 속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기를, 비틀즈는 하나님의 손으로 은사를 받았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고 하나님께서 온 세계에 음악적 부흥을 통한 은사주의적 갱신을 시작하실 목적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자기 백성에서 여전히 음성으로 말씀하심을 확신한다고 말하였다(John MacArthur, Reckless Faith, pp. 178, 179).

오늘날 다른 많은 운동들과 같이, 이 집회의 문제점은 은사주의적 연관과 에큐메니칼 성격이다. 이런 류의 운동은 자유주의적 교단들을 문제삼지 않고 심지어 로마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CCC의 빌 브라잇, 빌 하이벨즈, 무디 성경학교 교장 조셉 스토웰, 척 스윈돌, 척 콜슨, E. V. 힐 등 에큐메니칼 인사들이 이 운동의 연사들이다.

프로미스 키퍼즈 한국 본부는 이사장에 김의환 박사(전 총신대 총장)를, 이사에 김장환 목사(세계침례회 총회장), 김상복 목사(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김삼환 목사(명성교회), 김연택 박사(대한신학대학 총장), 전호진 박사(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박형용 박사(합동 신학대학원) 등을 세웠고 현재 정두영 목사가 총무를 맡아 실무를 보고 있다고 한다(크리스챤 뉴스위크, 1999년 10월 16일, 2쪽).

카리스마(Charisma)지 발행인 스티븐 스트랭은 "오순절-은사주의 동향" 사설(1999년 7월호)에서 "프로미스 키퍼스는 1990년대 초에 갑자기 등장했고, 은사주의적 형태의 찬양과 예배 음악 뿐만 아니라, 일부 은사주의 연사들을 세웠다"고 썼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일.)

3-3. 복음주의자들--CCC, NAE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교인들이 은사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대학생 선교회(CCC) 같은 단체들이 그러하다. 은사주의자들은 대학생 선교회의 총재인 빌 브라이트에게 따뜻하게 용납된다(Christianity Today, 1997년 7월 14일; Calvary Contender, 1997년 8월 1일). 대학생 선교회로부터 온 1998년의 한 소식지는 '예수님'이라는 그들의 전도용 영화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전히 표적들과 기사들을 행하시고 계시다"고 보도한다. 또 한 소식지는 인도의 16살 된 한 소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그 소녀는 몇 시간 동안 죽어서 장사되려고 했었는데 옛날 나사로처럼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 소녀는 죽은 자들이 거하는 장소에 갔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7일 동안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 소식지는 말하기를, 그 소녀는 다시 산 지 7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그 소식지는 말하기를, 이 일과 그 밖의 기적들이 아드리안 로저스의 그 주제에 관한 책에 열거된 '기적들을 위한 세 가지 시험들'을 통과했다고 한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일.)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 회장 케빈 매노이아(Kevin Mannoia)는 자유 감리교회의 감독인데 은사주의자이다. 그는 자신이 '보다 넓은 복음주의 운동 안에서'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 간에 일치의 다리를 놓기를 원한다고 말한다(Charisma, 1999년 5월호). 카리스마지에 의하면, 1993년에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의 회원 교회들의 약 51퍼센트가 오순절파라고 한다. 어떤 보고서에 의하면, 80퍼센트가 그러하다고 한다(Calvary Contender, 1992년 12월 15일).

은사주의자 잭 헤이포드(Jack Hayford)가 1997년에 쓴 책, 유망한 목사들(Pastors of Promise)에서, 미국의 인기 있는 저술가요 연사인 죤 맥아더는, 9천명 교인을 가진 '그 길에 대한 솔직한(Foursquare) 복음 교회'의 극단적 은사주의 목사 헤이포드를 칭송한다. 로버트 슐러, 빌 하이벨즈, 척 콜슨, 빌 브라이트, 및 그렉 로리도 추천의 글들에서 그를 칭송하였다. 5년 전, 맥아더는 은사주의적 혼돈(Charismatic Chaos)이라는 그의 책에서 환상 중에 "헤이포드는 그리스도를 본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었다. 헤이포드는 프로미스 키퍼즈 집회들을 장려하고 그 이사회에서 봉사하고 그 단체의 주요 행사들에서 연설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9월 1일, 15일.)

성령의 세례

오순절주의와 은사운동은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신자가 또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감리교회와 성결교회의 교리적 사상과 비슷하고 무디의 협력전도자이었던 알 에이 토리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1. 오순절 사건의 의미 / 1-1. 특수한 의미 / 1-2. 일반적 의미

2. 성령세례의 의미

3. 성령세례의 시간

1. 오순절 사건의 의미

성령 세례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과 직접 관계된다. 그러면 사도행전 2장에 증거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이중적(二重的)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특수한 의미요, 하나는 일반적 의미이다.

