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의 교리적 정당성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 가운데 일부는 선택하셔서 구원하시고 일부는 유기하셔서 멸하신다는 기독교 예정론의 교리적 정당성은 무엇인가? 참으로 기독교 예정론이 교리적으로 정당한 진리인가? 라는 문제는 기독교 진리 인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예정 섭리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교리에 의하여 그 정당성이 입증되고 있다. 특히 본절에서는 개혁교회의 정통교리를 대표할 정도로 무게가 있는 칼빈(Calvin)5대교리에 의하여 예정론의 정당성을 입증해 보고자 한다.


칼빈주의(Calvinism) 교리는 다섯 개의 특징있는 교리들로 구성이 되어 전문적으로 칼빈주의 5대교리(The Five Points to Calvi -nism)’라고 알려져 있다. 5대교리는 칼빈주의 신학체계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서 예정론에 대한 교리적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5대교리를 하나하나 차례로 언급하면서 예정론의 교리적 정당성의 근거를 확실하게 세우려는 것이다.

 

1. 전적 무능력(Total Inability)

 

전능하신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인간은 능력이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능력이 없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가? 하는 문제는 교리적으로 많은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인간론의 중대한 문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The Wesminster Confession of Faith )전적무능력(total inability)’ 교리에 대하여 사람이 스스로 죄에 빠짐으로 구원을 얻을 만한 선행(善行)의 의지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사람은 선에서 멀어지고 죄에서 죽었으니 자력(自力)으로는 회심(悔心)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려고 하여도 못한다.”(Ch , sec )고 하였다.


칼빈주의 5대교리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중심으로한 구속사적(救贖史的) 교리체계에 불과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전체적인 경륜과 섭리의 내용을 담은 교리체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예정론의 정당성을 확립해 줄 수 있는 교리적 근거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 섭리가 피조 인간에 대한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사역이라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섭리는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사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적 무능력(total inablity)’ 교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섭리 과정에서 지엽적으로 나타난 교리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일의 경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사역의 입장에서 전적 무능력교리가 이해가 된다면 인간 타락에 의한 전적인 무능력이 하나님의 예정 사역보다 앞서게 되어 타락 후에 선택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자(Arminian)들의 이론에 동조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것이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고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전적 무능력에 대한 교리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예정 사역의 한 부분인 구원 섭리의 차원에서 이해되고 정립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로 전적부패(Total Depravity)’라는 표현이 알미니안주의자의 조건적 선택교리를 방어하는 데 효력을 나타내므로 예정론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 용어의 표현이 전적 무능력이든 전적 부패이든 간에 이 교리가 어떻게 예정론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해 주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자(Arminian)들은 말하기를 비록 인간의 본성이 타락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았다 하더라도 인간은 전적인 영적 무능력의 상태에 처해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은혜스럽게도, 모든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며 믿게도 하지만 인간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는 범위에서 하신다. 모든 죄인들은 각각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지는데 그의 영원한 운명은 그가 어떻게 자유의지를 사용하느냐에 달렸다. 인간의 자유는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악에 대하여 선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는 전적 무능력교리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되는 것이다.


칼빈주의자(Calvinist)들은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전적으로 무능력해 졌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인간이 죄를 범하여 타락을 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에도 피조물인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무능력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힘입지 않고는 살거나 움직이거나 존재할 수가 없는 절대 무능력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서 선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된다.


처음 지음 받은 인간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으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죽어버린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자연인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영적으로 죽어버린 인간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자연인(自然人)에게는 아무런 자유의지도 가지지 못하며 도리어 악의 세력에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실상으로는 죽고 악의 노예가 된 인간의 후손 역시 모두가 다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시조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핑계할 수 없는 것이며(2:12)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존재임을 바울 사도가 밝혀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전적으로 부패하여 완전히 무능력한 상태의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교리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을 주장하는 이론과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킨다.


