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무엇인가? 마틴 마티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세계의 분열된 기독교회들이 자기들의 본질적 일체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일치와 재(再)연합을 향해 움직이는 시도"라고 정의했다(The Encyclopedia America, IX, 623). 로버트 브라운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분열된 기독교 가족을 재연합시키려는 관심"이라고 표현했다(The Encyclopedia of Religion, V, 20).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요 결실이요 주요 수단인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진술하기를,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한 거룩한, 공동적, 사도적 교회의 유형적(有形的) 일체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Gathered for Life: The Official Report of the Sixth As- sembly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p. 51). 이상의 설명들에서 볼 수 있듯이,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들을 재(再)연합시키려는 운동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2. 역사적 고찰

2-1. 19세기 말의 특기할 사건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를 간략히 고찰해 본다면, 우선 19세기 말 특기할 만한 몇 가지 사실들이 있었다.

첫째는 선교의 부흥이었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선교회들이 조직되고, 곳곳에서 선교 대회들이 열렸다.

둘째로, 1846년 복음주의자 연맹(Evangelical Alliance)이 영국에서 조직되었다. 이 단체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교회 연합체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셋째로, 기독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기독 청년 단체들(YMCA, YWCA)이 설립되었고 학생자원 해외선교운동이 일어났다. 1895년에는 세계 기독 학생 연맹(WSCF)이 조직되었다(David P. Gaines,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pp. 5-17).

2-2. 1910년의 세계 선교 대회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세계 선교 대회가 열렸다. 연구자들은 보통 이 선교 대회를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미국 감리교 평신도이었던 죤 모트의 활약으로 159개의 선교회들로부터 1196명의 총대들이 모였던 이 대회는 이름 그대로 세계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모였던 세계 대회이었다(William H. T. Gairdner, Echoes from Edinburgh 1910, p. 50). 이 대회의 한 결과로, 1921년에 국제 선교 협의회(IMC)가 조직되었는데, 이것은 최초의 세계적 에큐메니칼 기구이었으며, 1961년 세계교회협의회에 병합되었다.

2-3. 생활과 봉사 운동

1925년, 스웨덴 웁살라의 대주교 나단 죄더블롬의 주도 아래,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생활과 봉사의 세계 기독교 대회'가 모였는데, 이 대회의 관심은 사회 정치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적 원리들의 적용이었다. 이 대회로부터 시작하여 생활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이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모임들이 있었다(The Stockholm Conference 1925, ed. G. K. A. Bell, pp. 1-37).

2-4. 신앙과 직제 운동

1927년, 미국 감독교회의 감독 촬스 브렌트를 중심으로, 스위스 로잔에서 '신앙과 직제의 세계 대회'라는 또 하나의 세계적 회의가 열렸는데, 이 대회의 관심은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의 회복 문제이었다. 이 대회로부터 시작하여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운동이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모임들이 있었다(Faith and Order, ed., N. H. Bate, pp. 508-26).

2-5.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생활과 봉사 운동과, 신앙과 직제 운동이 서로 연합하는 움직임이 있게 되었고, 그 결과 1948년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에서 마침내 세계교회협의회가 조직되었다(The First Assembly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ed. Willem A. Visser 't Hooft, p. 14). 이와 같이, 세계교회협의회 조직의 배경이 되는 3대 관심은 선교, 사회 문제, 교회의 일체성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요 결실이요 주요 수단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1948년 창립 총회 이후,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제2차 총회,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제3차 총회,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제4차 총회, 1975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제5차 총회를 열었고, 1983년 캐나다 뱅쿠버에서 제6차 총회,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제7차 총회, 1998년 아프리카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제8차 총회를 열었다.

3. 비평적 연구의 필요성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필요하다.

첫째로, 우리는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력과 영향력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1991년에 117개국의 311 회원 교단들에 소속된 4억 이상의 기독교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였다(Christian News, 1991년 4월 8일, 1쪽). 한국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 대한기독교감리회(기감측), 구세군 등이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이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점들을 성실히 폭로하고 비평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모든 교회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가담하고 있든지 있지 않든지 간에,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성경적 근거와 신적 승인을 주장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 제1차 총회는 선언하기를,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땅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한다. 그가 우리를 이 곳 암스텔담에 모으셨다"고 했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21),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등의 성경 구절들을 즐겨 인용함으로써 에큐메니칼 운동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사무국 행정 사무관인 한스-게오르그 링크는 말하기를, "(에베소서 4:3을 언급하면서) 일체성에 대한 사도의 권면과 일체성을 위한 우리의 현재의 추구는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고 이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한 주님께 대한 불순종이 된다"고 하였다(Apostolic Faith Today, p. 1). 이러한 주장들은 에큐메니칼 진영 안팎의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에게 혼란의 목소리로 남아 있다.

셋째로, 더욱이 최근에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이전보다 더 우호적 태도를 보인다.

이전에는 보수적 교회들이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과 세계교회협의회를 비성경적이라고 간주해 왔었다. 사실상, 세계교회협의회는 창립 당시부터 그 지도층에 죤 베네트, 브롬리 옥스남, 헨리 반 듀젠, 추첸 차오, 대주교 죄더불롬, 윌리엄 템플 등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Carl McIntire, Modern Tower of Babel, pp. 139-206; David Hedegard, Ecumenism and the Bible, pp. 171-214).

그러나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 제6차 총회시 "뱅쿠버의 복음주의자들: 공개 편지"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복음주의자들 다수의 선언문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들이 복음의 핵심을 신봉하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명백히 받으신'자들이므로,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지도자들로부터 물러나지 말고 기쁘게 그들을 영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들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우리의 결심을 공적으로 선언할 압박을 느꼈다"(M. H. Reynolds, The World Council of Chruches: The Cup of the Lord or the Cup of Devils?, pp. 16-20).

이 공개 편지의 서명자들은 미국 풀러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이며 미국장로교회(PCA) 목사인 아더 글라서,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EF)의 전총무이었던 월드론 스카트,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 간사인 로버트 영블러드, 고든-콘웰 신학교 교수인 리차드 러블레스, 개혁주의 에큐메니칼 협의회(REC)의 총무인 폴 슈로텐보어 등 200여명이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비평적 연구가 필요하고, 만일 에큐메니칼 운동이 비성경적인 운동으로 판명된다면, 우리는 이 운동의 잘못을 널리 알리고 진실한 교회들에게 인식시켜 그들로 하여금 이 운동에 참여치 않게 하고 또 이 운동으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적 진술들

에큐메니칼 운동은 현대 교회의 신학적 변질 혹은 배교(背敎)와 더불어 시작되고 발전되었다. 그 문제점은, 비록 초창기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사실상 처음부터 존재하였다. 그것은 교회가 신학의 변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배제하지 못한 것이었다. 기독교계는 한편에서는 신학의 변질을, 다른 한편에서는 무분별한 연합 운동을 맞아들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일체성 혹은 연합이라는 구실 아래 전세계교회의 연합을 추구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그 문제점은 특히 그 운동이 추구하는 교회의 일체성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밝혀질 것이다.

1.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기초'

세계교회협의회 헌법의 맨처음에는 '세계교회협의회의 기초'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고 한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의 공동적 부르심을 함께 성취하기를 추구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Constitution, I, in Gathered for Life, p. 324).

이 진술 자체에는 어떤 잘못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단지,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로, 세계교회협의회에 소속된 모든 교회들이 이 진술에 충실히 서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 진술은 적어도 이단적 자유주의자들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회들의 건전한 교회 연합체로서 이 진술의 내용이 충분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진술은 이것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기타 다른 중요한 점들에서 이단적인 교회들, 예컨대 로마 천주교회 같은 교회를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2. '한 신앙'

세계교회협의회는 한 신앙 안에서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5차 총회는 선언하기를, 세계교회협의회의 첫번째 기능과 목적은 "한 신앙 안에서와 한 성찬 교제 안에서의 유형적 일체성의 목표로 교회들을 초청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1982년 리마에서 모인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위원회는 유형적 일체성의 실현을 위한 첫번째 요건으로서 "한 신앙 안에서의 일체성"을 강조하였다(Towards Visible Unity, p. 5).

1993년 한국의 주류 장로교단들(예장 통합, 예장 합동, 기장, 고신 등) 한국 장로교 협의회도 다음과 같은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모든 장로 교단들은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리, 하나의 복음에 대한 공동 이해, 개혁 신학과 신조에 바탕을 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공동 고백과 세례, 성만찬을 행하고 있다"("장로교 연합활동 활성화," 기독교보, 1993년 12월 11일, 7쪽).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 신앙'에 대한 강조는 성경적인 맛을 가진다(엡 4:5). 그러나 문제는 그 '한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그 한 신앙에 포함될 수 있는가? 또한 천주교회의 사상이 그 한 신앙에 포함될 수 있는가?

3. '사도적 신앙'

더욱이, 세계교회협의회는 사도적 신앙 안에서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위원회는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함께 고백하려고 할 때, 우리는 수백년을 걸쳐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성경대로의 사도적 신앙에 충실하기를 원한다"고 한다(Apostolic Faith Today, ed. Hans-Georg Link, p. 93). 세계교회협의회의 뱅쿠버 총회도 교회 일체성의 목표를 향한 한 단계로서 사도적 신앙의 공동적 인식, 공동적 설명, 공동적 고백을 강조한다(Gathered for Life, p. 48).

이것은 더욱 놀라운 진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그 내용이 무엇이며, 세계교회협의회의 모든 회원 교회들이 그 신앙에 충실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4.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세계교회협의회는 사도적 신앙의 예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제안하기도 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위원회는,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들에게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표현된 기독교 신앙의 완전한 일체성을 다시 인식하고 . . . 그 내용을 더욱 포괄적인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 주장하도록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Towards Visible Unity, p. 35).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주후 381년에 작성된 신조로서 성자와 성령의 참된 신성을 고백하는 정통적 신조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전능하신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을 믿는다. 또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 빛으로부터 나신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 창조되지 않으시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고, 그를 통해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 성육신(成肉身)하셨고 사람이 되셨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고난을 당하셨고 장사되셨고 제3일에 성경대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계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또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세계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죄사함을 위해 하나의 세례를 고백한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내세(來世)의 삶을 바라본다. 아멘."

이것은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 제시된 보다 구체적인 신앙의 내용이다. 그러나 역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는, 오늘날 자유주의적 교회들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성실히 받아들이겠는가이며, 둘째는 비록 이 신조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다른 추가적 요소들에서 이단적인 로마 천주교회를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신학적 포용주의(전체적 고찰)

앞에서 살펴본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적 진술들과 제안들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그럴 듯하다. 그러나, 세계교회협의회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료들을 조금만 더 자세히 읽어 본다면, 심지어 위의 네 가지 내용들도 단지 형식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교회 일체성을 위해 주장하는 형식적(形式的) 기초에 불과하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교회 일체성의 실제적(實際的) 기초는 신학적 포용주의(神學的 包容主義, theological inclusivism)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기독교회들 안에 있는 다양한 신학들을 비평 없이 포용하면서 교회의 일체성을 강조하며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분석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함

첫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세계교회협의회와 그 지도자들이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전총무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말하기를,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적 신학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결코 있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 교회가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들 안에서도 신학의 다양성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One World, January-February 1986, p. 5). 세계교회협의회의 전총무 유진 카슨 블레이크도 교회 연합을 위해 제안하기를, "연합된 교회는 그 공동성 안에서 (그리고 그 공동성 때문에) 신앙의 신학적 작성 형식들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포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The Ecumenical Review, 38 <1986>, 146). 세계교회협의회는 선교에 대한 한 선언문에서 진술하기를 자신이 "공통적 신앙의 다양한 표현"을 추구한다고 했다(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7 <1983>, 68).

2000년 2월, '교회일치운동의 역사와 현황'이라는 제목의 제1회 에큐메니칼 포럼의 기조 발제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인 박종화 목사는 교회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는 부류[보수적 교회]와 교회의 사회참여적 역할을 강조하는 부류[진보적 교회]는 한 동전의 양면과 같고, 이 둘을 포함하는 통합적 에큐메니즘이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한국 상황의 경우, 지금에 와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새롭게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 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은 에반젤리칼[복음주의] 운동과의 대립 구도로 자리 매김되는 축소된 위상을 지녀왔으며, 이런 이분법적 구도는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심화된 상태의 '적대적 냉전 구조'에서 파생되고 강화된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교회연합신문, 2000년 2월 13일, 8쪽).

신학적 다양성을 정당화함

둘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그 운동 안에 있는 신학적 다양성을 비평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신학적 다양성에 대한 그들의 정당화는 두 방면에서 관찰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그 신학적 다양성을 역사적 관점에서 정당화한다. 임마누엘 설리반, "1963년 몬트리얼에서의 신앙 직제 대회는 신학적 대화가 11, 16세기의 대분열 이전 시대들 즉 교회 안에 어느 정도의 건전한 다양성과 다원주의 뿐만 아니라 신앙의 기본적 일치가 있었던 시대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하였다(Ecumenical Trends, 15 <1986>, 4). 진 마리 틸라드(Jean-Marie Tillard)도 말하기를, "하나님의 교회는 심지어 가장 놀라운 일치의 시대들 동안에도 항상 다원적 형태이었다. 이것은 실천의 차원에서도 교훈의 차원에서도 그러했다"고 하였다(Different Theolo- gies, Common Responsibility: Babel or Pentecost?, p. 63).

한편, 어떤 이들은 그 신학적 다양성을 신학적 관점에서 정당화한다. 콘스탄티노플 에큐메니칼 교구의 대표자인 메트로폴리탄 다마스키노스 파판드루는 이렇게 말한다: "성육신 진리가 각 시대에 취한 역사적 복장은 진리의 본질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교회의 문제점은 그 회원들 중의 어떤 이들이 본질과 형식을 더 이상 구별할 줄 몰라서 형식적인 점들을 본질적인 것으로 취급하거나(전통주의의 오류) 혹은 중심적인 본질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잘못된 개혁론의 오류)"(Towards Visible Unity, p. 87). 하딩 마이어도 반문하여 말하기를, "우리 교회들의 분리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교리적 정죄는 결코 근본적 차이점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단지 개인적 차이점에 근거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라고 한다(Ecumenical Trends, 15 <1986>, 40).

