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선교전망과 정책

 

1. 20세기 선교의 현황

 

21세기 세계선교는 아직도 미완성의 과제이거니와 선교는 어떤 점에서 더 복잡한 양상이 되어간다. 더 많은 도전과 난관이 예상된다. 21세기 선교 전망은 요한계시록이 잘 말해 준다. 사도 요한은 위대한 미래학자로, 종말의 시대는 도덕적 무정부 시대, 바빌론 문화의 시대, 핍박의 시대로 정의하였다. 바빌론 문화란 반 기독교적 문화와 종교가 더 득세하는 상황임을 예언한다. 역사는 그대로 나아가고 있다. 동시에 순수한 기독교 신앙은 박해를 받는다.

 

이미 20세기 후반에 나이스빗 같은 미래학자는 21세기는 전통종교 보다는 종말론적 이단과 신흥종교들이 성행할 것을 예고하였었다. 2001년 9. 11테러와 이라크 전쟁으로 더 악화되는 상황이다. 세계는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와 전선 없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

 

19세기는 라토렛이 말한 대로 선교의 “위대한 세기”였다면 20세기는 교회의 시대로서, 기독교가 전 세계적 종교가 되어졌다. 세계의 모든 나라에 기독교가 전무한 나라는 없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북한과 강성 이슬람 국가와 불교 국가 등에는 지하교회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비서구 기독교는 윤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문제가 있다. 80년대 이미 세례 받은 이방인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기독교의 통전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실례로 이라크 부통령 아지즈와 나이제리아 대통령은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이는데 실패한다. 아프리카 기독교는 양적으로 논하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문화적으로는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아시아 최고 교회이지만 아직도 비기독교 국가이다.

 

20세기는 기독교의 중력이 서구에서 비서구로 이전하고 비서구의 선교운동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비서구 선교는 아직도 자금, 정보, 이론, 기술에서 서구에 의존한 상태이다. 비서구 선교의 자존성과 독립성은 아직 멀었다. 한국 교회는 12,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 대국으로 자부하며 경제적으로는 자주성을 갖고 있으나 정보와 이론 전략은 미국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 선교 지도력 국제화를 말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21세기 초기 선교환경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시아 많은 나라들은 정문으로는 선교사가 들어가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슬람 국가 55개 국가들은 대부분 선교의 문이 닫혔으나 이라크 전쟁은 바로 긍정과 부정의 대조적 상황을 연출한다. 시아파는 더욱 반미, 반 기독교적이 되어 미국과 기독교를 공히 경계하고 이란식 이슬람 국가 건설에 혈안이 되어있다. 그럼에도 쿠웨이트 외의 500만 피난민 들 중에서 복음을 받아들인다.

도피한 자들 중에서 선교운동이 일어난다고 이사야 66장 19절은 말한다. 소외된

자와 수많은 난민들은 선교의 기회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 선교는 구제 및 의료 등 봉사선교가 증대됨으로 경제적으로 어렵고 교회성장이 사실상 정지된 상태에서 많은 부담을 안고 있다. 먼저 선교의 도전과 전망 및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2. 기독교 선교의 도전

 

1) 소수 기독교 시대

우선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 아시아에서 기독교회가 무엇이냐는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처해 있다. 기독교는 아시아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서양 종교로 오해받거나 소외되고 있다. 서구에서도 기독교는 소수로 전락하는 상황을 최근 타임지가 "Where Did God Go?"라는 제목으로 잘 소개하면서 동시에 일부 부흥하는 교회를 언급한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기독교가 아직 다수종교로서 위력을 가지며 적어도 가치관과 윤리관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복지국가와 민주국가로서 선진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시아와 기독교는 소수종교로서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한다. 왜 하필이면 기독교회냐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일부 국가들이 양적으로는 다수지만 질적으로는 아직도 문제가 너무나 많다. 특히 아시아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는 철저히 거부한다. 일본의 철학인 화혼양재(和魂洋才)는 하나의 좋은 모델이다. 일본 신학자 오오끼 히대오(大木英夫)는 [일본의 신학]이라는 저서에서 교회역사를 환지중해 지역의 시대, 환대서양 지역의 시대, 그리고 환태평양 지역의 시대로 구분하고, 환태평양시대가 마지막이면서도 중요한 시대라고 하였다.

