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델란드 개혁신앙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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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네덜란드(Netherlands)와 벨기에와 룩셈부르그는 ‘베네룩스 3국’(國家群)이라 부른다. 네델란드는 영어로 ‘Low Countries’로 ‘저지대’ 라는 의미이다. 이 지역은 16세기에 네덜란드가 맨 처음 독립국이 되기 전까지는 역사상 하나의 단위로서 기능했고 그 뒤에도 合從連橫(합종연횡)을 거듭하기도 했다. 지금은 세 나라가 뚜렷한 문화적, 정치적 개성을 지닌 국가로 서 있으나 역사적 공통분모는 크다.

저지대 국가들은 바이킹의 잦은 공격으로 도성을 건축하여 방어를 하였고, 유럽의 관문으로서 상, 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12세기에 들어서자 상인들과 기술자들이 영주들과 일종의 계약을 맺었다. 상인들과 기술자들은 영주의 정복사업을 지원하는 대신에 영주로부터 여러 가지의 보호 조치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다. 이러한 계약에 의해서 국제법의 규범이 되기도 하였다. 암스테르담이 유럽의 항구가 된 것도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4세기말부터 저지대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서서히 ‘부르고뉴 공국(公國)’에 의해 병합되어 나간다.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의 중심부에 있던 공국으로, 지금의 독일-프랑스 접경지대 알사스 로렌을 점령하고 저지대로 진출하여 15세기에는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된다. 부르고뉴 공국은 이 지역의 도시국가들을 강력하게 통치하면서 자율성을 많이 규제하였으나 정치적 안정을 부여함으로써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다. 저지대의 경제활동은 맥주 생산, 그림, 보석, 도자기 제작과 무역 등이었다. 저지대 사람들의 근면성과 오랜 상업의 전통이 좋은 지도자와 어울려 15세기의 번영을 가져왔다. 그러나 나중에 프랑스에 합병된다.

1506년 저지대의 통치권은 부르고뉴 공국에서 스페인 왕 칼 5세에게 넘어갔다. 칼 5세는 합스부르그 왕가(王家) 사람인데 그는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했다. 당시 유럽의 나라들은 왕들의 사유물처럼 취급되었다. 부르고뉴의 필립공(Phillip the Fair)은 스페인의 조안나 공주와 결혼했다. 필립은 아들이 태어나자 그에게 저지대 지역을 선물로 주었다. 이 아들이 16세기 유럽의 패자(覇者)가 되는 칼 5세였다.

칼 5세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들어온 저지대를 아주 너그럽게 다스렸다. 저지대는 상업과 공업의 결합으로 해서 유럽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지역이 되었다. 이런 황금기는 종교개혁과 이에 대한 반통의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피비린내 나는 시기로 접어든다. 칼 5세가 죽자 필립 2세가 스페인 왕이 된다. 스페인의 전성기이자 쇠락기의 시작을 열게 되는 필립 2세는 근엄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는 자신을 세계 카톨릭의 수호자라고 생각했고 신교도들을 이단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신앙을 로마 카톨릭으로 일치시키려 시도했으며, 과대한 세금을 부과하여 저지대 백성들의 원성이 커져갔다. 한 신앙을 수립하기 위해서 종교재판을 강화시켰다.

1517년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가 교황청을 정면에서 공격함으로써 불을 붙인 종교개혁의 바람은 저지대로 들어왔다. 저지대 지역은 상공업이 발달하고 자유분방한 사회풍조였으므로 루터교가 확산될 조건이 성숙되어 있었다.

그러는 중에 1550년경부터서 칼빈주의가 남쪽으로부터 저항할 수 없게 밀려들었다. 그리고 유능하고 불같은 견고한 사람들을 통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제네바에서 칼빈에게 가르침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칼빈주의 신앙을 널리 전파하였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구이도 드 브레스 (Guido de Bres)는 1567년에 순교를 당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목회자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그들 중에 페트루스 다테누스 (Petrus Dathenus)는 대단히 열렬한 사람으로서 프랑켄탈 (Frankenthal)에서 피난자들의 교회를 세웠고 화란 교회와 정치에 영향을 크게 행사하였다. 또 구이도 드 브레스 (Guido de Bres)는 1559년에 작성된 불란서 신앙고백을 따라 1561년 37개조의 반박문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화란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의 기초가 되었다. 또 1563년 독일 팔츠 (Paltz)에서 울시누스 (Ursinus)와 올레비아누스 (Olevianus)에 의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er Catechismus)이 작성되었다. 같은 해에 이 요리문답을 다테누스 (Dathenus)가 화란어로 번역하였다. 이런 저술들이 개혁신앙운동에 방향과 확고함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1566년에 칼빈주의자들의 주도로 귀족들이 동맹을 맺고 브루셀에 있는 총독에게 청원서를 내서 개혁신앙을 탄압하는 것을 약화해줄 것을 청하였다. 또 같은 해에 상인들도 동맹을 맺어 권리와 자유를 요구하였다. 또 1566년에 종교개혁의 새 동요가 일어났다. 그것은 교회와 기도처에서 상(象)들을 일제히 제거하는 일이 일어났다.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우상제거를 감행하였다. 이 일이 플라안더런 (Vlaanderen)에서 일어났는데 전국에 번개처럼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당국도 뒤로 물러 주춤하면서, 1567년 알바 공작으로 총독(hertog Alva)이 바뀌었다. 그는 스페인과 이태리 군대로 편성된 1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개혁파인사들과 고위귀족들을 다 반역죄로 몰아 처형하였다. 포로들은 스페인식의 종교재판으로 무참히 처형되었다.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을 목매어달고 화형에 처하며 태형을 가하고 생매장을 하였다. 이 때 상당수의 개혁파는 도피하였다. 그런데도 이런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지 않아서 개혁교회는 크게 자라갔다.

이 저지대가 연합으로 항거를 할 때 오렌지 윌리엄 공(prins Willem van Oranje)을 중심으로 항거가 시작되었다. 윌리엄은 루터파 신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개혁파들도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의 항거에 동참하게 되었다.

1572년 알바를 반대하는 봉기가 레이덴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퍼졌다. 그래서 1573년 알바는 해임되었다. 그러는 중에 스페인 군대가 진격하여 암스텔담과 할렘 등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프린스 윌리엄은 레이덴에 대학을 세워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576년 프린스 윌리엄은 남부지역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1579년 위트레히트 연합 (Unie van Utrecht)을 체결하여 벨기에 지역(친 로마교회)을 빼고 북쪽 지방들로 네델란드(친 개혁파)를 구성할 기초를 놓았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과의 해전에서 패하자(1588년) 휴전을 선포하고(1609년), 개혁신앙이 지배적인 저지대의 북부지역인 네델란드에서 모든 것을 잃고 철수하였다. 따라서 네델란드가 암묵적으로 독립을 유지하다가, 1648년 30년 전쟁을 끝내는 웨스트팔리아 조약에서 유럽의 열강이 네델란드의 독립을 보장하는 조항을 넣음으로써 스페인-네덜란드의 80년 전쟁은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하여 자유와 함께 신앙의 자유를 얻어 네델란드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뜻이 세워졌다. 즉 네델란드는 개혁신앙이 주도적이 된 나라가 되었다.

