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찌무라 간조의 선교 이해
(이후천 / 협성대 선교신학교수)
1. 서론
한국에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는 흔히 무교회(無敎會)주의자,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했던 평화주의자 그리고 김교신, 함석헌 등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간조의 삶과 신앙도
현실정치의 한복판에서 진보적으로 치열한 정치적 삶을 살았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외로 간조의 글들에서 우리는 또 다른 신앙유형의
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국의 부흥회에서 강조되는 주장들과 거의 유사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간조로부터 타계적이고, 십자가의 피를 강조하는 한국부흥 운동이나 전도운동과의 내용적 일치점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전도를 영혼구원의 문제로
인식하는 그의 체험과 방법에서 그것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바로 여기 말하자면 그의 이러한
전도이해 속에는 단지 그것만이 아닌 현재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성찰해야 할 중요한 선교적 차원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데, 예컨대 하나님 나라 건설의 에큐메니칼적 차원의 확보 필요성이 요구된다는 것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에반젤리칼적
차원의 진정성이 후자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에큐메니칼적 차원의 확보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말은
간조에게 있어서 지나친 교파주의에 대한 악폐의 강조와 대사회적인 선교적 접근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으로 에반젤리칼적 차원의 진정성이
간조가 이해하는 전도의 긍정적인 면이라는 것은 우리가 간조의 언표 속에서 복음의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은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실행해 온 지나친 물량주의와 팽창성장만을 전도로 이해하는 개체교회 중심적인 선교 내지는 전도방법에
기막힌 대안을 제공하는 실마리가 아닐까? 간조가 말하는 전도의 본래적 정신은 회복하되, 그의 한계인 선교 방법적 지평의 확대를 통해서 한국교회는
전 세계에 보다 포괄적인 선교모델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본다면 간조의 전도이해는 한국교회가 지니고 있는 선교이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바로 그 점 때문에 동의와 동시에 비판의 모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위해 본 글은 간조의 생애와 회심 사건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가 이해하는 전도의 정신을
중심으로 목적과 방법을 탐구한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한국교회 전도의 원형으로서 간조의 전도이해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
2.
간조의 생애와 회심
거의 대부분의 다른 아시아인들처럼 간조도
일본의 비그리스도교적 전통과 문화가 지배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간조는 메이지 유신(1868-1912)이 시작되기 7년 전인 1861년 3월
28일 에도(江戶)에서 아버지 우찌무라 요시유키와 어머니 우찌무라 야소(1904)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무와 야망을 중시하는 친가의
분위기와, 양심적이고 금욕적인 외가의 가풍에서 자랐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카사키 파의 하급 무사(사무라이)계급에 속하였으므로 그도
본래는 "싸울 운명"과 "충성"이 숙명이었다. 그런데 간조의 아버지는 시도 잘 쓸 정도로 유학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그는 어릴 때 유교교육을
받았다. 간조의 어머니는 거친 삶 속에서도 정직과 절제를 최고의 가치로 살아 온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자세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녀는 고된
인생을 불평하지 않고, 말없이 남편과 4남 1녀의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장남 간조의 교육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학" 및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지만, 신분상승을 기대했던 아버지의 소원대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1873년 12세에 이르러서는
서양식 사립학교인 도쿄의 아리마 사학교 영문과에 입학한다. 13세에 간조는 도쿄의 외국어학교에 편입하였다. 간조가 편입한 해, 이 학교는
영어학만을 분리하여 도쿄 영어학교로 독립하였다. 간조는 이 학교 재학 중 질병으로 1년간 휴학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구약성서의 이야기에 접한다. 그는 영어 독본을 통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를 알게 된다. 이 당시 그는 친구의 권유로 외인 거류지
교회에 출석하였지만 단지 그리스도교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정도였다. 간조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된 계기는
16세 되는 해인 1877년 신설 삿포로 농업학교의 2기 관비생으로 입학하고 나서이다. 본래 간조가 다닌 도쿄 영어학교는 그 해 4월 도쿄대학
예비문으로 개칭되어 졸업하면 도쿄대학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간조로서는 장학금과 기숙사가 필요하였다. 삿포로 농업학교는 간조의 그러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간조가 입학한 이 농학교는 미국 매사추세츠 농과대학 학장이었으며 선교사적 열망으로 가득찬 윌리암
클라크(W.S. Clark: 1826-1886)가 교무주임(an assistant director)으로 1년간 초빙되어 체류하는 가운데 1기생
15명 전원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킨 상태였다. 클라크는 이미 귀국하였지만 바로 이들 남은 1기생들의 상급생으로서의 권위와 "새로운 종교에 대한
