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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

- 고린도전서1:18-31 -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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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나 은사주의, 신비주의를 경계하고 성경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 성경의 핵심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복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십자가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1.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8-25)

 

(1)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라는 말은, ()’라는 원어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십자가의 도십자가의 말씀이다.

복음의 중심적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이 죄인들에게 복된 소식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두 가지 상이한 반응을 가져온다. 곧 복음 앞에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멸망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자들이다.

다른 한 부류는 구원을 얻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복음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절망하며 구주 예수님의 대속(代贖)의 소식을 듣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복음을 믿고 구원 얻는 자들이다. 복음은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2)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19-21)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전도 혹은 설교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전도의 내용뿐만 아니라, 또한 전도라는 방식도 가리키는 것 같다.

전도와 설교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신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며 또 말로 전하는 그 방법도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 설교와 복음 전파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 우리의 웅변, 우리의 아름다운 말로 사람을 구원하려 하지 말고 미련하게 보이는 그 십자가의 말씀이 오늘날도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2-23)

교회 안에도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나 기적들의 체험을 추구하고 강조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기도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비주의적이다. 교회는 기적주의, 은사주의,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곳이 아니다. 또 교회는 세상의 지혜나 철학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다.

옛날 헬라인들은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였다. ‘철학’(philosophy)이라는 말은 지혜를 사랑함이라는 뜻이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경험을 중시한다. 철학은 그 성격상 인간중심적이고 인본주의적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복음과 철학을 조화시키려는 자들이 항상 있어 왔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대개 그러하다. 현대신학은 철학자 칸트의 지식론이나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복음을 인간의 이성적, 경험적 생각으로 혼잡시키고 변질시키려는 시도들, 즉 기독교의 철학화를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교회의 중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을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 사도들과 초대 교회가 전파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을 박혀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昇天)하셨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들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택하신 죄인들을 구속(救贖)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을 박혀 죽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죽으신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의미가 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에 대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예언하였다(53:5-6).

예수께서는 친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말씀하셨다(6:51).

또 그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20:28).

바울은 본 서신 뒷부분에서 복음의 골자를 표현하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하였다(고전 15:3-4).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이 십자가의 말씀은 기적을 원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 하나님의 능력의 체험을 강조하지 않고 과거의 한 사건을 중요시하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과거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 복음이 현재에 죄인들의 죽은 영혼들을 살려 새 삶을 시작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참으로 구원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말씀은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복음의 논리는 단순하고 소박해보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논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가 죄 씻음을 받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리적 형벌의 개념이다. 그러나 지식인은 책임적 행동을 강조한다. 자기의 일을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논리는 그들에게 어리석게 보인다.

사람의 책임 있는 행동이 좋은 인격의 요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아무리 책임 있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미 많은 죄를 지었고 또 날마다 짓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최선의 의로운 행위라는 것은 단지 더러운 누더기 옷에 비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의 행위로 말고 다른 방법이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대속)가 바로 그 방법이다.

 

(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4-25)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신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을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믿으라는 초청이 아니고 믿게 하시는것을 말한다. 그것이 신생(新生) 즉 새롭게 남이다.

이때 성령께서는 죄인의 마음속에 깨달음을 주셔서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신이 죄인인 것과 예수께서 구주이신 것을 깨닫고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거리낌이나 어리석음이 아니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최선의 방법이다. 그것은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며 가장 힘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인간의 최선의 생각보다 낫고 그 어떤 힘이 있는 수단보다 낫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조금 감동시키는 정도가 아니고, 사람의 죽었던 영을 살리고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한다.

 

2.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26-29)

 

(1)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6)

형제들이라는 명칭은 주 안에서 믿음의 한 식구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사회적 신분, 학력, 재산의 차이를 뛰어넘는 명칭이다. 교회에는 높고 낮은 계급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르심을 받은 형제들이다.

여기에 부르심이란 내적인 부르심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새롭게 나게 하셔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부르심이다. 이것은 우리를 실제로 구원하시는 효력 있는 부르심이다.

 

고린도교회에는 육체를 따라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 몸의 건강이나 정치적 권세나 물질적 힘이 있는 자, 가문이나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가 많지 않았다. 더러 조금은 그런 자가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만의 현상이 아니고 역사상 모든 교회들의 일반적 현상이었을 것이다.

야고보서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19:24). 세상에서 부족함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그의 무지와 어리석음이지만 세상의 만족과 즐거움은 그를 영적으로 어둡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은 비교적 믿음에 들어가기가 쉽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7)

어떤 사람이 위의 사실로부터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인간의 영광을 뒤엎어, 위대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들을 구원의 소망에서 제외시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또 이것을 마치 위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있는 구실로 만들 뿐 아니라, 자신들의 위치를 그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을 멸시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세상에서 그런 훌륭한 위치에 있지도 않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럴 수 없는 경우에 있으면서 교만을 부리고 있는 그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기억하도록 하자.

