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선교 사상과 한국 교회의 선교 연구

 

 

I. 선교활동



교회사의 연속선상에서 한국 교회는 개신교의 탄생을 가져 왔던 종교 개혁의 정신과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교회의 열매가 있다면 이것은 종교 개혁의 씨앗의 소산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한국 선교 정보 센터의 통계에 의하면, 1994년 6월말 기준으로 한국 교회는 113개 선교 단체 (78개 선교사 파송 단체)를 통해 세계 119개국에 3,272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이것은 1979년 한국 선교사 현황을 넬슨 선교사가 처음 조사할 당시의 93명에 비해 15년 동안 35.2배라는 놀라운 성장 속도를 기록한 것이다. 이 숫자는 또한 1980년대보다는 다소 안정적인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1990년대에도 여전히 높은 비율로 한국 선교사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음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 교회의 선교를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이와는 반대로 종교 개혁가들에게 선교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19세기 독일 사람으로서 근대 선교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구스타프 바넥(Gustav Warneck)은, 그의 유명한 명저인 복음 주의적 선교와 개신교 선교의 역사 라는 책에서 개신교의 시조였던 개혁가들이 선교 신학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세대주의 선교 신학자로 알려진 조지 피터즈도 동일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데 그는 특히 장로 교회의 칼빈주의에 입각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의 예정 교리가 선교 신학을 결여케 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학자들의 주장대로 과연 종교 개혁가들에게 선교 사상이 결여되었는가 ? 필자는 종교 개혁가들 중에서 특히 칼빈을 중심으로 그의 선교 사상과 활동을 찾아보고, 또한 이러한 종교 개혁의 후예로서의 한국 교회 선교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칼빈의 선교 사상과 활동을 통하여 그 문제점과 올바른 전략을 모색하고자 한다.


 


II. 종교 개혁의 선교사적 의의



종교 개혁가들에게 선교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선교 활동이 미약했다는 것은 부인치 못할 사실이다. 실상 종교 개혁 이후 1700년 초까지 개신교는 세계 선교의 주도권을 로마 카톨릭에 완전히 내어 준 채 세계 선교의 관심과 노력을 별로 갖지 못하였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의 원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기반을 다진 긍정적 측면에서의 의의를 찾아 볼 수 있다.


 


1. 부정적인 요소


1) 로마 카톨릭과의 생존 투쟁
당시 개혁자들의 관심은 교회의 개혁에 집중되었으므로 세계 선교는 그들의 당면 과제로 고려되지 않았다. 선교보다는 생존이 그들의 당면 과제였다.
종교 개혁기의 프로테스탄트 세계는 선교에 대하여 생각할 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648년까지 프로테스탄트는 그들의 생존을 위하여 싸워야 했다. 그해에 베스트팔렌 조약 (Peace of Westp)이 체결되고서야 프로테스탄트의 생존이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1685년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기함으로 말미암아 신교도들의 생존은 다시 위태로워졌다.


2) 개신교 내의 교리적 분열
개신교 내에서 서로 교리적인 이견으로 협력 관계를 갖추지 못한 것이 또한 선교에 바른 관심을 갖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로마 카톨릭 군사 동맹에 대비하여 신교의 영주들도 신교 동맹군을 결성하고 신교도간의 성례관에 관한 이견 조정을 위하여 1529년 말부르그에서 루터 파와 스위스의 개혁파 신학자들의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개신교 지도자 루터와 쯔빙글리는 15개 조항의 토의에서 14개 조항까지는 합의했으나 15번째 조항 곧 성찬의 그리스도 임재관에 대한 견해 조절에 실패함으로 회의는 결렬되었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서로 뭉쳐 신학적인 차이를 없앨 수 있는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어디에서나 명예스럽기는 하지만 맹목적이고 무모한 열성을 가지고 끝없이, 완고한 루터파 대 필립주의자, 루터파 대 개혁교회, 예정설의 칼빈파 대 알미니안파, 앵글리안 대 청교도파 독립파 등으로 분열하여 논쟁을 일삼으므로 그들의 정력을 낭비하였다.


3) 선교 기관 (Sodality)의 부재
기독교 확장사를 썼던 라투레트(Latourette)는 종교 개혁 운동에 있어 선교의 결여를 지적하면서 그 원인을 수도원 기구와 같은 반 자율적인 선교 단체를 개혁가들이 부정한데 있다고 본다.
로마 카톨릭 진영에서는 이미 존재하던 프랜시스 및 도미니크 수도단 등의 수도 단들이 자체 개혁을 통하여 선교에 더욱 치중하게 되었다. 더욱이 새로이 11540년에는 파리에서 익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서 예수회 가 설립되어 군대 조직적 체제와 규율을 가지고 엄격한 훈련과 상관에 대한 철저한 복종과 독신 생활과 가난한 삶을 다짐한 수도사들을 통하여 선교지를 널리 확산해 나갔다.


