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예화)
축복의 꽃
오래 전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병에 걸린 어머니를 간호하는 착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캤다.
어느 날 소녀는 절벽 사이에 돋아나 있는약초를 캐다 그만 굴러 떨어졌고소녀가 흘린 피로 주변의 하얀 꽃이 빨갛게 물들었다.
소녀의 정신이 희미해질 때 예수님이 나타나 "저 피 묻은 꽃을 꺾어 어머니에게 갖다드려라"고 말씀하셨고 그 순간 소녀는 힘을 얻고 일어나그 꽃을 어머니에게 갖다드렸다.
어머니도 병석에서 일어나 건강을 되찾았다. 포인세티아 꽃의 전설이다.
그래서 일까 이 꽃의 꽃말은 '희생' 또는 '축복'이다. 희생은 축복의 열매를 맺는다.
기다림과 축복
본문: 사 30:18
오늘 본문 말씀 이사야서 30:18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 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를 기다리신다고 했고 또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5:11에도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자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고 조급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도 없고 하나님 의 축복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라는 아들을 주실 때까지 참으며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뜻으로 하나님의 일을 촉진시켜 보려다가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고 큰 불화와 후세에 전쟁의 불씨를 남겨 주었습니다. 오늘날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곧 이스마엘과 이삭의 전쟁인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계시의 꿈을 꾼 다음에 형제들의 모함으로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도 하고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도 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원망하지 않고 14년이 나 참고 기다리다가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7년간이나 사울왕의 창칼을 피하여 이 굴, 저 굴, 이 바위, 저 바위를 숨어 다녔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축복의 날이 올 때까지 잘 기다렸기 때문에 대 성군 다윗 왕이 된 것입니다. 참고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큰 그릇이 될 수 없고 큰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시편 37:7에 보면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지어다" 했습니다. 복 받을 일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축복이 안 나타나고 응답이 오지 않습니까? 그럴지라도 불평하지 말고 참으며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은 도리어 "슬픔과 고 난의 보자기에 축복을 싸다 준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역대 하나님의 귀한 성도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다 겪었습니다.
고통이나 시련이 올 때 불평이나 낙심대신 "주여 감사합니다. 이 시험이 지난 뒤에는 무슨 축복을 주시 려고 하십니까"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시련의 크기 만큼, 고통의 크기 만큼 그 다음에 큰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감사할 수 없는 것을 감사하며 기다릴 때 기적적인 축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불평하지 말고 기다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계속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시편 40:1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계속 기도하며 기다리지 않는 자는 응답을 받기 어렵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하늘 나라에는 되돌아온 소포가 많을 것이다" 그랬습니다. 참고 기다리며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응답이 되돌아 오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낙심치 않고 계속 부르짖어 응답을 받았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재판관에게 애원할 때도 물러설 줄 모르고 계속 매어 달리다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기도는 응답이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 며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때가 되면 내 뜻과 내 생각대로는 안 되어도 다른 방법으로라도 하나님은 꼭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기도하며 기다리던 120명의 성도는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지만 실상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그 약속을 들은 사람이 500여명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120명 외에는 중간에 다 낙심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못 받은 줄 압니다. 믿고 기도한 것은 은행에 저금한 것 이상으로 정확하게 찾는 때가 옵니다. 씨앗을 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것은 즉시 이루어 주시고 어떤 기도는 몇 년 후에 이루어 주시고 어떤 경우는 수 십년 후에 이루어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박국 2:3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자.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셨습니다.
3.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득이 참고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은 큰 축복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0:23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해도, 십일조를 해도, 봉사생활을 해도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움직이지 말고 꾸준히 계속해야 합니다. 조급하고 안절 부절하는 사람은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기다림이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참고 기다리십시오. 불평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계속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움직이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꾸준히 참고 계속하십시오. 그럴 때에 정오의 햇빛같이 빛나는 때가 오며 축복의 날이 오는 것입니다.-아멘-
축복에 익숙해지는 병
그리스도인들에게 종종 찾아오는 특별한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에 익숙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해가 일 년에 한 번만 뜬다고 해 보십 시오. 많은 사람들은 그 해를 보고 감탄할 것이며, 해를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뜹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감사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평거리만을 찾아 다닙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
우리는 축복에 익숙해져 있는 마음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그 유일한 치료 방법은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 그분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보고 듣는 것마다 신기해하며 놀라움을 발하듯이 말입니다.
"주님, 저희는 너무나 많은 감사거리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습니다. 저희의 마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혹, 당신은 감사를 잃어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
평범한 은혜와 생활의 위안,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 좋은 음식과 옷, 따뜻함과 빛, 그리고 공기, 가정의 평화와 사랑의 신성한 끈 등 우리가 해야 할 감사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감사는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주어진 환경을 감사하는 사람보다 환경을 비판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 줄리어스 시저가 큰 잔치를 열어 많은 신하들을 초청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날씨가 돌변하여 비바람이 몰아치자 시중을 들던 신하들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시저는 그 신하들에게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도록 명령했습니다. 잠시 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자신들이 하늘을 향해 쏘았던 화살이 되돌아와 상처를 입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원망과 불평은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사막처럼 메마르고 황폐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 보는 사람까지도 괴롭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 보는 사람에게도 감동을 주어 우리 주위의 환경도 더 좋게 만듭니다.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 세상의 삶을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건이나 사물을 볼 때마다 무슨 비판 왕국에서 온 사람처럼 신랄하게 비판만 하는 이가 있습니다. 이 사람처럼 다른 사람을 비판만 하는 자는 결국 자신이 하는 그 비판으로 도리어 자신이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우리는 남자로 태어날 것인가, 여자로 태어날 것인가 생각하며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의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내 주위의 모든 환경은 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모든 환경에 대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배어 있을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모를 원망하거나 불평한다는 것은 축복의 우산을 스스로 버리는 꼴이 됩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자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온유함과 겸손함을 늘 풍길 것입니다. 자신의 환경에 대해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은 아직도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자일 것입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 청각 장애자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는 소년 시절에 기차 안에서 신문을 팔면서 틈이 나는 대로 열차 한구석에서 실험을 하곤 했는데, 어느 날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실험을 하다가 기차의 진동으로 화학약품이 떨어져 불이 나서 소동이 일어나자 격분한 승무원이 에디슨을 기차에서 밀어 떨어뜨렸는데 이때의 충격으로 고막이 파열되었다고 합니다. 훗날 에디슨에게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실험과 연구에 불편함이 없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에게 “나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사실에 대해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감사는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비록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으며 감사한다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오늘 본문의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부모님의 사랑을 온통 다 받고 성장하다가 하루아침에 종이 되어 외국으로 팔려간 신세가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어려운 환경이라면 그래도 잘 버틸 수 있는데, 잘 살다가 갑자기 환경이 바꾸면 견디기 더 어려운 법입니다. 요셉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갑자기 변한 자신의 환경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그때 요셉의 나이는 성숙한 40대가 아니라 17세 청소년기였음을 기억해 보십시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십대의 나이에 강제 가출을 당하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외국 생활을 할 때 얼마나 고독했겠습니까? 보고 싶은 부모님, 미운 형들, 타지에서의 문화 충격, 노예 생활…. 거기에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었던 환경은 또한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하루 이틀도 아닌 수년간의 감옥 생활을 요셉은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요?
사람은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면 굉장히 불안해하기 마련입니다. 감옥 생활하는 요셉의 미래는 그야말로 어두움뿐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환경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오히려 감사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꿔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꿋꿋하게 살아갔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자신을 애굽에 팔았던 형들에게 요셉이 말하는 장면입니다.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다같이 오늘 본문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4-8)
이렇게 요셉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크게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 어려운 환경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도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감사로 인내하면 더 좋은 감사의 조건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처한 환경을 원망하고 불평할 때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하늘을 향해 쏟아 부은 그 원망과 불평은 줄리어스 시저의 신하들의 화살처럼 자신들에게 오히려 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조건 속에서도 원망과 불평 없이 감사했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뿐 아니라 자기 민족, 아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살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자신이 처한 환경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손 가정이라 할지라도 혹은 몸이 다소 불편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감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부모를 원망하고 자기 자신을 학대한다면 결코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어떤 육체적 질병 속에서, 혹은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내하며 살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처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칼란 지브란의 『방랑자』란 책에 보면 우리가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떤 조개가 친구 조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 난 몸속이 많이 아파. 이상한 물건이 내 몸속에 있어서 얼마나 괴로운지 몰라”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 조개는 기세가 당당하여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난 아무 데도 아프지 않아. 난 몸속이나 몸 밖이나 모두 건강해.” 바로 그때 예쁜 게가 지나가다 둘의 이야기를 들었다. 예쁜 게는 건강을 자랑하는 조개에게 말하기를 “그래, 너는 건강하고 완전하지. 하지만 그뿐이잖니. 네 옆에 있는 조개는 지금은 고통을 당하지만 그 속에 굉장히 아름다운 진주를 품고 있는 거란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바다에 비교하곤 합니다. 파도가 없는 바다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바다에 파도가 없다면 그 물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더럽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는 고통, 실수, 아픔들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고귀한 인격과 열매를 맺게 해줍니다.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 다이아몬드나 황금 문이 아니라 ‘진주 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고통 속에 생기는 진주, 고난과 핍박을 이겨내고 통과하는 진주 문을 바라보세요.
