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한 교수(본지 편집고문,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원장). |
○구약성경
“여호와의 메시아”(Messiah)같은 표현이 구약성경에서는 왕, 제사장들, 선지자들, 족장들, 이방의 왕 고레스, 민족의 구원자에게 사용되고 있다(Donald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정원태, 김근수 공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266)
왕이나 제사장들
구약시대에는 왕이나 제사장의 임직식에 저들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기름은 직책에 대한 능력의 상징이었다. 열왕기서에 의하면, 예후를 왕으로 지명할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고 명하신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왕상 19:16상). 레위기에서는 제사장은 그 직책을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레 4:3),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레 4:5). 회막에서 드리는 속죄 제물은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었다. 다윗이 엔게디의 동굴에서 숨어 있을 때 자기를 잡으러 들어온 사울의 옷자락을 베고 난 후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른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 24:6). 기름 부음을 받음이란 하나님의 능력과 인정을 받은 것을 의미하였다.
선지자들
이세벨에게 쫓기어 호렙산에 피신해 있는 엘리야 선지에게 하나님은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의 직책을 잇게 하라는 명령을 하신다: “너는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6하). 선지자들은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자가 되었다. 엘리사의 경우는 엘리야에게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자기 스승의 영감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게 되었다.
족장들
시편 저자는 자기들의 조상인 열조들에 대하여 이들이 이 민족에서 저 민족으로 유리하는 유목민이었으나 이들이 해 받기를 용납하지 않으시도록 하나님이 열왕을 꾸짖으셨다고 노래하고 있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시 105:15). 하나님은 이 믿음의 조상인 열조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기름 부음을 받음이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印)치심을 받는 것으로 성별(聖別)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열조들은 이방인들 가운데 객(客)이 되었을 때 이방인들이 함부로 위해(危害)를 가할 수 없는 성별된 자로서 선지자와 같이 취급을 받았다.
이방인 고레스왕
이사야서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대한 제국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페르시아 제국을 세울 초대 왕 고레스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게 하신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사 45:1). 하나님이 고레스를 지명하여 기름부어 세웠기 때문에 그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사 45:2-3). 하나님은 이방(異邦) 지도자인 고레스, 이스라엘 신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異邦人) 고레스를 지명하여 바벨론을 무너뜨리게 하시고 대제국, 페르시아를 건설하게 하신다. 이사야는 고레스가 비록 비유대인(非猶太人)이지만 하나님이 그를 불러 세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민족의 구원자 “메시아”
왕정 후기와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기대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용어는 포로 상태의 현재를 벗어나게 해 줄 구원의 시대를 가져올 이상적인 인물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이 인물과 결부된 것이 다윗 왕국의 회복에 대한 희망이다. 그리고 다윗왕국이 세계를 다스릴 나라로 확장되리라는 희망이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강대국의 압박에서 정치적으로 질서를 바랄 뿐만 아니라 온 피조세계가 새로워 질 것을 기대했다(사11장). 그러나 미래의 구원의 시대에 대한 기대가 항상 “메시아,” 왕이 될 인물과 결합된 것은 아니었다(사65;17-22). 후기 유대교의 묵시록은 다윗의 자손인 정치적 “메시아”의 표상과는 달리 현재의 세계 질서를 끝낼 종말론적이고 초월자인 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약 성경
이러한 구약적 메시아 사상은 예수가 태어난 시대에 전승되어 새로운 모습을 갖춘다. 예수의 제자들과 동시대 사람들은 주로 정치적 메시아 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진정 메시아 의식을 각성한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고난의 종이라는 독특한 메시아 상에서 이해하였다.
예수 사역 초기에 그의 제자들은 메시아 직분을 구약을 배경으로 이해하고 있었다(Guthrie, 275).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를 만난 후에 자기 형제 시몬에게 예수를 “메시아”라고 소개한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요 1:41).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에 관하여 증언한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란 유대인이 기대하던 메시아를 가리킨다.
마태의 사용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동방박사들이 유대에 태어난 아기 왕을 경배하려 왔을 때 헤롯왕은 종교 지도자들을 모아 메시아가 태어날 곳을 묻는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마 2:4). 유대인의 서기관들은 선지자의 글에서 그리스도(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을 찾아낸다: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2:5-6). 마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가 선지자(미 5:2)가 기록한대로 “메시아”(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의 고대문화와 사회에서는 미래의 이상적인 세계 통치자에 대한 기대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위대한 인물의 탄생을 지시하는 별들에 대한 사상이 있었다. 그래서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위대한 아기의 탄생지를 찾아 경배하러 온 것이다. 별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수단이다. 마태는 미가 5장 1절을 인용하면서 맨 끝부분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는 삼하 5:2에서 끌어오고 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조상의 마을인데 이는 또한 메시야가 세상에 태어날 마을이다.