1-1. 특수한 의미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역사(歷史)의 과정에서 시대적 분기점을 이루는 몇 가지 특수한 의미들을 가진다.

첫째로,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령의 강림을 예언하셨었다. 이사야 32:15,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에스겔 36:27, "또 내 신[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요엘 2:28, 29, "그 후에 내가 내 신[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예수께서도 공생애 말기와 그의 승천 직전에 성령의 강림을 예언하셨었다. 요한복음 14:16, 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사도행전 1:4, 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이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 오순절 사건이었다.

둘째로, 오순절 사건은 성령께서 지상에 강림하셔서 이제 교회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의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영께서 약속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제 구원받은 성도들 즉 신약 교회 속에 영원히 거하시며, 그들의 성화(聖化)와 다른 이들을 위한 전도의 일을 하게 하신다.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가 일찌기 경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영원한 내주(內住)하심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셋째로, 오순절 사건은 성령의 활동 시대가 시작됨을 의미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체에 있어서 한 분으로서 교회와 늘 함께 계시고 함께 활동하시지만, 특히 신약 교회 시대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시는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사도행전 4:8,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사도행전 8: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사도행전 8:39, "둘이 물에서 올라갈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사도행전 10: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사도행전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사도행전 15: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사도행전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사도행전 16:7,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사도행전 18:5,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성령에 이끌리어--전통본문]."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물론, 때때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활동하셨다. 사도행전 9:4, 5,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 .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도행전 9:10,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사도행전 9:34,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사도행전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이상과 같은 의미들에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다시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單回的) 사건이었다. 헤르만 바빙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적절하다: "오순절에 발생했던 성령의 이러한 보내심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상 독특한(unique) 사건이다. 창조와 성육신과 같이, 그것은 오직 한 번 발생했다. 중요성에 있어서, 그것과 동등한 성령의 어떤 허락하심이든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잉태시에 인성을 취하셨고 결코 그것을 다시 버리지 않으시듯이, 성령께서도 오순절에 교회를 그의 거처와 성전으로 택하셨고 결코 그것으로부터 다시 분리되지 않으신다"(Herman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p. 386).

1-2. 일반적 의미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건이라는 일반적 의미도 가진다. 성령께서는 이 날 그 신자들 속에 처음 들어오셨고 영원히 그들 안에 거하셨다. 신자들 속에 성령께서 들어오시는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오순절은 반복된다. 즉, 죄인들이 구원 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들 속에 들어가시고, 그들을 인치시고, 영속적으로 그들 속에 거하시는 것이다. 사도행전 10:44이 증거하듯이,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전도를 듣고 믿는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내려오셨고, 그들 속에 들어오셨다. 사도행전 19:6의 에베소의 제자들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들은 바울의 전도를 듣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안수 받을 때, 또한 성령을 처음으로 받았다. 성령께서 최초로 그들에게 들어오신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이미 지상에 강림하여 계신 성령께서는 교회의 새 회원이 되는 새 신자의 심령에 들어가신다. 물론 신성을 가지신 성령께서 위로부터 들어가시는지, 옆에서 들어가시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무한하신 영,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2. 성령세례의 의미

그러면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성령세례란 전통적으로 생각해 온 대로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처음으로 들어오시는 사건인가, 아니면 오순절파나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미 믿어 구원 받은 자들 즉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 자들에게 두번째의 경험으로 충만하게 부어지시는 사건인가?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세례라는 말이 나오는 곳은 사도행전 1:5과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뿐이다. 사도행전 1:5의 성령의 세례는 오순절 사건을 가리켰다.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처음 들어오신 사건인 동시에, 이미 믿던 자들 속에 두번째의 경험으로 들어오시되 충만하게 부어지신 사건이었다.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도행전 11:16의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최초로 들어오신 사건이었다. 15절,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이 경우에는, 사도행전 1:5의 경우와 달리, 대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비로소 듣고 믿었을 때 일어났던 사건이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2:13의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신비적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 .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동일한 사건이다.

이상의 세 성경 구절들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개념은 성령세례가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최초로 들어오시는 사건이라는 전통적 개념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오순절 사건의 일반적 의미와 동일하다. 성령세례란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처음 들어오셔서 그들 속에 영원히 거하시는 사건이다.

그것은 곧 신자의 중생(重生) 사건과 동일하다. 신자는 중생시 성령을 받고 그것이 곧 성령의 세례인 것이다. 중생시 받는 성령을 성령의 세례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께서 그 시간에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으시고 우리의 죽었던 영혼을 살리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령의 구원하시는 사건인 것이다.

오순절파는 사도행전 1:5에 근거하여 믿는 자가 두번째의 경험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오순절 사건 이전의 제자들과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상황이 다르다. 왜냐하면 오순절 사건 이전의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기 전이었지만, 오늘날의 신자들은 믿을 때 이미 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3. 성령세례의 시간

성령세례가 성령께서 최초로 신자 속에 들어오시는 사건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성령세례의 때에 관하여 성경 역사상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 이전과 이후를 구분해야 한다.

