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전도 / 중앙 아시아 이슬람 선교 전략

 

글 : 주누가 선교사 (GO선교회)

무슬림 인구는 1940년 2억에서 현재 약 15억 명에 이르도록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이슬람 테러리즘은 지구촌 곳곳에서 프랜차이즈화 하면서 기세를 떨치고 있고, 이슬람의 주도 세력들은 영국과 호주 등 서방을 목표로 영어권 무슬림 확산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 가운데 있는 이슬람 지역 중 최근 십여 년간 가장 역동적인 복음사역이 일어난 지역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중앙아시아를 추천할 것이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이후 세계의 큰 주목을 받았던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와 중동의 완충지대이면서 중국의 배후에 위치한 군사 전략적 요충지이며, 경제적으로도 석유, 천연가스, 면화, 광물 등 방대한 지하자원이 매장된 중요한 지역이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 중국의 진출이 매우 활발했었고, 특히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어서 터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이슬람 국가 사이에도 세력 확장이 매우 치열했었다. 한편 연해주에서 강제로 이주된 고려인들이 많이 사는 관계로 우리도 큰 관심을 갖고 접근했었다. 특히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민족들은 알타이 언어권에 속하는 투르크계 민족이어서 우리와는 언어적,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운 민족이다. 또 역사적으로 충돌의 기록이 없어 친근할 뿐 아니라 한국인 디아스포라들이 많이 살고 있음으로 다른 어떤 선교지보다 한국교회가 효율적으로 사역할 수 있는 곳이다. 70년간의 공산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심한 정체성 혼란과 영적 공백기를 가진 중앙아시아는 지난 15년간 이슬람이 다시 뿌리를 내렸으며, 동시에 예수를 부르는 자들도 각 나라마다 수천에서 수만 명까지 생겼다.

이 중앙아시아는 이슬람권에서 가능한 창의적인 선교접근전략이 개발되고 적용된 전방개척선교의 역동적인 현장이었고, 평신도전문인 선교사들, 목회자 선교사들 그리고 많은 기독교 NGO들이 기독교적 변혁(Transformation)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영적 전쟁터였다. 진정 중앙아시아는 한국 교회가 세계선교계에 지도적 역할로 부상하는 데 큰 몫을 한 특별한 프런티어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중앙아시아의 정의

1843년 홈볼트는 지리적으로 카스피 해부터 서부 만주의 흥안령 산맥까지, 남북으로는 알타이 산맥에서 히말라야 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중앙아시아라고 최초로 정의했다. 이 지리적 개념에 문화적, 정치적 개념이 들어옴으로 중앙아시아의 정의는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투르크계 국가들과 페르시아계의 타지키스탄을 중앙아시아 5개국이라 칭한다. 때로는 투르크계인 소아시아의 터키, 코카서스의 아제르바이잔, 중국내 신강 우이구르 자치구 그리고 페르시아계인 아프카니스탄까지도 중앙아시아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중앙아시아의 역사

중앙아시아는 부흥과 쇠퇴가 반복된 유목민족의 전쟁터였다. 흉노, 스키타이, 연연, 에프탈리테, 아바르, 북위, 티벳, 돌궐, 우이구르, 셀축, 콰레즘, 카라카니드, 가즈나비드, 카라키타이, 몽골, 티무르, 오스만터키 등 크고 작은 제국들이 유라시아의 스텝에서 충돌하며 부침을 거듭하였다.

나무, 바위, 태양, 달, 별을 섬기던 스텝의 유목민족들이 이슬람으로 서서히 전환하기 시작한 것은 7C 중엽부터이다. 이 때 아랍은 비잔틴과의 전쟁으로 지쳐있던 페르시아를 632년에 정복, 이슬람화시켰고, 이것은 중앙아시아 무역을 담당하던 소그드인들의 이슬람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 소그드인들은 비단길 곳곳에 이슬람을 소개했다.

그렇지만 샤마니즘, 불교, 배화교, 마니교, 기독교(네스토리우스) 등 다양한 종교가 있던 중앙아시아에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호라산 총독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에 의해서였다. 특히 이슬람은 탈라스 전쟁이후 집단 개종의 결정적인 계기를 잡았다.

