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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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테일러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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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년기의 영적 성장

허드슨 테일러는 속세를 등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분주한 업무 속에서 살았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며, 많은 책임을 감당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각양각색의 그리고 각종 환경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끊임없는 변화의 삶을 살았다. 그는 전세계적으로 뜻이 깊은 사람들에게 모험적인 인생(선교사)을 살게 하거나 영적인 사람들에게 베푸는 일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 않게 일상생활의 평범한 일에도 충실하였던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을 체험으로 시험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으며, 최고의 영적 경지에서 변함없는 삶을 살 수가 있음을 만인에게 입증해 준 사람이었다. 그가 사망한 후 27년이 지난 오늘날(1905년에 운명, 1932년에 쓰여짐)에도 계속 성장하고 있는 선교사업을 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중국 내륙지방은 거의 그의 생애의 결과로 말미암아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수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으며, 1,200명의 선교사들이 아무런 보수도 바라지않고 그들의 모든 물질적인 필요를 하나님 한 분께만 의존하면서 살고 있다. 실제적으로 이러한 삶의 비결은 과연 무엇인가? 어떤 필요에도, 물질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그리스도의 무한한 풍부"를 의지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소년 허드슨 테일러는 재미있는 책을 찾아 아버지의 서가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날 토요일 오후 그의 모친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 있었다. 친구들과 헤어진 모친은 주님께 기도하기 위해 떠났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마음에 하나님께로부터 확신이 왔다.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확신의 기쁨이 넘쳐 흘렀다.

그 시간 소년은 창고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하나의 문구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일'이라는 귀절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잘 알고 있던 하나의 진리가 예전에는 비록 흘러 버렸지만 새롭게 그의 마음 속에 와 닿았던 것이다. "필자는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그는 자문했다. "왜 그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하시고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그때 '다 이루었다.'는 말이 빛 가운데 나타나듯 눈에 들어왔다. 다 이루었다? 무엇이 다 이루었다는 말인가?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함"이라고 그의 마음이 대신 대답했다. "위대하신 대속자가 죄의 빛을 청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이는 우리의 죄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 순간 놀랄 정도로 분명하게 다음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모든 일이 다 이루어져 있고 모든 죄의 빛이 다 청산되었다면, 내가 할일이 뭐가 남아 있겠는가?"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이 세상에 내가 할 일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다. 다만 무릎을 끊고 겸손한 마음으로 구주를 모셔들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 영원히 찬양하는 것밖에 내가 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전에 가졌던 모든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졌다. 흔히 부르는 거듭나는 체험이 그에게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그 마음을 채우기 시작했다. 엄마와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던 그는 엄마가 돌아오자 제일 먼저 맞으러 나갔다. "얘야, 안다. 네가 말하려고 하는 기쁜 소식때문에 나는 벌써 2주일이나 기뻐하고 있단다." 얼마후 그는 또 한번 놀랐다. 자기의 노트로 알고 펼쳐본 노트속에 누이의 필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구원을 받을때까지 하루도 쉬지않고 하나님께 간구하기로 작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두 형제 자매는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의 나이 이제 열 일곱으로 아직 어렸지만 그들은 하나가 되어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잃어버린 영혼과 멸망하는 영혼에 대한 주님과 같은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초기 생애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가 최고를 지향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무엇이든지 최상의 것, 즉 하나님을 의식하며 이를 인해 기뻐하는 삶 이하의 생활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오후 기도할 생각이 나서 깊은 갈증이 나서 주님과 홀로 있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때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고, 내가 모든 소망을 포기하고 구원의 소망마저 포기했을 때 나를 구원해 주셨던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과 감사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아뢰었다. 하나님이 임재하심이 놀라울 정도로 생생했고, 그 순간 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경외감에 차 있었다.


2.믿음의 성숙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허드슨 테일러는 은행에서는 사무 직원으로서 또는 자기 아버지의 가게에서는 조력자로서 바쁜 생활을 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는 많은 유혹을 느끼기도 했다.

이 무렵 영적인 패배와 갈증과 갈급함을 경험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의 손길이 그에게 새롭게 임했다. 그는 말없이 한 순간에 그 손길을 의식했다. 하나님만이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곳에 이르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일해 주시고 죄의 권세에서 풀어주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내적 승리를 주신다면, 그는 세상적인 모든 야망을 버리고 어느 곳이든 지시하는 땅으로 갈 것이며,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자기를 바쳐 무슨 일이든지 주저하지 않고 행할 것이며 완전히 주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자가 되기를 원했다. 먼 훗날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기억하며 기록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직접 얼굴을 뵙는 것 같았다. 전능하신 창조주와 계약을 맺는 것 같았다. 그때 이후로 내가 중국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은 결코 떠나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그의 일생은 하나의 위대한 목적과 기도로 일관되었다. 즉시 그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준비에 착수했다. 육체적 고난을 겪어야 하는 삶을 위한 준비에 나선 것이다. 깃털 침대를 매트리스로 바꾸었으며 음식을 먹을 때도 자제하기를 연습했다. 주일에 두번씩 교회에 나가는 대신, 저녁시간은 그 마을에서 전도지를 나눠주고 오두막집 모임을 갖는데 보내기 시작했다. 중국어 공부 역시 열정을 가지고 시작했다.

아버지 곁에서 몇년을 약제사로 보내는 동안 의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욕망이 컸던 차에 헐이란 곳에서 훌륭한 조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의사의 조수가 된다는 것은 그의 가족을 떠나는 것을 의미했다. 의사 하디(Hardey)박사는 개인적인 비용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봉급을 주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이자 특권으로서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꼬박꼬박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바쳤다. 주일이면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가 묵었던 드레인사이드(Drainside)지역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식사다운 식사는 거의 해 보지 못하게 됐다. 그의 생활은 고독했으며 저녁시간은 홀로 보내야 했고 주일이면 전도에 전념했다. 불편하고 어려운 생활에 자신을 훈련시키고 돈을 아껴 복음을 듣는 사람들을 위해 쓴다는 두가지 목적을 가지고 살았을 때, 그는 생각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도 살 수가 있음을 알게 됐다. 버터, 우유, 기타 고급 음식들은 모두 끊었다. 귀리와 쌀을 주식으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소득의 삼분의 이 이상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쓰여졌고 그럴수록 그의 영혼에 행복과 축복이 넘침을 경험했다.

이 당시 중국은 태평천국의 난(Taiping Rebellion)으로 말미암아 외부 세계로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모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중국 복음화 운동에 다소나마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망이 밝던 복음 사업들이 하나씩 실패로 돌아가자 대부분 돕기를 중단하거나 관심을 쏟지 않았다. 기도회들이 중단되고 선교사 지원자들도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섰으며 헌금 역시 현저하게 줄어들어 어떤 선교회는 아예문을 닫았다.