누가의 사용
누가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오인(誤認)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눅 3:15). 이에 대하여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한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 3:16).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고 자기 후에 오시는 자는 자기보다 능력이 나으시며,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요한의 예언은 예수가 승천하신 후 오순절날 불의 혀로 나타나는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재하심으로 성취되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 고소자들도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아 왕”이라고 주장했다고 진술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貰)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눅 23:2 ). 이에 빌라도가 예수에게 물으니 예수는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한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눅 23:3).
예수 자신은 자기가 “메시아”인 것을 알았지만 이것을 공인(公認)하기를 불허(不許)하셨다. 메시아라는 개념이 정치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메시아 개념을 철저히 비정치적으로 이해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국가와 백성들을 로마의 점령에서 해방시켜줄 해방의 메시아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예수에게 메시아란 많은 백성들의 허물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고난의 종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비정치적인 사고였고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메시아 비밀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독일의 신학자 브라데의 주장(W. Wrede, Das Messiageheimnis in den Evangelium, 1901, The Messianic Secret, 1971)은 근거없는 것이다(Guthrie, 269).
요한의 사용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그가 “메시아”인지 묻는다. 이에 대하여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증언한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요 1:20). 여기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인 메시아에 상응하는 희랍어이다.
사도 요한의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제자들에게 예수가 “메시아”라고 증언한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요 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5). 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를 좇는 사람들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요 1:40 )이다, 안드레가 자기 형제 시몬 베드로에게 말한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요 1:41). 요한은 “메시아” 칭호를 아람어 형식을 보존하면서도 헬라어 번역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수가성의 여인을 만난다. 예수는 여인에게 말을 건낸다. 대화를 하는 가운데 여인은 예수가 자신의 여태까지의 삶을 다 아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여인은 마치 메시아를 만난 것 같이 예수에게 말한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요 4:25). 예수께서 여인에게 이르신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요 4:26). 바리새인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숨겼지마는 예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 여인에게 숨기시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신다. 여기서도 우리는 예수께서 분명한 메시아 의식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가성의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른다(요 4:28 :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 예수는 여인이 전도하여 데리고 온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만나신다. 그 마음이 메시아를 맞이하기에 열려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항상 자신의 메시아적 정체성을 열어놓고 계신다.
베드로의 사용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메시아”라는 용어를 독특하게 사용하였다(마 16:13-20, 막 8:27-30, 눅9:18-21).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공관복음서 모두가 다루고 있다. 동일한 내용이나 신앙고백의 표현방식이 복음서마다 다르다. 마가는 단순히 “주는 그리스도”(막 8:29)라고 말하는 반면, 누가는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눅 9:20),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는 표현을 기록하고 있다. 이 신앙고백에 수난에 대한 예수 자신의 예언이 이어진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의 수난을 반대함으로써 예수의 책망을 듣는다(마 16:21하). 베드로는 예수의 메시아 직분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영광스런 “메시아” 개념을 가졌으므로,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 사상은 그에게 거침돌이 되었다. 예수 자신은 베드로가 원하는 정치적인 메시아상을 거부하셨다. 예수는 폭력을 피하셨으며, 정치적인 선동가로서가 아닌 원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가르치셨다(M. Hengel, Was Jesus a Revolutionist?, 1971). 나사렛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 상을 민족주의적 정치적인 “메시아” 상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에 나오는 고난의 종과 후기 유대교의 초월적 인자상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가 자기들이 바라는 메시아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었다.
○예수의 메시아 상이 주는 오늘날 의미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 그리고 사회지도자들에게 사명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보여준다. 당시 광야에서 예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오천명이 식사를 하도록 기적을 베풀자 군중들은 예수를 왕으로 옹립(擁立)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군중들의 인기에 연연하여 이들의 뜻에 따라 왕이 되려고 하시지 않았다. 예수는 역사상 나타났던 왕들이나 대통령이나 오늘날 정치나 종교지도자들처럼 대중들의 인기에 따라서 타협하여 자신의 소명을 변질시키는 대중영합주의(populism)에 빠지지 않았다. 예수는 당시에 팽배한 다윗왕권을 가지고 오는 정치적 메시아 상, 영광의 메시아 상에 자신의 메시아 상에 타협하여 자신의 고난과 대속의 메시아 상을 수정(修訂)하시지 않았다. 군중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메시아상은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기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메시아는 영광의 메시아였다. 당시 군중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메시아는 인간의 죄 때문에 먼저 고난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에 반하여 예수는 자기의 메시아 사명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막 10:45)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예수는 대중적 인기를 잃고, 자기를 따르던 군중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으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만 그의 메시아적 사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아신 것이다. 나사렛 예수, 그분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구세주이신 것은 자신이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 사명에 죽기까지 충실하셨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