한창 공부해야 할 청소년 시기에 때로는 생각지도 않은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무릎을 꿇고 좌절하고 만다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 환경의 현실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하겠습니까? 내 주위와 모든 환경을 받아들이고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항로에 순풍을 몰아오는 비결입니다. 감사하는 이에게는 계속 감사의 조건이 오고, 불평하는 이에게는 계속 불평의 요소가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향하신 계획을 지금은 잘 알 수 없지만. 여러분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사로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요셉과 같은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자, 이제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언젠가 우리를 진주와 같이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불행한 조건 속에서도 감사를 드릴 수 있다면, 진흙 속에 장미가 피어나듯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감사의 조건들이 피어오를 것입니다.
거듭남의 축복
본문 : 요 3: 1 ~ 4
사람은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의미를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인생의 목적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무지하게 동물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실제로는 잘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 구원받지 못한 니고데모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기 때문에 어떤 고통과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행복하고 의미있게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을 가리켜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삶의 목적을 잃고 살아갑니다. 무신론자의 최대 고민은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영원을 거부했기 때문에 자신이 죽은 후에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특징은 어떤 형태의 종교를 가지고는 있고 자기 자신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이기에 불안해 하고 갈등합니다.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적당히 살아갑니다.
이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이 오늘 성경에 나타난 ‘니고데모’라는 사람입니다. 1절에서 니고데모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에 대한 첫 번째 설명은 ‘바리새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바리새인이라는 뜻은 ‘분리주의자’입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고 살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확실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아주 엄격하게 도덕적으로 살려고 애썼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에는 이들이 6천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세력이었고, 이들 중에서 대 율법학자나 경건한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을 의미합니다. 7천 명 중에서 70명만 뽑히는 사람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의원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모든 분야에서 법을 집행할 수 있고, 경찰권과 권력을 가진 단체입니다. 그들은 사형 외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1절은 니고데모가 유대인이면서도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또 10절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네가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것도 모르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선생’이라는 칭호를 받는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19장 39절에서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라는 말과 함께 등장합니다. 이 니고데모는 예전에 예수님을 찾아갔던 니고데모가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재정적으로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39~40)”며 그가 예수님의 시신을 처리해 처리해주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라는 종교적 그룹과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권력그룹에 속해 있고 지성인이었으며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배고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억울한 사정이 있거나 옷을 못 입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부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는 한 밤중에 찾아올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검증이 되지 않은 예수에게 찾아와 상담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이 사람이 왜 예수를 찾아 왔을까요?
■ 니고데모를 혼란케 한 ‘예수’
우리는 이 두 가지 질문을 연결해 보면 다음과 같은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뭔가 불안해합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살아왔지만 내면의 불안함이 있어 밤중에라도 예수라는 청년을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라는 청년이 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강력한 지적인 호기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니고데모가 믿어왔던 엄격한 율법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니고데모가 말은 하지 않지만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라는 청년을 비판할 수도 지지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어떤 사실을 믿는 행위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의심과 혼란과 극도의 호기심에서 출발합니다. 처음부터 믿어지지 않습니다. 거부하고 불안해하고 혼돈 속에 있다가 빛을 보는 것입니다. 그 빛을 보고 내 마음 속에 흔들릴 수 없는 분명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호기심과 여러 영적갈등을 느끼며 밤중에 예수를 찾아갔지만 19장에 가서야 믿음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많은 과정과 시간을 거쳐서 하나씩 내 안에 빛과 진리를 깨달으면서 만들어지고 성숙해집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첫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 하신다면 당신이 행하는 이 기적과 표적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좀더 알아보고 싶고 혼돈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합니다.
니고데모의 이 말속에는 우리가 이해할 만한 말이 많습니다. 그는 ‘내가’라는 말 대신 ‘우리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는 인생의 주체를 자기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집단 속에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유교문화와 군대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원래 남자는 그런거야’라고 왜곡된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소리지르며 권위적으로 삽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내’가 중요합니다. 삶에 있어서는 ‘우리’로 살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는 ‘우리’가 죽지 않고 ‘내’가 죽습니다. 부인과 아무리 오래 같이 살았어도 죽을 때에도 같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니고데모는 ‘우리’라는 집단 속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니고데모의 말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선생인줄 ‘아나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인식의 사람입니다. 아는 것은 힘이 아닙니다. 많이 알면 괴롭기만 합니다. 믿음이 힘입니다. 아는 단계를 넘어 믿음의 단계로 갑니다.
니고데모는 모든 정보의 확인, 인식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마 예수는 우리와 다른 특별한 존재일 것이다” 혹은 “아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과 믿음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다거나 교회에 나온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통해 예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이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또 한 가지 니고데모의 말속에는 예수가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모는 부인할 수도 긍정할수도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구도자라고 합니다. 반대는 하지 않지만 긍정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좋은 감정만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예배에 온 사람 중에도 이와 같은 사람이 있을 줄 압니다.
■ 거듭나지 아니하면...
호기심과 내적인 불안을 가진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으로 대답하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아주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며 하시는 말씀은 중요한 말씀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열쇠는 ‘거듭남’입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종교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남을 받았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거듭났습니까?’
우리가 익숙한 것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익숙하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하면 불안합니다. 그곳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말을 하면 괜찮지만 죽음에 대한 말을 하면 불안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의 불안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후에 대한 것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환영하지 않는 이유는 저 세상에 대한 불안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 하고 죽음이 오면 눈물 흘리며 괴로워합니다. 병이 들면 불안해 하는 것도 죽음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없다면 사람이 동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식물과 동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천국도 없고 영원도 없이 현실만 있다면 도덕적으로 살 이유가 없습니다. 영원을 부인하고 저 세상을 부인하면 좋지만 불안해집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언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이 없다면 ‘영생’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옥’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지옥’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옥이 없다면 그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없다면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사랑’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우리는 식물과 다릅니다. 우리는 고민하고 불안해하고 몸부림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았을 때 인간은 괴로워합니다. 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이 영원으로 가는 문을 깨닫지 못할 때 방황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 실존하는 ‘천국’
고아가 된 아이나 입양된 아이에게 원래 부모가 없었던 것이 아니듯 천국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삶이 고독하고 추하고 허무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삶이 이 곳이 아니라 저 곳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모에게서의 탄생이 진정한 탄생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니고데모가 이 말을 듣고 알아들었을까요? 4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니고데모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는 인간적인 지식은 있었지만 영적인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제2의 탄생을 아십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이 새해 아침에 질문하십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혹은 집사나 장로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제2의 탄생을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중요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도 만질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제1의 탄생이 동물적인 것이라면 제 2의 탄생은 영적인 것입니다. 거듭난 자만이 진정한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성만찬을 합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이 내 안에 들어와서
제 2의 탄생, 축복된 탄생인 거듭남의 의미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을 통한 축복
인도의 성자인 선다싱이라는 분이 있는데,그 분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눈이 잔뜩 덮힌 히말라야 산 건너편에 있는 사원에 가기 위하여 어느 나그네가 추운 겨울날 눈보라를 헤치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눈 속에 쓰러져 동사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어물어물하다가는 자기도 얼어 죽겠다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얼마후 그 길을 또 한 사람의 나그네가 가다가 거의 얼어 죽게 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사람을 내가 구해야 되겠구나.'하고 생각하고는 그를 업고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산 너머 사원까지 갔습니다. 그 사람은 힘이 들어 땀이 났습니다 그런데 가다 보니 길가에 얼어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먼저 가면서 지나쳤던 사람이 얼어서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만 살겠다고 혼자 지나쳐 간사람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그를 업고 가던 사람은 그를 업었던 탓으로 힘을 쏟아 그 자신의 체온을 높이고, 그로 인해 등에 업힌 사람까지 살려 내어 결국 두 사람의 주고 받은 체온 덕택에 둘 다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것이 기독교 사랑의 실천윤리입니다.
축복 받은 선물
미국의 작가 오 헨리의 단편 소설 중에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읍니다. 그는 소년 시절 당시 어느 시골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 앉았던 짝은 예쁘고 청순한 어린 소녀였읍니다.
성장하여 어른이 됨에 따라. 그는 나쁜 친구들의 틈에 끼이게 되었고 마침내는 도둑질까지 하게 되었읍니다. 어느 날, 한 남자의 주머니를 성공적으로 턴 것을 기뻐하며 길을 걷고 있을 때, 그는 마침 옛날 자기의 짝이었던 그 소녀가 거리를 마주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녀는 변함없이 아름답고 순결한 옛 모습 그대로였읍니다. 그에 비하여 자신의 모습은 얼마나 비천해지고 말았는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는 거리의 한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는 머리를 가로등에 기댄 채,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울부짖었읍니다. “오. 하나님!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미운지 모릅니다.” 과거에 대한 그의 기억은 그 자신이 지금 얼마나 혐오스러운 인간이 되었는가를 깨닫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기억력이야말로 정말 축복받은 선물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식어지던 사랑도, 그들이 구혼하던 시절과 결혼 후 처음 몇 년 간 행복하게 지냈던 일들을 기억해냄으로써 옛날과 같이 다시 불붙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살아 계시며 그토록 귀한 분이었던 그 행복스럽던 시절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하나님께 돌아가 한때 그분과 누렸던 달콤한 교제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철저한 순종에서 오는 축복
여호수아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백성을 점검했습니다. 그는 장로들과 더불어 백성들 앞서 아이성으로 올라갔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군사작전을 짠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리더십입니다. 여호수아는 결코 자신의 판단력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않
았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나 사람들의 여론에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이성은 완전히 무너져 불에 탔으며 아이성 왕은 산채로 사로잡혀 여호수아 앞에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수 8:25 "그 날에 아이 사람의 전부가 죽었으니 남녀가 일만 이천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통쾌한 승리입니까?
