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원리와 목회실천의 관계

1. 서론

특강은 부탁 받았을 때 맡은 주제는 신학원리와 목회실천의 관계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루게 될 문제는 신학생들이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그들이 나중에 목사로서 행하게 될 목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주제가 먼저 학생들에게 매력있는 것임을 필자는 잘 이해할 수 있다. 신학교에서의 공부가 정말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학생들에게는 쉽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듣기로는 어떤 목사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목회를 시작하자마자 우리가 신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이 목회실천에 유익이 없음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 오늘의 공부가 내일의 목회활동을 위해 어떤 유이기 있는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의 이 주제는 다른 면에 있어서 교수인 필자에게도 매력있는 것이다. 교수의 임무는 신학생을 가르치는 것이다. 학생을 가르칠 때 필자는 나중에 아무 소용이 없는 무거운 짐을 학생들에게 지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칠 때는 지금 가르치는 내용이 나중에 학생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가르친다. 가르치는 내용이 목회실천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더라면 필자는 일치감치 교수 노릇을 포기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가진 확신을 여기서 설명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다.


2. 신학과목과 목회실천

오늘의 주제에 나오는 문제를 보다 정확하게 살펴보기 위하여 이 주제와 비슷한 주제 즉 신학과목과 목회실천의 관계에 대해 먼저 간단히 생각해보자.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은 목회실천에 있어서 중요한 것들인가? 이와 관련하여 두가지 보기를 들겠다. 그 보기는 둘다 목회신천과는 거리가 먼 것같은 전문적인 과목에 나오는 것들이다.

첫째 과목은 구약역사인데 이 과목에서는 고대 근동 지역의 지도도 좀 배워야 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출애굽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과목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떠났을 때 홍해를 건넜고 광야를 지나서 가야했다. 지도를 모르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갈 때 오직 그 길로만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를 보게 되면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당시 사람들이 주로 다닌 길은 북쪽으로 바다까지 가서 그 다음에 해변을 따라 블레샛 사람의 지방을 통하여 가는 길이었다. 예를 들어 당시의 상인들은 그 길을 따라 가나안으로 갔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 길은 그 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애 홍해를 통과하는 길로 인도하셨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그 대답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출 13:17).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도록 하신 뒤 백성들은 홍해를 등지고 있었으므로 애굽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신학생들은 근동지도를 공부한 덕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약속된 나라로 가는 길로 계속 가도록 권면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도에 잘나타나 있는 이 사실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하나님이 백성을 그 길로 인도하심으로써 이 약한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준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된 후에도 얼마나 죄를 범하기 쉬웠는가를 보여준다. 목사가 될 사람들은 이 두가 진리 곧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성을 항상 깨달아야 한다.

신학과목과 목회실천의 관계에 대한 두번째 보기는 헬라어와 관련된 것이다. 왜 신학생들은 헬라어를 배워야 하는가? 성령론에 나오는 문제 하나를 예로 언급해 보자.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인치는 일이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로이드죤스 D.M.Lloyd-Jones는 성령의 인침이 믿은지 얼마 후에 뒤다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엡 1:13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를 지적하면서 분사가 어떻게 변역되건간에 ‘rmef이 인침을 받을 때 이미 신자였다’고 말한다. 성령의 인침이 확신이 최고 형식이라는 견해는 이 분사의 의미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직접 헬라어를 살펴 볼 때 우리는 사도바울이 여기서 단순과거 분사를 사용했음을 알게된다.(πιστευσαυις). 헬라어의 단순과거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어떤 행동이 시작을 지적하는 것이다. 헬라어를 배운 사람은 ‘믿다’라는 동사의 단순과거의 특히 믿음의 시작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엡 1:13의 정확한 번역은 ‘그안에서 너희가 믿게 될 때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으로 인치시는 일이 믿는 동안에 일어나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 인치심을 특히 믿음의 시작과 관련킨다. 그러므로 이 인치심이 에베소 교회 모든 교인의 경우에는(너희), 과거의 사건으로 제시 될 수 있었다. 즉 ‘너희가 인치심을 받았다’라는 것이다.