에큐메니칼 행위들

셋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그 지도자들의 다음과 같은 에큐메니칼 행위들에서도 드러난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의 일체성을 위해 기독교 교리를 포용주의적으로 표현하기를 제안하고 강조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위원회 이전 의장인 니코스 니씨오릴스는 말하기를, "우리는 일체성을 위하여 진리를 정의하여야 한다. . . . 교회가 발언하는 모든 교리들은 교회의 교제를 회복하는데 의무적이라는 불가피한 명제는 절대적으로 참되고 필요하다"고 한다(Ecumenical Trends, 15 <1986>, 181). 라이문도 파니카도 말하기를, 에큐메니칼 토론의 목표는 "다양한 기독교 신앙 고백들을 초월하며 또한 내재하는 원리에 보다 더 깊이 충실하는 항상 어떤 새로운 일치점이다"라고 한다(Journal of Ecumenical Studies, 19 <1982>, 781).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또한 교회의 일체성을 위해 서로를 인정하고 성찬의 교제를 나누기를 제안하고 강조한다. 교회연합협의회(COCU; 이 단체는 1999년 1월 명칭을 CUC로 바꿈)의 소위 '언약'(Covenanting)은 한 세례 안에서 회원들을 서로 인정할 것, 서로를 교회들로 인정할 것, 안수 받은 목사들을 서로 인정하고 화해할 것, 정규적인 성찬 교제를 나눌 것 등을 포함하였다(Covenant- ing toward Unity: From Consensus to Communion, pp. 9-20). 르로이 개릿도, 일체성의 실제적 적용으로 제안하기를, 모든 기독교인들은 서로의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동등한 자로 영접할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교리적 심사 없이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또한 함께 일하는 목회 사역이 가능하다고 했다(Theology Today, 40 <1984>, 446).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 미 합중국 장로교회(PCUSA), 미국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CC), 및 미국 개혁교회(RCA)는 국내외 선교 협력과 목회자 상호 인정 등을 포함한 '전면적' 교단 교류를 선언한 합의서를 수용하였다. 미 합중국 장로교회 외의 다른 세 교단들은 1997년 총회에서 이미 그것을 수용했고, 미 합중국 장로교회는 1998년 3월 19일 현재 172개 노회 중 표결을 끝낸 111개 노회 중 109개 노회가 그것을 찬성함으로써 확정된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기독신문, 1998년 3월 25일, 16쪽.)

1993년 12월 한국 장로교 협의회 운영위원회는 1994년 사업 계획으로 각종 강단 교류, 신학생 예배 강단 교류, 연합 예배 등을 결의했다("장로교 연합활동 활성화," 기독교보, 1993년 12월 11일, 7쪽).

2000년 2월 한국 장로교 총연합회(대표 회장: 김도빈 목사)는 내장산 관광호텔에서 한국 장로교 연합과 일치 간담회를 열었다. 그 모임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 모색'이라는 제목의 주제 강연에서 전병금 목사는 "처음부터 기구적인 통합을 모색하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연합교회의 형태를 갖춰가면서 점진적인 통합을 이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과제들로서 교단간의 강단교류 활성화, 총회에 상호 사절단 파견, 2000년 장로교 총회 개회예배 함께 드리기, 같은 지역 안에서의 연합예배와 성찬식, 세계 개혁교회 연맹 참여로 국제 교회와의 연합 강화 등을 제안하였다. 논찬에서 김재규 목사(예장 대신측 총회장)는 "한국교회에서 사상 논쟁이 사라졌다는 발제에 동감을 표하고, 열린 보수와 열린 진보가 대화하면 사상 논쟁은 무너질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일치를 위해 "우선 실현 가능한 선교, 예배에 대한 것만이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해가자"고 주장하였다. (기독교보, 2000년 2월 12일, 10쪽.)

또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의 일체성을 위해 선교 활동에서 서로 협력할 것을 제안하고 강조한다. 앞에서 언급한 교회연합협의회(COCU)의 언약은 선교와 전도에 함께 참여할 것을 포함하였다(Covenanting toward Unity, pp. 14-16). 콘스탄티노플 에큐메니칼 교구의 세계교회협의회 파송 상임대표인 메트로폴리탄 에밀리아노스는 말하기를, "인간적인 혹은 신적인 어떤 법도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교리적 혹은 예배 의식적 차이점들 때문에 다른 자녀들을 돕는 것을 중지시킬 수는 없다. . . . 교회 역사는 요컨대 교리적 차이점들이 선교 활동에 협력치 못할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인다"라고 하였다(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72 <1983>, 258).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미 1948년에 세계교회협의회라는 세계적인 협의체를 구성하였다. 또 각 나라에서는 교회협의회(NCC)들이 구성되어 있고 지역적으로도 협의체들이 있다. 또한 미국 안에서는 9개 교단들로 시작된 교회연합협의회(COCU; 이 단체는 1999년 1월 명칭을 Churches Uniting in Christ=CUC로 바꿈)가 있다.

한국의 개신교 17개 교단의 총회장 및 총무 23명은 2000년 7월 6일 연세대에서 간담회를 갖고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할 '한국교회연합준비위(가칭)'를 구성하였다. 참여한 교단들은 예장 통합, 예장 대신, 감리교, 기장, 기하성, 기성, 기침, 구세군, 정교회 등이다.

교단 대표들은 90년대 이후 침체 상태를 보이고 있는 한국 개신교가 사는 길은 연합과 일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최성규 기하성 총회장은 "지금의 위기감을 넘어서는 길은 진보와 보수, 개혁과 복음 등 이분법을 넘어서 형제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주요 교단들이 주체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예장 합동, 예장 고신, 예장 개혁 등 보수교단들의 참여, 그리고 현존하는 양대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 총연합회의 해체 등의 큰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지적된다. 이번 모임의 초청자였던 기장측의 전병금 목사는 "한국 교회가 이번에 하나되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흔들리며 앞으로 상당 기간 연합하기 어렵다는 각오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2000년 7월 10일, 21쪽.)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세계교회협의회의 손짓

수십년 동안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였던 세계교회협의회(WCC)는 근래에 와서 복음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손짓을 보이고 있다. 1998년 12월 짐바브웨의 하라레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8차 총회는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의 지도자인 죠지 반더벨드를 주요 연사로 내세웠다. 또한 세계교회협의회 지도부는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에 파송된 월드 비젼의 공식적 대표인 독일 루터교회의 쿠르트 방게르트 목사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였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0월 15일.)

미국교회협의회는 새 조직체의 시작을 탐구하기 위해 천주교인들과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만날 것이라고 한다. AP통신에 의하면, 이런 제안의 통지문은 미국 천주교 주교회와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에 보내졌다. 미국교회협의회는 지난해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새 에큐메니칼 모험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었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6월 15일.)

비평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임

무엇보다 생각할 점은,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이다. 교리(敎理, doctrine)는 진리의 언어적 표현 혹은 명제적(命題的, propositional) 진술을 가리키며, 신학(神學, theology)이란 그러한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 것, 즉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가리킨다. 성경은 기독교가 하나님의 확실하고 불변적인 진리들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히 계시한다. 이 사실로부터 당연히 내려지는 결론은, 신학의 중심적 내용은, 만일 그 신학이 바른 신학이라면, 변하지 않으며 변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신학들을, 그것도 그것들이 서로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비평 없이 받아들이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비성경적인 잘못이며 기독교회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교회의 일체성도 교리적 성격을 가짐

또한, 교회의 일체성도 교리적 성격을 가진다. 교회의 일체성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요한복음 17장과 에베소서 4장은 교회의 일체성의 대상과 성격을 통해 그 일체성의 교리적 성격을 잘 보인다. 그 구절들에 의하면, 교회의 일체성이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의 일체성(엡 1:3-1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의 일체성이며(요 17:9), 하나님 안에서의, 진리 안에서의 일체성이다(요 17:11, 21). 다시 말해, 교회의 일체성은 바른 진리와 교리 안에서의, 그 위에서의 일체성인 것이다.

워필드는 바르게 말하기를,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 위에 기초하였다. 그리스도 안의 일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라고 하였다(B. B. Warfield, "True Church Unity," Selected Shorter Writings, p. 302). 마틴 로이드-죤스도, "진리와 교리를 떠난 일체성이란 없다"고 바르게 말하였다(Martin Lloyd-Jones, The Basis of Christian Unity, p. 50). 그러므로,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이름 아래 신학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교회는 바른 교리들을 지킬 의무를 가지고 있음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전달받았고 현재 소유하고 있으며 또 그 진리들을 간직하고 지키라[보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 전통)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3, 14,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바른 말들의 표준을 지키라]." 기독교의 정통 교리들은 근본적 교리들을 내포한다. 개신교회의 주류적 교파들은 공통적으로 믿고 고백하는 교리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통적 근본 교리들은 교회의 일체성의 기초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이나 죤 오웬도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들을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의 기초로 간주했다(Institutes, IV. i. 12; The Works of John Owen, XV, 106). 그러므로, 바른 교리들을 지킬 교회의 의무를 생각할 때, 바른 교리들을, 적어도 역사적 개신교회들의 공통적 근본 교리들을, 보존함이 없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잘못이다.

교회는 이단들을 배격할 의무를 가지고 있음

더욱이, 교회는 이단들을 배격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로마서 16:17, "너희의 교훈을[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유다서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기독교의 전통적, 정통적 신앙 사상을 부정하는, 갖가지 형태의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이 유행하고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이 무슨 전문적 명칭으로 분류되든지 간에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초자연적 사실들과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 복음의 핵심인 그의 형벌적 대리적 속죄 사역, 그의 육체적 부활, 그의 재림 등을 부정하고 있다. 그것들은 교회 역사상 어느 이단 종파의 사상보다도, 심지어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천주교회의 신학보다도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로부터 크게 탈선한 이단이다. 메이천의 분석과 평가대로,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연주의적, 비(非)속죄적 종교이며, 단순히 한 이단이 아니라 전혀 기독교가 아니다(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그러므로, 바른 믿음에서 떠난 이단들을 배격해야 할 교회의 의무를 생각할 때, 기독교계 안에 있는 다양한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함이 없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큰 오류이다.

신학적 포용주의(성경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이상의 전체적 고찰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구체적인 몇 가지 점들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그것은 잘못된 성경관의 포용에서 나타난다.

1. 분석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위원회의 모임들에서 채택된 다섯 개의 공식적 보고서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① 1949년의 왜담 보고서("성경 해석을 위한 지침들"), ② 1963년의 몬트리얼 보고서("성경, 전통 및 전통들"<Bible, Tradtion, and traditions>), ③ 1967년의 브리스톨 보고서("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한 해석학적 문제의 중요성"), ④ 1971년의 루베인 보고서("성경의 권위"), ⑤ 1977년의 로컴 보고서("신약성경과의 관계에서의 구약성경의 중요성") 등이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이것들을 묶어서 성경: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그것의 권위와 해석(The Bible: Its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in the Ecumenical Movement, ed., Ellen Flesseman-van Leer)이라는 책을 내었다.

이 책에 담긴 보고서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성경관에 있어서 포용주의 입장을 취한다. 브리스톨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성경관들을 제시한다: ① 성경은 교회가 전적으로 의존하는 유일한 진리의 규범이다, ② 성경은 교회 안에서 계속적 생명을 가졌던 동일한 전통의 산물이다, ③ 성경은, 입구가 여럿인 기독교 진리의 종합관(varigated complex)에서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그런 다음, 그 보고서는 "우리는 이 입장들 중의 어느 것도 배타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고 진술한다(pp. 38, 39).

또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포용적이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성경 해석에 관한 다음과 같은 여섯 개의 다른 원리들을 제시한다: ①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② 성경의 중심 주제(center)가 해석의 열쇠이다, ③ 성경은 성령의 인도 아래 개인의 양심에게 말한다, ④ 교회의 생각(mind)이 해석의 열쇠이다, ⑤ 교회의 가르치는 자들(magisterium)이 그 관리인(guardian)인 신앙의 저장물(the deposit of faith)이 해석의 열쇠이다, ⑥ 신조들이 해석의 열쇠이다. 그런 다음, 그 보고서는 말하기를, 우리는 자신의 해석 원리를 "자명하거나 결정적인 것으로 혹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한다(pp. 22, 38).

그러나 이 책에서 세계교회협의회는 특히 다음과 같은 명백한 잘못들을 포용하고 있다.

1-1. 성경의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받아들임

첫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공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브리스톨 보고서는 말하기를, "성경은 일군(一群)의 문학적 문서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문학적 문서들의 연구에 사용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 . . [그러므로] 문학적 비평적 방법이 필요하다"(p. 31), "성경은 그 많은 부분에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 . . 전통들과 기록물들은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에서 전달되어 내려 왔으며, 흔히 오랜 기간 동안 결합되고 후대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재작성되고 재해석되었다. . . . [그러므로] 역사적 비평적 방법이 필요하다"(Ibid.). 책의 편집자 플레스만-반 리어는 이 보고서에 대해 논평하면서 말하기를, "그 보고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사용하는 학자적 주석의 과정을 전적으로 긍정한다"라고 한다(p. 45).

루베인 보고서도 진술하기를, "성경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서 기원한 인간 문서들의 집합으로, 그리고 과거의 모든 다른 문학적 문서를 위해 채택된 절차들을 따라서, 연구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 . . 역사적 비평적 연구에 근거하여 성경 학자들은 최근 수십년 동안에 많은 애매한 점들을 분명하게 해결했다. . . . 그 연구 방법은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라고 한다(Ibid.).

1-2. 성경 속에 신학의 다양성과 상호 충돌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함

둘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 속에 신학의 다양성과 상호 충돌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브리스톨 보고서는 진술하기를, "성경은 매우 다양한 문학적 전통들의 집합을 포함하는데, 그 내용들은 흔히 서로 긴장 속에 있다. . . .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때때로 진짜 모순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 . .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그것들이 참으로 모순적인 곳에서 이것은 성경 시대 자체 안에서의 실제 신학적 불일치들로 돌아갈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서로 다른 사회적 혹은 역사적 상황들에 기인했을 것이다"라고 한다(pp. 31, 32).

1-3. 성경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함

셋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그것들을 해석된 역사로 본다. 루베인 보고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성경 학자들은 무엇보다 성경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건들이 모든 경우들에서 이미 해석된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 . . 보도된 사건들은 그러므로 결코 '순수한(bare) 사실들'이 아니고 오직 성경 저자들에 의한 해석의 옷을 입고서만 항상 우리에게 접근한다. . . . 우리는 성경에서 해석되지 않은 사건들이 없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p. 48).