여호수아는 아이성의 거민이 진멸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은 손을 거두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단창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29절에 보면 아이 왕을 저녁 해질 때까지 그 시체를 나무에 달았다가 내려서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순종은 철저한 승리를 낳습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리더십임을 기억하십시오.
고난과 축복
몇 년 전에 고기잡이 배들이 뉴잉글랜드의 동부 연안에 있는 한 작은 어항으로부터 출어하였습니다. 오후에 그들은 큰 폭풍을 만났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그 어선들 중 단 한 척의 배도 항구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들의 부인들, 어머니, 아이들, 그리고 애인들은 해변을 오르내리면서 손을 모아 하나님께 그들을 구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상황에 공포는 더하여, 한 오두막이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이 모두 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집을 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 기쁘게도 모든 어선들이 연안에 있는 항구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절망의 얼굴을 한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집이 불타버린 남자의 아내였습니다. 육지로 올라 와서 그의 남편을 맞이했을 때 그녀는 울며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는 망했어요. 우리 집과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이 불에 타버렸어요." 그러나 남자가 말하였습니다. "그 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오. 모든 어선들을 항구로 무사히 인도한 것은 우리의 불타는 오두막에서 나오는 불빛이었다오 ! "
구원의 축복
화가‘잭슨 폴록’의 전기와 ‘미국 최고의 의사들’이라는 책을 쓴 미국의 작가 그레고
리 화이트 스미스는 34세에 머리 속에 10년 이상 자리잡고 있던 양성 뇌종양이 갑작스럽게 악성으로 변해서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앞으로 3개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사들로부터 들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난 후 투숙하고 있던 호텔의 커피방에 들러 계피 롤빵을 모조리 사서 먹어 치웠다. 그리고 나서 그의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하였다.
며칠 후, 텔레비젼에서 기상통보관이 “내일은 우산을 준비하지 않으셔도 좋을 듯 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는 그의 수명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을 거라고 했던 의사의 진단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의사들은 기상통보관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불변의 자연법칙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한 예측을 전달할 따름이다.그는 확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바로 그날부터 그는 무엇이든 의문이 생기면 끝까지 추적하여 뿌리를 뽑게 되었다. 그는 미국내에서 아니 세계에서 종양 치료에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의사들을 찾는 일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들이 일하고 있는 병원의 명성, 그들의 출신교,또는 그들이 어떤 유명 인사들을 치료했는가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그가 목표한 것은 그에게 나타난 증상과 같은 증상을 보인 환자를 치료한 경험이 있는 의사를 찾는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그는 ‘미국 최고의 의사들’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미국 전역의 우수한 의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들에게 자기 분야의
최고의 전문의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괜찮다 싶은 의사를 추천받으면 그때마다 그는 그들과 통화를 하거나 그들을 직접 찾아가거나 그의 뇌사진을 그들에게 보내거나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뉴욕의 신경방사선 전문의 사덱 힐럴을 찾아냈다.그는 혈액 속에 약물을 투입하여 종양의 크기를 줄이는 치료법을 권했다.그 방법으로 치료를 하기 시작한지 수주만에 종양의 크기가 50% 정도 줄어들었다.하지만 종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서 그는 수술을 받았다.그는 뇌종양 수술의 권위자를 찾아놓고 있었다. 그는 바로 버지니아 대학교의 빈코 돌렌스 박사였다. 돌렌스 박사의 치료 덕분에 G.W.Smith는 감사하며 살아 가게되었다.이런 경험을 토대로 그는 의사만 제대로 만나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러한 의사를 찾아내기는 몹시 어렵다. 질병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경우,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그 사실에 감정적으로 굴복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의 병을 치료해줄 의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가 어려워지고 모든 일이 허망하게 느껴진다.따라서 의사를 선택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를 행사하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게 없다.그러나 사형선고를 받고도 죽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항상’기회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영혼의 병자들로서 죽음을 선고 받은 자들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선 우리의 병을 고쳐 줄 훌륭한 의사를 보내 주셨다. 그분은 멀리 계시거나 찾기 어려운 곳에 계신 분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와 심판에 대하여 듣고 괴로워하면서 구원을 요청할 때 그분은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예수 그리스도만이 영혼의 병, 죄로부터 우리를 온전하게 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참의사이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축복 받은 소망
어니스트 색클톤 경이 남극을 탐험하였을 때 자신의 밑에 있었던 사람들을 불가피하게 코끼리 섬에 남겨 두어야만 하는 경우를 당하였다.
그는 곧 그들을 영국으로 데려갈 것을 약속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연기되어야만 하였다. 그가 그들에게 가려고 할 때는 공교롭게도 바다는 얼어붙어 자기 휘하에 거느린 사람들은 고립되어야만 하였다.
세 번이나 그들을 구조하려 하였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하여 빙판에 구멍을 뚫으며 갔다. 조그만 배로 섬에 도착하자 그는 자기 휘하의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았을 뿐 아니라 배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매우 기뻤다.
그들은 곧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였다. 모든 흥분이 가라앉자 어니스트 경운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승선할 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그들의 지도자가 잠을 깨우며 "항상 갈 준비를 해두시오. 오늘 주인이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라고 외쳤다고 말하였다.
이 세상에 다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색클톤 경이 코끼리 섬에 들어간 것보다 더욱 확실한 것이다. 구세주가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는 약속은 그분의 말씀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축복 받은 희망" - 반드시 이루어질 희망"-인 것이다.
축복을 더해주는 감사신앙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금년에도 엄청난 수마가 우리 나라와 이웃을 할퀴고 갔고 여러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 아픔 속에서도 우리가 건강하게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감사거리를 찾아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갈등하는 많은 문제는 사실 감사하지 못하는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 감사하는 것! 바로 삶의 최대의 지혜입니다.
특히 어려울 때 감사해야 진짜 감사입니다.
어려울 때 한번 감사하는 것은 일이 잘 될 때 백 번 감사하는 것보다 가치 있습니다. 주님은 어려울 때 감사하면 "네 믿음이 크구나!" 하시면서 더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어려워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 높으신 뜻이 있음을 믿고 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사람은 실패를 죽기보다 싫어하지만 실패를 잘 요리하면 성공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고상한 실패는 수많은 저속한 성공보다 더 소중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 더 많은 교훈을 얻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교훈만 얻습니까? 그때 바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람이 실패 속에서 자기 연약함을 인정할수록 하나님 만날 가능성은 더 높아집니다.
얼마 전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의 저자 레나 마리아가 내한 공연을 했습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양손이 없었고, 한쪽 발도 짧았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발로 글을 쓰고, 발로 밥을 먹고,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고, 십자수도 놓았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수영과 운전도 하게 되었고 장애인 올림픽에서 상도 받았습니다. 특히 얼마나 노래를 잘 하는지 아름다운 찬양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녀는 자기를 장애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다르게 사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천사의 표정을 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진정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며 희망을 노래해야 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은 크게 영광 받으시고, 큰 축복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 살면서 시련도 있어야 합니다 >
때로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도 사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 어려움 때문에 우리가 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편하고, 일이 잘 풀리고, 자녀가 잘 나가면 잘 믿을 것 같지만 더 못 믿게 됩니다. 대개 망하는 사람을 보면 환난 때문에 망하기보다 잘 되는 것 때문에 더 망합니다. 잘 된다고 흥청망청 살고, 음란하고, 안일하게 사니까 내 안에서 망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전혀 없기를 원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더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어려움도 예상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어려움은 더 안 찾아오고, 어려움이 찾아와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입고 돈과 권력과 지위와 건강이 있어야 행복합니까? 자기의 사람됨은 저 밑바닥에 있고, 자기 영혼은 병들었는데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추한 모습으로 건강하게 살기보다 건강은 약해도 아름답게 사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건강, 내 생명, 내 가는 길을 지켜 주셔야 우리는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의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평안하게 지냈습니까? 다른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외적으로 불안하니까 만리장성을 쌓았고, 내적으로 불안하니까 아방궁을 지었습니다. 건강이 불안하니까 동남동녀 3천 명을 동해 신선도로 보내 불로초를 구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대적은 다 죽였지만 오래 못 살고 아방궁에서 마흔 아홉 살에 죽습니다.
여러분! 때로는 외적도 있고, 내적도 있고, 힘든 상황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도하고, 그래야 우리가 바로 살고, 우리가 겸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시황처럼 별난 것을 먹고, 유별나게 살아야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잘 믿어야 참 행복과 위로부터 주시는 무한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이 없으면 자기밖에 모르게 되지만,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은 남을 생각해 줍니다.
어떤 재벌 아들이 미국 가서는 편지 안 하더니 군대 가서는 편지를 잘 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역시 군대 잘 갔다. 군대 대학이 제일 좋은 대학이구나!" 했다고 합니다.