4) 지리적 제한
당시의 외적 환경은 더욱 선교의 장애 요인이 되었다. 16세기 상황에서의 개신교의 세력은 아직 영아기에 불과한 반면 구교의 세력은 1,000년의 종교 정치적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개신교의 세력은 유럽 이외의 더 광대한 세계와의 접촉을 갖고 있지 못했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은 해양로를 완전 장악하여 정치상의 제국주의와 병행하는 일종의 종교상의 제국주의를 수립하고 있었다. 독일인들의 활동은 대부분 국내에서 제한되어 있었다.
주어진 지리상의 테두리 안에서 완전히 폐쇄된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상으로 살펴볼 때 종교 개혁자들의 내적, 외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인한 선교의 부정적인 요소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종교 개혁자들의 선교 의지나 사상이 결여되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2. 긍정적인 요소


1) 교회 개혁을 통한 선교 초석
앞에서 여러 학자들이 종교 개혁자들은 선교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일단 외관상으로 수긍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는 종교 개혁자들을 비롯하여 칼빈이야말로 진정한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유명한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는 "한 제국을 복음화하는 일보다 더 어렵고, 부흥시키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타락된 교회를 개혁하는 일이다."라고 토로했다. 교회의 올바른 개혁과 갱생 없이는 진정한 교회 부흥이나 선교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도와 선교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곧 대내적인 전도와 선교요, 또 내외적인 전도와 선교가 그것이다. 그리고 대내적인 전도와 선교가 대외적인 전도와 선교보다 우선적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종교 개혁자들과 칼빈이 전도와 선교에 무관심한 것처럼 교회 개척에 전심하여 확고 부동한 대외적인 전도와 선교의 기초 공사를 한 질적인 선교를 하였기 때문이다.


2) 성경 번역과 문서 전파
종교 개혁자들의 성경 번역과 저술을 통한 문서의 전파는 15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발전인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일반 대중에게 사상 전파의 중요한 수단이었고 선교의 좋은 토대가 되었다.
한 세기 전의 독자들과는 다른 유형의 훈련을 받은 새로운 독자층이 이제는 다른 용어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사상을 식별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신속하고 저렴한 서적 제작으로 인해 새로운 사상이 좀더 용이하게 전파될 수 있었고 지금까지는 그런 일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회 계층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비록 수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읽을 기회를 가졌고, 그로써 자신들의 교육의 필요성 뿐 아니라 책에 담긴 사상을 받아들이고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특히 존 칼빈의 가르침을 포함하는 개신교 개혁자들의 가르침의 전파의 토대였던 것이다.
모든 교리상의 결정에 있어서 의지해야 하는 것은 원문으로 기록된 성경이다. 라틴어 불가타 성경은 스위스 신학에서는 아무런 지위도 갖지 못하였다. 원칙상 셩경지식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했지만, 그들 중 소수만이 원어성경을 읽을 수 있었으므로 루터의 개혁 운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스위스 개혁자들 중에서도 신구약 성경을 자국어로 학문적으로 손색없게 번역하려는 열의가 일어났다. 이를 위한 노고는 루터의 독어역 신약 성경과 모세오경을 이용하게 되어 경감되었다. 쯔빙글리 자신도 이 일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완전한 "쮜리히 성경"은 1529년 출판되었고, 프로샤워에 의해 산뜻한 인쇄본이 1530년, 1536년 출판되었다. 쮜리히역본은 학구적으로는 우수했으나 문체에 있어서는 그리 호평받지 못하였다. 성경이 자국어로 널리 익혔다는 것은 평신도의 신앙을 강화하고 종교개혁을 고수하게 하는데 무한한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종교 개혁가들의 교회 개혁 운동과 성경의 번역과 문서의 전파 활동 등은 당대는 물론 후대의 선교 운동에 영향을 끼치는 점에서 개신교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고 하겠다.



III. 칼빈의 선교 사상



칼빈의 선교 사상은 그의 기독교 강요와 성경 주석 그리고 실제 선교 활동 등에서 두루 살펴 볼 수 있다.


 


1.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선교 사상
칼빈은 단지 학자들만을 위해 저술하지 않았고 그의 저서들도 단순한 학술서가 아니었다. 그는 사상은 행동을 낳아야 한다고 믿는 실제적인 사람이었다.
기독교 강요에서도 그의 이러한 면들을 엿볼 수 있다. 기독교 강요의 저술 목적과 문제시되는 예정론에 대해 범위를 좁혀서 살피고자 한다.


