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적 영성으로 미국을 각성시킨 에드워즈

청교도 영성의 신학적 뿌리는 16세기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 당시에 성경의 중요성이 재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빈은 그런 의미에서 청교도 운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칼빈이 주장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 중심의 사상을 삶에 깊이 적용시킴으로써 종교개혁을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청교도들은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들을 단순히 바꾸는 것만으로는 종교개혁이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은 실제적이며 생활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활 구석구석에서 철저하고 완전한 개혁이 있어야 하고, 인간의 전 삶이 변화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처음엔 의식과 예복들을 반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으나 교회의 교리 전체로 발전되어 나아갔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칼빈주의적 신앙심으로 드러난다. 존 낙스, 토마스 굿윈, 존 번연,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19세기 찰스 스펄전과 존 라일 그리고 20세기의 존 오웬,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커 등이 그 맥락을 같이한다.
금세기 최고의 개혁주의 설교자라고 할 수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는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에드워즈(Jonathan Edwards,1703-1758)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존스는 18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에드워즈에 대해 18세기 미국 청교도주의의 완성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종교개혁과 청교도의 지성을 집대성한 사람!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균형 있는 생활인! 영적 암흑시기인 18세기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철저한 청교도적 영성가! 그가 조나단 에드워즈다.



활활 타오른 미국의 대각성운동
당시 목회자였던 쿠퍼(W.cooper)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모든 개혁교회들이 그 동안 얼마나 죽어 있었고, 메마른 상태에 있었습니까? 황금의 소나기가 멈춰졌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회심도 드물었고 정말 그러한 일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때때로 긍휼의 소나기가 내렸던 특이한 한두 장소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영적 분별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탄식하던 이 시기에 하나님은 에드워즈를 준비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무너져가고 이성과 합리주의가 판을 치던 18세기. 하나님은 어둡고 패역한 땅에 친히 당신의 주권을 드러내셨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인지 18세기는 위대한 부흥의 시기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복음적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북미 영국의 식민지 뉴잉글랜드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서의 부흥이나 대각성의 의미는 오늘날 말하는 은사주의나 열광주의와 다르다. 교인 수가 늘고 헌금의 양이 많아졌다는 의미 또한 아니다. 개인 차원의 회심사건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약 50년 간의 부흥운동(1726-1776)을 제1차 대각성운동이라 부르는데, 이는 하나님의 부흥의 손길이 사회·문화·정치 등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쳤기에 ‘각성’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에드워즈는 4년 동안 외조부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목회수업을 받다가 외조부가 사망하자 24년 동안 뉴잉글랜드에서 목회를 하게 된다. 1727년 부임한 뉴잉글랜드 지역은 자유주의 물결이 범람하여 타락하고 냉담했다. 신앙생활은 세속적이고 형식적인 상태로 전락되었다. 칼빈주의 신학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 ‘오직 은총’이 무시되고 도덕적 기준은 허물어졌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도시는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지독한 학구파인 그는 매일 서재에서 13시간 이상 보내면서 매주 설교 두 편을 썼으며 심방보다는 설교준비와 말씀 연구에 주력했다. 1733년 노탬턴 젊은이들의 향락적이고 사악한 모임을 준열히 꾸짖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그의 설교에 깊이 감명받은 청년들이 자복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렇게 각성운동은 철저한 회개에서 출발하였다. 아울러 1734년 그 도시에서 발생한 젊은 남녀의 갑작스런 죽음은 젊은이들을 크게 각성시켰다. 에드워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늘 죽음을 대비하는 삶이 곧 회개생활임을 선포했다. 이로 말미암아 젊은이들은 말씀을 사모하여 주일뿐 아니라 주중에도 모였으며 이 분위기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 기도하지 않는 것, 탐욕, 이웃에 대한 증오, 반목, 시기 등의 죄들을 낱낱이 지적하며 설교했다. 그리하여 그 해 12월 대대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고, 나아가 그들의 삶과 행동에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더욱이 그 도시에서 가장 큰 회사를 경영하던 젊은 여인의 극적인 회심으로 마을이 온통 각성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기쁨과 확신으로 넘쳤으며 모임마다 사람들로 꽉꽉 들어찼다.