어려워봐야 부모가 보이고 형제가 보이고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쉽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이란 어려움이 없는 삶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이 와도 감사하며 이겨내는 믿음의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에도 하나님을 믿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축복을 얻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
오늘 본문은 10명의 문둥병자 얘기를 통해서 감사를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문둥병자는 사람들과 격리되어 가족을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상처와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얼마나 절망적인 일입니까? 그들이 예수님 소식을 듣고, 멀리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세요!"하고 울부짖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의 한을 아시고, 고쳐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말씀만 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
당시에는 제사장이 문둥병이 나았다고 판정해야 가족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어떤 상처 때문에 불평이 늘어난 교만한 문둥병자가 이렇게 불평합니다.
"안수도 안해주고 이게 뭐야! 예수님이란 분도 별 수 없어! 우리가 더럽단 말이지!"
가장 큰 비극은 불행을 당했을 때 자기 불행에만 매달려 사는 거만한 모습입니다. 만약 이 문둥병 환자들이 불행에 매달렸다면 결코 그 병은 낫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행을 당했을 때 필요한 것은 불행보다 주님의 긍휼에 매달리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다행히 문둥병자들은 겸손하게 말씀에 순종하며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러 떠났습니다.
문둥병자가 병도 낫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순종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다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가족들 만날 부푼 꿈을 안고 계속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한 명은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가다가 발길을 돌려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그런 행동을 '하나님께 영광 돌린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원한다는 고백을 많이 하고,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인지를 잘 모릅니다. 자기가 믿는 자로서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믿는 자로서 실패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하는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란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면 좋은 일을 해도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름을 드러낼수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크기가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나면 감사하되, 이름을 억지로 내지 않을수록 하나님께서 더 영광 받으십니다. 얼마 전, 가난한 제 3세계 사람들에게 신학 공부를 시켜주는 안디옥 선교회를 갔을 때
이슬람권에서 온 학생들이 콘테이너 박스 안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노동으로 피곤에 지친 얼굴을 하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며 공부하는 그들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 관한 글을 인터넷에 게시하자 한 분이 조용히 한 사람 교육비를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등록금 보조를 받은 학생은 누가 자신을 도와주었는지 모르니 어떻게 합니까?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신학생이 도와준 분을 알고 큰절을 했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이 이름 없이 선행을 하니까 결국 전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름 없이 선행을 하게 되었을까요? 은혜 받고 감사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인터넷으로 말씀을 대했지만 마음에 감사를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나 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 감사하면 더 큰 감사거리를 주십니다 >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하러 온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열 명이 다 깨끗하게 되었는데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
그리고 나서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그 한 사람에게 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두 가지 큰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인정이었습니다. "너밖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없구나!"(18절)
이 세상 살면서 가장 큰 축복은 남에게 인정받는 것, 특히 주님에게 인정받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
한 명의 감사를 표현한 문둥병자는 결국 '주님의 인정'과 '구원의 은혜'까지 받았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에 비하면 문둥병자의 병이 나은 은혜는 오히려 작은 것이 아닐까요?
그처럼 감사할 것에 대해 감사하면 반드시 높은 이자와 함께 축복이 돌아오게 됩니다. '감사의 문'이 열리면 '하늘 문'이 열리고, '행복의 문'도 반드시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암에 걸렸습니다. 몸이 힘드니까 간호하던 자녀들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의 심방예배를 받으면서 이분은 모든 것을 감사하기로 다짐했습니다.
한번 감사하기로 작정하고 이분은 죽도록 감사하는 삶을 실천했습니다. 병원에 오는 분마다 이분의 감사 고백을 듣고 오히려 용기를 얻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처럼 죽도록 감사를 실천하니까 암세포가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면 영혼과 육신의 암까지 치료되고,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 감사한 일이 있으면 바로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
나머지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요? 아마 그들 중에는 제사장에게 보여 완치 판정을 받고 가족들을 만난 후, 가족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감사하러 오겠다는 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일을 미루면 대개 감사하지 못하고 다시 자기 욕망대로 살게 됩니다. 병들었을 때는 "이 병만 고쳐주시면 제일 잘 믿을게요."라고 누구든지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병이 낫고 조금 시간이 흐르게 되면 다시 자기 욕망대로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감사의 때를 놓치지 말고, 특히 더 늦어 후회가 되기 전에 부모님께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요구하는 모습은 많아 보여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은 적습니다. 육체가 무감각해지는 문둥병보다 은혜에 무감각해지는 영적 문둥병이 더 문제입니다. 은혜에 무감각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때는 행복이 끝장나는 줄 알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속에는 성령님께서 거하지만 불평하는 마음속에는 마귀가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감사할 때, 말로만 감사하기보다 시간으로도, 몸으로도, 물질로도 감사하십시오. 사실상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지 않습니까?
복음의 최전방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들도 역시 실질적으로 물질이 많이 필요합니다. 누가 그 필요를 채워줄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감사를 아는 우리가 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저는 믿음이 없어요. 사업 조금 더 하고 나중에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겠다는 분이 시간이 지나 선교하고 구제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지금 감동이 있을 때 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지금 당장 다른 어려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힘껏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금년을 보람있게 사셨습니까? 한번 속으로 남을 위해 해 준 것을 한번 꼽아보십시오.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 한번 펜을 가지고 종이에 남을 위해 해 준 것을 적어보십시오.
종이에 하나도 적지 못한다면 금년 한해도 별로 보람있게 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그 책임을 읽을 줄 알고, 그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진실로 감사를 아는 사람입니다.
< 참으로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
루터는 말했습니다.
"선한 사람은 있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악인은 없는 것을 생각하고 불평한다."
항상 '있는 것'을 생각하는 선한 사람이 되십시오. 사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 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나처럼 모자란 사람과 기쁘게 살아 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어떤 남편은 아내가 나 없이는 못 살 것 같으니까 참아가며 자기와 살아 주는 줄 압니다.
그런 생각은 가장 위대한 착각입니다. 그런 착각과 오해가 가정을 파괴하는 세균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이들이 많아서 가끔 예배에 방해가 됩니다. 그것도 사실 감사거리입니다.
이번 주에 어떤 작가의 고백을 듣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분의 고백에 의하면 작가에게는 사색과 명상을 위한 조용한 시간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애들이 시끄럽게 하니까 줄거리가 잘 떠오르지 않고 짜증이 났습니다. "조용한 곳에 혼자 얼마나 좋을까" 하는데 어느 날 진짜 조용한 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심한 위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니까 조용해서 처음 열흘간은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그 조용한 시간이 금방 싫증이 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오히려 글쓰는 촉매제가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조용한 순간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시끌벅적한 순간도 필요합니다. 조용한 것이 좋아 보여도 신경성 정신질환은 대개 소리가 없는 환경에서 많이 생깁니다.
지나치게 조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데에는 텔레비전 소리, 차 소리, 시장 소리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어린아이들 소리가 많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보면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멸시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 중에 어렵게 사는 사람이 더 감사할 줄 안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풍족하게 사는 아이에게 의도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은 바로 감사하는 삶입니다.
요새 아이들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최대한 해주고 학교에도 자가용으로 모셔다줍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면 감사하는 삶을 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힘써 가르쳐야 합니다. 풍족해도 아이들에게 풍족함을 다 쏟아 붓지 마시고, 항상 감사하며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 자녀가 잘 되는 길이고, 자녀의 눈빛이 빛나게 되고, 축복 받는 길입니다.
많이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적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복된 존재입니까? '많이 가진 삶'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많이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을 더 좋아해야 합니다. 조엘 해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다 얻었을 때는 더욱 조심하라. 살찌는 돼지는 운이 나쁜 돼지이다."
어떤 분은 참 어렵게 사는데 감사하는 말이 입에 붙었습니다. 참으로 귀한 분입니다. 사람은 은혜 받을수록 은혜를 잘 모르지만 성도는 은혜 받을수록 더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가정에서 부모가 큰아들을 위해 논 팔고, 소 팔아서 유학까지 시켜주었습니다.
결국 큰아들은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는데 미국에 주저앉아 편지 한 통 없었습니다. 반면에 작은아들은 큰아들 공부시키느라고 고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고생한 노부모를 모시는 사람은 작은아들이라면 누가 복된 존재입니까?
여러분!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에 속하지 말고 감사할 줄 아는 한 명이 되십시오.
신앙생활의 목적은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민을 가슴에 품고 주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주님 기뻐하시는 일 중에서도 주님은 우리의 진실한 감사를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항상 범사에 감사하며, 남을 도우며,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충성된 가족에게 있는 축복
충성된 가족에게 있는 축복 (시 128)
"자기 둥지를 틀지 않은 새가 완전한 새일 수 없듯이,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자기 가정을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은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체스털튼(G.K.Chesterton)이라
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한 사람의 인생에게 있어서 가정에 대한 성실함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지으셨을 때, 우리는 분명 독립된 한 인격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회로부터 단절된 외로운 한 개인으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작지만 참으로 중요한 공동체, 곧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만드셨습니다.