열정과 선교의 정신"은 2기생들의 그리스도교 개종을 강제적으로 행사하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간조는 이러한 학교의 분위기에 처음에는
다신교적 미신에 사로잡힌 자기정체성의 위기를 느끼고 강력히 저항하였지만, 마침내 그해 12월 1일 친구들의 잇단 서명의 동참과 "학교의 여론"에
굴복하여, 자신의 뜻이나 양심과 달리 강제로 "'예수 종교'의 문에 들어서는" 행위로서 클라크가 남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서약"에 서명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비록 간조가 자신의 그리스도교 개종이 강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간조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오히려 자신이 기도했던 8백만 이상이나 되는 많은 신들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 "구원의
손길"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와 같은 강제적인 세례에 따른 그의 심리적 불안이나 갈등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사건은 간조에게 결과적으로 제신들로부터 해방시킨 사건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교에 입문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 속 깊은
평화와 기쁨"을 동반하는 회심을 동반한 개종은 아직 아닌 것으로 보인다. 회심을 향한 한층 진일보한 상황은 그가 1878년 6월 2일 미국에서
온 감리교 선교사 미리암 콜버트 해리스(M.C. Harris)의 세례를 받으면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이름을 받아들이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아멘'"이라고 대답할 때로 보여진다. 그는 이 날을 결코 잊을 수 없는 날로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강제적인
서명을 오히려 만족스러워 하였고, 모든 신들에게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게 된 사실에 대해서도 기쁨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교인이라 고백하면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에 감동하여 요나단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이름을 택하기도 한다.
세례 이후 간조는 동기 6명과 함께 작은 예배공동체를 꾸리게 되는데, 이것이 후에 저 유명한
삿포로 밴드로 발전된다. 1880년 7월 상급생의 졸업을 계기로 간조는 동급생들과 함께 교회건축을 계획하지만 감리교와 성공회 교파 소속의 문제로
재정후원의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교회 분파주의의 폐해를 목격하기도 한다. 어쨌든 간조는 1881년 7월 졸업 후에도 동기들과 함께 빌린 돈으로
어느 교회에도 소속되지 않는 독립교회를 세워 예배와 전도활동에 주력하여 부흥시킨다. 이 시기 그의 열심으로 자신의 가족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한다. 또한 그는 관비생들의 규정에 따라 삿포로에 머물며 수산업을 전공하였으므로 어업관계 공무원으로 일하는 한편으로, YMCA를
결성하여 부회장직을 맡기도 한다. 1884년 3월 28일 간조는 교회에서 개방적이고, 지적인 여성 아사다 다케를 만나 모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였지만, 6개월만에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이혼한다. 이 이혼으로 간조는 교회로부터 비난받는다. 이 일 이후 간조는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
도미하게 된다. 간조의 진정한 회심은 그의 미국 유학기간에 일어난다. 간조는 1884년 11월 24일 처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고, 얼마 안 있어 필라델피아로 옮긴다. 그곳에서 간조는 1885년 약 반년 간 정신박약아 양호원의 간호인으로 근무한다.
그 해 9월 그는 1821년에 설립된 매사추세츠의 애머스트 대학(Amherst College)에 비정규생으로 3학년에 편입한다. 이 대학에서
간조는 비로소 신앙의 스승인 제 5대 총장 줄리우스 호울리 실레(J.H. Seelye)를 만나 회심을 하게 된다. 실레의 따뜻함에 감동된 간조는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특히 죄의 문제로 고민하던 그에게 실레의 다음과 같은 권면이 회심을 일으킨다.
우찌무라, 너는 네 자신의 마음속만 보니까 안되는 거야. 너는 네 밖을 보아야 해. 왜 자기
성찰을 그만두고 십자가에 달려서 네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가. 너는 어린 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 놓고 그 나무의 성장을
확인하려고 매일 그 놈을 뿌리채 뽑아 보는 것과 같은 짓을 하고 있어. 왜 신과 햇볕에 맡기고 안심하고 너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는가.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죄로부터 구원의 문제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의한다는 것이다. 죄로 더렵혀진 인간구원의 문제로 심각하게 고뇌하던 간조에게 실레 총장의 이 말은 참된 복음의 소식이었다. 그는 죄의 문제에서
해방되었다. 간조는 이 회심의 기쁨과 감격을 1886년 3월 8일과 5월 26일의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의한 속죄신앙은 간조의 사상과 전도의 정신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다. 오늘처럼
그리스도의 속죄능력이 내게 분명히 드러난 적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에서,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던 모든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빚을 해결하셨기 때문에, 나는 타락 이전에 태초의 사람이 가졌던 순결과 순진함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실 것이며, 결국에는 천국으로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는 악보다도 선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새,
꽃, 태양, 공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악에게 불평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갖추면 이 세상은
천국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종교다.
