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운동의 시작과 발전
1. 청교도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청교도(淸敎徒, Puritan)란 영국의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청교도 개혁운동은 영국의 종교개혁 운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청교도들은 영국 종교개혁의 완성의 주역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중세교회 안에서도 선구자들의 종교개혁이 있었듯이 영국 내에도 몇몇 선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4년 헨리 8세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잉글랜드의 교회의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결별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 우두머리로 하는 독립교회가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 국교회(성공회)이다. 영국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나 국교회 내에는 여전히 천주교적인 요소가 교회에 잔존하여 있었다. 반쯤 이루어진 종교개혁에 반하여 철저하고 완전한 종교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등장한 무리들이 청교도들이다.
로이드존스(D. Martyn Lloyd Jones, 1899-1981)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혁은 먼저 의식들과 예복들에서 시작되어 끝내는 영국 국교회의 전체 상태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갔고 철저하게 개혁하려는 열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하였다.”
청교도 교회 개혁은 더욱 발전하여 엘리자베스(Elizabeth I, 1533-1603) 여왕이 다스리던 1560년대에는 청교도 운동이 하나의 조직된 운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결국 영국 국교회 내에서의 청교도 운동은 1662년 대 추방령으로 종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남으로 청교도들에게 설교하고 독립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다시 주어지고 국교회 밖에서 계속된다.
이렇듯 청교도는 한 세기 반가량 영국에서 진행된 개신교 종교개혁운동이다. 청교도운동은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은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청교도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시기는 1564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이름은 처음에 영국 국교회에 비타협적인 개신교도들을 내리깎는 경멸조의 적개심이 가득한 호칭이었다. “까탈스러운 사람들, 비판적이고 고집불통의 사람들”, “국교에 반대하는 비판적이고,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작당들”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처음에 사용되었을 때에 대적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경멸조의 이름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스러운 표현이 되었듯이 청교도들이라는 경멸의 표현도 얼마 후에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이 된 것이다.
2.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청교도들을 알아야한다. 왜 그들을 알아야 하는가? 조셉 파이파(Dr. Joseph A. Pipa)는 청교도들을 알아야하는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그들은 우리와 비슷한 상황 속에 살면서도 효과적으로 복음사역을 하였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은 우리의 신앙고백적인 표준서들의 발원(發源)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임스 패커(J.I. Packer)는 다음과 같이 일곱까지 이유를 들었다.
– 그들은 성숙한 기독교인의 모델이다.
– 그들은 신학적 통합성을 추구했다.
– 그들의 영적 표현의 질이 뛰어났다.
– 그들은 효율적 행위에의 열정을 가졌다.
– 그들은 가정생활의 안정을 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 그들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지각을 가졌다.
– 그들은 교회 갱신의 이상을 가졌다.
이처럼 우리가 청교도들을 알게 되면 참된 성도의 삶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삶을 알아야한다.
(1) 청교도들은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의 샘슨(Dr. Thomas Sampson)은 청교도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은 그 누구도 정당하게 잘못을 찾을 수 없는 교리와 생활을 지닌 형제들이었다.” 라이큰(Leland Ryken)도 이렇게 말했다. “청교도들은 이 세상의 성자들(Worldly Saints)이다. 그들은 세속 오염으로부터 격리된 거룩한 양심을 소유한자들이었다. 초대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사도적 순결과 거룩한 양심을 지키려고 세속으로부터 격리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어떠한 것이라도 거부했다.”
“오늘날 청교도들이 누구인가?”라고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2000년 교회역사 속에서 성경 밖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성경적인 사람들이다.” 즉 성경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1899-1981)의 말처럼 “청교도는 언제나 신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헤른(James Heron, D.D)은 “청교도들이 원했던 것은 가능한 성경 속에 나타난 원리들에 적합한 교리는 물론이고 교회의 규율과 행정조직을 갖기 원했던 것이다.“라고 했다.
청교도들은 이처럼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모든 것을 복음적인 관점에서 보았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하여 성경의 권위가 온전히 드러났다.
(2) 청교도들은 온전한 개혁을 이루려고 한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이 살던 당시의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은 정치적이고 형식적이었고 반쯤 개혁된 영국 국교회(성공회)도 이러한 잔재가 남아 있었다. 또한 왕이 교회의 통치자가 되어 교회를 국가의 시녀로 전락시키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성직자들 가운데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도 많았다고 한다. 결국 설교 없이 의식만 거행되는 예배가 만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빈곤 및 도덕성의 상실로 사회와 경제적인 불안이 심각하였다.
이러한 암흑의 시대에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예배의식을 반대하고 초대교회와 같은 순수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다. 또한 성경을 연구하고 그 성경을 기초로 죄와 회개와 구원의 은혜를 중심한 설교를 강조하였다. 또한 이들은 거룩과 경건을 생활의 절대적인 요소로 삼았다. 결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온전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비록 영국 국교회 내에서는 그들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영국 개신교 교회에 종교개혁의 주역들이 되었다.