결국 알미니안주의자와 칼빈주의자의 논쟁의 초점은 인간의 타락이 부분적이냐 전체적이냐에 있다. 여기서 칼빈주의의 전적 타락에 의한 전적 무능력교리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부분 타락에 의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교리, 즉 인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가 합력(合力)하여 인간의 구원을 성취한다고 하는 잘못된 교리를 정면으로 파괴시킴으로 하나님의 예정 사역에 의한 구원 섭리가 입증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 사역의 정당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공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인간 주도의 성취물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작정 섭리 안에서 인간에 대한 예정 섭리를 따라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주도의 절대적인 주권 사역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은 구원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주도의 절대적인 주권 사역을 나타내는 하나의 과정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박사는 죄와 비참으로 인한 극()한 인류의 타락은 칼빈주의 체계의 근거(根據) 기초인것 같이 또한 성경에 전시된 구속 계획의 근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 체계의 근거 기초는 타락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작정 섭리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정 사역에 의한 구원 섭리가 인간의 타락을 기초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작정 섭리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적인 타락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 섭리에 의한 구원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드러내는데 하나의 과정적 수단이 되어졌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3:22)”고 하였다. 또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11:32)”고 말함으로 인간의 타락의 의미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역으로 이루어진 예정 섭리를 이루시는 과정적 수단(手段)으로써의 의미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전적 무능력교리는 부분적이지만 예정론의 정당성을 매우 강력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가운데 얼마를 선택하실 때 조건적(條件的)이셨는가? 아니면 무조건적(無條件的)이셨는가? 하는 문제 역시 예정론과 관계가 되어 심한 교리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따라서 무조건 선택교리는 어떠한 교리보다도 예정론과 직접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교리라고 하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간과 천사들 중에 어떤 이는 영생으로 어떤 이는 영원한 죽음에 경륜되었다(Ch , sec )하였다. 이 선택 교리는 예정 교리와 직접 관계를 갖고 있으며 예정교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역과 관계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선택 교리의 이해와 정립(定立)에 따라 우리의 신관,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 구원관 등이 좌우되는 아주 중요한 교리이기 때문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조건적 선택교리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하실 목적으로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인간이 부르심에 응하여 믿게 될 자들 - 자기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 - 임을 미리 알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이나 결정에 따라 되는 것이니 조건적이다고 한다. 즉 인간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나 결정이 조건이 되어 선택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이론이다. 