이때 그는 고독했고 사랑과 동정을 원했으며, 아직 소년으로서 자기를 이기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힘이 들었다. 마귀는 이때를 노렸다. 하수지역으로 이사한지 몇 주일이 안 지나서 충격적인 사건이 그에게 몰아닥쳤다. 몹시 사랑했던 그의 연인이 자기를 영원히 떠나기로 선언했다. 2년이란 긴 세월동안 그는 하루같이 그녀를 사모하고 사랑했었다. 거절의 이유는 간단했다.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그의 야망을 꺽지 못한 그녀는 더이상 설득시킬 수 없음을 알고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그녀를 사랑했단 만큼 상처도 컸다. 그러나 중국을 가기 위해서는 길이 하나밖에 없었다. 유혹자 마귀는 속삭였다. "왜 하필 머나먼 중국을 가려 하느냐? 일생동안 의무감의 노예로 수고하고 고통하는 길을 자청하는 이유가 뭐냐? 지금 포기하라. 아직도 늦지 않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다." 유혹의 목소리는 그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다. 그는 슬픔에 겨워 감각을 잃었고 주님을 향해 위로를 구할 힘마저 없었다. 슬픔을 달래며 긴 시간을 홀로 울었다.

하나님과 흉금을 털어놓고 교제할 때, 포기한다는 것은 결국 받는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 "하수지역"에서 겨울을 날 때 특별히 이것을 체험했다. 물질적인 면에서 가장 좋은 것을 포기하는 생활을 했을 뿐만아니라, 그는 당시 생활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애인까지도 포기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은 과감하게 포기했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테일러의 편지는 내용이 바뀌었다. 통상 자기 연민에 빠지던 그가 선교 사면의 열심이 가득찬 내용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어머님, 저의 열심에 대해서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선교사의 일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가족과 이별하고 멀리 간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있을때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얼마나 선교사가 되기를 갈 망하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기도 하나만으로 하나님을 통해서 사람을 움직인다. 이것은 외로웠던 그 해 겨울 "하수지역"에서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위대한 비결이었다. 그 체험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헐에서 일하고 있을 때 나의 고용주는 봉급때가 되면 언제나 자기에게 기억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석달에 한번 받게 되는 봉급 지급일이 가까와 왔을때 나는 다른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기도를 했다. 시간이 되었으나 하디 박사는 봉급에 대한 어떤 암시도 없었다. 계속 기도를 했다. 수 주일이 지났으나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가계부를 정리해 보니 반 크라운(은화로서 2실링 6펜스)짜리 하나밖에 없었다. 토요일 밤 열시경에 마지막 심방예배를 마쳤을 때, 한 가난한 사람이 자기 아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기도해 주기를 청했다. 그는 18펜스가 없어서 사제를 부르지 못했다. "아이 반 크라운짜리 은화대신에 2실링 6펜스가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1실링을 즐텐데!" 그러나 그 은화를 통째로 준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낙심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이때 양심은 날카롭게 꾸짖었다. "이 위선자야, 구원받지도 않은 이들에게 하늘에 계신 친절하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에 대해 말하면서 네 호주머니 속의 은화는 통쨰로 줄 수가 없단 말이냐?"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나 기도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기도하려는데 다시 꾸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반 크라운 은화를 천천히 꺼내 그에게 주면서 그것은 나의 전부라고 말하였다. 그때 내 마음에는 기쁨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갈 때 나의 마음은 텅빈 나의 호주머니만큼이나 가벼웠다. 깜깜하고 황량한 거리들은 찬양의 노래로 화답하고 기쁨의 눈물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남은 귀리죽으로 아침을 때우고 있었다. 죽을 채 다 먹기도 전에 소포하나가 배달되었다. 봉투를 열었으나 안에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고 다만 흰 종이로 싼 어린이 장갑이 한 켤레가 들어 있었고 장갑을 펴 보았을 때는 놀랍게도 반 소프린(10실링짜리 금화)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당시 허드슨 테일러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 주었던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지불되지 않은 봉급을 기억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후 2주일이 지났을때 나는 2주일 전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나를 괴롭히는 것은 궁핍이 아니었다. 내 입으로 말만 하면 돈은 언제라도 주어진다. 내 마음에 있던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중국에 갈 수 있느냐, 아니면 믿음과 능력이 부족해서 선교사의 일을 포기해야 하느냐"하는 것이었다. 나는 목,금요일의 필요한 일상업무외에는 거의 전부 중단하고 하나님과 기도의 씨름을 했다. 그러 던 중 아버지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확신을 받았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 떠한 방법으로든 나 대신 간섭할 것이라는 확신을 받았다. 토요일 저녁 5시경 하디박사는 갑자기 말하였다. "테일러야, 네 봉급일이 되지 않았니? 대단히 미안하구나. 진작 애기해 줄 것이지. 글쎄 오늘 오후에 가진 돈을 몽땅 은행에 보냈는데 아니면 바로 네게 봉급을 줄 수 있을텐데." 그날 밤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은 포기했다. 그런데 그밤 이상하게도 부자 환자가 자기 병원비를 치루기 위해서 방금 다녀갔다. 그 환자는 밤 10시가 넘었어도 불편한 자기 마음을 해결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이제는 중국에 갈 수 있게 됐다고 기쁨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렸다.

허드슨 테일러는 헐을 떠나 런던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런던에서 큰 병원에 의과대학의 실습생으로 들어갔다. 그의 부친과 그를 파견한 중국선교회(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에서는 생활비 제공을 제안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는 일부러 자원하여 가능한 모든 공급원을 차단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다. 이러한 결심으로 젊은 의학도 허드슨 테일러는 참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수많은 기도에 대한 응답들은 그의 믿음을 강건하게 하였고 다음 12개월 내에 중국으로 출발할 여건을 조성했다.

나이 21세가 되었을 때 길이 열렸다. 중국선교회에서는 그에게 상해로 가는 배가 준비되는대로 출발하도록 요청했다. 때는 바야흐로 태평천국의 난(Taiping Rebellion)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남경에 거점을 정하고 주로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반란군은 중부와 북부지방을 휩쓸었다. 북경도 곧 장악될 것 같았다.

1854년 허드슨 테일러는 5개월간의 위험한 항해 끝에 처음으로 중국해안에 도착했다. 그때의 중국은 상해와 기타 4개의 항구도시에서만 외국인이 살 수 있도록 조약을 맺었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에는 한 명의 개신교 선교사도 없었다. 그의 생활 주변에서도 어려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인상이 깊고 오래가는 선교사 생활의 초창기에 그는 숱한 어려움을 경험했고 또 주님의 놀라운 건지심을 경험했다.