(3) 청교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설교한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은 다른 어떤 자이기 전에 먼저 설교자였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교회가 성경의 권위아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 설교의 권위를 되찾게 되었다. 특히 이것은 강단위의 위의 설교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청교도들은 무혈적이고 영적이고 구두적인 개혁을 설교를 통하여 이룬 자들이다.
그들의 설교시간은 예배시간과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예배에 있어 설교는 핵심요소였다.” 그들은 설교를 공예배의 절정으로 간주했다. 즉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수반되는 말씀 선포와 그 말씀으로 부터 오는 교훈을 구원관 성화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그래서 강단위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였고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선포했고 그들 모두는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다.”고 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말처럼 설교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의 진리를 설교함으로서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강조하고,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유일한 대상이 그리스도임을 제시하고, 신앙인의 삶의 방향이 경건과 거룩임을 일깨웠고, 철저한 직업 소명의식을 일깨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전한 가정생활을 하게하고, 세상의 쾌락과 사치로부터 돌아서게 했다. 설교된 성경의 진리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설교자들은 가장 성경적인 삶을 살았음은 물론이고 회중속의 청교도들도 그와 같이 살았다.
(4) 청교도들은 삶의 전반에서 경건한 의무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에게 가장 중요시되는 단어는 ‘의무’라는 단어였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의무가 성경의 내용대로 순수한 신앙을 지키며 이것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요 그 대가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한 신앙이 가정과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실현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원하고 싸웠던 것이다.” 청교도들은 교회와 가정에서 청교도의 삶의 의무를 실제적으로 강조하였다.
한편 목회자들은 설교에서 공통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 순종과 충성을 강조했으며 양떼들에게 신앙과 의무를 이행하라고 강조했다. 즉 청교도들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의무로 삼았던 것들은 1) 성수주일, 2) 예배, 3) 기도, 4) 경건한 가정, 5) 거룩한 삶이었다.
– 철저한 주일 성수의 의무
리차드 백스터의 자서전에서 입증되듯이 안식일의 엄숙한 준수는 사실상 청교도 활동 중 가장 우선적이고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들은 주일을 영혼을 위한 장날이요 단체의 찬양과 기도로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날로 생각했다. 청교도들이 체계화시킨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제118문은 이점을 분명히 하는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주요한 의무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제118문 : 왜 가족의 어른들과 다른 윗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특별히 주어졌습니까?
대 답 : 가족의 어른들과 다른 윗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 이 특별히 주어진 것은 그들 자신에게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있 을뿐만 아니라 그들의 통솔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로 안식일을 지키게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며, 그들 자신의 일로 아랫사람들 의 안식일을 방해하는 일이 흔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 소요리문답 제60문과 대요리문답 제117문에서는 어떻게 안식을 거룩히 지켜야하는 지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제117문 : 안식일 혹은 주일을 어떻게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까?
대 답 : 안식일 혹은 주일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온 종일 거룩히 쉼 으로 할 것이며, 언제나 죄악 된 일을 그칠 뿐만 아니라 다른 날에 합당한 세상일이나 오락까지 그만두어야 하며, 부득이한 일과 자선 사업에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시간을 전적으로 공사간 예배하는 일에 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마음을 준비할 것이며, 세상일을 미리 부 지런히 절제 있게 배치하고 적절히 처리하여 주일의 의무에 보 다 더 자유로이 또는 적절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주일성수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금지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소요리문답 제61문과 대요리문답 제119문은 이렇게 말한다.
제119문 : 제4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대 답 : 제4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요구된 의무를 하지 않는 모든 것과 모든 부주의와 등한함과 그것들을 무익하게 이행함과 이에 지쳐 괴로워함이며 또 게으름과 죄악 된 일을 하는 것과 세속적인 일과 오락에 대하여 필요 없는 일, 말, 생각들을 함으로써 그 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청교도들은 주일성수를 의무로 여기며 철저하게 지킨 좋은 정통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주일성수에 대한 의무와 철저한 준수는 리차드 박스터가 사역하던 키더민스터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확인된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일날 거리에서 전혀 무질서가 보이지 않게 되었고 거리를 지날 때 수많은 가정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를 되풀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 예배의 의무
청교도들은 형식적이고 의식에 치우친 예배를 배격하고 성경에 근거한 순수한 예배, 간결한 예배를 사모하였다. 카튼(John Cotton, 1585-1652)의 표현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사모함이다.” 청교도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기독교 예배의 세 가지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곧 지역교회에서의 공적예배와 가족 단위의 가정예배와 골방에서의 개인예배인 것이다.
