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대 김성수 교수 개혁주의론
합동신학대학원대학 김성수 교수님의 "개혁주의, 의미와 진로" 라는 글의 후반부입니다.
(제가 극히 일부분의 문맥을 수정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 개혁주의 신앙 노선에 지적으로는 동의하나 심정적으로 동의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개혁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해
냉랭함, 교만, 독선 등, 이런 문제는 개혁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장로교만을 가리켜 "저것은 분열주의자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겠다. 왜 분열을 하게 되었는가? 교만과 독선, 그리고 편협한 성격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말하나,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며, 이를 사람의 기질(mentality) 문제로 환원시켜서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평가라고 말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해서, 장로교 내지 개혁주의자들이 직면했던 문제들, 경건주의가 드러낸 여러 가지 교리 상의 오류들을 가만히 덮어두고, 교회가 그냥 싸안고 있어야만 하겠는가, 특별히 성경의 권위 자체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은 구원 자체를 부정하는 자유주의를 교회가 관용과 일치라는 명분으로 포용했어야 했는가 반문해 본다면, 교회가 분열했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우리의 약점인 것처럼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옳고 그름이 너무나 분명한 문제였고 또 그 문제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인 것만큼 그것에 대해 강력한 저항은 옳았다고 하겠다.
지식주의라는 비판도, 당시 자유주의와 관련지어 볼 때 문제가 된 것이 지식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기독교 진리를 변증하려고 하는 기독교 지식인들의 노력에 의해서 부각된 것이니 만큼, 꼭 그것을 약점이나 오류라고 지적해야 할 것인가는 짚고 넘어갈 문제이다. 흔히 그들은 독선적이지 않다고 말을 하는데, 진리와 비진리와의 극한적인 투쟁의 상황에서 호전적인 심성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교회의 전투성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유화적인 사람에게 독선적인 것으로 비추어 질 지 모를 문제라 할지라도, 교회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라고 인식한 이에게 그것은 결코 독선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사소한 문제와 근거 없는 것이라면 독선적이란 비판을 받아도 좋겠지만, 사안 자체가 중요하고 시비가 분명한 만큼 독선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개혁주의의 세 부류
산재하는 개혁주의의 부류들을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교리주의자, 둘째, 경건 경향의 사람들, 셋째, 문화적 사명을 강하게 나타내려는 교파(미국 칼빈 신학)이다. 이들은 서로를 향하여 서로 매우 의심스런 눈초리를 갖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있다.
우선 여기서 살펴볼 것은, 교리·경건·문화적 사명이라는 것이 개혁주의 내에 포함되면서 왜 이들의 구분이 파벌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기보다는, 이런 것들이 교회의 새로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 등장할 때마다 여러 가지 새로운 신학적 요소가 가미되면서 여러 가지 역사적 부산물들을 산출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교리를 무시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믿어야 할 것을 모르고 우리가 무엇을 믿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바울 사도께서 목회서신에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건전한 교훈(교리)을 가르치라는 것이었고, 그것을 해치는 자들을 엄격히 경계하라는 가르침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갈라디아서 1장의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그 복음, 그 교리가 아닌 다른 것을 가르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지라'고 하였다.
물론 역사적으로 나타난 교리주의자들에게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 당시에 교리적 상황을 감안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전투적인 상황을 감안할 때 그들이 강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지적 항변으로 신앙이 주지주의 적이며 이지적인 역사적인 신앙(historical faith)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교리는 필수 불가결의 중요한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교리주의가 전체는 아닐지라도 일부 부산물로써의 부정적인 요소임은 인정하고 심각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
경건주의가 외친 말들 "교리 대신 삶이 있어야!" ,"제도적인 직분이 아니라 성령이어야!", "모양만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이어야!" 등의 말에서 역으로 유추해 볼 때 경건주의는 정통 교회에서 영적으로서의 메마름과 이에 대한 갈급함이 토양이 되었다고도 본다. 경건주의가 주장하는 긍정적인 면들 ― 살아 있는 믿음, 성령님의 생생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들 ― 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이 천번만번 지지하는 것이요, 참으로 그 당시 전통주의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반드시 주장되었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성령님의 역동적인 삶을 강조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교리와 삶이란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 교리가 아니고 삶이 있어야 한다는 반 교리적, 반 제도적인 자세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살아 있는 생생한 감정을 차디찬 지성보다 강조함으로써 정서적인 면을 매우 중요시했다.
물론 참된 성령의 감화에 의한 복된 믿음에의 감정을 무시하지 않는다. 문제는 반 교회적이요, 반 제도적인데 있으며, 감정을 강조함으로 일시적인 신앙(temporarily faith)으로 전락할 위험이 컸다. 이 신앙은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내적 변화를 얻지 못하는 믿음(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의 신앙)이다. 이런 폐단을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정통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을 강조한 반면, 경건주의는 감정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인위적으로 감정을 유발시키고 흥분시키는 일들이 경건주의 말기에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fide)는 약화되고, 인간의 결단이 강조되었다. 그 결과 나중엔 반 펠라기우스(anti-pelagius)적인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사실 근본적으로 교리나 경건이나 문화적인 사명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로 통합되어야 하는데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로 나타나기는 교리주의자, 경건주의자, 그리고 사회참여주의자로 나뉘어졌던 것이다. 각각 그들은 그 정당성과 그 역사적 부산물도 함께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처방안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학적 흐름들을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가? 먼저 이런 다양성을 맹목적으로 인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절대적이고 무오한 진리의 척도인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각 신학 흐롬이 갖고 있는 오류를 제거하고 참된 것은 확인하고 발전시키되, 진리 안에서 모든 참된 요소들이 통일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적당히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식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밝혀 가면서, 나의 오류를 인정하여 제거하고 상대방의 옳은 점을 발견하고 배워 나가면서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통일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통일체(unity)를 이루어야지, 정치적이거나 교세 확장을 위해 이루어 간다면 그것이 오래가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 맹목적이고 감상적인 연합 운동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필연성을 WCC 같은 운동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오직 진리에 근거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 하에서, 비록 그 과정이 지루하고 번잡하고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도 인내와 관용으로 기다리면서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한다. 어떤 이는 분열이 편협한 기질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오히려 분열이 일어난 이유는 모두가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에 순복하려는 자세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끝까지 밝히고 순종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의 난맥상도 이런 세계 교회 난맥상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오히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복잡 혼란한 미묘함이 산재한 상황에서 성경 말씀에 비추어 상황을 판단하고 그 바른 길을 제시할 준비가 한국 교회는 안 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신학적인 문제들을 제시해도 속수무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록 어떤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런 깊은 논의에 참가할 수 있는 준비라도 충분히 되어 있는가를 심각하게 자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
마지막으로 어떤 다양한 입장과 교회의 삶의 복잡한 양상이 있던지, 이를 해결하는 유일한 진로는 성경 말씀이 이에 대하여 뭐라고 하는지를 깨달아 오래 참고 관용하며 그 진리 안에서 하나 되기를 촉구하는 길밖에 없다고 본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오늘의 이 신학적 교회적인 난맥상을 헤쳐 가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성경의 권위를 교회가 포용적이고 해이하게 여기는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한국 보수 교회 내에서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태도가 점점 해이해져 간다는 점은 심각하게 우려할 부분이며, 여러 목회자들이 특별히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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