1571년 엠덴 (Emden)에서 개혁교회총회를 모아 교회를 조직하였다. 엠덴총회에서 화란 개혁교회의 조직 체계와 예배 의식이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였다. 장로교회적 교회정치제도가 채택되었고, 구교에서 볼 수 있었던 위계 계층적 교직제도를 거부하였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주안에서 형제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영으로 다스리시므로 모든 교회는 평등하고 위계질서는 전혀 없게 하였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부착한 신정정치만을 강하게 추진하였다.

스페인에서 독립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이 쟁취된 후 신앙 문제가 격돌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니케야 신경을 합의하는데 아타나시우스와 아폴리나리우스가 함께 하였지만, 그리스도 성육신의 이해방식에서 아폴리나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해서 디륵 폴커즈 꼬른헤르트(Dirk Volkerstz. Coornhert, 1522-1590)을 중심으로 항의가 제기되었다. 그는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기독교를 원하고 신앙고백은 완전히 배제하였다. 예정교리와 의지의 매임에 대해서는 부정하였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적인 덕으로 획득하는 것으로 꼬른헤르트는 주장하였다. 결국 1619년 네델란드 개혁교회는 개혁교회의 최초의 에큐메니칼 회의로서 절대예정에 대한 교리를 확정하게 된다(스코틀랜드 교회의 미참).

알미니우스파의 조항들 (Articuli Arminiani) 혹은 항의서 (Remonstrantia).

항의자들 (Remonstranten)이 1610년 우텐보헤르트 (Wtenbogaert)의 지도 아래 작성한 5개조 항의서는 알미니우스가 죽기 직전 (1608)친히 작성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주로 예정교리에 대항하여 이 조항들이 작성되었다.

제 1 조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고 불변한 작정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타락하여 죄있는 인간종족 가운데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 예수를 믿고 이 믿음과 믿음의 순종안에, 이 은혜로 말미암아 끝까지 견인할 자들을 작정하셨다. 그리고 반면에 고쳐질 수 없고 믿지 않는 자들을 죄안에 와 진노 아래 두시기로 작정하시고 또 그들을 그리스도와 격리된 사람들로 요한복음 3:16 안에 있는 복음의 말씀을 따라서 정죄하기로 작정하셨다. 요한복음 3:1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므르니라.

제 1 조항의 핵심은 예지된 믿음으로 그런 자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 믿지 않는 자들은 그 믿지 않음 때문에 멸망에로 작정하셨다.

이 조항이 전제하는 것은 타락하여 죄아래 있는 자들도 다 믿을 능력을 갖고 그 믿기로 한 그 작정 때문에 구원에로 작정하신 것이다.

제 2 조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구주는 모든 사람과 각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래서 그는 그들 모든 사람들 위해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의해 구속과 죄용서를 획득하셨다. 그렇지만 요한복음 3:16의 복음을 따라 믿는 자 외에는 누구도 실제로 이 죄용서를 누리지 못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이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느니라. 요한일서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 죄만 아니라 온 세상 죄를 위함이니라.

이 2조의 핵심은 그리스도는 택자들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이에서 나아가 각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죄용서는 믿는 자만이 누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만인 각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지만 그것을 받고 안 받고는 개인의 결정에 달렸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사람의 결정여부에 따라서 구속은혜가 사라지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다.

제 3 조

사람은 구원하는 은혜를 자신으로부터나 그의 자유의지의 힘에서 갖지 않는다. 사람이 배도와 죄의 상태에 있는 한, 자기 자신으로부터나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참으로 선한 어떤것을 (구원하는 믿음같은 것) 생각하거나 원하거나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출생하고, 이해나 성향이나 의지나 그의 모든 능력에 있어서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그는 참으로 선한 것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바로 이해하고 생각하고 원하고 이룰 수 있다. 요한복음 15:5 내가 없이는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3조는 사람이 중생하고 새로워질 필요가 있고 그렇게 되면 참으로 선한 것을 원하고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생과 새로워짐이 전적으로 은혜로 되고 그래야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올바르게 강조하지 못한다.

제 4 조

이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선의 시작이고 계속이며 성취이어서, 중생한 사람 자신은 앞서 오는 은혜나 돕는 은혜나 일깨우는 은혜나 뒤따라오며 협동하는 은혜없이 선을 생각하거나 원하거나 할 수도 없게 되고 악에 대한 시험에 저항할 수도 없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선한 행동들이나 운동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귀속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은혜의 역사의 양식에 대해서는 그것은 불가항력적이도 않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된 대로 그들은 성령에 저항하였다. 사도행전 7과 성경 많은 곳에서 그러하다.

이 4 조항의 핵심은 모든 선행은 은혜없이 안 되지만 그 은혜의 역사의 방식은 불가항력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즉 은혜의 역사를 거부할 수 있고 저항할 수 있는 자유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하는 주장이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사람이 거부하고 구원도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정이 결정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제 5 조

참된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통합되어 그의 생명을 주시는 영에 동참자들이 된 자들은 이로써 사탄과 죄와 세상과 자신들의 육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완전한 힘을 가지고 승리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성령의 돕는 은혜로 말미암아서라는 것이 잘 이해되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모든 시험에서 그들을 도우며, 그들에게 그의 손을 펴신다. 그리고 그들이 투쟁에 대해 준비만 되어있고 그의 도움을 원하고 비활동적이지 않으면 그들이 타락하는 것을 막으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탄의 계교나 힘에 의해서 미혹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손에서 빼앗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즉 요한복음 10:28: 어떤 사람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러나 그들이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삶의 처음을 버릴 수 있는지 혹은 다시 이 현 악한 세상에로 돌아갈 수 있는지, 그들에게 전달된 거룩한 교훈에서 돌이킬 수 있는지 혹은 거룩한 양심을 잃고, 은혜를 상실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성경에서 특별히 결정해야지 우리 마음의 확신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조의 핵심은 은혜를 입은 자들이 사탄과 죄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지만 게으름으로 구원하는 은혜에서 탈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은혜가 사람의 형편에 따라서 상실되고 사람이 잘 하면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즉 은혜의 유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린 것이 된다.

반항쟁운동 (Contraremonstratie)

1611년 개혁파는 1610년에 작성된 항의서에 대항해서 반항의서 (contra-remonstratie)를 제출하였다. 이 문서의 작성자는 레에덴의 설교자 페스투스 홈니우스 (Festus Homnius) 이었다. 이 때부터 그는 반항의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논쟁이 격렬해질 때 홀란드의 법무장관 혹은 검찰총장 올덴바르네펠트 (Oldenbarneveldt)는 큰 자유주의자이어서 무장한 군대로 반대자들을 진압하도록 제안하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이제까지 중립이던 프린스 마우리츠 (prins Maurits)가 반항의자편을 들었다. 그는 지방연합의 대표로서 반항의자들을 편들었다. 그리하여 그의 영향아래 의회의 대다수가 국가적인 총회를 열어 이 논쟁을 해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홀란드와 위트레흐트는 이런 총회를 반대하였다. 그 때 마우리츠 공은 두 지방에 꾸데타가 일어나도록 하였지만 홀란드가 여전히 반대하므로 화란의회를 통하여 그는 거의 독재적인 권력을 입었다. 이로써 왕정에 반대하는 자들의 지도자들을 잡아들였는데, 올덴바르네펠트도 연합에 대한 배신 때문에 1619년에 목베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우텐보헤르트 (Wtenbogaert)는 국외로 도망갔다.

이제 국가적 총회가 열리는 것을 막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1618년 11월 13일 도르트레흐트 (Dordtrecht)에서 총회가 소집되었다. 각 주마다 대표들을 이 총회로 파송할 뿐만 아니라 개혁파 나라들도 대표를 파송하도록 정부가 요구하였다.