오순절 사건 이전에는, 사람들이 예수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 예수님을 이미 믿었고 이미 깨끗함 곧 중생(重生)을 얻었다. 요한복음 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한복음 7:39,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16장에서 성령을 약속하셨고, 또 사도행전 1:4, 5에서도 승천하시기 직전에 성령세례를 약속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오순절 사건 이전에 예수님을 진실히 믿었으나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었고, 예수님 승천하신 지 약 10일 후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을 받은 것은 시간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는다. 사도행전 10, 11장의 고넬료의 경우,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 혹은 성령세례는 시간적으로 동시적이었다. 그것들은 두 개의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었다. 또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에베소의 제자들의 경우도 자세히 읽어 보면, 그들이 요한의 세례만을 아는 자들이었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듣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을 받았다. 또 고린도전서 12:13도 성령세례와 중생 사건을 동일한 사건으로 증거한다. "우리가 . .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한 몸이 되는 것은 중생 사건이다.

더욱이,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다 성령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령께서는 인만 치고 떠나신 것이 아니고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인치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요한일서 2:20, 27,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성령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 .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내주하시는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내주하시는 성령]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고린도전서 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께서 예수 믿는 우리 속에 오셔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신 것이다.

또한, 세례(洗禮)라는 말은 죄 씻음과 새롭게 됨을 표시하는 것인데, 신약성경은 예수 믿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씻음과 새롭게 됨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령세례와 같은 뜻이다. 고린도전서 6:11,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7,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단지, 사도행전 8:15-17에 기록된 사마리아 교인들의 경우만은 예외적이었다. 오순절파는 이 구절을 가장 중요시하며 이 구절에 근거하여 예수 믿는 것과 성령세례 받는 것을 분리시키려 한다. 그러나 그 성경 본문 16절은 그것이 예외적이었음을 보인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라." '오직 . . . 만'이라는 표현은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 받지 못한 것이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즉, 이 구절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는 법이었는데, 사마리아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J. A. Alexander, Acts, p. 332).

사마리아 교인들의 경우가 예외적이었던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가지고 있었던 특별한 신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오래도록 종교적 간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들 보기에 반쯤 이방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만일 처음부터 사도들이 그 곳에 내려가 전도해서 예수 믿는 자들을 얻었다면, 아마 성령 강림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자는 사도가 아니고 집사인 빌립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일을 지연시키셨던 것 같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도들이 파송되어 그 곳에 가서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사마리아 교인들과 유대의 교인들과의 영적 일체성은 확증되었다.

사도시대에 이 한 가지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약성경이 전체적으로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 곧 성령세례를 시간적으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에는 신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든가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성령을 받는 것 혹은 성령세례가 예수 믿는 자가 두번째의 경험으로 경험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그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혹은 그가 중생했을 때 이미 받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미 성령을 받았고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또다시 성령 받기를 구하거나 성령 세례 받기를 간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지 이미 오신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우리의 영육의 각 부분과 각 기능에서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그에게 겸손히 복종하고 그를 의지할 것만 남아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오순절에 성령의 부으심은 그가 교회 속으로 최초로 그리고 실제로 오심이었다. . . . 그리스도의 몸의 새 부분들은 외부로부터 교회에 추가되며, 성령께서는 몸으로부터 새 지체들 속으로 부어지듯이 그 새 부분들 속으로 부어지셨다. . . . 이것은 또한 오늘날 왜 새 회심자들이 오직 일상적인 방식으로 성령을 받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 . . 또한, 성령의 다른 하나의 부으심이나 세례를 위한 기도가 부정확하고 참된 의미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한 기도는 실제로 그 오순절 기적을 부정한다. 왜냐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그 분은 우리에게 더 오실 수 없기 때문이다"(A. Kuyper, The Work of the Holy Spirit, pp. 115, 126, 127).

에취 씨 쥐 무울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서신서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성령의 세례를 구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 . . 보다 더 효과적 봉사를 위해 성령세례를 기다리는 행위는 잘못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미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이미 소유한 것으로 충만해지기 위해 가장 겸손한 신앙으로 우리 영혼과 삶의 모든 길과 부분들을 여는 것이다"(H. C. G. Moul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 pp. 222, 223). 또한 레만 스트라우스도 같은 신념에서 말하기를, "성령세례를 중생 경험과 별개로 보는 가르침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 . . 성령세례는 봉사의 능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난 자들로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게 하는 것과 관계된다"고 했다(레만 스트라우스, 성령론, 132-134쪽).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은사운동은 성령세례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성령세례의 결과로 받는 성령의 은사들,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강조한다. 성령의 은사들에는 자연적 은사들과 초자연적 은사들이 있다. 자연적 은사들이란 로마서 12:6-8에 증거된 대로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勸慰)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의 은사들을 가리킨다. 초자연적 은사들이란 고린도전서 12:8-10에 열거된 은사들을 주로 가리키는데,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 등 아홉 가지이다.