과거 환대서양 지역의 시대 기독교 선교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와 조우하면서도 큰 도전을 받지 않았지만 환태평양시대는 이미 앵글로 색슨의 개신교 선교는 어떤 점에서는 패배, 혹은 고전하고 있다. 환태평양시대 기독교 선교는 과거 어느 때에도 경험하지 못한 문제에 직면하는데, 그것은 이 지역에서 개신교의 존재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직면한다고 하였다.

 

현대 세계 기독교는 후기 기독교 시대, 탈 교파주의, 순교시대이다. 후기 기독교 시대란 기독교가 서구나 비서구 공히 소수종교로 전락하는 상황이다. 비 서구는 물론 서구에서조차도 기독교가 수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서구는 공익정신과, 질서, 공존원리는 집단주의를 지양하는 비서구보다 더 공동체적이다. 한국에서도 현재 기독교회는 이방의 빛이 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한계를 안고 있다. 선교적 교회가 먼저 되어야 하고 사회가 적어도 기독교적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2) 종교전쟁의 시대와 박해

헌팅톤의 문명충돌론은 이미 잘 알려진 이론인데 부분적으로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선교의 기회이자 도전이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라크 전쟁을 기독교 원리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의 전쟁으로 본다. 타리크 알리라는 이슬람 학자는 [근본주의의 충돌]이라는 저서에서 이슬람과 미국의 전쟁을 부시의 기독교 원리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가 충돌로 단정한다. 최근에는 부시의 신보수주의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부시의 기독교 신앙은 세대주의적 신앙 혹은 원리주의로, 친 이스라엘적이며 사담 후세인은 악의 축으로 본다.

 

이라크 전쟁 이전 교황은 이라크 전쟁이 전 세계적으로 종교의 재앙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교황이 말하는 종교의 재앙이란 이 전쟁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로 비약되어 두 종교가 증오로 대립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교황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천주교 주교를 면담한 자리에서 이러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교황은 부언하기를 “전쟁이 세계 종교를 양분하도록 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이웃이나 다른 종교의 사람들과도 형제애로서 협력하고 상호유대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교황이 계속 전쟁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이면에는 개신교적 미국이 전쟁을 주도하는 것에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측면도 작용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1940년대와 50년대 남미에서 개신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을 박해, 엄청나게 죽인 역사를 회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는지 궁금하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번 전쟁이 기독교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라크 전쟁 후 뉴욕 타임지 보도에 의하면 서구에서 공부한 파키스탄 지성인들은 사실 미국 편이었고 이슬람 신앙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 이후 이들 지성인들이 이슬람 성직자들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이슬람 정당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 외교관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파키스탄의 제3당인 이슬람 정당에 완벽한 선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중동 지역에서 반미감정은 반 선교를 부추기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선교해야 할 선교지는 갈수록 종교적 집단주의로 변모, 타종교를 엄청나게 핍박한다. 종교적 집단주의란 종교를 중심으로 강력한 공동체, 마을,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아시아의 현실이다. 이들 사회에서 다른 종교로의 개종은 바로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반역이 된다. 미국의 선교학자 세이플은 전 세계의 6억의 사람들은 종교문제로 심한 핍박을 받는다고 분석하는데, 53개 이슬람 국가들은 종교자유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전 세계적으로 종교 자유는 더 위축되는 상황이다. 특히 인구가 많은 아라비아, 중국,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인도, 나이제리아 등은 종교의 자유가 부분적이거나 완전 제한된다.

 

최근 인도에서는 힌두교 원리주의자들이 더 극성을 부려 기독교를 박해하며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군사정권은 친미적이지만 이슬람과의 정치적 제휴로 종교 자유를 완전히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신성 모독죄는 이 나라 기독교의 목을 죄이는 악법이다.

 

아프리카의 수단과 나이제리아 북부지방에서 시행되는 이슬람 샤리아 법 제정은 기독교를 압박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중동전쟁은 60년대와 70년대는 민족적, 인종적 전쟁이었으나 갈수록 종교적 의미를 띄고 전개된다. 종교는 세계 분쟁의 중요한 요인이 되기 때문에 한스 쿵은 종교의 평화 없이는 세계의 평화도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3) 원리주의 도전: 세계화 역행

1970년대는 아시아 종교의 부흥의 시기로서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80년대부터 소위 원리주의라는 종교의 극단주의 운동이 등장, 1989년 소련의 해체 이후 종교가 하나의 정치 이념으로 대치되고 있다. 원리주의란 자기 종교를 절대화한다. 이것을 필자는 군사적 절대주의로 단정한다. 원리주의는 서구 주도의 세계화에 정면 도전이다. 이들은 세계화를 서구가 경제를 주도하고 나아가서 서구 문명이 기독교와 계몽주의 철학에 근거하여 세속주의를 거룩한 아시아에 확산시킨다고 주장한다.