  • 751년 파미르 고원에서의 전투에서 돌궐-아랍-티벳 연맹군이 고선지가 이끈 당의 군대를 물리침으로 아랍 이슬람의 위상은 커졌고, 중앙아시아 돌궐(투르크)족들은 한순간에 샤머니즘을 버리고 대대적으로 무슬림이 되었다.

  • 9C와 13C사이에 이슬람 종교는 두개의 교역로 모피길과 비단길을 통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계속 확장되었다. 13C 중앙아시아 스텝을 지배한 몽골이 반이슬람 정책을 썼음에도 수피 선교사들과 상인들의 공헌으로 이슬람 운동은 꾸준히 일어났다.

  • 14C 말에는 오히려 몽골 통치자와 투르크계 장군들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였다.

  • 한편 티무르 제국 때는 수피무슬림에 의해 더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 그러나 16C중반 러시아제국의 통치자 이반 4세가 중앙아시아 진출을 시도하면서 이슬람 활동은 급격히 위축되었었다. 무슬림 리더들은 추출되고 사원들은 파괴되고, 기독교 개종이 강제로 시행되었다.

  • 이후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을 거쳐, 1922년 12월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된 후 종교에 대한 무력습격, 종교 지도자나 샤리아법에 대한 행정규제, 이슬람 신학교 폐지 등의 탄압 조치는 중앙아시아 이슬람을 현저히 제한했다. 이슬람 사원도 1912년 26,279개에서 1968년에 500개 정도로 거의 사라졌다.

  • 1991년 12월 13일 소비에트 연방이 갑자기 해체되면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은 저절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수년 동안 모라토리엄 상태를 겪고 있던 중앙아시아 정부는 민족주의에서, 사람들은 이슬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하였다.

중앙아시아 종교 환경 이해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무신론 가치관 속에서 70년을 지배받음으로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중동의 근본주의 이슬람과는 차이가 있다. 중앙아시아 이슬람은 정통 이슬람의 종교적 요소와 페르시아의 문화적 요소가 투르크의 유목문화와 혼합되어 나타난다. 특히 이슬람의 유일신관과 투르크족의 무속신앙이 혼합되어 발전한 수피즘 때문에 형식적인 이슬람 율법보다 과거의 무속 신앙이 여전히 생활 속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 속에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확산되고 있다.

중동 이슬람은 막대한 재정으로 이슬람 신학교와 사원의 재건과 건축을 수없이 하고 있고, 메카 성지순례 초청행렬도 그치지 않는 등 이슬람 부흥은 거세다. 이런 흐름 속에 18C말 사우디에서 일어난 와하비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도 중앙아시아에 진출하였다. 걸프전 때도, 얼마 전 이라크 전쟁 때도 상당수의 무슬림들이 길거리로 나와 서방세계를 저주하며 알라의 위대함을 부르짖었던 사실은 중앙아시아의 현재와 미래를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와하비 세력들은 코란대로 이슬람법에 따른 정부를 만드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이들의 활동은 현 중앙아시아 정치 지도자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것이 되었다. 2001년 아프카니스탄과의 전쟁에서 중앙아시아가 아랍과 달리 적극적으로 미국 편에 선 것은 아프칸에서 왕성하게 수입되던 와하비 근본주의 운동이 제한될 것도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테러와의 전쟁’에서‘자유의 확산’으로 정한 2기 부시정권의 방향성은 중앙아시아에도 여파가 미쳤다. 레바논의 백향목혁명, 그루지아의 장미혁명,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이 일어났고, 특히 키르키즈스탄의 레몬혁명의 성공은 중앙아시아 국가에게는 큰 압력이었다. 곧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민주 데모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죽는 큰 희생을 치렀다. 이 때 데모 군중을 지지한 미국에 대한 반발이 생겼고, 특히 미군을 철수시킨 우즈벡에서는 선교사 추방과 더불어 교회에 대한 압박이 현재 심상치 않다. 독립 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정권을 잡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까리모프, 카작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투르크메니스탄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등 강력한 지도자들은 대중 매체와 정치적 수완을 통해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으나 적어도 5∼10년 내에 이들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뚜렷한 후계자가 세워지지 않을 경우, 새 지도자는 국민의 종교적 정서에 호소하며 이슬람 국가주의를 표방하는 근본주의 세력과 결탁 필요성을 절감할 것이다. 그럴 경우 다음 정권에 이슬람 국가주의 그룹이 갑작스럽게 부상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이슬람 근본주의 그룹의 정치 활동 및 정책 참여가 현실화되면 기독교 선교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심각한 장애를 가져올 것이다.