이러한 교리적 이론은 예정론을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어떠한 조건에 의한 피동적 사역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피동적인 사역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인 절대성 내지 주권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칼빈주의의 무조건 선택교리는 인간의 행위나 결정 등의 조건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절대주권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많은 칼빈주의자들 역시 선택의 근거를 인간의 타락에서 찾으려고 후택설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선택의 근거를 인간에게서 찾으려는 노력과 공통점을 이룬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대하여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박사는 또한 하나님은 어떠한 자를 멸망에 정하시기 위하여 창조하시느냐고 하는 알미니안파의 반대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 이래로 선택 교리를 주장한 사람 중의 대다수는 타락 후 하나님의 선택론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선택의 근거를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역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인간의 타락에서 찾으려는 노력인 것이다.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박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현대에 있어서 칼빈주의자로서 타락 전 하나님의 선택설을 취하는 자는 백분지 일도 잘 안된다고 하여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강력한 칼빈주의자들이지만 ()파의 칼빈주의자는 아니다. ‘고파의 칼빈주의자란 타락 전 하나님의 선택설을 지지하는 자들을 가르침이다.”라고 역설하면서도 전택설에 대한 동정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챨스 하지 박사(Dr. Charles Hodge)의 말을 빌려 그 경외(敬畏)할 만한 단체(웨스트 민스터 회의)의 의장 튀스(Twiss)씨는 대단한 타락 전 하나님의 선택론자이었다. 그러나 의원(議員)의 대다수는 타락 후 하나님의 선택론자이었다. 그 회의의 신조는 명백히 후자의 견해를 포함하면서도 가급적 타락 전 하나님의 선택론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공격되지 않도록 제작되었다.”고 동정의 뜻을 나타내 주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할 것은 후택설을 취택하는 동기가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의 섭리의 기초 근거로 삼고 있다는 데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교리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인간의 어떠한 조건과 관계 없이 자신의 주권적인 기쁘신 뜻에 따라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셨다는 하나님의 주권 사역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을 근거로 한 하나님의 선택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주권적 예정 사역에 의하여 선택되었기 때문에 타락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지, 타락되었기 때문에 선택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유기에 있어서도 타락되었기 때문에 유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역에 의한 예정 섭리 안에서 유기되었기 때문에 타락되고, 또한 타락된 그대로 버려진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타락을 근거(根據)로 한 선택을 생각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예정 사역을 근거로 하여 그 의미를 생각하여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말하듯이 선택의 목적을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택은 하나님 자신의 절대주권의 영광을 드러내신 결과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9:21)”고 하였다. 한덩이의 진흙으로 귀히 쓸 그릇이든 천히 쓸 그릇이든 맘대로 만들 수 있는 권한(權限)이 토기장이에게 있음을 드러내듯이, 하나님께서 똑같은 인간들 중에 어떤 자들은 선택하고 어떤 자들은 유기하는 사역으로 하나님 자신의 절대주권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선택교리의 의미는 선택의 결과를 향하는 과정의 한 부분인 구원 사역 측면에서 이해되거나 정립이 되어져서는 안되고 어디까지나 선택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작정 섭리의 측면에서 이해되고 정립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선택의 의미가 정립될 때, ‘선택설(選擇說)’에 있어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타락 후 선택설타락 전 선택설간의 논란도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전장 예정의 시기라는 항목에서 논술하였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다만 무조건 선택교리가 어떻게 예정론에 대한 정당성을 드러내 주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무조건 선택교리 역시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조건적 선택교리를 무색하게 함으로 선택의 근거를 인간에게서가 아닌 절대자 하나님에게서 찾음으로 그 정당성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선택교리는 피조된 인간의 어떠한 조건에 의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역으로 되어진 예정 섭리를 이루어 가는 데 한 과정적 수단으로서, ‘예정론에 대한 그 정당성을 힘있게 증언해 준다.