 

반면 서구는 모든 종교는 동등하여 동일한 하나님, 동일한 구원에 도달한다는 종교 다원주의 신학이 세계신학과 선교를 휩쓴다. 다원주의가 종교의 평화적 공존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민주주의의 징조이고 지름길이다. 그러나 아시아는 종교의 평화적 공존을 거부하고 정치화하고 이데올로기화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원리주의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은 이슬람 원리주의이다. 빈 라덴의 알 카에다는 테러를 자행, 수 천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반인륜적인 살인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미국이 나쁜 나라로, 빈 라덴은 영웅으로, 이슬람은 좋은 종교로 우리사회에 부각되어지는 현실이다.

 

학문적 깊이가 결여된, 문화차원에서 이슬람을 소개한 책자가 인기서가 되고 있다. 이슬람 문화는 가치중립이라는 입장에서 마음껏 소개한다. 이슬람 변호자들은 이슬람을 사랑과 관용과 정의의 종교로 소개하고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 종교자유는 전혀 없다는 것은 거론의 대상에서 완전 제외된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당하는 핍박은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 이슬람 역시 세계적 종교로서 세계정복을 꿈꾸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의 폭력은 공산주의에서 배운 것이다.

 

4) 가치관의 혼란

다음은 이라크 전에서 야기되는 가치관의 혼란이 주는 선교적 도전이다. 일반은총의 영역도 정(옳음)과 오(잘못됨), 진리와 거짓에 대한 바른 분별력이 있을 때 전도가 더 용이하다고 본다.

 

기독교는 정과 오에 대한 가치관이 분명한 종교이다. 그럼에도 현대는 이 문제에 대한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사회 미디어나 여론은 부시는 악인이고 김정일이나 후세인은 정의의 사나이다. 후자들의 반 인권적 죄악은 간과되거나 무시되고 반면 미국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더 부각시킨다. 이것은 기독교 선교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즉 반미감정은 반 기독교 정서로 이어진다.

 

더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충돌이다. 종교자유는 유엔인권 헌장에 의하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다. 그럼에도 이슬람권과 불교 및 힌두교 원리주의는 이것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종교는 철저히 집단적 가치관이며 권리로 개인의 자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적 서구가 만든 헌장으로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WCC나 카톨릭 일부는 이것을 수용한다. 그래서 자유세계의 인권파괴를 고발하는데 열을 올리는 반면 이슬람과 공산국가의 인권은 모른 체 한다.

 

가치관의 혼란에는 좌경 이념이 한 몫 한다. 좌경 이념은 사회정의와 빈자나 약자를 위한 사회이론으로 자처하나, 냉소주의이며 반 전통적이며 신과 영혼, 천국과 지옥 등 초자연 세계를 거부한다. 이들은 물론 기독교의 가치관을 거부한다. 좌경 이념이 사회를 지배할 때 도리어 경제는 약화된다는 것이 이미 나타난 현실이다.

 

5) 다원주의 혼란

현대 신학이나 선교는 신학적으로 다원주의의 도전에 직면한다. 기독교가 주 종교이면서도 다른 종교를 허용한 미국은 이번 전쟁에서 다원주의로 인한 심각한 혼돈이 발생하였으니 바로 한 미군 병사가 전우를 살해하고 부상을 입힌 사건이다.

 

이 병사는 이슬람 신자(무슬림)으로 같은 종교인인 이라크를 대항하여 싸우는 것에 갈등을 느끼고 도리어 아군을 죽이고 말았다. 미군 군목 중에는 이슬람 군목 30여명이 되는데, 이들도 이라크 전투에 참여하였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6) 소수인종주의 시대

현재 국제정치는 바야흐로 민족국가(nation-states)에서 소수민족주의(ethnonationalism) 혹은 인종민족주의로 발전하고 있다. 19세기 서구에서 발전한 민족주의는 70년대부터는 서서히 비서구 사회에서는 소수인종주의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동서냉전의 시대에 돌입하였으나 1989년 구 소련의 해체로 이데올로기에 의한 냉전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소수인종주의는 불행하게도 국제화 시대에 오히려 원시문화로의 복귀를 의미하며 이것은 기독교 선교에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원시문화로의 복귀는 문화인류학자들에게는 학문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기독교 선교 관점에서는 샤머니즘적 문화를 되살리기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 선교가 어렵게 된다.

