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10월 11일 토요일에
한국개혁신학회 주최 가을 학술 세미나에서 류응렬 교수가 발표한 <새 설교학자들의 성경관과
개혁주의 설교>라는 논문의 결론
부분이다. Ⅳ. 개혁주의 설교의
방향
지금까지 우리는 세 사람의 새 설교학자들의 설교신학을 살펴보면서 특히 그들의 성경관에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세 설교학자들은 기존의 설교학이 지니는 전달의 부족함을 극복하고자 보다 들려지는 설교를 위해 노력한 공로는 인정된다. 이런 점에서
새 설교학자들의 전달방법은 어느 정도 수용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새 설교학자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전달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본문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신학과 철학에 있다. 그들은 객관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절대적인 성경을 개인의 체험을 강조함으로써 주관적인
위치로 전락시킨다. 성경을 풀어서 해설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경험에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도구로 삼기도 한다.
개혁주의 설교학은 이러한 설교철학과는 근본적으로 특징과 목적을 달리한다. 필자는 새 설교학자들의 주장을 배격하고 성경적인 개혁주의 설교신학의
정립을 위해 몇 가지 제언하고 글을 맺고자 한다.
A.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 있는 성경
성경신학에 근거한 개혁주의 설교는 성경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 위에 세워져야 한다. 영혼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사라지는 곳에 진정한 설교의 권위를 찾을 수는 없다. 바울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선포한다 (딤후 3:15).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에게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기에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동등한 무게를 지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데이빗 알렌과 제리 바인스는 설교에서의 성경에 대한 관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 설교자에게 나오며, 사실 설교자에게는 성경 그 자체에서 나온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떠날 때 설교자는
선포해야 할 아무런 케리그마나 디다케도 없다. 설교자의 권위의 근거는 성경 본문 자체이다.” (David
Allen and Jerry Vines, “Biblical Authority and Homiletics,” in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A Basic Prespective, ed. Duane A. Garret and Richard R. Melick, Jr.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169.) 두 사람의 주장처럼 성경적인 설교자가 의존한 수 있는 유일한 권위는 성경
자체이며 성경 본문의 권위를 떠나는 순간 설교자의 권위 역시 보장할 근거는 사라진다.
우리가 살펴본 세 설교학자들은 성경을
들려주고자 새로운 설교방법론을 주창했고 그것이 전달 면에서 신선한 영향을 끼쳤지만 성경관에 대해서는 한결 같이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크래독은 성경의 명제적인 진리를 규정할 수 없고 설교 되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온다고 주장하거나 버트릭처럼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담고 있다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주장이다. 개혁주의는 성경주의에 근거해야 한다. 개혁주의 설교학 역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적 신학에 근거할 때 죽은 자를 살려내는 구원과 구원 받는 백성을 온전하게 하는 말씀의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B.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의도하는 의미에 집중하는
설교
개혁주의 설교학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근거할 뿐 아니라 성경 말씀이 보여주는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여 전하는 설교라야 한다. 성경 본문을 대할 때 저자가 사라지고 본문만을 가지고 의미를 파악하는 신비평이나 독자편에서 의미를
마음껏 재구성하는 독자비평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필자는 강해설교를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에게 의도한 말씀을 묵상과 주해를 통해 바르게
파악하여 성령께서 먼저 설교자 자신에게 적용하게 하시고 청중의 변화를 위하여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하는 설교”라고 정의를 내린다. 저자에게
의도한 하나님의 말씀에 해석의 근거를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당한 해석의 근거를 놓치게 된다.
핸드릭 크래벤덤은 “해석학과
설교”에서 “성경의 본문은 본문에 나타난 저자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고 지적한다(Hendrik Krabbendam, “Hermeneutics and Preaching,” The Preacher and Preaching: Reviving the Art in the Twentieth
Century, ed. Samuel T. Logan, Jr.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86), 213. 크래벤덤은 이 논문에서 저자의 한 가지 의도를 지향한다. 문장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을 수 없고
저자가 의도한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는 저자 중심의 해석학을 주창하는 허쉬의 해석학에 근거한다. 저자의 한 가지 의도를 집중하는
해석학을 위해 허쉬의 두 책을 참고하라. E. D. Hirsch, Jr., Validity in Interpretat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67); The Aims of Interpreta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6)). 개혁주의 설교자는
성경의 영감설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가 하나님 자신이란 사실을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새 설교학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의도를 찾아 청중의 삶에 적실하게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청중의 삶에 필요한 것을 먼저 살피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본문을
가져오는 문제해결방식의 방법론을 설교에 가져온다. 성경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생의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을
끌어오는 것은 성경을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 해결의 교과서로 전락시킨다.
설교에서의 청중은 설교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결론을 나름대로 내리는 주체가 되어서는 안된다. 청중은 설교자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말씀 앞에 변화를 받아야 할 대상이지 말씀에 의미를
부여하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개혁주의 설교자가 권위를 가지고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배경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라는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허셜 요크(Hershael W. York)는 “우리는 저자가 지닌 의도나 그 본문이 지시하는 성경의 다른 곳에 나타난 의미를
벗어나 설교할 수 없다.