 

3.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속죄해 주시는 섭리가 모든 인간에게 무제한적(無制限的)으로 베풀어지는가? 아니면 일부분 선택된 자들에게만 제한적(制限的)으로 베풀어지는가? 라는 문제가 예정론에 대한 교리적 논쟁과 함께 제기되어 왔다.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교리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무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자들에게만 실효성있게 적용이 되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교리이다. 그런데 이 교리에 있어서 제한적이라는 용어의 이해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자체의 능력이 제한적이라고 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불완전성(不完全性)을 내포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한적이라는 용어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자체의 능력은 완전하지만, 그 능력이 적용되는 범위(範圍)에 있어서 제한적이라는 이해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교리에 대해 언급하기를 그런고로 선택된 자는 이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에 빠졌더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었느니라. 또한 성령께서 합당한 때에 사역하심으로 저희가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으며, 양자가 되어 성결함을 받고 또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전하여 구원을 얻는 데 이르게 하셨나니라. 택한 백성 외에는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입으며 확실한 부르심을 입으며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양자가 되어 성결함을 받아 구원될 자가 없느니라(Ch , sec )”고 하였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제한적 속죄교리에 반대하여 일반적 속죄교리를 내세워 속죄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속죄를 제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능력의 불충족성(不充足性) 내지는 불완전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여 비난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제한적이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판단의 결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에 대하여 효과면(效果面)에서나 사역면(使役面)에서 충족성과 완전성을 인정하고, 뿐만 아니라 유효적(有效的)으로 구원까지 보증하는 완전한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무제한적으로 전 인류 전체에 적용시켜 속죄의 보편성을 강조하여 양적인 충족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이러한 부질없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질적인 불완전성이나 불충족성을 강조하게 되는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속죄가 전 인류에게 적용이 되었다면, 전 인류 모두가 구원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실에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自明)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을 하셨지만 인간이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그리스도의 속죄가 유효적으로 구원을 보증(保證)하는 사역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 편에서 구원의 가능성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질적인 불완전 내지는 불충족성을 주장하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속죄가 질적인 충족 내지는 완전성을 가진 속죄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속죄가 양적인 완전 내지는 충족성을 가진 속죄인가? 하는 물음 앞에 어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에 있어서 이 둘이 같이 병립(竝立)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고찰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질적인 면에서만 완전 내지는 충족성을 지니고 있고, 양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고 쉽게 판단을 내린다면 큰 오류를 범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의 속죄가 실질에 있어서 양적인 완전 내지는 충족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불완전 또는 불충족성을 인증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가 실질(實質)에 있어서 양적으로도 완전하고 충족하지만, 그 적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사역의 예정 섭리를 따라 하나님 자신이 적용 범위의 양()을 제한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양적인 제한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스스로가 하신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속죄를 통한 그리스도의 의가 모든 인류의 구원을 단순히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창세 전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 사역의 한 부분인 선택 사역의 일환(一環)으로 선택자에게 실제적으로 구원을 확실하게 한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속죄가 제한적이냐? 무제한적이냐? 또는 질적 제한이냐? 양적 제한이냐? 하는 모든 문제 역시 속죄라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이해되고 어떠한 차원에서 설명이 되어지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라고 하겠다. 이같은 문제들은 모두가 그 내용은 상반된 의미를 띠고 있으나, 그 근거는 인간의 죄의 해결을 통한 구원에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共通點)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근거를 인간의 죄에 두기 때문에 잡다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근거를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역의 하나인 예정 섭리에 둔다면 앞에서 말한 모든 문제들은 자연히 사라지고 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속죄란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 사역의 하나인 선택의 결과라는 말이다. 따라서 속죄의 근거 역시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역에 궁극적(窮極的)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보통으로 고찰한다면 속죄가 어디까지나 인간의 죄에 근거한다고 하겠으나 이러한 고찰은 하나님을 능동자가 아닌 피동자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속죄라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간 측면인 죄에 근거해서 이해하지 말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해서 이해할 때 제한적 속죄교리는 예정론의 정당성을 강하게 부각(浮刻)시켜 주고 있음을 감지(感知)할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인간의 죄에 근거한다면 모든 인류 전체에게 그 효력이 발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 사역에 있어서 선택된 자에게만 그 속죄의 완전하고 충족하며 유효한 결과로 구원이 확증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 자신도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5)”고 하셨으며,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 -ner) 박사는 마태복음 2028절을 인용하여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을 위한이라 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이라고 하지 않은 것에 주의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 사역에 근거한 제한적 속죄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주의 5대교리 가운데 제한 속죄교리는 기독교 예정론의 정당성을 너무도 분명하게 밝혀 준다.

 

4.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ible Grace)

 

