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의 의미


"샬롬"이라는 말에는 "안녕"이라는 뜻을 포함하여 다섯가지의 뜻이 있다.

 

첫번째로 샬롬은 평화라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외부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으로 나자신이 살고 있는 가정과 사회와 나라가 언제나 평화롭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 평화를 위하여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디모데에게 권면 하였다. (딤전2:1-2)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다른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경건 생활이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두번째로 샬롬은 평강이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내면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비록 외부적인 요인이 여의치 못하여 평화롭지 못하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나의 마음을 붙잡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의 내면적인 평강을 이루는 것이다.


평강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강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14:27)는 말씀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내적 평강을 말하는 것이다.

 

세번째로 샬롬은 정의를 의미한다.


나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불의로 충만한 곳이 아니라 정의가 충만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5:24)


오늘날 처럼 불의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이 말을 간절히 원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만큼은 하나님의 공의가 바로 서도록 해야 한다.

 

네번째로 샬롬은 질서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가정과 사회는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의 질서가 흐려져 가고 있으며 사회에서는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들 간의 질서가 무너져 내린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질서의 문제는 서로의 위치를 구별 해 주는 문제이지 결코 서로를 차별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로에서 교통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운전자가 질서를 지키지 않아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정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질서의 문제와 많이 연관 되어 있기 때문에 질서가 바로 잡히지 못할 때 항상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섯번째로 샬롬은 조화라는 뜻이있다.


이것은 서로 대립되거나 상충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과 결핍을 채워 줌으로 전체적인 측면에서 온전함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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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이란?


요즈음 교회에서는 "샬롬"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아멘, 할렐루야 등의 단어와 함께 우리말처럼 흔하게 쓰이는 히브리어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샬롬"이란 단어는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샬롬"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상호명과 홍보물도 종종 보게 된다.

"샬롬"은 평안, 평강, 평화라고 번역되어지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 자연스럽게 나누는 인사말이기도 하다. (삼상25:6, 대상12:8) 

"샬롬"은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번역되어지는데, "에이레네"의 경우도 샬롬과 같이 인사말로도 사용되었다.(10:5-6, 24:36, 살전1:1, 벧전1:2, 5:1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10:5-6)

 

특히 "샬롬"이라는 단어가 구약의 제사장들이 축복을 빌어주는 기도문에 사용되었듯이, "에이레네" 역시 하나님이 교회에 주시는 평안을 기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고전1:3, 고후1:2, 1:3, 벧후 1:2,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3)

 

1. 샬롬의 어원적 의미 구약에서 평안, 평강, 평화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샬롬"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 개념의 단어이다.


그런 점에서 구약성서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은 "샬롬"25가지 이상의 다양한 의미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본래 히브리어 "샬롬"의 어원적 의미는 "완전하다, 온전하다, 꽉 찼다"(be sound, complete, full)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히브리어 명사의 본래적 어원은 주로 동사에서 온다는 점을 고려할 때, 샬롬과 연관된 동사,"실람"은 샬롬이라는 단어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실람"이라는 동사의 의미는 "지불하다, 빚을 갚다"는 뜻이다 

"물건의 값을 지불하다" 혹은 "빚을 갚다"는 것은 물건을 사고 나서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빚을 지고 있는 상태와 같다.


물건의 값을 지불하는 "실람"의 행위가 있으므로, 비로소 그 물건은 완전하게 나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물건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 곧 샬롬, 완전함의 개념인데, 신약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개념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실람"이라는 동사는 "지불하다" 혹은 "빚을 갚는다"는 뜻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긍정적으로는 "만족시키다"이지만, 부정적으로는 "복수하다, 보응하다"는 뜻이 된다. (삼상 24:19)에서 사울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갚다"는 동사가 "실람"이다.


그런가하면 (신명기 32:41)에 언급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에서 "보응하다"가 곧 "실람"이라는 동사이다.

 

이러한 어원적 의미에서 보면, 샬롬은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한 상태 혹은 삶"이 된다. 즉 샬롬이란 단어를 한글로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으로 볼 때에 완전한 이상적 충족상태>라고 보면 거의 접근한 개념이 되어질 것이다.

 

2. 샬롬의 성서적 의미


1) 구약성서에서 샬롬은 "무사함, 외적이고 내적인 번영"을 의미한다. (18:23; 왕상 4:25) 또한 샬롬은 관계의 개념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의 좋은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하였다. (왕상 5:12)

 

2) 개인적 차원에서의 샬롬과 공동체 안에서의 샬롬은 개인이나 사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에게 주어진 가능성이 아니라, 절대자에게서 받는 일종의 선물이다.(29:11; 26:12; 45:7; 48:18)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께서 친구나 이웃에게 샬롬을 주시기를 기원하였다.(125:5; 128:6)

 

제사장들은 예배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회중을 위하여 하나님의 평강이 선물로 주어지기를 축원하였다. (6:24-26)


예루살렘이라는 단어에서도 "살렘"이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살렘"은 평강이라는 의미도 되지만 평강을 주는 하나님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한 신적 명칭은 멜기세덱이 왕으로 있었던 "살렘" 도시와 연관된다.

