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언약(신27-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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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모세의 세 번째 설교(신29:3)와 그의 마지막 유언과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과 저주의 길을 제시하면서 율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고 계신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가나안에서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곳에서 유럽을 순종하는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리고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므로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참된 삶의 모습과 우리의 올바른 생활 지침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축복과 저주(신27,28장)

27장의 전반부에서 하나님과의 회복으로 인한 예배와 친교가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신27:9)라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신27:14이하에 나오는 저주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27장은 율법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죄인의 도덕적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28장은 하나님의 통치하에 들어 있는 한 민족으로서의 축복과 저주의 길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경우 그들에게 주어질 축복은 무엇일까?

1) 율법 아래의 저주와 축복

이스라엘은 에발 산에 제단을 쌓고 속죄제 대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친교를 나누게 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발 산에서의 저주는 갈3:10에서 바울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율법의 행위에 삶의 원리를 두고 있는 자는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신28:1,2,13은 선민의 축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들은 역사서 특히 에스더서에 잘 나타나고 있다(에8:16,17; 에10:3).

2) 결과를 기다리라

지적 우월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이 행할 삶의 모습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고 맡기는 자세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결과들을 체험하게 하실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모든 분야에서 순종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2. 언약이 갱신(신29, 30장)

29장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파기되었던 언약을 갱신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이 모든 언약 갱신의 내용을 요약하면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신29:13)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언약을 갱신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30장에서는 범죄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그의 백성으로 회복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이런 약속에 대한 조건은 무엇인가?

1) 갱신과 회복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행한 언약의 갱신은 우상 숭배의 유혹을 이스라엘이 물리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을 뿌리 채 썩게 할 것이며, 그 나라에 많은 재난과 심판을 불러올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런 죄들을 완전히 소멸하지 않으셨는가? 그 때와 권한은 아버지께서 그의 권한에 두셨다(요21:22; 행1:7; 골2:18). 그리고 회복의 조건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심이다. 회개는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신30:10)라는 진실한 회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신30:3). 그리고 회개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지속적으로 순종해야 증명되는 것이다(신30:8-10). 이러한 회개에 근거한 은총은 하나님께서 동정 받을 자들로 측은히 여기실 것이다(신30:3). 그리고 흩어진 자들을 열방에 모으시고 그들의 땅으로 이끄실 것이다(신30:3-5).

2) 계약의 실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은 실천되어져야 할 것이며, 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회개함으로 매일 매일 하나님과의 약속이 갱신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말씀을 삶 속에 적용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들을 체험해야 한다.

3. 약속의 성취(신31-34장)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구세대들은 이미 죽었고 이제 모세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모세는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많은 일을 하였다. 그런 모세의 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새로운 지도자를 소개하면서 승리의 약속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신34:9). 이런 사실에 대해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리고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신3:21-29). 그 의미는 무엇인가?

1) 새 지도자

그들은 반석이신 하나님을 저 버리고 변절하여 우상을 세웠다(신32:15-18). 이에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이방인을 향하셨으며, 그들에게 징계를 가하셨다(신32:19-25). 그러나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때 그들은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신32:35-4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을 지상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 역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영원한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모세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그리스도가 이루었듯이 율법이 할 수 없는 구원을 복음이 이루었다(요1:17). 율법은 하나님의 표준이 무엇인지를 설정하기는 하지만 그곳에 도달할 수 있게는 못한다. 단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성령의 역사만을 가능하게 한다.

2) 영원한 약속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를 통해 지속되고 성취되었다. 이처럼 아담의 타락 이후 죄로부터 구원과 회복의 약속은 많은 구속의 사건 가운데 계시되면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 완성을 향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신다.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수아의 출현은 그들을 승리하게 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였다.

 

본문은 '언약의 갱신"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흩어질 것이며(신28:36), 비방거리가 되고 꼬리의 모습이 되지만(신28:37,44) 회개함으로 그 약속의 땅에 돌아와서 번영할 것(신30:2,3-9)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언약 갱신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된다. 그러므로 지금도 많은 흩어져 있는 그의 백성을 불러모으시고 새로운 하나님의 공동체를 확장시켜 나가신다.