1.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목적

2.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사라짐 / 2-1. 언제 사라졌는가? / 2-2. 왜 사라졌는가?

1.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목적

사도시대에 주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성경 역사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직접 나타나심, 말씀하심, 그리고 기적들을 통해 주어졌다. 이것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일치하게, 사도시대에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혹은 기적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과 확증을 위한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2:8- 10에 언급된 성령의 아홉 가지 초자연적 은사들 중에,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은 계시 전달에 관계되고, 믿음, 병고침, 능력 행함은 계시 확증에 관계된다. 또한, 히브리서 2:3, 4에는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복음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하였다. 또 마가복음 16:17-20에는, 주께서 귀신을 쫓아냄, 방언, 뱀을 집거나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음, 병 고침 등의 표적들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확증하셨다고 증거했다. 특히 성경에서 기적을 '표적'(sign)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적들 혹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성격이 그러하였으므로, 그것들은 비록 사도 시대에 성도들에게 어느 정도 경험되고 행해졌을지라도 주로 사도들에 의해 행해졌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43과 5:12은 사도들을 통하여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증거했고 고린도후서 12:12은 기적 행함을 사도의 표라고까지 말씀했다. 에베소서 2:20의 말씀대로, 사도들은 신약 교회의 기초를 닦은 자들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혹은 기적들을 나타내게 하심으로 특별 계시들을 전달하고 확증케 하셨던 것이다. 비 비 워필드는 적절히 말하기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특별히 사도들의 증명서이었다. 그것들은 교회를 설립하는 하나님의 권위적 도구들로서의 사도들의 신임장의 일부분이었다"라고 하였다(B. B. Warfield, Counterfeit Miracles, p. 6).

2.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사라짐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교회 역사상 사라졌다는 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언제 그리고 왜 사라졌는가?

2-1. 언제 사라졌는가?

교회 역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사도시대의 교회의 특징이며 오직 사도시대에만 속하고 그 후시대에는 사라졌음을 증거한다. 따라서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중단 혹은 폐지를 인정하고 가르쳐 왔다.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에 대해 증거하는 신약성경의 말씀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2-14장의 말씀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에 반론하려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역사상 그렇게 섭리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겸손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주후 4세기 말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대주교장이었던 크리소스톰은 고린도전서 설교에서 방언은 이미 그쳤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David O. Beale, "Lecture on the History of Dotrines," Bob Jones University). 주후 5세기 초 유명한 어거스틴도 요한일서 설교에서 방언은 유대 기독교인에게 주신 초기 표적이었고 이전 시대에 이미 사라졌다고 가르쳤다(Beale).

칼빈 선생도 사도행전 10:44 주석에서 "방언의 은사와 및 그 밖에 그와 같은 것들은 교회에서 오래 전에 중지되었다"고 말했다. 비 비 위필드는 초대 교회의 자료들을 연구한 후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종교 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은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중지되었음을 매우 밝히 가르쳤다. . . .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기적들]은 사도시대 교회의 특징이었고, 오직 사도시대에 속했다. . . . 18세기 초에는 은사들이 [교회 역사의] 처음 3세기 동안 계속되었고 4세기 경에 사라졌다는 견해가 지배적이게 되었지만, 이 견해는 사실과 조화되지 못한다"(Warfield, pp. 6-10).

2-2. 왜 사라졌는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왜 사라졌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성경에서 두어 가지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 독특한 목적 때문에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과 확증이었다. 그런데 그 목적은 사도시대에 신약성경의 기록이 완성됨으로써 다 성취되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8, 19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이 성경에 충족히 기록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더 이상 주어질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라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워필드의 표현대로, "그것들[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의 기능이 그것들을 특별히 사도교회에 제한시켰고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그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

사실, 이것은 과거 수천년 동안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후에 그것을 책에 기록하게 하셨다. 그것이 구약성경이었다. 모세에게 주셨던 기적들은 그 후시대에 반복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모세에게 계시되고 확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시대에 전달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둘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 때문에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은 또한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을 보인다. 초자연적 은사들은 영속적인 무엇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온전한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단지 일시적이었고 부분적이었다.

