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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약정 토서판 : 족장들은 상속자가 없어 노예를 양자로 삼아야 할 사람들에 대한 규정을 만들었다(창15:20이하). 초기 고대 근동지방의 이러한 관습은 이 사진의 고대 바벨론 약정서에 잘 설명되어 있다. BC 1500년경 작품으로 폭 55mm이며 라르사에서 출토되었다.
성경은 옛 원전이요 하나의 역사적 기록이다. 그런만큼 기록된 당시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비추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아주 바람직하고 또 많은 도움이 된다.
이같이 하는 데에는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기독교의 믿음은 역사적 사건들, 곧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에 의존한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고 설명된 사건들은 그 밖의 역사 자료드에서 알려진 사건들과 나란히 비교될 수가 있다. 성경 자체는 다른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되었고 또 역사적으로 입증될 수가 있다.
성경의 정확성 확인
성경의 정확성 역시 알려진 다른 자료들과 대조하여 확인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언제나 겉보기처럼 단순한 일은 아니다. 문헌들은 자주 손상을 입거나 미완성의 상태로 남는다. 고고학적 증거는 여러 경우들에 있어서 한 가지 이상의 해석이 얼마든지 가능하다.우리는 성경이 서술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사건들을 서술하는 고문서들을 별로 갖고 있지 못하다.또 어느 경우에서나 두 관찰자 혹은 저작자가 동일한 사건을 같은 관점에서 서술하는 일이 거의 없다.히브리인들은 비교적 보잘것 없는 백성이었다. 그들의 경력은 우리가 갖고 있는 기록들에 소개된 주요국가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의 후기 왕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성경의 인물들 중에 다른 문서들에 나타난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비교할 수 있는 곳에서는 성경 저작자들의 정확성이 여실히 입증된다. 비록 동일 사건들에 관한 병행기사들을 찾아내기는 극히 힘들다 할지라도 우리는 자주 구약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직접 관련은 되어 있지 아니하되 아주 비슷한 관습과 사건들의 예들은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표면적인 유사성을 그르칠 우려가 있으므로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고대 근동에 관한 지식은 도움이 될 수가 있다. 그것이 성경 역사의 정확성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나 간접적인 혹은 상황적인 증거를 제공하여 주지 않고 있을 때에라도 그러하다. 이스라엘의 이웃나라 관습,문화,문헌,역사 등에 관한 연구는 우리에게 히브리 민족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바에 대한 개념을 제공하여 준다.
직접적 증거와 간접적 혹은 상황적 증거 그리고 유추의 증거, 이 세가지 형태의 증거들은 그것들이 성경에 어떻게 빛을 던져주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직접적 증거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드물다. 또 나온다 하더라도 단지 왕의 이름들에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가진 자료 중에는 B.C. 945-924년에 애굽을 통치한 시삭(왕상 14:25이하)의 침입에 관한 기록이 있다.테베스에 있는 그의 비문은 보존이 잘 되어 있지는 아니하나 팔레스타인에서 정복한 여러 성읍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팔레스타인에 원정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디글랏빌레셀 III세(B.C.745-727)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흥왕케하고 웃시야가 유다를 굳건히 한 몇 10년 동안에 약화되었던 바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앗수르의 통치권을 다시 공고히 쥐어 잡았다. 그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의 므나헴이 바친 조공의 목록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기록에서 호세아가 반역하여 베가를 쳐죽이고 대신 왕이 된 사건은 앗수르와 관련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왕하 15:19-2030).열왕기하 15:19(대상 5:26도 역시 보라)에서는 디글랏빌레셀이 불(PUL)로 불리우고 있다.그는 열왕기상하의 편판이 최종 완료된 시기로 믿어지는 B.C 6세기의 바벨론 역대기 편찬자에게 그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후에 사마리아에서의 앗수르 통치권은 유다를 속국으로 포함시켰는데 유다의 왕들은 애굽의 지원을 얻어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하고자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가 유다를 치러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그 앗수르왕은 수 많은 비문들에서 이 사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히스기야가 니느웨의 자기에게로 어떻게 조공을 보냈는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그 합계는 왕하 18:14이하와 근소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는 주장은 하고 있지 않다. 또 당연히 그는 그의 군대의 운명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다.솔로몬의 건축공사들에 관한 기사에서 열왕기상 9:15은 예루살렘 이외에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 이 세 성읍을 언급하고 있다. 각 성읍의 유적지를 발굴한 결과는 모두 다 B.C. 10세기경에 동일한 형태로 건축된 성벽들을 갖고 있음을 밝혀주었다. 각 성읍의 성벽은 거대한 성문을 갖고 있는데 전부 그 설계와 규모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여기서 또한 모든 것을 설계감독한 중앙집권적인 권세자에 대한 물리적인 흔적들을 발견한다. 실로 솔로몬의 영화는 외견상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과 관련된 옛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점점 더 신빙성을 갖게 된다.