가족은 단순한 생활 공동체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가족과 더불어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울고 웃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 가족의 존재 이유를 설명
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한 가족이 서로 얼마나 강하게 결속하고 있느냐는 것은, 각 사람이 다른 가족에 대해 얼마나 성실한 자세로 임하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가족 안에 있는 서로를 향한 성실함과 충성됨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으로 설명합니다. 시편 128편 1절에서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의 기록대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가정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를 행하는 그런 가정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도를 행하는 가정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지" 바르게 아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아는 일에서 출발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가족과 함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또 하나, 가족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바른 길로 가족의 삶을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리스도의 참된 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함으로"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으로 자라날 뿐만 아니라, 이웃에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복된 가정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가정에 주시는 풍성한 축복을 누리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고난을 축복으로 “바꿉시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지구촌이 온통 긴장하고 있어 계절을 느끼지 못하고 하루하루 보내는 것 같아 아쉽다. 아프가니스탄의 한 여인은 서방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땅은 소망이 없습니다.절망의 땅입니다”고 절규했다.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크고작은 숱한 고난을 만나고 이를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성경속의 요나를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요나가 당한 고난은 단 3일간의 고난이었지만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음부까지 내려간 고난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에게 예고된 풍랑,물고기 뱃속에서의 사투 등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며 혼신을 다해 기도하는 요나가 처한 절망의 깊이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어떤 도움도 기다릴 수 없는 완전 절망의 상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절망의 극치를 보여준다. 요나는 이런 절망속에서 마침내 구원을 받고 다시 선교의 사명지로 떠나 그 사명을 완수하여 니느웨의 멸망을 막는 놀라운 승리의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요나는 완전 절망의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인생이 되었을까.
먼저 요나는 자기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그 하나님’께 기도했다. 요나는 자기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축복도 주관하시는 분임을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 고난을 바꾸어주실 분도 오직 ‘그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었다.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깨닫는 만큼’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자포자기나 원망은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친히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만이 유일한 산 소망이 됨을 기억해야 한다.
또 요나는 극심한 고난 중에서도 자기의 기도가 주께 상달되었음을 확신하고 감사했다.요나의 기도는 점점 더 깊어진다. 처음에 그는 “여호와를 불러 아뢰었다”고 했다. 아버지 하나님께 지금 그의 고난을 다 말씀드렸다. 그런데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오히려 점점 더 죽음의 고통이 그를 엄습한다.그래도 그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부르짖는 기도에 돌입한다. 지금 그가 처한 현실이 마치 지옥 같은 고통임을 시사하면서 그는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다”고 했다.스올은 죽은 사람들이 머무는 음부를 말한다.물고기의 뱃속에서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고통스럽게 부르짖었다. 극심한 고통속에서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할 즈음에도 그는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고 고백한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생각’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보라.주가 주시는 놀라운 평화가 넘쳐날 것이다. 스올의 뱃속에 있는 요나였지만 그의 영혼에는 비로소 평안이 찾아든다.생각을 바꾸자.고난이 크면 축복도 큰 법이다. 고난 저 건너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완전 절망을 놀라운 축복으로 바꾼 요나처럼 진실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만 철저히 의지함으로써 이 고난의 시대를 이겨나가자.
/노희석목사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새로운 축복기회를 잡으세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평화는 깨지고 인간은 다른 피조물을 종처럼 무자비하게 다루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곳곳에 피조물의 탄식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1968년, 최초의 우주인으로서 달을 밟은 암스트롱이 우주에서 보낸 첫 주일 아침에 지상으로 보낸 첫 메시지가 시편 8편 1절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그는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아폴로 호가 달에서 찍어 보내온 사진을 보면 지구의 색깔은 청록색이었는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지구의 모습은 회색 빛을 띈 죽은 별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대기오염으로 산성비가 오고, 오존층이 파괴되어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삼림은 급속히 줄고 있고, 지구 전체 물의 1%밖에 안되는 강물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신 것은 자연을 파괴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연을 문화인답게 경작하라(cultivate)"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을 오해하고 자연을 맘대로 훼손해 환경의 탄식은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처럼 환경의 탄식소리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의 탄식소리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전에 가난에 지친 19세 소녀가장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침에 신문배달하고, 낮에 약국 점원으로 일하면서 6식구를 부양하던 소녀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탄식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탄식을 들을 때 우리는 "에바다!(열려라!)" 하신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왜 이 19세 소녀가 자살이라는 가장 절망적인 길을 택해야 했을까요?
단순히 "가난하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자기의 탄식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자살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격려와 도움이 있었다면 이런 소녀의 자살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변을 살펴 더욱 서로의 격려자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하고, 항상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의 세미한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주위의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사도 바울이 깊은 영성을 가졌던 이유는 그 탄식소리를 듣는 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지금 자연도 탄식하고, 믿는 사람들도 탄식합니다. 계속해서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믿는 사람도 겉으로 보면 안 그런 것 같지만 속으로는 탄식할 일이 많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어떤 목사님에게 한 젊은 여자 분이 와서 남편 자랑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의 남편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 빼고는 정말 나무랄 데 없이 좋아요."
그 말을 분석해보니까 남편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것에 대한 탄식이 배여 있어서 목사님이 슬쩍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자매님! 실제로는 마음이 힘들죠."
그러자 그분이 곧 울먹이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정말 힘들 때가 많아요."
거듭 난 사람과 거듭 나지 않은 사람은 사는 세계가 다른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성격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면 함께 고쳐 가면 되지만 신앙이 다르면 참 힘듭니다. 신앙이 달라도 마음의 고통이 없다면 내 신앙의 진실성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보면 믿는 사람들에게도 곳곳에서 탄식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탄식소리를 듣고 같이 기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탄식소리를 들을 귀를 예비할 때 신기하게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지 않고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정신적 여백이 없이 너무 바삐 살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소음은 얼마나 큽니까? 그 소음 때문에 정작 들어야 할 소리를 못 듣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루의 얼마 시간만이라도 내 귀를 소음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합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심장 소리라도 들으려 하다 보면 하나님 음성도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었거든 이제 침묵을 끝내고 세상에 사랑과 위로를 전하려고 해야 합니다.
어느 날 꾀꼬리가 풀이 죽어 있어 현자가 "너 왜 요새 노래가 없지?"하고 물었습니다. 꾀꼬리가 불평하며 "개구리 소리가 하도 커서 제 소리가 소용없잖아요?"라고 하니까 현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조용히 있으니까 개구리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거야."
세상이 악하다고 침묵만 하는 것도 안되고, 불평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탄식소리가 나는 곳에 가서 내가 희망찬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떠하든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성도란 겨울과 같은 상황에서도 봄을 노래하면서 봄을 준비하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때로 큰 것에 길들여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작아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작아 보여도 그 은혜가 세상의 탄식을 잠재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헌신하십시오. 길거리에 떨어진 종이라도 주우십시오. 꿈은 꿈꾸는 자들의 헌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작은 몸짓의 중요성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작은 몸짓으로라도 꾸준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 탄식은 곧 생명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
그런데 주변의 탄식소리들을 잘 들어보십시오. 그 속에서 어떤 음성을 듣게 됩니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 즉 우주만물들이 지금 무엇을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 즉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 피조물의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자연과 사람이 한 형제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자연과 우리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사실상 하나라고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강물에 죽은 고기떼가 보이면 그 강이 죽은 것이고, 결국 우리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죽은 강을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자연이 힘들면 하나님의 아들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을 애타게 기다리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졌다는 징표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쓰레기를 슬쩍 버리지 않고 자연을 최대한 존중할 것입니다. 또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고대한다는 말은 모두 주님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주만물이 다 주님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에도 주님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여자 3명이 모이면 이런 이야기를 한답니다. "얘, 너 아직도 그 사람과 사니?" 그 정도로 많은 가정들이 신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세상에 누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필요하고, 또한 가정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필요합니다. 가정도 사람 사는 곳이기에 부부관계, 부자관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는 절대 이런 문제는 없을 거야!"라고 하는 미신을 믿으면 불행해집니다. 문제는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과연 예수님이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있고, 예수님을 소망하며 살면 우리의 삶은 빛깔이 나게 됩니다.
"음식을 만들 때도, 화장을 할 때도 남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아주 틀렸다"고 하는 한 이혼녀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아마 거의 모든 이혼녀가 비슷한 고백을 할 것입니다.
옷을 입을 때도, 어디를 갈 때도, 차 사고가 났을 때도 남편이 있으면 확실히 틀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다"는 이 한가지 사실이 얼마나 의미가 큰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있기에 때로 현재의 모습이 참담해도 소망을 가지고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선언합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먼저 "생각건대."라고 말합니다. 이제 좀 생각하면서 믿으라는 말 아닐까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을 비판할 때 주로 '말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비판합니다. 우리는 말을 줄이고 침묵을 통해서 항상 말씀과 진리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처럼 사도 바울은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결론을 얻고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는 침착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내 고난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한 차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해 현재의 고난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돈과 명예보다 굳건한 내일의 소망입니다. 이웃과 다른 비교는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 비교할 믿음의 비교가 있습니다. 믿음의 비교란 '현재의 고난'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비교해보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고난 중에 있다"라고 느끼면 분명히 그 고난은 작은 것이 아닐 것이지만 고난 중에서도 동시에 재빠르게 장래의 영광을 생각해보는 민첩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비교하며 살면 소망도 없고 삶이 참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미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며 살면 죽음 같은 고난 중에도 여유가 생깁니다.