또한, 세계교회협의회는 1984년에 우리의 공통적 신앙의 뿌리들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거기에는 죠지 판텔리스(Jorge Pantelis)의 자유주의적 글이 비평 없이 실려 있다("The 'Apostolic Faith' in Relation to the Teaching and Deeds of Jesus," in The Roots of Our Common Faith, pp. 41-53). 판텔리스는 성경 학자들이 예수님의 '명확한' 역사적 생애를 재구성하는데 실패했다는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받아들인다(p. 41). 사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들을 논하면서, 그는 말하기를, "저 이야기들은 분명히 초대 교회가 예수님의 생애의 그 측면을 어떻게 다른 방식들로 확장하기를 좋아했는지를 보인다"고 한다(p. 43). 또한, 변화산 사건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그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이야기가 부활 사건 이후의 제자들의 경험임을 동의한다"고 말한다(p. 50).

1-4.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함

넷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직접적으로 성경이 더 이상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되지 못함을 주장한다. 루베인 보고서는 진술하기를, "우리는 성경이 일차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에서 따라야 할 표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 . . 우리는 [성경을] 모든 문제와 모든 상황을 위한 규범으로 변경시켜서는 안된다. . . . 성경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부과되는 규범이 아니다"고 한다(p. 56). 그 대신, 그 보고서는 성경의 "관계적 권위"(relational authority)를 주장한다. 즉 성경의 권위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 그 보고서는 진술하기를, 성경의 권위는 "사람들이 그것을 권위있는 것으로 경험할 때에만 현재적 실재이다"고 한다(p. 48). 덧붙여서, 이 보고서는 성경의 영감이나 성경 저자들의 목격자적 성격도 성경의 신적 권위에 본질적이지 않다고 말한다(pp. 49, 54).

이상의 성경관으로부터 다음의 두 가지 결과들을 가지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첫째로, 성경 구절들을 증거 구절들(proof texts)로 인용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브리스톨 보고서는 말하기를, "흔히 해왔듯이 고립된 성경 본문을 '증거 구절들'로 인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다(p. 32). 둘째로, 성경의 명확한 메시지(the definite message)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몬트리얼 보고서에 대해 논평하면서, 플레스만-반 리어는 말하기를, "특정한 문제에 관해 성경의 메시지나 성경의 교리에 대해 더 이상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 . . 어떤 [성경] 본문도 어떤 현재의 교리적 혹은 윤리적 질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고 한다(pp. 4, 11).

2. 비평

2-1. 성경의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용납함에 대하여

첫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의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용납한다. 에드가 크렌쯔는 성경의 문학적 비평과 역사적 비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학적 비평(Literary Criticism)은 저자의 저작 목적, 사용된 문학 형식, 작품의 완전성과 신빙성, 그리고 그것의 자료들을 결정한다. 역사적 비평(Historical Criticism)은 작품이 쓰여진 역사적 상황과 그 작품의 선(先)역사에 관계한다"(Biblical Studies Today, p. 17).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간의 말이므로 위의 접근 방식들이 어떤 타당성을 가질지도 모른다. 워필드는 말하기를, "개혁 교회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 그들은 그 모든 말씀이 인간의 말임을 똑같이 명백하게 믿는다"라고 했고("Inspiration and Criticism," in Revelation and Inspiration, pp. 397, 398), 헤르만 바빙크도 성경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전적으로 인간 저자들의 산물임을 주장했다(G. C. Berkou- wer, Holy Scripture, p. 25). 아브라함 카이퍼는 심지어 역사 비평 연구를 수납했으며, 단지 그것이 추구한 지나친 부분들을 반대했다(Ibid., p. 15). 도날드 거스리는 말하기를, "참된 문학적 비평이 고등한 성경관과 공존할 수 없다는 타당한 이유는 없다"고 했다(Biblical Criticism: Historical, Literary, and Textual, p. 121).

그러나 문제는, 문학적 역사적 비평 방식을 취하는 비평가들이 실제적으로 두 가지의 잘못된 전제들 혹은 선입견들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첫째로, 비평가들은 초자연적 사건들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지 현대인들이 초자연적 사건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리차드 소울런은 말하기를, "엄격히 말하면, 역사적 비평 방식이라는 용어는 실재(reality)에 대한 인간의 현재적 경험이 과거에 무엇이 발생할 수 있을지 혹은 없을지를 결정할 객관적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역사적 추론의 기본원리를 가리킨다"고 했다(Richard N. Soulen, Handbook of Biblical Criticism, p. 99).

둘째로, 비평가들은 성경책들이 문자 그대로 참된 책들이 아니라고 전제한다. 즉 성경의 문자적 신빙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방법론은 내적 증거들로부터 성경책들의 진실성, 신빙성을 결정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 가설적 비평적 방법에 의한 결론은 성경이 그 언급된 저자들의 작품이 아니고 후대의 익명의 편집자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들 그리고 이런 류의 비평 방식은 매우 주관적일 뿐이다. 현대인들이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옛날에 성경 역사에서 일어난 계시적, 초자연적 사건들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참되고 정당한 변론이 될 수 없다. 비록 현재 경험치 못하는 것일지라도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들이라면 그것들은 인정되고 수납되어야 한다. 또한 성경책들이 그 주장된 저자들의 작품이 아니고 후대의 익명의 편집자의 것이라는 생각도 전적으로 주관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류의 불신앙적, 파괴적 비평 방식이 건전하고 정당한 성경 연구의 방식으로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2-2. 성경에 신학적 상호 충돌이나 모순이 있다는 생각에 대하여

둘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에 신학적 상호 충돌이나 모순이 있다는 생각을 용납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단순히 인간 저작들의 모음으로 본다면 상호 충돌이니 모순이니 하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하나님이 성경의 참 저자이심을 믿는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성경의 통일성의 교리는 성경 영감과 신적 권위의 교리 안에 내포되어 있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만일 성경책들이 그것들이 주장하는 그것,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책들은 한 생각의 작품이며, 그 생각은 곧 하나님의 생각이다. 이 사실로부터, 성경이 성경과 모순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라고 했다(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I, 187).

2-3. 성경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함에 대하여

셋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계시들은 역사적 성격을 가졌다. 성경 저자들은 진실한 증거자들이었다. 성경의 권위는 일차적으로 역사적 권위이다. 즉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거에 근거한 것이므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성격과, 성경 저자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진실한 증거성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곧바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파괴적인 오류이며 무서운 이단인 것이다.

2-4.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함에 대하여

넷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성경의 객관적 권위 대신에 '관계적 권위'를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신정통주의적 성경관이다. 물론, 성경의 관계적 권위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며 성령께서 성경의 신적 권위를 사람에게 확신시키시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은 진술하기를,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서 말씀에 의해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성경관의 문제는,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하고 관계적 권위만을 주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개신교회들의 공통적인 기본 원리를 근본에서부터 뒤엎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모든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되도록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주어졌다"고 진술했다. 루터교회의 일치신조는 "모든 교의들과 모든 박사들이 평가되고 판단되어야 할 유일한 규칙과 규범은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적이고 사도적인 글들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고 진술했다. 영국교회의 39개 신조도 "무엇이든지 [성경에서] 읽을 수 있고 그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아무에게도 그것을 신앙의 조항으로 믿도록 요구되어서는 안된다"고 진술했다. 이와 같이, 개신교회들은 공통적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 객관적 규범이라는 확신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개신교회들의 공통적인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의 부정은 성경 자체의 명백한 증거들과 충돌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명백히 증거하셨다. 주 예수님은 "성경은 폐할 수 없다"고 밝히 선언하셨다(요 10:35). 바울 사도도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통들]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살후 2:15).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이 기초가 무너지는 곳에 참 기독교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 기초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적 성경관을 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포용주의는 명백히 잘못이다.

신학적 포용주의(신조의 개념)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또한 신조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의 포용에서도 나타난다. (신조, 복음, 믿음에 대한 고찰을 생략하기를 원하는 분은 7장으로 넘어가십시오.)

1. 분석

1-1. 교회 연합을 위한 신조적 내용을 축소시키려 함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 연합을 위한 신조적 내용을 축소시키려고 한다.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아직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이를 위해 제안된다. 1982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분과의 리마에서의 보고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니케아 신조]에 근거하여 자기 교회의 신앙 고백적 입장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다른 교회들의 가르침을 배제하기 위해 작성되고 이해되었던 정죄들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Towards Visible Unity, p. 43).

1-2. 니케아 신조가 시대 제약성을 가진다고 주장함

둘째로, 어떤 지도자들은 니케아 신조가 시대 제약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리마 보고서는 1세기 신조들의 언어가 "그 시대의 문화와 필요와 상황에 의존했다"고 주장하면서, "[니케아] 신조도 그 언어와 그 개념들과 그 사상 형식들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진술한다(Towards Visible Unity, p. 34). 그 보고서에 의하면,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는 것은 고대 헬라-로마의 사상과 언어의 형식들에 속박되는 것을 의미한다"(Ibid., p. 40).

1-3. 니케아 신조를 부적절하거나 부정확하다고 간주함

셋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솔직하게 니케아 신조를 부적절하거나 부정확하다고 간주한다. 1981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분과의 소련 오뎃사에서의 회의 보고서는 "어떤 이들은 [니케아] 신조가 단지 낡은 언어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잘못된 기초적 존재론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진술한다(Apostolic Faith Today, p. 250). 그 보고서는 또한 "그 신조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성경적 신앙에 대한 부적절한(inadequate) 신조로 생각된다"라고 말한다(p. 251). 그 보고서는 덧붙여 설명하기를, 그들에게 그 신조는 일방적인데 왜냐하면,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와 성육신의 교리는 오직 요한복음에만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Ibid.).

1-4.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주장

넷째로, 심지어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주장한다. 오뎃사 보고서는 "신비의 요소가 [니케아] 신조에서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말로 표현하려는 어떤 시도에서든지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다음, 하나님에 대해 진술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를 믿는 유대적 신앙으로부터의 이탈, 즉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비판 없이 인정한다(p. 252). 구체적 한 예로, 다마스키노스 파판드루는 말하기를, "신조가 생명으로 취급될 때, 그것의 내용은 모든 정의를 초월한다. . . . 파악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를 누가 표현할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 위험을 무릅씀이 없이 그 정의할 수 없는 분을 정의할 수 있는가?"라고 한다(Towards Visible Unity, p. 86).

2. 비평

2-1. 교회 일치를 위해 신조를 축소하려는 생각에 대하여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 일치를 위해 신조적 내용을 축소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조가 무엇인가? 제임스 배너만은 신조의 기능을 ① 연합의 기초로서 성경의 진리를 붙듬, ② 하나님의 진리를 권위 있게 가르침, ③ 세상의 오류나 불신앙을 대항하여 진리를 증거하고 선포함이라고 요약한다(James Bannerman, The Church of Christ, I, 296-302). 신조의 세번째 기능이 본 논의에 특히 중요하다. 죤 머리도 신조들은 오류의 침입에 대항하여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음을 강조한다(John Murray, "The Creedal Basis of Union in the Church,"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I, 281). 그는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의 어려운 상황을 생각할 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 . . 가장 기초적 불신앙의 모순들이 확고한 성경 교리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Ibid.). 그러므로 이상적 신조는 모든 진리들을 선언하고 교회에 존재하는 모든 오류들을 반박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신조의 이 기능에 비추어 볼 때, 니케아 신조는 오늘날 교회의 교제의 기초적 신조로서 여러 점들에서 부족하다. 예를 들면, 니케아 신조에는 펠라기우스적 오류를 반박할 인간의 부패성에 대한 진술들이 들어 있지 않다. 또한 그 신조에는 교황 무오(無誤), 마리아 숭배, 미사, 연옥과 같은 천주교회의 오류들을 반박하는 아무런 진술들도 없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신조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 그리스도의 속상적(贖償的), 유화적(宥和的) 속죄, 인간들의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그리고 성경의 무오(無誤) 등의 중요한 진리들에 대한 아무런 언급들도 없다. 오늘날 교회들은 현대적 오류들이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진리들을 분명하게 선언하는 보다 더 자세한 신조를 필요로 한다.

개신교회들은 종교개혁 이후 자신들의 신조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 이 신조들은 니케아 신조보다 더 자세하다. 오늘날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서의 신조는 이러한 신조들의 본질적 내용들 이상을 포함해야 한다. 따라서 개신교회들이 그들의 확장된 신조들을 깍아내리고 보다 더 간략해진 신조로 돌아가려는 것은 후퇴이며 오류이다. 죤 머리가 표현하듯이, 그들의 현재의 신조들을 부정하는 것은 퇴보일 뿐만 아니라, 또한 "펼치시는 섭리의 사건들을 통해 그의 계시된 뜻을 더 충만히 이해하도록 교회를 깨우쳐 오셨던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이다(Ibid., p. 284). 그러므로, 교회 일치를 위해 필요한 신조적 내용을 니케아 신조에 제한시키려는 어떤 지도자들의 생각은, 신조의 기능을 고려할 때, 명백히 잘못이다.

2-2. 니케아 신조가 시대적 제한성을 가진다는 주장에 대하여

둘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니케아 신조가 시대적 제한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 계시들을 구체적,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 속에서 주셨고 정통적 신조들도 그런 상황들 속에서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특정한 문화들로 옷입었다고 묘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계시들이 주어진 문화적 상황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진리와 뜻을 전달하시는 적절한 수단이었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구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이러한 성격은 인간의 진술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런데 왜 이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신조가 시대적 제한성을 가진다고 강조하는가? 만일 이 강조가 신조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객관적, 영원적 진리들을 적절히 전달하기에 부족함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 자체의 근본적 성격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만일 하나님께서 역사적 상황을 그의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셨다면, 왜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작성된 신조가 영원한 진리를 적절히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겠는가?

더욱이, 만일 누가 신조는 시대적 제한성 때문에 영원한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즉시 회의주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사람의 모든 진술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당신의 주장도 시대적 제한성을 가지는가?"고 정당히 질문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조적 진술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직접 전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신조들의 역사적, 문화적 옷들--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뿐만 아니라, 또한 신조들이 선언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 자체에 대한 순전한 거부이다.

사실, 신조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정확히 반영할 때 영원한 성격을 가진다. 왜냐하면 진리와 교리는 내용에 있어서 불변적이며, 신조란 기본적 기독교 진리들과 교리들의 진술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이 기독교 진리들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이므로, 모든 신조들은 성경에 일치해야 하고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조가 성경적 진리들을 바르게 나타내는 한, 즉 그것이 성경적인 한, 그것은 또한 신적 권위를 가지고 또한 영원한 성격을 가진다. 교회의 신조들이나 교리들은, 아치볼드 앨릭잔더가 진술했듯이,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공식적 표현"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Archibald Alexander, "Creed,"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aedia, I, 741).

