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의 선교사상 연구

Ⅰ.서론
 
1.문제제기와 본 논문의 중요성
사복음서를 중심으로 예수의 선교사상을 검토해 볼 것이다. 사복음서를 중심으로 선교의 근거와 정당성을 찾으려고 할 때 선교라는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면 연구의 범위가 방대하여 지므로 본 논문에서는 선교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한정하려고 한다.
선교란 "선포하다"의 의미를 가진헬라어 (케리세인)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은 뜻은 "보낸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아포스텔로)와 (펨포)와 연관하여 생각할 때 나타난다. 도드(C.H. Dodd)는 고전 1:21을 해석하면서 "전도의"( )라는 단어안에 있는 "선포"( )라는 단어에 주목할 때, 그 뜻은 비기독교 세계에 기독교를 대중적으로 설교하는 것을 의미하므로영어의 mission이라는 단어의 뜻이 이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선교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는 사건을 말하며(고전1:21) 더 나아가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이며(요20:21)이제 우리도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자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 성서적 선교개념이라 할 것이다.(고전4:1)
 
2.연구의 범위와 방법
사복음서 안에서 선교와 관계된 제 논점들을 취급하기에 앞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나사렛 예수와 초대교회 공동체의 세계선교와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쯔웨머(Samuel Zwemer)는 전통적으로 네 가지의 견해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 헤겔(Hegel)이나 톨스토이(Tolstoi)등의 그단적 견해로서, 예수가 가진 것은 반유대적의식으로 오직 세계선교만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견해는 선교본문의 후기-부활적성격(the post-Easter nature of the mission texts)을 지나치게 소흘히 본다는 비판을 받는다.
둘째로 이와 정반대의 견해가 있다. 즉 예수는 극단적 유대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라이마르스(Reimarus), 스트라우스(Strauss), 벨하우젠(Wellhausen), 하르낙(Harnack)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이 견해는 예수와 초대교회공동체가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관점 즉 "때"(time)에 대한 의식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종교진화론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견해로서 예수가 처음에는 편협한 유대주의자였으나 그의 생애가 끝나갈 무렵 세계선교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견해를 말한다.여기서는 카임(Keim) 하우스라트(Hausrath), 베르톨렛(Bertholet), 바이스(Bernard Weiss)등이 대표적인데, 이 견해 역시 둘째 견해와 비슷한 비판을 받고 있다.
한편 한(F. Hahn)은 "때"를 강조한 예레미야스(Jeremiss)의 견해를 또 하나의 유형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예수 자신이 이방선교를 시작하지 않았고 교회도 그의 가르침에서 선교적 교훈을 연역해 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예수의 부활이 초대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구원의 마지막 때가 되었음을 확신하게 만든 결과 그렇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견해는 "보냄"을 받는 적극적인 선교관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비판을 면치 못한다.
넷째로 예수가 그의 생애 동안에 이방선교를 시작하지 않았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있었고 부활 이후에 이것을 구체적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교본문의 후기-부활적 성격(the post-Easter nature of the mission texts)을 잘 반영해주는 견해라 할 수 있다. 쯔웨머는 이 견해를 정리하여 교회의 전통적인 주장으로 제시한다. 즉 예수는 그의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전인류에 대한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특히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보내어졌음을 알고있었다. 따라서 그의 지상사역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의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견해들을 극복하고 예수의 지상사역이 세계선교에 대하여 어떤 준거와 모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을 것이란 가정을 사실로 밝히는데에 있다.
이를 위해 예수의 지상사역을 통하여 나타난 이방선교의 맥락이 과연 부활 이후의 교회의 최대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 세계선교의 국면에 얼마나 깊은 교훈과 모본을 제시하는지를 공관복음을 통하여 감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Ⅱ.사복음서의 선교신학
1.사복음서의 주제
마태복음의 대주제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사역과 그리고 장차 그 나라의 왕으로서 등극하게될 보좌와 우주적통치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고난의 십자가를 받아 들이셨다. 그러나 그는 "메시야"라는 호칭을 거부 하셨고 오히려 "인자" 라고 칭하시기를 좋아 하셨다. 복음서 기록자들이 예수안에 우주적 메시야 의식이 있었지만 십자가와 부활로 그의 사역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의 친구들이나 원수들이 그 의미와 범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인자"라는 칭호의 사용이 가장 빈번한 것은 마가복음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가복음에서 더 상세히 다루도록 하고 사실상 인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해를 마태복음에서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보고하면서(16 : 13 - 20),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질문에서 마가복음에 있는 με를 τον υιον του ανθρωπου로 대치하여 예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 τινα λεγουσιν οι ανθρωποι ειναι τον υιον του ανθρωπον :그리고 마가복음에 있는 베드로의 대답 συ ει σΧριστοσ에다 마태는 ο υιοσ του θεουτ-ου를 덧붙인다. 아마도 이것은 공관복음에서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을 동일시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예일 것이다. 최후의 심판의 비유 (마 25 : 31-46)에서 인자는양과 염소를 분리하고 그 "양"들을 위해 그의 아버지 하나님의 심판을 전할왕과 동일시된다. 그들은οι ευλογημενοι του πα τροζ μ-ου (v. 34)로 인정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이 人子의 아버지와 동일시됨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인자의 사상은 에수의 초림을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요하네스 블라우는 이를 특히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함께 우리에게 예수의 선교적 사명을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단서가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이유는 이 비유가 여러면에서 볼 때 "다음에 계속되는 비유들을 이해하는 데에 출발점이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dl 비유는 비유에 사용된 여러 사건들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계시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러한 13장의 일곱가지 비유들은 "시간이 천국을 이루는 한 요소"임을 말해주고 있다는 데에 동감한다. 누구든지 씨를 뿌리고 당장에 추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진행중에 있으며 세상 끝날이 미루어지고 있다는 이것이 메시야 시대에 주어진 특별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메시야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한정된 방법으로만 사용될 수 있는데, 이 길은 대리적인 고난과 죽음의 길인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이기도 한 인자(人子)는 복음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하나님의 고난의 종이라는 사명과 함께 재림하실 인자의 사명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고 할 때 마태복음은 이러한 요소를 가장 잘 충족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두사역-고난받는 하나님의 종과 구름타고 재림하실 인자-을 실행함으로써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으로 대속을 이루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목적을 성취하신 예수께서, 또한 인자로 구름타고 오셔서 인간, 곧 제 2의 아담으로서의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다. 그리고 심판이 늦추어 지는 것은 이 열매가 익어 추수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과 함께, 보다 많은 풍성한 추수를 주인이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추수는 풍성하여야 한다. 만국에 대한 복음전파의 동기와 임무는 여기에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적 대위임은 마태복음의 마지막장인 28장에서 선며하게 드러난다. 주님의 선교명령이 부활 후에야 구체적으로 언급 되었다는 것은 그의 사역과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상관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은 종말에 있게 될 메시야의 심판때에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지금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메시야 왕의 최후심판에 대한 예수의 설교가 보다 상세히 드러나고 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은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다.(마4:17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선포 뒤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곳인지에 대하여 본질이나 존재를 증명하는 설명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하나님 나라사상에 매우 친숙 하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이와같은 선포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요단강 사방에서 나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예수님께서 점차적으로 비유를 통하여서하나님 나라 의 본질과 특징을 설명하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유대인들에게는 친숙한 사상이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하나님 나라 와는 의미에 있어서 상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사복음서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통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종말에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학자는 없는 듯 하다. 즉 사복음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에 대개의 신약학자들이 동의 하는 듯 하다. 하나님의 통치, 이는 하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택하신 자들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이를 성서에서는 하나님 나라 라는 어휘로 표현하고 있다.예수님께서는 이와같은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 를 선포하시고 또 한 가르치셨다. 신약성서 전체에 이와같은 어휘가 나타나고 있지만, 공관복음과 사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어휘를 택한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으로 이 어휘를 사용하셨으며,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이 어휘를 사용하신 의미를 바르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세상의 인간 역사와의 갈등 속에서 변천 되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사복음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사상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된 하나님 나라 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사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사용되고 있는 본문 가운데서도 어느 한 부분에서 온전히 하나님 나라 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고 있다. 때로는 적대시 하는 사람과의 논쟁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의 특징을 하나 밝히시고, 또 이적을 행하신 후에 하나님 나라 의 다른 특징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의 특징들을 하나씩 나열한 뒤에 그 특징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공통된 하나님 나라 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올바른 하나님 나라 를 이해하는 것이며, 참된 하나님 나라 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여러 신학자들이 하나님 나라 에 대하여 여러 견해를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그와같은 견해들이 사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정확하게 이해하고 난 뒤의 주장인지를 검토하며, 교회로 하여금 확실한 하나님 나라 의 사상을 이해하여 지금 현실 가운데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가운데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의 사상이 팽배 하면서 교회 내의 문제와 함께 사회 문제까지 야기되고 있는바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신 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 나타나고 있는 공관복음의 하나님 나라 를 연구하여 성서적인 하나님 나라 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한다.
