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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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수로왕
駕洛國 首露王
지위
가락국의 초대 국왕
재위 42년~199년
후임자 거등왕(居登王)
이름
김수로(金首露)
묘호 수로왕(首露王)
신상정보

출생일

42년 0월 00일(2041-11-30)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慶尙南道 金海)

사망일

199년 00월 00일 (157세)

사망지

경상남도 김해(慶尙南道 金海)

매장지

수릉(首陵)

왕조

가락 왕조(駕洛 王祖)

가문

가락 왕조(駕洛 王祖)

모친

정견모주(正見母主)

배우자

허황옥(許黃玉)

자녀

거등왕(居登王) 묘견공주(妙見公主)

종교

불교(佛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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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왕릉(首露王陵)

생애

수로왕(首露王, 42년(임인년) ~ 199년, 재위: 42년 ~ 199년) 또는 김수로(金首露)는 가락국(駕洛國)의 초대 국왕이며,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일명 수릉(首陵), 뇌질청예(惱室靑裔)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신라 유리왕 19년(42년) 가락국 북쪽 구지봉(龜旨峰)에 하늘로부터 떨어진 6개의 금란(金卵)이 모두 변하여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김수로도 그 가운데 하나로, 김해 김씨의 시조이다. 수장(首長) 구도간(九刀干)들이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나라를 세워 가락국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 알 중 가장 먼저 깨어난 9척(약 2m)의 소년이 수로왕이 되었다고 하나, 신라최치원은 그가 정견모주라는 여성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150세 이상을 생존했다고 하나 이는 신빙성이 낮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변한구야국에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42년 3월 부족장을 기다리는 구야국의 지도자들에게 "너희의 왕을 내려 보낸다"는 계시와 함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하늘의 계시를 들은 부족장들은 가락국의 9간(干) 이하 수백 명이 김해의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말대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고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다.

부족 주민들의 수가 늘어나 노래소리가 커지자 하늘에서 빛이 나더니 곧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빛 상자가 내려오고, 그 안에 둥근 황금색 알 여섯 개가 들어있었다. 12일 후 이들 알에서 사내아이들이 태어났는데, 그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알에서 깨어난 아이가 수로였다. 부족장들은 그를 6가야 중 수도이자 영토가 넓은 가락국의 왕으로 추대하여 주민들은 그를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또한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학자 최치원석이정전(釋利貞傳)에 따르면 가야산의 여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하늘의 신(神)인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명은 뇌질주일(惱室朱日)이었고, 다른 한 명은 뇌질청예(惱窒靑裔)였다. 금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청예(김수로왕)는 여신 정견모주를 닮아 얼굴이 희고 갸름했으며 대가야의 시조가 된 뇌질주일(이진아시왕)은 이비가를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글고 붉었다고 한다. 이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맏형이었다고 한 ≪가락국기≫에 전하는 금관가야 중심의 형제설화와는 대비되는 것이다.

석탈해와 재주를 겨룬 뒤 이겨 가락국의 왕 자리를 지켰고, 102년, 파사 이사금의 요청으로 실직곡국음즙벌국 사이의 영토 분쟁을 중재하였다. 이에 파사 이사금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연회에 모이게 하였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종[奴]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 보제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부인은 마우리아 왕조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이며, 199년까지 무려 158년 동안이나 살았다는 신화적 인물이다. 수로왕은 허황옥을 태우고 온 15명의 아유타국 선원들에게 450필의 비단을 내렸는데 이는 대단히 많은 물량이며 또한 옷감 450필, 쌀 150섬을 싣고 움직일 수 있는 배를 이미 갖고 있었다는 것은 가야가 연안 항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뱃길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러한 물량은 단순한 하사품이라기보다 교역 물량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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