2-3. 니케아 신조가 부적절하고 부정확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셋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니케아 신조가 부적절하고 부정확하다고 주장한다. 만일 '부적절하다'(inadequate)는 말이 양적인 불충분성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니케아 신조는 내용에 있어서 교회의 일체성을 위한 기초로서 불충분하다. 그러나 만일 그 부적절함이 질적인 불충분성 혹은 부당성(impropriety)을 의미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그 신조는 그것의 기본적 철학에 있어서 부정확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 일방적이라고 주장하므로, 그들이 의미하는 부적절함이란 부당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니케아 신조가 부적절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 신조의 권위와 타당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생각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니케아 신조는 개신교회들을 포함하는 모든 기독교 세계가 공식적으로 성경적 신조로 수납해 왔던 신조이다. 영국교회의 39개 신조는 "니케아 신조는 철저히 받아들여지고 믿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가장 확실한 증거들에 의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 진술한다(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III, 492). 루터교회의 일치신조(The Formula of Concord)도 니케아 신조는 "보편적 기독교 신앙의 일치적 찬동이요 정통적 참 교회의 고백이다"고 말한다(Ibid., pp. 94, 95). 에이 에이 하지는 니케아 신조를 모든 기독교회의 신조라고 표현하였다(A. 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 5). 그러므로 니케아 신조의 권위와 정확성을 부정하는 것은 분명히 기독교회의 정통적 전통 혹은 전통적 정통에 반대되는 이단적 개념이다.

2-4. 진리의 언어적 표현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에 대해

넷째로, 심지어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진리의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유행했던 신정통주의적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은 하나님의 계시가 언어적, 명제적(命題的, pro- positional)이지 않고, 인격적, 경험적임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상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 즉 객관적(客觀的) 계시의 부정이며, 나아가서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하나의 신비주의나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만들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실 때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계시들은 언어적, 명제적이며, 여기에서 사람의 언어의 지식적 기능(cognitive function)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언어적 표현, 명제적 진술을 반대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기본적 성격을 반대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계시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이단적 개념들을 단호히 거절해야 하며, 건전한 옛 신조들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신학적 포용주의(복음의 개념)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또한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의 포용에서도 나타난다.

1. 분석

1-1.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함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1963년 신앙 직제 위원회의 몬트리얼 보고서는 전통(Tradition)과 성경을 분리시키며, 교회는 실제로 복음 자체를 의미하는 전통(영어의 대문자 Tradition)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단지 복음에 관한 증언들을 의미하는 전통들(traditions)의 형태만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았다(The Bible in the Ecumenical Movement, p. 21). 플레스만-반 리어는 말하기를, "우리는 전통(영어의 대문자 Tradition)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적 전통들(traditions)의 형태로 우리에게 온다"고 한다(Ibid., p. 3).

1-2.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함

둘째로, 어떤 이들은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한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복음의 명제적 진술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복음은 살아있는 실재(혹은 존재, a living reality)인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한다: "전통의 내용은 정확히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달하는 실재는 명제적 형식들 안에 완전히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Ibid., p. 27), "전통이 의미하는 바는 복음 자체 . . . 즉 교회의 생명 속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시다"(Ibid., p. 19). 플레스만-반 리어는 그 보고서에 대해 논평하기를, "따라서 전통(Tradition)은 단번에 고정된 그리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된 교리들의 총체로서 이해되지 않았고, 하나의 살아있는 실재, 즉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 속에서의 그 과정으로 이해되었다"고 한다(Ibid., p. 2).

1-3.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함

셋째로, 어떤 이들은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복음의 선포는 항상 불가피하게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말한다(Ibid., p. 20). 또한 1981년의 오뎃사 보고서는 순수한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복음의 '헬라주의화'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것의 '유대주의화'의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의 제기는 우리가 결코 '화학적으로 순수한'(chemically pure) 복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핵심으로 돌아간다"(Apostolic Faith Today, p. 252).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의 뱅쿠버 총회도 이와 비슷하게 진술한다: "많은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파한 복음이 이미 많은 다른 문화들과 오랜 세기 동안의 상호 작용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그들이 이 시점에서 문화적으로 제한된 기독교를 다른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Gathered for Life, p. 33).

1-4.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함

넷째로, 어떤 이들은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한다. 오뎃사 보고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신약의 글들 자체는 전통의 계속적 과정과 그것의 재해석을 증거한다. '복음은 동일한 복음으로 남기 위하여 변하는 것이 필요하다'. . . . 만일 신약 시대의 기간에 신앙의 작성과 재작성의 계속적 과정이 있었다면, 왜 우리는 이 과정이 역사상 어느 지점에서 중단되고 동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Apostolic Faith Today, p. 252).

2. 비평

2-1.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대하여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가 복음을 받았고 지금 소유하고 있음을 명백히 선언한다. 고린도전서 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갈라디아서 1:9,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사도는 그들에게 확정적, 불변적 복음을 전했고,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소유로 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주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실 때, 그 명령은 그의 제자들이 전파할 복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만일 그들이 전파할 내용을 소유하고 있지 못했다면, 무엇을 전파할 수 있었겠는가? 주의 제자들은 주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은 명백한 오류이다.

2-2. 복음은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實在)라는 생각에 대하여

둘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한다. 물론, 복음의 내용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복음은 살아 있는 실재(존재, 인격)이다.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 계시다. 그러나, 복음에 있어서 교리와 인격(살아있는 실재) 간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제시된 그 인격이시다. 예수께 관한 교리적 진술들은 복음의 근본적 내용이다(고전 15:3, 4). 그러므로 복음은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라는 견해는 비성경적인 오류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복음의 주요한 요점들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들이 공격을 받을 때, 복음은 파괴된다"고 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1). 고든 클락도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했다: "머리와 가슴 사이의 어떤 대립도, 지적 신앙에 대한 어떤 무시도 없다. 기독교는 어떤 명확한 역사적 명제들의 진실성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명제들의 진실성을 부정하거나 그것들을 어떤 신비적 경험의 상징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Gordon Clark, Religion, Reason and Revelation, pp. 107-8).

2-3. 복음이 문화적 제약을 받는다는 생각에 대하여

셋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복음이 문화적 제약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1:8, 9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정죄는 순수하고 영원한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구절에서 칼빈은 "복음의 순수하고 단순한 교리"에 대한 바울의 강조를 관찰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1). 이와 비슷하게, 루터는 로마서 주석에서 "이 서신은 바로 가장 순수한 복음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 mans, p. xiii).

만일 우리가 복음의 내용이 문화적으로 옷 입었다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 문화 자체를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의 거룩한 수단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어진 문화 속에서 그의 영원한 진리들을 사람에게 주실 수 없는가? 사실, 만일 어떤 특정한 문화 속에서 주어진 인간의 모든 진술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었다면, 그래서 어떤 순수하고 영원한 진술도 가능하지 않다면, 오직 회의주의와 불가지론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순수한 복음이 없다는 생각은 명백히 오류이다.

2-4.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생각에 대하여

넷째로, 심지어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복음의 내용이 영원하고 불변적이라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1:8, 9에서, 바울 사도는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파했고 그들이 그로부터 받았던 것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고 밝히 말한다. 복음의 내용은 그것에 대한 사도의 선포와 더불어 영구히 고정되었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바른 복음관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1:8, 9에 관련하여 말하기를, "한 번 복음의 음성이 들렸으므로, 그것은 마지막 날까지 취소되지 못할 것이다. . . .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무 것도 더해서는 안되고 아무 것도 수정해서는 안된다"고 했다(Lectures on Galatians, pp. 55, 56). 그러므로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생각은 명백히 비성경적인 오류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이처럼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포용하고 있다. 미국 남장로교회의 조직신학 교수이었던 로버트 댑니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포용주의적 견해 즉 소위 '넓은 교회주의'(Broad Churchism)는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신실한 증거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각 유형교회는 증거적 단체이므로, 오직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사두개적 멸시나 불성실만이 이 견해와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Robert Dabney, "What Is Christian Union?" Discussions: Evangelical and Theological, II, 440).

신학적 포용주의(믿음의 개념)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또한 믿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의 포용에서도 나타난다.

1. 분석

1-1. 믿음에 대한 반(反)지식적 견해를 주장함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믿음에 대한 반(反)지식적 견해, 즉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재시 마라쉰(Jaci Maraschin)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체계가 아니고 "하나의 산 경험, 하나의 존재의 양식, 그리스도인들이 그 안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분위기"이며, "이성적 범주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에 의존한다"(Towards Visible Unity, pp. 25, 26).

1-2. 믿음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함

둘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믿음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죠지 판텔리스는 현대 성경 학자들이 "예수의 '명확한' 역사적 생애를 재구성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The Roots of Our Common Faith, p. 42). 또한, 1983년 신앙 직제 위원회의 로마 보고서는 주장하기를, "이 사도적 믿음은, 사도적 공동체의 본래의 증거와 여러 세기를 걸쳐 이루어진 그 증거의 충실한 설명과 연속성을 가지고, 변하는 시대들과 장소들의 상황 속에서 항상 새롭게 고백되고 해석되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Ibid., p. 20).

2. 비평

2-1. 믿음에 대한 반지식적 견해에 대하여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믿음에 대한 반지식적 견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지식을 요구하고 그것을 내포함을 명백히 보인다. 이 사실은 복음서 기자들이 복음서들을 기록한 이유에서 증거된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4, ". . .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믿음에 지식이 필요치 않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믿음의 지식적 성격은 또한 주의 제자들이 무엇을 전파했는지를 살펴볼 때에 분명해진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 특히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전파했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믿음의 지식적 요소를 강조했다. 칼빈은 믿음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라고까지 표현했다(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II. ii. 7). 또한 그는 천주교회의 '맹목적 믿음'(implicit faith)의 개념을 반박하면서 "지식이 없는 곳에 믿음도 없다"고 단언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2). 촬스 핫지도 말하기를, "지식 즉 믿어야 할 명제의 의미의 인식은 믿음에 본질적이다"고 했다(Systematic Theology, III, 84). 제이 그레샴 메이천도 "모든 참 믿음은 지식적 요소를 내포하며 . . . 어떤 인격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인격에 대한 지식을 가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 . . 어떤 명제들에 대한 동의는 믿음에 절대필수적 요소이다"고 단언했다(What Is Faith?, pp. 40, 48).

그러므로 믿음과 지식을 대립시키고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생각은 큰 오류요 명백히 이단적이다.

2-2. 믿음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에 대하여

둘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믿음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믿음의 내용은 ① 예수 그리스도, ② 복음 진리들, 그리고 ③ 성경 전체인데, 그 어느 것도 변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며(히 13:8),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진리의 내용도 불변적이며(갈 1:8, 9),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불변적 말씀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말보다 더 파괴적이고 악한 말이 없다.

신학적 포용주의(천주교회에 대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개신교회 안의 이단적 자유주의 사상들의 포용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천주교회에 대한 긍정적, 우호적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천주교회 신자들의 수효가 개신교회와 헬라 정교회의 신자들을 합한 수효보다 훨씬 능가하므로, 소위 기독교계의 재연합이라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비젼은 천주교회를 포함함이 없이는 수적으로 큰 결함이 있을 것이다. 세계 기독교 백과사전에 의하면, 1980년 중반 천주교회 신자 수는 약 8억 9백만명, 개신교회 신자 수는 약 2억 8천만명, 헬라 정교회 신자 수는 약 1억 2천 4백만명, 영국교회 신자 수는 약 6천 5백만명이다(David B. Barrett, World Christian Encyclopedia: A Com- parative Study of Churches and Religions in the Modern World AD 1900-2000, p. 6).

분석

타임지 종교 편집인 리차드 오슬링은 포트랜드 대학교 잡지에서, "오늘날, 기독교도들에게 당면한 궁극적 질문은 비천주교인들이 교황 제도 아래 연합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이하의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Richard Ostling, "Piercing Together the Ecumenical Puzzle," University of Portl- and Magazine, Summer 1986, p. 11). 그의 말과 같이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은 천주교회와 점점 가까와지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천주교회에 대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긍정적, 우호적 태도

첫째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천주교회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초대 총무이었고 명예 회장인 빌렘 비셜트 후프트는 세계교회협의회와 천주교회의 적극적 협력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가 반복해 말하는 바는, 세계교회협의회 내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는 이제 모두 한 동일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The Ecumenical Review, 37 <1985>, 336).

세계교회협의회의 전총무인 에밀리오 카스트로도 공언하기를, "세계교회협의회와 천주교회 간의 현재의 관계는 매우 긍정적이며 모든 종류의 우호 관계들이 있다"고 했다(One World, January -February 1986, p. 6).

1992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새 총무로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콘라드 라이저(Konrad Raiser) 박사가 선출되었다. 그는 튀빙겐, 하이델베르그, 쥬리히, 하버드 대학 등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한 학자이다(기독교 연합신문, 1992년 9월 6일, 15쪽). 그의 배경은 루터파이지만, 그는 말하기를, "내가 에큐메니칼 운동 안으로 더 많이 이끌리면 이끌릴수록, 나는 헬라 정통교회와 로마 천주교회의 전통들을 더 많이 존경하게 되었고 그것들에 의해 더 많이 풍성하여졌다"고 했다(Calvary Contender, 1992년 10월 1일). 그는 후에 또 말하기를, 세계는 '후(後)-교파적' 시대에 있고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전통적 교단들을 넘어서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하며, 이것은 세계교회협의회가 비(非)교회들에 대해 열려 있음을 나타낸다고 하였다(Christian News, 1993년 6월 7일).

1997년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의 에큐메니칼 관계자 프랭크 센(Frank Senn) 목사는 말하기를, "나는 우리와 천주교회와의 관계가 우리가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의제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진영에 있다"고 했고, 부언하기를, "우리는 16세기에 분리되어 나간 자들이며, 우리는 다시 함께 돌아가야 할 자들이다"고 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7년 8월 1일).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는 1997년 8월 모임에서 수세기 동안의 천주교도들과의 분열의 싸움이 끝났다고 선언하였고, 과거의 정죄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진술을 958대 25의 표결로 승인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7년 9월 15일).

1998년 1월 아시아 기독교협의회(CCA)와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FABC)는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제2차 '기독교 일치를 위한 아시아 운동' 세미나를 갖고 아시아 지역 신구교 일치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 세미나는 아시아에서 유일한 신구교 사이의 공식적인 논의 기구이다. (기독교 연합신문, 1998년 1월 11일, 2쪽; 기독교신문, 1998년 1월 25일, 1쪽.)

1998년 1월 기독교 일치주간 연합예배가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려 기독교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였다. 거기에 참여하는 교회들은 일반 개신교회, 한국 성공회, 한국 정교회, 천주교회 등이다. (기독교신문, 1998년 1월 11일, 1쪽.)