런던 선교회의 록하트(Lockhart)박사가 허드슨 테일러를 잠시 돌보아 주지 않았다면 그는 아주 곤경에 처할 뻔 했다. 사치생활은 평소부터 멀리했기에 거처할 곳만 있으면 감사했으나 살을 에이는 추위와 습기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전쟁으로 무참히 고난을 당하는 이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일로 더욱더 고통을 당하실 주님의 입장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로 마음을 달랬다. 개인적인 시련도또한 적지 않았다. 그의 생애중 처음으로 재정적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처지에 있게 되었다. 자기 봉급의 3-4배를 받는 집에 세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는 생활 필수품을 구입하는데도 자기 봉급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다음 여름의 무더위에 한가지 어려움이 겹쳤다. 자기와 함께 파송하기로 했던 스코틀랜드 의사 선교사가 4명의 가족과 중국으로 출항했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을 위해 방을 구해 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셋방을 하나 구했으나 이 지역은 외국인 거류지 보호구역 밖이었고 북문을 겨냥하는 정부군의 포탄 사정거리였다.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그의 생애마저 수없이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기 직전에 그들이 거할 곳을 발견했다. 런던 선교회의 구내에 록하트의 집이 있고, 그옆에 허드슨 테일러의 좋은 친구였던 한 선교사가 살고 있었다. 파커 박사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오는 도중 배 안에서 낳은 아기까지 데리고 도착했다.
그는 누이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저는 모든 문제들을 주님께 가지고 갑니다. 저는 오늘 저녁 읽을 부분의 시편을 읽었습니다. 시편 72-74편입니다. 한번 읽어 보시고 이 말씀들이 저에게 얼마나 잘 적용되는지 보십시오. 이유 는 잘 모르나 요즈음 저는 눈물이 없이는 거의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3.전도여행

중국에 도착한 후 처음 2년 동안 허드슨 테일러는 무엇보다도 열과 성을 다하여 전도를 했다.그러나 그는 그 동안에도 10회 이상이나 되는 전도여행을 용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감행했다. 상해의 큰 도로와 골목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저 건너" 편에 있었다 - 한 번도 구원의 길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이들을 위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이 마음을 어느 것으로도 달랠 수 없었다. 겨울의 추위도 여름의 무더위도 전쟁의 위험도 그를 좌절시키지 못했다.

하나의 전도여행이 끝나면 또 하나의 준비에 착수했다. 열 번의 전도여행을 15개월 내에 끝마쳤다. 파커 박사가 도착한 후 그는 처음 3개월 동안 파커 박사와 함께 전도를 나갔으며 1,800여 권의 중국어 신약성경과 2,000권이 넘는 책자와 전도지를 배포했다. 아무에게나 나눠주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나눠줬다. 그 해 1월부터 3월까지는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4차례의 전도여행을 계속했다. 낮에는 온종일 군중가운데 나가 전도를 하고 밤에는 보트에서 지내면서 찌는 듯한 무더위를 이겨냈다. 어떤 것도 이 젊은 선교사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여행에는 항상 위험이 수반되었고 동반자가 없었을 때의 외로움은 달래기가 어려웠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의료기구는 그의 유일한 동반자요 조력자였다. 의료기구들은 전도의 길을 개척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전도여행을 통해서 그는 "그리스도 없이" 험한 이 세상을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전쟁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상해의 반도들은 마침내 정부군에게 항복을 했다. 전쟁은 지나가고 고요했다. 허드슨 테일러와 동료들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영혼을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에 있는 중국 선교회 본부에 안정된 사역을 위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선교회의 회답이 부정적으로 왔다. 고민하고 있는 그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해안에서 집을 구할 수 없다면 왜 많은 중국인들처럼 보트를 타고 물 위에서 살 수 없겠는가? 이 생각은 곧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몇 개 안되는 개인용품을 닝포로 옮겨 파커 박사에게 맡겨 놓고 돌아와서는 중국인들과 완전히 동화하기로 작정했다.

이제까지 선교사 중에는 한 사람도 또는 어느 외국인도 이러한 풍습에 동화하지 않았다. 중국에 온 지도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외국인들과 교제하며 지냈는데, 그 사회에서 중국인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곧 그들 가운데 사회적 매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좀더 고차원으로 생각해 볼때 중국옷을 택하는 것이 복음을 위해서 더 지혜로운 것임을 확신했다.

그가 중국에 온 것은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중국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것이었다. 그가 방문했던 58개 도시 가운데서 51개가 이전에 한번도 복음의 일꾼이 다녀간 적이 없는 곳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주된 방해물은 그들과 다른 자기의 모습임을 발견했다. 그가 전도하기를 바라는 대상이 중국인이라면 항구에 사는 동료 외국인들의 눈보다는 중국인의 눈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결단을 내렸다. 많은 기도와 말씀의 묵상 가운데서 중국옷 한 벌을 구했다. 이발소에 가서 윗머리를 면도해내고 뒷머리에는 염색을 해서 길게 단 모조 변발과 색깔을 맞췄다. 이날 이후 전도의 문은 열리기 시작했다. 상해로 돌아갈 때 사람들은 그가 외국인인 것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설교를 하고 책을 나눠주고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해서야 그가 외국인인 것을 알 정도였다. 예전과는 달리 중국인들은 자기 안방까지 그를 초청했다. 관심있는 구도자들은 심각하게 접근해 오기도 했다. 그는 감사한 마음에서 그가 선택한 의복에 대해 "내륙지방 전도에는 가장 큰 조력자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마음은 점차 "내륙지방"으로 집착되었다. 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던 형제에게 상해에서 믿은 형제들의 보살핌을 부탁하고, 또 다른 선교사들도 있고 해서 상해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는 시절이 뒤따랐다. 왜냐하면 전도에는 성공했으나 그 성공의 결과로 쫓겨나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백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쭝민이란 섬이 그의 종착지였는데 이곳에는 단 한 명의 신교선교사도 없었다. 이번에는 반가운 영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도착한 지 3일 만에 "내륙지방"에 임시 자기 집을 구한 셈이었다. 기쁨의 6주일 후 실망이 왔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사건인 만큼 고통도 컸다. 몇몇 의사들과 약제사들이 단합이 되어 세력있는 정치인을 매수하여 허드슨 테일러를 자기지역의 경쟁자로 생각하고 그 지역에서 제거해 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 일로 당황하고 실망한 허드슨 테일러는 앞으로의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모님께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저는 당연한 권리마저 포기하고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는 양들을 위해 나의 생명을 버 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제가 말로만이 아니라 진리와 행실로 예 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이토록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허드슨 테일러에게 생명부지의 한 사람이 등장했다. 이 사람은 허드슨 테일러와 동일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허드슨 테일러와 하나님의 일에 더욱 깊고 더욱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1839년 스코틀랜드와 카나다에서 강력한 부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바 있는 위대한 부흥사 윌리암 번스였다. 그는 적시에 허드슨 테일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얼마되지 않아 두 사람은 형제 의식을 갖게 되었고 나이 차가 컸지만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처럼 한팀이 되었다. 이 우정은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사 생애의 방향 설정에 도움을 주었고 후에 허드슨 테일러가 인도하게 될 원대한 선교 사업의 밑거름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번스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비록 나이는 더 어리고 경험이 적지만 허드슨 테일러가 더 많은 관심있는 청중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자기는 밖에서 기다리도록 요청을 받았는데 허드슨 테일러는 개인 집으로 들어오도록 요청을 받는 것도 보았다. 그 결과 번스는 다음 편지에서와 같은 결심을 했다.