이 분사에 대한 토론는 헬라어의 한 전문적인 요점인 것 같고 ‘믿게 될 때 라는 번역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번역이 목회자에게 실제적이 sruf과를 가져다 주는데 그것은 목사가 신자를 성령을 인치심을 받은 살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이 두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학의 실제적인 중요성은 다른 과목에 있어서도 얼마든지 증명될 수 있다.


3. 신학원리

하지만 여기서 논의할 주제는 신학과목과 목회실천의관계가 아니라 신학원리와 목회실천의 곤계이다. 여기서 신학원리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신학원리인가? 사실 하나님 없이는 신학이란 단어에서‘학’이라는 글자만이 남으므로 의미가 없게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신학의 일반적인 원리가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 원리가 될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물론 그렇다. 신학이란 말에 나오는 신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부정하는 신학자도 있다. 예를들어 벌콮H.Berkhof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지만 조직신학 책을 썼다. 하지만 개혁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은 안 될 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개혁교회에서는 삼위일체 교리가 신학원리 중 하나인 것 같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모든 기독교 신학은 성경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요사이 많은 신학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을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쓴 책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로서 그것이 참된 신학은 아니다. 우리가 의미하는 신학 원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하게 받아 들이는 개혁주의 신학이 인정하는 신학원리이다.

우리는 개혁교회가 인정하는 원리에 집중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개혁교회의 고백서에 표현되며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개혁신학의 원리가 웨스트민스터 표준서들에 표현되어 있다.

신학원리와 목회실천이 관계에 대한 질문은 이제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 표현되고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가르쳐지는 신학원리는 목회 활동에 있어서 어떤 결과를 낳느냐는 것이다.


4. 칼빈

개혁교회는 언제나 신학원리가 구체적으로 중요한 것이어야 됨을 주장했다. 여기서 잠시 칼빈의 말을 들어보자. 칼빈의 중세 신학자들을 비난하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의 신학에 사변적인 요소가 자주 나온다는 것이다. 칼빈은 사변을 반대한다. 기독교강요의 서두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경건과 관련되어 나온다.

칼빈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유익에 대한 지식이 공급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된, 그 존경을 경건이라 부른다’고 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우리를 경건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건이 없다면 하나님이 참된 의미로 알려지신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갈빈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면서 사변에 대해 경고한다. 사변은 우리의 신앙이나 목회실천을 위하여 구체적인 결과가 없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실제적인 결과를 가진다.

다른 곳에서 칼빈은 천사에 대한 교리를 다룬다. 중세기 신학자들은 천사에 대해 사변적인 논쟁을 많이 벌였다. 그 중 하나를 예로 들자면 바늘끝에 천사가 몇 명이 서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같은 토론이 구체적으로 무슨 결과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칼빈은 특히 천사론을 다루면서 그것을 모든 종교적 교리에 대한 일반적인 규칙을 제시하기 위한 좋은 계기로 삼는다. 칼빈은 세가지를 지적한다.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계시하는 것을 넘어가서는 안된다.

(2)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건덕으로 인도하는 것을 찾고 묵상해야 한다.

(3) 하나님께서 헛된 문제점이 아닌 참된 경건을 우리를 교육시키고자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지식에 만족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 교리와 목회실천 사이에 관계를 연구하려면 칼빈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이미 칼빈은 사변을 피하고 가르쳤고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참된 교리를 연구하라고 가르쳤다.

이제 우리는 성경적 원리가 실제적 결과를 가진다는 것을 이론적인 방식으로 옹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이미 다른 글에서 논의했기 때문에 이제 구체적인 방식으로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 즉 세가지 신학적 원리에 있어서 그들이 목회실천에 미치는 구체적인 결과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5. 하나님이 우선

첫번째 원리는 우리 신앙에서 하나님이 우선적 위치를 가지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을 모르겠다. 그는 개혁주의 교의학 책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런 책에서 신론은 여러 주제 중 하나에 불과한 거이 아닌가? 또 우리 신앙을 표현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마찬가지 아닌가? 거기에도 하나님이 다른 주제와 나란히 토론되고 있지 않은가? 신론에 대한 고백 앞에 성경에 대한 것이 나오고 신론 후에도 작정, 창조등이 나온다. 하나님의 우선되심이 어떻게 개혁신학의 원리가 될 수 있는가?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우선되심이 어디나 나오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고백은 성령이라는 한책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알리시느냐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다른 모든 주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작정에 대한 고백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결정하셨음을 말한다. 창조에 대한 고백은 성부, 성자, 성령이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셨는가를 말하고 섭리에 대한 고백은 하나님이 어떻게 만물을 다스리시느냐에 대한 것이다. 죄라는 것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이 벌 주시는 것으로 고백되고 있다. 신앙의 모든 주제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선이 되신다.

