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적 설교와 그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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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훈 교수
(서울신대)
서 론
성실한 신앙과 교훈 신학을 수용하는 기독교의 지성은 신앙과 규범을 현대정신에 의해 홍수처럼 나오는 오늘의 수필신학 위에가 아니라 초대교회의 사도의 증언 위에 확실히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당초부터 기독교 신앙은 보편적 종교성이나 인간의 공통적 심성인 종교적 본능이나 그러한 인간의 갈구가 축적되어 창출한 종교적 자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자연인의 심성을 압도하고 모든 자연인의 지성을 심판한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사건이 그 출발이었기 때문입니다.
본 론
현 세계 의식의 거대한 흐름
소위 초대교회 이후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의 크리스찬들은 오늘의 세속 철학과 현대의식으로 재조명한 여러 형태의 세속신학의 선전을 너무나 많이 접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의 세속적 지성이 경험론적 실증의 유일한 방법론이 되어 비평하고 분석한 합리주의의 종교는 하나님의 초월적 권위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인 구원과 영생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인간의 해방과 자유와 사회정의가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전대미문의 도전을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 앞에 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의식이 매스컴을 주도하고 이런 자유로운 비평적 방법론을 현대교육의 핵으로 시행하는 강의실에서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여 내일의 세대를 그들에게 위임하려고 하는 현대교육의 거대한 흐름을 비평 신학자 존 나이스피트는 ‘메가트랜드’(Mega-trend)라고 했습니다. 메가톤의 메가(Mega), 흐름이라는 트랜드(trend)입니다.
현대인의 의식이 당당하게 대하처럼 흘러가고 있는 그 속에 우리 목회자 는 가령 교회성장이 양이 양을 출산학적으로 출산하는 성장원리에 기대한다거나 교회성장이 관광학 개론의 이론에서 좋은 장소에 보기 좋은 건물을 호텔처럼 세워 자기 과시를 할 필요가 있다거나 큰 군중을 도식적으로 초조직함으로 능률화하여 효율성이 증대되는 힘의 논리를 교회성장학에서 활용하여야 한다고 하는 등등의 세미나 교육은 나름대로 현장교육의 개선책은 되지만 작금의 도도한 세속정신과 가치론에 의한 민중의식화의 도전 앞에서는 너무나 임시적이고 잠정적이고 실적신학의 방법론이 아니냐는 심각한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1980년대에 성서와 비교될만한 베스트셀러인 ‘메가트랜드’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한 존 나이스피트는 오늘 우리가 “제3의 자각 또는 제3의 혁명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종교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에 이어 오늘의 의식혁명에서 오늘의 교회가 그 도전의 파도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역사적 위기에서 그러한 기회를 다시 한번 원천적 기독교의 에너지인 사도적 증언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적 증언의 원형적 이해가 절대적 요구이면서 동시적으로 초대교회 역사적 이해가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을 먼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증언의 막중한 의미는 그들만이 예수의 공생애의 동참자요, 역사적 예수의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던 각별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들이 예수 지식과 증언의 내용과 그들의 신앙 규범의 성격에 관한 역사적 이해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지만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역사를 집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대교회 역사의 중심적인 존재 였던 12사도에 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다는 놀라운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역사적 이해가 용이하지 않는 이유
첫째로 사도들은 ‘순수한 역사’를 집필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과거 역사를 회상적으로 저술하려는 의사보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려는 역할에 전심했습니다. 상술한 순수한 역사의 집필은 니케야 교부 들 시대에 와서야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의 집필 동기 역시 일반 역사의 문서 가 아닌 기독교 변증의 문서로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어떻게 종교의 구조에서 벗어나 이방인 선교의 거시적 안목을 지닌 세계 교회가 어떻게 출현했는가에 대한 설명서입니다. 만일 저자 누가에게 질문을 했다고 하면 그가 초대교희의 막중한 역사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스승인 바울의 변호를 의도한 것이 결과적으로 초대교회의 유일한 역사적 자료가 되었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둘째로 초대교회 시대는 복음서 집필과 바울의 편지 등이 집필된 이후에 다시 침묵기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기독교의 활동이 터널을 통과하는 비유로 설명될 것입니다. 그러한 현상은 복음서나 신약의 편지들이 복음이 전도된 초기의 요구에 응한 문서들이고, 예수의 재림이 매일매일 뜨겁게 대망되는 역동적인 초기의 신앙공동체에 있어서 예수의 재림이 가장 강력한 주제였기 때문에 매우 가까운 미래를 지향한 교류와 질서에 관한 이론의 체계가 아직은 요구되지 않았으며 그런 자각이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의 사정으로 보아 바울의 설교 주제는 긴박한 예수의 재림이었고 그 강조가 너무 강력하여 바울이 그것을 전한 후에는 일손을 놓고 하늘만 쳐다보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연로하여 죽은 연장자의 구원을 걱정하는 가정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코 역사의 기록이 필요하다고 아무도 언급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셋째로 초대교회 사도들의 기록이 희소한 까닭은 사도들이 전기문학의 제목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활동을 제보해 줄 역사적 기록은 아주 적습니다.