12월 29일에 저는 지금 입고 있는 중국인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벌써 몇 달전부터 입고 있습니다. 그가 이 옷 때문에 전도에 불편을 덜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저도 그의 본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번스는 참으로 기도의 사람이었다. 박학다식한 사람으로서 정다우며 타고난 지혜가 넘치는 그 사람은 허드슨 테일러에게 천생연분의 스승이었다. 훗날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친 영적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그는 허드슨 테일러 앞에서 살았고, 모범을 보였으며 또한 허드슨 테일러가 생애를 바치기로 한 인생의 교육장인 중국에서 보여주었다. 7개월의 기나긴 세월 동안 그들은 함께 일했다. 처음에는 상해 지역에서 다음에는 스와또우 지역에서 일했다.
얼마 후 번스는 허드슨 테일러에게 상해를 다녀 오도록 부탁했다.

번스는 의약품과 도구들이 필요해서 허드슨 테일러를 상해로 보냈으나, 불행히도 의약품들은 모두 불에 타버리고 없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없어진 의약품들을 다시 구입하기 위해 상해에 있을 때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의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승인 번스가 관청에 붙잡혀 멀리 광동까지 31일간의 여행을 떠났다는 비보였다. 그들은 다시는 스와또우에 오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받았으며 이는 허드슨 테일러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이 없었던들 그의 전도의 생애는 성공을 하지 못했을 것이며, 인간의 사랑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는 정치적으로 먹구름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번스의 체포에 관한 비보와 함께 영국과 중국간에 전쟁이 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사건은 4년이 지나서야 종결된 긴 전쟁이 시작이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맨 먼저 번스의 안전에 대해 염려했다. 알고 보니 번스가 스와또우에서 광동으로 호송되어 간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가 어쩔 수 없이 닝포에 있었으나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곳에서 그의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 지역에 외국사람이라고는 허드슨 테일러와 죤스 부부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는 최초의 여학교였던 조그만 여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던 한 여학교 교사뿐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올더시였고 아직도 미혼이었다. 그녀를 돕고 있던 여인들은 사무엘 다이어 목사의 두 딸이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자기 동료 죤스 집에서 종종 동생 다이어를 볼 기회가 있었고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벌써 오랫동안 중국 선교회는 명성은 부끄러울 정도였다. 벌써 오랫동안 중국 선교회는 재정적으로 빚을 안고 있었다. 개인적인 신조는 절대로 빚지지 않고 사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사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중국 선교회 자체는 빚 속에 있었다. 나와 중국 선교회에서 동역하는 사역자들의 분기별 청구서는 가끔 빌린 돈으로 충당해 주었다. 결국 이듬해에 나는 중국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했다.

다이어의 눈은 다시 테일러를 주의 깊게 관찰했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녀 역시도 내륙지방을 향한 불타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러 달이 지나갔다. 테일러는 상해에 가야 했고 그녀를 떠나는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테일러에게 편지 한 장이 온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구혼이었다. 언니는 함께 반가와하며 격려해 주었다. 다음으로 그녀는 올더시양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로 분한 어조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자리에서 청혼을 승락해 버렸다. 그 후 그들은 여러 사람 앞에서 당당히 약혼을 하게 되었고 그 전에 경험한 어려웠던 시절은 이 행복한 겨울날로 모두 보상이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초기 중국 선교 생활 중 마지막 2년 반은 짧은 기간이었으나 열매가 풍성한 기간이었다. 테일러 부인의 도움으로 여성들과 어린이들도 남자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드나들며 교제를 하게 되었다. 테일러 부부에게 가까운 친구이며 동역자이었던 중국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목화 상인이었는데 이전에는 불교신자였다. 그의 이름은 "니"(Ni)였다. 어느 날 저녁, 거리를 지나가다가 열린 대문을 통해 그 안에서 무엇인가 진행 중인 것을 발견했다. 종교적인 일을 토론하는 장소임을 알고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죄에 대한 징벌과 죽은 뒤 영혼의 가는 곳에 대해서 대단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그는 열렬한 성경 학도가 되었다. 성경 지식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의 믿음은 놀랍도록 성장하였다. 그는 구원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전에 회장으로 있었던 불교 신도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전에 그를 따르던 동료들 중에 하나는 그의 간증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었다.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동료 선교사들은 초신자들이 그들 주변에서 성장하는 동안 모든 짐을 다 져야 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노방 전도, 교회 설교, 방문객의 영접, 서신의 회신, 경리, 전도 여행, 그 외에도 적지 않은 의료의 일을 담당해야 했다. 이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과 구도자들을 상대로 매일 교제하고 상담하는 일을 그 어떤 것 보다도 중요시했다. 이와 같이 초신자들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아끼지 아니한 결과 그들은 날이 갈수록 은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갔다. 따라서 교회는 성장하였고 선교사의 일은 번창해갔다. 동시에 봉사의 기회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허드슨 테일러가 결혼했던 그 해 여름에 천진조약이 조인되었고, 이는 마침내 내륙지방에 전도의 길을 터 놓았다. 외국인들도 이제는 여권만 있으면 자유롭게 내륙지방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 다리의 거리에서 심혈을 기울여 집중적으로 초신자들을 가르친 것은 훗날 내륙선교회 업적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허드슨 테일러가 이와 같은 추수의 기쁨 속에 있을 때, 예기치 않은 큰 슬픔이 그에게 새로운 일을 맡게 했다. 파커 박사의 가정에 가슴아픈 일이 일어났다. 수 많은 어려움을 하나같이 극복한 파커 박사였건만, 정작 그의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넋을 잃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예상치 않던 일이 테일러 앞에 제시되었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의탁하면서 그는 약방뿐만 아니라 병원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파커 박사가 남기고 간 돈이 다 소진되었고 허드슨 테일러 자신의 돈도 다 써 갈 무렵, 허드슨 테일러는 홀로 또는 조력자들과 많은 기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요리사 꾸에이화씨는 마지막 가마의 쌀을 쓰기 시작했고 많이 없어지고 있다는 하였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시간이 가까이 왔음이 분명합니다"라고 테일러는 대답했다. 그 마지막 쌀가마가 다 끝나기 전에 편지 한 통이 테일러에게 전달되었고 이는 놀라운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버거로부터 온 편지였다. 그는 이전에도 헌금을 보내온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거금 50파운드를 송금했다.


4. 은둔생활과 영적 소명감

병원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매일 바쁘고 기쁜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보낸 6년은 테일러의 몸에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그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혼 구원에 대한 절박한 책임감은 테일러의 건강에 무리가 가게 했고 결국 중국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급기야 그는 1860년에 질병으로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악화된 건강도 주위의 만류도 어떠한 어려움도, 멸망해가는 수백만의 중국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에서 그를 분리시킬 수 없었다.

런던 동쪽 끝에 있는 전에 근무한 적이 있는 병원 가까이에 거주하면서 건강이 좋아지자 테일러는 그의 의학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또한 닝포 성경을 개정하는 일을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중국 선교사로 가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많은 서신 교환을 했다.