그래서 영국, 팔츠 (Paltz), 브레멘 (Bremen), 엠덴 (Emden), 헷센 (Hessen), 나싸우 (Nassau), 독일어를 쓰는 스위스와 제네바에서 대표들이 파송되어 돌트레흐트 총회에 참석하였다. 불란서의 개혁파는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참석하지 못하였다. 또 화란정부 쪽에서도 18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리하여 약 100명 정도가 참석하였다. 이렇게 하여 1618-1619 년 돌트레흐트에서 처음이고 유일한 에큐메니칼 개혁파 총회가 개최되었다. 의장은 요한네스 보헤르만 (Johannes Bogerman)이었는데, 항의자들은 소수파로 참석하였다.

돌트레흐트 총회의 공식언어는 라틴어였다. 이것이 장로들이 적게 참석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총회의 주제는 항의운동의 정죄여부였다. 두 파가 다 서로의 주장들을 충분히 분석하였다. 교회는 어떤 복음을 전파할지를 결정해야했다. 오직 은혜의 복음이거나 인간행동 혹은 인간의 책임의 복음을 결정해야만 했다. 항의자들은 상실된 대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시몬 에피스코피우스 (Simon Espicopius)의 지도아래 끝까지 저항하였다. 심한 항의 때문에 그들은 총회에서 쫓겨나고 그들의 주장은 문서로 다루어졌다. 1619년 4월에 돌트 표준 (Canones Dordracenes) 즉 항의자들에 대항한 5개조가 결정되었다. 이 돌트 표준은 화란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함께 교회통일의 3대공식이 되었다.

돌트표준 혹은 칼빈주의 5대교리

돌트 표준은 항의자들의 5개조에 대항해서 작성되었다. 그러므로 5개조로 구성된다. 항의자들이 신적 예정에 대해서 항의하였으므로 첫 항목이 신적 예정에 관하여서 (De Divina Praedestinatione)로 시작한다.

교리의 첫째 머리: Primum Doctrinae Caput, De Divina Praedestinatione

: 하나님은 조건 없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신다.

제 1 조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하여, 저주와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모든 인류종족이 죄와 저주 아래 남겨지도록 하시고 또 죄 때문에 그들을 정죄하기를 원하셨어도,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시는 것이 아니다. 사도의 말들을 따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정죄아래 있나니. 롬 3:19.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6:23.

제 1조 요점: 모든 인류의 범죄로 정죄와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지 않아도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선언한다.

제 2 조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으니 그가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요한일서 4:9; 요한복음 3:16

제 2조 요점.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범죄한 자들로 영생을 얻게 하셨다. 이것이 큰 사랑이다.

제 3 조

사람들을 믿음에로 이끌기 위해 그의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전령들을 그가 원시하는 사람들과 그가 원하시는 때에 보내신다. 그들의 사역으로 사람들이 회개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로 부름받는다. 그들이 듣지 못하면 어떻게 그들이 그를 믿을 것이요? 전파자 없이 어떻게 들으리요? 보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전파할 것이요? 롬 10:14, 15

제 3조의 핵심은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복음전파자들을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 보내신다.

제 4 조

이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 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무른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주 예수를 살아있는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

4조의 요점: 주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제 5 조

그런 자들과 다른 모든 죄인들의 불신앙의 원인이나 죄과가 결코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gratuitum Dei donum). 기록된 대로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값없이 너희에게 주어졌으니 빌 1:29

요점: 불신앙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사항이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제 6 조: 믿음이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에서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 주어지고 다른 사람들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영원부터 그의 작정에서 나온다; 그의 모든 일을 그가 영원부터 아신다. 행 15:18; 엡 1:11. 그 작정에 따라 택자들의 마음이 아무리 굳어도 은혜로 부드럽게 하시고 믿는 것에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신다.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그의 의로우신 심판으로 악독과 굳어짐에 남겨두신다 (non electos autem justo judicio suae malitiae et duritiae relinquit). 여기에 가장 중요한 가장 깊은 것과 자비로운 것이 나타났으며 또 멸망의 사람들의 구분이 공정하게 나타난다. 혹은 저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되었다. 이것을 패역한 자들과 불결한 자들과 굳건하지 못한 자들은 자기들의 멸망에로 비튼다. 그러나 거룩한 자들과 경건한 자들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위로가 주어진다.

요점: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가 영원부터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정해진다. 불결한 자들과 패역한 자들은 이 작정을 자기들의 멸망에로 비튼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제 7 조: 선택이 하나님의 불변한 작정이다.

그런데 선택은 하나님의 불변한 작정이시다. 이 작정으로 창세전에 보편 인류종족으로부터 처음의 순결성의 상태에서 자기의 허물로 죄와 죽음에로 떨어진 종족으로부터 그의 가장 자비로우신 뜻의 기뻐함을 따라 순전한 은혜로 그들 사람들 중의 어떤 무리를 택하셨는데, 그들 중에 더 나은 어떤 사람들이나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같은 비참함에로 떨어진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영원부터 모든 택자들의 중보자로 구원의 머리와 기초로 세우셨다.

이와 같이 그에게 구원얻을 자들을 주시고, 그와의 교제에로 말씀과 그의 영으로 유효하게 부르시고 또 끌으시며, 참된 믿음을 주시며, 의롭다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아들의 교제에서 지켜진 자들을 영화롭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렇게 작정하심은 그의 자비를 드러내시고 그의 영광스런 은혜의 풍성함을 찬송하도록 하심이다.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그의 앞에서 거룩해지고 사랑으로 흠없게 하시려 함이니; 그는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뜻의 기뻐하심에 따라 자신 안에서 아들들로 삼으시사 그의 영광스런 은혜의 찬송이 되게 하셨으니, 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받으실 자로 만드셨도다. 엡 1:4, 5, 6.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셨고 또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고 하셨으며; 의롭다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0

요점: 선택이 하나님의 불변할 작정이다. 타락한 자들 가운데서 그냥 값없이 아무 공로없이 그들을 택하셨다. 이들을 택하심은 순전한 그의 기뻐하심으로 구원에로 예정하신 것이고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은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송하게 하려고 하심이다. 선택이 순전히 하나님의 기뻐하심에서 나왔으므로 그렇게 택하시고 부르신 것을 찬송하게 하려고 하심이었다.

제 8 조: 선택은 하나의 동일한 선택이다. 구원에로의 선택이므로

이 선택은 여러 종류가 아니고 신약과 구약에서 모든 구원얻을 자들의 하나이고 동일한 선택이다. 성경은 유일한 그의 기뻐하심과 작정과 하나님의 뜻의 경륜을 선포한다. 이로써 그는 영원부터 우리를 은혜와 영광에로 선택하셨고 또 구원과 그가 우리로 그 안에서 행하도록 예비하신 구원의 길에로 선택하셨다.

요점: 이 선택은 신구약에 동일한 하나의 선택이어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의 뜻이다. 택한 자들을 구원에로 부르셨다.

제 9 조:

이 동일한 선택이 미리 아신 믿음에서나 믿음의 순종에서나 거룩함에서나 다른 어떤 선한 성질과 성향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마치 선택될 사람 안에 미리 요구된 원인이나 조건에서 처럼이 아니고, 믿음과 믿음의 순종과 거룩함에로 선택하신 것이다. 선택이 모든 선의 원천이듯이: 거기로부터 믿음, 거룩함과 다른 구원하는 선물들과 마침내 영생과 그 열매와 결과들이 흘러나온다. 사도의 말을 따라: 그가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그 앞에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1:4.