간접적 혹은 상황적 증거
고고학과 성경에 관한 책들의 특색을 이루고 있는 발견자료들 중 대부분이 간접적 혹은 증거의 부류에 들어간다. 이 증거들은 성경의 사건들에 대하여 직접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아니하나 분명히 성경의 구절들과 비교해볼 수 있는 관습이나 부수적 사건들의 본보기들을 제공해준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는 사라가 무자하여 그 여종 하갈과 결혼하였다가 뒤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확증을 얻을 때까지 그 여종을 집에서 내어보내기를 거부한 사건이 당시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조항에 일치되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 족장들의 이름 역시 B.C. 2천년대에 사용된 일반적인 이들들과 일치가 되는데 지금은 수천편에 달하는 그 당시의 문헌들에서 여러 이름들이 알려져 있다.솔로몬 영화의 또 다른 일면이 애굽의 자료들에서 그 증거를 얻고 있다. 열왕기상 9:16에 의하면 그는 바로의 딸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2 내지 3세기 앞선 시대 곧 애굽의 전성기에는 애굽의 공주들이 왕궁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또 외국의 유력한 왕이 그 중 하나를 신부로 줄 것을 요청할 때에도거절하였다. 그런데 B.C 10세기 영화가 기울어진 21왕조와 그 후계자의 치하에서는 이 규례가 파기되었다. 그래서 솔로몬이 바로의 딸과 결혼할 수가 있었다.
솔로몬 시대 얼마 전에 영웅적인 사사 기드온은 숙곳에서 한 소년-분명히 쉽게 붙잡을 수 있고 또 이용가치가 있는 소년이었을 것이다.-을 데려다가 숙곳 방백과 장로 77인의 이름을 기록하도록 했다(삿 8:14). 그 당시에 이름들을 쉽게 기록하고 또 알아볼 수 있었음이 베들레헴 근처와 그 밖의 자옷들에서 발견된 구리 화살촉에 그 소유자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 사실에 의해서 방증되고 있는데 그 구리 화살촉들은 B.C. 12세기와 11세기의 것들로 추정된다.
유추의 증거
우리가 구약성경을 떠나서는 히브리인들의 옛 생활과 사상과 역사에 관한 기록을 실제로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생활의 여러 국면들이 도무지 알려질 수가 거의 없었음을 뜻한다. 일반적인 쇠망의 과정들은 가죽종이나 파피루스에 기록한 문헌들을 다 파괴하여 팔레스타인의 성읍들에 가구와 의복들과 함께 땅에 묻어 버렸다. 그러한 품목들이 이웃 문화권에 보존되어 있는 경우에는 때때로 그 유사한 용법을 옛 이스라엘에게도 적용시킬 수가 있다. 각 경우에 있어서 그 상황이 실제로 병행되는지 철저히 살펴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우리가 구약성경을 판별하는 일에 분명히 도움을 주고 있다.이스라엘의 성읍들에는 아무런 문헌도 보존되어 있지 않으나 실제로 존재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비록 학자들간에는 그 기록된 형식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일고 있을지라도 구약성경 자체는 그것을 증거한다. 애굽과 바벨론에서는 기록체계가 매우 복잡하였으므로 문헌을 남기는 일은 서기관들에게만 국한되었다. 이스라엘(또한 인접 국가들)에서는 단순한 22자의 알파벳트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배울 수가 있었으므로 기록을 남기는 일이 일반 대중에 보다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전문적인 서기관들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여러 소규모의 기록된 문헌들에서 얻어낸 증거는 옛 이스라엘의 이같은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만일 기록을 남기는 일이 생활화 되었다면 그것이 문학적인 작품에도 역시 이용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기록된 말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다. 가치가 있는 옛 책들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그 책들은 재구성되거나 편집될 수도 있으나 이것이 어떤 방법으로 되었는지는 보다 오래된 사본들이 보존되어 있을 경우에라도 대조를 통해서 밝혀낼 수가 있다.
