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김수로왕 신화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개벽한 이래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었고, 또한 군신의 호칭 따위도 없었다. 그저 아도간(我刀千)·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千)·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의 9간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곧 추장으로서 이들이 당시 백성들을 통솔했던 것이다. 그 백성들은 모두 1백 호, 7만 5천 인이었으며 산야에 제각기 집단을 이루어 그저 우물을 파서 물 마시고 밭갈아 밥 먹을 정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후한 광무제(光武帝) 18년-즉 신라 유리왕 즉위 19년(A.D.42) 3월 계욕일(鷄浴日)14)이다. 그곳 북쪽의 구지(龜旨)에서 뭔가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무리 2,3백 인이 그곳 구지봉에 모여들었다 사람의 말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를 내는 자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나고 있을 뿐이었다

 소리는 이렇게 물었다.
 
 "이곳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9간들은 응답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
  소리는 또 물어 왔다.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가?"
  그들은 응답했다.
  "구지봉입니다. "
  소리는 또 말했다.
 
 "황천(皇天)께서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임하여 나라를 새롭게 열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위의 흙을 파면서 이렇게 노래하라."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내어 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이 노래를 외치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아 너희들은 기뻐 날뛰게 될 것이다. "

  9간들은 그 말대로 모두 기쁘게 노래부르고 춤추었다. 노래하고 춤춘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우러러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자색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에 닿고 있었다. 줄 끝을 찾아보았더니 붉은 보에 싸인 금합이 매달려 있었다.

 그 금합을 열어 보았다. 해같이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했다 그리고 그 알들을 향해 수없이 절을 했다. 조금 있다 도로 보에 싸가지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갔다. 탑상(榻上)에다 놓아 두고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꼭 하루를 지나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은 다시 모여들었다. 그리고 금합을 열어 보았다. 여섯 개의 황금알은 사내아이들로 화해 있었다. 용모들이 매우 준수했다. 상에 앉히고 무리들은 절을 드려 치하했다. 그리고 공경을 다해 모셨다.

 사내아이들은 날마다 커갔다. 10여 일이 지나갔다. 신장이 9척으로 은나라의 성탕(成湯)과 같았고, 얼굴이 용 같아서 한나라의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여덟 가지 색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은 당의 요제(堯帝)와 같았다. 그리고 눈의 동자가 둘씩 있는 것은 우(虞)의 순제(舜帝)와 같았다.

  그 달 보름날에 왕위에 즉위했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라 했다. 혹은 수릉(首陵 : 붕어한 뒤의 시호임 )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또는 가야국(伽倻國)이라고 불렀다. 곧 6가야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을 경계로 하고 남쪽에 위치하여 우리 나라의 꼬리 부분이 된 곳이 가야의 영토다. 왕은 임시 왕궁(假宮)을 짓게 하여 들어가 거처했다. 질박·검소하게 하려고 풀로 이은 지붕에 처마는 자르지 않고, 흙으로 된 계단은 석 자를 넘지 않게 했다.

 즉위 2년(A.D.43) 봄 정월에 수로왕은 '서울을 정해야겠다'고 하며 궁의 남쪽 신답평 (新畓坪)으로 나갔다. 사방으로 산악들을 바라보고 나서 왕은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은 여뀌 잎사귀처럼 협소하구나. 그러나 지세는 빼어나서 가히 나한이 머무를 만한 땅임직도 한데 하물며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일곱을 이루었던 칠성(七聖)이 살았던 땅이 진실로 여기에 부합됨에랴. 토지를 개척하여 터전을 열어 놓고 보면 마침내 훌륭하게 되리라. "

  그리고는 둘레 1천5백 보의 나성(羅城:외성)과, 그리고 궁궐과 여러 관서의 청사와 무기고 및 창고를 건축할 터를 정한 뒤 환궁했다. 널리 국내의 장성, 인부와 장인들을 징용하여 그 달(12년 봄 정월을 가리킴) 20일에 금양(金陽)에서 성을 쌓기 시작하여 3월 10일에 이르러 역사를 마쳤다. 궁궐이며 관서의 청사 건축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그 공사를 진행시켰는데, 그 해 10월에 시작하여 그 이듬해, 즉 왕 즉위 3년(4.D.44) 2월에 이르러 낙성을 보았다.