요점: 선택은 예지된 믿음이나 믿음의 순종이나 선한 성향 때문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선택에서 믿음과 영생이 흘러나온다.

제 10 조

이 값없는 선택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성질들이나 행동들을 모든 가능성들에서 구원의 조건으로 택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인들의 무리들에서 어떤 사람들을 자기의 소유로 아셨다.

기록된대로: 아이들이 아직 나지도 않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는데 말씀하기를 (물론 리브가에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 기록된 대로 야곱은 내가 사랑하고 에서는 내가 미워하였다. 롬 9:11, 12, 13. 영생에 이르도록 정해진 자들은 다 믿으니라. 행 13:48.

요점: 인간의 행동이나 성질과는 무관하게 죄인들 중에서 일부를 그냥 자기의 소유로 택하셨다. 하나님의 기뻐하심 외에는 아무런 선택의 원인이 없다. 인간들의 행동이나 성질들에서 아니고 그냥 죄인들 중 어떤 사람들을 자기의 소유로 택하셨다.

제 11 조

하나님 자신은 가장 지혜로우시고, 불변하시며, 전지하시며, 전능하시다. 따라서 그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선택은 (ita electio ab ipso facta) 깨어지거나 변해지거나 취소되지 않고 끊어지지도 않는다. 택자들이 버림 받지도 않고, 그들의 수가 감소되지도 않는다.

요점: 선택은 불변이다.

제 12 조

이 구원에로의 영원하고 불변한 그의 선택으로부터 택자들에 그의 때에 다양한 등급으로 다른 정도로 확실한 것들이 돌려진다. 사실 하나님의 은밀하고 깊은 것들을 호기심으로 탐구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의 열매들은, 무오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목되어 있는데, 그리스도 안에게 참된 믿음과 하나님을 아들처럼 두려워함과 하나님에 대항한 죄에 대하여 슬퍼함과 의에 주림 등등은 그 자신 안에서 영적 기쁨과 거룩한 기뻐함으로 관찰할 수 있다.

요점: 선택이 은밀하고 깊은 하나님의 일이므로 탐구할 수 없지만 선택의 열매들은 영적 기쁨으로 감지할 수 있다.

제 13 조

선택을 지각하고 그 확실성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자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주의 자비들의 깊이를 경탄하며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먼저 자기들을 그렇게도 사랑하신 그를 이제 열렬하게 사랑하게 된다. 이 선택교리와 그 묵상에 있어서 신적 명령들을 지키는데 게을러질 수 없고, 육신적으로 안전에로 돌아가는 있을 수 없다. 이런 것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가운데 성급한 가정의 결과들이고, 선택의 은혜를 부질없게 또 음분하게 시비하는 것의 결과인데 택자의 길에 걷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결과들이다.

요점: 선택은 오히려 겸손하게 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게을러지고 육신적인 안일에로 돌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제 14 조

이 신적 선택에 대한 교리는 하나님의 가장 지혜로운 경륜에 의해서 선지자들과 그리스도 자신과 사도들로 말미암아 신구약에 선포되었다. 또 그 후에 거룩한 기념비적인 문서들에 의해서 천거되었다. 즉 이와같이 오늘날 하나님이 교회에서, 특히 이 교리가 교회를 위해서 정해졌는데, 분별의 영으로 경건하고 성스럽게 그 때와 장소에 따라서 공포되어야 할 것이다. 호기심으로 길들을 살핌이 없이 할 것이 아니다. 또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고, 생생한 그의 위로를 전파하게 된다.

요점: 이 교리는 신구약에 선포되었으므로 교회에서 때에 따라 적합하게 전파해야 한다.

제 15 조

성경이 우리의 선택의 이 영원하고 값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최상으로 밝히고 우리에게 천거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선택되지 않았다고 증거하고, 선택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서 지나치고, 그런 자들을 하나님은 그의 가장 자유롭게 가장 의롭게 후회하심이 없는 불변의 기뻐하심으로 같은 비참함에 내버려두시기로 작정하셨다. 이 비참에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과 때문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구원하는 은혜나 돌이킴의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고 그들의 악 가운데서 또 의로운 심판에 넘기워져서, 불신앙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죄들 때문에 그의 공의의 선언에로 정죄될 것이며, 영원히 형벌을 받도록 정하셨다. 이것이 유기의 작정인데, 하나님은 결코 죄의 저작자가 아니시다. 또 이로써 그는 두려워해야 할 그리고 후회하실 것이 없는 의로운 심판관이 되실 것이다.

요점: 유기는 일부 사람들을 그들의 죄과 와 불신앙 때문에 비참함에 버려두기로 하신 작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죄의 저자가 아니시고 의롭고 합당한 공정한 심판관이 되실 것이다.

제 16조.

그리스도에 대한 산 믿음과 심장의 확실한 신뢰와 양심의 평화와 아들처럼 순종에 열심함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함을 충분하게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용하도록 약속하신 그런 수단들을 이용하여 유기를 언급하여도 놀라지 않고, 또 자신을 유기된 자들에게로 배정하지 않도록 한다. 또 수단들을 사용하여, 때때로 더 풍성한 은혜를 열렬하게 원하며 경건하고 겸손하게 기대하게 만든다. 늦게 하나님께로 돌이켰고 오직 그만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고 죽음의 육체를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들은 유기교리를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경건과 믿음의 삶에서 그들이 원하는 곳까지 이를 수 없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그 향불나는 아마를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기로 약속하셨다. 그렇지만 자신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한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세상의 염려와 육의 욕망에 자신들을 전적으로 넘긴 자들에게 이 교리는 두려움이 된다.

요점: 신앙의 성장이 덜 된 자들은 수단들을 사용하여 선택사실을 확고하게 한다. 연약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세상에 집착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만 이 교리가 두려움이 된다

제 17 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그의 말씀에서 판단할 수 있는데, 말씀은 증거하기를 믿는 자들의 자녀들은 본성으로 아니고 은혜언약 때문에 거룩하다고 한다. 그 언약에 자녀들이 부모들과 함께 포함된다. 따라서 경건한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의 선택과 구원에 대하여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릴 때부터 부르셨다.

요점: 믿는 자의 자녀들도 선택되었다. 언약관계 때문에 자녀들의 선택이 확실하다.

제 18 조

이 값이 주시는 은혜의 선태교리에 관해서 또 의로운 유기의 엄함에 대해서 불평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사도의 말로 대항한다. 사람아, 너가 뉘기에 하나님께 대구하는가? 롬 9:20. 우리 구주의 말씀을 인용하면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 권이 내게 없느냐? 마 20:15. 우리는 경건하게 이 신비들을 존경하여 사도와 함께 외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 얼마나 깊은고! 그의 심판들은 찾아내지 못할 것이요 그의 길들은 찾을 수가 없도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에게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그에게 먼저 드려 돌려받을 것인가?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있느니라. 그에게 영광이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3-36.

요점: 선택과 유기교리는 시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다.

제 2 교리의 머리: Secundum Doctrinae Caput, De Morte Christi, et Hominum Per Eam Redemptione

교리의 제 2 머리;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죽음을 통한 사람의 구원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자들만을 구원한다.