애굽인과 앗수르인,바벨론인,헷인,그리고 가나안인들은 다 잘 다듬어진 종교의식들과 제사제도와 성직자 제도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신전들은 특히 훌륭한 왕들에 의해서 아름답게 건축되고 호화롭게 장식되었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 점에서 달랐더라면 그들은 예외자들이었을 것이나 실상 그렇지는 않았다. 이같은 유추들은 회막과 솔로몬의 성전과 레위기의 규례들이 이스라엘의 대응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더우기 이웃 민족들의 경우에서와 같이 백성의 집단이, 왕이 요구되는 장엄한 수준에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서 수고와 고생을 담당하였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서로 연관된 민족들 가운데 한 민족으로서 유사한 사고와 표현방식들을 함께 나누고 있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바벨론이나 애굽의 문헌이 현대의 사고방식과 다른 특징들을 보여줄 때 우리는 그것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는다. 곧 우리의 유일한 정보자료가 되는 본문의 정확성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붙일치점들과 역설들과 외견상의 모순점들을 설명하려면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확고한 객관적 이유들이 제시되고 있지 않을 때 그러하다. 이스라엘의 문헌도 ㅇㅎ사한 익살들을 포함하고 있을 수가 있다.그러한 경우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만 한다. 어떤 것들, 예를 들면 연대적 순서가 틀린 사건들에 관한 기사나 문맥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없이 수집해 놓은 목록들은 확실히 가려낼 수가 있다.
유사점과 차이점들
무릇 성경의 배경을 제공하여 주는 고대 근동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여 적용하는 일의 가치를 보여주는 데에는 이상의 예들로 족할 것이다. 직접적 증거와 직접적 증거는 구약성경과 아주 일치하므로 그것은 실로 매우 의심스러웠던 이스라엘의 문화와 경력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하여준다. 어떤 발견자려도 히브리어 기록들과 모순점을 제기하지 아니하였다. 모순점들과 불확실성과 해결되지 아니한 문제들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의 모든 증거의 불완전성은 이것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다. 새로운 발견자료들은 옛 문제들을 해결해주었고 또 자주 현대적인 이론들의 거짓된 전제들을 밝혀주었다. 이와 동시에 그 자료들은 새로운 문제들을 불러 일으켰고 또 보다 깊은 연구와 새로운 시도와 더 나은 이해를 증진시켰다.이스라엘과 그 이웃 나라들 사이의 유사점들이 성경 고고학이 이룬 큰 업적의 결과로 밝혀진 것이라면 그 차이점들 또한 주목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과 그 이웃 나라들 사이의 연결될 수 없는 간격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언어와 문화는 큰 몫을 함께 나누고 있으나 이스라엘의 신앙만큼은 전혀 독자적인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과 우상없는 예배와 한 곳에 집중된 제사에 관한 자료를 추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웃 나라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그들 자신의 신(모압의 그모스나 암몬의 밀곰)과 같이 한 민족의 신으로 간주하였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특이한 위치를 알지 못하였기 땜누이다. 더욱 복잡하게도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신앙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적이 없었던 만큼 이교 신앙의 대상들이 이스라엘 성읍들의 잔재에서 발견될 수가 있다.
성경의 가르침을 그 당시의 문헌들과 비교하여 보면 차이점들이 가장 잘 드러난다. 십계명의 절대적인 명령들과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 공동책임을 지게 만드는 개개인의 평등사상, 선지자들의 이타주의 등, 이 모든 것들과 그 밖의 사실들에 있어서는 구약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그 진정한 반향을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은 그것들이 신빙성을 갖지 못한 것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2000년 이상의 역사를 보종하여 주는 바 지금까지 보존되어온 사본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처럼 오래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현대인에게 의미있는 말씀을 하고 있다.
만일 그 역사와 문학적인 국면들이 옛 시대에 관한 우리의 지식과 일치가 된다면 사실 그 윤리적이며 신앙적인 차이점들은 설명을 요하게 될 것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이 한마디로 일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