 길일을 택하여 새로 지은 궁에 나아갔다. 그리고 만반의 정사를 장리(掌理)하며 온갖 정무에 근면했다. 완하국(琓夏國)이란 나라의 함달왕(含達王)의 왕비가 임신하여 낳은 알에서 깨어 나온 탈해라는 자가 문득 바닷가를 따라 가락국으로 왔다. 그의 신장은 석 자, 머리통의 둘레는 한 자였다. 탈해는 거침없이 수로왕의 궁궐로 들어갔다. 그리고 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왔소이다. "

   수로왕은 답했다.

  "하늘이 나를 명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여 나라 안을 태평케 하고 하민들을 안락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기고서 왕위를 줄 수 없으며, 또 감히 우리 나라우리 백성들을 함부로 너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이다. "

  탈해는 제의했다.

  "그렇다면 서로의 재간으로써 승부를 결정하자.  왕은 좋다고 응낙했다.

   삽시간에 탈해는 한 마리의 매가 되었다 그러자 수로왕은 독수리가 되었다. 탈해는 또 참새가 되었다. 왕은 그러자 새매가 되었다. 그 동안이 잠깐도 걸리지 않았다.

  탈해는 본신으로 되돌아왔다. 수로왕 역시 본신으로 돌아왔다. 탈해는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제가 술법을 다루는 마당에 독수리에 대해 매가, 새매에 대해 참새가 되었음에도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인의 그 죽이기를 싫어하는 인덕의 소치로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제가 왕을 상대로 하여 왕위를 다투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

  그리고는 곧 인사를 드리고 나갔다. 탈해는 그 부근 교외의 나루로 나가 중국의 선박들이 항해해 오던 해로를 취하여 가려고 했다. 왕은 탈해가 체류하고 있다가 난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우려하여 급히 수군 5백 척을 내어 탈해를 쫓았다. 탈해는 달아나 신라의 땅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수군은 모두 되돌아왔다.

 (여기 이 기록에 실린 것은 신라의 것과 많이 다르다)

 후한 광무제 24년 -즉 수로왕 즉위 7년(4.D.48) 7월 27일이다.  9간들이 배알 차 와서 왕에게 진언했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들에게 있는 처녀 가운데서 가장 예쁜 자를 뽑아 들여 배필로 삼도록 하십시오. "

  왕은 답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천명이오. 나를 짝하여 왕후가 있게 됨도 또한 하늘의 명일 것이오. 그대들은 염려 마오. "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경편(輕便)한 배와 그리고 준마를 끌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다시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에 나아가 있게 했다.

 문득 가락국 앞 서남쪽 해상에서 붉은 빛깔의 돛을 걸고 붉은 빛깔의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가 있었다. 성산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천간 등은 먼저 횃불을 올렸다.

  배는 마구 내달아와 앞을 다투어 상륙하려 했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은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듣고서 흔흔히 기뻐했다. 그리고 9간들을 보내어 좋은 배를 내어 영접해오게 했다. 9간들이 즉시 대궐로 모셔 들이려 하자 왕후는 입을 열었다.  "나와 그대들은 평소 알아온 터수가 아닌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겠소?"

  유천간 등은 돌아가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왕후의 말을 옳게 여겨 해당 관원들을 데리고 대궐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으로 가서 만전( 殿 : 장막으로 친 임금의 임시 거처)을 치고 기다렸다.  왕후는 바깥쪽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매어 두고 육지에 올라 우뚝 솟은 산 언덕에서 쉬고 있었다. 거기서 왕후는 입고 있던 비단 치마를 벗어 산신령에게 예물로 드렸다. 그리고 왕후를 시종해 온 신하 두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라 했고, 그들의 아내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 있었다. 노예들까지 아울러 모두 20여 명이 되었다. 왕후가 가져온 화려한 비단이며 의상이며 금은 주옥이며 패물, 노리개들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는 점차 행재소(行在所 : 왕이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로 접근해 왔다. 왕은 나가 맞았다. 그리고 함께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왕후를시종해 온 신보, 조광 이하 모든 사람들은 뜰 아래에 나아가 뵙고는 곧 물러나왔다. 왕은 해당 관원에게 명령을 내려 왕후를 시종해 온 두 신하들 부처를 인도하여 각각 다른 방에 들게 하고 그 이하 노예들은 한방에 각각 5, 6명씩 들게 하고는 맛좋은 음료를 주고 좋은 침구로 재우게 했다. 그리고 가져온 의복이며 천들이며 보화들은 많은 군졸들을 둘러 세워 지키게 했다.