캘빈은 죽을 때 이 18절 말씀을 25번이나 외우면서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정말 크다면 오히려 현재의 고난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기독교의 생명은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믿는 사람답게 사는 것에 있지 않습니까? 캄캄한 밤에 별이 더욱 빛나듯이 성도들의 신앙도 어려움 속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잘 믿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어려움을 잘 이겨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낼수록 우리의 믿음은 소중해지고, 내일의 영광은 찬란해집니다. 서울에서 새벽기도로 유명한 큰 교회를 담임하시는 K 목사님의 경험담입니다. 그분은 청년 때부터 목회를 했는데 어느 날 아이가 첫돌 지나면서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진찰비가 70원이었는데 70원이 없어서 아이를 1년 동안 병원에 못 데려갔습니다. 어떤 분은 "그 70원 어디서 빌리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돈 때문에 사람에게 구차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돈 빌리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주의 종 되더니..."라고 하면서
예수님 부끄럽게 하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목사가 어찌 그런 말을 듣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없어도 있는 척, 굶어도 먹은 척'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세미한 탄식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도 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목회자는 좀 낫습니다.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님의 아픔은 3배는 더할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지만 마치 구걸하는 것 같아 후원요청도 제대로 못합니다. 저도 몽고에서 김재호 선교사님이 3개의 교회와 신학교를 돌보는데 차가 없어서 아주 고생한다는 것을 선교사님 본인이 아닌 다른 목사님을 통해서 자세히 알았습니다. 꼭 필요하지만 제대로 후원요청도 못할 때 우리는 그 내밀한 탄식을 얼마나 듣습니까? 이제 축복의 말씀에만 열린 귀를 구하지 말고 이웃의 탄식에도 열린 귀를 구해야 합니다. 며칠 전 김재호 선교사님이 두 달 전에 몽고에서 당했던 일을 지금에야 공개했습니다. 몽고의 수도 울란 바타르 시내 버스 안에서 술 취한 두 몽고 사람에게 발길질을 당해 선교사님은 가슴을 맞고 입술이 터져 두 달간 앓았고, 사모님은 어금니 두 개를 빼고서
몽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열매맺기도 전에 고향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저는 그 소식을 접하고 그 동안 모은 차량헌금을 하루라도 빨리 전달하기 위해 온누리 교회 선교협력 목사로 계신 김사무엘 목사님을 통해 선교사님에게 전달했습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의 최전방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의 탄식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선교사님의 탄식이 바로 병원비 70원이 없어 애끓던 K목사님의 탄식 아니겠습니까?
<선교사님 후원하실 분 연락주세요. 국민은행 284-21-0264-873 이한규(요삼일육선교회)>
그때 K목사님도 걱정은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데려 가실까?" 하는 마음으로 있다가 1년이 지난 후에 아이가 너무 아파해서 할 수 없이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말했습니다.
"정말 미련합니다. 아이가 이런데 1년만에 병원에 데려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말을 듣고 "당신은 내 사정을 너무 모른다!"고 한 마디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차비가 없어 아이를 자전거에 싣고 올 정도였는데 어찌 병원에 갈 엄두가 나겠습니까? 결국 아이는 죽었고, 죽은 후에 아이 시신을 찾는 것도 돈이 없어 힘들었다고 합니다. 너무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그 아픔이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때로 우리에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찾아오지만 주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너무 억울해서 "주님! 억울합니다"라고 하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억울하니? 나는 죄가 없이 인류 죄를 다 덮어써도 한 마디 하지 않았단다." 우리가 "너무 힘듭니다" 하면 주님은 "나도 십자가에서 힘들었단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움이 있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때 믿음을 나타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에게 어려움은 기득권의 상실이지만 믿는 사람에게 어려움은 산고의 진통입니다.
산고의 진통은 극심한 고통이지만 사실상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는 기쁜 고통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주어진 고난의 체험은 오히려 '희망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보다 실천을 앞세워야 합니다. 작은 실천을 통한 '희망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고 한 달 수입의 30분의 1을 따로 떼어 보냅니다.
그 돈은 큰 금액은 아니어도 남을 위해 내 것을 도려내는 그러한 작은 실천을 통해서 우리가 체험하는 희망의 체험은 곧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고통이 축복의 통로라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24-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인간에게 소망은 산소 같이 중요하지만 소망의 근거는 눈에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기에 항상 참고 기다리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저 사람은 싹수가 노래. 저 사람은 가망이 없어."
그러나 우리는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녀에게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 말은 내가 짜증이 많고, 조급하고, 정서 불안이라는 또 다른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이었기에 어느 누구도 싹수가 노랗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파란 싹이 돋게 된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이 조금 실망스럽다고 정말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거나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면 얼마나 잘못이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 아내가 교회가 나오지 못하게 하는 사람에게 "왜 못 나오게 하느냐?"고 물으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끼리 너무 어울려 다녀서 걱정스럽다는 것입니다. 정말 걱정도 팔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어울려 무슨 나쁜 행동을 하겠습니까? 조금 주책없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애교로 충분히 봐 줄 수 있는 행동입니다. 때로 한참 남편 헐뜯다가도 "그래도 내 남편! 잘해줘야지!" 하는 소리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내가 옛 동창들만 만나도 전혀 다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소리 하나 하나 들으면 곧 가정 깨지는 일이 날 정도의 말들도 서슴없이 주고받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내가 집안에만 있으면 안심이 된다는 남편은 정말 한참 모릅니다. 요새는 집안에서 더 큰 일이 일어나는 것도 모르는가 봅니다. 너무 안이한 생각입니다. 집안에서 컴퓨터만 켜도 금방 채팅으로 들어가 훨씬 더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많은 것을 마치 혼자만 모르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교회 열심히 나가는 것이 훨씬 더 낫지요. 그래서 "나는 안 나가도 당신만이라도 교회에 나가주세요"라고 하소연해야 할 시대인데 아직도 아내를 집에 꼼짝 못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얼마나 불행한 생각입니까? 이제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것만 붙들며 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생각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확대됩니다.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가져야 할 꼭 필요한 자세가 바로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불행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무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인터넷이 조금만 늦게 나와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가끔 의식적으로라도 삶의 속도를 늦추려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이 중요하고, 주일 예배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을 절제하고 삶의 속도를 가끔 늦춰야 살아있음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고 그러한 고요함 중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웃음 띈 얼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더욱 분발하십시오.
믿음의 길이란 삼각형의 꼭지점을 향해 가듯 올라가는 길이기에 올라갈수록 힘듭니다. 그래도 올라가야 합니다. 쉽고 편한 길로 들어서려고 하면 영혼은 내리막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뜻을 품고 주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런 어려움도 겪으면서 기뻐할 때 우리의 삶은 생동감이 넘치고 영혼이 소생합니다. 시련은 나약한 사람에게는 절망의 조건이지만, 믿음의 사람에게는 생명샘터가 됩니다. 믿음생활을 볼 때마다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선한 결심을 했다가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하려면 지속적인 열정을 가지고 꾸준히 선을 결심해야 합니다.
한 두 번 해보고 그만 두면 선한 열매는 결코 맺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두 번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분은 가끔 아내 설거지를 재밌게 도와줍니다. 그러나 계속 하라면 다 도망갑니다.
아기 잠깐 안아주는 것은 기쁘지만 종일 안아주라고 하면 대개 다 도망가 버립니다. 지속적인 열정이 없는 선한 일은 거품입니다. 순간적인 열정은 오히려 문제만 만듭니다.
사과나무도 네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야 비로소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인내와 기다림이 있어야 비로소 탐스런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깐의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본문 바로 뒤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면 실패는 있어도 실망은 없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실패해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좋은 계획은 절대 실패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는 일어나 하나님께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입니다. 그 발걸음만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새로운 축복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때로 어려움이 있어도 장래의 영광을 생각하며 더욱 '믿음의 분발'이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축복으로 여긴다'빙점'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는 13년 이라는 긴 세월을 폐결핵과 척추카리에스로 고생을 했다. 그는 그 기간 동안은 양친과 형제들에게 큰 부담을 끼친 쓰라린 나날이었다고 한다. 13년간을 사람들에게 신세만 지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으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주위의 고생도 고생이지만, 미우라 자신의 고통은 얼마나 컸겠는가?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그런 미약한 생명까지도 어떠한 형태로든 사람
들을 위해 사용해 주셨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병으로 고생한 것이 결코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건강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축복받은 생명이라고 여기며 감사했다. 아무리 큰 고난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축복으로 간주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그것은 고난일 수가 없었다.