1) 기독교 강요의 저술 목적에 나타난 선교 사상
칼빈은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잔인한 박해를 받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볼 수 없어서 저들을 변호하기 위해 조용한 바젤 시에서 붓을 들기 시작한 것이 기독교 사상 가장 유명한 기독교 강요 가 되었다. 그의 나이 26세 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책이 23년 동안 끊임없이 칼빈에 의해서 개정되어 방대한 저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사상의 내용에 있어서도 1536년 제 1판과 1559년의 결정판 사이에 조금도 중대한 차이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1559년판 기독교 강요 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제 1편의 제목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지식에 대하여"이며, 자연계, 성경,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된다는 것, 우상과 하나님과의 구별, 삼위일체 하나님, 악의 존재는 하나님의 의를 훼손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제 2편은 "구속 주이신 하나님 지식에 대하여" 이며 여기서 그리스도를 논한다. 제 3편에서는 성령을 논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는 수단" 곧 신앙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제 4편에서는 교회를 논한다.
칼빈은 1559년 서두나 그의 불어 판 서두에서 그의 기독교 강요를 쓰는 목적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성경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둘째는 그 내용을 무슨 목적에 연계시켜야 하는 가이다.


"본서에서 내가 목적한 것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가르쳐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접근하며 아무 장애 없이 그 안에서 진보하여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기독교 종교의 모든 부분을 총괄 개진하였고 또 그것을 적절한 순서로 배열하였으므로 누구든지 그것을 바르게 파악하기만 하면 성경 속에서 무엇을 특별히 찾아야 하며, 또한 그 내용을 어떤 목적에 연관시켜야 하는가를 결정짓는 데 어떠한 곤란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목적중 첫째는, 우리가 생명 속에서 주로 찾아야 하는 것은 창조주 되시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자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주시는 "복음의 말씀"을 주로 찾아야 하고, 둘째는 그 말씀을 부지런히 들어서 "우리의 구원"에 연결시켜야 한다. 또 아직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하여서 그들도 구원을 얻게 하는 일에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쓴 목적이라면, 칼빈의 신학이 철두철미 구원론적 성격을 가짐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저술 목적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믿어 구원을 받고, 또한 아직까지 구원을 받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씌어진 것으로 그의 선교 사상을 충분히 알 수 있다.


2) 예정론과 선교 사상
다음은 칼빈의 예정론은 과연 복음 전도를 약화시키는가?
칼빈은 그의 예정 선택론에 대한 반론들 즉, 올바르게 살려는 열의를 전적으로 말살, 그리고 모든 권고나 전도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첫째, 선택 교리는 올바르게 살려는 열의를 전적으로 말살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불 경건하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알 수 없는 비밀을 찾아 덮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목적은 이와 반대로 우리가 교만을 꺾고 항복하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떠는 동시에, 그의 자비를 존중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신자들이 목표를 삼는 것도 이것이다.
.... 바울은 우리가 선택된 목적에 대해서 그것은 우리가 거하고 흠없는 생활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엡 1:4). 만일 선택의 목표가 거룩한 생활에 본다면, 선택은 아무 선행도 하지 않는 구실을 우리에게 준다기보다, 도리어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생활에 집중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며 자극할 것이다. 구원을 얻기에는 선택으로만 충분하다고
해서 선행을 중지하는 것과 선택을 해 주신 목적인 선의 추구에 몸을 바치는 것, 이 두가지가 얼마나 서로 다른 가를 비교해 보라! 그리고 이런 신성 모독적 언행을 일소하라. 그것은 선택의 질서 전체를 뒤덮는 악한 행위이다.


또한 칼빈은 선택 교리는 모든 권고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반론에 대해,


....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를 계속하여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며, 그들을 믿음 안에서 보존하여 끊임없는 유익을 얻게 해야 한다. 그러나 예정에 대한 인식을 막지 말라. 그래야만 복종하는 자들도 자기의 힘으로 되는 일같이 자랑하지 않고 주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들을 귀를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가 권고하며 전도할 때에 그들을 기꺼이 순종하지만,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응한다 (사 6:9)
.... 어떤 진리를 우리가 말할 때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더 악해지고, 우 리가 침묵할 때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진리를 얻도록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 말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쪽도 진리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손해가 될 것이다. 그가 듣고 받아들인다면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배우게 될 수 있다.
....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도록 경건을 선포해야 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 해서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도록 이 예정론을 선포해야 한다.


선택의 결정은 비밀이다. 따라서 설교자에게 있어서, 회중 중에 누가 선택되고 누가 선택이 안 되었는지는 전연 계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설교자가 선택된 자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택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설교의 효과는 설교자의 손에는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설교자의 자유로는 안된다.
최후에 선택되지 않은 자에게도 설교를 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그 까닭은 이와 같이 그들은 제멋대로 범할 죄에서 그들을 억제하고 또 지도하는 감화력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따라서 칼빈의 예정론은 전도 사역을 약화시키거나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도의 적극적인 동기 부여와 촉진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성경 주석에 나타난 선교 사상