1941년 7월 8일. 미국 전역에 새로운 파문을 일으키는 계기가 있었으니,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gry God)이란 제목의 설교였다. 이 설교는 꺼져 가는 청교도 정신을 새롭게 불어넣었다. 나아가 타락해 가는 뉴잉글랜드의 이주민 2, 3 세대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미대륙에 기독교의 새로운 분기점을 형성한다. 그는 영적인 무관심과 무감각을 깨뜨리기 위해서 생활의 추악한 치부를 드러내고 양심에 호소하였다. 풍부한 상상력과 깊은 지성을 소유한 그의 설교는 말 그대로 불덩이였다. 아니 커다란 위력을 지닌 폭탄이었다.
이 한 편의 설교를 통하여 깊은 동면 가운데 있던 청교도의 후예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새로운 호흡을 시작했다. 영적으로 냉랭했던 엔필드 주민들의 가슴에 뜨거움이 임했다. 공포와 회개의 함성과 참회의 울부짖음으로 더 이상 설교가 진행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그에게서 유창함이나 노련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달변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하루 평균 13시간을 들여 준비한 그의 설교는 개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대각성운동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조용하고 병약한 사람, 허약하고 가는 목소리의 나약한 존재! 그의 설교가 어떻게 수많은 영혼을 일깨우며 그토록 큰 파문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오직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였다는 해답 밖에 없다.
에드워즈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었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도록 강력히 촉구하는 데 있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 보스턴에 무절제한 주류거래가 횡행했다. 부정한 노예제도, 남녀간의 부도덕한 성적 타락이 가속화되어 도시는 방탕함으로 휘청거렸다. 더욱이 빛과 소금역할을 해야 할 기독교의 타락 즉 자유주의와 이성주의의 확산은 젊은 지성인들을 교회에서 막무가내로 내몰았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한 그의 설교는 잠자는 성도들을 깨우고, 나아가 교회를 갱신하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하나님의 손 즉 자비와 용서의 손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신 그 사랑의 손길을 죄인들의 폐부 깊숙이 심어주길 원했다.



부흥과 하나님의 주권
에드워즈는 부흥을 ‘하나님의 때’에‘하나님의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이라 했다. 부흥이란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임하시는 행위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 이뤄지는 전적 하나님의 사역이다. 한순간 성령의 불을 체험하여 뜨거워졌거나 교인수가 증가했다고 부흥이라 하지 않는다. 기질적으로 흥분 잘하고 저돌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의 일시적인 뜨거움 또한 부흥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반지성주의나 광신주의로 흐를 염려가 있고, 부흥의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영적 각성이나 부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서만 참된 부흥이나 각성운동이 일어남을 인식하는 일이다.
에드워즈는 천성적으로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3대째 목회자 가정이었고, 그 또한 목회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학이나 철학에 심취하였고, 예일대를 비롯한 명문대에서 수학한 지성파였다. 목회자가 된 후에도 성도와의 교제나 심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서재에서 하루 13시간 이상씩 성경연구에 몰두했다. 청교도 역사상 이렇게 차가운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냉정했다. 그는 영적 은사들이나 감정 표출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당시 일반 철학의 대표자 존 로크와 견줄 만한 인식론을 제시한 기독 지성의 소유자였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과 노는 것이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나의 모든 정신은 진지하게 배우고 탐구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지식에 대한 열망이 그로 하여금 완숙한 청교도적 사상을 가지고 ‘의지의 자유’, ‘원죄’, ‘신앙의 본질’ 등 신학적 걸작과 1,500여 편의 설교를 남기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의 부흥운동에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많이 나타났다.