29세와 24세의 젊은 나이에 그들이 사랑하는 선교지역을 뒤로 두고 런던의 빈민가에서 침체된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러한 5년간의 은둔기간이 없었더라면 장차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꿈과 정열이 성숙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닝포의 사역을 위해서 계속 물질적인 공급을 해야 했고 여러 가지 지시도 해야 했다. 따라서 많은 서신 업무도 해야 했다. 신약 개정 작업은 난외 주석을 다는 일까지 해야 함으로 적지 않은 일이었다. 이 난외 주석은 후에 닝포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일은 힘들기도 했지만 테일러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는 매일 성경을 놓고 여러 시간 동안 씨름을 했다. 성경 개정 작업에 투자한 시간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중국 영토에 대한 철저한 공부를 했다. 이미 그가 잘 알고 있는 지역 외에도 그 광활한 미개척의 땅을 하나하나 조사했을 때 그 결과에 자기도 놀랐다.

지금 그는 서재에서 중국 지도를 벽에 걸어 놓고 그 넓은 땅을 바라보고 있다. "기도하는 길만이 애타는 나의 심정을 달랠 수 있는 길이다"라고 말하며 못다한 포부를 주님께 아뢰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마음은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그 일에서 회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중국 선교를 위해 자신을 바쳐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는 자기 앞에 펼쳐진 성경말씀을 상고하면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를 사용하시기를 원하고 계심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테일러의 긴 은둔생활은 그것대로 가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실 큰 그릇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 달에 약 100만 명의 영혼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는데 이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결심을 해야 했다. 선교지에 나가 일하는 일꾼들을 위해 기도해 준다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솔선하여 그들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실로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결심이었다.

7년 반 동안, 그들의 결혼생활에 관한 한 완전한 세월이었다. 그녀는 위대한 그리고 겉보기에 불가능한 중국 내륙선교의 임무에 남편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어 주었다. 그녀의 생활 체험과 사랑으로 찬 부드러운 마음씨는 그녀를 선교의 어머니로 만들었다.

테일러 부부가 새로 이사를 한 코본가의 큰 집에는 얼마 안 가서 중국 선교사 지망자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테일러는 그가 가진 돈의 전부였던 50달러를 은행에 넣고 중국 내륙 선교회라는 은행구좌를 만들었다. 이 구좌 잔고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하여 수백 달러가 되었다. 그리고 선교사로 떠날 제1진 구성을 위해 계획이 시작됐다.

그는 중국의 절박한 영적 필요를 알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모든 필요가 충족된다는 것을 역설해야 했다. 중국의 영적 필요와 요구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테일러 부부는 쓰기 전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썼다. 이 책의 교파를 초월하겨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출판된 지 3주일만에 재판을 발행했다.

테일러가 제안하고 있는 일은 규모가 너무 방대해서 어느 한 교파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선교사를 자원하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선교부에서 봉급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데도 선교사로 나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테일러가 특별히 신경을 쓴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중국 복음 전파를 이유로 기성 교단에서 성도들의 헌금이나 사람을 유인해 내지 않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기성 교단에서는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르는 청년들이나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성도들 중에 자원하는 자가 있을 경우 이들을 격려하기를 원했다. 또한 반드시 중국 내륙 선교회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모금 운동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후보자 명단이나 모금 운동이 없이 순수한 기도의 응답으로만 중국 선교가 수행될 수 있다고 믿었다.

중국 선교를 위한 영국 본부의 주선은 용이하게 이뤄졌다. 쎄인트 힐에 있는 버거 부부를 중심으로 테일러 못지 않게 중국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 일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자기 집을 개방하여 선교의 일을 위해 본부로 삼았다. 마찬가지로 버거는 고국에서 책임을 졌다. 그는 선교사 지원자들과 서신 교환을 하고 헌금을 관리하고 수시로 발간되는 선교신문에 재정보고를 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절대로 빚지지 않는다는 것은 철칙이 되었다.

선교사 제 1진이 출항하기 전에 기도하고 이들 기도 제목들이 응답된 예는 일일이 소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의 배후에는 매일 정오에 테일러의 집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고, 일주일에 한번씩 토요일마다 기도회가 있었으며, 쎄인트 힐에서도 일주일에 한번씩 선교를 위한 기도회가 있었다. 특별히 이를 위한 금식과 기도가 있었다.

선교사 일행이 중국에 도착한 후 몇 년 동안, 이들 초기 사역자들에게는 분명한 소명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 주변에서 그리스도 없이 죽어가는 영혼을 특별히 사랑했다. 중국을 향해 출항하는 16명의 선교사와 4명의 어린이들은 4개월의 긴 항해를 해야 했다. 선교사 일행은 모두 젊은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테일러가 34세로 제일 나이가 많았다. 선원들은 이 선교사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코 앞에서 시험해 볼 수가 있었다. 이윽고 선원들은 자진해서 예배를 보아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업은 이 배 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선교사 일행이 목적지까지 무사히 항해했다는 것은 한 마디로 기적이었다. 왜냐하면 중국 해안에 닿을 때까지 한시도 예외없이 심한 풍랑과 폭풍우가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5일간은 태풍이 불어 망망대해에 추풍 낙엽처럼 파선 직전에 있었다. 태풍을 겪은 지 3일 후 한층 심각해졌다. 배에 식수가 떨어진 것이다. 모든 불도 다 꺼져 버려 밥을 지을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 식수를 구할 수가 없었다. 남녀 할것 없이 펌프에 매달려 물을 푸는 일에 전념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련 속에서도 기도의 응답으로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더욱 놀라운 기도의 응답은 그들이 상해에 도착한 후 모두 중국옷을 입고 내륙지방으로 집을 구하러 나설 때에 나타났다. 옛날에는 청나라 관리가 살았다는 큰 집이 하나 있었다. 새로운 집주인은 그 집의 일부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세를 놓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선교사들이 이 집에서 머물면서 주위의 많은 시선을 끌지 않고 집안에서부터 전도사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해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교인수는 50 - 60명이나 됐고 이들은 주일마다 열심히 참석했다. 그동안 테일러는 벌써 1차의 전도여행을 했다.

한편 테일러는 대단히 바빴다. 중국인의 새해가 되면서 환자들이 하루에 200명씩이나 몰려들었고, 비슷한 수자의 사람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1867년 봄, 선교사의 추가 일행이 영국에서 파송되어 중국에 도착했을 때, 테일러는 너무 바빠서 수시간이 지나서야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후 머지않아 죤 멕카디(John McCarthy)가 테일러의 전담조수로 일했다. 테일러는 모든 선교사의 모범이 되었고 모두 그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그를 잘못 이해하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중상모략에 의해 입은 상처는 컸으나 오직 사랑과 인내로 극복하였다.

그동안 계속해서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았고 1,500명의 신도가 넘는 교회의 모체가 세워졌다. 그러나 그 해 여름 너무나 뜻밖이고 견디기 힘든 슬픔이 왔다. 주님꼐서 선물로 주신 아이들 중 제일 귀엽던 맏딸을 잃게 된 것이다. 이제 겨우 8살이었다. 긴 여름 뜨거운 날씨에 그레이시(Gracie)가 약해지더니 갑자기 세상을 뜨고만 것이다. 테일러는 그의 모친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했다.