 

다른 한편 바울은 여기서 비천하고 무력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그러나 그런 사람들도 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즉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사람들보다는 비천한 사람들을 더 사랑하시며, 교만한 자들의 교만을 꺾으시기를 좋아하신다고 밝히고 있다.

또 이런 하나님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왕들이 그리스도에게 입을 맞추기를 권고하고 있으며(2:12) 또한 바울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비천한 사람이나 위대한 사람, 제왕들이나 일반평민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여 주셨다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친히 증명하여 주셨는데,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비천한 어부를 그의 제자로 부르셨고, 다음에 철학자들에게, 또 무식하고 멸시받던 어부들을 가장 명예로운 자리로 들어 올리셨다. 그러나 나중에는 왕들과 고문들, 그리고 원로원들과 변호사들을 그리스도의 학교로 부르셨다.

 

(3)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많이 택하시고 구원하셨다.

그들은 과거에 세상에 속했던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교회의 대다수의 교인들은 그런 자들이다. 그들은 머리가 좋고 말 잘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좋은 학교 출신이 아니다. 그들은 건강한 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존귀하거나 인정받거나 잘난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었고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의 근본이다. 이로써 우리는 우주와 인간의 근원을 알게 되고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고 도덕의 근거와 내용을 알게 된다. 이것은 지혜 중의 지혜이며 지식 중의 지식이다.

또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은 세상의 빛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한 세상 속에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생활을 한다. 그들은 역경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소망과 용기를 가진다. 그들에게는 평안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신다. 그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의 이런 점들을 보고 놀란다.

 

따라서 이 문장은 이런 성경 구절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셔”(113:7),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146:8)등의 말씀들도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인용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 이전에 인간에게 어떤 공로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인가 하는 분명한 사실을 완전히 깨닫게 된다.

 

(4)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29)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그들을 통해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건강하고 존귀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까닭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사람이 자신을 내세워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람은 죄인이며 또 죄의 결과로 많은 고생과 슬픔과 허무함 가운데 살고 있다.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이다. 사람의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자랑은 헛되다.

우리는 인간의 모든 교만을 꺾고 자신의 죄악됨과 허무함과 무가치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겸손해지기를 원하신다.

 

3.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30-31)

 

(1)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0)

"하나님께로부터 나서"라는 원어는 그로 인하여, 그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택 안으로 들어가 그의 의와 생명 안에 거하며 그의 영광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죽은 영혼이 하나님으로 인해 살아나는 일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말은, 그들이 사도 바울의 말의 일부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까 보아 바울은 그의 말을 어떻게 그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는가를 보여주는데,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다고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라는 말은,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의식적으로 멀리 떠나기를 원치 않으면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를 떠나 무엇인가를 찾는 사람이 많이 있으므로, 첫째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가진 보화가 무엇이며,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그는 우리의 존재 양식을 설명하려고 한다.

둘째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에 의하여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용납이 되고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의 칭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값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는데,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셋째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거룩함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우리 곧 본성적으로 불의한 우리가 그의 성령으로 거룩하게 거듭나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만일 우리가 동시에 거룩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믿음만으로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은혜의 선물들은 분리할 수 없는 끈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만일 어떤 사람이 그것을 분리시킨다면, 그 사람은 어느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조각조각 찢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로 거룩하다는 칭호를 얻으려 한다면, 이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자. 곧 만일 동시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거룩하신 분으로 붙들지 않으면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사람은 그의 성령을 통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순결한 생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와 마찬가지로 중생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분명히 논박하여 주고 있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의 이 두 가지 사역이 연합되어 있는 한, 그들은 서로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분명하게 구별한 것을 혼동하는, 참으로 잘못을 마음대로 범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무지한 자들, 불의한 자들, 불결한 자들, 죄의 형벌과 공포 아래 있는 죄인들은 다 이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한다. 그들은 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구원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죄 아래서 신음하는 자들에게 가장 복된 소식이 아닌가?

 

(2)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31)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인간 자신의 힘이나 지혜, 건강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만을 자랑하라(9:23,24)고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방법, 곧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자비하신 분이시라는 사실로 우리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이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그를 경외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된 것, 의인된 것, 성도된 것, 천국시민된 것, 영생을 얻은 것, 이것들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자랑할 것밖에 없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았으므로 우리는 예수님만 자랑하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실상,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자랑은 헛되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4:7에서,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말했고, 또 고린도전서15:10에서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 존 칼빈 주석을 중심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