사복음 전체가 하나님 나라 사상으로 가득하기에 전체를 다루는 것은 너무나 방대한 분량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어휘의 문제로 나라(Basileia)에 대한 것을 살펴보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 어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서 이것과 선교의 관계성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2.하나님나라의 신학과 선교
공관복음에는하나님 나라( :the Kingdom of God) 와하늘나라(:the Kingdom of Heaven)'라는 두 어휘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어휘의 공통어인 나라를 살펴본 후에 이 두 어휘의 차이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A. 나라 (Basileia)
이 단어는하나님 나라 에 관해 해석하는데 매우 중요한 논점이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인 출발에서 이 단어를 고찰해야 한다. 신약성서에서나라 라는 단어의 우선적인 의미는 왕국 이나 백성 보다통치 의 개념이다. .최근에 이 주제에 대하여 비평 학자들에 의하여 많은 관심이 모여졌으며,의 뜻으로 왕국혹은백성 보다왕의 능력,권세 란 개념이 더 기본적이라는데 실제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일반적인언어 사용에서 보통 왕국, 나라로 번역되는 라는 말은 모든 다른 용례보다 먼저 왕의 성격, 지위 등을 지칭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왕에 관한 말이므로 우리는먼저 그의 위엄, 그의 권세를 말한다. 이 추상적 의미는 아마도 우리 주께서 그 의 가르침에서 사용하셨던 아람어 말쿠트(malkuth)에서도 발견된다. 최근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달만의 판단을 확증한다. 구약 성서와 유대 문헌에서 말쿠트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는 언제나 왕적 통치를 의미하며, 그것이 왕이 다스리는 영토를 의미한 것 처럼 결코 그 나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데 추호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바실레이아의 이 추상적 의미에 대한 몇개의 실례가 신약성서에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바실레이아를 받기 위해서 먼 나라로 갔다가 돌아온한 귀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여기서 바실레이아는 영토나 백성이 아니며, 그 백성에 대하여 주어진 영토에서 왕으로 통치할 권세임이 명백하다.(눅 12:19) 이와 동일한 용법이 계시록 17:12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바실레이아라는 단어의 이 정의는 복음서에서하나님 나라의 뜻을 위한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바실레이아가 나오는 모든 곳에통치, 왕권, 주권 을 대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왜냐하면 때로는 추상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이 단어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왕적 권세는 그 백성을 포함하며 어떤 영역이나 영토로 표현된다. 바실레이아의 의미의 정상적인 확장은 세속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에 있어 모두 신약성서에서 발견된다. 그 예로는 마4:8의 사탄의 시험 가운데 만국의 영광을 보여준 것과 막6:23의 헤롯이 살로메에게 약속한 것은 통치하고 있는 모든 지역과 그것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하나님 나라 를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다 연결시키는 것을 보게된다. 이와같은 연구에서 우리는나라 의 단어가 우선적으로는 주권을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 주권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다스리는 영토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주권자의 의도가나라 라는 단어에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아야 한다.
B.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천국)
이 두 어휘의 사용을 사복음서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하나님 나라어휘가 마태복음에는 4번, 마가복음에는 16번, 누가복음에는 32번이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 마태복음에 30번이 사용될 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는 예수님께서천국이 가까왔느니라.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는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고 선포하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태복음 10장 6절,7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12제자에게천국 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누가복음 6장 20절에는 예수님께서 12제자에게하나님 나라 를 전하고 계시며, 마태복음 13장에는하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나, 누가복음 8장 11절과 마가복음 4장 11절에서는 마태복음과 동일한 비유를하나님 나라 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각 복음서에서 어휘가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복음서 저자들이 두 어휘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없었기 때문인가? 이와같은 의문점을 가지고 이 두 어휘에 대한 의미의 차이점을 발견하고자 하는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저자들에게 있어서는 두 어휘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분명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마태복음에 사용된하나님 나라 의 어휘가하늘 나라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 23절,24절을 예로 살펴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천국 에들어 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하나님 나라 에 들어 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천국 과하나님 나라 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천국 과하나님 나라 의 의미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왜 복음서 저자들은 편협된 어휘로 복음서를 저술하였을까? 이와같은 의문점은 복음서를 저술하게 된 동기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쉽게 이해된다. 사복음서는 기록되기 이전에 Kerygma를 내용으로 한 것을 이어서 저술되었다. 이러한 선교적 목적이 복음서에는 있다. 때문에 복음서가 읽혀지거나 보는 사람들에게 좀 더 친숙한 표현과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흩어진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각기 독특한 복음의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다른 어휘를 사용하게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마태가 하나님 나라의 어휘 보다는 하늘 나라 라는 어휘를 사용한 이유는 그의 복음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저술되었으며 복음서 저자들 중 가장 유대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 의 표현은 히브리어의말쿨 샤마임(malkuth shamaim) 을 문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회피하는 고정된 유대식 언어사용과 관련이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회피하는 간단한 방법 중 하나로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마태가 하늘 나라어휘를 사용한 것은 마태 자신이 유대적인 사람이기에 하나님 나라 대신에 습관적으로하늘 나라 를 사용한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가나 누가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들의 복음서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저술된 것이상훈 이기에 오히려 유대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적인하나님 나라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누가가그 나라 라고만 기록하였을 때도 이는 하나님 나라 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눅12:32 ;22:29) 그러나 유대교적 표현으로는 이와같은 용법을 찾아볼 수 없다. 유대교에서는 단독적으로 사용되는 나라는 당시의 통치권을 가진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이 두 어휘의 차이점은 의미의 차이가 아니라 당시의 성서를 기록한 사람의 출신이나, 그 복음서를 누구에게 보낸 것인가?가 어휘의 선택을 가져왔음을 보게 되었다.