우리 귀여운 그레이시! 아침에 잠이 깨면 제일 먼저 달려와 인사를 하던 그 애의 달콤한 목 소리는 이제는 아침에도 해질 무렵에도 들을 수가 없어 그립기만 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 은 그 애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아니고 구원받은 그레이시를 데려가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 커다란 이별의 슬픔 속에서도 테일러 부부는 중국 내륙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업에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바쳤다. 16개월이라는 긴 항주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 그들은 그곳을 떠났다. 테일러 부부는 2개월간의 보트 생활끝에 양주시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양자강을 건너 다시 여행을 계속하여 대운하의 상류인 북방으로 수마일 더 올라갔다. 그래서 한때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총독으로 있던 인구 36먼의 도시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친절한 호텔 주인과 관심있는 방문객들이 몰려와서 전망이 밝게 보였다. 그러나 그 도시의 지식 계급들이 회의를 개최하고 모든 범죄와 악행이 외국인들, 특히 "예수교"를 전파하는 자들의 소행이라고 허위선전했다. 그 후 또다른 음모가 꾸며졌다.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48시간동안 선교사 일행은 신강성 가까이에 있는 보트속에서 부상당한 상처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폭풍과 같은 살인적인 격노로부터 보호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후 선교사들은 여느때와 같이 평온한 생활을 했다. 그들의 행동과 인정어린 마음씨를 통해서 주변 중국인들의 의혹을 완전히 벗기는데 성공했다. 선교사들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을 무렵 테일러의 네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또하나 기쁜 것은 두 명의 중국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5. 어두움의 시절과 변화된 생활

영국에선 양주 폭동이 의회와 전국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비난을 몰고 왔다. 매스콤에서 그 사건을 오해하고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양주 사건으로 한참 머리가 아픈데 설상가상으로 또 하나의 골치거리가 등장했다. 선교 초창기부터 말썽을 부리던 몇몇 선교사들이 사표를 제출하고 나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그렇지 않아도 오해가 많은데다 더욱더 오해를 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 결과로 버거의 지도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몇 선교부의 후원자들이 지원을 중단했다. 매스콤의 혹평과 더불어 지원까지 줄어들어 선교부의 재정은 심각할 정도로 위기에 봉착했다.

이 모든 와중에서도 선교부가 부름을 받은 개척 선교의 임무는 계속되었다. 개척 선교에 더 많은 물자와 사람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영국으로부터 오는 지원은 현저하게 줄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도 않은 일이 발생하여 그들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한 영국 사람이 있었다. 그는 기도와 믿음 하나로 2,000명(후엔 4,000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는 어려운 사정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주님의 약속만을 의지함으로 죠지 뮬러(George Muller)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했다.

양주 사건이 나자마자 그 소식이 영국에 정식으로 전달되기 훨씬 전에 뮬러는 중국 내륙 선교회에 재정적 지원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의 지원은 재정적 뿐만아니라 선교사들에게 큰 격려와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외적 시련은 그가 겪는 내적 시련에 비해 가벼운 것이었다. 내적 갈등과 실망의 수렁에서 헤매이고 있었다. 그는 모친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했다.

저는 가끔 어머님께 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질투를 받고, 어떤 사람에게는 멸시를 당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미움을 받고, 어떤 때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나 전혀 관계없 는 일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붙들어 주시지 않거나, 제가 하는 일이 곧 주님의 일이란 확신이 없으면 또한 "고난의 늪"에서도 그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 신이 없다면 저는 이미 쓰러지거나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먼 발치에서 따르고 있는 자신을 애통히 생각하며, 주님을 닮는 일에 게으른 저를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가끔 유혹도 받아 많은 시련을 경험합니다. 제가 얼마나 거짓된 마음을 가지고 있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곤 합니다. 한편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일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분에게 영광돌리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처럼 죄가 가득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고 자문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을 등뒤로 던져 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우 리를 영접하신 풍성한 은총을 다시 기뻐합니다. 제가 죄를 멀리할 수 있게 그리고 거룩하게 되도 록 또한 주님의 봉사에 더욱 크게 사용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후 6개월 후 그의 영적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테일러에게 변화된 생애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제 그는 "더이상 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멍에 대신에 자유, 실패 대신에 조용한 내적 승리, 두려움과 연약함 대신에 주안에서 느끼는 충분한 안식, 이러한 것들이 그를 지배했다. 그는 누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했다.

일로 말한다면 저의 일은 과도할 정도로 많고 책임도 무겁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한 압박감이나 긴장감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저의 마음은 지난 6-8개월동안 심히 고민하고 있었습니 다. 개인적으로나 선교 본부의 일을 위해서도 저는 거룩함과 생명력과 능력을 몹시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선교부의 일도 일이지만 개인적인 필요가 앞섰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배은감과 하나님께 가까이 살지 못하는 죄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저는 기도하고, 고민하고, 금식하고, 노력 하고, 결심하고, 성경말씀을 더욱 부지런히 읽고 묵상할 시간을 더욱 많이 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소용없었습니다. 매일, 거의 매시간 죄책감이 저를 억눌렀습니다. 저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 하고 한 순간도 주님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로 업무로, 아니면 계 속되는 방해물로 주님을 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저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와졌으며 화를 내도록 유혹을 당했고 원망을 하거니 불쾌한 언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매일매일이 죄와 실패와 능력의 결핍으로 일관되었습니다. 저는 자신을 미워했습니다. 저의 죄를 미워했습니다. 그 러나 죄를 이길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가 무능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께 도 저에게 도움과 힘을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녁이 되어 하루를 반성해 보면, 죄와 실패를 고백하면서 애통해야만 했습니다. 더욱 생활에서 범한 죄들은 이 죄들의 근원이 되 는 불신앙의 죄에 비하면 하잖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없을지라도 그는 미 쁘시니."라는 말씀과 "내가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기쁨 은 한량 없었습니다. 제가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를 생각했을 때 성령님께서는 제 영혼에 빛을 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단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을 뿐더러, 우리는 주님의 몸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경험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함이 가 져다 주는 안식입니다.

테일러의 변화된 삶은 달이 가고 해가 바뀌면서 숱한 시련을 통하여 얻어진 결과였다. 이제는 그리스도로 충만된 생활을 잃지 않았다. 시련이 오고 그 시련은 이전보다 더 어려웠지만 주님의 임재하심으로 넘쳐나오는 기쁨은 전혀 방해를 받지 않았다. 주님께 헌신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의 체험은 새로운 차원의 헌신이었다. 그것은 작은 일에나 큰 일에나 자신을 위한 최선의 것은 주님의 뜻에 충성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뜻을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그 뜻을 순종하는 것이었다.