 비로소 왕과 왕후는 함께 침소에 들었다. 왕후는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阿踰타: 인도의 한 나라)나라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올해 5월 중의 어느 날 저의 부왕과 왕후는 저를 보고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꿈에 함께 옥황상제를 뵈었단다.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어 왕위에 나아가게 한 사람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신성스러운 분이다. 이제 새로 나라에 임하여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짓도록 하라 하시고는 도로 하늘로 올라가셨단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사뭇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바로 부모를 하직하고 그곳으로 가거라.'라고 말씀 하셨어요. 이리하여 저는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蒸棗)를 찾아 하늘을 옮아 아득히 반도(蟠桃)를 좇아 이렇게 외람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나이다. "

 왕은 응대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들일 청을 했으나 함부로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그대가 스스로 왔으니 이 몸은 행복하오."  왕과 왕후는 드디어 어울려 들었다.

 이틀 밤 하루 낮이 지났다. 이제는 왕후가 타고 왔던 배를 본국인 아유타국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배에 딸린 사람은 모두 15명, 각각 쌀 열 석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본궁으로 수레를 돌렸다. 왕은 왕후와 함께 타고, 왕후를 시종해 온 신하들도 수레를 나란히 하고, 그리고 가져온 그 이국의 패물들도 모두 싣고서 서서히 대궐로 들어왔다. 그 때 시간은 막 정오가 되려 했다.

 왕후는 중궁(中宮)을 거처로 정했다. 시종해 온 신하들 부처와 남녀 사속들에게는 널찍한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종자들은 20여 칸짜리 빈관(賓?) 한 채에다 사람 수를 배정, 구별지어 들이고는 날마다 풍부한 음식을 주었다. 싣고 온 진기한 물건들은 안 창고에다 간수해 두고 왕후의 네 철 계절에 따라 필요한 양을 충당하도록 했다.

 어느 날, 왕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9간들은 다 백관의 장들이나 그 직위며 명칭이 무지 촌스러워 결코 벼슬자리에 있는 귀인의 칭호라곤 할 수 없다. 혹 어쩌다 문명된 외국인이 전해 들으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되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

  드디어 아도를 아궁(我躬)으로, 여도는 여해(汝諧)로, 피도는 피장(彼藏)으로, 오도는 오상(五常)으로 고치고, 유수와 유천의 이름은 윗 글자는 그냥 두고 아랫 사만 고쳐 각·각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했다. 신천은 신도(神道)로 고치고 오천은 오능(五能)으로 고치고, 신귀는 음은 본래대로 두고 그 훈만 고쳐서 신귀(臣貴)라고 했다. 그리고 신라의 직제를 취해다 각간(角干)·앗간(阿叱干)·급간(級于)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 관료는 주나라의 규례와 한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배정했다. 이것이 곧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며 관서를 설치하고 직책을 배정하는 방도일 것이다.

 이리하여 나라와 집안은 질서가 갖춰지게 되고, 백성들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므로 그 가르침은 엄숙히 작위를 짓지 않아도 저절로 위엄이 서고 그 정사는 엄격을 내세우지 않아도 잘 다스려져 갔다. 더욱이 왕이 왕후와 함께 있음을 비유하면 마치 하늘에게 땅이, 해에게 달이, 양(陽)에게 음(陰)이 있음과 같음에랴. 그리하여 그 공은 도산(塗山)의 딸들이 하우(夏禹)를 도운 것과 같았고, 당요(唐堯)의 딸들이 우순(虞舜)을 일으킴과 같았다. 몇 년을 잇따라 곰을 얻은 몽조(夢兆)가 있더니 왕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후한 영제 22년(A.D.189) 3월 1일에 왕후는 붕어했다. 향년이 157세, 나라사람들의 비탄은 대단했다. 구지봉 동북쪽에 있는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왕후 생전에 백성들을 사랑하던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왕후가 처음 가락국으로 와서 상륙했던 그 나루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부르기로 하고, 왕후가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에게 예물로 바쳤던 그 산언덕은 능현(綾峴), 붉은 빛깔의 깃발이 들어오던 그 바닷가는 기출변(旗出邊)이라 부르기로 했다.