제 1 조

하나님은 최상으로 자비로우실 뿐만 아니라 가장 공의로우시다. 그의 공의는, 그의 무한한 엄위에 거슬러서 범한 우리의 죄들이 현세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에서도 영혼과 육체의 형벌로 형벌 받기를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형벌들을 피할 수가 없다.

요점: 우리의 죄에 대해서 그 형벌을 받아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제 2 조

그에게 보상하는 것과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그 지대한 자비에서 그의 독생하신 아들을 우리에게 보증으로 주셨으니, 그가 우리를 위해 속상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우리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죄와 저주가 되셨다.

요점: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를 위해 속상하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죄와 저주를 지게 하셨다.

제 3 조

하나님의 아들의 이 죽음이 죄를 위해 유일하고 가장 완전한 희생과 속상이시어서 무한한 힘과 가치를 가지므로 모든 세상의 죄들에 대해 넘치도록 충분하게 속량한다.

요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세상 죄를 위해 완전하고 유일한 속량이다.

제 4 조

그러므로 이 죽음이 그토록 큰 힘과 가치를 가졌다. 왜냐하면 이 죽음에 종속하신 인격이 참되고 완전하게 거룩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이서 그런 자로서 우리의 구주가 되셔야 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지각과 결합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죄들 때문에 죽음에 합당하였다.

요점: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완전한 사람과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므로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에 합당하다.

제 5 조

더욱이 복음의 약속은 바로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그 약속은 모든 백성들과 사람들에게 이루어졌는데, 그들에게로 하나님이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복음을 보내셨으므로, 그냥 공동으로 구분없이 선포되고 공포되어야 하되 회개와 믿음의 명령과 함께 되어졌다.

요점: 이 복음의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진 것이므로 아무 구분없이 선포되고 공포되되 회개와 믿음의 명령으로 되어졌다.

제 6 조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부름받지만 회개는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불신앙으로 멸망하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바쳐진 희생의 실패나 불충분성이 아니고 그들 자신의 합당한 허물이다 (propria ipsorum culpa).

요점: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부름받았지만 회개하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허물이고 그리스도의 희생의 실패가 아니다.

제 7 조

참으로 믿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멸망에서 해방되고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은혜 (beneficium)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서, 영원부터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혜인데, 그들에게 몫이 된다. 이 은혜는 하나님이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아니다.

요점: 이 구원은혜는 순전한 은혜로서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 할당된 것이다.

제 8 조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인 경륜과 가장 은혜로우신 의지요 목적이다. 즉 그의 아들의 가장 고귀한 죽음의 살게하고 구원하는 능력이 모든 택자들 안에 역사한다. 오직 그들에게만 의롭게하는 믿음이 주어지게 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류없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 즉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해 새 언약이 확증하였다) 모든 백성과 족속과 방언에서, 영원부터 구원에로 선택되고,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그들 모두를 오직 그들만을 유효하게 속량하시고, 믿음을 주시며 (믿음과 성령의 다른 구원하는 은사들을 그가 자기의 죽음으로 획득하셨다), 모든 죄들에서 원죄나 실범죄들이나 믿기 전에 지은 죄나 믿음 후에 지은 죄들을 자기의 피로 깨끗하게 하신다. 또 마지막까지 신실하게 지키시고, 마침내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자기 앞에 영광스럽게 서게 하신다.

요점: 구원하는 은혜가 오직 택자들 안에서만 역사하고, 믿음이 택자들에게만 주어지고 확실하게 구원에 이르게 한다. 택자들만을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온전하게 깨끗하게 하신다. 그리고 점도 흠도 없이 주 앞에 서도록 하신다.

제 9 조:

이 경륜은 영원한 사랑에서 세상 시작부터 지금까지 택자들에게로 흘러가는데, 지옥의 문들이 투쟁하였어도 헛되어, 능력있게 성취되었다. 또 차례로 또한 성취될 것인데, 어떻든 택자들은 자기들의 때에 하나로 모여지게 될 것인데, 항상 믿는 자들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에 정초되어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 신부를 위해서 하는 것처럼, 교회를 위해서 자기의 영혼을 십자가에서 내어놓으셨는데, 항상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양육하신다. 교회는 그를 자기의 구주로서 여기와 영원에까지 찬송할 것이다.

요점: 이 선택경륜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서 나와서 교회에 적용되었고 앞으로 계속 적용될 것이다. 한 교회가 된 후에도 영원히 그리스도를 구주로 찬양할 것이다.

교리의 제 3과 4 머리: 사람의 부패와 하나님께로 돌이킴과 그 방식에 관하여

Tertium et Quartum Doctrinae Caput, De Hominis Corruptione, et Conversione Ad Deum Ejusque Modo.

:사람의 전적인 부패

제 1 조

본문: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 곧 그의 창조주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또 영적 사물들의 지식이 지성에, 의가 의지와 심장에, 또 깨끗함이 모든 감정들에 장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적으로 거룩하였다 (totus sanctus). 그러나 마귀의 충동을 받아 순전한 그의 의지로 (libera sua voluntate a Deo desciscens) 하나님에게 반역하여 그런 은사들을 자신에게서 완전히 박탈시켰다. 또한 그 반대로 지성의 눈멀음, 무서운 어두움, 허영과 판단의 삐뚤어짐, 의지와 심장에 악독과 반역과 굳어짐, 모든 감정들에 불결을 모아왔다.

요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데 마귀의 충동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므로 모든 은사들을 상실하여 지성과 의지와 감정이 완전히 비뚤어졌다.

제 2 조

본문:

타락 후에 사람은 그런 존재였으므로 그런 자녀들을 생산하였다. 확실하게 부패한 자는 부패한 자들을 낳았다. 아담으로부터 모든 후손들에게 모방에 의해서가 아니라 (펠라기우스파가 전에 주장했던 대로), 악한 본성의 확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때문에 부패가 전달되었다.

요점: 모든 부패가 악한 본성의 확장으로 모든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결코 모방에 의해서가 아니다.

제 3 조

본문: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잉태되었고 진노의 아들들로 출생되었으므로 모든 건전한 선에 부적합하고, 악에로 기울어져있고, 죄안에 죽었으며, 죄의 종이다; 성령의 중생하는 은혜는 없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과 부패한 본성을 교정하는 것과 스스로 그 본성의 교정을 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요점: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므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고 부패한 본성을 고칠 수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제 4 조: 본서의 빛의 불충분성

본문:

사실 타락 후에 사람 안에는 어떤 본성의 빛이 남아있는데, 그 덕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자연적 사물들에 대한 지식, 선악간의 분별하는 지식을 유지한다. 그리고 덕과 외적 훈련을 적용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본성의 빛에서 구원하는 하나님 지식에 이를 수가 없으며, 그에게로 자신을 돌이키는 데도 충분하지 못하다. 사실은 자연적인 사물들과 시민적인 사물들에서도 그 빛을 바로 사용할 수가 없다. 그 빛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빛은 여러 방식으로 사람을 오염시키고 불의에로 붙잡아두어서, 그것을 행하여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핑게할 수 없게 된다.

요점: 타락 후 사람에게 남아있는 본성의 빛은 하나님과 자연적인 사물들에 대한 지식은 주나, 구원적인 하나님 지식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도 없으며, 자연적인 사물들도 잘 사용할 수가 없다.