고린도전서 13:8-12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이러한 성격을 자세하게 증거하였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질 것임이니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들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같이 내가 알리라."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온전한 것'이 오면 사라질 것이었다. 여기에 이 '온전한 것'이란 적어도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신약성경의 완성과 관계가 있다. 초자연적 은사들의 단편적인 내용에 비교하면,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온전한 계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의 충족하고 온전한 계시인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곧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고 초보적인 성격의 것들은 자연히 폐지되고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건물을 지을 때 비계목을 설치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비계목은 건물을 짓기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단 건물이 완성되면 비계목은 철거되어야 한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도 그러하였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일시성, 초보성을 나무의 지지대에 비유하여 말했다: "만일 과수원에 나무를 심는다면 흔히 그 곁에 큰 지지대를 세워 붙들게 한다. 그러나 아무도 과거 50년간 있었던 사과나무를 지지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는 기적과 이상(異像)의 지지가 필요치 않는 나무다. 여러분은 이상보다 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신구약 66권의 성경과의 관계는 마치 유치원과 대학교의 관계이다. 성령의 그 은사들은 유아들을 위한 것, 유아시절의 것과 같다. 신구약성경을 가진 자들이 그러한 은사들을 구하는 것은 마치 대학생이 유치원에 등록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비평: 은사운동에 대하여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역사상 계속 존재했고 오늘날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한다. 오늘날 오순절파 뿐만 아니라 또한 전통적 교단들 내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그러나 은사운동은 다음과 같이 비평되어야 한다.

1.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됨

2. 초자연적 은사들의 실재성이 의문됨

3. 신앙을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킴

4. 에큐메니칼 운동과 함께 감

1.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됨

첫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전반의 계속성 혹은 회복을 주장하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된다. 하나님께서 과연 성경 외에 또 다른 계시들과 예언들을 주신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것을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 최종적 권위의 말씀으로 믿고 있다. 신구약성경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누구에게 계시하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계시의 필요성이 무엇이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1900년 기독교 역사상 성령의 내면적 활동을 통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성경을 기억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새 계시적 활동들을 통해 동일한 성경의 내용을 또다시 받는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성경말씀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충족하다는 사실을 밝히 증거하셨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또한 앞에서 인용한 요한계시록 22:18, 19도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분명히 증거한다.

물론, 아무도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교회 역사상 거두신 은사들일지라도 다시 주실 수 있음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1900년 동안 거두어 가신 은사들의 계속성이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을 반대하는 일이 된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기적 행함의 역사가 아니고 십자가의 말씀을 전파한 역사이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였다(고전 1:22, 23). 물론 중생과 회개의 내면적 기적은 늘 일어났지만, 외적인 기적들은 오랫 동안 대체로 사라졌었다. 특별한 경우 기도의 응답으로 병고침을 받는 것 등은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충족한 계시의 말씀으로 그의 일을 진행해 오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과 새생활을 위해 충족한 수단이었다.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삶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잔잔한 내면적 활동은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난 적이 없었고, 하나님의 그러한 섭리 속에 신자들은 만족을 누렸다.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계속을 주장하는 은사운동은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되며 성경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에 반대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사들이 아니고, 성경말씀에 대한 성실한 순종이다.

2. 초자연적 은사들의 실재성이 의문됨

둘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교회역사상 계속 존재했고 오늘날 교회 안에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러한지 의문된다. 기독교회들은 성경에 증거된 계시와 예언, 방언, 병고침 등의 은사들을 계속 경험하여 왔는가? 하나님께서 신실한 성도들과 종들에게 그런 은사들을 항상 주셨었는가? 또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이라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우선, 계시와 예언에 대하여, 성경은 기록된 책의 내용 외에 다른 어떤 것을 더하지 말 것을 엄히 명령하였다.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그렇다면 성경 외에 계시와 예언을 말하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 아닌가?

역사상, 초대교회에 몬타누스파들은 초자연적 은사들을 주장했으나 이단으로 정죄되었었다. 18세기 에드워드 어빙이 설립한 카톨릭 사도교회는 모든 사도적 은사들을 주장했고 예언도 했으나 어떤 예언들이 성경과 충돌하고 또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정죄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안식교, 몰몬교, 및 여러 신비주의 집단들이 성경 외의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들을 말하지만, 다 이단들 혹은 불건전한 단체들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방언에 대하여, 은사운동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하며 이 은사는 거의 모든 성도들의 필수적 은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방언들이 외국어들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반해, 오늘날의 방언 현상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방언'이라는 헬라어 글로싸는 단순히 '언어'를 가리킨다. 신약성경에서 글로싸라는 말은 50회 사용되었고 이 말과 비슷한 말인 디알렉토스는 단지 6회만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 라숀(114회)은 헬라어 70인역에서 91회 가량 글로싸로 번역되었고 2번만 디알렉토스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사파(176회)는 대부분 '입술'(케일로스)로 번역되고 5회는 글로싸로 번역되었고, 아람어 릿솬(7회)은 전부 글로싸로 번역되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원어는 단순히 '언어'라는 뜻이다.