 왕후를 따라온 신하 천부경(泉府卿)인 신보와 종정감(宗正監)인 조광은 가락국에 온 지 30년 만에 각각 딸 둘씩을 낳았다. 1, 2년을 더 지나 그들 부부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나머지 노예들은 온 지 7, 8 년이 지나도록 자녀들을 낳지 못하였고, 오직 고향을 그리는 슬픔을 안고 지네다 모두 죽어 갔다. 그들이 살던 집은 텅 빈 채 아무도 없었다.

 수로왕은 왕후가 간 뒤로 매 양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여 비탄을 금하지 못하더니 왕후 간 지 10년이 지난, 후한 헌제(獻帝) 10년(A,D.199) 3월 23일 붕어했다. 향년은 158세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부모를 여읜 듯, 왕후가 붕어했을 때보다 더욱 비통해 했다. 대궐의 동북방 평지에 높이가 한 길, 둘레가 3백 보 되는 빈궁을 축조하여 장사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 하였다. (하략)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가락국기(駕洛國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요점 정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형식 : 건국신화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주제 : 수로의 강림과 가락국의 건국 유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성격 : 상징적, 신화적, 신성성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의의 : 최고(最古)의 집단무요인 구지가를 삽입가요로 가지고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내용 연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계욕일 : 음력 3월 상사일(上巳日 :巳가 붙은 간지가 일진으로 든 날)에 액을 떨구어 버리는 의미로 목욕하고 물가에서 회음(會飮)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구지 : 이것은 산봉우리의 명칭이니 십붕(十朋:'역경'에 나오며 거북을 지칭함)이 엎드린 형상과  같아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신답평 : 이는 고래의 한전(閑田)으로서 새로 경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납'은 속자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16나한 : 빈두로파라타(Pindola-bharadvaja)를 위시한 석가의 16제사를 가리킴이니 이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받고 이 세상에 영주하며 중생을 제도(濟度)한다고 한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칠성(七聖) : 7가지 정지(正智)로서 진리를 조견(照見)한 이들을 이름. 7가지 정지란 수신행(隨信行) , 수법행(隨法行), 신해(信解), 견지(見至), 혜해탈(慧解脫), 구해탈(俱解脫), 신증(身證)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망산도는 가락국 서울 남방의 섬이요, 승점은 가락국 기내(機內)의 나라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증조는 곧 찐 대추로서 선인들의 약의 일종. 반도는 선계인들이 먹는 복숭아. 증조를 찾아, 반도를 좇아 왔다는 것은 선계로 신선을 찾아 왔다는 의미로 곧 왕을 찾아 왔다는 말이다. 왕은  종종 신선에 비유되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도간은 하나라의 유창이 제후를 만나 맹세하였다는 곳으로 우완은 이 도산녀에게 장가들었다고 한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도산(塗山)의 딸 : 순의 아내가 된 요제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곰을 얻은 몽조(夢兆) : 곰 꿈을 꾸면 아들을 낳는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이해와 감상

 금관가야의 시조 신인 김수로왕에 관한 신화.

〔개 요〕

  시조신화이며 건국신화로 삼국유 권2 가락국기에 전하는데, 건국자인 수로왕의 탄생과 혼사, 그리고 즉위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이 점에서 김수로왕신화는 단군신화나 혁거세신화 혹은 동명왕신화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건국시조신화로서 김수로왕신화는 왕국에 신성함을 부여하고, 아울러 왕권 자체를 신성화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와 하늘의 뜻대로 지상을 다스리는 첫 군왕이 곧 김수로왕이고, 그러한 왕을 받들고 있는 거룩한 왕국이 곧 금관가야라는 이념이 다른 건국 시조신화와 마찬가지로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특 징〕