오늘의 안목에서 평가하면 사도들은 초대교회의 건립자요, 창립자입니다. 초기 신앙공동체의 맥락에서 사도들의 위치는 교리와 교회의 감독자이기 보다는 성령이 충만한 예수의 증인이며, 아직 조직이 없이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전도자의 유형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 때 이방인이 구원의 권속 안에 수용되는 최초의 교리도 거기에 모인 전원의 동의에 의해서 성령과 우리가 결정한 사례일 뿐(15장 28절) 아직 고위층의 권위라는 교회론적 구상은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들은 아직 조직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전도자이고, 교회정치가는 아니었습니다. 사도들 의 이야기는 전도자의 이야기일 뿐 아직 교회역사는 아닌 것입니다.
사실적으로 기원 69년 이전 예루살렘 안에 머문 유대인 교회의 활동은 거의 아는 바가 없고, 70년 예루살렘 몰락 이후에는 사도들이 뿔뿔이 흩어져각처에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교회 전통에 의하면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에서, 맛디아는 현대의 소비에트 흑해 동안의 아르메니안 지방에서 순교했고 도마는 인도에서, 요한은 소아시아에서 마가는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을 지낸 후에 구주의 오지의 고을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넷째로 당신의 로마제국이나 희랍문화에서는 아직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취급이 되어야 할 사실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초기 당시 역사적 관심은 제왕과 정치가에 관한 일이며 갈릴리 어부들이 전한 갈리리 목수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적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요세푸스도 예수의 형제 야곱의 순교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기독교 자체 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역사가들도 젊은 사도의 기록을 빼놓고는 별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바 없고 사도시대가 훨씬 지나가서야눈을 돌렸습니다. 실제적으로 12사도의 행적과 영향에 관한 비교적 자세한 언급은 헤게시프스나 유세피우스 같은 조직된 교회지도자의 시대에 가서야 가능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몇 사람을 예외로 하고 평범한 존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누가 쓰겠습니까?
그럼에도 현대 지식은 초대교회가 있었던 그 시대에 관하여 많은 지식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당시 로마 역사에 관한 연구가 지금에 지극히 활발하여 새로운 고고학적 고증에 의한 많은 지식이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런 활발한 로마제국의 역사적 연구 속에서 사도들이 생존했던 그 세계의 정황에 관한 지식이 마치 엊그저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이런 활발한 역사탐구로도 사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방법론적으로 ‘무엇이 아니다’ 하는 만큼이나 ‘어떠했다’고 하는 상당히 정확한 유추를 해낼 수는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들어 사도시대의 로마는 비교적 안정되어 시민들의 유동이 활발하였고 광범한 문화의 교류가 가능한 환경이었습니다. 한 예로 고린 도에서 바울이 써 보낸 로마서를 보면 아직 바울이 방문한 일이 없는 로마시 에는 이미 바울을 잘 아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어서 그 편지 속에서 문안을 하고 있습니다. 주전 60년에 나온 시세로의「여행기」에는 주전 50년에 시저 가 영국을 침공한 사실이 그 사회가 안으로는 광범위하게 안정되었고 또 열려있는 역동적 사회였음을 알게 합니다.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로마제국은 한 언어 한 통치자에 의한 질서, 구석구석 도로가 발달한 방대한 영역으로서 영국에서 아프리카로 러시아에서 프랑스로 인도에서 서반아까지 도로망이 있어 불편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울 자신이 주전 44년에 시저가 이미 정복한 서반아의 선교를 소망한 적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결코 무리가 없는 생각입니다. 사도시대는 그들의 선교활동이 성공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문명, 통일된 판도, 활발한 교통수단, 하나의 언어, 이 네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활짝 열린 무대 위에서, 그리고 그 너머의 변경으로까지 힘차게 뛰는 사도들의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 역사가는 기독교 자체를 거의 간과해 버렸습니다.