축복받은 선물(과교제)
미국의 작가 오 헨리의 단편 소설 중에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읍니다. 그는 소년 시절 당시 어느 시골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 앉았던 짝은 예쁘고 청순한 어린 소녀였읍니다. 성장하여 어른이 됨에 따라, 그는 나쁜 친구들의 틈에 끼이게 되었고 마침내는 도둑질까지 하게 되었읍니다. 어느 날, 한 남자의 주머니를 성공적으로 턴 것을 기뻐하며 길을 걷고 있을 때, 그는 마침 옛날 자기의 짝이었던 그 소녀가 거리를 마주 걸
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녀는 변함없이 아름답고 순결한 옛 모습 그대로였읍니다. 그에 비하여 자신의 모습은 얼마나 비천해지고 말았는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는 거리의 한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는 머리를 가로등에 기댄 채, 하나님을 향
하여 이렇게 울부짖었읍니다. `오, 하나님!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인간이 되었는가를 깨닫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기억력이야말로 정말 축복받은 선물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식어지던 사랑도, 그들이 구혼하던 시절과 결혼 후 처음 몇 년 간 행복하게 지냈던 일 들을 기억해냄으로써 옛날과 같이 다시 불붙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살아 계시며 그토록 귀한 분이었던 그 행복스럽던 시절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하나님께 돌아가 한때 그분과 누렀던 달콤한 교제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의 축복
어떤 전도사가 개척지에서 매우 중한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슬픔이 더 하였던 것은 그녀에게 돈이 도착하지 않아서 자신이 먹고 싶은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날마다 오트밀과 깡통에 든 우유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 전도사는 점차 회복이 되었으며 꾸준히 30일 동안 오트밀 음식을 먹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송금한 돈을 받게 되었고, 다른 것들도 얻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휴가 때가 되자 그녀의 큰 시련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한 의사가 그녀의 병의 증상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는 심한 소화불량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돈이 빨리 도착했었더라면 당신은 오늘 나에게 여기서 말할 수 없었을 거요. 우리가 그 병을 위하여 항상 처방하는 음식이 바로 30일간의 오트밀 식사랍니다."
그녀의 고난이 바로 축복이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은 축복을 싸고 있는 보자기입니다.
축복 받은 소망
어니스트 색클톤 경이 남극을 탐험하였을 때 자신의 밑에 있었던 사람들을 불가피하게 코끼리 섬에 남겨 두어야만 하는 경우를 당하였다.
그는 곧 그들을 영국으로 데려갈 것을 약속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연기되어야만 하였다. 그가 그들에게 가려고 할 때는 공교롭게도 바다는 얼어붙어 자기 휘하에 거느린 사람들은 고립되어야만 하였다.
세 번이나 그들을 구조하려 하였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하여 빙판에 구멍을 뚫으며 갔다. 조그만 배로 섬에 도착하자 그는 자기 휘하의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았을 뿐 아니라 배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매우 기뻤다.
그들은 곧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였다. 모든 흥분이 가라앉자 어니스트 경운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승선할 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그들의 지도자가 잠을 깨우며 "항상 갈 준비를 해두시오. 오늘 주인이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라고 외쳤다고 말하였다.
이 세상에 다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색클톤 경이 코끼리 섬에 들어간 것보다 더욱 확실한 것이다. 구세주가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는 약속은 그분의 말씀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축복 받은 희망" - 반드시 이루어질 희망"-인 것이다.
왕을 축복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시
본문 : 시편 21;1∼2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시편 20편이 전쟁나가는 왕을 위한 기도라고 한다면 시편 21편 말씀은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왕을 축복하신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감사시 혹은 축하시입니다.
1. 축하의 내용 (1절)
백성들이,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고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는 것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강한 군대를 가지고 전쟁마다 승리했지만 그의 기쁨은 오직 주의 힘과 주의 구원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군대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백성들도 다윗 군대의 승전보와 하나님의 능력을 칭송하는 왕의 모습에서 은혜를 받고 축하합니다. 왕과 백성 모두 하나님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와 가정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하나님 중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느 8:10).
2. 하나님을 찬양함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2절)라며 하나님이 왕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에 대해서 찬양합니다.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3절)라는 찬양으로 하나님께서 기대 이상의 호의를 베풀어주신 점을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복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기대 이상의 축복과 호의를 의미합니다(엡 3:20).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3절)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왕에게 가장 높은 명예와 영광과 권세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면류관은 하나님이 씌우시는 영광스러운 상입니다.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라며 왕에게 왕국이 영원하리라 는 확신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영영한 장수란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다는 확신입니다.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라며 하나님께서 왕을 영원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나 가정이나 모두 하나님 중심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소원을 입술로 구할 때 하나님이 들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때 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절치 않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구원의 축복
화가‘잭슨 폴록’의 전기와 ‘미국 최고의 의사들’이라는 책을 쓴 미국의 작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는 34세에 머리 속에 10년 이상 자리잡고 있던 양성 뇌종양이 갑작스럽게 악성으로 변해서 수술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앞으로 3개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사들로부터 들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난 후 투숙하고 있던 호텔의 커피방에 들러 계피 롤빵을 모조리 사서 먹어 치웠다.그리고 나서 그의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하였다.
며칠 후,텔레비젼에서 기상통보관이 “내일은 우산을 준비하지 않으셔도 좋을 듯 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는 그의 수명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을 거라고 했던 의사의 진단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의사들은 기상통보관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불변의 자연법칙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한 예측을 전달할 따름이다.그는 확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바로 그날부터 그는 무엇이든 의문이 생기면 끝까지 추적하여 뿌리를 뽑게 되었다. 그는 미국내에서 아니 세계에서 종양 치료에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의사들을 찾는 일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들이 일하고 있는 병원의 명성, 그들의 출신교,또는 그들이 어떤 유명 인사들을 치료했는가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그가 목표한 것은 그에게 나타난 증상과 같은 증상을 보인 환자를 치료한 경험이 있는 의사를 찾는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그는 ‘미국 최고의 의사들’이라는 책을썼다. 그는 미국 전역의 우수한 의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들에게 자기 분야의 최고의 전문의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괜찮다 싶은 의사를 추천받으면 그때마다 그는 그들과 통화를 하거나 그들을 직접 찾아가거나 그의 뇌사진을 그들에게 보내거나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뉴욕의 신경방사선 전문의 사덱 힐럴을 찾아냈다.그는 혈액 속에 약물을 투입하여 종양의 크기를 줄이는 치료법을 권했다.그 방법으로 치료를 하기 시작한지 수주만에 종양의 크기가 50% 정도 줄어들었다.하지만 종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서 그는 수술을 받았다.그는 뇌종양 수술의 권위자를 찾아놓고 있었다. 그는 바로 버지니아 대학교의 빈코 돌렌스 박사였다. 돌렌스 박사의 치료 덕분에 G.W.Smith는 감사하며 살아 가게되었다.이런 경험을 토대로 그는 의사만 제대로 만나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러한 의사를 찾아내기는 몹시 어렵다. 질병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경우, 그 사실을 부인하거나 그 사실에 감정적으로 굴복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의 병을 치료해줄 의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가 어려워지고 모든 일이 허망하게 느껴진다.따라서 의사를 선택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리를 행사하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게 없다.그러나 사형선고를 받고도 죽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항상’기회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 영혼의 병자들로서 죽음을 선고 받은 자들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선 우리의 병을 고쳐 줄 훌륭한 의사를 보내 주셨다. 그분은 멀리 계시거나 찾기 어려운 곳에 계신 분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와 심판에 대하여 듣고 괴로워하면서 구원을 요청할 때 그분은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예수 그리스도만이 영혼의 병, 죄로부터 우리를 온전하게 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참의사이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 하시니라.”(막2:17)
축복받은 희망
어니스트 색클톤 경이 남극을 탐험하였을때 자신의 밑에 있었던 사람들을 불가피하게 코끼리 섬에 남겨 두어야만 하는 경우를 당하였다.
그는 곧 그들을 영국으로 데려갈 것을 약속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연기 되어야만 하였다.
그가 그들에게 가려고 할 때는 공교롭게도 바다는 얼어붙어 자기 휘하에 거느린 사람들은 고립되어야만 하였다. 세번이나 그들을 구조하려 하였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하여 빙판에 구멍을 뚫으며 갔다.
조그만 배로 섬에 도착하자 그는 자기 휘하의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았을 뿐 아니라 배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매우 기뻤다.
그들은 곧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였다. 모든 흥분이 가라 앉자 어니스트 경운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승선할 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그들은 매일 아침, 그들의 지도자가 잠을 깨우며 `항상 갈 준비를 해두시오 오늘 주인이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라고 외쳤다고 말하였다. 이 세상에 다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색클톤 경이 코끼리 섬에 들어간 것보다 더욱 확실한것이다. 구세주가 다시 이 세상에 오신 다는 약속은 그분의 말씀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축복 받은 희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희망인 것이다.
축복의 기도로 시기심 극복
챨스 스펄젼 목사님과 켐벨 몰간 목사님, 그리고 마이어 목사님이 세 분 목사님은 모두 기독교 교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분들이시다. 그런데 스펄젼목사님과 켐벨몰간 목사님이 인도하는 교회가 큰 부흥을 이룰때 마이어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기도를 드리는데 그 자신이 스펄젼목사님과 켐벨목사님을 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회개하여 시기심을 없애려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질투는 감당할 수 없었다.
마이어목사님은 `주님! 시기를 없애고 평화의 영을 갖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이어 목사님께서 이 시기의 마음을
극복할 수있었을까? 그는 기도의 방법을 바꾸었던 것이다.
`주님! 스펄전목사님과 캠벨 목사님의 교회를 부흥시켜주시고 축복해주세요 라고 기도 드린후 참 평화를 경험했다.
성전 헌신 봉사 변화 축복
가덕 기도원 성전 지을 때 모 성도가 지었는데 시킨대로 하지 않았다고 여 집사들이 어떻게나 잔소리를 하는지 화가 나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삼일간 내려오지 않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변화를 받아 새사람되고 믿음 자랐다.