1.하나님나라의 현재성
신약성서의 주제인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 실제로 말하여 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과 같아서 미래가 아닌 현재에 인간의 마음에 뿌려지고 있다(막4:3이하).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소망과 기대가 자기 안에서 성취 되었다고 선언 하였다. 그리고 구약의 예언이 이처럼 현재적 실체로 성취된 사실을 들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 했다고 선포하셨다.
천국의 현재성에 대한 주장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적인 능력의 행하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실제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치유 활동과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들로 이해되어 진다(눅11:20;마12:28,13:). 그런데 이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눈으로 부터 숨기워져 있다. 그러나 그 활동은 분명하고 뚜렷하게 우리 가운데 나타난다.
그리하여 존 브라이트는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here and now)" 현존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복음서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성서가 그 나라에 관하여 언급할 때 이미 시상의 극적인 변화가 일어 났다. 구약성서의 미래 시상("보라 그 날이 오리라")이 현재 시상 즉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1:15)라는 선언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약속과 성취"의 구조를 실현시키고 있다.
신약성서는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이, 요나보다 더 위대한 이(눅11:31-32), 아니 성전과 율법보다 더 위대한 이(마12:65-8)가 여기 있다고 말한다. 그는 종의 모습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나타났다(눅4:17-21).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의 활동을 볼 수 있게 되었다(마11:2-6). 이것은 과거의 모든 사람이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한 그 날이 온다는 것이다(눅10:23-24). 이제는 더 이상 그 나라의 긴박성의 징조를 급박하게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여기에 "여러분 가운데"(눅17:21) 있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오심과 동시에 실재로 하나님 나라가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12:28절의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는 말씀에서 예수는 매우 강한 어조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말씀하고 있다. 이 본문의 마지막 말은 완료형인 '임하였느니라'(has come)로 번역해야만 하는 것이 확실하다. 이 본문은 전 문맥, 특히 마태복음에서 따르고 있는 전 문맥 가운데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자기더러 귀신들의 대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내었다고 비방하는 것에 대한 대답에서 사탄과 그의 왕국과 적대되는 것이 하나님과 그의 임의대로 하시는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나라의 능력과 그것의 현존이야말로 예수께서 귀신들 위에 권세를 가진 것의 설명이 된다.
래드(Ladd)는 이와 더불어 성경은 말하기를 사탄은 이미 패배했고 그는 이미 떨어졌으며(눅10:18) 그것은 이미 결박되어졌으며(막3:27), 그의 권세 아래 졸개들은 이미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굴복되었다(막1:27-39,3:11)라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류의 기적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새 시대가 현재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곧 하나님의 권능이 그 기적속에 현존하고 있으며, 이 시대의 마귀세력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그는 사탄의 왕국을 쳐부수고 마귀세력에서 승리하셨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행한 능력있는 일들을 통하여 사탄의 나라는 파괴되고 하나님의 권능은 이 세상에 들어와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하는 실체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전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지배권이 작용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왔으며 이 나라의 도래는 인간의 태도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의 이적과 사탄을 물리치심뿐 아니라 그의 설교 가운데서도 메시야의 도래와 그 나라의 도래가 성취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누가복음 16장16절의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라고 언급한다. 여기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대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는 시대와 대조되어 등장한다. 다른 말로 말해서 복음이 전파됨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선지자들에게는 오로지 대망만 되었던 것이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복음의 전파는 비유와 마찬가지로 천국이 임하였다는 증거이다.
이 밖의 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보면, 쿨만(Cullman)은 "그리스도의 오심 이래 우리는 이미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생활 속에 임하였다고 한다"고 했다.
스튜어트(Stewart)는 "심령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로서 천국"을 말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상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점점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민족적이 아니라 도덕적인 성격이다. 둘째, 세상적이 아니라 영적인 성격이다. 세째, 이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풀러(Fuller)는 절박한 종말론적 왕국과 실현화된 종말론을 인정하며 결론짓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벌써 앞에 적용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예상적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선포와 흔적속에 들어오고 있으나 결정적 사건은 미래이지 과거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구약시대에 예언되어졌던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 되었다. 하나님의 통치권은 이미 이 세상에 작용하고 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적으로 현재속에 임하였다. 앞 장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예수님의 비유(마13장)와 교훈(마5장)들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또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다음으로 미래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B.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복음서의 교훈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을 현재와 미래, 양쪽에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현재와 미래, 양쪽에서 그 자체를 드러낸다.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들이 그 은총을 경험할 수 있는 현재의 영역과 미래의 영역, 이 양쪽 모두를 창조한다. 음서 자료는 그 나라의 미래적 종말론적 측면을 단순히 현재적 측면에 부수하는 것이 아닌 우선적인 시제적 교훈으로 인식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산상 설교는 현재적 의에 관하여 다루고 있지만 그 의를 소유하는 것은 현 세상을 사는데 필요함보다 그 미래적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전제로서 이해된다. 그 나라는 왔던 나라가 아닌, 사람이 지금 스스로 그것의 도래를 예비해야만 하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이 그 나라를 현재적인 것으로 나타낼지라도 그것의 충분함과 완전함은 현존하지 않는다. 악을 행하는 자는 시대의 완료때 까지는 함께 그 나라 밖으로 내어 쫓기지 않으며 오직 그 때에 가서야 의로운 자들이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13:38-43). 하나님 나라는 현시대의 완료시에 선과 악이 분리되기 까지는 완전히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마13:47-50).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한 교훈이 들어 있다. 또한 마태복음 7장 22절에서 '그날'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그날(즉,미래의 심판일)로 언급하였다. 것은 미래의 사건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6장 29절에는 또 하나의 '그날'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여기서 예수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마실 때까지는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였다.
이 밖에도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것이다"(마21:43)등에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교훈해 주신 비유들 중에서도 '달란트 비유', '열 처녀의 비유'등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몸의 부활 등에서 확실히 앞으로 올 천국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필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괄하는 나라임을 확신한다. 예수의 오심을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는 씨중에 가장 작은 씨가 성장하여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되는 것처럼 점진적으로 완성되어져 간다. 완성된 그 나라의 도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우리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이 때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영광의 모습으로 그의 나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Ⅲ.사복음서의 선교사상이해
 
1.복음서의 기록과 중요성
초대교회에에서는 사실 기술된 복음서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생생한 구전 전승(oral tradition)이 풍부하게 존재했고 누구나 주님이 곧 다시 오실 것이란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들었고 목격하였던 1세대 기독교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갔지만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고 로마의 압제나 암울한 세상의 환경느 변함이 없었다. 이에 반발한 유대적 광신주의 자들로 인하여 공포와 소동이 일어나고 기독교공동체의 존립이 위협받는 시기에 종말론적 기대와 함께 이단들이 일어났다. 이를 바라보는 제2세대 기독교인들중에서 그러한 변질을 묵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우리중에 이루어진 사실에"(눅1:1)대한 기록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 책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진실한 설교자라면 꼭 가르쳐야 할 최소한의 것을 제공하여 주었고 또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들을 제시하여 주었다. 이와 같이 공관복음서는 교회의 선교사역의 현장에서 출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말은 당시의 선교적 상황에 의하여 복음서가 만들어 졌다는 것은 아니다.