단어는 참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저자의 의도를 벗어날 수 없다”라고 본문과 저자 중심의
설교를 강조한다(York and Decker, Preaching with Bold Assurance,
30.). 설교자는 강단에 설 때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듣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설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수님이 나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이 의도한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설교, 이것이 진정한 설교이다.
C. 청중의 변화를 지향하는 설교
개혁주의 설교자는 명확한 설교의 목적을
지녀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바라시는 것, 즉 성경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는 목적과 동일하다. 모든 성경이 구원을 주시는
말씀과 변화 받은 백성의 거룩한 삶을 위해 기록된 것이라면 기독교 설교는 마땅히 구원과 성화를 담은 메시지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해석되고 난 후 청중의 변화를 향해야 한다. 바울의 모든 설교는 전반부의 교리와 후반부의 구체적인 삶의 적용으로
나뉘어진다. 존 브로더스는 “설교에서 적용이란 단순히 논의에 덧붙여진 하나이거나 논의에 종속되는 부분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적용의
중요성을 지적한다(John A. Broadus, 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 (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79).
브로더스는 적용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촉구를 담고 있지
않는 설교는 기독교적 설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브라이언 채플은 “적용이 없는 설교는 지성을 만족하게 하지만 적용이 있는 설교는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지적하면서 적용이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라고 강조한다(Bryan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Redeeming Expository
Preaching (Grand Rapids: Baker), 45. 채플은 “적용은 예수를 해설할
때 초점으로 삼을 뿐 아니라 설교의 촉구에서도 중심을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적용이 사라진 설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적
설교라고 할 수 없다. 찰스 스펄전은 적용이 시작될 때 비로소 설교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청중의 변화를 위한 설교를 위해서
설교자들은 본문에 근거하여 구체적으로 적용하며 촉구해야 한다. 바울이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러므로’ 신자의 마땅한 삶을 촉구하듯이 개혁주의
설교자들은 청중의 삶에 진리가 구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도록 만들어야 한다.
새 설교학자들은 복음을 직접전하고 복음에 근거하여 삶을
촉구하는 것을 거부한다. 설교자에게서 청중에게로 일방적으로 촉구하는 것은 청중을 무시하는 일이며 설교에 참여할 수 없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청중은 설교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반응해야 할 객체이다. 개혁주의 설교는 본문에 뿌리내리는 주해뿐 아니라 청중의
삶에 적실한 적용으로 삶의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글을
맺으면서
필자는 지금까지 최근의 설교학자들의 설교신학에 나타난 성경관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개혁주의적 설교학이 나아가야 할 과제를 간단히 제시했다. 건전한 신학 위에 성경적인 설교가 시작된다.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가
무너지는 곳에 올바른 개혁주의 설교가 세워질 수는 없다. 그레다누스는 성경에 대한 이러한 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설교자가
신적 권위를 가지고 설교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영감된 성경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 왜냐면 오직 성경만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신적 권위를 가지고 설교하기를 원한다면 자신과 자신의 사고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의 메아리에 복종시켜야 한다.
설교자는 문자 그대로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권위 있는 설교는 진정한 강해 설교라는 말과 동일하다.”(Sidney Greidanus,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Interpreting and Preaching Biblical Literature (Grand
Rapids: Eerdmans, 1988; reprint, 2000), 12?13. (David M. Greenhow, “As One with
Authority: Rehabiliatating Concepts for Preaching,” in Intersections:
Post?Critical Studies in Preaching, ed. Richard L. Eslinger [Grand Rapids:
Eerdmans, 1988], 105?106). )
오늘날 새 설교학자들은 더 이상 성경의 권위도 설교자의 권위도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설교자가 본문을 해설할 뿐 적용이나 촉구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설교를 듣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인자는
설교자도 본문도 저자도 아닌 청중 자신이다. 설교에서 해석의 중심축이 성경에서 청중으로 옮겨진 것이다. 효과적으로 들려지는 설교의 방법론을
찾다가 설교해야 할 대상과 내용을 놓쳐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과 확신 없이 진정한 기독교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성경적인 설교가 바탕되지 않는 곳에 진정한 영적 부흥은 기대할 수 없다. “내용과 형식면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보여주지 못하는
설교는 실체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설교의 권위는 설교자의 성경에 대한 관계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삼위의 하나님에 대한 투명한 관계에서
비롯된다. .... 설교자는 확실하게 성경의 권위 아래에 놓여져야 한다.”(J. I. Packer,
“Introduction: Why Preach?,” The Preacher and
Preaching: Reviving the Art of in the Twentieth Century, ed. Samuel T. Logan, Jr.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86), 11?12).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여 청중의 삶에 가장 적실하게 적용하여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 이것이 개혁주의 설교가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
http://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67§ion=sc9§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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