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 1/2

1989년 사진예술이 세상에 공표된지 꼭 1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 뜻 깊은 해에 창간호를 내게 된 ‘사진예술’ 에서는 창간특집으로 세계 사진사 150년을 요약하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우선 첫 번째 기획으로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를 준비한 본지에서는 앞으로 계속해서 사진사상 한 전기를 이룬 사건들과 그 뒷 이야기를 연재해 드리겠습니다. 특히 이번 특집에는 프랑스의 통신사 시그마에서 기사와 사진제공을 해 주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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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엡스박물관 앞에 있는 니엡스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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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발명가인 니엡스의 초상(왼쪽)  사진을 공동발명한 루이스 다게르의 초상(오른쪽)

1839년 1월 7일 파리에서는 과학아카데미 종신회원인 프랑스와 아라고에 의해 굉장한 뉴스가 발표되었다. 바로 사진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이제 전세계는 사진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갖가지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중 프랑스 문화성이 개최하는 “사진은 누가 발명했는가?” 란 주제의 심포지엄이 관심을 끈다. 이미 일반적으로 루이스 다게르에 의해 사진이 발명되었다고 믿어온 터에 새삼스럽게 던져지는 이 물음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진은 누구에 의해 발명되었는가? 프랑스 통신사인 시그마(SYGMA)가 제공하는 대답은 이러하다. 사진의 탄생을 알리는 뉴스가 발표된 1839년 8월 7일 역시 아라고에 의해 요셉니세포르 니엡스가 만들고 루이스 다게르가 개량한 발명품의 세부자료들이 발표되었다. 이와함께 프랑스 정부는 제작자로부터 그 발명품을 구입하고 즉시 전인류에게 그 발명품의 사용을 허용한다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사진의 역사는 사실 1839년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1815년에 이미 니엡스는 그의 동생 클라우드와 함께 사진술로 이루는 최초의 결과를 얻어냈다. 감광판에 새겨진 사진이 암실 깊숙한 곳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그 사진은 불안정한 것이었고 그래서 클라우드는 그의 연구를 단념하였다. 그러나 니엡스는 연구를 계속해 1816년 5월 28일에 기적을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사진을 만든 것이었다.
그 사건은 니엡스 가족이 살던 아름다운 고장인 Domaine De Gras에서 일어났다. 니엡스는 그의 암실 카메라를 창가에 놓아두었는데 몇시간 동안 햇빛이 그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는 질산으로 만든 염화은 인화지에 그의 첫번째 이미지를 고정시켰는데 그 이미지가 최초의 네가티브였다.
그리고 6년 후인 1822년에 마침내 그는 그가 원했던 것을 이루었다. 첫 번째 포지티브였다. 화학적인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니엡스는 어려운 분야를 탐구하였고 유태 아스팔트 물질을 이용, 그 연구를 마무리짓게 되었다. 유태 아스팔트는 보통 라벤더유와 오일 속에 잘 녹지만 햇빛을 받은 후에는 녹지 않는다. 따라서 니엡스는 유리판 위에 이 아스팔트를 고르게 칠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역사상 첫사진을 만들어냈고 여기에 ‘Set Table' 이란 제목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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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니엡스가 아스팔트의 용해로 만든 사진 ‘A Set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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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니엡스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사진