2) 전도와 선교와의 관계
선교라는 단어와 전도라는 단어가 오늘날에는 의미의 차이가 있다고본다. 먼저 선교사라는 단어의 사용 기원부터 살펴본다. 영어의 미숀나리(missionary)라는 언어는 13세기 로마 가톨릭이 사용했다. 의미는세상에서 사도생활과 사역을 위해 보냄을 받은 어떤 사람(someone whois sent)이다.4) 그러나 이 단어가 오늘날의 선교사 개념으로 사용되어진 것이 아니다. 또 선교사 또는 선교라는 단어가 이 이후부터 그의미를 가지고 꾸준히 사용되어진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선교(mission) 라는 단어보다는 전도(propagation)5)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도 예외가 아니다.6) 선교(mission) 라는 단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사용한 것은 1786년 영국에서[서부인도 감리교 선교회](Methodist Mission to the West India)를 세웠을 때이다. 그렇다고 미숀(mission)의 의미가 오늘날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역시 전도(propagenda)의 의미였다.
오늘날처럼 선교라는 단어가 정착된 것은 바르넥(Gustau Warneak)이1897년에 저술한 복음주의 선교학(Evanyelishe Missionslehre)로 본다.7) 그러므로 이당시까지만 해도 선교와 전도의 관계는 전도가 더포괄적 이었다.그러나 현재는 선교가 전도의 의미를 포함내지 동등한 관계가 되었다.8) 이같이 된 이유는 1910년 에딘 버러 대회의 결과라고 본다. 에딘버러 선교대회 이전에는 선교학을 일명 사도학(apost-elics) 또는 증가학(Prosthetics)이라고 하였다. 이들 개념은 복음을증거하는 행위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사도학의 경우 복음증거를 위해서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보냄은 곧 누구로 부터 보냄을 받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사도적 권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9) 이에 비해 증가학은 교회인원이 복음증거결과 증가한다는 의미를 강조함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에딘버러(Edinbugh) 선교대회와 1928년 예루살렘 선교 대회를 기준하여 선교의 방향이 복음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사회 복음으로 기울어 진 것이다. 이같이 된 이유는 각 선교단체가 교리적 일치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 교리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사업 즉 통계 수집, 마약제거운동, 교육, 성경번역, 출판, 병원 설립 등에 힘을 쓰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선교의 개념은 전도의 개념을 포함하게 되었고 과거의 순수한 개념에서 보다 이탈되고 확대되어 결국 '하나님의 선교(missionDei)의 앞길을 예비하였다. 그러므로 1928년 예루살렘 선교대회시 독일 대표로 참석했던 칼 하임(Karl Heim)은 당시 일부 대표자들은 국제선교협의회를 한낱 국제 연맹이나 민주주의 이상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다.
기독교의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복음서 중에서 최초의 기록으로 보여지는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라"(막1;1)는 설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복음"( )이라는 말의 뜻이 바로 "좋은 소식"인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은 그 근원이 역사적 사실에 있다. 그 순서도 역사적으로 잘 조화되어 있다. 브르스(F. Bruce)는 "기독교는 어느 특별한 시간과 관련이 없는 일반 종교나 철학적 체꼐와 구별된다. 이는 그리스도의 '영단번(once-for-allness)의 구속사건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즉 복음그 자체는 온 인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마지막 단계가 실현되었음을 알리는 신적 선포이며 하나님이 계시하신 사실의 선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복음서가 예수의 인생행로와 예수의 공생애 기간 3년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서 그 기록을 "일대기" "전기"(biography) 혹은 연대기도 아니다. 존 드레인은 복음서들이 예수의 전기적 성격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결코 일반 범주에 속하는 그런 전기물은 아님이 분명하다.심지어 예수의 공생애에 관한 기록이라도 각 복음서는 그의 사역에 대한 선별적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A.성경적 기초
1.역사적 사실과 신앙
복음서들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에 관한 선별적 기사로 간주되고 있다고 해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브레데(W. Wrede)는 마가복음이 단순한 예수를 메시야처럼 묘사한 고도의 신학적 문서라고 규정했고 벨 하우젠(W. Wellhausen)은 브레데의 주장을 공관복음서에 확대적용하여 "공관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전기라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가 고백한 신앙의 보도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연구는 양식비평(form criticism)의 방법을 사용하는 학자들에게 인수 도니었고, 결국 "복음서들은 본래 고립된 자료의 단편들(units)로 구성되었는데 그 단편들은 역사적 보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설교하고 가르치고 기타 활동을 하는 데 나라마다 필요로 하는 것에 부응하기 위하여 형성되었다"는 주장으로 귀속 되었다.. "달리 말해서 그 자료는 역사적 목적 보다 오히려 선교적(kerygmatic) 목적을 위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입장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불트만(R. Bultmann)은 복음서들 안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대부분을 초대교회의 산물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즉 교회가 복음 이야기의 양식을 통하여 신자들의ㅡ믿음을 표현하였기 때문에 복음서는 하나의 신앙고백일 뿐이라는 것이다. 불트만은 부활에 있어서 그것의 의미성이 이해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은 아니다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역사외 케뤼그마의 단절이 일어난다. 결국 신앙이 실제의 역사로부터 끊어지게 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또 복음서 기자들의 신학적 동기와 주제를 연구하는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의 방법에서 보면, 복음서 기자들은 단순한 전승의 편집자들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수집하고 배열한 그 복음 전승의 해석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스을 해석함으로서 그들 자신의 신학을 쓸 수 있었으며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어떤 말씀들도 쓸 수 있었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된다.
인간 예수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도를 해오던 학자들이 20세기에 이르러 인간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 괴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이유를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예수의 입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말을 집어 넣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와 초역사적 그리스도 사이의 간격은 그들이 에수의 부활을 사실로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트만은 부활이 십자가의 구속적 의미를 선포하는 신화적 방법이라고 말하고 보른캄(G. Bornkamm)도 콘첼만(H. Conzelmann)도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가?"라고 되물으면서 "역사가가 본문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의 실제가 아니라 제자들의 부활절 신앙이다"라고 부활을 폄하한다.
많은 학자들이 이처럼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못하고 실존주의적으로 도피함으로써 "부활의 사실"이 "부활 신앙"으로 붕괴되고 말아 버렸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몸의 부활을 배제하고는 예수의 인격의 일관성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복음서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래드(G. E. Ladd)의 주장 처럼 구약에서 약속된 때가 차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고(막1:15, 눅4:21, 마4:14이하) 그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2.구약과의 관계
누구든지 구원에 대한 구약성경의 배경을 중심하여 예수님의 일생을 연구해 볼 것 같으면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중요한 문제들에 놀라게 된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이를 테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러번 메시아의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메시야의 오심은 구원의 영향으로 나타나는 세계질서의 극적인 변화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 시대의 신학 학파들은 메시야 예언의 특수한 면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전체적인 면을 등한시 해버린 결과를 빚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에 이르러서야 그 수수께끼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안에서 풀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일한 구원의 사건을 신약의 여러 저자들이 다양하게 해석하였다는 점에서 신약신학의 다양성을 발견할 수있다. 이 구원의 사건은 성질상 역사적 이면서도 종말론적이며, 인간과 세상에 대한 헬라의 이원론적 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공관복음의 신학적 전제는 근본적으로 구약선지자들의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며, 세상과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세상은 악하지도 않고 악의 영역도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선하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살피시고 돌보신다(마 6 : 30). 인생의 기쁨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누리도록 주신 선물이다. 예수님은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축제나 향연을 비유로 들어 설명하시기도 했다. 아뭏튼 예수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기를 원하셨다.