“어떤 사람은 비탄과 슬픔에 울며, 어떤 사람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울고, 어떤 사람은 그들의 이웃 영혼들에 대한 연민과 걱정으로 울었다. … 부흥의 불이 붙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입신하며, 환상을 보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번민으로 크게 소리지르며, 여러 건장한 사람들도 마치 대포가 발사된 것처럼 쓰러졌다.”
이처럼 부흥은 전적 하나님의 사역이다. 인간이 조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일시적인 흥분이나 열정은 마귀의 도구로 악용될 수도 있다. 물론 부흥에 뜨거운 결단과 신비 체험 등이 따를 수 있지만, 참된 부흥에는 반드시 각성과 회개 그리고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말씀이 이론이 아닌 생활 현장 구석구석에서 적용되고 체현되어져야 한다. 말씀이 삶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여 먼저 나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 변화가 가정, 사회, 국가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전세계가 하나님의 임재를 피부 깊숙이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에드워즈를 통한 대각성운동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부흥 혹은 각성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이지만 인간 편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한다. “유효한 은혜 안에서는 우리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는 하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산출하시고 우리 또한 모든 것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산출하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체시요 근원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합당한 행동자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면서도 전적으로 능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준비된 사람들을 통하여 부흥을 허락하시며, 에드워즈도 예외는 아니었다.



준비된 자
에드워즈는 한 사람의 사역 능력이 활동과 업적에 비례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까다로울 만큼 철저한 청교도적 생활인이 되도록 했다. 일과는 분명한 계획과 엄격한 방식에 따라 통제되었다. 시간을 아껴서 가장 큰 영적인 유익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을 복종시켰다. 보통 네다섯 시에 기상하여 매일 열세 시간씩 공부했다.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스도께서 이른 새벽에 무덤에서 일어나셨으므로 새벽 일찍이 일어날 것을 명령하셨다고 믿는다.” 에드워즈는 ‘만일 예수님께서 장기간 홀로 구금상태에 있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을 했을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답은 사도행전 6:4에서 보는 대로 ‘기도하는 것과 말씀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을 것이다’였다. 그는 시간을 엄수하여 쉬지 않고 자주 은밀한 기도를 드렸다. 종종 여러 날 동안 은밀한 금식기도를 하였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은밀한 기도를 드리는 정해진 계절이 있고 집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행 중에도 매일 세 차례씩 기도하는 습관이 젊었을 때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진리를 깊이 알고 탐구하고 싶은 비상한 갈망이 있었다. 다른 어떤 책보다 성경을 가장 중시하고 깊이 연구했다. 다른 경건한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성경연구에 몰입했다. “나는 복음의 교리들을 사랑한다. 그것들은 내 영혼에 푸른 초장과 같은 것이다. 복음은 내게 가장 귀한 보물이다. 그것이 내 속에 풍성히 거하기를 갈망한다.” 어느 전기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깊은 관심을 갖고 그의 저작들을 읽어 보라. 그리고 사도시대 이후 신학자들의 저작들과 비교해 보라. 그러면 이제까지 나타났던 경건한 신학자 중에 그처럼 성경을 낱낱이 연구했던 사람이 없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는 걷거나 여행 중에도 늘 주제들을 정하여 묵상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중요한 생각들을 기록해 두기 위해 펜과 잉크를 가지고 다녔다. 겨울에는 30분 이상 장작 쪼개는 일도 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고난의 종
에드워즈의 신앙과 사상, 철저한 청교도적 삶은 3대째 내려오는 경건한 성직자 가문이 그 터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가정교육을 받았다. 6세 때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여 13세쯤엔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에 숙달하여 원어 성경을 읽었다. 지성과 경건을 갖춘 청교도 가문의 유산을 받고 자란 에드워즈는 일찍부터 경건과 복음을 깨달았다.