한편 니엡스는 당시 같은 분야에서 열심히 연구하던 루이스 다게르와 오랫동안 서신교환을 하다가 그와 연계하여 공동 연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니엡스는 그의 발명의 이익을 다른 사람에게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다게르와 공동연구를 했지만 다게르는 사업에 대한 직감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곧 그가 유일한 사진의 창시자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니엡스는 이미 사진술의 공식적인 탄생이 이루어지기 6년전에 죽었고 따라서 다게르의 이름만이 언급되어졌던 것이다. 일반 대중에게 판매되는 최초의 사진기기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것이 바로 다게레오 타입(Daguerreo Type)이었다. 불운한 천재 니세포르 니엡스는 1765년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 이 진정한 천재는 생전에 그가 가치를 두고 연구했던 업적을 모두 잃어버렸을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그의 명예를 회복받지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다게르에게는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면서도 니엡스에게는 그의 명예를 위해 동상 하나 설립하는 것조차 거절했었다. 프랑스에는 다게르의 이름과 관련된 거리가 수없이 많으며 그에 대한 연구도 활기에 차있지만 니엡스라는 이름은 쓸쓸하게 남아있다.
사실 니엡스는 사진술 이전에도 여러 가지를 발명해낸 발명가였다. 즉 나폴레옹의 적에 의한 봉쇄선으로 프랑스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설탕이 부족하였었다, 그때 니엡스는 으깬 Zucchini로부터 설탕을 생산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보다 사탕무우에서 뽑아낸 설탕을 더 선호했다. 또 정부가 말리 근해의 물을 끌어올리려 할 때 그는 그의 ‘내연식 엔진’을 제안했다. 그러나 다른 모터가 대신 선택되었다. 법정에 그가 발명자로서의 우선권을 제출했지만 별 효력이 없었다. 더욱 훌륭한 것은 그가 발명한 엔진은 여러해 뒤에 자동차산업이 채택하여 사용한 연료분사장치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믿을 수 없으리만큼 지독히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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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르가 사용했던 기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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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부터 1900년까지의 카메라 종류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지막 걸작품인 사진술의 발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루이스 다게르의 책략에 넘어가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루이스 다게르는 여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호색가였다. 그리고 결국은 그 여자들 때문에 매독에 걸리고 말았다. 어느날 저녁 다게르는 은판 위에 수은이 가득든 숟가락을 놓아 둔 것을 잊고 자버렸다. 그 다음날 아침 그는 깜짝 놀랐다. 여성이 현상되어 있었 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었다. 이 결과 사람들은 한 시간이 아니라 단지 20분만에 사진을 현상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방법이 보강되었기 때문에 다게르는 연약한 이시도르 니엡스(니엡스의 아들)에게 계약에 있어 그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니엡스가 사후에 당한 또한번의 패배였다. 파리 근교에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사진박물관을 설립한 Jean Fage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이고 기술이고 예술인 사진을 니엡스는 유리판 위에 가장 먼저 기록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는 자신이 인류를 위한 몇몇 천재적인 인물중 한사람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또한 그가 우리 역사의 가장 위대한 혁명중 하나인 혁명의 창시자였음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 옛적에 한 천재가 살았었다. 150년 그 이전에.
(사진 기사제공/ Sygma, 번역/강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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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엡스의 최초의 카메라. 물론 세계 최초의 사진 장비이다.
프랑스 사진박물관의 관장이며 큐레이터인 Jean Fage와 Andre' Fage. 1855년부터 1895년까지의 스튜디오 장비들(시계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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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Ducos De Hauron에 의해 쓰였던 Melanochromsocope(왼쪽사진)
1900년의 것으로 1/5000초에 작동하는 ‘Sigriste' (왼쪽)와 Star Streo cham 1022.(오른쪽 사진)

스그마통신이 제공한 앞에서의 글은 150년전 사진술발명 초기 니엡스와 다게르간의 미묘한 갈등에서 야기된 실상을 오늘날 이 시점에서 재검토하여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보려는 배려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 당시 약화된 니엡스의 공적을 다시 높이려는 운동으로 간주할수 있다. 그래서 지난날 이미 발표된 사진사중에서 사진술 발명초기의 사실의 일부를 여기 소개하여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려 한다. 다게르의 사진술에 대한 연구실험은 1831년 접어들면서 어느정도 실마리를 잡는 단계로 발전했다. 즉 니엡스가 헤리오 그래피의 개량에 심혈을 쏟고 있을 때 다게르는 한발 앞서고 있었다. 다게르의 초창기 사진술에 대한 연구는 니엡스와 동일한 은을 바른 동판과 영상을 고정시키는 옥도를 사용한 실험이었다. 1831년에 그는 은맥기한 동판에 옥도의 증기를 쪼여서 만든 옥화은이 높은 감광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광이 되어 영상이 명확하게 나타날 정도의 강한 감광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게르는 감광성을 높이는데 그 연구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옥화은판을 가지고 갖가지 연구를 시도해 보고 또한 노출을 여러 가지로 조정해 봤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요컨대 니엡스나 다게르는 ‘현상’이라는 개념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직 광선을 쪼여서 그대로 화상을 나타나게 하는 연구에다 촛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기적이 일어났다. 다게르는 여느때와 같이 옥화은판을 검은상자속에 넣고 노광을 시켜봤지만 영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노광을 시킨 은판을 연마해서 한번 더 사용할 목적으로 그날은 그것을 그대로 화학약품을 보관 하는 장속에 넣어두었다. 몇일 후에 그판을 꺼내어보니 넣어 둘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옥화은판위에 선명한 영상이 나타나 있었다. 다게르는 깜짝 놀라면서 무척 기뻐했지만 왜 화상이 나타났는가에 대한 원인은 몰랐다. 또 다게르는 노광을 시킨 옥화은판을 약품이 들어있는 장속에 넣고 수일후에 꺼내보니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는 분명히 장속의 약품에 의한 작용이라고 생각한 다게르는 매일같이 약품을 조사해 봤지만 같은 결과로 영상이 나타났다. 마지막 시험으로 수은이 든 병만을 남겨놓고 다른 약품은 모두 제거해 봐도 결과는 동일했다. 그리고 장속에서 수은이 든 병을 꺼내고 옥화은판을 넣어두었는데 영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게르는 영상을 나타나게 하는 에너지는 수은의 증기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되어 잠상이 현상에 의해 나타난다는 현대사진술의 기초원리를 확인하게 되었다. 잠상에서 현상처리에 의해 선명한 영상을 얻을 수 있는 프로세스의 발견은 니엡스가 고민하던 장시간노출의 결점을 해결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종래 수시간이 걸렸던 노출은 20분 내지 30분정도로 단축되었으며 옥화은 대신에 추화은을 사용하므로 해서 노출은 1분에서 5분정도로 단축되었다. 또한 다게르는 이 프로세스가 최종적으로 영상이 일광에 쪼여지면 광선에 의해 상이 일광에 쪼여지면 광선에 의해 상이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식염의 포화용액으로 영상을 보호하는 방법도 발견했다. 이것은 지금의 정착방법으로 다게르는 현상과 정착이라는 두가지 사진술의 기초원리를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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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라이카 N228 24×36mm형이다.(왼쪽) 마이크로 스파이카메라. 크기는 4.5×6mm(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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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엡스가 역사상 최초의 사진을 만들어낸 Dumaine De Gras의 자택. 문제의 2층 창문이 열려져 있다.