세계 루터교회 연합회는 제네바에서 열린 1998년 연례회의에서 제의된 "칭의(稱義)의 교리에 대한 [천주교회와의] 공동선언문"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Dallas Morning News, 1998년 7월 4일). 그렇지만, 하루 뒤, 바티칸의 고위 관리들은 그 문서를 칭찬하면서 몇 쪽의 '설명서'를 내어놓았는데,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이 은혜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행과 공적에 대해 주시는 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일.)

세계교회협의회와 천주교회 사이에는 협력을 위해 지난 7년 동안 연합 실무회가 있어왔다. 둘 사이의 관계는 점점 진전되었다. 천주교회는 이미 온 세계의 56개국의 교회 협의회들의 정회원이다. 1998년 세계교회협의회 제8차 총회에 참석한 많은 천주교 신부들과 수녀들 중의 하나인 토마스 스트란스키는 신문기자들에게 천주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 간의 관계에 대한 간단한 역사적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1972년에는 바티칸이 가까운 미래에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이 되기를 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었지만, 이제 "나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미래에 세계교회협의회의 정회원이 되리라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2월 1일.)

미국 천주교 주교 대회와 미국 교회 협의회는 매년 문안과 사절단을 교환하며, '커져가는 협력'과 계속적인 '공동적 활동'을 보고한다. 1999년 6월 21일 크리스챤 뉴스는, "그러한 협력의 다른 한 상징으로, 교회 협의회의 회장이며, 미국의 전(前) 유엔 대사인 [친 마르크스주의적] 앤드류 영(Andrew Young)은 9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천주교 성당에서 그의 취임식을 거행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7월 15일.)

매트 코스텔라는 미국 침례교회(ABC)의 2년마다 모이는 1999년 6월 모임에 대한 보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 침례교회 목회자협의회는 그 매2년 모임의 첫째날에 모였고 싸우스 다코타주 워터타운에 있는 하나님의 어머니 수도원에서 온 베네딕 수녀 아드리엔 카우프만이 '실제적 대화: 회중들이 분열 가능한 문제들을 분열됨 없이 다루는 수단'이라는 주제에 대해 강연하는 것을 들었다. (지난번 매2년 모임에서는, 천주교회 추기경이 전체 모임에서 설교하였다)." (Foundation, 1999년 7-8월; Calvary Contender, 1999년 9월 1일.)

1999년 미국의 역사 깊은 하버드 대학교 신학대학의 새 학장에 천주교회 신부인 브라이언 헤이르(Bryan Hehir)가 임명되었다. 헤이르는 이 직위에 임명된 최초의 천주교인이다(Christian News, 1999년 9월 13일; Calvary Contender, 1999년 10월 15일).

1999년 10월 31일, 루터교회 세계연맹(LWF)의 크리스티안 크라우제 주교와 천주교회 교황청 일치위원회 위원장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은 '칭의(稱義)의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에 서명하였다. 이 사건은 신구교의 500년만의 화해의 사건으로 알려졌다(조선일보, 1999년 11월 2일, 8쪽). 크라우스 주교는 그 공동 선언을 치하하면서 그것을 '희망의 서명'이라고 묘사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 선언을 칭찬하면서 그것이 완전한 기독교 일치의 회복을 향한 중요한 걸음이라고 말했고(Christian News, 2000년 1월 10일, 3쪽), 또 "그리스도인들이 환희와 일치와 연합으로 나아가는 길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라며 환영했다(기독신문, 1999년 11월 3일, 16쪽).

천주교회와 루터교 세계연맹(자유주의 루터교)의 대표자들은 1999년 10월 31일에 모여 칭의(稱義) 교리에 관한 그들의 애매모호한 공동선언서에 서명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9년 12월 1일). 그러나 천주교회는 16세기 트렌트 공의회에서 공식적 교회 교의(dogma)가 된 이단들을 계속 주장한다. 천주교회가 그 무오한 교의들을 '개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 일치란 개신교 당사자들이 그들의 선조들이 믿었거나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일 것이다(World, 2000년 1월 1일).

빌리 그레이엄과 촬스 콜슨 같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위대한 기독교 목자로 찬양을 받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최근에 2천년을, 면죄부의 발행으로 완전케 되는 '희년'으로(연옥에서의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때로) 선포하였다(Calvary Contender, 2000년 1월 15일).

조선일보2000년 1월 22일자(23쪽)는 "신-구교 '하나 되기' 기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기독교 일치기도 주간 행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18일부터 25일까지는 그리스도교 여러 교파들이 화해와 단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그리스도교 일치기도 주간'. 1968년 로마 교황청과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함께 제정한 일치기도 주간을 맞아 국내외에서 많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 . . 18일 로마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가톨릭,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00년 대희년(大禧年) 교회일치 기도회가 열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영국 국교회 수장(首長) 조지 커레이 캔터베리 대주교, 동방정교회 대표 헬리오폴리스 수석대주교는 함께 베드로 대성당의 '거룩한 문'을 열어 젖히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예배 의식을 가졌다. 교황은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는 형제들이지만 이제 굳은 결의를 가지고 완전한 일치에 이르는 길에 들어섰다'며 '지난 1000년간 교회가 하나되지 못한 데 대해 그리스도께 용서를 구하고 새 밀레니엄에는 간절한 기도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자'고 강조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18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서 가톨릭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개신교 교단들, 루터교, 한국정교회, 성공회 등이 참가하는 합동기도회가 열렸다. 이 기도회는 여러 교파의 성직자들이 공동으로 의식을 집전했으며 성가대도 연합으로 구성하여 찬양을 불렀다. 교회협의회장 이성덕 구세군사령관은 설교를 통해 '신-구교 신자들은 관행과 제도가 다른 가운데 지내왔지만 이 순간 그리스도의 마지막 소원을 재확인하면서 "주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간절한 일치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창립 56년 만에 처음으로 천주교인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2000년 4월 앨버타 에드몬튼에서 열린 회의에서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천주교회 온타리오 주교인 안드레 발리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캐나다 최대 교파인 천주교회는 1997년 캐나다 교회협의회에 회원으로 정식 가입되었다고 한다.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현재 19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다. 발리 주교는 취임 인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화를 위해 서로를 더 잘 아는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일치가 내일 당장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일치를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크리스챤신문, 2000년 5월 22일, 2쪽.)

미국의 앨러배머주의 헌츠빌 타임즈(Huntsville Times) 2000년 1월 15일자의 한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천주교 신부가 [남] 침례교회에서 연설하고 안식교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대 희년 예배를 위한 기독교 일치 축제'에서이다. . . . 기독교 공동체는 1월 23일 [헌츠빌] 제1침례교회에서 예배와 찬양의 시간으로 모일 것이다." 주최측은 이것이 이 곳에서의 새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 천주교 연사는 로마 천주교회와 헬라 정교회와 개신교와 복음주의자들/은사주의자들이 대화를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들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평화를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 안식교 목사는 말하기를, "우리의 소망은 모든 분열의 장벽들이 제거되고 우리를 연합하고 함께 모으는 것들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오류 안에서 연합하는 것보다 진리에 의해 분리되는 것이 더 낫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2월 1일.)

심지어, 에큐메니칼 운동에는 모종의 교황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경향까지 존재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초대 총무이었던 비셜트 후프트는 일찌기 그 사실을 인정했다(The Ecumenical Review, 37 <1985>, 336).

1999년 5월 12일 영국교회(성공회)와 천주교회 신학자들로 구성된 '영국교회-천주교회 국제위원회'는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발표한 "권위의 은사(교회의 권위 III)"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로마 주교는, 교회의 보편적 수위권(首位權)의 표현으로서, 진리를 분별하고 밝히는 특별한 사목(司牧) 활동을 한다"고 명시했다. 죠지 캐리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번 문서에 대해 "환영한다. 폭력과 분열로 갈라진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이 한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기독신문,1999년 5월 19일, 16쪽;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일.)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천주교회의 태도의 변화

둘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천주교회의 태도도 변하였다. 천주교회는 1959년까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 밖에 있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는 1960년에 기독교 일치 촉진 사무국을 설립했고, 1962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했고, 그를 이어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쳤고, 1967년 기독교 일치 촉진 사무국을 교황청의 상설 기관으로 만들었다. 이 두 교황의 노력으로 천주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적극적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특별한 전환점이었다. 그 회의 이후, 천주교회는 다른 교회들과의 대화들에 활발히 참여해 왔다(John J. McDonnell,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nd the Catholic Church, pp. 129-221).

비록 천주교회가 현재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교회가 아니고 또 회원권을 구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 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68년 이후, 10-15명의 천주교회 신학자들이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위원회에 정회원으로 참여해 왔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는 (1) 매년 기독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을 위한 예비 대회들에 참여했고, (2) 세계교회협의회의 주요 대회들에 참관인 혹은 참조인으로 정규적으로 참여했고, (3) 세계교회협의회의 프로그램 작성 간사 중에 들어 있고, 또한 (4) 1985년 현재, 적어도 25개의 지역적 혹은 국가적 교회 협의회에 회원권을 가지고 있다(Apostolic Faith Today, p. 9).

1993년 8월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5차 신앙 직제 위원회 세계 대회의 120명 회원 중 26명은 천주교인으로서 전적으로 참여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3년 9월 15일). 1999년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천주교회는 이미 온 세계의 56개국의 교회 협의회들의 정회원이다(Calvary Contender, 1999년 2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수석 교리 사무관인 라칭거 추기경은 "교회의 일치와 신앙과 도덕에 대한 [천주교회의] 책임"에 대해 말하며, "이제까지 분리된 공동체들이 교황과 더불어 일치 안으로 들어올 때" 교황직의 사용이 [기독교계를] 변화시킬 방식들을 구상한다(Christianity Today, 1998년 5월 18일). 교황은 1995년에 비(非)천주교인들을 초청하기를, 교황직의 사용이 기독교 일치에 장애물이 아니라 도구가 되도록 그것을 함께 재고하자고 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8년 6월 1일).

1998년 세계교회협의회 제8차 총회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공식적 편지가 세계교회협의회 총무인 콘라드 라이저 박사에게 전달되었는데, 거기에서 교황은 총회 대표들에게 문안하고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세계교회협의회와 천주교회의 관계에 관하여, 연합 실무회의 골격 안에서 미래의 협력의 길들이 기독교 일치를 위한 추구를 강화하기 위하여, 또한 그것의 유형적 차원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라고 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2월 1일.)

은사 운동의 접착제 역할

셋째로, 오늘날 은사 운동은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 간의 접착제로서 나타난다. 이그네이셔스 카타넬로(Ignatius Catanello)에 의하면, 1983년 미국에서만 60만명 이상의 천주교인들이 매주 은사주의적 기도회에 참여하고 있고, 온 세계에서는 약 5천만명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The Effects of the Charismatic Movement on Local Ecumenism" <Ph.D. dissertation, New York University, 1983>, p. 1).

복음주의자들의 천주교회 포용

천주교회에 대한 포용적 태도는 자유주의적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또한 적지 않은 복음주의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이런 예들은 점점 누적되고 있다.

빌리 그레이엄

1993년 6월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세번째 전도대회를 개최했는데, 1050개의 교회들과 65개 교단들이 협력하였다. 이 대회에서 여섯 명의 천주교인들은 실행위원에 포함되었다(Christianity Today, 1993년 7월 19일자; Calvary Contender, 1993년 8월 1일).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 이사 스털링 허스턴은 말하기를, "지난 10-15년 동안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천주교회의 참여가 크게 늘어났고 약간의 수의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전도대회 계획위원회들의 공식적 대표자들로 봉사한다. 천주교회 신자들은 안내위원들, 성가대원들, 심지어 상담위원들로 환영을 받고 있다"고 했다(Calvary Contender, 1993년 12월 1일).

무디 먼슬리1993년 11월호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오늘날, 선이든 악이든,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을 분리시키는 선들이 사라지고 있다. 양쪽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촬스 콜슨은 쓰기를, "지금은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가 우리의 신앙고백들과 우리의 전통들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함께 모일 적절한 때이다"라고 했다. 빌리 그레이엄과 루이스 팔라우와 월드 비젼 같은 단체들이 천주교인들을 포함한다. (Calvary Contender, 1993년 12월 1일.)

휴스턴 크로니클(Houston Chronicle) 1997년 3월 30일자는 빌리 그레이엄의 알라모도움에서의 전도집회에 대한 보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지역 천주교회도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교황의 1987년 샌안토니오 방문 기간에 보인 그 침례교인[빌리 그레이엄]의 후원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었다. . . . 기독교 지도자로서 빌리 그레이엄은 신학적 차이점들을 초월하는 존경을 얻었기 때문에 침례교인들과 천주교인들과 장로교인들이 그레이엄 전도집회 준비를 위한 수개월 전의 계획 모임들과 훈련 회의들에 함께 모인다." (Calvary Contender, 1997년 5월 1일.)

복음 전파(Proclaiming the Gospel) 1997년 6월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주교회는 이제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대회들에 참여하고 있다. 전도대회를 선전하고 촉진시키고 천주교회 상담자들을 사용하는 댓가로, [빌리] 그레이엄은 믿음을 고백하며 앞으로 나오는 모든 천주교인들을 그들의 천주교회들로 돌려보내겠다고 그 지역의 주교와 약속한다"(Calvary Contender, 1997년 6월 15일).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8월 10일자는 이렇게 썼다: ". . . 인구 약 백만명의 [오타와] 지역을 위한 지난 6월 25-28일 빌리 그레이엄 전교 활동에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 간의 간격--그리고 어느 정도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 간의 간격--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전도대회를 후원한 470개의 지역 교회들 가운데, 60개는 천주교회들이었다. 천주교회의 참여는 모든 그레이엄 전도대회 가운데 가장 중대하였다." 그 잡지는 언급하기를, 새 신자들 중의 얼마는 천주교회에서 데려갔다고 하였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9월 1일.)

빌리 그레이엄은 최근의 한 대담에서 자기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금세기의 인물로 뽑겠다고 말했다(Religion Today, 1999년 12월 20일). 그는 말하기를, 현 교황은 "지난 200년 중의 교황들 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나는 그의 용기, 결정, 지적 재능, 및 천주교회, 개신교회, 헬라 정교회의 차이점들에 대한 그의 이해, 그리고 어떤 형식의 화해에 대한 시도에 감탄한다"고 하였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1월 1일.)

빌 브라이트

대학생 선교회의 창설자요 총재인 1969년 천주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천주교회를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기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 안에서 힘있는 역사를 하고 계시며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일을 돕기 위하여 수백만의 천주교인들을 사용하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The Post and Times Star, Cincinnati, Ohio, 1969년 8월 30일; David W. Cloud, "Bill Bright Joins Hands with False Gospels," Christian News, 2000년 1월 3일, 18쪽).