천진 대학살 이전에도 테일러 부부는 개인적으로 큰 슬픔을 많이 맞이했다. 첫째 그들은 교육을 위해 사랑하는 아이들을 멀리 영국에 보내야 했다. 이것은 오랜 세월의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제 겨우 5살 밖에 안된 유난히 귀엽던 막내아들이 몹시 앓다 다음 날 새벽녘에 깊고 영원한 잠이 들어 버렸다. 그들이 맞이한 1870년의 여름은 그 이전 어느 여름보다 문제가 많은 여름이었다.

테일러 부부는 양주보다 신강성을 집으로 삼고 있었다. 천진 학살 사건 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려움이 거듭해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셨습니다. 남경에서는 중국인들의 분노가 지금까지 대단합니다. 저의 마음은 평안하지만 머리속에는 어려움들로 차 있어 대단히 복잡합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업은 방해를 받지 않았다. 당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쁨은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았다. 6월 중순 데즈그라즈(Desgraz)에게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데즈그라즈에게 좋은 귀절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요 7:37-39까지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것이 사실일까요? 양자강보다도 더욱 힘이 있고 깊으며 더욱 넘치는 강물이 흘러 나옵니다. 가뭄이 오 면 시냇물은 바닥을 드러내고 운하까지도 메말라 버리지만 양자강은 결코 메마르지 않습니다. 깊 은 물은 항상 흐르고 있으며 아무도 이를 저지할 수 없습니다. 내게로 와서 마시되 습관적으로 와서 마시라는 뜻입니다.

6주후 신강성에 있는 선교부에 기쁨과 슬픔이 뒤섞었다. 아들 하나가 새로 태어났으나 콜레라가 발병하여 엄마인 테일러 부인을 극도로 약화시켰다. 어린 아이는 이 세상에서 일주일을 살다가 다시 본향으로 가고 엄마도 그후 얼마 안 있어 어린애를 따랐다. 그녀 나이 겨우 33세였다.

그동안 외적인 어려움 역시 적지 않았다. 정치적 사태는 과거 어느 때보다 험악했다. 불란서 영사를 포함해서 21명의 외국인들이 학살된 천진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고 중국 당국은 유럽이 전쟁 상태에 돌입했음을 알고도 반외국감정을 완화시키려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871년 육체적인 질병으로 인해 "슬픔의 나날과 고통의 밤들"이 다가왔다. 테일러는 건강이 나빠져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심한 침체에 빠지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허파까지 아파 고통이 더할 뿐만아니라 호홉까지 어렵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도 상실감은 없어지지 않았다.


6. 넘치는 생애

1870년 시련의 시절 허드슨 테일러는 아직도 30대의 청년이었다. 선교부는 겨우 33명의 선교사를 확보하고 있었다. 세 지방에 지부를 설치하고, 10-12개밖에 안되는 조그만 교회마다 개심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 책임들이 한 사람에게만 몰렸을 때 그것은 무거운 짐이었다. 테일러는 벌써 5년 동안을 이렇게 피곤하게 중국에서 보냈다.

1871년 말경, 버거 부부는 그동안 선교부의 영국업무를 그토록 잘 이끌어 왔으나 그들의 일을 계속 지탱해 갈 수 없게 되었다. 쎄인트 힐의 선교부 집은 매각되어야 했고 모든 통신업무, 회계업무, 편집업무, 선교사 선발, 기타 세부적인 업무들도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야 했다. 이리하여 테일러는 황무지를 맞이하는 것같은 기분이었다. 이로 인해서 그는 영국에 머물러야 했다. 그는 선교부의 집행위원겸 중국내륙 선교회의 회장이 되었다.

선교부의 거대한 선교 사업을 추진해 나가기를 원하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이를 수행하지 못하고 사무실의 통상적인 일로 나날을 보내는 그는 마음이 착잡했다. 그러나 이토록 제한된 환경에서 생활했으나 주 예수님과의 참된 교제의 열매를 맺는 생활이었고 많은 젊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서 좋은 영향을 받았다. 영국에서 보낸 그의 준비기간도 열매가 풍성했다. 테일러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을 때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친구들로 구성된 후원회를 런던에 남기게 되었다.

선교부의 지도자인 테일러가 버거의 퇴임으로 업무 인수차 영국에 와서 15개월 동안 머무른 후 다시 중국을 찾아왔을 때, 질병과 기타 장애물들로 인하여 몇몇 옛 선교 본부의 사역이 침체되고 있었다. 교회들은 과거와는 달리 힘이 없었다. 선교 지부들도 인원이 부족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는 충성스러운 동료 한 사람을 그에게 보내 주셨다. 항주에서 여성 사역을 맡아 책임지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여성 지도자 폴딩(Faulding)양이 그의 두번째 아내가 된 것이다. 그는 양자강에서 부인과 합세하여 남경에서 3개월 머물면서 많은 시간을 전도하며 보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여행하면서 여러 지부를 방문하고 친근하고 접촉하기가 가능한 사람들로 가득 찬 밀집지역들을 통과하여 갈 때 그의 마음은 원근 각처의 아직 인도되지 않은 영혼들에게 있었다.

1874년 1월 27일 그는 성경 난외에 "저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50-100명의 중국인 전도자를 제게 추가로 주시옵소서"라고 썼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기도와는 반대로 그 후 그에게는 건강보다는 질병이 다가왔다. 그는 여러 주일을 자리에 누워 고통하며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붙들 수 있었다. 수개월동안 자금도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복음 사업 확장을 위한 자금이란 한푼도 손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륙지방으로 갈 것을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중국 내륙지방에도 하나님의 시간이 거의 왔다는 확신이 있었다. 바로 이때, 그가 아직 병상에 있으며 서서히 회복되고 있을 때, 영국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그것은 중국 내륙 선교회의 복음 확장 사업을 위해
800파운드를 기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새로운 어려움이 발생하여 서부개척이 지연되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용감하고 충성을 다했던 블레췰리 양이 너무나 많은 업무에 시달려 건강을 잃게 된 것이다. 테일러는 서부 선교부의 일을 하다 말고 쥬드에게 맡기고 영국으로 급히 가야했다. 그러나 그가 중국을 채 떠나기도 전에 사랑하는 친구 블레췰리 양은 세상을 떠났다. 이것 뿐이 아니었다. 그가 쥬드와 함께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갈때 넘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척추를 다친 것이 서서히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런던에 와서 무리를 한 탓인지 아래 다리가 점차 마비를 일으켜 끝내는 보조의자 신세가 되었다.

인생의 한창때에 이런 상태가 되어버린 그는 2층방에 누워 있었으나 할 일만 태산같이 떠올랐다. 모두가 자기 손이 가야 될 일들이었으나 하지 못하는 심정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이런 중에서도 그는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잃지 않았다. 그의 가슴을 압박해 오는 끝없는 일들과, 이를 추진하고자 하는 욕망과, 기도의 제목들과, 열려진 중국의 문과, 다시 부흥하는 영국인들의 영적인 열심과, 이 열심이 선교의 손길로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인간적으로 볼때 거의 희망이 없는 그의 건강과,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처지와 이 모든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였다.