 

기독교 선교가 샤머니즘 문화권에서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지만 부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사회에서 선교적 접근 자체가 어렵다. 또한 원시공동체는 부족간의 강한 배타주의로 인종갈등을 심화시킨다.

 

최근 인도네시아 칼리만탄에서 발생한 마두라족과 칼리만탄 원주민간의 충돌에서 일부 칼리만탄 원주민들이 보여준 끔찍한 행위 등은 과거 식인종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국제정치학자들도 이슬람 세계에서 인종주의는 이슬람 원리주의의 세계주의적 주장(the universalists claims of the Islamic fundamentalism)을 해친다고 우려한다. 이유는 인종주의는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아프카니스탄에서 패슈툰족, 타지크족, 우주베크족은 같은 이슬람이면서도 약간의 다른 차이로 종교의 이름으로 서로 파워게임을 전개한다. 우리사회도 국제화를 크게 외치지만 지방주의는 한국 사회와 문화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이다. 따라서 소수인종주의는 사무엘 헌팅톤이 말한 대로 문명충돌(clash of civilization)을 심화시킨다.

 

3. 21세기 선교전망과 선교전략

위기는 기회이다. 이라크 전쟁은 선교에 도전이지만 기회이다. 이라크에 들어간 서구나 한국 교회의 구호단체는 조심스럽게 선교활동을 하며 빌리 그래함 아들 그래함의 구호단체는 노골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미국 선교단체들의 비난을 사고 있다.

 

이라크에 복음주의 신학교를 세우자는 운동도 노골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많은 피난민들은 복음에 대한 수용성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프니스탄과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동유럽에서는 기독교회가 부흥하며 몽골은 1990년에는 여섯 명의 신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수 백개 교회에 1만 명 이상의 교회로 부흥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네시아는 한국교회를 능가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아시아의 화교들은 복음에 수용적인 사람들이다. 유교문명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 이슬람 국가 및 이스라엘은 아직도 복음에 저항적이다. 성경은 구원의 범위는 전 세계적이어서 하나님의 백성은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 처럼 많다고 하였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선교는 수단을 동반한다. 교회가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으로서 사명을 다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사 42:6).

 

1) 한국 교회와 선교는 인격의 위기이다.

먼저 한국교회와 선교는 인격의 위기이다. 복음운동은 사람운동이다. 신자들이나 전도자들이 먼저 중생된 인격자로서 통전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기독교의 절대성 증명은 인격으로 나타나야 한다. 9.11 이후 문명충돌론 논쟁에서 한국 학자들은 대부분 헌팅톤을 반박한다.

 

한 한국의 학자는 "헌팅톤은 훌륭한 정치학자지만 문화, 문명에 대하여 잘못 이해한다. 문명이 자체 힘으로 다른 문명과 싸우거나 무너뜨린 적은 없다. 정치세력이 문화를 악용하였다. 중요한 것은 보편적인 윤리와 민족문화의 다양성을 양립시키는 것이다," 고하였는데, 그는 이슬람은 기독교가 강한 지역에서 발전하였음을, 특히 칼로 정복한 역사를 무시한다.

 

세계 무슬림들은 앞으로 아시아에서 이슬람 국가가 될 나라는 한국이라고 호언한다고 한다. 이유는 한국 기독교가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기독교로 도덕과 윤리가 발전하였고 인간성을 더 풍요하게 한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사회가 기독교로 업그레이드 된 것을 증명해야 한다.

 

2) 교회와 선교의 협력관계

한국교회 선교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와 선교회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과 협력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로잔대회는 양자간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선교회가 교회에서 독립하는 것은 나쁘고 교회와 협동하는 것은 더 좋다. 그러나 교회의 팔로써 봉사하는 것은 가장 좋다고 하였다( independence of the church is bad, cooperation with the church is better, service as an army of the church is best).

 

이점에서 교회가 선교회를 완전히 없이하고 독점하려는 것은 잘못이고 또 선교회가 선교를 독점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교회는 선교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반면 선교는 교회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양자의 이상적 관계는 선교회는 교회의 다리와 팔로서의 역할을 하되, 교회가 미치지 못하고, 또 할 수 없는 분야를 위임받아 선교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3) 돈 선교는 지양해야 한다.

최근 미국의 한 선교학자가 현대주의의 도전을 받는 선교라는 주제에서 자본주의적 선교를 걸림돌로 지적하였다. 즉 달러로 영혼을 사는 선교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인도 등지에서 원주민이 기독교로 개종하면 얼마를 받았느냐고 동네사람들로부터 곤욕을 치른다고 한다. 한국교회도 거품경제를 타고 돈을 앞세운 것도 사실이다.