1) 주석에 나타난 선교 사상
기독교 강요를 현대적 의미의 조직 신학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독교 강요를 성경 연구의 안에서요, 성경에서 특별히 무엇을 찾아야 하며, 무슨 목적에 그 내용을 관련시켜야 하는지를 독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었다. 칼빈은 그의 성경들을 기독교 강요의 보충 서로 저술하였다.
고전학자인 스켈리거는 칼빈을 가리켜 " 사도 시대 이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혜자"라고 하였다. 칼빈 신학의 몇 가지 원리를 수정한 알미니우스까지도 칼빈의 주석을 성경 다음 가는 책이라고 추천하였다. 왜냐 하면 칼빈은 "성경 해석에서 다시 추종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 자체가 선교적 메시지이므로 칼빈의 주석 또한 자연스럽게 선교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① 이사야 53:22 -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칼빈의 이 구절의 주석에서,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초청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하나님은)지금까지 구원이 오직 유대인들에게 속한 것처럼 그들에게 말을 해 왔지만 그는 모든 세상 사람을 구원의 소망에로 초대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에 집착함으로써 고의적으로, 말하자면 생명의 빛을 회피한 모든 민족의 배은 망덕을 비난한다.
... 여기서 우리는 또한 구원을 얻는 참된 방법이 무엇인지를 상기하게 된다.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하고 우리의 마음을 전적으로 그에게 전향시키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제시된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믿음의 눈으로 그를 앙망해야만 한다.


② 말라기 4:2 -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이 부분의 주석에서 칼빈은 '나가서'에 강조 점을 두며 구원받은 자의 벅찬 기쁨과 감격을 통한 선교의 장의 확대를 바라보고 있다.


"나가서"라는 말에는 하나의 대조적인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이제까 염려에 사로잡혀 오랫동안 갇혀 있었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 갇혔던 상태에서 풀려나 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공공연히 선언하고 우리의 느낌을 마음껏 토로할 수 있는 넓은 장소를 구하게 되는 것이다.


③ 마태복음 24:14 -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기에서 칼빈은 본문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을 언급하며 세계 선교에 대한 강력한 촉구를 하고 있다.


... 하나님에게는 결코 '증인'이 없지 않았으며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증거를 주셨지만 그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계시는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손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에게 더 이상 희미한 그림자 속을 걷지 말 것을 엄숙하고 권위 있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겠다. 이것도 순종하지 않겠다는 자들에게는 더이상 아무런 핑계가 있을 수없다.
④ 사도행전 2:21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기 때문에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 우리들의 불 신앙 이외에는 우리가 거기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할 자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해 주신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부분의 주석에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사람일지라도 전도자의 복음 전파가 필요하며, 전도자의 전도하지 않는 불 신앙 외에는 어떠한 장애물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상의 몇 구절의 주석에서 살펴보았듯이 칼빈은 어느 누구보다도 뜨거운 선교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이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찰스 체니는 칼빈의 신학 속에 네가지 선교 사상이 담겨 있다고 한다.
첫째는 구약 성경 속에 이방인을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가 있으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나라(Regnum Cristi)가 점진적으로 전지구상에 확산된다는 사실이다. 세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를 수단으로 해서 교회를 전세계에 설립하게 한다는 것이며, 네째는 성도는 만인 제사장직 사명이 있어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파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자들의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사상은 모트나 스토트가 말하듯이 성경 자체가 선교의 메시지이기에 선교와 별개의 것일 수 없다.


 


3. 칼빈의 실제 선교 활동
칼빈의 마음 속에 베어 있는 선교에 대한 열정은 그의 생애 가운데서도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1) 브라질에 선교사 파송
1555년 브라질 가나바라(Ganabara)만 해안에 600여명의 프랑스 식민지 개척단이 상륙하고 개척 단원의 질서 유지와 교화를 목적으로 그 우두머리 콜리니가 제네바에 있는 칼빈에게 몇 명의 목회자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자, 칼빈은 거기에 주로 개혁 교도들로 구성된 프랑스 식민지를 설립하고 원주민의 기독교화를 추진한다는 계획을 승인하였다. 이런 목적으로 제네바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던 레리와 투명의 목사 리쉬에르와 기욤 샤르티야를 식민지로 파송했었던 사실이 있다.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콜리니의 브라질 원정에 두 선교사를 임명한 것은 로마 카톨릭 외에서 이 시기에 처음으로 시작한 유일한 선교였다.


2) 프랑스 복음화를 위한 선교 열정
칼빈의 가슴 속에는 항상 동족 프랑스인들이 떠나지 않고 자리잡고 있었다. 언젠가는 프랑스가 그가 꿈꾸는 바대로 진정한 기독교 국가로서 변모할 그날을 애타게 기다렸으며, 그날이 오기까지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양심을 따라 평화롭게 예배드릴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그는 제네바로부터 개혁 신앙에 의해 교육받고 이를 공감하는 선교사들을 수없이 파견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개혁 교회들을 봉사하도록 하였다.
프랑스 신교가 초기에는 에라스무스주의 및 신비주의적 경향, 독일로부터 침투해 온 루터란 복음주의와 거의 명백한 차이가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1550년대에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자기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고, 칼빈주의 서적들이 점차 널리 유포됨에 따라, 프랑스의 신교는 제네바의 양상을 닮아 가기 시작하였다. 신자들은 작은 그룹을 지어 개인 주택이나 헛간, 수풀이나 들에서, 동굴이나 또 다른 은신처 등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핵심 그룹들이 점차 대규모의 회중을 형성함에 따라 그들은 칼빈에게 목회자를 파송해 주도록 청원하였으며, 어떤 그룹은 규모가 하도 커져서 부목회자들까지도 부탁하는 경우가 있었다. 칼빈은 자기의 힘이 닿는 한도 안에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숫자를 파송하였다. 그들은 밤을 세워 여행하였으며, 다락방이나 굴뚝 뒤에 몰래 꾸며진 방 속에 은신하였으며, 비밀 루우트를 사용하여 잠입하였다. 이들은 오리벳탄의 프랑스어 성경,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시편, 기타 칼빈의 논문들을 소지하고 있었다.