 

3) 성서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샬롬적인 관계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 파괴되었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파괴된 평화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성경의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회복된 평화는 하나님의 용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샬롬과 용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119:165)

 

하나님의 평화는 단순히 인간과의 회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동식물을 포함한다. 성경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참다운 샬롬은, 개인적 차원의 평안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공동체의 샬롬 곧 공동체의 평안과 안녕, 더 나아가 창조질서의 보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4) 샬롬의 네번째 요소는 내세에 대한 넘쳐흐르는 종말론적인 소망이다.

시편 23편의 마지막 부분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게 되면 곧 하나님 나라로 영접을 받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는 확신을 노래하고 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적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23:5-6)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72:7)

종말적으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으며(48:22, 59:8) 패망에 이르게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59:8)

"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7:25)

 

신약시대의 교회는, 구약성서 및 당시의 유대교에 있어서 종말론적으로 소망되어 있던 "샬롬", 즉 하나님의 구원으로서의 참된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될 것을 인식 또는 체득하고, 그것을 헬라어 "에이레네"라는 말을 써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3. 개인적과 공동체적인 차원의 샬롬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인적 차원의 샬롬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의 샬롬을 추구하였다. 성경에서 개인은 단독자로서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온전한 샬롬이 있다하더라도 공동체가 만족하는 샬롬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샬롬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공동체의 샬롬 곧 공동체의 온전함이란 무엇인가? 공동체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소외되거나 빈 부분이 없어야 함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최종적인 관심은 이스라엘 전체였다. 아무리 개인이 뛰어난 신앙과 영성을 지녔다하여도 결국은 전체 이스라엘의 신앙과 영성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결정하였다.


개인적인 샬롬과 공동체적 샬롬을 동시에 보여주는 성경 내용은 누가복음 15장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의 비유가 소개되어 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이다.

이 비유의 초점은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와 집나간 아들을 찾았다는 즐거움에 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간절히 찾으신다는 것이다.

잃은 것을 찾으시면 아버지 하나님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큰 잔치를 배설할 만큼 기뻐하신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비유에서 발견하게 되는 공통점은 모두가 복수(보응)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된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100마리 양들 중의 하나였으며,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10개 드라크마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집을 나간 아들은 두 아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 점에서 이들 잃어버린 양이나 드라크마나 아들을 되찾는다는 것은 전체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남아있는 99의 양이나 9개의 드라크마, 그리고 집에 있던 큰아들은 모두가 불완전한 샬롬이었다.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올 때 비로소 남아있던 자들도 참 샬롬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마지막 부분은 동생을 영접하지 않는 큰아들의 불평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큰아들의 이러한 모습은 무엇이 참 공동체의 샬롬인가를 가르치는 교훈이기도 하다.

     

4.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스도께서 가져온 것은 "평화의 복음"(10:36, 6:15, 14:27)이고, 참된 평화를 확립하는 "평화의 도"이다.(3:17,19:42)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17-18)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19:42)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정한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과의 적대관계에서 화해로 인도되고, 동시에, 그것에 기초하여 하나님과의 사이뿐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평화도 주어진 것이다.(5:1-11, 고전14:33, 1:20, 2:14-17, 3:18)

 

그리스도가 실현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불리우는 당시의 로마제국의 지배체제하에 있어서의 평화(24:3) 같은 외양의 평화의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고, 특정의 삶들 및 민족이 억압되고 있는 곳에 참된 평화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샬롬의 파생어인 동사 "실람"이라는 단어가 "지불하다, 빛을 청산하다"는 뜻이라고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즉 그와 같이 물건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 곧 샬롬, 완전함의 개념인데, 신약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단어의 개념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즉 진정한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왕성되어진 것이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라고 예언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샬롬)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9:6)


특히 구약에서 샬롬의 왕, 평강의 왕인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7:2)  

예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왔노라"(10:34)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기초한 평화가 참된 평화라는 것을 실현하기 위한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신앙이 배제된 평화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포함된 평화의 카테고리와 다르며 장차 상호 대립되어질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반드시 하나님의 신앙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진정한 평화가 되어진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하며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를 올바르게 보전 유지하는데 있어서만이 진정한 평화가 현실화 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종말론적인 평안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바울도 주 그리스도에의 신앙에 기초한 종말론적인 평안을 외면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경고를 말하고 있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


바울을 비롯한 신약시대의 사도들의 성경적인 가르침은 평화를 추구하는 일과 또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사는 종말론적 소망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14)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약속에 따라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성도들에게 온전하게 거룩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는 우리가 주 앞에 나타나게 되는 종말적인 현상을 "평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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