 
3.선교와 교회
세번째 우리가 살펴 보아야할 것은 선교에 있어서 그 기초가 "교회가 먼저"인가 아니면 "복음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문제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앞서 말한 "사실인가" "신앙인가"하는 문제와 연결고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케제만(E. Kasemann) 같은 이는 초기 양식비평학자들의 주된 과업이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우리에게 준 예수의 메시지가 거의 다 신빙성이 없고 여러 단계를 거쳤던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으로 조작된 것임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비평학자들의 발상은 복음이 교회의 신앙고백일 뿐이므로 한 사건을 달리 설명하는 모순이 복음서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 사건의 역사적 신빙성도 희박하다는 것이다. 브론캄(G. Bornkamm)은 복음서 안에 수집된 전승이 얼마나 강하게 신앙의 이해로 판찍혀 있는지를 강조하는 실례로 마태복음 22장1절 이하의 "혼인잔치의 비유"와 누가복음 14장 16절이하의 "큰 잔치의 비유"를 들고 있다. 그는 이 두 비유가 원래 한 비유 였는데 이해는 상이하다고 한다. 따라서 누가는 마태와 다르게 말하고 있으며 더 오랜 본문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성경에서 선교의 동기를 찾는다는 것은 요원하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브루스는 법정진술의 예를 들어서 적절하게 반박한다. 즉 두 개의 비슷한 비유가 반드시 동일한 비유의 두 가지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일테면 마치 경찰관이 두 개의 다른 교통사고를 거의 동일한 언어로 설명한다고 해서 그가 참으로 동일한 하나의 교통사고를 두 가지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 디벨리우스와 불트만의 기본가정은 초대교회가 그 자체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을 구태여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신빙성이 없다. 고린도전서 7장 10절과 12절에 보면 바울은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고 했고,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고 하면서 예수의 가르침과 자신의 가르침을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7장19절에서도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하는 마가 자신의 언급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들이 그들의 복음서 보도에 있어서 그들이 살고 있던 초대교회의 "삶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비평학자들의 주장도 조심스럽게 헤아려야 한다. 그들의 생각대로 만약 교회나 복음서 기자들이 이 말씀들을 예수의 입에 담아 예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했다고 한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난 남고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은 빛을 잃고 마는 것이다.그들에 의하자면 이것은 결국 교회의 가르침일 뿐인 것이다.
비평학자들의 논의점은 "교회"( )라는 단어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마태복음 16장 18절과 17절에 나타나 있는 교회에 관한 말씀들은 실제로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부활 이전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예수가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교회라는 단어는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 200년전부터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었다.구약의 70인역에서 100번정도 "회당"의 동의어로서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복음을 형성시켰다는 비평학자들의 주장은 지나친 추론이다. "삶의 정황"이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설명하는 바는 그 이야기의 조작이 아니라 기록이다. 초대교회의 어떤 "삶의 정황"도 예수 생애의 "삶의 정황"을 배제하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삶의 정황"은 예수 생애에 일어난 사건과 그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선교의 열정이 달아 올랐던 초대교회의 "삶의 정황"이 복음을 형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삶의 정황"이 주님의 선교적 사역을 생각나게 하여 복음서에 기록하게 하였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예수의 생애야말로 오직 참도니 선교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복음이 교회를 있게 했고 또 선교가 일어나도록 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Ⅲ.사복음서의 이방선교
1.요한복음
우리가 아직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가운데는 우리가 복음으로 알고 있는 네 번째 복음서가 있다. 이 복음서에서는 우리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과 그의 경험속에서 그가 발견한 것을 남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에 자신을 전폭적으로 바쳤던 사람이 기록한 일생에 대한 명상록과도 같이 쓰였다고 막스 워렌은 이야기 한다. 이것을 기록한 사람은 분명히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제자는 '함께 산다는 것'의 의미와 예수님과 함께 거한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그의 생각을 따라서 예수님의 생각을 한다는 것, 또 끝임없는 사유로부터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에 의해서 전수되어져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실로 자기 자신도 그것에 의하여 그리스도 교회가 갖는 체험에 대하여 알게 되었던바 예수님의 여러 가지 말씀들의 진정한 내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입증했었던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선교의 목적이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이 쓰여진 목적이 요한복음의 성격을 많이 알게 된다. 요한복음은 쓰여진 목적을 밝히는 구절이 20 : 30-31절에 나온다.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하고 말하므로 목적이 상당히 분명해진다.
에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아는 믿음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전체적으로 헬라적인 색채가 많이 나타나 있다. 헬라인의 문화적 표현을 많이 사용한 것이다. 그것은 곧 헬라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그리스도(Christ)로 알고 구원을 받으라고 선언하기 위해서 이다. 요한의 선교사상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요한에게 있어서 선교의 ㅈㅇ심 메시지는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오셨음을 고백하는 신앙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참조;요한일서 4:2-3). 이것은 헬라인의 이원적인 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저들에게 있어서 말씀(Logos)이 사람의 몸으로 임하셨다는 것이 실로 혁명적인 선언과 같다. 곧 불가능을 현실화한 것이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육(Incarnation)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사건이다.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은 복음의 핵심이며 선교 메시지의 주제이다.
둘째로 요한은 선교가 다른 다른 양들에게도 목자를 소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0:16). 불신자들은 아직 양의 우리안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이지만 저들에게도 참목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밖에 있는 양들은 곧 이방인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목자가 되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요한은 선교 행위가 그리스도의 복종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5:19-20)이 선교이다. 또한 선교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는 것이다(20:21). 선교라는 말 자체가 바로 "보낸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선교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넷째, 요한복음에는 보편성(Universalism)이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으로 오신 것이다(요 1 : 9). 예수는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요 1: 29). 예수께서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히면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끌게 될 것이며(요 12 : 32), 아주 역설적으로 예수가 이방세계에 가서 헬라인들을 가르칠 모양이라고 말한다(요 7 : 35). 예수의 공생애의 사역이 헬라인들의 예수를 보러 옴으로 절정에 이른다(요 12 : 20). 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세상의 구주라고 선언한다( 요 4 :42). 마지막으로 빌라도는 예수를 이스라엘의 유대인의 왕이라고 팻말을 쓰는데 그것을 만방의 언어로 쓴다(요 19 : 19). 이런 것을 볼 때 헬라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요한복음을 썻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한은 구원이 전 우주(Cosmos)적으로 적용됨을 강조하고 있다. 구원의 보편성은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도 강조한바 있지만 요한은 이 문제를 좀더 확실하게 구체화 하였다고 보여진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셨으며(3:16).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시며(4:42),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요(1:29), 또한 세상의 빛(8:12)이시다. 요한이 빛에 대하여 말할 때는 거기에는 어둠에 대한 것도 역시 포함되어 있다. 어둠은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세상이며 죄와 거짓 가운데 살고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세상이다. 이 어둠속에 빛이 비추이나 어두움은 빛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1:5). 선교는 어두움속에 있는 잃어버린 세상에 구원을 베푸는 것이다.