그러면 이 신학원리는 목회실천과 정말 관련이 있을까? 이 원리가 필자의 생각에는 목회활동에 참으로 중요한 것인데 그것을 특히 설교라는 분야에 있어서 보여 주고자 한다. 설교에서 하나님께 우선적 위치가 주어지지 않으면 그 설교는 아무리 많은 진리를 표현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사울에 대한 설교를 생각해 보자. 본문은 삼상 15:12이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니 혹시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이 본문은 17절과 관련될 수 있다. ‘사무엘이(사울에게)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에 대한 설교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사울이 왕이 도기 전에는 자신을 작은자로 보았지만 아말렉 백성을 정복한 후에는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건설했다. 사울은 교만한 자가 되고 말았다. 원래 겸손했던 사울조차도 교만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설교자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 청중들을 바라본다. 즉 사울이 범한 잘못은 우리 모두를 날마다 위협하는 시험이라는 것이다. 어릴 때 우리는 자신이 중요한 자가 아님을 잘 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중요한 존재가 되어 교만하게 될 수 있다. 우리도 자신을 위하여 영적인 기념비를 건설하고 싶어진다. 이처럼 목사로서 우리는 많은 약점들을 지적하고 청중들을 잘 경고할 수 있다.

이런 설교는 좋은 설교처럼 보이지 않은가? 또 구체적인 설교가 아닌가? 또 교만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설교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점을 고려해 보자. 이 설교에서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은 적용에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셨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설교는 하나님이 없는 설교이다. 그 결과로 설교는 기독교적 내용이 없는 설교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설교는 기독교 예배당에서 뿐만 아니라 서당이나 불교 법당 등 어디에서나 행해 질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설교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오직 도덕적 교훈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설교의 근본적인 잘못은 하나님의 우선됫미을 무시한데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우선되심을 고려하면서 삼상 15장에 대해서 어떻게 설교할 수 있을까? 사실 필자의 생각에는 설교자가 11절만 가지고서는 설교할 수 없다고 본다. 그 본문은 하나님의 계시도 아니고 선지자 사무엘의 말도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길가는 사무엘에게 말한 것일 따름이다. 이것은 이야기의 한 요소에 불과한 것인데 우리는 그 이야기 전체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을 멸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울은 아말렉을 정복했지만 아말렉 왕은 살려 두었다. 그는 또한 아말렉의 가축도 죽이지 않았다. 따라서 삼상 15장이 제시하는 사울왕의 죄는 교만이 아니라 불순종이다(22, 23절 참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위시키신 것이다.

이 모든 것 가운데 기념비를 세운 것은 한 요소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잘못이라 말씀하시지도 않았다. 기념비를 만드는 것 자체가 죄인가? 사울은 아말렉 족속의 정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건설할 수도 있었다. 기념비를 건설하는 것 그 자체는 성경에서 금지된 것이 아니다. 그 기념비는 사울이 불순종과 관련해서만이 잘못된 것이 된다. 즉 사울은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은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건설했다. 그것은 사울이 자기의 불순종의 회개하지 않은 표시이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념비 건설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시지않고 사울의 불순종 때문에 그에게 벌주셨다.

설교자가 삼상 15장에 대해 잘 설교하려면 그 사건에서 하나님의 우선적 위치를 깨달아야 한다. 사건을 하나님과 관련시키면 우리는 본문의 메시지가 교만에 대한 교훈이 아닌 줄 알게 된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사울은 그 명령을 부분적으로만 순종하고 하나님은 그 부분적 순종에 대해 심하게 벌 주신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이 사실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과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과 부분적 순종이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사울이 받은 벌 주신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이 사실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과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과 부분적 순종이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사울이 받은 벌을 통하여 경고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메세지는 우리가 본문의 내용에서 하나님의 위치를 중심으로 여길 때만이 나올 것이다.