회개를 외치고, 교인의 자격에 대하여 지나치게 엄격한 청교도적 자세를 요구하는 그에게 고난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그에게 반발하여 청교도적 자세를 삼갈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1735년 어느 날 에드워즈의 지옥에 관한 설교를 들은 후 발생한 한 젊은이의 자살사건에서 더욱 심각해졌다.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동역자들의 태도는 젊은 설교자를 절망의 나락으로 끌고 가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타협을 거부하고 끝까지 엄격한 청교도적 자세를 고수하였다. 그 대가로 외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24년 간이나 목회를 해오던 정든 교회를 사임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가 노탬턴 교회를 사임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교회 제직 자격에 대한 의견차이 때문이었는데, 이는 그가 엄격한 청교도 정신을 끝까지 고집한 결과였다.
노탬턴에서 해고된 후에 광야 유랑생활이 시작된다. 그는 “세계의 넓은 바다 한가운데 내던져진 나와 나의 많은 가족들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고 일기에 적었다. 오랜 고뇌의 시간이 계속되었지만 뉴잉글랜드에서 그를 부르는 곳은 없었다. 막막한 광야생활이 계속 되던 중 1751년 8월 버크셔스주 스톡브리지 교회에서 초빙 의사를 표명했다. 아울러 그곳에 거주하는 호사톤족 인디언들의 선교사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노탬턴에서 계속 쓰디쓴 시련을 겪은 터라 이곳 스톡브리지에서의 사역만은 평화롭고 안정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많은 재정적 문제가 그를 짓눌렀다. 마음의 고통 못지 않게 물질적 어려움 또한 그를 심하게 압박해 왔다. 그의 자녀들은 자수와 바느질, 부채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에드워즈의 설교원고지 또한 변변치 못했다. 폐지, 의사의 처방지, 결혼예식 순서지, 기도 의뢰문, 아이들의 복사지, 증명서 용지, 선전지, 심지어는 부채를 만들다가 남은 마분지로 원고를 작성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와 가족들은 심한 병고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결코 좁은 길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 속에서 그를 더욱 뜨겁고 강하게 붙들어 주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고 약한 자, 소외된 자들의 대변자가 되었다. 인디언들에게 선교활동을 하던 중 백인들의 인디언에 대한 그릇된 대우를 뼈저리게 느낀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대변자로서 백인들의 착취행위에 대해 강하게 항거했다. 그리고 영국 본토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인디언들을 몰아내겠다는 정책에 대해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난하며 책망했다. 특히 그는 이곳에서 6년 동안 목회자와 선교사로 일하면서 학문연구에 집중하여 세상 끝날까지 길이 남을 ‘원죄’와 ‘의지의 자유’를 집필했다. 1758년 2월 프린스턴 신학교의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나 취임 5주만에 천연두로 일생을 마쳤다. 점잖고 조용한 학자의 나이 54세였다.


하나님께 지배당한 사람
유능한 신학자인 동시에 위대한 복음 전도자인 에드워즈! 화려한 약력을 지닌 듯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우리와 다를 바 없음을 곧 알게 된다. 날카로운 지성과 아울러 그의 감성은 작은 일에 상처받는 연약성을 지녔다. 영적 각성운동으로 전세계를 울렸지만 개인으로서의 삶은 설교 작성할 원고지 한장 없어 우울하고 낙심할 때도 있었다. 아내와 자녀들이 병고에 시달릴 때에도 속수무책 바라볼 뿐 대책 없는 무능한 가장이기도 했다. 체구 또한 왜소하고 병약했다.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연약한 한 인간임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들어 전미국을 변화시키는 영적 각성운동의 주역으로 삼으셨다. 그의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을까?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는 굉장히 많은 책을 탐독한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위대함은 영적인 것이 언제나 지적인 것을 통제했다는 데에 있다. 그는 언제나 자기의 철학과 사변을 성경에 굴복시켰고 그것들을 단순한 종으로 여겼다. 어떤 지적 마찰이 생긴다 하더라도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했다. 자신의 깊은 학식과 풍부한 재능들로 말미암아 성경 혹은 하나님이 가려지지 않도록 자신을 철저하게 복종시켰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께 지배당한 사람이었다. 혹자는 “에드워즈는 열정적인 경건과 심오하고 통합된 지성을 조화시켰다”라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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