이중 공적예배가 가장 중요하다. 공적예배는 주일의 중심이다. 주일은 아침과 오후 혹은 저녁 공적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음적인 예배는 중생한 자들만의 특권이며 동시에 의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발견하는 특징가운데 그들은 가정에서 중요한 의무도 예배였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을 보면 “모든 가정이 통상 아침과 저녁에 시행하야 하는 가정예배는 기도와 성경읽기와 찬양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한다.
청교도들은 가정에서 매일 예배하였다. 리차드 백스터는 “가정예배를 위해 단지 2명만 있어도 된다.”고 하며, 죠지 휫필드는 “마음만 올바르게 갖추어져 있다면 가정예배를 건덕스럽게 드리는데 있어 다른 어떤 비장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다.”고 했다. 죠엘 비키(Joel R. Beeke)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부모들이 가정예배를 지속적으로 시행해야하는 이유를 이렇게 제시한다. “부부와 자녀들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선한 양심의 만족을 위해, 자녀 양육의 도움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짧기에 하나님과 그의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정에서 매일 지속적으로 예배해야한다.”
– 기도의 의무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고정된 기도서를 거절하고 즉석기도를 했다. 그들은 주일은 물론 일주일 내내 개인기도와 가족기도로 충만했다. 청교도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낙스(John Knox, 1513-1572)처럼 청교도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청교도들은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냈으며 기도의 의무 실천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의무가 대요리문답 제185문과 제186문에 잘 나타난다.
제185문 :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대 답 :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엄숙한 이해와 우리 자신의 무가 치함과 필요한 것들과 죄에 대한 깊은 의식과 통회하며 감사하는 열띤 마음을 가지고 이해, 믿음, 성실, 사랑과 인내로써 하나님을 바라며, 그의 뜻에 겸손히 복종함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제186문 : 하나님께서 기도의 의무에 관한 우리의 지침으로 어떠한 규칙 을 주셨습니까?
대 답 :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기도의 의무에 관한 지침으로 사용되지만, 특별한 기도 법칙은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양식인데 곧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경건한 가정의 의무
청교도들은 가정을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인 동시에 하나의 교회로 보았다. 그들은 남편을 목사로 아내를 전도사로 하는 작은 교회라고 주장했다. “남편의 의무는 가족을 신앙으로 이끌고 주일날 그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고 가정에서 그날 온종일 성별하도록 감독하고, 자녀에게 교리문답을 하고 믿음을 가르치고 설교를 들은 후에 가족 전체의 시험을 보아 얼마나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부족하면 이해시키고, 매일 가정 예배를 이상적으로 하루에 두 번 인도하고, 언제나 모든 문제에어서 근실한 모범이 되는 것이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라면 자녀들을 그들의 자녀로 만들기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위해 애쓴다.”고 믿었다. 설교자들은 가정을 경건한 가정으로 유지할 것을 강조하였다.
– 거룩한 삶에 대한 의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물론이고 오웬(John Owen, 1616-1683)도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땅의 삶 동안 그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화이다.” 그는 또 말했다. “거룩은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이기도 하며 인간에게 명해진 의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이 의무를 실행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바르게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은혜를 주시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인이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를 억제하여야 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하나의 교리로 다루어 ‘죄 죽임의 교리’(A doctrine on mortification)를 강조한다. 이 땅에서 완전한 거룩이 불가능하지만 그들은 거룩의 최고봉에 이르기 위한 열망으로 완전한 거룩을 추구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그들은 성경이외의 교회사에서 가장 거룩한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탁원한 거룩은 그들의 특징인 동시에 그들의 능력이 되어서 자신들의 시대는 물론 지금껏 남긴 글을 통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청교도들은 개신교회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었다.
초기 청교도들은 장로교도였다. 헤른(James Heron)은 독립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로빈슨(John Robinson, 1576-1625)의 말을 인용한다. “교황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교황에게, 신교도들은 감독들에게, 청교도들은 장로회에, 우리들은 교회로 불리 우는 다수의 회중의 몸에 그것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장로정치가 초기의 청교도들의 특생이었음을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말한다.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신구조요 하나의 정신입니다. 저는 주장합니다. 참된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장로교회 안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존 낙스에게서 말입니다.” 초기의 청교도들이 칼빈주의적인 전통을 따르는 장로교였으나 이후에 여러 개신교의 산실이 되었다. 물론 다른 시각에 바라보면 더 초기적인 형태의 청교도는 침례교도라고 말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오늘날의 개신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고향을 등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의 미국으로 떠나 오늘 날의 미국교회와 미국의 정치, 교육,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교회 내에서도 장로교회, 영국의 회중교회, 분리주의교회, 감리교회 등에 영향을 미쳤다.(*) 글쓴 이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http://www.thetruthlighthouse.org/미국의-뿌리-청교도의-신앙과-삶1-청교도운동의-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