비정규학생 간조는 1887년 7월 이학사
학위를 받음으로 애머스트 대학을 정식으로 졸업한다. 이후 그는 코네티컷주 하트포드 신학교(Hartford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하지만
만족하지 못하였고, 4개월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중단하여, 1888년 5월 일본선교에 대한 비전을 간직한 채 귀국한다. 귀국 후 간조는 니가타
현의 교장직을 맡았지만 동양이나 일본 현자들의 가르침도 중요하며, 외국전도회 선교사의 원조를 받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그의 부정적 입장과
선교사들의 주장이 대립하여 4개월만에 사직한다. 1889년 7월 31일에는 가정적인 여성 요코하마 가즈코와 재혼한다. 간조는 1889년 9월
2일부터 도쿄의 제일고등중학교(오늘날 도쿄대학교 교양학부)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여기서 영어, 지리, 역사를 가르쳤다. 그는 1891년 1월
9일 천황이 서명한 교육칙어를 봉독하는 이 학교 행사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머리를 조금 밖에 숙이지 않아 소위
"불경사건(不敬事件)"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또 다시 그는 2월 3일자로 면직되었고, 같은 해 4월 19일에는 그의 아내마저도
별세한다. 이때 이후로 간조는 "성서의 연구"와 같은 잡지를 출판하며,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두개의 J, 말하자면 Japan과
Jesus를 통합하려는 시도, 비전론(非戰論), 무교회주의에 대한 견해, 화석화된 기성교회와 신학에 회의하여 성서연구 중심의 그리스도교 복음
전도운동 등을 펼치며 강연과 그의 주옥같은 글들을 출판한다. 면직 이후 거의 40년간 저널리스트로서 그리고 자유로운 독립 전도자로서 그의
열정적이며, 치열했던 삶을 뒤로하고 간조는 1930년 3월 28일 아침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친다.
3.
간조의 전도 이해
간조의 전도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순수한 전도의 정신을 실현하는데 있다. 간조는 1894년 2월 "전도의 정신"을 출판하였는데, 그 책에서 그는 전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유형별로 여섯 가지를 제시한 후, 그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순수한 전도의 정신인지를 논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상적 전도자의 품성과
자질의 문제를 제시한다. 그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의식(衣食)을 위한 전도; 2) 명예를 위한 전도; 3) 교회를 위한 전도; 4)
나라를 위한 전도; 5) 하나님을 위한 전도; 6) 사람을 위한 전도. 간조는 여기서 앞의 네 가지는 사람들의 자기 자신을 위한 전도라고 본다.
그렇지만 간조는 이 가운데 다섯 번째 하나님을 위한 전도야말로,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사람을 위한 전도일 때 - 특히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간파괴와 하나님만이라는 추상성이 극복되고, 인간의 영혼을 구하게 되는 진정한
전도의 정신이 살아나며, 순수한 종교적 사업이 된다고 주장한다.
나를 오해하지 말라. 나는 사람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뒤로 미루는 전도를 변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전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욕을 위해서 전도하려는가. 나는 그것을 당장에 포기할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 자신에게 극히 불리하기
때문이다(세상이 너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은 뻔하다). 너는 전도계에서 명예를 얻으려는가. 그만두라 그것은 치열한 싸움터 속에서
얻으라. 또는 의회의 단에서 얻으라(군사나 정치도 전혀 공명만으로 할 것은 아니지만). 네 전도는 네가 속한 교회를 위해서냐. 걱정하지 말라.
네 종교는 곤고와 실망을 네게 가득 안겨줄 것이요, 기쁨과 성공은 없을 것이다. 나라를 위한 전도, 물러가서 정치가가 되라. 네 천직은 거기
있다. 하나님을 위한 전도, 네 하나님을 네 동포에게서 찾을 때까지 기다려라. 네가 하나님을 위한다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할까 두렵다.