하나님의 우선되심에 근거한 설교의 두 번째 보기를 들겠다. 막 5장에는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중 33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데’ 이 본문을 가지고 목사가 믿음에 대하여 설교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참된 믿음의 성격은 무엇인가? 그 여자는 두려워하면서 예수님께 나아갔다. 그러므로 믿음의 첫 번째 성격은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믿음의 두번째 성격은 겸손한 것이다. 그 여자가 예수님 앞에 엎드리지 않았는가? 믿음의 세 번째 성격은 고백하는 것이다. 그 여자가 그리스도께 모든 사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이 설교는 아까 언급한 설교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그 설교는 교만에 대한 경고로서 도덕적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설교는 믿음에 대한 것이므로 완전히 기독교적인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는 염려스러운 요소가 하나 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 그것이 일반적인 태도가 아니었다면 그것을 지금 어떻게 일반적인 규칙으로 교인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가? 또한 그 당시에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제자들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참된 믿음이 없었는가? 이처럼 막 5:33의 내용을 일반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한 걸음은 더 나아가 이리한 설교방식의 근본적인 잘못은 이 설교가 하나님이 없는 설교, 그리스도가 없는 설교라는 사실이다. 그 설교는 그 당시의 여자로부터 오늘날의 청중들에게도 직접 적용되고 있으며 그 적용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본문을 잘 이해하고 또 잘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과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즉 하나님이 구약에서 주신 율법과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고려해야 한다. 구약의 율법을 따라 이 여자와 같은 사람은 의식적으로 불결한 사람이었다(레 15:25이하). 그런 사람을 만지는 자도 역시 불결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 여자는 성전에는 갈 수 없었고 사람들과 교제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예수님을 만졌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 여자는 두려워하면서 예수님께로 갔다. 자기가 사람들을 만졌고 일부러 예수님까지도 만졌기 때문이다.

히지만 예수님은 그 여자의병을 고쳐 주셨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 여자를 의식적으로 깨끗게 해 주셨다. 즉 예수님은 성적인 것과 관련되 그 여자의 불결함을 용납하시고 그 여자에게 깨끗함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중심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예수님과 그분의 깨끗게 하심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길이 오늘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할 내용이다.

우리는 우리의 성적인 더러움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불결함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사람들과 교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없애 버리시고 그렇게 하심으로서 하나님 및 사람과의 교제를 가능케 하신다. 이것이 이 설교의 촛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가 본문을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 만이 찾을 수 있다.

이상의 보기들을 논의한 것은 설교를 제시하고자함이 아니다. 여기서 두 가지 설교 형식을 제시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즉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선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함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주된 역할을 항상 인정한다. 우리는 그사실을 잘 알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항상 그원리에 따라 설교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우선되심이라는 신학원리를 항상 설교하는 일과 관련시키라는 것이다. 설교를 준비할 때 그 적용을 언제나 다음의 내용에 따라 검토하도록 하자. 즉 적용에 있어서 하나님이 참으로 핵심이 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위치가 제이차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적용은 언제나 구약이나 신약의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을 통하여 오늘의 청중들에게로 가야하는 것이지 그 당시 사람으로부터 직접 청중에게로 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6. 선택교리

이제 신학원리가 목회실천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과 또 관련되어야 할 필요성을 함께 보여주는 두번째 보기를 들겠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전도에 관심이 많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신자들은 불신자들엑 하나님의 그분의 사역을 전한다. 교회마다 있는 주일학교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의 자녀에게도 복음을 가르치고 있다. 전도에 대한 이러한 열심과 활동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이 모든 전도활동이 하나님의 선택교리를 잘 깨닫지 못한다면 그릇된 길로 가버릴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신학원리 가운데 정말 실천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게 있다면 그것은 선택교리일 것이다.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죄인 중에 누가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 있고 그리하여 죄사함을 받고 또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셨다는 교리이다. 선택이란 하나님의 생각에 속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교리가 진리이긴 하지만 그것이 목회활동에 있어서 실제적인 결과를 가지는 교리가 될 수 있는가?