더구나, 방언이라는 말은 빈번히 글로싸이(방언들)라는 복수형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그것들이 여러 개의 언어들임을 나타낸다. 마가복음 16: 17, "새 방언들을 말하며."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방언들]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11, "그들이 우리의 방언들로 하나님의 큰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원문 직역). 사도행전 10:46, "이는 방언들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사도행전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들도 하고 예언도 하니."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방언들이 사도행전에 증거된 방언과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추측할 정당한 이유는 없다. 고린도교회가 경험한 방언 은사는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 사실들과 동시대의 현상이며, 따라서 사도행전에 나타났던 방언 은사와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실도 방언이 언어적 성격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언어가 아닌 소리를 통역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방언들은 대체로 외국어의 성격을 갖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 어떤 전문가들의 증거이다. 도날드 벌딕은 오늘날의 방언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① 반복이 매우 심하다, ②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의 언어적 배경이 비슷하다, ③ 한 두 개의 모음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④ 언어적 구조가 부족하다, ⑤ 방언에 비해 통역이 두드러지게 너무 길다, ⑥ 동일한 구절의 통역이 일치하지 않는다, ⑦ 영어 통역시 주로 17세기초의 흠정역(KJV) 문체가 사용된다(Donald W. Burdick, Tongues: To Speak or Not to Speak, p. 65). 미쉬간 대학교 언어학자 케넷 파이크와 미국 성서공회 관계 언어학자 유진 니다 등은 오늘날의 방언들이 언어학이 다룬 어떤 실제적 언어들과도 비슷하지 않다고 지적했다(Richard C. Schwab, Let the Bible Speak about Tongues, p. 108).

더욱이, 방언 같은 현상들은 역사상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어떤 불건전한 단체들이나 이단 종파들 속에 있었고 심지어 기독교 밖에도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몬타누스파들은 방언을 했다. 그 후 17세기 말까지 방언 현상은 교회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1776년 미국 뉴욕주 트로이 부근에 앤 리가 설립한 쉐이커 공동체는 남녀가 나체로 춤추면서 방언을 하였고, 앞에서 언급한 카톨릭 사도교회에서도 방언을 했다. 몰몬교 장로들도 유타주 성전을 봉헌할 때 방언을 하였다(Robert G. Gromacki, The Modern Tongues Movement, pp. 5-29; Schwab, pp. 4-7). 그러므로 방언 같은 현상이 다 하나님이 주신 방언 은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덧붙여서, 오늘날 은사운동에서 흔히 방언 훈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인위적이며 비성경적이다. 예를 들어, 1987년 7월 22-25일 미국 루이지아나주 뉴올리안스에서 모인 '성령과 세계 전도에 관한 북미 대회'에 관한 한 보도에 의하면, 한 저녁 집회후 성령세례 받을 자들을 위한 집회에서 인도자는 자기의 '기도 방언'을 따라하게 함으로써 참석자들로 하여금 방언을 체험케 하려 했고 그들에게 그것이 성령 세례요 하나님이 주신 방언임을 믿도록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제재되지 않았다(Dennis W. Costella, "Deceiving and Being Deceived," Foundation, July-Sept. 1987, p. 9).

그러나 성경의 방언 사례들은 결코 훈련을 통한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방언하기를 구한 것도 아니었다. 사도시대의 신자들은 믿는 자에게 성령이 오신 표로서 방언을 말하는 경험을 했었다. 그러므로 방언 훈련은 명백히 성경의 모범을 벗어난 행위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인간적 훈련으로 받게 하려는 거짓된 행위이다. 그러한 활동은 결코 하나님의 일일 수 없다.

그러면 오늘날의 방언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는 분명한 표가 없다면, 오늘날의 방언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물론 그것들 중의 일부는 하나님이 주신 방언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1900년 동안 거두어 가셨던 은사들을 오늘날 정말 다시 주실 것인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과 성경의 충족성에 비추어 볼 때 그 가능성은 매우 작아 보인다. 오히려, 오늘날의 많은 방언 비평가들은 현대의 방언 현상들이 심리적 현상이거나 위조품이거나 혹은 심지어 마귀에게서 기원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Schab, pp. 104-108; Burdick; Gromacki, pp. 44-49). 특히, 오늘날 방언 현상들의 비(非)언어적 성격이나 방언운동 안의 인위적 요소들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보인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서도 그렇게 불같이 일어나는 것은 악령이 아니고 무슨 영의 역사이겠는가?

마지막으로, 병고침(신유)에 대해서도, 우리는 단순히 병고침의 현상들이 그것들이 성령의 은사임을 확증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병고침의 현상들은 기독교 안팎의 신비주의적 집단들에서 있어 왔다. 신비주의 연구가 쿠르트 코흐는 악령에 의한 신비적 치료의 많은 사례들을 제시했다(쿠르트 코흐, 사단의 전술전략, 22-101쪽).