그에게 육정적인 쾌락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대로 그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거하거든 하나님께 바칠 것을 그에게 주라 [...] 이 전도에 환희와 정열이 있다. 이 전도에 박해와 다툼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진정 전도의 정신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간조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간조는 하나님만을 위한 전도가 극단적으로 흐를 때 사람에 대한 "관용과 자비와
유화"가 결핍되고, 또한 하나님 없는 사람만을 위한 전도는 자신의 공명과 세상을 부정의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하나님 없는 인간 사랑에서 비롯된 전도는 맹목이고, 인간 없는 하나님을 위한 전도는 공허해진다. 그리고 이때 구원의 지평은 단지 영혼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국가, 인류, 세계, 우주가 그 시야에 들어온다. 이처럼 우리는 간조에게서 이미 통전적 구원(Integrales
Heil)의 단초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도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전도의 목적과 연결될 때는 다소 추상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간조가 하나님 나라를 현세적이기보다는 타계적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그는 전도의 목적이 다가올 천국시민 양성에 있다는
것에 대해 확신한다. 이때 간조는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지 않고, 그가 직접적으로 표현하듯이 내세에서 이루어지는 "천국"논리에
입각해 있다. 소위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같은 전도 구호는 아니더라도, 그의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 저 너머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간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실현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웠다'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진 않았다 [...]
그는 그의 나라의 건설을 미래에 기대하셨다. 그것도 이 세상의 미래가 아니다. 이 세상이 끝난 후에 올 내세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신 것이다
[...] 앞으로 올 세계에 나타날 그의 나라의 시민을 모으고 그들을 연마하고 그들을 완성시키는 일, 그 사업이 예수의 전도의 목적이었다
[...]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도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천국의 시민 양성을 그들의 활동의 주안으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전도의 목적을 하나님 나라 건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올바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 전도의 목적과 사도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저 세상의 "천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 개념의 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갖게 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해가 이 세상의 역사를 완전히 떠난 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불트만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있어서 논증한 바 있다. 불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에
침입해 있다는 것이다: "신의 나라가 이미 현재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나라가 그 시초에 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전도의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러한 간조의 타계적 이해는 전도를 교세확장이나,
사회개혁 또는 국가구제, 세례, 성찬식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한다. 왜냐하면 간조에 의하면 내세에 이루어지는 천국에 비하여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모든 사역과 활동은 수적 팽창을 염두에 둔 거짓되고 공허한 몸짓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봉사로서의 전도에 종사하는 오늘날의 교회의 전도에 볼 만한 것이 없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그들이 천국의 백성을 만들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은 이 세상의 성인이나 군자도 만들지 못한다. 그들의 사회사업이라는 것은 회칠한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옳은 전도"와 "나쁜 전도"를 구별하면서 나쁜 전도를 "교세확장을 위한 전도"로
손꼽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그는 마태복음 23장 15절과 고린도전서 1장 15절을 언급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에 비해서 옳은 전도란 "천국의 건설을 위한 전도", "영혼을 구하기 위한 전도",
"자비와 사랑으로 비롯하여 자기 자신을 죽이고 종사하는 전도"이다. 간조에 의하면 여기서 옳은 전도와 나쁜 전도는 각각 그리스도의 전도와 교회의
전도에 해당되어 나뉜다. 이런 관점에서 간조는 미국 선교사들의 교회중심적인 선교모델을 강력히 비난한다. 미국 선교사들의 교회확장적인 전도는
성과를 중시함으로서 "신앙이나 도덕을 타락"시키는 "좋지 않은 태도, 천한 태도, 부끄러운 태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간조는 자기의 제자를
만들거나 , 당파성을 갖는 것은 세상적 차원에서의 전도이해라고 본다. 더 나아가 교회를 위한 전도는 개종주의(Proselytism)와 연결되어
있고, "사랑과 평화를 세상에 가져오는 전도가 아니"라고까지 비판한다. 대신에 그리스도교 전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의 전도란 나의 주장을 세상에 펴고, 나의 덕으로 사람을 감화시켜서, 나의 당이나 나의
제자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기독교의 전도란 나의 죄를 세상에 고백하고, 내가 받은 은혜를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나의 구주를 세상에 소개하여
그분의 수종자나 그분의 제자를 만드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조에 의하면, 전도자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사회개혁가도 아니며, 교회설립자도 아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사회사업은 사도들의 본업이 아니라 부업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곳에서도 간조는 전도를 자선사업과 연계시키지 않음으로써 전도는 곧 구령사업에 국한하는 것임을 명확히 한다: "전도는
자선사업이 아니다. 전도는 영혼을 구하는 것이지 육체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사회개혁에 힘쓰는 것은 그리스도교를 일본에서
침체시키는 원인으로 진단한다. 심지어 그는 선교사들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선교사라고 하면 자못 존귀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을 캐보면 대개는 목사가 될 소양이 없는 사람들이다. 혹은 상점의 점원 노릇을 했거나, 공장의 직공 노릇을 했거나,