3) 문서 선교
칼빈의 뜨거운 선교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것 중의 한 가지는 그의 서신들이다. 또한 칼빈은 서신을 통한 전도 방법을 사용하였다.
칼빈은 교황제의 본거지이던 이탈리아에 "복음을 전파"시키는 데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서신들을 보면 신비한 말씀의 능력에 의해 영주들을 개종시킴으로써 이탈리아를 복음화 시키고자 원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칼빈은 복음주의적 신앙에 동정적이거나 혹은 이미 이를 편든 시민들과 귀족들, 영주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서신들을 발송하였다. 나바르의 왕 안톤 (King Antoine of Navarre), 콩데의 왕자 (The prince of Conde), 콜리니 제독 (Admiral Coligny)등 유력 인사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젊은 목사들이나 순교자들에게도 편지를 썼으니, 이들 가운데에는 프랑스 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네바에서 가던 중 사로잡혀 순교 당할 날을 기다리고 있던 리용(Lyon)의 다섯 죄수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거절당한 이들은 없었다. 실업자가 직장을 구할 수 있도록, 양가집의 아이들에게 가정 교사를 추천하기 위해서, 학생들이 기숙 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가난한 자들이 구제 받을 수 있는 방도를 얻도록, 복음 전파자들이 항상 강건한 영혼을 소유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그는 편지를 보내었다. 그가 남긴 서신들만으로도 쉽게 35권의 책을 만들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칼빈의 열정은 그가 친구에게 고백한 말 가운데서 읽을 수 있다.


"낮에 해가 비치는 동안에는 창밖을 내달 볼 시간도 없다네. 만약 이대로 계속된다면,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릴 지경일세. 일상 업무를 다 마친 후에도 수많은 편지를 써야 하고, 수많은 문의에 답해야 하지. 이 때문에 잠을 거르는 밤이 너무도 많은 실정일세."


 


4. 칼빈이 선교에 끼친 영향
생명력이 있는 씨앗은 반드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
칼빈의 선교 열정의 씨앗은 후대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된다. 그의 영향력은 스위스, 불란서, 영국, 스코틀랜드, 화란, 독일 등지에 퍼져 나갔고 한 세기가 지나면서 이들 나라에 독특한 형태의 조직이 이루어지고 칼빈주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칼빈의 영향이 불란서에 들어가서는 휴그노를 만들었고, 영국에 들어가서는 청교도들을 만들었고, 스코틀랜드로 들어가서는 장로 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칼빈의 개혁 사상이 화란에 들어가서는 화란 개혁 교회를 만들었으며, 독일과 스위스에도 각각 개혁 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1620년에 영국의 청교도들이 그리고 1628년 화란 개혁 교회 성도들이 그리고 1700년대 전후해서 휴그노파들과 독일 개혁 교회 그리고 스코틀랜드 장로 교인들이 각각 미국 대륙으로 건너와서 그들 나름의 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이때의 성도들은 대개가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결국 미국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장로 교회는 교회 정치 체제로는 스코틀랜드에서 나왔고, 신학 사상으로는 칼빈과 그의 동지 개혁자들에 의해서 형성된 칼빈주의적 신학이 유럽 대륙에서 머물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서 200년 동안 시련을 겪다가 칼빈주의 신학의 부흥기에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칼빈의 영향은 칼빈주의적 전통을 이어 받은 한국 장로 교회의 선교와 함께 지속될 것이고, 계속해서 선교의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IV. 한국 교회 선교의 문제점