요하네스 블라우는 요한복음서 역시 다른 복음서들과의 비교선상에서 그 자신의 특유한 위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특히 요한복음 20 : 21- 23을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신 일 사이의 연속성을 지적하고 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이끄시는 대로 그의 구원 활동에 쓰여지는 하나님의 군병으로서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고 했다. 어찌 되었건 이러한 진술에서 드러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 첫째 되는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된다는 것과 둘째로 성령의 은사가 주어짐도 오직 만국에의 복음전파 때문이라는 것이 블라우의 주장이다. 성령안에서의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영원 임재는 제자들로 하여금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임무를 수행 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선교하고 계시다는 명백한 진술이 되며, 그가 제자들에게 선교를 명하시고 성령을 또한 선물로 주셨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선교를 맡겨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을 통하여 복음전파의 사역을 담당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신학을 보여주는 것이 요한복음서 인 것이다.
제 4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는 특히 인자의 선재성이 강조되고 있다. 즉, 人子는 하늘에서 선재하였고 하늘로부터 세상에 내려왔으며 그 하늘로 올라가는 자이다.(3 : 13 ; 6 61) 이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언급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3 : 16f ; 16 : 28}.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 언급되었듯이 人子의 영광도 언급되엇다(12 : 23 ; 13 : 31). 1 : 49-51에서 예수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나다나엘의 고백을 받아들이면서 마가복음 14:61f에서처럼 人子에 관한말로 대답한다. 후에 예수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를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 : 15f.) 人子와 하나님의 아들을 동일시하는 가장 명확한 구절은 5 : 26f.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 됨을 인하여[그가 人子이기 때문에]그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人子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신적인 본성을 공유한다. 또한 이 본성은 니고데모에게 언급 하였듯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인자의 권리와 역할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다니엘서에 약속된 그 메시야로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인자로서 오셨으며 결국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으며 또한 이 사실을 그의 제자들에게 선포하라고 명하여 온 세상으로 가라고 파송하셨으며 성려을 선물로 저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저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 하셨다. 이는 곧 예수 자신이 성령안에서 세계만국에 복음을 전하겠으며 사람들을 부르시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복음서 모두는 人子를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한다. 복음서 저자들에게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은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에,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을 동일시 하는 것은 아마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렇듯이 자신을 인자로 호칭하셨다는 것은 결국 지상에서의 자신의 사역을 알고 계셨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예수 뿐만 아니라 복음서의 저자들도 구약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메시야 사상에 정통했으며, 결국 예수가 바로 그 메시야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2.마가복음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라고 인정되고 있는 성경이 마가복음이다. 이 마가복음서에는 이방선교(Gentile missions)에 대한 몌수의 생애와 사역이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서두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1:15). 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됨을 볼 수있다.
마가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대중속에서 행하신 예수의 사역(1:14-8:26), 둘째, 제자들에게 행하신 예수의 가르침(8:27-10:45), 셋째, 적대자들과의 마지막 논쟁과 죽음과 부활(10:46-16:8).
첫 번째 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이적과 기사들에서 예수의 선교적 의도를 간파할 수 있다. 이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제자들의 무지, 결국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배척이 심해지고 결국 구원에 대한 이방인의 참여가 제시 되는 것으로 기록이 정리된다.(막11:17, 12:9) 특히 마지막 수난 기사는 로마 백부장의 신앙고백과 함께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극적 상황을 이야기한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6:39)는 고백과 동시에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방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복음의 초점은 항상 그 자신이 복음이신 예수님에게 있었다. 마가는 아주 의도적으로 그의 책의 서두를 이렇게 달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그 복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것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13:10) 이었다.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능력은 그리스도 임재의 견고한 확실성에 근거되어 있으며, 이 임재는 세계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 복음서마다 부활과 선교에 대하여 강조점을 달리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인간계에 관심을 둔다("whole creation"은 인간계를 의미함)여기에서는 마태복음의 넓은 범위(하늘과 땅)가 축소되어 진다. 반면에 마가복음은 예수의 권세에 대해 보다 집약적으로 알기 쉽게 강조하고 있다.
위든(Th. H. Weeden)은 마가복음의 서술 구조를 제자들의 예수 이해와 관련시켜 설명할 때 쉽게 이해 된다고 하였다. 첫째, 무지의 단계(1:16-8:26), 둘째, 오해의 단계(8:27-10:45), 셋째, 배척의 단계(10:46-16:8). 여기에서 제자들의 몰이해는 예수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지와 오해 배척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고난받는 메시야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오해 가운데 예수를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예루살렘에서 상당한 부와 지위를 가진 마리아의 아들이며(행 12 : 12)바나바는 그의 삼촌이었다(골 4 : 10). 이 제2복음서는 로마인을 위하여 씌여졌다. 유대인들의 일상 용어나 풍습이 자주 설명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독자가 이방인들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말씀보다는 그의 행동을 강조한다. '바로', '곧' 등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유뒤스(υιδσ)'라는 단어가 41회나 사용된 사실은 단적으로 이 행동의 복음이 갖고 있는 특징을 말해준다. 특히 구약의 인용이 적고 유대인의 습관 지명 족보등을 대부분 생략하였다. 마가복음은 특히 예수를 섬기는 종으로 묘사한 것이 인상깊다.
G. E 래드는 신약의 여러 저자들이 공통된 신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신약신학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있다고 했다. 특히 마가복음의 인간론은 근본적으로 후기 유대주의의 원천인 구약의 것과 동일하다. 혼과 몸을 분리시키는 헬라의 이원론과는 달리 히브리의 사상은 인간을 유기적 결합체로 본다. 혼(프쉬케)는 몸의 생명이며, (막 3 : 4) 살아있는 전 인격이다(막 10 : 45). 이 사상은 혼이 몸(소마)와 서로 대체될 수있다는 점을 통해 가장 명확히 입증된다. 그러나 생명의 중심인 혼(프쉬케)는 몸 이상의 어떤 것을 함유하고 있다. 온 세사을 얻음과 프쉬케를 잃어버림 사이의 대조에서(막 8 : 36) 프쉬케는 육체적 생명 이상의 것을 뜻 한다. 이 발전이 헬라의 영향을 받았던지 받지 않았던지 간에 성경속에 흐르고 있는 인간론은 헬라의 인간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 운명은 이 세상을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몸이 부활 하는 것이라고 마가복음은 선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막 12 : 25). 성경에 나타난 이 시대와 오는 시대사이의 차이는 헬라의 이원론이 말하는 물질과 영혼, 현상계와 본체계의 가시적 실재와 비가시적 실재 사이의 차이와 달리 죄와 의, 사멸성과 불멸성 사이의 차이를 보여준다. 성경은 근심, 쾌락, 그리고 탐욕등은 인간의 마음을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막 4 : 18). 인간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 세상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세상은 죄와 죽음의 영역이 되고 말았고(막 10 : 23이하)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와 고난으로 말미암을 구속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인자사상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복음서가 사실상 마가복음이다. 이러한 근거는 마가복음 2 : 10에 있는 선포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예수는 중풍병자의 죄가 사해졌다는 그의 용서의 선언을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 함으로써 정당화한다. 죄 용서는 하나님의 대권이므로 서기관들은 예수의 행위를 하나님께 대한 모독으로 여기고 항의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대권을 주장함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범주(the category of the divine)로 분류하고 있으며 그의 초인적인 치유행위는 이같은 주장의 표징인 것이다라고 김세윤은 말한다. 또 마가복음 13장 26절의 용어도 흥미롭다. 인자는 그의 택한자들을 그의 도래시에 모을 것이다. 보통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모으신다는 것이 정상이므로(요 6 : 70의 진술을 볼 때)예수께서 자기 백성들을 모으시겠다고 언급한 것은 퍽 놀라운 사실이다. 사실 바로 몇 구절 앞에서 마가는 τουζ εκλεκτουζ를 모으시는 분은 주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말하였기 때문이다.(막 13 : 20) 이것은 인자와 하나님이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하는 것을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알리고저 하는 예수의 언어 유희 였다고 할 수있다.