  그러나 이 신화는 몇 가지 점에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여러 씨족이 연합되어 이룩된 통합적인 왕국의 창건에 관한 신화라는 점에서 각별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즉, 개벽한 뒤로 국호도 없이 다만 아도간(我刀干)·여도간 (汝刀干) 등 아홉 사람의 추장이 백성들을 통솔하고 있는 땅에 김수로왕은 하늘의 신으로서 강림하였다.
주인공이 이 같이 씨족연합사회의 통합된 군장으로서 하강했다는 점에서는 혁거세신화와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둘째, 신화 내용이 직접 신에게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3월 계욕일에 즈음하여 구지봉에 2백
3백 인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인 구간(九干)은 직접 하늘에서 들려오는 신의 목소리에 응답하였고, 그 결과 신의 내림을 받았다.
그 목소리는
황천(皇天)이 나로 하여금 이곳을 다스려 새로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기에, 내 여기에 내리고자 하노라.고 하면서 구간들에게 춤추고 노래하며 그를 맞이하기를 요구했고, 하늘의 신이 시키는 대로 실행하여 신을 맞이한 부분이 김수로왕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신이 직접 인간에게 한 말을 신탁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무속신앙에서는 그것을
공수라고 부른다. 김수로왕신화는 공수와 공수의 내용대로 사람이 실천한 행동을 중핵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이 신화의 신화다움은 신 자신에 의해 결정되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신이 직접 이야기한 신 자신에 관한 얘기가 곧 이 신화의 핵이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서 옮긴 것뿐이다.
신화의 공수다움은 우리 신화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속성이나, 그것을 문헌에서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는 유일한 경우는 바로 김수로왕신화이다. 그런 뜻에서 이 신화는 한국신화가 지닌 기본적인 성격을 성문화(成文化)해서 전해주고 있는 셈이다.
셋째, 이 신화는
신맞이 신화라는 것이다. 신내림을 받드는 신맞이 신화라는 성격은 혁거세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공수다움과 신맞이라는 두 요소가 어울림으로써 한국신화의 기본적인 유형을 얻게 된다. 공수를 받들어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이 신내림을 받은 얘기라는 한국신화의 기본 골격이 갖추어진 것이다. 신맞이 신화는 당연히 신맞이굿과 겹쳐져 있다.
실제로 김수로왕신화는 신이 하늘에서 소리하면서부터 지상에 출현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이란 사람들이 공수를 받들어 노래하고 춤춘 부분이자 육체로 연행된 신화란 점에서, 이 신화는 굿과 짝지어져 있다. 신화가 말로써 하는 풀이라면, 그 풀이가 사실은 말에 담겨 표현되기 이전에 행동에 담겨 표현되어 있었다.
김수로왕신화가 지닌 구술적인 서사진행은 먼저 육체에 의거해 있었다. 이 사실은 우리 신화의 기원에 관한 좋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른바 제의학파적(祭儀學派的)인 신화기원론이 적용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이 신화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김수로왕신화가 곧 굿이었다는 명제는 오늘날에까지 남겨져 있는 굿을 신화와 연관지어서 바라볼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실제로 이 신화의 줄거리, 특히 신맞이 부분은 오늘날의 별신굿의 신맞이 절차를 연상시켜 주기에 알맞다. 그런 뜻에서 고구려의
수신제(隧神祭)의 기록과 함께 김수로왕신화는 한국 민속종교를 통시적으로 부감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서 강조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에 남겨진 별신굿과 도당굿은
가락국기의 신맞이 부분과 수신제를 재현하고 있다. 별신굿은 상고대 신화가 오늘에 남겨진 모습이다. 이처럼 오늘날의 별신굿의 원류로서 부각되는 김수로왕신화는 한국인의 신명 내지 신바람의 원형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신명이 신이 지펴서 나타나는 앙분상태와 도취상태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당 개인의 종교적 체험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별신굿이나 도당굿에서 집단적으로 겪는 종교적 체험이기도 하다.
별신굿에서 신내림은 원칙적으로 무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별신굿이 진행되면서 무당이 겪은 신지핌의 상태는 마을 안에 번져간다. 접신 상태의 집단적 감염현상이 일어나고, 거기에 춤과 노래와 더불어 흥이 더해지면 별신굿판의 신명은 아주 결정적인 것이 된다. 김수로왕신화는 춤과 노래로 받든 신내림 부분을 통해 가장 오래된 신바람의 현장을 오늘에 전해 주고 있다.

〔의 의〕

  김수로왕신화는 결국 건국 시조신화라는 골격 속에서 다른 신화들에서 볼 수 없거나, 볼 수 있다고 해도 단편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한국 종교사적인 의미를 가장 풍족하게 간직하고 있다. 신화의 독특한 개성이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韓國의 神話(金烈圭, 一潮閣, 1976), 韓國神話와 巫俗硏究(金烈圭, 一潮閣, 1977), 首露王考(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eol-hwa/kim-su-lo.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