제 5 조:

본문:

그 본성의 빛 때문에 십계명을 모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주어졌다. 이 율법은 사실에 있어서 죄의 크기를 벗겨내고, 사람을 점점 더 피고소자로 몰아가지만, 처방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 비참함에서 나오도록 하는 힘을 수여하지 못하고, 육으로 말미암아 연약해져서, 범법자를 저주에 넘기운다. 사람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하는 은혜를 획득할 수 없다.

요약: 본성의 빛 때문에 율법을 주셨으나 이 율법은 사람을 고소하여 비참함에 묶어 두지, 율법으로 사람은 구원은혜를 얻을 수 없다.

제 6 조

본문:

본성의 빛이나 율법이 할 수 없는 이것을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수행하신다. 설교로 화해사역 곧 메시야에 대한 복음으로 수행하시는 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구약과 신약에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요약: 본성의 빛이나 율법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음으로 혹은 성령의 능력으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기뻐하셨다.

제 7 조

본문:

이 하나님의 뜻의 신비를 하나님은 구약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드러내시고 신약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백성들의 식별을 넘어서 나타내셨다. 이 섭리의 원인은 한 종족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본성의 빛을 더 잘 이용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두어야한다. 모든 공로를 넘어서서 또 모든 공로에 거슬러서 그렇게도 큰 은혜를 받은 그들은 은혜를 겸손하고 감사하는 심장으로 인정해야하고, 그런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함과 공의를 사도와 함께 경외할 것이고, 결코 호기심으로 탐사하려고 하면 안 된다.

요점: 하나님의 뜻의 신비를 하나님이 드러내셨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이 구원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겸손하게 그 은혜를 인정하고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함과 공의를 경외할 것이고 탐사하려고 하면 안 된다.

제 8 조

본문:

복음으로 부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진지하게 부름 받은 것이다. 진지하고 가장 참되게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현시하셨다. 하나님 자신에게 기뻐하는 것은 즉 부름 받은 자들이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것임을 현시하셨다. 또 진지하게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과 믿는 자들에게 영혼의 안식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요점: 하나님은 확실하게 부르셨으므로 부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며, 자기에게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혼의 안식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제 9 조

본문:

복음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부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나아오지도 않고 돌이키지도 않는 것은 그 허물이 복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제공된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부름 받은 자들 자신에게 있다. 그들의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떻든 용인은 하지만, 심장에 들이지 않고, 일시적인 믿음의 사라지는 기쁨 후에는 뒤로 물러간다. 다른 사람들은 염려의 가시들과 세상 쾌락으로 말씀의 씨를 질식시켜 아무런 열매도 내지 못한다. 이것을 우리의 구주가 씨의 비유로 가르치신 것이다. 마 13.

요점: 부름 받아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의 책임은 복음이나 복음의 그리스도나 복음으로 부르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름 받은 자들 자신에게 있다. 혹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심장에는 들어가게 하지 않고 조금 기뻐하다가 도로 뒤로 물러간다.

제 10 조

본문:

다른 사람들이 복음의 사역으로 부름 받아 나아오고 돌이키는 것은 사람에게 돌릴 일이 아니다.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이거나 믿음과 돌이킴에 있어서 충분한 은혜로 가르침 받아 분별하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교만한 펠라기우스파들이 이단으로 설정한 것이다). 오히려 영원부터 자기의 백성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때에 맞게 유효하게 부르시고, 그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주시며, 어둠의 권세에서 구출하시어, 그의 아들의 나라에로 옮기시고, 이런 자들 자신을 어두움에서 경탄할 이 빛에로 부르신 이의 덕을 선전하게 하셨다. 그리고 자신이 아니라 주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사도가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한다.

요점: 부름 받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가 아니고 그들을 택하신 하나님께 그들이 돌이킨 원인이 있다. 이렇게 부름 받아 돌이키는 자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주시고 그들을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다.

제 11 조

본문:

하나님께서 이 자기의 기뻐하심을 택자들 안에서 수행하실 때에, 그들 안에서 참된 돌이킴이 작용하는데, 복음이 그들에게 외적으로만 전파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힘있게 조명하시어서,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판단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영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로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깊이 들어가시며, 닫힌 심장을 여시고, 굳어진 심장을 연하게 하시며, 표피를 베시고, 의지에다 새로운 성질들을 불어넣으시며, 죽었던 의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악한 것을 선하게 만드시고, 원하지 않는 의지를 원하게 만드시며, 거역하던 것을 순종하게 만드시고, 그 의지를 활동하게하고 강하게 하신다. 이로서 선한 나무처럼 의지는 선한 행동들의 열매를 생산할 수 있다.

요점: 복음으로 부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하게 돌이키시고 중생시키시고, 의지를 완전히 새롭게 하시므로 선한 열매들을 생산하게 하신다.

제 12 조

본문:

이것이 성경에서 그렇게도 많이 선포된 중생이다. 즉 새로운 창조이고, 죽은 자들에게서 살아남이며 (suscitatio e mortuis), 하나님이 우리 없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살리심 (vivificatio)이다. 이것은 결코 외적으로 울리는 교리나 도덕적인 설득이나 그렇게 역사하는 이유로 말미암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후에 (자신에 대해서), 중생되고 중생되지 않고나 돌이키고 돌이키지 않음이 사람의 능력 안에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 중생은 분명히 초연적이고, 가장 능력있으며, 동시에 가장 즐거운 역사이며, 경이롭고 비밀스러우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사이다. 그 능력에 있어서 성경에 의하면 (성경의 저자의 역사하심으로 영감되었는데), 창조나 죽은 자들의 부활에 모자라는 것이 아니고 또는 열등한 것도 아니다. 그들의 심장에 경탄할 방식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들 모두는 확실하고 무오하게 또 유효하게 중생되며 실제로 믿는다. 또 의지가 이미 중생하였으므로, 하나님에 의해서 활동하게 되고 움직이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활동되었으므로 그 자체가 활동한다. 그러므로 사람 자신이 그렇게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회개한다고 올바르게 말해진다.

요점: 중생은 하나님이 실제로 일으키는 일로 새로운 창조이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남이고 하나님이 살리심이다. 이 중생의 역사는 비밀스럽고 초자연적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사이다. 의지를 하나님이 완전히 중생시켰으므로 실제로 믿고 회개하게 된다.

제 13 조

본문:

이 역사의 방식을 신자들은 현 삶에서는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다. 그렇게 아는 정도로도 만족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의 심장으로 믿고 자기의 구주를 믿을 줄을 알고 느낀다.

요점: 중생의 방식은 신자들이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그래도 그 지식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의 심장으로 믿고 구주를 사랑할 줄을 알게 된다.

제 14 조

본문: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인간의 의지에 제공된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실제로 수여되고, 영감되고, 주입된 것이다. 하나님이 믿을 능력을 수여하시는 것이 아니고, 또 믿을려는 동의나 행동을 인간의 의지로부터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믿기를 원함과 그가 실제로 믿는 것을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성취하신다.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역사하시는 이가 모든 것을 모든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다.

요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데, 믿을 능력이나 동의함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믿기를 원함과 실제로 믿는 것을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친히 성취하신다.