이 교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은혜가 피조된 인간 편에서 거부될 수 있느냐? 또는 거부될 수 없느냐? 하는 문제로부터 출발이 된다. 이에 대하여 칼빈주의자들은 절대로 거부될 수 없다는 결론에서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ible grace)’이라는 교리체계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이 교리에 관하여 무릇 영생에 이르기를 예정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 용납하시기로 작정하실 때에 말씀과 성령으로 저희들을 확실히 부르사 저희가 본성품으로 사는 죄와 죽음에서 나오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은혜와 구원을 얻는 지위(地位)에 이르게 하시되 성령과 구원에 이르게 하시도록 저희 마음을 밝히사 하나님의 도를 깨달아 저희의 완악한 마음은 버리고 유순한 마음을 얻게 하시며 저희의 심지(心志)를 다시 새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힘으로 저희를 세워 모든 착한 일을 행하게 하시며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하시나니라 그러나 이 사람들도 은혜로 말미암아 감심(感心)으로 아주 자유롭게 나오나니라고 언급하고 있음을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 박사는 그의 저서 칼빈주의 예정론 제13I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교리에 대하여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즉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갖가지 은혜에 대하여 성공적으로 거스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부르심이라든가 중생, 또는 회개 등 구원에 있어서의 기본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얼마든지 거부(拒否)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성령 하나님께서 어떠한 은혜를 피조 인간에게 베풀고자 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협력 없이 하나님 자신만의 사역으로는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만일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말대로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거부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하나님은 능력에 한계가 있으신 분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만을 나타내시고 그 결과를 이루는 주도적인 권한이 인간에게 있다는 말이 되며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招來)하기 때문에 그들이 주장하는 가항력적 은총(resistible grace)’ 교리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미 앞서 전적 무능력(total depravity)’ 교리를 통하여 말했듯이, 인간은 타락하기 이전에도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타락한 이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영적으로 죽어버린 존재이다. 이같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중생되고 회개하고 믿어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가 죽은 인간에게 베풀어져 효과적인 부르심, 즉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듣게 하는 부르심을 뜻하는 내소(內召)를 통하여 중생시키시고 회개시키시고 믿게 하시며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고 양자(養子)로 삼아 성화를 이루게 하시며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하시는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은혜 사역이 인간의 아무런 협력 없이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의하여 되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항거(抗拒)할 능력조차 없이 절대주권적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마치 죽어버린 시체가 땅에 묻히기를 거부할 수 있다는 격이 되는 것이다. 흔히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자기 자신을 돌이켜서 하나님을 향할 수 있고 구원도 쟁취하며 목적도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이 외부로부터의 아무런 작용이 없이 자기 안에 생각하고 결정해서 행동하는 근본적인 요소와 원인을 모두 가지고 있는 완전한 독립적인 자존자(自存者)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조된 인간, 더욱이 타락하여 죽어버린 인간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사역이 아니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협력자가 아니라 주관자이며, 그의 은혜 역시 가항력적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은 능력에 있어서 상대적일 수 없다. 더욱이 실패자이실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거부 행위에 의하여 계획에 차질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불가항력적 은혜교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역에 근거한 예정 섭리 가운데서 선택된 자에게 베풀어지는 특별한 은혜 사역인 것이다. ‘선택자체가 불가항력적인 절대주권에 근거한 사역이므로 선택자에게 베풀어지는 은혜, 즉 선택의 결과를 위한 방편들 역시 불가항력적이라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다.


구약성경에 있어서 에녹이 승천한 사건, 노아가 방주를 지어 여덟 식구가 구원을 얻은 사건,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은 사건, 롯이 소돔과 고모라 멸망에서 구출된 사건, 야곱이 축복받은 사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사건 등 이 모두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결과였다.


신약에 있어서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처녀 잉태 사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부르심, 오순절의 성령 강림, 바울의 소명 등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사역에 대한 증거들이 많이 있다. ‘불가항력적 은혜교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역에 근거하여 이해되고 그 의미가 정립됨으로 예정론의 당위성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역의 하나인 예정에 근거한다는 의미이다.

 

5. 궁극적 구원(Perseverance of the Saints)

 

칼빈주의 5대교리 가운데 마지막 교리인 궁극적 구원교리는 하나님께 선택된 인간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인간의 구원은 확실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쟁이 기독교 예정론 교리의 논쟁과 함께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것이다.


이 교리는 앞서 말한 교리 체계들에 의한 논리적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전적으로 무능력한 인간이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의 예정 섭리에 무조건 선택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효과적으로 받게 하셔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말이다.