테일러의 행동 반경은 이제 네 모서리를 가진 조그만 침대 위였다. 그러나 침대는 발쪽에는 아직도 중국지도가 걸려 있었다. 중국 전체 지도 외에 또 하나가 있었다면 그것은 주님의 임재하심이었다. 이제는 침대에 매어 놓은 로프의 도움을 받아서야 겨우 움직일 정도였다. 처음에는 편지도 손수 써 보냈으나 이제는 연필도 잡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손길을 통하여 기적적으로 중국에 송금할 자금을 채워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으나 중국 내륙지방으로 가는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18명의 개척 선교사들이 파송된 후에도 영국 관리의 살해사건으로 전쟁이 발발하여 어떤 것도 이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이 드디어 왔다. 최후의 순간에 중국 외무성에 변화가 일어났다. 총독 이흥찬은 황급히 해안으로 달려와 치푸에 와 있는 영국의 장관과 만나 유명한 조약을 조인했다. 이 조약으로 중국의 어느 지방이든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44세)

선교부의 개척 선교사들은 다음 2년 동안 총 3만 마일을 여행했다. 이때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의 중요한 결심을 해야 했다. 수년동안 개척하는 일로 고난을 겪고 있던 젊은 선교사들이 복음의 문이 전국적으로 활짝 열려 있으므로 이제는 결혼을 하고 안정된 가정을 중심으로 선교사업을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테일러는 여성 사역을 권장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신혼 선교사들을 내보내기로 결심했다. 처음 선발대를 보내기로 허락했을 때 주변의 항의는 대단했다. 사태는 점차 확대되어 그 후 1-2년동안 테일러는 신혼 선교사들을 험하고 먼 여행길을 떠나게 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한번은 18명의 개척 선교사중 한 사람인 니콜이 그와 함께 있었다. 그때 몇 통의 편지가 테일러의 사무실에 배달되었고, 그 편지들은 몇몇 선교 지부에서 폭동이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때 그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근심하고 고민한다고 그들에게 도움이 됩니까?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일도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무거운 마음을 주님께 맡깁시다."

당시 중국 북쪽지방에는 600만 명이 기아 선상에 있었고 처녀들은 종으로 팔려 나갔다. 그는 이들이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힘을 쓰고 있었다. 얼마 안되는 돈은 마련되었지만 그 빈민가를 찾아가 엄마 노릇을 할 여자 지원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테일러 부인은 현지로 가고 그는 영국으로 구호 모금 운동을 위해 온 것이다. 그 후 1년이 지나서야 부인을 만날 수 있었고(1879) 그 동안 그녀의 수고의 덕택으로 내륙지방 곳곳에 여성 사역이 서서히 문을 열게 되었다. 여성 선교가 시작된지 2년쯤 되었을 때 깊숙한 내륙지방에서 60-70명의 구원받은 중국인들이 조그만 교회에 모여 예배를 보게 되었다.

선교 사역에 생기를 불러 일으킨 여성 선교 사역의 배후에도 격렬하고 장구한 고난의 시간이 있었다. 1879년에는 테일러가 생명을 잃을 뻔한 심각한 질병을 앓았고 그 다음 해에는 사태가 호전됨에 따라 하나님의 축복도 있었으나 선교부는 축적된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수년에 걸친 기도와 강인한 노력의 결과로 이제 예전에 볼 수 없는 전도의 문이 열렸고 내륙지방이 그들앞에 개방되어 있었다. 새로운 사역자가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70명의 새로운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다. 기도의 응답이 오는 것을 3년으로 잡았다.(1882-1884). 그토록 짧은 기간에 70명의 선교사를 주선하여 파송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기도했던 70명의 선교사는 3년 내에 놀랍개 채워졌다.

1886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테일러는 그때 선교부의 제 1회 중국 선교부 회의를 개최했다. 각 지역 책임자들이 모여 1주일을 금식과 기도로 보내었다. 그러나 이 기도회에 참석한 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믿음의 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00명의 새로운 사역자를, 그것도 즉시 필요로 하는 사역자를 위해 기도하자는 것이다. 신중하게 이 제안을 검토한 후 테일러는 마침내 동의했다. 1887년이 되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선교부에 600명의 남녀가 자원하여 신청을 냈으며 그중 102명이 선발되어 모든 준비를 갖추고 파송되었다.

그 이듬해 1888년에 테일러는 미국에 가게 되었다. 그는 무디(D. L. Moody)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고 '나이아가라 성서 수양회'에 참석하여 여러 지도자들을 만났다. 3개월후 테일러가 중국으로 갔을 때 그는 혼자 가지 않았다. 14명의 젊은 남녀가 그와 동행하였다. 미국대륙의 힘이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각 종파에서 참여했고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서 헌금과 기도가 예상치 않게 몰려 오기 시작했으며 이는 그후 중국 복음화에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들의 관심과 지원이 성장하여 북미의 선교부가 창설되었고 헨리 프로스트가 이 선교부를 대표하여 이끌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테일러의 복음사업중 마지막 12년은 전세계적인 사역이 되었다.

선교부의 도움으로 광서를 비롯한 전 선교지에 전진을 위한 계획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새로운 고난의 세례가 먼저 있어야 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이 전국을 휩쓸었던 것이다. 이때 테일러는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막 영국에 도착했었다. 부인 테일러 여사는 그에게 스위스의 조용한 곳을 찾아 휴양을 하도록 권유했다. 그가 휴양하고 있을때 전보가 꼬리를 이어 폭동과 대량학살과 선교부의 곳곳에서 피난민들을 소탕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해 여름 중국을 휩쓴 공포의 소식으로 그는 영원히 잠들뻔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매달렸다. 사태가 극도로 악화되었을때 그는 "더이상 못 읽겠다. 기도할 수도 없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다."라고 고통의 심정을 표현했다.

테일러는 그후 중국에서 새로운 복음의 문이 개방되는 날을 볼 때까지 살았다. 자기가 사랑하고 기도해 오던 중국 땅에 다시 한번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홀로 돌아왔다. 수년간 함께 동반자가 되어준 반려자는 그들의 순례의 길을 밝게 비춰즈는 등불이었으나 스위스의 제네바 호수곁 베비(Vevey) 산 기슭에서 영영 잠든 것이다.

테일러는 이번 중국 방문 여행에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중국을 향했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그가 선교지부의 하나하나를 거쳐갈 때 그곳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존경심으로 영접해 주었다. 어디를 가나 "중국의 은인"으로 불리웠다. 양자강을 따라 한구까지 여행한 후 몇 주일을 호남성의 북쪽지방에서 묵은 후 한번 더 여행을 시도했다. 호남성까지는 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30년이 넘도록 이 지역을 기도가운데 기억했고 호남성의 기독교인들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들러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프랭크 켈러(Frank Keller)박사 집에 모여 그들은 그토록 많이 들어왔던 선교의 창시자인 테일러를 인도자로 예배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 밤 주님의 부르심이 왔다. 그것은 영생의 문턱을 넘어선 반가운 행진이었다. 그 방은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으로 가득차 있었다.(1905. 6. 3, 7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