 

최근 테러와의 전쟁으로 많은 난민이 발생하였고 많은 나라들이 직접 선교의 문은 더 닫는 실정이 되어 NGO선교운동이 많이 발전한다. 그러나 이것은 돈과 막대한 인력을 요구하는 점에서 우려도 금치 못한다.

 

4) 동일화 전략

한국교회는 핍박받는 나라들의 교회와 동일화되는 선교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선교는 이제 우리가 직접 교회를 개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세워진 교회들이 잘 성장하고 뿌리를 내리도록 협력해야 한다. 고신은 아시아 개혁파교회들을 지원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중이다.

 

이제 우리가 선교할 선교지는 많은 교회들이 있다. 한국 선교사들이 계속 교회설립을 고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최근 WEC은 교회개척은 철저히 원주민에게 일임한다고 한다.

 

5) 제자화 선교

한국교회는 선교가 뿌리를 내리어 선교지에서 학교, 병원, 복지기관등 프로젝트에 투자하였다. 이제는 이것을 누가 콘트롤 하느냐의 시점에 왔다. 한국 선교사들이 가부장적 입장에서 주도하는 것은 이미 도전을 받고 있다. 원주민 지도자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아직 이것은 부족한 실정이다.

이사야 66장 20절에서 헌신적인 지도자와 평신도가 세워지는 것이 선교의 최종 목표이다. 르완다 경우 80%가 기독교 신자이지만 94년 인종청소로 악명이 높다. 러시아도 몽골도 교회는 급 성장한다. 그러나 성숙을 위해서는 아직 할 일이 많다.

 

6) 기독교와 세속화 분리

한국교회는 기독교가 세속적 종교라는 인식을 불식시켜야 한다. 서구문화와 결탁한 기독교가 세속적이라는 이미지는 변명하기 어렵다. 이점에서 이슬람 세계는 청교도적 윤리와 가치관이 빛을 발할 때라고 본다.

 

7) 통합선교의 강점과 약점

21세기는 질병, 가난, 전쟁, 폭력, 인권유린 등 인류의 비극이 상존한다. 그러나 선교는 갈수록 저항에 직면, 여기서 직접전도가 어려워짐으로 소위 통합선교가 발전될 수밖에 없다. 통합선교(wholistic missions)란 전도와 봉사를 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에이즈환자가 무려 4천1백만이나 되며 기근으로 2십억이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매년 2,200만이 기아로 죽어간다. 그리고 수천만의 난민이 있다. 이들은 선교의 기회이다. 물론 돈도 든다. 반면 통합선교는 평신도 선교를 증가시킨다. 평신도 선교시대는 선교에서 성직주의를 약화시킨다.

 

8) 선교협력을 더 강화해야 한다.

선교와 연합은 동전의 양면이다. 기독교에 대한 도전이 심한 선교지에서 선교사간의 협력은 필연적이며 성경적이다. 그러나 협력의 범위가 단순치 않다. 몽골의 경우 하나의 기독교 조직만을 인정하는 판에 연합은 필수적인데 쉽지만은 않다. 라덴은 범 이슬람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에서 테러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사실 더 세계적 연대를 강조한다.

 

9) 한국 선교는 신축적 전략이 요구된다.

사우디, 모로코 등은 선교가 전혀 불가능함에도 선교사들이 상주하면서 갈등을 느낀다. 후원교회들도 열매가 없다고 후원을 중단한다. 사우디 사람에 대한 선교는 꼭 사우디에서 하기보다 차라리 서구나 미국 등 사우디 디아스포라를 찾아서 하는 것도 가능한데 후원교회가 이해를 하지 않는다.

 

끝으로 한국교회는 먼저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선교적 교회와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선교회가 정치화되는 것은 선교를 죽이는 것이다. 교회가 영적으로 활력을 찾으면서 성장해야 하고 선교회를 위시한 기독교 기관들이 참신한 이미지를 주어야 한다.

 

국내 선교여건은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이다. 선교회가 참신하게 운영되는 곳은 소수 교파선교회와 초교파 선교회에 국한되는 인상은 한국 교회 선교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선교회가 힘있게 선교를 리더하지 못하는 상황도 선교의 어려운 난제이다.

(from : http://www.chtoday.co.kr/template/news_view.htm?code=mis&id=2352)

http://www.islammission.org/mission/worldmiss/mision_stratage(200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