다게르가 현상에서 정착까지의 프로세스를 완성하여 아름다운 영상을 영구적으로 고정하는데 성공한 것은 1837년이었다. 다게르는 자신의 스튜디오의 일각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예술가의 스튜디오’라고 제목이 붙어지고 다게레오 타입의 싸인과 1837년의 년호가 기입되어 있으며 현재 피리의 프랑스사진협회에 소장되어 있다.
다게르가 다게레오 타입을 완성했을 때 니세포르 니엡스는 벌써 4년전에 사망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니세포르를 대신해서 아들인 이시돌에게 인계되었기 때문에 10년간의 기한부계약은 파기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게르는 아들 이시돌을 감언이설로 계약의 일부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개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사진술의 발명은 디세포르와 다게르의 약속으로 두 사람의 공동연구의 성과이기 때문에 완성의 공로는 당연히 두 사람이 똑같이 차지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게르는 일방적으로 다게레오 타입으로 공표했던 것이다.
당시 파리의 천문대장이며 저명한 물리학자인 아라고박사는 다게레오 타입의 발명의의와 그 성능을 인정하고 1839년 1월7일 과학 학사원에서 다게르의 사진술 발명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아라고박사는 프랑스정부에게 사진술 발명의 권리를 매수하도록 권장했다.
1월 14일에는 다게르와 이시돌 니엡스의 두사람과 당시의 내무장관 듀카딜과의 사이에 가계약이 체결되었다.
그해 6월15일에는 다게르와 니엡스의 아들은 이 발명을 정부에 양도하고 그 댓가로 다게르는 종신연금 6천프랑, 니엡스의 아들에게는 동일하게 4천프랑이 지급되게 하고 두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망인이 각기 그 반액의 연금을 받을 수 있게하는 내용의 법안이 기초되어 의회에 회부되었다. 이 법안은 프랑스 하원을 7월 3일 통과하고 7월30일에는 상원을 통과했다. 특히 아라고박사는 7월3일 하원에서의 강연에서 다게레오 타입의 특질과 효용성을 역설했다. 사진의 장래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정확한 기록성, 신속성 그리고 진실성이라는 점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효용성을 예건한 사실은 높이 평가된다.
법안이 상하양원을 통과한 1839년 8월19일 아라고박사는 과학학사원에서의 과학아카데미와 미술아카데미 합동집회 석상에서 다게르타입의 기술적인 요소를 상세히 설명, 발표하였다. 이 과학학사원에서의 아라고박사의 공식발표는 바로 사진술의 발명선언으로 인정되고 따라서 8월19일을 사진술 발명의 날로 기념하여 전해지고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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