마가는 이러한 일련의 묘사를 통하여 예수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고 또 고난을 받아야 할 여호와의 종이지만 그는 예수의 권세들을 보다 집약적으로, 알기 쉽게 강조함으로 (불신앙, 능력들과 질병들에 대해 월등한 능력을 나타냄) 예수의 인간을 "자유케 하시는 권세"를 말하고 있다. 마가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세상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자유가 제한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자유케 하시는 권세와 그 분의 인자로서의 사역에 대하여 우리에게 증거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분의 사역 즉 인간의 부자유함에 대하여 자유케 하시는 사역이 예루살렘안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혜택과 그 효과는 이스라엘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온 천하'와 "만민'에게로 이어져야 할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막 16 : 15)
김연진도 이러한 의견에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능력의 주님으로 소개하고 있음에 대하여 주목해야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종으로서의 능력이었다는 것이다. 또 마가의 메시지에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많이 묘사되고 있다. 기적은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수단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는 방법이 되기도한다. 그리고 마가는 선포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설교방식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이방인선교를 중요한 사역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1)마가복음서의 이적기사
마가복음서의 이적들은 대략 네 그룹으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병자 치유, 둘째, 귀신축출, 셋째, 죽은자를 살림, 넷째, 자연이적등이다. 이러한 이적들은 예수의 메시야적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마가복음 4장 35절에서부터 8장 26절 사이에 나타나는 이적기사들은 대략 평행구조를 이루고 있다. 즉 유대인을 향항 이적과 이방인을 향한 이적이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것이다.이는 로마서 1:16에 있는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는 말씀을 시간적으로 느끼게 된다. 특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친 기사(5:21-43)는 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준 사건(7:24-30)과 평행을 이루고, 5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이적(6:35-44)과 4천명을 먹이신 칠병이어의 이적(8:1-9)의 평행적 구조는 앞서 말한 선교의 맥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마태복음의 선교사상
마태는 상당부분 마가의 기록을 이요하여 기록했다. 마태는 예수님 사역을 돌이켜봄에 있어서, 그를 위대한 전달자, 즉 새로운 모세로서 심중에 확신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모세보다 훨씬 넓고 훨씬 놀라운 범위에의 전달자로 생각하고 있었다(24:14). 마태는 모세를 유대나라의 실질적인 설립자로 생각하고 있는 자기 동족들의 전통에 깊이 몰두했다. 그래서 산상수훈이 그 어느 복음서보다 체계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5,6,7장)
이러한 맥락에서 마태복음은 구약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선교적 임무를 재확인시켜준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에게 위임된 하나님의 제사장 국가로서 열방앞에 보여주어야 할 것임을 산상수훈이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한다고 김연진은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계속적으로 국경을 넘어서 그의 왕국을 선포한다.(4:17-25) 이제 제자들도 국경을 넘을 준비가 되어있기 위하여 훈련을 받는다.(9:9-17; 20:18-20)
마태복음의 특징은 고립된 유대주의적 사고를 벗어나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복음을 전해야한ㄹ 대상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한 예로 마태복음 10장과 28장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에 대한 선교를 조화있게 묘사하고 있다. 곧 선교의 지역이 온 세계로 확장되었음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비유들과 그 설명은 교회의 선교와 관련해서 일어나게 될일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들은 마지막 때가 되기전에 온 민족이 복음을 듣게될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다(24:14). 아울러 종말적 심판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을 것을 예고해 준다. 곧 선교사역은 이 땅의 모든 민족과 국가들에게 행해져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5 : 24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는 구절은 어떤 진술인가?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을 말씀하신 것은 그가 구약성경의 선택교리에 따라 세상만국과 이스라엘을 확연하게 구별하고 계셨다는 사실에 또 하나의 증거를 보태어 주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포도원, 하나님의 양무리(마 10 : 6)이며, 하나님의 약속들은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유효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것이다(마 8 :12, 관련; 눅 12 : 32). 이에 반하여 이방인들(만국)은 구약성경에서 처럼 어두운 색조로 그려져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 기도할 때 중언부언 함으로써 저희 무지를 가리려 하여(마 6 : 7), 그들은 오직 세상 것만 찾으며(마 6 : 32, 관련; 눅 12 : 30), 하나님과 메시야를 거스리는 일만 한다(마 10 : 33, 관련 눅 21 :24, 참조; 행 4 :27).
에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 : 5 - 6)고 말씀 하셨다. 유대인들의 선교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멸망케 하는 것이라고 판정하셨다(마 23 : 15). 예수께서 이스라엘 밖에서 병을 고치시며 전도하셨다는 사실이 이런 성귀들의 비중과 예리함을 약화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 자신이 이방인에게 선교하기 위하여 노력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5 : 21 - 28, 8 : 5 - 13의 병 고침은 멀리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대나라의 국경을 넘으신 것은 이방인에게로 나아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전 유대인 지역 안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마태복음안에서 보여지는 것은 어떤 연유인가? 이 사건들을 마태의 시각이 예수와 같이 민족주의나 "배타주의"탓인가?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오늘날엔 거의 완전히 포기되었다. 이 모든 것을 예수께서 자신의"계시의 역사적 맥락"안에 두시려는 하나의 표시로 인식된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중론이다. 이 역사적 맥락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에 완전히 이루어지는 끝날에 이방인들도 구원에 참여케 됨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구원의 때가 임박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이 구원을 그 자신의 메시야적 사명과 관련 시키셨다. 이것은 복음서들에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마태복음서 안에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보여진다. 최후의 심판때에 이스라엘과 함께 세상 만국도 하나님앞에 설 것이며,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은 함께 세상 만국도 하나님앞에 설 것이며,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은 마찬가지로 구원을 받기도 하고 멸망을 받기도 할 것이다(마 25 : 31 ff). 또한 끝날에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게 될 것이며(마 8 : 11, 12 : 42 ff),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사실 하나로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없다(마 3 : 9) 그와는 반대로 이스라엘과 만국간의 차이는 없어질 것이며( 마 23 : 37), 이스라엘은 오히려 이방인보다 더욱 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입장이 될 것이다.( 마 12 : 4f)
마태복음의 주요한 면은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책이 유대인들이나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외 다른 복음서보다 많은 구약성경인용에서 찾을 수있다. 즉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구약의 증거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있다. 여기에는 구약의 직접인용과 암시가 100회이상 사용되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또는 "선지자로 예언된바"와 같은 구절이 마치 후렴구처럼 반복된다. 예수의 생애의 각장면마다 마태는 한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구약의 본문과 예수의 사역으로 성취된 구약의 예언들을 제시한다.