브라이트가 창설한 대학생 선교회에는 1970년대에 간사들 가운데 천주교인들이 있었다(James Hefley, "A Prejudiced Protestant Takes a New Look at the Catholic Church," 1971, p. 122; Cloud, Ibid.). 또한 그의 지도 아래 열린 '키(Key) '73'과 1976년의 '여기에 생명 아메리카가 있다'는 집회들을 위해 천주교인들이 참여하였다(Cloud, Ibid.).

1986년 빌리 그레이엄의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브라이트는 또 이렇게 말했다: "개신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이 서로 많이 관계하고 싶어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영께서는 천주교회 뿐만 아니라 또한 개신교회의 교제들과 교통들에서 이와 같이 크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곳마다 매우 편안함을 느낀다"(Foundation, 1986년 7-8월호; Cloud, Ibid.).

빌 브라이트는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을 따뜻하게 용납한다. 어떤 이들은 그가 1994년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상호 인정과 협력의 진술서에 서명한 것 때문에 그를 비난했고 ECT에 대한 그의 입장을 취소하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천주교인들 가운데 수천만명의 참된 신자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거절했다. (Christianity Today, 1997년 7월 14일; Calvary Contender, 1997년 8월 1일.)

다른 복음주의자들

빌리 그레이엄 뿐만 아니라, 또한 제리 팔웰, 잭 반 임페, 제임스 로빈슨, 에드 답슨 등의 복음주의자들은 다 최근에 천주교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하여 찬사를 보냈다. 1985년, 에드 답슨은 "교황 제도가 적그리스도적이라고 선언하는 극단주의자들은 . . .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고 말했다. 케넷 칸써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85년 9월 6일자 사설에서 교황을 '성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불렀고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그 '자신의 호소'에 대한 이유들을 열거하였다. (Calvary Con- tender, 1992년 12월 1일).

촬스 콜슨, 빌 브라이트, 제임스 패커 등의 복음주의자들은 1994년 기본적으로 서로의 양무리를 '개종시키지' 않기로 천주교인들과 합의한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라는 문서에 서명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7년 6월 15일).

1997년 9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모임에서 "구원의 선물"이라는 두번째 진술서를 발표하였다. 그 글은 매우 복음적인 구원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 외에는 구원 얻는 다른 길이 없다고 바르게 진술한다. 또 그것은 의롭다 하심이 인간의 선행으로 말미암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만 근거한다고 바르게 말한다. 그러나 그 진술서는 천주교회의 공로 개념, 연옥, 마리아 경외 등의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이해들'이 있다고만 언급하고 그것의 옳고 그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모든 사람은 주 안에서 형제 자매이다"라고 말한다. 또 그것은 진술하기를, "종교개혁의 유산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고전적 신앙고백을 확신을 가지고 공언하는 복음주의자들로서, 천주교회의 교훈에 양심적으로 충실하는 천주교회 신자들로서, 그리고 우리의 기독교 선조들에 대한 우리의 빚과 우리의 동시대인들과 우리 후에 올 자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함께 인식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우리가 여기에서 고백한 복음 안에서의 우리의 일체성을 선언한다"고 했다. 그 진술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대학생 선교회 총재 빌 브라이트,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해롤드 브라운과 죤 우드브릿지, 위튼 대학의 마크 놀, 카나다의 리전트 대학의 제임스 패커 등이다. 이들은 다 오늘날 유명한 복음주의자들이다.

달라스 신학교 교장 척 스윈돌은 1997년 10월의 한 서신에서 테레사 수녀를 '주목할 만한 여인'이라고 불렀다(Calvary Contender, 1998년 2월 1일). 제임스 답슨 박사는 고(故) 테레사 수녀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그의 생애에서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잭 반 임페는 이 '상냥한 40킬로그램 몸무게의 숙녀'가 구원을 받지 못한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꾸짖는다(C.E.C. Journal, 1998년 2월). 그러나 빌 잭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개인의 구원을 판단하기를 원하지 않지만, 그 [수녀] 자신의 입술로부터 그의 영혼의 상태에 관한 어두움을 나타내는 말들이 나온다. 그는 누구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영혼이 연옥을 떠나기를 기도했다; 그는 성찬떡에 대한 사제의 축복이 아니면 예수님을 소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교황에게 마리아를 '그리스도인의 협력 구속자, 협력 중보자 및 보혜사라고 부르기를 공공연하게 간청하였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3월 1일.)

잭 반 임페는 슬프게도 영적 분별력이 없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칭송하는 자들과 연합하였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3월 2일자는, 그가 최근에 교황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변호하는데 그의 전체 방송을 사용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다음번 교황이 요한계시록의 거짓 선지자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경고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로서 결합되었다"고 말했다(Calvary Contender, 1998년 3월 15일).

사업가이며 천주교인인 마이클 티미스(Michael Timmis)는 국제 교도소 선교회(Prison Fellowship International)의 회장으로 지명되었다. 그의 전임 회장이며 설립자인 척 콜슨은 명예 회장으로 이사회에 남아 있다(Moody Monthly, 1998년 8월). 티미스는 또한 프라미스 키퍼스의 이사로 있고(Calvary Contender, 1997년 9월 1일), 지난 10월에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모인 제4회 프라미스 키퍼스 총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7월 15일.)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4월 6일자에는 '여섯 개의 영감 있는 비디오 세트'에 대한 전면 광고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제목이었다. 이것에 관하여, 그 광고문은 이러하였다: "이 영감을 주는 비디오 선집은 가장 사랑받는 종교적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과 연합하도록 여러분을 초청한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4월 15일.)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9월 7일자는 고(故) 레이먼드 브라운 '신부'의 신약 개론을 높이 추천했고 "그는 오늘날 신약학의 탁월한 종합을 제공한다"고 논평했다. 브라운은 예수께서 전지(全知)한 하나님이 아니셨고 오류를 범하셨다고 말한 영향력 있는 천주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자이었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거부했고,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적이었다. 그는 1971년에 뉴욕의 자유주의적인 유니온 신학교에 갔고 그 학교의 첫번째 종신직 천주교회 교수가 되었다(Christian News, 1998년 9월 14일). 그러나 풀러 신학교의 1984-85년 요람은 브라운을 강사 명단에 두었다(Calvary Contender, 1984년 10월 15일).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의 설립자요 이사장은 빌리 그레이엄이다. 죠셉 스토웰, 워런 위어스비, 에드 답슨은, 천주교인들과 더불어, 그 잡지의 '자문 편집 위원들'로 명단에 올라 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10월 15일.)

1998년 12월 미국의 무디 성경학교 교장 죠셉 스토웰은 위튼 대학교 총장 듀안 리트핀(Duane Litfin)과 트리니티 국제대학교 총장 그레고리 웨이브라잇(Gregory Waybright)과 함께 천주교 추기경 프랜시스 죠지의 집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하였다(Moody Student, 1999년 2월 2일). '친분 관계'가 형성되었고, '동반자 관계'가 논의되었다. 스토웰은, 그 네 사람이 '사회 문제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으나 협력 때문에 '신학적 이해들을 타협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죠지 추기경은 '신학을 이야기하기를 원했으며' 또한 "우리 회중들에게 어떤 공통적 봉사 활동들을 함께하며 기도하고 예배하자는 요청을 가지고 다음 천년에 들어갈" 가능성을 논하였다. 리트핀은, 추기경과의 친분 관계가 무엇으로 인도할지 모른다고 말했으나 '그러한 친분 관계를 가지는 것이 가지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3월 15일)

비평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은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연합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심지어 복음주의자들도 천주교회를 용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개신교회는 천주교회를 우상숭배적이고 변질된 적그리스도적 집단으로 간주해 왔으며 천주교회는 그 기본 교리들에 있어서 변하지 않았다. 천주교회의 근본적인 오류들을 비평함으로써 천주교회를 포용하려는 개신교회들의 경향이 잘못된 것임을 살펴보자.

교황의 권위에 관한 교리

첫째로, 천주교회는 교회와 그 전통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와 동등하다고 간주하면서 로마 교회의 우위성과 교황의 베드로 사도 계승을 주장해 왔고, 심지어 교황 무오설까지 선언했다. 1870년 바티칸 회의는, 로마 교황이 그 직분을 수행하며 믿음과 윤리에 관한 교리를 정의할 때 그는 무오성을 소유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여전히 변함 없이 교황을 "베드로의 계승자,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전체 교회의 유형적 머리라고 부르면서" 교황의 수뇌성과 무오한 교훈의 직분에 관한 그 동일한 교리를 "모든 신실한 자들이 확고히 믿어야 할" 교리로 다시 제시했다(Documents of Vatican II, ed. Austin P. Flannery, pp. 370, 380).

그러나, 교황 무오성에 대한 천주교회의 이 교리는 성경에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개신교회 교리들의 제1 원리인 성경의 신적, 절대적, 최종적 권위의 교리에 가장 모순된다. 또한 교황 무오성의 교리는 교황의 칙령들의 실제 역사에도 모순되는 거짓된 교리이다. 역사상 교황들의 사상들과 선언들 간에는 차이점들과 심지어 상호 충돌이 없지 않았다. 예를 들어, 로마 감독 그레고리 1세(590-604)는 누구든지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말했으나, 보니페이스 3세(607)는 황제로 하여금 그에게 그러한 칭호를 주도록 만들었다. 또한 씩스투스 5세(1585-1590)는 성경 읽기를 권장하였으나, 피우스 7세(1800-1823)와 여러 다른 교황들을 그것을 정죄하였다. 무오한 교황들이 서로 모순된 교훈들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외에도, 교황들 가운데는 역사상 드러나게 부도덕한 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요한 12세(955-964)는 살인, 위증, 신성 모독, 간음, 근친 상간 등의 죄로 로마 황제에 의해 처형되었다. 또 알렉산더 6세(1492- 1503)는 여섯 아이들을 낳았는데, 그 중 둘은 그가 교황이 된 후에 태어났다. 이런 부도덕한 자들이 무오한 권위를 가진다고 생각될 수 있겠는가?

덧붙여, 교황들은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 예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요 18:36), 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그는 정치적 권력을 소유하지도 행사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천주교회의 교황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주교회의 교황이 하나님의 참 교회의 머리나 무오한 지도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참되고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을 부당하게 탈취한 자라고 결론을 내린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진술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이시니,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주장은 비성경적이요 사실에 근거가 없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권리 침해이다"(25:6).

마리아에 관한 교리

둘째로, 천주교회는 마리아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와 승천을 주장한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선언했고, 1950년 피우스 12세는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똑같이 선언하기를, "마침내 원죄의 모든 더러움 없이 보존된 그 순결한 동정녀는 . . .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리움을 받았다"(Ibid., VIII. 59)고 하였다.

또한, 천주교회는 신도들에게 마리아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카톨릭 교리서에 보면,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항상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에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각별한 공경과 기도를 드리고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도와주시기를 청해야 한다"고 말했다(한국천주교 주교회의, 1967년, 114쪽). 천주교회에서 성자로 추앙되었던 알폰스 추기경은 말하기를,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고 받지 못하지만, 마리아에게 구하여 받는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구하는 바를 예수께 기원함으로써보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더 신속히 얻는다"고 했다(Alphonse de Ligouri, The Glories of Mary, pp. 127, 254).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는 마리아에게 부당한 많은 칭호들을 돌린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언하기를, "[마리아는]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리움을 받았고 주님에 의해 만물 위의 여왕으로 존귀케 되었다"(Ibid., VIII. 59)고 했다. 카톨릭 교리서도 말하기를, "마리아는 . . . 하늘에 오르시어 천상과 지상의 모후(母后)가 되셨다"(114쪽)고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또 선언하기를, "하늘로 올리움을 받은 후 그[마리아]는 이 구원하는 직책을 버리지 않으셨고 여러 가지 중보사역에 의해 계속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선물들을 가져다 주신다. . . . 그러므로 그 복된 동정녀에게 우리는 교회에서 변호자[보혜사], 돕는 자, 은혜 베푸는 자, 그리고 중보자의 명칭들로 빈다"고 하였다(Ibid., VIII. 62).

추기경 알폰스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인들은 마리아를 통해서만 용서받는다"(p. 83), "마리아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는 실패하고 잃어버려진다"(p. 94), "마리아는 하늘의 문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를 통하지 않고는 저 복된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p. 160), "구원의 길은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열려져 있지 않다"(p. 169),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이 그에게 주어졌으므로 마리아의 명령에 모두가 순종한다. 심지어 하나님도 순종하신다. . . .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온 교회를 마리아의 통치 아래 두셨다"(p. 180, 181), "그는 우리의 구원, 우리의 생명, 우리의 소망, 우리의 모사,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도움이시다"(p. 257).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기도해야 하며,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신적 경배와 기도를 올려서는 안된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마태복음 4:10,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또한, 우리의 구주와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마리아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에 불과하다. 누가복음 1:38, "마리아가 가로되 [자신의 잉태의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에게]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우리는 성경에서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높임을 볼 수 없고 도리어 그 반대의 예들을 본다. 마태복음 2:11, "[동방박사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누가복음 2:48, 49, "그 부모가[그들이]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마리아는 인간 모친에 불과하였다.

무리 중 한 사람이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고 예수께 말하였을 때, 그는 말씀하시기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하셨다(눅 11:27, 28). 또 그의 모친과 형제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그의 모친을 다른 제자들보다 달리 특별히 높이지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마리아 교리는 확실히 비성경적이며 우상숭배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우상숭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피조물에게 신적 명칭과 속성 그리고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보혜사, 중보자, 천국의 문, 구원의 길, 혹은 천상 천하의 어머니와 여왕'이라고 부르는 행위가 그러하다. 촬스 핫지는 천주교회의 성인, 천사, 마리아 숭배가 우상숭배적이라고 비평하면서 그 교회가 이론적으로는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기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피조물에게 전지와 전능의 신적 속성들, 그리고 기도 응답의 신적 사역을 돌리기 때문에 우상숭배적이라고 잘 지적하였다(Systematic Theology, III, p. 281).

칭의(稱義)에 관한 교리

셋째로, 천주교회는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부정한다. 1563년 트렌트 회의는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사람이 공식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고(Canons of Trent, Session VI, Canon X), 또 "누구든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轉嫁)에 의해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하면, . . . 혹은 심지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호의뿐이라고 말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Ibid., Session VI, Canon XI).