 

1. 율법에 대한 복음서의 가르침

예수의 독특한 어법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메시아적 자기 이해에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추적해 볼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하여 직접적으로 표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적인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하기보다는 '부동성(不同性)의 원리' (principle of dissimilarity)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방법은 진짜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유대교와도 다르고,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와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방법론은 대단히 비현실적인 방법론이다. 왜냐하면 이는 시공(時空)을 벗어난, 비역사적이고 추상적인 예수를 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역사상에 있어서 유사성(類似性, 연속성)과 개별성(個別性, 불연속성)을 지니며 존재하게 된다. 이 점은 예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을 주장하는 것은 데카르트(Descartes)적인 과학적 방법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려는 것이 부동성의 원리이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자료를 통하여 역사적 예수의 메시아적 자기 이해를 찾을 수 있다면, 이는 확실하다. 또한 이러한 태도는 신학의 선교적 사명에 있어서도 대단히 유용한 것이다. 우리는 역사 비평학의 그릇된 태도를 외부에서 비판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직접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를 밝혀 주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방법론을 적용하게 될 때 대단히 그 적용범위가 좁아지게 된다. 비록 요한복음의 핵심이 역사적 예수의 메시야적 선포에 있기는 하지만 주로 위의 방법론은 공판복음에 적용된다. 여기서는 '아멘'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지니는 의미만을 한정하여 살펴볼 것이다. 유대인은 아멘이라는 단어를 응답의 경우(responsory case)에 사용하였으며, 현재의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스스로 중요한 말씀을 선포하실 때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유대교나 초대교회에서 그 사용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키텔은 그의 신학사전에서 이한 단어만으로도 역사적 예수의 메세야적 자기 이해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에서 볼 때, 이 말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랍비들은 자신의 말을 제자나 사람들에게 전할 때 3,4대까지 그 권위를 소급해 올라간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모세와 모세가 전수한 율법의 권위에 귀결되어 랍비들의 가르침이 전승된다는 의미이다. 또한 유대의 선지자들은 "야훼께서 말씀하신다."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예수와 같은 독특한 어법은 구사하지 않았다. 즉 예수는 아멘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함으로 자신의 엄청난 권위를 강조하였다. 이는 모세나 율법의 권위를 뛰어넘는 무엇이었다. 예수는 스스로 자신을 율법에 메이지 않는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2. 율법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바울은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구속사적으로 이해하였다. 바울은 율법은 복음의 예비 단계였고, 구약적 복음의 파괴 세력으로 작용하던 율법이 구원사적이고 종말론적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의하여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하여 주장하였다. 죽은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구속력을 지니지 못한다.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묘사하고 있다. 어떤 여자가 율법이라는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그 남자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자는 더 이상 그 남자에게로부터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아니하므로, 다른 남자(복음)에게 시집갈 수 있다는 것이 논지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율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율법은 죽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진 자로서 이미 죽은 율법과 더 이상 아무런 관련이 없다.

 

 

3. 율법에 대한 히브리서의 가르침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아론의 제사직에 근거하여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논한다. 히브리서는 사죄(赦罪)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아론의 제사장직이 실제로 그 기능을 발휘하여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논증하고 있다. 율법이 규정하는 짐승의 피 제사는 두 가지 면에서 근본적으로 속죄의 기능을 완전하게 수행하지 못한다. 첫째로 피 제사의 반복으로 인해서이다. 황소와 염소의 피제사는 1년에 1회씩, 또는 수시로 드려졌다. 즉 그것은 사죄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다는 의미인 것이다. 둘째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의 연약함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먼저 자신을 위하여 제사하고 그 다음에 백성을 위하여 제사하는 죄 있는 자들이었다. 죄 있는 자들에 의하여 수행된 피제사가 완전한 속죄의 기능을 수행하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