마태는 1장에서부터 예수를 다윗의 자손임을 족보로서 증명해낸다. 그러므로 예수는 틀림없는 유대인의 왕인 것이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며, 히브리인에게 약속된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시라는 것이 마태의 위대한 신학적 주제이다. 그러나 그 예수는 자기 백성에게 배척을 받고 유대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히시었다. 마태복음을 읽는 사람은 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이가 십자가에 못박히시었는가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는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40일간 함께 계시므로 오히려 그의 고난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누가복음
누가복음 24 : 44-53에서는 패배로부터 승리를 거두고, 슬픔을 기쁨으로 변하게 하시며, 죄와 허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시는 놀라는 하나님의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용서하는 권세"를 강조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헬라인 의사였던 누가는 데오빌로라는 로마의 고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이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이 복음서는 초신자들을 지성적인 신앙인이 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고 보여진다. 예수의 흔적을 보다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수의 계보로부터 탄생과 사역과 수난을 거쳐 부활에 이르기 까지의 사실을 연대기적 기법으로 서술하고 있다.
누가복음의 핵심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 : 10)에서 찾을 수있다. 앞에서도 살펴 본대로 누가복음도 인자사상이 드러나고 있다. 인간을 죄에서 끌어올려 생명과 희망으로 인도하는 예수의 사역과 교훈에 초점이 모아진다. 예수의 기저과 비유와 교훈, 그리고 주의 모든 행적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과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예수님을 인자됨은 인간을 향한 주(主 )의 연민과 인간미가 강조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 : 32). 누가는 자신이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복음서의 다른 어떤 기자들 보다도 이방의 선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오직 누가복음에만 소외된 사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감동적인 비유가 나오는 것이다. 또 문간에 않아 구걸하던 거지를 천대하다가 음부에 떨어져서, 뒤늦은 회개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심음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도 오직 누가만이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이는 예수가 민족과 계급을 초월한 유일한 구주이심을 알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짐작케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같이 동일한 사람의 작품이다. 이 두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한 선교적 위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선겨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누가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또한 그 시대에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져야 할 것을 강조하고 따라서 "죄 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족속에게 전파" 되는 일이 시급함을 전한다(24:47) 보쉬(David J. Bosch)는 용서와 결속이 누가복음의 선교모델의 핵심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누가의 선교신학의 특징을 여덟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에 대해 김연진은 몇가지로 요약해서 우리에게 전해준다. 첫째, 누가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다. 성령은 곧 선교의 영이시라는 것이다.
둘째, 누가는 선교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상호 협력하므로 열매맺게 됨을 강조한다.
셋째, 누가는 선교에 있어서 증인됨을 강조한다. 선교는 증언이며 선교사는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들이다. 누가는 때때로 증인과 '사도'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행1:2. 8; 10:41) 이상에서 본 것을 종합하면 선교는 곧 교회의 사역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교회가 이 사역을 수행해 나갈 때 핍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눅 9:51-19:40). 이러한 증거들은 선교가 곧 영적인 전투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Ⅳ.사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선교사상
사복음서 안에서 '나라'의 의미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가리키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탐구한다는 것은 구약성서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매우 방대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직접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선교의 연관성이 있는 부분들을 살펴 보고자 한다.
사복음서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사상과 선교의 여노간관계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복음선포가 모두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주시 하여야 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의 선포 (3:2),제자들의 복음선포(10:7) 그리고 제자들의 자리다툼의 사건을 설명함(18:1)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마가복음은 아리마대 요셉의 인물됨을 묘사하는 장면 (15:43)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와같은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제자들의 해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신 이 어휘들을 자세히 살펴보면,비유로 가르치실 때, 또는 교훈과 선포 하실 때, 이적과 함께 복음을 전하심을 나타낼 때로 구분되어진다.
 
1) 하나님 나라 와 비유를 통한 선교이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는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초월적인 것이다. 왜냐하며 하나님께서하시는 일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숨어있는 하나님 나라 는 묵시문학에서 말하는 오는 세대안에 숨어있기에 현실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실 속에서 통치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가 숨어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라는 가르침을 통하여하나님 나라 의 본질과 성격, 그리고 도래의 메세지를 선포한 것은 매우 적절한 방법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창안하신 교수법은 아니라 히브리적 전승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히브리어의 마살(masal)이 이 단어에 해당한다. 로버트 슈타인(Robert H. Stain )에 의하면 이 단어는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잠언, 풍자 또는 야유, 수수께끼, 알레고리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와같이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교수법을 사용함으로 듣는 사람들이 친근감을 가지고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이 교수법은 당시의 랍비들도교의의 해명이나 성구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었던 교수법이었다. 때문에 대중들에게더욱 친숙하게 하나님 나라 의 본질을 가르칠 수 있었다. 비유의 교수법은 가장 평범하고 친밀한 배경을 통하여 하나의 진리에 대한 촉구를 하는 것이기에 바로 결단과 대답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단지 이와같은 이유만에서 예수님의 비유가 사용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예수님의 비유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메세지를 예증하고 나타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예수님의 메세지를 반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메세지를 은폐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단순히 은폐만이 아니라 죄 용서의 초대로 부터 제외 되었기에 그 자체가 하나의 심판임을 뜻한다.또한 예수님의 비유는 논쟁 가운데서 행하여 진 것으로 이는 상대방에게 도전을 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비유는랍비들이 사용하였던 비유와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랍비들의 비유가 독립된 하나의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비유는 그것과 함께 그 자체가 메세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비유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빈도수를 볼 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가 가장 많다는 것을 알 수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결국 종말론적으로 볼 때 그것이 사탄의 통치가 임하고 있는 세상나라에 대한 하난미과 예수 그리스도의 반격으로서 종국적으로 승리할 나라의 메시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에는 우리들의 선교에 대한 책임이 함께 내포되어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어휘가 사용되고 있는 비유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1) 씨 뿌리는 비유 ( 마 13:11, 막 4:11, 눅 8:10 )
이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비유이다. 또한 이 비유가 가지는 중요성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능히 다른 비유도 깨달을 수 없는 가장 기초적인 비유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가 기록된 뒤에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묻는 제자들에게 비유를 통하여 은밀히 숨어있는하나님 나라 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사람만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공관복음 모두는 기록하고 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 대부분의 경우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4가지의 밭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예레미아스는이 비유의 핵심은 헛수고로 보이는 씨 뿌리는 자의 행위가 마지막에 ( 종말론적으로 )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하나님의 충만을 암시하는 것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고 말하면서 이와같은 하나님의 충만은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서서 다가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윌리암 레인 ( William Lain )도 예레미아스의 견해에 찬동을 표하면서이 비유의 핵심은 4가지의 토양이 아니라 농부의 파종 행위에 있다."고 말한다. 이는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하나님 나라 가 이 세상의 현장에 돌입하여 왔다는 것을 알려주며 또한 하나님의 충만으로 결실할 때가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하나님 나라 는 사람의 힘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 하시어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중심적 관심사는 하나님께서 행동 하신다는 것에 있다. 이 비유의 시작은....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 마 13:3-4 )이다. 씨를 뿌리는 자의 행위가 그 어떤 것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자신의 행동을 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