칭의의 진리와 관련하여, 천주교회는 신자들의 죄들의 속죄가 남아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에서 선행과 기도를 통한 속죄의 교리와 연옥의 교리 등이 나온다. 카톨릭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고백의 성사로 지옥의 벌은 언제나 사함을 받으나, 세상과 연옥의 벌까지 사함을 다 받는 것은 아니다. 이 유한한 벌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 신부는 보속을 정해준다. 고백 성사를 받는 사람은, 우리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죽으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자기 죄에서 오는 벌을 보상해야 한다"(148쪽), "우리는 마음의 준비와 열심을 갖고 대사(大赦, 교회가 주는 큰 용서)를 받기 위해 기도와 선행을 해야 한다"(149쪽).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렇게 선언했다: "죄는 속죄되어야 한다. 이것은 이 땅 위에서 이 생의 슬픔과 불행과 시련의 일들을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속죄는 내세에서 불과 고통들 혹은 정결케 하는 형벌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Indulgentiarum Doctrina, I. 2), "하나님의 사랑 속에 참으로 회개하고 죽었으나 그들의 죄와 태만에 대해 적절한 회개로 보상하지 못한 자들의 영혼들은 죽은 후에 연옥에서 그들의 빚을 제거하기 위해 준비된 형벌들로 깨끗케 된다"(Ibid., I. 3).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하며 오직 그 공로에 근거하여 죄인이 죄씻음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밝히 가르친다. 로마서 3:21, 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것은 일한 것이 없이도 은혜로 받는 의이며(롬 4:4, 5),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 의이다(롬 5:1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義)이시다(고전 1:30).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사죄(赦罪)와 칭의(稱義)는 완전하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성도들의 기도와 선행은 결코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예수님 믿고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은 결과요 그 열매일 뿐이다.

미사(Mass)에 관한 교리

넷째로, 천주교회는 미사(mass)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회의 미사는 개신교의 성찬과 같다. 그러나 그 내포하는 의미는 매우 다르다. 천주교회는, 미사가 속죄 제사로서 거기에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미사 때마다 반복하여 죽으신다고 주장한다.

트렌트 회의는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미사에서 참되고 적절한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Canons of Trent, Session XXII, Canon I). 트렌트 신앙고백에는 진술하기를, "나는 이와 같이, 미사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참된, 적절한 속죄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고백한다"고 했다(제6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선언하기를, 미사는 "십자가의 제사가 계속되는 제사"이며 "미사의 제사에서 우리 주님은 제물로 죽임을 당하신다"고 했다(Eucharisticum Mysterium, Introduction C, Section 1, 2).

한국의 카톨릭 교리서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사 성제는 예수님이 바치신 십자가의 제사를 새롭게 하고 되풀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제의 손으로 당신 자신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제물로 드리신다. . . . 따라서 미사 성제는 십자가의 제사와 완전히 같으며, 가장 완전한 신약의 제사이다"(135, 136쪽).

그러나 천주교회의 미사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을 모독하는 교리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칼빈의 주석대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음을 나타낸다(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p. 235-37). 칼빈은 또 말하기를, 이 말씀은 미사라는 가증스러운 것을 정죄한다고 했다(Ibid.).

또한 히브리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하팍스, 에파팍스)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음을 강조하였다. 히브리서 7:27,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위해 더 이상 속죄의 제사가 필요치 않다. 히브리서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상의 비성경적, 이단적 오류들을 볼 때, 우리는 천주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고 복음 진리를 버린 거짓된 교회이며 마리아를 신격화 하는 우상숭배적 단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천주교회는 신약교회 2천년 역사상 대표적인, 가장 강력한, 그리고 지금도 세계적으로 매우 활동적인 이단이다.

그러므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회가 적그리스도적이며 우상숭배적 단체임을 분명히 하였다.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교황은 "귀신들이 충만한 자요 . . . 하나님의 원수요 적그리스도"라고 단언했고, 교황 제도를 마귀적이라고 했다(Martin Luther, Church and Ministry, III, p. 363). 그는 "이 악마적인 교황 제도는 땅 위의 최종적 불행이요, 모든 악령들이 전력을 다해 할 수 있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표현했다("Against the Roman Papacy, an Institution of the Devil, 1545," in Luther's Works, vol. 41, p. 376). 개혁교회의 기초를 닦은 죤 칼빈도, 천주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치명적 대적자들로 간주했고, 천주교회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 때보다 더 불순한 교리와 더 큰 우상숭배를 가지고 있고, 다니엘과 바울이 예언한(단 9:27; 살후 2:4) 바로 그 적그리스도요 그 악하고 가증한 왕국의 지도자요 기수라고 보았고(John Calvin,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IV. ii. 4, 9, 12), 교황의 복음을 바울의 복음의 '무서운 변질'로 간주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2).

이와 같이 천주교회는 그 교황 제도의 기초가 되는 기본적 교리들에 있어서 변하지 않았다. 그 기본 교리들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이며 변질되었고 우상숭배적이다. 그렇다면, 천주교회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태도는 오늘날도 여전히 정당하고 유효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천주교회에 대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교제와 우호 관계는 명백히 비성경적이며, 종교개혁의 귀한 유산인 은혜의 복음에 대한 배신이 아닐 수 없다.

성례주의적 경향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또한 교회의 일체성의 중요한 표현으로 성례를 강조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지도자들은 약 50년간의 연구의 결과로 1982년 세례, 성찬, 및 교직제도(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BEM)라는 중요한 문서를 공식적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이 문서에 나타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사상은 성례주의적 경향을 나타낸다.

1.분석

1-1. 세례

세계교회협의회의 위의 문서는 세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으로 결합되는 것이다. . . . 그것은 세례 받은 자를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의 백성과 연합시킨다. . . .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롬 6:3-5; 골 2:12), 죄 씻음(고전 6:11), 새 출생(요 3:5)이다. . . . 세례 받은 자들은 더 이상 죄에 노예들이 아니고 자유롭다. . . . 세례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받았고 깨끗케 되었고 거룩하여졌다. . . . 하나님께서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음과 약속을 허락하신다. . . .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서로간의, 그리고 모든 시대와 장소의 교회와의 연합 속으로 들어온다"(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pp. 2, 3).

1-2. 성찬

이 문서는 또한 성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찬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만드시는 은사의 성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을 통하여 이 구원의 은사를 받는다. . . . 그리스도의 약속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의 세례 받은 각 지체는 성찬에서 죄 용서의 확신(마 26:28)과 영생의 보증(요 6:51-58)을 얻는다"(Ibid., p. 10).

2. 비평

위와 같은 성례관은 성례주의적이며 의식주의적인 맛을 가진다. 즉 그것은 성례의 의식 자체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보는 입장처럼 들린다. 성례주의 혹은 의식주의는 천주교회의 성례관으로 돌아가는 오류이다. 타임지의 종교 편집인 리처드 오슬링은 정확히 논평하기를, "'세례, 성찬 및 교직제도(BEM)'라는 문서는 개신교인들과 정통교인들 간의, 그리고 비(非)성례주의적 개신교인들과, 천주교회에 가까운 성례관을 가진 개신교인들간의 간격을 극복하려고 추구한다. . . . 그 문서는 부인할 수 없는 '고교회적(친<親>천주교회적)' 음조를 가지고 있다"라고 했다(Richard Ostling, "Piercing Together the Ecumenical Puzzle," University of Portland Magazine, Summer 1986, p. 13). 그러나 성례주의, 의식주의는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2-1. 성례주의는 복음의 영적 성격과 모순됨

첫째로, 성례주의는 복음의 영적 성격과 모순된다. 구원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나는 영적 변화이다. 성령께서 영적으로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유효하지 못하다. 기독교는 단순한 의식들의 종교가 아니고, 마음과 영의 종교이다.

로마서 2:28, 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성령으로 말미암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글자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라." 이것은 유대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2-2. 성례주의는 성경의 지원을 받지 못함

둘째로, 성례주의는 성경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성례에 참여한 자일지라도, 만일 그가 영적으로 중생치 못했다면, 영원히 멸망받을 수 있다. 가룟 유다는 주님 자신의 손에서 빵과 포도즙을 받은 후에도 멸망했다. 마태복음 26:20-25, ". . .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성례들이 구원의 은혜를 준다는 생각에 대하여, 죤 칼빈은 단언하기를, "그것은 명백히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것은 믿음 없이 의(義)를 약속함으로써 영혼들을 멸망으로 몰아가며; 둘째로, 그것은 의(義)의 원인을 성례로부터 유래시킴으로써 가련한 마음들로 하여금 미신적인 생각에 얽히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Institutes, IV. xiv. 14). 촬스 핫지는 일찌기 교회의 배교가 의식주의의 주 요인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도 시대 동안, 그리고 사도적 형태의 종교에서, 진리는 외적 의식들보다 심히 초월하여 있었다. 교회의 배교는 의식들을 진리보다 더 중요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Charles Hodge, A Commentary on 1 & 2 Corinthians, p. 17).

한 세계교회를 지향함

에큐메니칼 운동은, 비록 그 지도자들이 자주 그렇지 않다고 부인해옴에도 불구하고, 한 세계교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분석

교파의 부당성을 강조함

첫째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파의 부당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교파들의 분리의 현실을 부끄러운 사실로 본다. 리처드 니이버는 교파주의를 "인정치 않는 위선"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러한 반(反)교파주의적 정신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흐르고 있다. 1982년 리마에서 모인 신앙과 직제 회의는 선언하기를, "우리의 분리들은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다"고 했다(Toward Visible Unity, p. 41).

교회의 유형적 일체성을 강조함

둘째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의 유형적 일체성을 강조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1948년 암스텔담 창립총회는 "우리의 의도는 함께 머무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고, 1954년 에반스톤 총회는 "우리의 의도는 연합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1961년 뉴델리 총회는 "교회의 유형적 일체는 하나의 완전히 묶여진 교제(one fully committed fellowship)에서 나타난다"라고 선언하였다.

또한 1968년 웁살라 총회는 "보편적 에큐메니칼 협의체적 형태의 일체성"을 언급하였다. 1975년 나이로비 총회는 "참으로 연합된 지교회들의 협의체적 교제"라는 표현을 쓴 후, 그것은 완전한 유기체적 일체성과 동일하며 하나의 분리되지 않은 교회의 일면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첨가하여 말하였다. 1983년 뱅쿠버 총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하나의 거룩한, 공동적, 사도적 교회의 유형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하나의 조직체, 즉 하나의 세계교회를 지향함

셋째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하나의 조직체, 즉 하나의 세계교회를 지향한다. 1975년 나이로비 총회는 선언하기를, "우리는 하나의 세계적 공동체를 갈망하며 그것을 위해 싸운다"고 했고, 그들이 추구하는 "참으로 연합된 지교회들의 협의체적 교제"는 완전한 유기체적 일체성과 동일하며 하나의 분리되지 않은 교회의 일면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1983년 뱅쿠버 총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하나의 거룩한, 공동적[세계적], 사도적 교회의 유형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고 진술하였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한 세계교회를 꿈꾸지 않는다고 종종 말하곤 하였지만, 위의 진술들이 결국 하나의 세계교회를 만들기를 원한다는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1993년 5월 한국장로교협의회(회장: 한영제--예장 통합측 총회장)는 회원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다섯 개 교단의 이름으로 교회 일치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 선언문은 다섯 개 교단이 궁극적으로 한 장로교단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을 천명했다. 그 선언문은 한국교회의 분열이 신학적 정당성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항목들에 있어서 결코 분열될 만큼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남은 문제는 우선 협의회를 통하여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지향해야 하고, 결국은 하나의 한국 장로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5개 장로교단 총회장 공동선언문," 기독교연합신문, 1993년 5월 30일, 3쪽; "'하나된 장로교' 향한 첫걸음," 크리스챤 신문, 1993년 5월 29일, 3쪽.)

연합된 교회의 성격에 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음

넷째로,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는 연합된 교회의 성격에 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어떤 이들은 연합된 교회가 하나의 신학과 정치구조를 가진 한 교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연합된 교회가 각 회원 교회의 신학과 정치구조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한 교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평

교회의 일체성은 교리적이어야 함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일체성이 교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강조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이 영적, 교리적, 유형적임을 가르친다. 교회는 영적으로 이미 하나이며 그 영적 일체성은 결코 파괴될 수 없다. 또한 교회는 가능한 한 유형적으로도 일체성을 표현하고 유지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고전 1장, 엡 4장). 그러나 오늘 시대에 보다 중요한 바는 교회의 일체성이 교리적이라는 점이다. 교회의 교리적 일체성은 영적 일체성의 외적 표현이요, 유형적 일체성의 내적 기초이다.

요한복음 17장(특히 9-11절과 20-21절)과 에베소서 4:3-6은, 교회의 일체성의 대상과 성격에 관하여, 교회의 일체성이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의 일체성이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그리고 진리 안에서의 일체성임을 분명히 보인다. 다시 말해,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일체성은 바른 진리와 바른 교리 안에서의 그리고 그 위에서의 일체성인 것이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그들의 교리와 교훈을 가리킨다. 사도적 교리가 없이는 교회도, 교회의 일체성도 생각할 수 없다.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표현하였다: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 위에 기초했다. 그리스도 안의 일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True Church Unity: What It Is," in Selected Shorter Writings of Benjamin B. Warfield, p. 302).

자유주의와 천주교회의 오류를 포용하는 교회 연합은 잘못임

둘째로, 우리는 자유주의와 천주교회의 오류를 포용하는 교회 연합이 잘못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물론 조직체적 연합의 개념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건전한 교리와 정치 원리에 입각한 교회 연합을 반대할 자가 누구이랴! 불필요한 분열을 극소화하고 필요한 연합을 극대화하는 연합주의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 세계교회 개념은 기독교계 안의 배교적 구성원들인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회를 배제하지 않고 추구하는 연합이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말이다.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구호가 이단을 포용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교회의 배교와 혼란의 상황 속에서, 교리적 순결을 무시한 연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바르게 말하였다: "거짓이 종교의 성채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자마자, 요긴한 교리의 요점이 뒤집어지자마자, 교회의 죽음이 초래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 .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교리 위에 기초해 있다면 . . . 그 교리가 파괴될 때 교회가 어떻게 계속 존속할 수 있겠는가?"(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IV. ii. 1).