농장에서 땅이나 파던 사람들이다". 물론 그는 신분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는 아니라고 부연하여 설명하지만 일본 사람들을 선교하는 목사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에 해당하는 품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전도 방법의 무용론을
주장한다. 전도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혼 구원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복음 전파 운동을 해야 하지만
복음 자체가 운동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법의 모색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때 전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순수한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고 밝힌다. 그래서 전도자가 지녀야 할 성품으로 간조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체험, 정직, 건전한 상식을 든다. 이 밖에도
전도자는 하나님에 관하여는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얻기 위해 원어로 연구할 수 있어야 하며, 사람을 알기 위해 역사와 사회학을 그리고, 만유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과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논한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전도자가 성서를 나누어주고 그 내용을 외우게 하는 것이 영성을
발전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전도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도는 방법이 아니다. 생명의 빵을
공급하는 일이다. 주어야 할 빵은 없으면서 줄 방법만 제 아무리 교묘하게 꾸민다고 그것으로 사람이 구원을 받지는 못한다. 나에게 빵이 있는가,
그것이 문제다. 줄 수 있는 생명의 빵이 있다면, 나누어 주는 방법이 아무리 졸렬하더라도 나는 전도에 있어서 이미 반 이상 성공한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 간조는 전도방법을 논하는 것은 하나의 "선교 소동"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전도는 방법이 아니라, 진리체험의 문제이며, "영혼은 그 깊은 곳에서 서로 상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사람들의 전도방법은 모금을 해야 하고, 선교지의 현지인 고위 관리와 사교를 하여 그 세력을 이용해서 교세를 확장해야 하는 방법을 택하는데,
이러한 전도 방법은 비성서적일 뿐더러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접근 통로를 막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 대해 간조가 회의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금전 의존적이며, 정치적이고, 기계적이며, 책략적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간조가 부흥회를 개최해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회심을 촉구하고, 세례를 베풀며 교회설립을 하는 전도방법 등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전도 방법에 대한 무게중심은
아무래도 이심전심을 중시하는 불교의 선종(禪宗)적인 태도를 가진다. 간조는 개인의 구원이 시작되면 이미 그것으로써 그 지역이 그리고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으로 간주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간조의 "농민 구제책으로서 기독교 선교"를 논하는 글 속에서 일본 농업의
지주와 소작인 제도의 문제점을 논하면서 법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그러한 것을 통한 농민 구제안을 그리스도교 전도의
방법으로 삼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사회개혁 제도의 개혁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도지역 선정의 문제와 관련하여 간조는 도시보다는 농촌에서의 전도가 보다 중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수산업을 전공한 것에 기인하지 않나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서 학생보다는 농민전도에 애착을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가급적 남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지역 전도를 강조함으로서 전도지 재배치 문제와 전도 자원의 효율성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것은 서구 선교사들이 한 지역에 여러 교회출신의 선교사들을 집중시킴으로써 빚어졌던 전도의 비효율성을 간파한데서 오는 견해일 수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간조는 이미 복음을 접한 혹은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한다. 대신에 그는 무신론자나 타종교인들
그리고 정신적 방랑자들이 전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밝힌다. 전도 주체와 관련하여 간조는 평신도들의
전도사역 참여를 지지한다. 그에 의하면 전도사역을 명예를 얻거나, 생계 수단으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도의 효과가
부실해진다고 한다. 간조는 전도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문적인 전도자가 될 필요는 없으며, 자신의 일상적인 직업을 통해서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교회가 행한 최대의 과오는 전도자란 계급을 만든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간조는 일본 전도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독립 전도"로서 이것은 외국 선교사의 자금을 빌리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간조의 전도이해는 전통적인 교회중심적 전도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는 반교파주의적 전도이해를 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교파주의의 악폐에 대한 그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후에 그의 무교회주의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서 무교회의 무란 교회를 무시하거나, 없애버린다는 의미에서의 무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무교회는 본래적인 교회를 회복하자는 것으로서 교회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만나는 유(有)교회이다. 그리고 마치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숙소에 해당한다. 천국에는 어떤 조직적인 교회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례도 성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직분도 없다. 이
공동체의 중심에는 성서가 있고, 오직 믿음만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오히려 간조에게 있어서 강단을 빼앗긴 요한 웨슬리의 사역과도 같이 세계전도에