더욱이, 성경에서의 병고침의 사례들은 즉각적이고 비제한적이었는데, 오늘날의 병고침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죤 맥아더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병고침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① 한 마디의 말씀이나 한 번의 만짐으로 치료하셨다(막 8:22-26에서 소경에게 두 번 안수하신 예외는 있었지만). ② 즉시 치료하셨다. ③ 완전히 치료하셨다. ④ 모든 사람을 치료하셨고 치료하실 수 있었다. ⑤ 신체 기관의 질병들도 고치셨다. ⑥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다(John MacArthur, The Charismatics, p. 151).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의 소위 병고침과 신유의 은사들은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잠언 25:14, "거짓 은사를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원문).

3. 신앙을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킴

셋째로, 은사운동은 성경적 기독교의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에 불만족하며 성령의 체험을 강조한다. 즉 은사운동은 체험적 기독교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을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킨다. 강조점이 말씀에서 경험으로 이동된다. 성경 말씀으로 만족하던 신앙생활이 경험의존적인 신앙생활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 진리대로 사는 바른 삶을 강조해 왔다. 그것은 옛 길이다. 우리는 그것이 성경적인 건전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영성(靈性)의 표는 그리스도인다운 인격과 삶이지, 어떤 은사 경험이나 행사가 아니다. 은사는 결코 영성의 표나 척도가 될 수 없다.

성경의 대표적 한 예는 고린도교회이다. 고린도교회는 은사들을 많이 경험하고 소유한 교회이었음에도 불구하고(고전 1:7) 영적 어린아이라고 지적되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1987년과 1988년에 미국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던 짐 배커(Jim Bakker)와 지미 스웨거(Jimmy Swaggart) 같은 어떤 은사주의 T. V. 전도자들의 사치스럽고 부도덕한 생활들은 기독교계의 수치이었다. 또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지교회 부흥'의 주역이라는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시의 브라운스빌 하나님의 성회 교회의 세 명의 중심지도자들은 많은 분량의 토지를 샀고 부요한 집들을 지었거나 짓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교회 목사 죤 킬패트릭은 31만불짜리 호화 자동차로 여행을 하고 34만불짜리 호화 주택을 지었다. 전도자 스티븐 힐은 알라바마주의 공식 가격 847,931불짜리 거의 5만평 가량의 땅을 샀다. 브라운스빌의 학교 사역 책임자 마이클 브라운은 727,360불의 값이 나가는 집을 짓고 있다고 보도된다. (Pensacola News Journal; Bob Jones University, What in the World; Calvary Contender, 1998년 12월 1일.)

성경은 초자연적 은사들의 경험보다 바른 인격과 삶을 더욱 중시하고 강조한다. 신명기 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

마태복음 7:22, 23,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못했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린도전서 13:1-7은 그 어떤 은사들보다도 중요한 것이 사랑의 인격과 삶임을 밝히 증거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 은사들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객관적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초보적이고 부분적이며 어린 아이 시절의 것이었으나(고전 13:8-12), 신구약 성경말씀은 성숙한, 온전한 것이다(10절).

데살로니가후서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서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사모하지도 말고 그것들을 구하지도 말고 그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오직 신구약 66권의 말씀으로, 성경말씀의 연구로, 그 말씀을 믿고 사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을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한 줄 깨닫자. 오늘날도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새롭게 하시고 부흥케 하시고 성장케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하자. 교회의 참된 부흥은 다른 것을 통해서가 아니고 오직 신구약 66권의 말씀의 성실한 강론과 전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누가복음 16: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4. 에큐메니칼 운동과 함께 감

넷째로, 은사운동은 전통적 교회들과 사역자들이 체험치 못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체험했고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반면, 바른 교리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은사운동은 오늘날 배교적인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우상숭배적인 천주교회를 분별력 있게 배격하지 않는다. 오늘날 은사운동은 오히려 세계 교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1987년 성령과 세계 전도 대회에 관한 북미 대회에서 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지어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통합을 선언했다(Costella, pp. 16, 27). 이러한 미혹의 예언은 물론 그 대회에서 제재되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은사주의자들도 분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한 예로서 1993년 순복음 강남 신학원 교수진에는 자유주의적인 한신대, 감신대, 연대 신대의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크리스챤 저널, 1993년 5월호, 96쪽).

'만국을 위한 그리스도' 선교회는 1998년 6월 21-26일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라는 주제로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연사들에는 팻 로벗슨, 베니 힌 등이다(Dallas Morning News, 1998년 5월 30일). . . . 카리스마지 1998년 4월호에 의하면, 선교사 마틴 롬바도는 1월에 로마에서 '만국을 위한 그리스도' 성경학교를 개설하였고 그와 그 외의 은사주의자들은 이태리에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을 연합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롬바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천주교인들에게 쏟아부으시는 것을 본다. 은사주의 천주교 무리들이 각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베니 힌의 지난해 방문 이후 그러하다." 그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이 어울려 그의 충만한 영광 가운데 계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날을 볼 계획이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7월 1일.)