그리고 즐거움으로 남은 일을 잘 마쳤다.
나중에 장로되다.
물질적 축복의 근원 성경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회사라고 하면 세계적으로 우수한 기름회사로 이집트에서 기름을 퍼 내고 있는 유명한 회사이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 회사가 이집트에서 석유를 퍼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스탠다드 오일 회사의 중역가운데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 한명 있었다. 그가 성경을 읽던중 출애굽기 2장을 읽고 있는데,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 동안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출2:1-3)
라는 구절을 일게 되었다. 이 성경 구절을 읽는 동안 그의 머리에 무엇인가 번갯불처럼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역청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역청은 영어로 피치(pitch)라고 하는 것인데 피치는 바로 석유의 일종인 것이다. 모세의 어머니가 역청을 구할 수 있었다면 바로 그곳에 기름이 날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한 그는 찰스 휫샤트(Charles Whitshott)라는 지질학자를 이집트로 보내어 현지조사를 하게 했다. 아닌게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커다란 유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실로 성경은 읽는 자에게 영적 축복은 물론, 육적 양식까지 제공하는 놀라운 책이다
정금자 집사의 호렙산 축복
개포동 정금자 집사의 간증:
90년도 호렙산 기도회 에 참석코자 40만원에 봉고차를 빌렸더니 다를 안타고 혼자만 사용하게 되 할 수 없이 거의 혼자서 그 돈을 물고 계속 40일을 참석하는데 어찌나 날이 갈 수록 은혜를 주는지 40일 기도회 가 끝날 무렵에 뜻하지 않게 1억이 넘는 건물을 내 돈 거의 들이지 않고 인수할 수가 있어서 학원을 경영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크리스챤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고시학원을 하는데 물질 적 축복을 주시더라고. 그 감사한 체험이 그 얼굴에 볼 수 있었고 그 체험으로 부천에 있는 친구를 전도하고자 차 목사를 찾아와 함께 심방했다. 비록 친구의 반응이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정금자 집사의 열심과 전도의 적극성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는지 이해가 돼 큰 은혜를 받았다. 91년도에는 에스터 선교회 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열심히 이 사명을 감당하하겠다고 고백한다. 성서 은혜받고 기억나는 귀절 --> 시109:4 `나를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늘 이 귀절이 마음에 떠올라 : 내게 필요한 말씀이라 생각 참자유는 모르는데서 이루어지는게 아니다. 기도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대적 앞에서 `나는 기도할 뿐이라`는 고백은 기도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는/ 기도보다 더욱 효과적이고 강력하고 확실한 방법이 없다는 고백의 표현인 것이다.
예) 광림 교회 김선도 목사님의 가장 강력한 남을 인상은 `기도밖에 없어 !` 하시면서 지도자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모습일 것.
오늘 기도의 효과와 능력을 모르는 자가 있는가 ? 다시 한번 겸손히 기도의 학교에 입문하기 바란다. 그리고 기도의 가치를 배우고 신앙의 참 맛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베드로 후서 3:18)
내게주신 축복에 감사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나는 늘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 창세기12장 첫 부분의 이 말씀을 붙잡고 살아왔다.
10년전 첫 근무지로 떠날 때 막연하게 그려 보았던 이 말씀은 [암스테르담]에서 독일로 떠나기전 [헤이그]의 한 장로님댁에 모여 철야기도회를 할 때 박형순 형제가 다시한번 새겨주었다.
모스크바로 향하던 날 이른 새벽 아내는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주 소련영사처 개설이 확정, 보도되던 날 나를 강하게 흔들어 깨우는 말씀 때문에 종일 가슴이 뛰었다. 또 옮겨야만 하는가라는 의구심과 함께 10년전부터 찾아오는
이말씀은 오늘을 준비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지러운 마음을 추스리기가
힘들었다. 독일을 떠난 아내의 가장 큰 걱정은 나의 건강이었다. 두가지 지병중
하나는 병력 15년의 심한 디스크와 수면 상태에서 일어나는 신경 계통의 심한 통증
이었다. 서울의 한 신경외과에서 14년째 약을 공급받고 있는 나는 4년 복용이면 완
치된다는 김박사의 말을 듣지 않고 투약을 중단해 또 하나 용기를 주고 있는 것은
외무선교회의 활동이다.
내가 해외 근무를 하는 동안 줄곧 따뜻한 사랑으로 영의 양식을 대어주는 젖줄중의
하나였다. 사랑의 메시지와 함께 아프리카의 험지나 풍토병이 난무하는 미개발 국
가에서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며 근무하는 외교관들과 그의 가족에세 보내는 선교회
의 복음 메시지는 곧바로 내가 모스크바에 도착하던 날 몽골과의 수교를 위해 떠났
던 분중에도 외무선교회의 추수꾼들이 함께 했으며 귀국한 즉시 모스크바의 창설 공
관에도 어김없이 주님의 말씀과 찬송을 보내 왔다.
매사에 소극적이었던 내가 언제나 잊지 않고 보내오는 그들의 사랑에 힘입어 교회생
활이외의 또 다른 꿀송이를 발견하곤 했다. 전도의 열매를 맺기도 했다. 그때 나
는 빛이 비추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둠은 즉시 물러간다는 극히 단순한 사실에서 은혜
를 받고 내 자신이 갑절로 축복을 받았다.
모친의 축복
(부모의 가르침-위대한 정신적 지주)
죠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집을 떠날 때, 어머니는 아래와 같은 말로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래 내 아들 죠지야, 하나님의 축복과 어미의 기도가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일국의 대권을 어깨에 메려고 할 때, 한 어머니의 마지막 이 확신의 말은 그때까지 서서히 불어 넣어 주던 하나님께 대한 경애심을 최고조로 보여 준 것이었다.
대 성인 성녀, 애국자, 문필가,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우리가 선망하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는 알게 모르게 그 위대한 정신을 키워 준 부모들이 있는 법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와싱턴의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동선익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훈육시키므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크게 봉사할 수가 있다. 부모들은 주께서 씨를 뿌려 주신 숭고한 목적과 소명을 젊은이들 안에서 꽃 피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상의 교사는 부모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물질적 축복의 근원 성경
물질적 축복의 근원 성경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회사라고 하면 세계적으로 우수한 기름회사로 이집트에서 기름을 퍼내고 있는 유명한 회사이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 회사가 이집트에서 석유를 퍼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스탠다드 오일 회사의 중역가운데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 한명 있었다. 그가 성경을 읽던중 출애굽기 2장을 읽고 있는데,
[레위족속 중 한 사람이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 동안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출2:1-3)
라는 구절을 알게 되었다. 이 성경 구절을 읽는 동안 그의 머리에 무엇인가 번갯불처럼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역청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역청은 영어로 피치(pitch)라고 하는 것인데 피치는 바로 석유의 일종인 것이다. 모세의 어머니가 역청을 구할 수 있었다면 바로 그곳에 기름이 날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한 그는 찰스 휫샤트(Charles Whitshott)라는 지질학자를 이집트로 보내어 현지조사를 하게 했다. 아닌게 아니라 바로 그곳에서 커다란 유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실로 성경은 읽는 자에게 영적 축복은 물론, 육적 양식까지 제공하는 놀라운 책이다.
주님 저들을 축복해 주십시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시 109:17)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1973년 부활절 아침.이디 아민대통령의 독재에 시달리던 아프리카 우간다의 한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셈판기 목사는 7천여명의 신자들에게 부활절 설교를 했습니다. “부활의 주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정의의 편에서 끝까지 싸우자”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목양실로 돌아온 셈판기 목사에게 5명의 괴한이 침입했습니다. 그들은 목사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때 셈판기 목사가
말했습니다.“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날이오.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소.다만 당신들을 위해 2분 동안만 기도하게 해주시오” 셈판기 목사는 5명의 괴한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저들은 자신이 범하고 있는 죄를 알지 못하나이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한참 기도를 하고 눈을 떠보니 괴한들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괴한의 우두머리가 총을 거두며 말했습니다. “목사님.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무례를 용서 해 주시옵소서” 기도가 괴한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대로 용서를 오히려 구하는 기도를 드리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당신도 진정 필요할 때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의 모본을 보이신대로 말입니다.
"하나님 저에게도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원수를 용서하며 내게 해를 끼치는 자를 축복하게 하소서"
용서는 가장 큰 복수이다.
나는 얼마나 주님의 모본을 따라 용서해주는 기도를 하였는가 노트해보자.
모친의 축복
죠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집을 떠날 때, 어머니는 아래와 같은 말로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래 내 아들 죠지야, 하나님의 축복과 어미의 기도가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일국의 대권을 어깨에 메려고 할 때, 한 어머니의 마지막 이 확신의 말은 그때까지 서서히 불어 넣어 주던 하나님께 대한 경애심을 최고조로 보여 준 것이었다.
대 성인 성녀, 애국자, 문필가,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우리가 선망하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는 알게 모르게 그 위대한 정신을 키워 준 부모들이 있는 법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와싱턴의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동선익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훈육시키므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크게 봉사할 수가 있다. 부모들은 주께서 씨를 뿌려 주신 숭고한 목적과 소명을 젊은이들 안에서 꽃 피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최상의 교사는 부모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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