제 15 조

본문:

이 은혜는 하나님이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으신다. 사람이 갚음을 받도록 아무것도 먼저 줄 수 없는 사람에게 무엇을 빚지겠는가? 오히려 자기 것으로는 죄와 거짓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빚지겠는가? 그러므로 이 은혜를 받는 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원한 감사를 빚지고 감사할 뿐이다. 이 은혜를 받지 않는 자는 영적인 것들을 결코 관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것만을 기뻐한다. 그런 자는 자기가 갖지 않는 것을 가진 것으로 헛되이 자랑한다. 외적으로만 신앙을 공언하고 삶을 교정하는 자들에 관해서는 사도들의 모본을 따라서 가장 좋게 판단하고 말해야 한다. 심장들의 가장 깊은 내면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아직 부름 받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는 있지 않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과 다른 것처럼 결코 거만하지 말아야한다.

요점: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것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빚진 것이 전혀 없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므로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해야한다. 그리고 외적으로만 믿음 고백하고 삶을 고치는 사람들의 속은 우리가 전혀 모르지만 좋게 평해야한다. 그리고 아직 부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겸손하게 대해야한다.

제 16 조

본문: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지성과 의지를 부여받았으므로 사람이기를 중단하지 않는 것처럼, 전 인류종족에 퍼져있는 죄는 인간 종족의 본성을 파괴하지 못하였지만, 인간본성을 부패시켰고 영적으로 그 본성을 죽였다. 이처럼 중생케 하는 이 신적 은혜는 나무줄기나 통나무에서처럼 역사하지 않는다. 또 이 은혜는 의지와 그 특성들을 제거하는 것도 아니고, 의지에 거슬러서 폭력적으로 의지를 강제하지 않고, 영적으로 살리고 낫게 하고 교정하며, 부드럽게 그러나 동시에 힘있게 의지를 굽힌다. 즉 전에는 충분히 육의 반역과 저항이 지배하였으나, 이제는 성령에 기껍고 신실한 순종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 순종에 우리의 의지의 참되고 영적인 회복과 자유가 성립한다. 저 경탄스러운 모든 선의 조성자가 우리와 함께 역사하지 않으면, 어떤 희망도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타락으로부터 사람에게 일어날 수가 없다. 그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사람이 견실하게 서 있는 동안 파멸에로 자신을 던져 넣었을 뿐이다.

요점: 타락으로 사람이기를 중단하지 않는 것처럼, 죄는 인간본성을 파괴하고 의지와 그 특성들을 제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의지를 제거시키거나 폭력적으로 강압하지 않는다. 은혜는 의지를 살리고 낫게 하고 교정하고 부드럽게 굽힌다. 그래서 반역과 저항이 지배하였는데 이제는 성령에 기쁘고 즐거운 순종이 지배한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로는 타락한 인간에게 아무런 소망도 일어나지 않는다.

제 17 조

본문:

우리의 자연적인 생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하나님의 전능한 역사하심은 수단들의 사용을 배제하지 않고 요구하는 것처럼, 이 수단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의 무한한 지혜와 선하심을 위해서 그의 권세를 행사하시기를 원하셨다.

우리를 중생시키는 앞서 말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하심은 복음의 사용을 배제하거나 무너뜨리지 않으시고, 그 복음을 가장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중생의 씨와 영혼의 양식으로 배정하셨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그들 뒤를 이은 교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모든 교만을 누르기 위해, 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경건하게 백성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간에 복음의 권면대로 하지 않고, 말씀과 성례와 권징의 행사로 백성을 붙드는 것을 소홀히 하였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들과 배우는 자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가장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를 원하셨던 것을 나누므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

권면들로 말미암아 은혜가 수여된다. 그 은혜로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신속하게 수행한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호의가 더욱 빛나게 되고, 그의 사역이 더욱 올바르게 진행한다. 그에게만 모든 영광 과 수단들과 그 수단들의 구원하는 열매들과 그 효력의 영광이 세세토록 돌려져야한다. 아멘.

요점: 하나님은 전능하게 역사하셔도 수단들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으셨다. 이 수단들을 사용하시므로 하나님은 그의 권세를 행사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복음의 사용을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영혼에 직접 역사하시지만 복음을 사용하여 일하신다. 수단들을 사용하고 그 수단들의 효과와 역사의 영광도 다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

교리의 다섯 번째 머리: DE Perseverantia Sanctorum

제 1 조

본문: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따라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제에로 부르시고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시키시는 자들을 죄의 지배와 종노릇하는데서 해방하신다. 그러나 육신과 죄의 몸에서서는 이 세상 삶에서는 완전히 해방시키시는 것이 아니다.

요점: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죄의 지배에서는 해방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육신과 죄의 몸에서 완전히 해방하신 것은 아니다.

제 2 조

본문:

여기에서 일상적인 연약함의 죄들이 솟아나온다. 성도들의 최선의 행적들에도 흠점들이 붙어있다. 이 흠점들이 그들을 항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만들고,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로 피하게 한다. 그리고 기도의 영과 경건의 성스런 연습들로 육을 점점 더 죽이고, 완전의 목표를 향하여 탄식하도록 하는 재료들을 공급해주는 일을 한다. 이 죽을 몸에서 풀어지는 순간 하나님의 어린양과 함께 하늘에서 다스리게 된다.

요점: 이 육과 죄의 몸에서 언약함으로 짓는 죄들이 나오게 된다. 성도들의 최선의 행동들에도 흠점이 붙어있어서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게 만들고 그리스도께로 피하게 만들며 육을 점점 죽이도록 하는 재료들을 공급해준다. 이 육신을 벗어나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안식한다.

제 3 조

본문:

내재하는 죄의 잔재들 때문에 또 세상과 사탄의 공격들 때문에, 자기의 힘들에 남겨두게 되면, 돌이킨 사람들이 은혜에 지속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사 돌이킨 자들을 수여하신 은혜에 자비롭게 확증하시고, 그 은혜 안에서 마지막까지 힘있게 보존하신다.

요점: 남아있는 죄의 잔재들과 세상과 사탄의 공격 때문에 돌이킨 사람들이 자기들의 힘으로는 은혜 안에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혜 안에서 확증하시고 끝까지 그 은혜 안에 지키신다.

제 4 조

본문:

신자들을 은혜 안에 확증하고 보존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육에 의해 지배되는 것보다 더 강하지만, 돌이킨 사람들이 항상 하나님에 의해 추진되고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특수한 행동들에서는 은혜에 의해 인도되지 않고, 자기의 악에로 물러가고 육의 욕망들에 유혹되고 그것들을 따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시험들에 빠져 들어가지 않도록 항속적으로 깨어있어 기도해야한다. 이것들을 하지 않으면 육과 세상과 사탄에 의해서 무겁고 악독한 죄들에로 끌리어 들어갈 수 있고, 때때로 하나님의 정당한 허용에 의해서 이런 죄들에로 끌리어 들어간다. 다윗과 베드로와 다른 성도들의 애석한 타락은, 성경에 기술되어 있듯이, 이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요점: 성도들이 은혜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잔존죄들 때문에 육의 유혹과 세상과 사탄의 공격에 끌려서 무겁고 무서운 죄에 떨어진다. 다윗과 베드로의 실패들이 좋은 예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늘 기도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제 5 조

본문:

그런 거대한 죄들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심하게 화나게 하고, 합당한 죽음을 불러오며, 성령을 슬프게 하며, 믿음의 행사를 중단하게 되고, 양심을 심각하게 상하게 하고, 때때로 은혜의 감각을 잃는다. 진지한 회개로 생명에로 돌이킨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버지같은 얼굴을 다시 비치실 때까지 그렇게 한다.

요점; 성도들이 큰 죄를 지어 하나님을 성나게 하고 성령을 슬프게 하고 양심을 심하게 손상하면, 진지한 회개로 다시 생명에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이 다시 돌이킨 자들에게 비친다.