천주교회는 1965년 제2 바티칸 회의 때부터 은사운동을 후원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67년 이후 약 일억명 가량으로 추정된 천주교인들이 은사주의적 갱신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천주교회 내에서의 이 '갱신'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카리스마 1999년 7월호는 말하기를, 필라델피아 근교 프리젠테이션 BVM 천주교회는 '갱신'의 단계를 넘어서 '은사주의적 부흥'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그 특징은 방언을 말하기, 거룩한 웃음, 예배 악단, 춤추는 수녀들, 및 바닥에 납작 업드린 방문객들 등이라고 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일.)

이전에 천주교회 신부이었던 바트 브루어는 이렇게 말한다: "은사운동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들에 의해 . . . 의문할 여지가 없는 목적들을 위해 온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두 운동들은 동일한 밭고랑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많은 은사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성령을 통해 교파들간의 차이점들이 사라지고 무의미하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가 머리가 될] 거대한 한 세계교회를 향한 현재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은사운동으로부터 기세를 얻고 있다." (Jeffrey Khoo, Biblical Separation; Calvary Contender, 1999년 11월 15일.)

W. A. 크리스웰과 더불어, 은사주의적인 조용기, 폴 크라우취, 잭 헤이포드, 죤 윔버 등은 로버트 슐러의 자서전에 인정하는 추천의 글들을 실었다(Christian News, 1996년 5월 20일, 3쪽; Gist, 1996년 봄호). 그러나 로버트 슐러는 자유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를 조롱하는 기독교 일치 학교의 뉴에이지 연례대회에서, 문선명과 함께 통일교회 행사들에서, 그리고 몰몬교 성전에서의 종교 간의 조찬기도모임에서 주강사로 나타났다(Vantage Point, 1998년 11월호). 뉴에이지 운동가들과 몰몬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은 그의 교회당에서 연설했다(Calvary Contender, 1999년 1월 1일). 그는 오래 전에 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과 이별을 고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원하지 않는다(The Discerner, 1999년 6월호).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 신앙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Christian News, 1999년 7월 19일).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5일.)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인물을 위해 추천의 말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다.

오순절파에서 성장했던 오우 탤미쥐 스펜스(O. Talmadge Spence)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이 항상 신봉하는 가장 큰 이단 사상은, 첫째로, 현존하는 계시들을 성경과 대치하는 것이었으며; 둘째로, '방언들로 말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높은 영적 증거들을 위한 품질 증명으로 높이는 것이었다. 또한, '방언들로 말하는 것'은 말세를 위해 성경보다 더 후의 계시를 위한 길이 되었다." 그는 첨가하여 말하기를, "현재의 모든 오순절 운동들은 로마 천주교회 뿐만 아니라 또한 빌리 그레이엄 사역을 지지하고 그것들과 교제한다"(Staightway, 1999년 5-6월호; Calvary Contender, 1999년 7월 15일.)

이렇게 은사운동은 오늘날 잘못된 에큐메니칼 운동의 촉매로서 나타나 그 운동을 촉진시킨다. 이것이 현대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부흥의 표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현대교회의 영적 어두움과 혼란을 추가시키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것이 성령의 일이겠는가, 악령의 일이겠는가?

결론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충만하심 속에 살아야 한다. 성경은 신자의 삶이 이러한 영적인 삶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에베소서 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충만을 받으라'는 원어(플레루스데, 현재 수동태 명령형)는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뜻이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소멸치 말라."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이라는 증거를 갖지 않는다. 도리어, 그 운동의 여러 가지 잘못된 요소들과 경향들은 그 운동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게 만든다. 은사운동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결코 현대교회의 영적 부흥의 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대교회에 불어닥친 영적 혼란의 추가적 일일 뿐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들과 신자들은 마땅히 은사운동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마땅히 그 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만일 현대교회에 영적 침체가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경직된 성령론' 때문에가 아니다. 역사상 빈번히 그러했듯이, 교회의 영적 침체는 목사들과 신도들의 죄와 불순종, 특히 세상과 분리되기보다는 세상을 따라가며 세상과 타협하는 인본주의적 삶에 기인한다.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왔음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 부흥은 신자들의 성령세례 경험 같은 어떤 단회적 혹은 반복적 사건들에 있지 않고, 성경말씀에 근거한 철저한 회개와 진실한 믿음,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성경말씀대로 사는 온전한 순종의 삶에 있다.

http://www.oldfaith.net/03modern/04은사운동.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