다섯째로 사도시대가 지난 후에는 하나의 기독교가 희랍과 로마로 분리되었습니다.
사태가 크게 변화되어 소위 로마제국 자체가 로마와 바잔틴으로 분리되면 서 동방기독교, 서방기독교로 나뉜 교회는 서로 사도적 권위와 정통성을 시비하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교회는 사도들의 유물, 유품 등의 수집에 열을 올렸습니다. 이때 콘스탄틴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에 소위 12사도의 교회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고 사도들의 거룩한 뼈들을 수집하여 한 곳에 묻은 공동묘지를 터로 정하여 그 위에 엄청나게 큰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콘스탄틴 대제의 유명한 12사도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사도 안드레, 사도 아닌 사도적 권위의 지도자 누가, 디모데의 유골은 입수할 수 있었지만 바울과 베드로의 뼈는 특별히 안치될 방만 준비했을 뿐 그대로 로마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콘스탄틴의 꿈은 두 줄로 12사도의 유골을 안치하고 그 중심에 자기의 무덤이 위치하도록 설계했었지 만 결국 자기 무덤 이외는 완성을 보지 못했다고 유세피우스의「콘스탄 최후의 날」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그의 꿈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사도들의 유골을 찾기 시작한 노력의 출발점이 되어 쇠위 카톨릭 교회의 유품을 정중히 여기는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교회와 중세의 정치 권력자에게 더욱 극단화되어 고가를 지불하여 뼈를 얻고 유품을 얻는 미신의 요소가 불필요악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사도 연구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기도 하고 지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근자에 이르러 동․서 구교가 성유골에 대한 경쟁을 덜 할 뿐 아니라 교황 바오로 경우에는 그가 로마에 안치하여 온 안드레의 뼈를 도로 안드레의 순교지인 희랍에 반납하여 동․서교회의 화해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여섯째로 사도들의 선교 동기의 이해가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사도 연구에 있어서 부동의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외없이 전원이 마태복음 28장에 기록이 된대로 예수님의 위대한 선교명령을 심각하게 받아 들여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찾아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이야기 다시 말해 사도들의 역사는 주로 초대교회의전도 이야기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도들은 교회의 전도와 선교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전도는 서민이나 왕, 모두에게 차별없는 전도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기쁜소식을 전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스스로 일을 하여 자급하는 사람들로, 유급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중 바울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할 수 있는 대로 더 멀리 찾아가 남이 이미 세운 터 위에 세우지 않았다고 하였거니와 대체적으로 모든 사도들이 그와 같이 거의 단독 개척의 전도를 했습니다.