1. 선교 정책의 부재
한국 교회는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선교에 박차를 가하여 바야흐로 선교 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 세계 기독교의 상황은 이제 서구 기독교의 시대는 서서히 사라지고 기독교의 중력이 제3세계로 이전하고 있으며, 제3세계 기독교 가운데서 한국 교회는 영적 자원, 물적 자원, 인적 자원을 확보한 나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과거 개신교 선교 역사를 고찰하면 19세기는 영국 교회가, 20세기는 미국 교회가 세계 신학과 선교를 주도하였다. 이제 다가오는 21세기는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의 주역을 감당해야 된다고 하고, 또한 가능성이 있다고 하나 사실상 한국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전호진 교수는 이러한 한국 교회의 문제점으로 몇 가지 이유를 지적하고 또한 우려를 표명한다. 그 이유는 언어에서 한국어는 국제적인 언어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 역사가 짧아 신학, 지도력, 선교 행정과 훈련, 선교 정보 등에서 아직은 너무나 어린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심각한 문제는 선교를 하려면 파송지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는 거품 부흥이라는 인상을 줄 정도로, 부흥이 너무 빨리 지나가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금치 못한다. 영적 자원이 고갈된 교회는 선교를 할 수 없다.
월간 목회의 편집 겸 발행인인 박종구는 한국 교회 세계 선교의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 퇴색해 가는 선교 헌신의 동기 - 지나친 경쟁 의식, 선교비 사용의 비효율성, 부실한 선교사 선교 훈련, 무자격 평신도 선교사 파송, 범람한 비합법 선교 활동
2. 선교 단체의 관리 능력 부재 - 선교 단체 난립, 불분명한 선교의 동기와 목적, 선교 정책 부재, 관리 능력 부족
3. 무분별한 사회 주의 국가에서의 선교 활동 - 대북 활동, 중국 선교, 러시아 선교, 동구권 선교
한국 선교 훈련원 (GMTC) 원장인 이태웅 박사는 한국 교회의 선교에서 긴박성과 내실성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 즉, 선교를 할 때 우리가 느긋한 마음으로 한다든지 항상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자세는 금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긴박성의 구실 아래 내실성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내실성을 기하기 위한 요소로 다음 세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최소 한도의 조직이나 지원 체제나 전문성을 갖추지도 않은 채 무조건 현지에 선교사만 보내어 숫자만 증가시키면 된다는 사고는 선교의 저해 요인이 된다. 교회와 선교 단체는 정직하게 본부 조직과 재정 및 선교사의 삶과 신앙을 위한 지원 체제를 갖추고 선교사를 파송해야 할 것이다. 이때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이렇게 하는 것이 결국 선교를 빨리 하는 길이 될 것이고, 긴박성에 부응하는 길이 될 것이다.
둘째로, 선교사의 준비가 급선무이다, 선교사의 준비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과 재정의 투자와 더불어 성의 있는 깎음이 요구된다.
세째로, 교회의 준비 태세이다. 아무리 바빠도 교회의 선교 의식 고취나 선교 참여 도가 선교사 파송과 함께 증진되어야 건전한 선교가 가능하다.
결국 위의 선교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할 때 한국 교회 선교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선교 정책과 전략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서정운 박사는 OMF의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아시아 출신 선교사들이 서구 선교사들보다 중도 탈락률이 상당히 높은 이유중 하나를 선교 정책의 부재로 보았다.


해외 선교 정책의 문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국 교회는 아직도 선교 정책이 불충분하다는 지적이다. 구체적인 규정도 갖추지 못하고 막연히 선교사를 발굴하고 또한 파송하고 사역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미에서 선교사와 파송하는 교회와는 건전한 계약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계약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구체적 규정이나 정책이 분명해야 한다.


선교 정책이란 선교 단체가 지향하는 선교 원리와 목적,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데 필요한 제반 규정들을 말한다. 좋은 선교 정책이란 성서적 원리의 바탕에 서야 하고, 오랜 역사 속에서 실험되었던 경험이 살아 있어야 하고, 오늘의 현실에서 문화권별 급변하는 상황이 전개되어야 하고, 종말론적 미래지향적인 비전이 제시되어야 한다. 따라서 좋은 선교 전략을 위와 같은 좋은 선교 정책의 줄기에서 뻗어 나오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한국 교회의 선교 정책과 전략의 부재 현상을 바라보며 칼빈의 선교 사상과 전략을 통하여 그 방안을 고찰하고자 한다.


 


V. 한국 교회 선교의 전략


 


1. 교회 개혁을 통한 선교 운동
루터나 칼빈이 처음부터 로마 교회의 울타리를 뛰쳐나오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로마 교회가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잘못되었고 병들었기에 성경으로 돌아가 병든 부분을 도려내고 갱생해야 되겠다는, 문자 그대로 교회 안에서의 개척 운동이었다. 그러나 저들의 소리가 당시 교권을 장악하고 있던 지도층에게 거부되어지고 오히려 교회에서 축출되었기에 개신 교회의 탄생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선교는 교회의 갱생 즉, 선교 역사 속에서 부흥으로 종종 연결되는 이것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국 교회의 초창기 선교 역사 속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찾아볼 수 있다. 1905년부터 길선주 장로를 중심으로 시작된 평양 장대현 교회의 새벽 기도 운동과 1900년부터 시작된 선교사들의 성경 공부 운동을 통한 지도자 양성이, 결국 1907년 장대현 교회에서 성경 공부 모임이 모였을 때 성령님의 쏟아 부워줌의 충만이 있게 했으며, 이것은 또한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의 폭발적인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를 바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내의 개혁이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신본주의 신앙을 확립해야 한다.
오늘에 와서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오염되고 퇴색해 가고 있다. 암담했던 역사의 질곡을 넘어서 생활의 풍요를 경험하면서, 물량주의가 고개를 들었고, 첨단화된 과학 문명의 혜택을 받으면서, 또 세상의 권력에 편승하여 맛본 관료주의, 그리고 대중의 인기가 하나님을 모셔야 할 자리를 점점 좁혀 오고 있다.