제 6 조

본문;

자비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불변한 선택의 목적으로부터 슬픈 실패의 경우들에 있어서 성령을 그의 백성에서 결코 완전히 철수하시지 않고, 그들을 넘어지게 허용하지 않으시며, 그들을 입양의 은혜와 칭의의 상태에서 끊어내지 않으신다. 죽음에 이르는 죄 혹은 성령에 대한 죄를 지어도 성령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아 영원한 파멸에로 나아가도록 하지 않으신다.

요점: 자비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슬픈 탈락의 경우에도 성령을 완전히 옮기지 않으시고, 심지어 성령에 대한 죄를 범하여도 영원한 멸망에로 나아가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제 7 조

본문:

첫째로 그런 큰 죄들의 경우에도 그 가운데서 그의 불멸의 씨를 보존하신다. 그 씨에 의해서 그들이 중생하였으므로, 그 씨가 멸망하거나 내어던져지게 하지 않으신다. 그 다음 말씀과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확실하고 유효하게 회개하도록 새롭게 하시고, 그 범한 죄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대하여 영혼으로부터 슬퍼하게 하시고, 중보자의 피에 의해서 믿음으로, 슬퍼하는 심장으로 죄용서를 기대하며 획득한다. 화해된 자들은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믿음으로 그의 불쌍히 여기심을 경배한다. 이어서 그의 구원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열심히 이루어낸다.

요점: 큰 범죄들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중생시키는 씨를 보존하시어서 확실하게 회개하고 새롭게 되게 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체험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불쌍히 여기심을 경배한다.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더욱 열심히 이루어낸다.

제 8 조

본문: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의 공로나 힘으로 아니고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로 이것 곧 중생시키는 씨를 얻어서, 전적으로 믿음과 은혜에서 파내어지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타락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멸망하지 않는다. 그들을 대하여 이것이 쉽게 이루어질 뿐 아니라 의심할 수 없게 이루어진다. 하나님에 대해서 이것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경륜이 변화되지도 않고, 약속이 끊어지지 않으며, 목적을 따른 소명이 취소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공로, 도고와 보호가 무효하게 되지 않으며, 성령의 인침이 좌절하게 되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요점: 성도들이 비록 크게 범죄하여도 자기들의 공로나 힘으로 중생의 씨를 얻은 것이 아니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얻었으므로 은혜와 믿음에서 탈락하지 않고, 소명이 취소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공로가 무효하게 되지 않고 성령의 인침이 지워지지 않는다.

제 9 조

본문:

택자들이 구원에로 지켜짐에 대하여, 또 신자들이 믿음에 인내함에 대하여 신자들 자신이 확신할 수 있다. 또 그들이 그로써 믿는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확신하고 있고, 그 믿음으로 그들은 항속적으로 참되고 살아있는 교회의 지체들로 남을 것을 확신하며, 죄들의 용서와 영생을 가질 것을 믿는다.

요점: 구원에 이르도록 지켜지고 믿음에 인내함을 신자들이 확신한다. 그래서 죄용서와 영생을 가질 것임을 확신한다.

제 10 조

본문:

이어서 이 확신은 말씀을 넘어서서나 말씀 밖에서 이루어진 특수한 계시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 이 약속들을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서 가장 풍성하게 우리의 위로에로 계시하셨다.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과 상속자들임을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에서 나온다. 롬 8:16. 마지막으로 선한 양심의 진지하고 거룩한 열심과 선한 일들을 열심하는데서 나온다. 또 승리의 위로를 견고하게 얻음과 무오한 영원한 영광의 보장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자들이 상실한다면, 그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참한 자들일 것이다.

요점; 이 확신은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증거에서 나온다. 확실한 승리와 영원한 영광의 보장을 상실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일 것이다. 즉 이 확신대로 성도들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제 11 조

본문:

동시에 성경은 신자들이 이 삶에서 여러가지 육의 의심들과 싸운다고 증거한다. 무거운 시험들에 들어서게 되면 믿음의 확신, 견인의 확신을 늘 상은 지각하지 못한다. 모든 위로의 아버지,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힘 이상으로 시험받음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마련하신다. 고전 10:13.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시험들 가운데서 다시 인내의 확신을 일깨우신다.

요점: 신자들이 현생에서 여러가지 육의 유혹들과 싸운다. 그러나 시험에 들어서 믿음과 견인의 확신을 늘 갖지는 못해도 하나님은 시험과 피할 길을 마련하시고, 견인의 확신을 일깨우신다.

제 12 조

본문:

이 견인의 확신은 신자들을 거만하게 하지 못하며, 육적으로 안심하게 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것은 겸손과 아들같은 경외 참된 경건, 모든 슬픔에서 인내와 열렬한 기도, 십자가같은 고난에서 참음과 진리의 고백과 하나님 안에서 견고한 기쁨의 뿌리가 된다. 이런 은전을 생각하는 것은 진지하고 지속적인 감사와 선한 행동들을 힘씀에 대한 자극제가 된다. 이것은 성경적인 증거들과 성도들의 모본에서 보이는 것과 같다.

요점: 이 견인의 확신은 신자들을 교만하게 하고 거짓 안전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고 참된 겸손과 존경, 또 경건과 인내의 뿌리가 된다. 또 진지하고 끊임없는 감사와 선행을 힘쓰도록 하는 자극제가 된다.

제 13 조

본문:

뒤로 물러감에서 회복된 자들에게서 새로워진 견인의 신뢰의 경박함과 경건의 손상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 길들에서 굳게 서는 것에 더욱 주의하게 하고, 그 길들에 걸으면서 자기 견인의 확신을 유지하고, 화해된 아버지 얼굴의 부적인 관용을 오용함으로써, 다시 그의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이키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그의 얼굴을 바라봄이 경건한 자들에게는 생명보다 더 달고, 그의 얼굴을 철수함이 죽음보다 더 쓰다). 그리하여 영혼을 더 무겁게 고문하는 데로 떨어지면 안 될 것이다.

요점: 한번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돌이켜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한 자들은 그 돌이킴으로 신뢰와 경건의 손상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견인의 확신을 갖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과신하여, 다시 아버지가 그 얼굴을 돌이키는 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주의 길에 굳게 서야할 것이다.

제 14 조

본문:

복음 선포로 은혜의 그의 이 사역이 우리 안에 시작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듯, 그의 복음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권면을 통하여, 협박과 약속들로 또 성례들을 시행하므로 그 사역을 보존하고 계속하고 완수하신다.

요점: 복음의 선포로 견인이 시작된 것처럼, 복음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권면과 성례전을 시행함으로 이 견인이 완성되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제 15 조

본문:

신자들과 성도들의 견인에 대한 이 교리는 하나님이 자기 이름의 영광과 경건한 자들의 위로가 되도록 하나님이 그의 말씀 안에 넘치게 계시하셨고, 신자들의 심장에 인각하셨다. 그러나 육 혹은 육신은 이 교리를 파악하지 못하며, 사탄은 미워하고 세상은 조롱한다. 경험이 없는 자들과 외식자들은 잘못 사용하며, 오류의 영들은 공격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부는 이 무상의 보화를 극진히 사랑하고 항상 변호하여 싸웠다. 어떤 고안이나 힘도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수 없다. 하나님은 신부가 했던 것을 앞으로도 하도록 보살피실 것이다. 이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들과 성령에게 영예와 영광이 영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