대한 비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물론 간조는 복음과 서구화를 동일시하거나 식민지적 선교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세계를 자신의 활동 지역으로 삼아야 한다 [...] 크리스천의
의무 또는 책임 및 특권은 세계 전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전 세계와 더불어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의 구주는 모든 민족의
구주이다. 그는 자기 혼자 구원을 받으려고 원하더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가족 및 국가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또 주님과 함께 전 세계의 복음화, 모든 민족의 구원을 원하고
그러기 위해서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감리교 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표어는 다음과 같은 성구였다고 한다. 즉 나의 활동 구역은 전
세계이다(The field is the World)라고. 우리는 크리스천이 되어 육대주를 하나님의 은사로 받았다고 보아 조금도 틀림이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간조의 전도이해는 순수한 전도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진정한 전도의 정신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타계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따라서 철저히 비교회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그의 무교회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의 교회론으로서 무교회론과 전도이해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일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4.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간조의 전도이해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단지 그것만이 아닌 현재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성찰해야 할 중요한 선교적 도전이 함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간조는 외국 선교사들이 자신이 속한 교파를 확장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 또한 그는 전도를 위한
방편으로 그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하여 애쓰지도 않았다. 전도에는 방법이 불필요하며, 특히 교회확장을 위한 전도는 더욱 회피해야 할 교회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에 의하면 이상적인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학지식과 교양은 물론이고, 정직 등 건강한 성품이 요구된다는 것도 주장한다.
더 나아가 간조는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적인 구속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럴 때 피안의 천국 백성을 모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세상을 섬기기 위한 교회의 디아코니아가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특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도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간조는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전도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전도라는 것도 밝혀준다. 교회를 위한 전도는 교회를
몰락시키지만,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전도일 때, 교회가 산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간조의 전도이해를 통해 순수한 전도의 정신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점을 깊이 성찰한다. 베르카일은 선교사역의 순수한 동기와 불순한 동기를 구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선교의 순수한
동기에는 1) 순종의 동기; 2) 사랑, 자비 그리고 동정의 동기; 3) 영광의 동기; 4) 종말론적 동기; 5) 긴급함; 6) 개인적 동기가
있다. 그리고 불순한 동기로는 1) 제국주의적 동기; 2) 문화적 동기; 3) 상업적 동기; 4) 교회 식민주의를 말한다. 존 영(John
M.L. Young)도 그의 저서 {선교의 동기와 목적}(The motive and Aim of Missions)에서 선교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 그 일의 목적이 되어야만 한다"고 밝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가 선교 일을 하는데 있어
약동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공급해주며, 우리가 순종을 잘하여 질투를 참으며 진정한 신앙심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에게
있어서 선교의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베르카일에 있어서 그것은 선교의 순수한 동기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간조의 입장은 위 두 사람의 맥락과 닿아 있으며, 교회팽창 중심적인 전도를 통해서 성장해 온
한국교회에 커다란 교훈이다. 왜냐하면 최근 한국교회의 선교적 상황은 간조가 말하는 전도의 정신이 분명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교적
상황이란 교회와 전도에 대한 비판이 급증하는 현상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역할과 전도의 방법에 대한 문제가 교회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로써 한국 교회가 당면한 선교의 위기는 단순히 교회 선교프로그램이나, 그 외의 선교적 자원들, 즉 교회가 현재까지 이룩한 성과로서
인적, 물적 토대를 충분하게 동원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교회와 전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경향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간조의 무교회론과 그의 전도이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교회와 전도에 대한 새롭고, 본질적인
시각의 등장이 요구된다. 이 새로움과 근본성은 반드시 현재에서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간조의 전도이해는 적어도 여기에 대한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다. 어쨌든 이런 점에서 간조의 전도이해에 대한 연구는 한국 교회선교에 대한 새로운 전망과 지평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간조의 전도이해는 기존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으며, 교회전도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전도이해 상당부분이 교회론을 함축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전도와 교회의 모습을 반성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연히 그의 전도이해와 무교회론과의 연관성 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앞으로 남겨진 과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