 


2. 지도자 양성을 통한 교육 선교
선교에 있어서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고 중요한 것은 인재 양성이다. 훌륭한 선교사 양성 없이 좋은 선교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지금 한국 교회의 많은 선교사들은 신학교 설립, 교회당 건축, 학교 건설, 병원 설립, 사회 사업 기관의 설립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파송 교회에 경제적 지원을 호소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돈을 주는 지혜와 방법의 부족으로 인하여 돈을 주고도 뺨을 맞는 수모를 당하며, 나아가 서구 교회와 제 3세계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한국 교회는 돈 선교 (money mission)를 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선교지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교회당 건물이나 기타 시설물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2차적이고 더 중요한 것은 원주민 사역자의 양성이다. 원주민 사역자가 없이 교회당 건물부터 세우는 것은 아이를 임신하기도 전에 기저귀부터 준비하는 것이다.
원주민 한 사람은 열 명의 선교사 보다 더 낫다는 것이 선교의 잠언이다. 따라서 선교의 성패는 얼마나 훌륭한 원주민 사역자를 양성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런 면에서 종교 개혁가들은 교육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칼빈의 경우에는 스위스의 제네바에 대학을 세움으로써 개혁의 불길을 유럽에 확산시키는 데 전략적인 역할을 하였다.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가 설립됨으로써 칼빈주의의 확장은 귀중한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었다. 대학부에서는 철학, 신학뿐만 아니라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등 인문주의적 과목들을 설치하고 있었다. 현재의 제네바 대학이 된 이 아카데미는 즉시 유럽 전역에서 여러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수학한 후 칼빈의 가르침을 지니고 자기들의 본국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칼빈의 교육 정책에 따라 그의 대학은 학문의 국제적인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교육 과정은 예수회에서도 본받을 정도였다.
현지 교회의 지도력 개발에 대한 교육 선교의 요청이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세계 2/3 지역 교회에서 날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가 현지의 어려운 교회들에게 교회 갱생의 측면에서 선교적 도움을 주는 것은 너무나도 시급하고 중차대한 선교 과업이다.
한편, 총신의 선교학 김성태 교수는 이런 교육 선교에 대한 몇 가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첫째는, 현지 교회의 요구를 무시한 한국 교회 단독의 일방 통행 적인 물량주의적 프로젝트 중심의 선교는 잘못하면 현지 교회의 외면을 받게 되고 또한 동기에 문제 있는 불순한 일꾼을 양성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현지 교회가 교육 선교의 프로젝트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고 지도력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선교사의 일방적인 교육 선교 추진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 교회와는 상관일 없는 일종의 교육 시설을 운영해 나가는 제도주의화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셋째는, 동일한 선교 지역에 각기 다른 교단이나 선교부의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이 엄청난 규모의 교육 선교 프로젝트를 구상하는데, 서로 유기적인 협력이나 의논 없이 독자적으로 선교 계획을 추진하는 데 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현존의 선교학자 들에게 교육 선교의 방법으로서 공식 교육(Formal education)과 더불어 비공식 교육 (Informal education)이나 준공식 교육 (Non-formal education)등이 강조되고 있다. 선교지에서 한국 선교사들이 신학교를 세워 공적 교육을 통해 현지 교회의 지도력을 세우는 것 이상으로 선교사 자신의 인격적이고 삶의 모범은 통한 참된 성경적 지도자 상을 배양하는 비공식적 혹은 준 공식적 교육 방법을 무시할 수 없다.


 