그 첫째 대답은 선택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더이상 신뢰할 수 없고 인간의 가능성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빌리 그래함 Billy Graham이 1984년에 한국에서 한 설교에 잘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자신의 자유 의지의 행동으로 「믿는 것과 받는 것을」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면에 있어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분 자신이 제시하시는 생명을 억지로 받아들이게 할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결정이 없어졌고 그 대신 결정하는 인간이 나온다. 그 결과 이것은 두 번째의 결과이다. 믿음을 설득하는 것이 목사의 최고 임무가 될 것이다. 목사의 주된 관심은 이제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능력있게 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선택이 없다면 모든 것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목사의 가능성에 달려 있다. 이때의 위험은 목사가 하나님의 계시에 완전성에 유의하지 않고 사람에게 인상을 주는 일에 유의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목사는 인상깊은 것만을 말하고 반대가 예상되는 말은 생략하게 될 것이다. 그 겨로가 설교자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중 상당부분을 잘라내게 될 것이다.

선택론을 무시할 때 생길 세 번째의 결과는 많은 목사에게 실패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비교적 많지 않은, 성공한 목사들에게 관심을 가진다. 그들의 교회는 성장하며 그들은 능력있는 말 대문에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목사들이다. 그러나 다른 목사들을 고려해 보자. 물론 그들 중 게으른 사람들도 있겠지만 열심히 봉사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교회는 수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실패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목회를 잘 못하는 사람으로 말할 수도 있다. 또 시골의 자그마한 교회에서 열심히 전도하는 목사를 생각해 보자. 전도의 열매가 많지 않을 때 이들이 실패자로서 비판만을 받아야 하는가?

사실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실패자들이다. 즉 하나님의 선택을 깨닫는 일에 있어서 실패하게 된다. 목사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러나 열매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사람이 중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즉 교회가 성장하지 않을 때 그 이유가 필연적으로 목사의 부족인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이 선택을 무시한 결과라면 그럼 선택을 인정하고 고려한 결과는 무엇인가? 다시말해 선택이라는 신학원리가 목회실천은 어떻게 관련되는가? 이것을 행 18:9-11을 따라 살펴보기로 하자. “밤에 주께서 항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이 본문에서는 선택개념이 핵심이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는 표현은 선택을 가리킨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를 시작한지 아직 오래되지 않았고, 아직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많은 사람’이 라고 하실 때 그분이 의미하신 것은 앞으로 예수님을 믿고 교인이 될 사람이다. 또 그들이 많다는 사실까지도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바울의 전도 열매가 항상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고린도로 가기전에 그는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다. 아덴에서 전한 복음은 사도행전에 부분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까지 많이 인용되고 사용된 것이다. 그 설교 자체는 잘못된 점이 없다. 하지만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 설교는 실패였다. 아덴의 철학자들은 더 이상 듣기를 원하지 않았고(17:32)믿게 된 사람도 많지 않았다(17:34). 그러므로 고린도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는 것은 바울의 능력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믿을진대 우리는 먼저 전도의 열매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음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을 듣는 사람 중에서 선택받은 사람이 듣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전달하는 노력을 사용하신다. 이 사실은 진실하게 일하면서도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 목사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선택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큰 교회를 만들지 못한 목사를 실패자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선택은 목사가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 때 목사는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선택받은 사람은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목사나 다른 사람들의 전도를 통해 실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한 사도행전의 본문은 이것도 잘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고린도에 많기 때문에 복음을 이것도 잘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고린도에 많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야 했다(행 18:9). 그리고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일년 반 동안 복음을 전했다(18:11). 하나님이 선택한 대한 인정은 우리를 열심있는 전도로 인도한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전달하는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18:11). 이것은 선택을 믿는 세 번째의 구체적 결과이다. 바울은 복음을 잘라낼 필요 없이 진실하게 복음을 완전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선택받은 사람이 믿게 될 복음을 그대로 전달한다. 이와같이 선택을 믿는 구체적인 결과는 목사가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을 전달하는 일에 매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다 하나님 곧 선택의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데 충실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사람의 비판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게 되는데 이는 열매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7. 성령님의 발생