이러한 궁극적 구원(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용납하시고 실제로 부르시고 또한 성령으로써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最終的)으로 타락할 수는 없다.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에 있을 것이며 또한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171)”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 섭리에 의하여 예정 가운데서 선택된 인간은 그 구원 과정에 있어서도 절대주권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시도되기 때문에 선택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구원 역시 궁극적인 구원이 된다는 것은 불가피한 결론인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와는 정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의견을 대략 종합해 보면, 인간이 진실로 믿어서 구원 받는 가운데 인간 자신이 믿음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같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라 하더라도 더러는 죄인이 일단 중생이 되어 신자가 되면 절대 유기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安全)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모든 논리들이 서로의 충돌을 이루고 있는 근본 이유는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는데 반하여,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구원이 주도권(dominion)을 가지신 하나님과 순응(順應)해야 할 인간이 연합하여 서로 노력함으로 성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논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 사역에 관하여 가지는 주도권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응하지 아니하면 그 주도권의 결과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의 논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약화시키는 잘못된 논리에서 나온 산물임이 틀림없다. 피조된 인간의 타락한 의지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적 능력의 사역으로 이루시는 구원 사역에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구원 사역의 결정적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어떻게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하여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고 했고,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3:2)”고 말씀했으며, 로마서를 통해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고 말씀하고 있다. 즉 인간의 구원이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가 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膳物)이며 믿음으로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 역시 모든 자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선택된 인간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근거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일 구원이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 근거를 인간의 타락에다가 두게 되면 궁극적 구원이라는 교리의 성립이 어려워지게 된다. 왜냐하면 처음 인간이 타락할 때 인간 편에서 불순종했기 때문에 타락했다고 하는 논리가 이 경우에도 적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는 그 근거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섭리에 두고 이해하며, 그 의미를 정립(定立)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란 인간이 자기 의지로 불순종하여 타락함으로 어쩔 수 없이 실패하신 하나님께서 그 실패를 다시 회복하시려고 애써 노력하심으로 얻어진 결과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예정 섭리 안에서 선택된 자들에게 절대적인 주권에 의하여 주어지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궁극적 구원교리가 하나님의 예정 섭리를 밝히 드러내 주는 결과로 예정론의 정당성을 입증해 준다.


혹자들은 사실에 있어서, 믿다가 낙심하는 자들이나, 범법(犯法)하고 악에 빠지는 자들을 들어서 궁극적 구원교리에 대해 반증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 끝까지 돌아서지 않고 멸망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믿은 자가 아니라 예배당에 다닌 자이며 외형적인 단체에 가입했던 자임에 불과하다. 틀림없이 택한 자라면 다시 뉘우치고 돌아오게 되며 범죄의 생활에서 점진적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혹자들은 성경을 들어서 궁극적 구원교리를 반증하려는 자들 역시 적지 않다. 히브리서 64절에서 6절까지 보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궁극적 구원교리를 반대하고 나선다. 그러나 이 말씀의 참 뜻은 히브리서 전체가 말해 주듯이 유대인들은 복음의 신령한 것들을 상징적 또는 그림자적으로 다 맛보고 참예하고 얻은 자들이다. 그러나 타락한 자들 즉 복음의 그림자가 아닌 참 형상(形象)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6:6)” 보인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6:6)”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구약의 상징적이고 그림자적인 복음은 받았으나 참 형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고 십자가에 욕보였으니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10:2627)”는 말씀도 있는데 이 말씀의 참 뜻 역시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오실 예수에 대한 지식을 구약의 예언을 통하여 받았지만 짐짓 죄, 즉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를 범하면 용서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도 선택되지 아니한 자들은 예수를 믿을 수 없게 하시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려 저희 눈은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2:40)”고 하였다.


따라서 선택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섭리이듯이 구원도 역시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섭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 구원교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예정론의 당위성을 힘주어 입증해 준다.


이에 따르는 여러 가지 지엽적인 문제들은 다음 장(3)에서 논하기로 약속한다.


출처: 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