중앙아시아 창의적 선교접근

구소련 붕괴 후 혼란기에 위험과 불확실성 속에서 한국을 비롯한 다국적 선교사들은 중앙아시아 구석구석마다 누비며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드렸다. 우리나라는 해외선교단체, 교단 외에 지역교회에서도 많은 사역자들을 파송하였다. 수많은 교회 단기사역 팀들도 기도하며 참여하였다. 게다가 기독사업가들도 많이 진출하며 복음전파에 힘을 더했다. 말 그대로 중앙아시아 영적 특수를 본 총체적인 진출이었다. 혼란스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선교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비공개적으로 제자양육 사역을 하던 전문인 선교사들과 공개적으로 다민족교회 사역을 하던 목회자 선교사들은 서로를 보며 판단하는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주님은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에게 유익함을 일깨워주시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다.

그 결과 적지 않은 교회와 가정모임들이 생겼다. 이 과정에 전문인 선교의 다양한 도구로 학생이나 교수 신분, 혹은 병원과 보건지소, 이동진료사역, 한국문화센타, 한국학과, 태권도 교육, 컴퓨터센타, 농업프로젝트, CHE (Community Health Evangelism) 등 다양한 NGO 사역이 있었다. 또 여행사, 무역회사, 봉제공장, 라면집, 식당, 문구점, 책방, 카페, 국수 공장 등 각양각색의 비지니스 베이스를 세우기도 했다. BTCP 제자양육, G12사역 등 교회개척 전략들도 사용되었다.

앞으로 중앙아시아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쉽지 않은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이 많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는, 더욱 본질적인 면에 충실해야 한다.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없다고 또다시 계속 서두를 수는 없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해야 한다. 중앙아시아는 추수가 보인다. 이러한 때 모두가 하나 됨으로 이 영적 전쟁의 군대장관으로 주님을 초청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제는 기도와 예배로 싸울 때이다.

둘째, 현지인 교회개척 운동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중앙아시아의 문이 열렸을 때 고려인에게 복음을 하루라도 빨리 전하기 위해서 러시아어 통역을 세워 시작했던 고려인 교회들을 기억한다. 너무 한국적 요소를 많이 담고 있어서 당시에 비판적으로 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들을 다민족 교회의 모습으로 바꾸어 활성화시키셨고, 고려인, 러시아인, 이슬람 배경의 현지인 사역자들을 일으켜 세우셨다. 놀라운 일이다. 앞으로의 중앙아시아 선교의 중심에 이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니다. 현지인 교회개척 운동이 더욱 활발히 일어나도록 현지인 리더들을 세우고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셋째, 중앙아시아 언어는 투르크 계열이거나 페르시아 계열의 언어로 매우 가깝다. 카작어, 우즈벡어나, 투르크멘어, 아제리어, 키르키즈어가 어느 정도 통용될 수 있고, 또 러시아어를 사용할 경우 대화소통에 하등 문제가 없다. 타직어와 다리어 그리고 이란어도 통용이 가능하다.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익숙하다. 카작교회가 우즈벡과 키르키즈로, 타직교회가 아프칸과 이란으로, 터키교회가 아제리로, 아제리 교회가 투르크멘으로 복음의 역동적 전파가 일어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같은 언어권 나라를 향해 선교하는 교회로 중앙아시아 교회들을 시급히 전략화해야 한다. 이제 사역 팀들도 한 나라에 국한해서는 안된다. 동일 언어, 동일 문화권별로 움직이면서 큰 그림의 영적 동력화가 일어나도록 우리의 지경을 넓혀야 한다.

우리는 불과 100년 전 세계 선교계에서 침투 불가능(Impossible to penetrate) 국가로 분류된 조선이 복음화되는 것은 물론 선교 강국이 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어두움을 이기고 주께 예배드리는 것 뿐 아니라 이슬람 선교의 맏형 역할을 할 날을 소망한다.

(from : http://bbs.kcm.co.kr/NetBBS/Bbs.dll/kcmmission0/qry/zka/B2-pBnVt/qqa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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