3. 교회 중심의 선교
라토레트 (Latourette)은 회중 정치 구조의 침례 교회 출신으로 교회 병행 선교 단체 (para-church mission agents)를 선교 역사에 있어서 부흥의 축으로 보았다. 즉 구속사의 핵심을 소수의 헌신되고 희생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가진 교회 내의 내면적 모임으로 보았는데 결국 이것은 랄프 윈터가 말하는 sodality이며 선교 단체이다. 이런 사상의 위험한 점은 역사적인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기 쉽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진 소수 사람들만을 구속의 중심으로 보는 적은 자의 모임이 참 모임이라는 그루터기 신학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가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침을 통해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를 전 지구상에 확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피에르 쇼뉘(Pierre Chaunu)의 지적처럼 교회 내의 개척 운동은 두 단계로 되어 있었다. 제 1단계는 복음 전파의 단계 였고, 제 2단계는 조직의 단계였다. 루터는 종교 개혁의 전도자였다. 더욱이 그는 접근 방식이 명백히 게르만 적이고 거의 케케묵었다 할만큼 보수적이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상충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교회 내에서 변경시키지 말라는 원리를 따랐다. 반면에 칼빈은 인문주의자와 법률가로 교육을 받았으므로 극히 탁월한 조직가가 되었다. 더욱이 신학과 교회 실천 분야에서 성서가 요구하지 않는 것을 고수해서는 안된다고 했던 그의 주장은 루터보다도 더욱 급진적이었다.
칼빈은 교회의 참된 표지에 대해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준수를 정했다. "말씀을 존경하며, 성례를 집행하고 있다면 물론 그것은 하나의 교회로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러한 일들에는 반드시 결실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의 전파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본질적인 활동인 것이다.
또한 칼빈은 교회의 사회에 대한 관심과 봉사 활동을 강조하였다. 칼빈의 교육 정책에 따라 그의 대학(university)은 학문의 국제적인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교육 과정은 예수회에서도 본받을 정도였다. 초등 교육 과정에서는 가난한 어린이들과 고아들을 시립 학교에서 무료로 교육시켰다. 칼빈은 공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의사를 임명하도록 확보해 놓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의료 봉사였다. 이처럼 공적인 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 이 개혁 교회의 사역은 최소한 중세시대의 사제 활동만큼이나 다양했다.
여기서 칼빈의 위대한 승리는 초대 교회의 집사직을 부활시킨 데 있다. 중세동안 한낱 의식적인 보조자로 전락했던 직분이 칼빈에 의해서 병든 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본래의 기능으로 회복되었으며, 이것이 여자들에게 그가 자리를 내줄 수 있는 유일한 사역영역이었다. 칼빈이 영적인 자치 요청을 통해 옥스포드 운동가들의 그림자 노릇을 했다면, 사회 복지에 대한 그의 관심을 통해서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개신교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방법은 말씀을 선포하는 수단으로서의 선교이며 목표는 교회 설립이다. 물론 이러한 신학적 특징에서 우러나오는 선교 패턴이 지나치게 경직되고 신축성이 없을 때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균형을 상실하고 오직 수직적 차원에서 구령 측면의 교회 설립만 강조하는 폐쇄적이고 내향적인 선교가 이루어지기 쉽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궁극적으로 전인적인 변혁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말씀 선포 없는 박애주의적 희생과 봉사는 그것이 아무리 명분이 고귀하고 필요한 일일지라도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개혁자들의 선교 원리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빵인가 ? 복음인가? 이 두 가지는 다 필요하지만 그러나 복음이 우선되


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가난의 근본 원인을 퇴치하는 중요한 경제적인 요소가 있다. 따라서 선교는 우선 가난한 자에게 빵을 공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빵을 만들 수 있는 본질적 요소가 기독교 복음에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선교라 할 수 있다.
또한 교회 중심의 선교에서 선교 단체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피터스에 의하면, 선교회의 교리적, 성경적 타당성을 강력하게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성경은 조직에 대하여 유연한 자세를 취하므로 선교회 기구의 권위성을 전체 부정할 필요는 없으며, 또한 교회가 효과적 봉사를 위하여는 조직의 효율성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상호 협조와 연합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교 대형 기관인 선교회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의 선교는 궁극적으로 교회 중심의 선교가 되어야 한다.


 


VI.한국교회 선교의 방향


한국 교회 성장이 이제 정체하고 감소해 가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종교 개혁가들의 개혁 정신과 선교 사상은 신선한 도전으로 다가와야 한다. 영적 성장과 부흥 없는 선교는 있을 수 없다.
종교 개혁가들에게는 선교 사상이 없었다는 주장은 적어도 선교의 사람 칼빈 앞에서는 설 자리가 없어야 한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주석 및 그의 저술들을 살펴볼 때, 칼빈은 선교의 열정으로 훨훨 타올랐던 사람이다. 또한 자신의 삶으로 직접 실천했던 언행일치의 신학자요 목사요 전도자였다.
이제 한국 교회는 선교의 재고를 통하여 선교 정책과 전략 부재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바른 선교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 자체 내의 부단한 개혁과 갱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외형과 실적 위주의 선교보다 인재를 키우고 양성하는 교육 선교가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선교는 교회의 선전과 자랑을 위한 악세사리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부여받은 지상 명령과 마땅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선교이다. 교회의 개혁과 교회의 선교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종교 개혁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교의 전략이며 교훈일 것이다.


 


< 참 고 문 헌 >


존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 편집부 역. 서울 : 생명의 말씀사, 1990.
김성태. 세계 선교 전략사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4.
스티븐 니일. 기독교 선교사 홍치모,오만규 공역. 서울:성광문화사,1983.
도날드 매킴. 칼빈 신학의 이해 이종태 역. 서울 : 생명의 말씀사, 1991.
신복윤. 칼빈의 신학 사상 서울:성광문화사,1993.
루이스 W.스피치. 종교개혁사 서영일 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1994.
전호진. 한국 교회 선교: 과거의 유산, 미래의 방향 서울 : 성광문화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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