교파적 확신들의 차이를 포괄하는 연합은 바람직하지 못함

셋째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파적 확신들의 차이를 무시하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초교파적 연합 교회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교회 연합의 과정에서 모든 이단적 요소들을 배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교회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리적, 언어적 간격으로 인한 불편은 놔두고라도, 많은 교회들이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중요한 교리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 세례의 대상과 방식, 목사직의 성격,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와 방식, 천년왕국과 휴거의 의미 등에 대해 견해의 심각한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차이들은 진리들에 대한 무지나 오해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교파들간의 차이점들을 고려할 때, 초교파적 한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진리에 대한 충실한 고백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설교자가 어떤 특정 교리에 대한 확신 있는 설교를 할 때 그것이 어떤 교회 회원들의 양심을 억압할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목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는 어떤 교리적 신념을 가지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교파적 차이점들을 무시하거나 포괄하는 초교파적 한 교회란 진리의 신념과 확신의 차원에서 결코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한다고 본다. 사실, 한 신앙고백이 없는 한 교회란 참으로 하나가 아니다. 마틴 로이드-죤스는 다음과 같이 바르게 말했다: "단순히 하나의 외면적 조직체 때문에 그들이 '하나'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단지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을 오해케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거짓말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D. Martyn Lloyd-Jones, The Basis of Christian Unity, p. 61).

우리는 전제주의적 교회를 두려워함

넷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전제주의적 교회를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여하튼 하나를 만드는, 인간이 만든 하나의 세계적 조직체는 모든 회원을 그것의 통제 아래 놓는 전제주의적 교회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하나님을 바로 경외치 않고 순종치 않는 사람은 교만해져서 남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 교회의 일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이다. 우리는 전제주의적 천주교회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피흘려 싸웠던 선진들의 투쟁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누리는 귀한 신앙의 자유라는 종교 개혁의 이 유산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종교적 다원주의의 경향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실제적 기초는 신학적 포용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늘날 이 운동은 이방 종교들을 포함하려는 혼합주의 또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분석

이방 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함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의 뱅쿠버 총회는 세계교회협의회 35년 역사상 최초로 힌두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다섯 개 세계종교들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공식적으로 연설케 했다.

1998년 6월, 미국의 알라바마주 헌츠빌의 '종교간 선교봉사회'는 그 월례회에서 미합중국 장로교단 소속 페이스(Faith) 장로교회에서 '거룩한 소리들'에 대한 한 프로그램을 발표했다(Huntsville Times, 1998년 7월 11일). 바하이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및 세 개의 '기독교' 교단들을 포함하는 종교 대표자들은, 소리가 그들의 예배 형식에서 가지는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 (Calvary Con- tender, 1998년 8월 1일.)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에서 매년 모이는 전국 기도의 날의 책자에 의하면, "모든 종교들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들에 따라서 참여하도록 격려된다. . . . 전국 기도의 날은 모든 신앙의 사람들이 그들의 이해하는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만들어졌고 의도되었다." 그 모임의 공동의장은 제임스 답슨 목사의 부인 숼리와 빌 브라이트의 부인 보네트이었다. 촬스 콜슨은 전국자문위원회에 들어 있고, 랍비 조슈아 하버만, '신부' 로버트 시로코, 및 제임스 케네디는 연결고리들이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6월 1일.)

대화의 방식을 강조함

세계교회협의회는 타종교들과의 대화의 방식을 강조하며, 그들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진리의 통찰력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세계교회협의회 뱅쿠버 총회는 선언하기를, "우리는 우리가 증거하는 예수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한편, 다른 신앙들(종교들)의 사람들 가운데서의 종교적 진리의 추구에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이 있음을 인정한다. . . . 대화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세상에 어떻게 활동적이신지를 더 분별하고, 다른 신앙들의 사람들이 궁극적 실재(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찰들과 경험들을 그것들 자체 때문에 감사하기를 기대한다"고 한다(Gathered for Life, p. 40).

세계교회협의회의 종교간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더크 멀더(Dirk C. Mulder)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모든 곳에서 사역하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어떤 방식으로 구원적이지 않는가? 이 질문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있고, 그 대답들은, 대화에서 우리가 단지 우리의 신앙을 더 잘 증거하기 위하여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새로운 빛들을 가지기 위하여 배우고 들어야 한다는 확신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The Ecumenical Review, 38 <1986>, 215).

세계교회협의회 종교간의 대화 위원회의 지도자인 죤 테일러(John Taylor)는 대표자들에게 말하기를, 모든 종교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데 협의회 회원들 가운데 일치가 있다고 하면서, "이슬람교도들과의 대화가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선교 활동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방해된다. 우리는 이슬람교도들 가운데서의 모든 선교적 노력들을 중지해야 한다. . . . 많은 유대교인들이 우리를 제발 그냥 홀로 놔두라고 말한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그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Christian News, 1983년 9월 5일, 7쪽; Province [of Vancouver], 1983년 7월 27일).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함

더욱이, 세계교회협의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 종교간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더크 멀더는 "당신은 불교인이나 힌두교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느끼십니까?"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물론이죠, 물론이죠"라고 대답하였다(M. H. Reynolds,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The Cup of the Lord or the Cup of Devils?, p. 8).

세계교회협의회의 타종교들과 이념들과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출판한 성경과 타종교인들(S. Wesley Ariaraja, 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 1985)이라는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절대적 의미에서의 진리는 어느 누구도 파악할 수 없고, 우리는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들이 성 요한, 성 바울,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절대적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한다(p. 27). 그가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성경이 명확한 기독론을 가지고 있지 않고, 서로 다르고 모순된 기독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Ibid., pp. 21, 22, 67), 성경의 언어는 신앙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Ibid., pp. 6, 9, 24, 26).

또한 그는 이교도들도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회개해야 할 자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신, 힌두교의 신, 이슬람교의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힌두교적 이해, 이슬람교적 이해가 있을 뿐이다. . . . 타종교인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형제 자매요, 순례자이지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는 한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다. . . . 힌두교인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료 순례자이다"(Ibid., pp. 9-11, 56). 심지어, 그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전도에 가장 큰 방해거리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참된 증거의 가장 큰 방해거리이었던 한 가지 요인을 골라내라고 요청한다면,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하는 이 절대적 주장들이 그것이라고 말할 것이다"(Ibid., p. 53).

1990년 1월, 세계교회협의회의 살아 있는 신앙들의 사람들과의 대화 분과의 스위스 바아르에서의 모임은 15개국으로부터 온 21명의 헬라 정교회, 개신교회, 천주교회 신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참여하였고 '종교적 다원성: 신학적 관점들과 선언들'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하였다(Marlin Van- Elderen, "Consultation Speaks on Plurality," Christian News, 1990년 2월 5일, 1쪽).

이 문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나라들과 백성들 가운데 항상 하나님의 구원적 임재(臨在)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문서는 선언하기를, 다른 종교적 전통들의 '추구와 발견 속에서 하나님께서 계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의 진실과 지혜와 그들의 삶에서의 사랑과 거룩은 . . . 성령의 은사이다,' '그들이 우리와 더불어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 문서는, 종교적 다원성을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성취를 기다리면서 하나님과의 그리고 이웃들과의 우리의 만남을 깊게 할 기회로 본다. 또 그 문서는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 외의 다른 길들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선함과 진실과 거룩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 . .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인격적 의탁에 제한시키는 신학을 넘어서서 나아갈 필요성을 인식한다는 것을 발견한다"라고 한다. 그 문서에 의하면, 그 세계적 차원이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적 신비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 성취를 향해 펼쳐질 때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로 매개(媒介)되고 표현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우리 밖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고 감동하는 종교적 전통들의 구조 안에서 성실하고 진실한 삶을 살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들로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문서는 주장하기를,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신앙들의 사람들의 삶과 전통들 속에서 역사하셨다," "우리가 다른 종교들의 진리와 선을 해석할 수 있는 것는 바로 성령의 세계 안에서이다"라고 하였다. (VanElderen, p. 15.)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7차 총회에서는 한국 이화여대의 조직신학교수 정현경은 주제 강연에서 한(恨)을 안고 죽어간 영들, 예를 들어 하갈의 영, 우리아의 영, 입다의 딸의 영, 헤롯에게 죽임 당한 어린 아이들의 영, 잔다르크의 영, 십자군 파병 때 죽어간 백성들의 영, 지구상의 토착민들의 영, 나찌 시대에 가스실에서 죽은 유태인들의 영, 히로시마와 나카사끼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죽임 당한 자들의 영, 광주에서, 천안문에서, 리쿠니아에서 죽은 자들의 영,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탐욕으로 파괴되고 착취된 땅과 공기와 물의 혼 등을 부르는 초혼(招魂)적 행위, 즉 샤마니즘적 행위를 하였다(기독교 연합신문, 1991년 3월 17일, 7쪽; 3월 24일, 7쪽; 3월 31일, 7쪽).

그는 또 독일 영화인들 앞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문화에서 부처를 통해, 무당들을 통해 . . .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해방-생존-혼합주의의 영'이라고 고백했고, 또 말하기를 "나는 여러분처럼 혼합주의자이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 (Christian News, 1992년 2월 17일; Calvary Contender, 1992년 4월 1일.)

한국신학대학 조직신학교수인 김경재는 정현경 교수의 캔버라 주제 강연에 대해 동감하면서 이렇게 썼다: "영원하신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서 유대땅에 화육하셨지만, 영원한 그리스도로서 연민의 사랑과 지혜의 영으로서 모든 문화 속에, 우리 조상들 속에 현존하셨다는 신앙고백이다. 기독교 전래 이전 불교와 유교를 믿고 살고간 우리 조상들은 지옥갈 우상숭배를 하고 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혹은 그림자처럼 우리 가운데서 창조와 구원과 속량의 일을 행하여 오셨다고 믿고 신앙고백하는 것이 정 교수의 신앙고백이다. 필자는 그의 신앙고백에 동의한다"(김경재, "'생명의 신학' 위한 성령론의 복귀," 기독교 연합신문, 1991년 3월 31일, 7쪽).

1998년 6월, 미국에서는 약 2천명의 예배자들이 1993년 95세로 사망한 노만 빈센트 피일의 100주년 기념을 축하했다. 피일은 1984년 필 도나웨 프로그램에서 말하기를, "거듭나는 것은 필요치 않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가는 여러분의 길을 가지고 있고 나는 나의 길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 신도교 사당에서 영원한 평화를 발견했다. . . . 그리스도는 그 [여러] 길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다"라고 하였다(Christian News, 1998년 6월 8일). 피일은 1980년 한 몰몬교 총회장 생일축하모임의 주 연사이었고 몰몬교 지도자들을 칭찬하였다. 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며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신성, 및 부활을 부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빌리 그레이엄과 기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찬사를 받았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7월 15일.)

오늘날 주의해야 할 종교 다원주의적, 에큐메니칼 지도자의 한 사람은 로버트 슐러이다.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조롱하는 기독교 일치 학교의 (뉴 에이지) 연례대회를 위해서, 문선명과 함께 통일교회 행사들에서, 그리고 몰몬교 성전에서의 종교간의 기도 조찬에서, 주강사로 나타났다(Vantage Point, 1998년 11월호). 뉴 에이지 운동가들, 몰몬교인들, 그리고 천주교인들은 그의 수정 대성전 강단에서 연설했었다. 그의 가르침들과 행동들의 일부는 자유주의적이고 후(後)현대주의적이고 이단적이다(Calvary Contender, 1999년 1월 1일). 그는 오래 전에 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과 이별을 고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더 이상 불리우기를 원치 않는다(The Discerner, 1999년 6월호).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 신앙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Christian News, 1999년 7월 19일).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5일.)

2000년 1월, 김경재 교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회보에 기고한 "새 천년은 아레오바고 영성시대"라는 글에서, 기장 교단이 불교와 심층적 대화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뚜렷하게 하고 동아시아의 위대한 영성과 창조적 지평 융합을 이루자고 주장하였다("기장, '종교다원주의 논란,'" 기독신문, 2000년 4월 19일, 19쪽).

비평

대화의 방법에 대해

성경적 전도 방법은 단지 대화가 아니고, 주로 그리고 일차적으로 선포와 가르침이다. 마태복음 4:23,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마태복음 28:18-20,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함에 대해

아리아라자의 결론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결론이며, 이러한 성경 이해는 배교적(背敎的)이며 이단적이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간에 교회가 속화되고 부패될 때마다 우상숭배적 혼합주의가 유행했다. 그러나 사두개적 불신앙을 버리고 참된 신앙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의 언어는 단순히 신앙의 언어만이 아니고, 곧 진리의 언어이며, 성경의 신론과 기독론은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확함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명기 4:39,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上天下地)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라." 이사야 43:10, ". . .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이사야 45: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이방 종교들에 대한 성경적 평가

성경은 이방 종교들이 모두 헛됨을 밝히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의 절대성을 가르치는 앞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이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사야 45 :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더욱이, 성경은 이방 종교들이 마귀적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여기에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고린도전서 10:20,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에베소서 2:2, 3,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요한일서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요한복음 8:24,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결론

결론적으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매우 비성경적인 운동이다.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목표는 좋지만, 이 운동이 실제로 취하는 교회 일체성의 개념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실제적으로 취하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는 신학적 포용주의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계를 변질시킨 배교와 혼란의 시대에 신학적 포용주의의 태도는 자유주의 이단 사상들을 포용하는 명백한 잘못이요 악이다. 또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천주교회에 대해서 포용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신교회의 종교개혁의 유산을 뒤엎는 비성경적인 배신의 행위인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강조되는 성례의 개념도 정당하지 않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성례관은 성례주의적이며, 그것은 천주교회의 오류로 돌아가는 일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조직체적 관심 즉 한 세계교회의 추구도, 자유주의와 천주교회를 배제하지 않는 한, 용납할 수 없고, 또 비록 이런 이단적 요소들을 배제한 연합이라 할지라도 초교파적 연합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심지어 에큐메니칼 운동은 타종교들에 대해 포용적 경향 즉 종교적 다원주의 혹은 혼합주의의 경향을 명확히 보이고 있다. 이것은 1983년 뱅쿠버 총회 이후 더욱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배교와 타락의 모습이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연합 운동이겠는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비성경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바벨탑 운동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는 신실한 교회들과 성도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분리(分離)되고 성별(聖別)되어야 한다. 한국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와 대한기독교감리회(기감측) 안에 있는 진실한 성도들은 그 교단들로부터 나와서 보수적 교회들을 설립하든지 아니면 보수적 교회들에 가입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배교와 타협하지 말고, 옛 길, 좁은 길을 지켜야 한다. 성경을 믿는 교회들과 성도들은 옛신앙의 순수성(純粹性)을 지켜야 한다.

예레미야 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고린도후서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be separate,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위태하게 되는 그런 사랑과 일치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고, 20세기 초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앙의 투사 죤 그레셤 메이천은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바로 찔러 말하기를, "오늘날 가장 나쁜 죄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동의하고 믿는다고 말한 후 기독교의 기본적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과 협력하고 타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William Ashbrook, Evangelicalism, pp. 31, 45).

http://www.oldfaith.net/03modern/02교회연합운동.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