신학원리가 목회에 실천적인 결과를 갖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한 주제를 다루어 보겠다. 그것은 성령론에 나오는 것이다. 즉 성령론에서 성부와 성자 및 성령의 관계에 대한 교리이다. 그 관계는 성령님의 나오심(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성령님의 발생 내지는 파송)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교의학 책을 보면 이 문제가 고대교회와 중세기에 많이 토론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 총회(381)에서 성령님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신다고 결정되었다. 이백년 후에 서방 교회는 톨레도 총회에서 거기에다 성자에대한 언급을 덧붙여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고 했다. 동방교회는 이 첨가를 거부하였고, 성령님이 단지 성부에게서만 나오신다고 믿고 있다. 이 차이는 1054년부터 분리된 동․서 교회사이의 큰 장애물이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분석하지는 않고 다만 우리 논의의 보기로만 사용하겠다. 이 문제가 토론된 지 천년이나 지난 지금 살아가는 우리가 그 토론에 대해 읽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이론적인 문제로 보이지 않는가? 성령님이 성부 및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이 무슨 실제적 유익이 있는가? 성령님이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가의 여부가 중요한 문제인가? 성령님의 나오심의 원리는 도대체 무슨 실제적 결과를 가지는가?

그 대답은 성령님이 만약 성부의 성령님이 아니시라면 성부와 성령이 서로 분리된다는 것이다. 그 때 성부와 성령은 서로 다른 것을 행하신다. 그리고 인간이 성령님을 따를 때 그는 성부와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다.

이 분리는 신비주의의 한 특징이지만 신비주의 밖에서도 나올 수 있다. 그런 이론에 따르면 성령님은 신자를 하나님과 관련시키지만 신자를 성부의 사역과는 관련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신자가 가능한 만큼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신비주의 신자는 세상 바깥의 수도원이나 외딴곳에서 살려고 한다. 그만큼 벗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세상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 신학적인 이유는 성령님이 성부의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님은 신자를 성부와 사역인 이 세상과 관련시키지 못한다.

도리어 성령님이 성부의 영이심을 인정할 때 신자는 이 세상과 관련된다. 성령님은 신자를 성부와 관련시킴으로써 신자 안에서 세상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시고 이 세상에서 올바로 일하게 하신다. 성령으로 충만된 신자들은 엡 5,6장에 나오는대로 세상적인 관계, 즉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 관계, 노사 관계 등에서도 순종을 나타낼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신자는 기독교적 정치에도 관심을 갖는다. 그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세상인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정부들이 성부가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행하느냐 하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성부의 영은 성부의 세상에서 무엇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일으키신다.

성령님은 또한 성자의 영이시며 성자의 일을 이루도록 보냄을 받으셨다. 성자의 일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죄 용서를 이루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셨고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하여 성령님을 주신다. 성령님과 성자 사이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은 신비주의의 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밖에도 성령님이 우리를 성자의 사역과 관련시킨다는 사실이 자주 부정되어 왔다.

필자가 본 보기를 하나 들겠다. 필자가 만난 어떤 사람은 자기가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민이 많아서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어느 날 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밖은 빛을 보여 주시고 하늘에서부터 어떤 목소리가 그를 부르셨다고 했다. 그 때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백한 백성중 하나임을 확실히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당시와 그 후 20년 동안을 간음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자기 생각에는 그 간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옛 사람에 속하는 것이었다. 옛 사람으로서 그는 마음대로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그를 부르셨다는 성령님이 그의 일상생활 및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 사람의 잘못은 성자와 성령을 분리시킨 것이다. 그에게는 성령님이 성자의 사역을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며, 성령님은 성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존재였다.

성경은 롬 8장에서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8:9)이 우리의 성화를 이룩하신다고 가르친다. 성령님이 어떤 사람에게 거하실 때 그분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죄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대적하실 것이다.

이처럼 성령님은 성부 및 창조된 세상과 분리될 수 없다. 또한 성령님은 성자 및 구원사역과도 분리될 수가 없다. 이러한 원리가 목회실천에서 낳는 구체적 결과가 무엇인가 할 때 그 대답은 목사는 청중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과 그들이 자기의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권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8. 결론

이상에서 신학원리가 목회실천과 어떻게 관련되느냐에 대해 세가지 보기를 제시했다. 그러나 신학의 모든 참된 원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목회 실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신학생들도 목회를 하면서 신학원리가 목회실천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계속해서 더 많이 깨닫게 되어야 할 것이다.

<고재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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