일곱 번째로 그들에게는 뚜렷한 사도적 선교전략이 있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경우 더욱 명백히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모든 사도들에게는 비상하고도 지극히 현명한 선교전략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언제나 우선적으로 상역로상에 위치한 큰 도시를 찾아갔습니다. 그런 후에 그 중심에서 다시 사도의 제자들이나 결신자들을 도시의 외곽으로, 그들의 거주지로 보내어 그 자리에 교회를 설립하게 하였고 그렇게 설립된 교회들은 다른 교회를 설립하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이 활용한 방법은 전략적으로 ‘중심’과 ‘분산’이라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교의 근거와 복귀라는 방법만을 일삼는 현대의 선교행위, 선교기구, 선교회와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당시의 사도들은 ‘교회인’이었습니다.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도들이 세운 것은 교회 회중 또는 교회 신자였습니다. 많은 현대의 선교활동은 교회와 분리되어서 교회로 하여금 선교하도록 다시 움직이는 데 힘이 듭니다. 아니면 밖에 있는 선교기구를 교회 안에 끌어들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는 결신자들로 하여금 즉각 교회가 되게 했다는 그 점을 현대의 전도학이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근래의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 가운데 태국으로 진출한 모든 선교사는 지금 전부 LA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 출국한 선교사는 전부 미국가서 잘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가 아닙니다. 이민의 변형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도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규범적인 가치를 거기에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25절에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이 말씀은 그의 신학적 요약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했다는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성’ 소위 세인트(saint)라고 하는 머릿글 칭호를 로마교회와 희랍교회가 사용하기 시작한 후에 많은 종교 위인들에게 이 관례를 적용함으로써 사도들의 실상보다 지나치게 위대하게 숭앙하는 점도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 신약의 정전으로 매듭이 끝나기 전에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 새 예루살렘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계 21:14)고 말한 본문이 있습니다. 이미 기원 1세기 후반에 가롯 유다가 떠난 자리에서 맛디아가 초대교회 전체의 인정 속에서 사도로 있었다는 증언으로 중시되는 이 본문으로 미루어 볼 때 서서히 12사도의 행적과 그 의미성이 새 예루살렘의 기초로서 평가되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12사도의 요건
전통적 이해대로 예수가 12사도를 택한 것이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상징적 의미때문일까요? 예수 자신이 새로운 영혼의 대제사장으로서 직분을 회복시키기 위한 열세번째의 지파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1장 21~22절에 보면 베드로의 사도적 모습을 예수의 구속적 공생애에 관한 동반자적 지식과 함께 예수의 부활에 관해 우리로 더불어 증거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규범에서 맛디아가 피선되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그의 회심 이후에 예수께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사도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지만 그 많은 수고와 또한 표적과 크신 능력에도 불구하고 12사도로 용납이 되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는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 일이 있습니다.
사도행전과 12사도의 관계
사도행전은 기독교가 유대주의 속에 한 갈래의 운동이었던 것이 바울의 부신 활동으로 설명되는 바와같이 어떻게 지중해 연안 제도시의 기독교가 되었으며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50년이 못되어 로마제국의 전 판도를 굴복시키는 세계의 종교가 되었는가의 이해를 위한 단서가 될 유일한 초대교회의 역사문서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어떻게 유대적 기독교의 핵심에서 성장하여 배타적인 유대주의의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고 이방인 기독교가 되었는가의 변증인 것입니다. 결국 사도행전은 어떻게 베드로 중심의 유대인 기독교에서 바울 중심인 세계의 기독교로 발전했는가의 해명입니다.
역사적 사실에서 볼 때 베드로도 바울과 동시대적 상황에서 로마에서 선교했습니다. 그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이 큰 이유도 되지만 제 1세기 이후에 실제적으로 유대인 사회 안에서는 기독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이 명백히 하는 바는 기독교가 유대인 사회의 구조와 맥락 안에 서, 한 갈릴리 목수에서 시작된 메시야 운동이었지만 다른 우수한 종교적 에너지인 바리새나 사두개나 에세네파 같이 유대주의와 유대인 배타적감정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로 한 신앙 운동이 왜 아니었는가의 변증인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같이 사도행전으로 완벽한 초대교회 역사를 찾아내려는 기대는 실망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신앙의 뜨거운 정열로 귀국한 당시 14개 지역의 모든 교회와 그들의 성장에 관한 정보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친구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의 처형시에 북부로 도주하여 짐작컨대 흑해 연안인 남부 코카서스에 정착했다는 추측은 있지만 그후 그들의 소식과 함께 당시 흑해 연안의 기독교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