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이 성전을 대체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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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바람 회당 (북부 갈릴리): 이스라엘내에 있는 회당들중 가장 잘 보존된 회당.

주후 70년 로마 제 10군단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장소이며 유대교에서 가장 거룩한 곳인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시켰다. 그러나, 성전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는 살아남았으며 오히려 번성하였다. 또한 수세기를 지나면서 유대 회당은 "거룩한 장소"로 여겨지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회당은 성전 파괴 이후에나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성전 파괴 이후에 성전의 기능을 대체하게 되었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주전 1세기 중엽 성전이 존재할 당시에도 공동체의 모임은 회당에서 이뤄졌다. 한편 회당이 성전의 기능을 대체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

회당의 기원은 미스테리에 쌓여있다. 어떤 학자들은 회당의 기원을 제 1차 성전시대로 보기도 한다. 다른 학자들은 바벨론 유수때로, 혹은 제 2차 성전시대 후기를 회당의 기원 시기로 보기도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적어도 회당이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1세기 전부터 크게 발전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동의를 한다. 이스라엘내의 회당들은 유대 철학자인 알렉산드라의 필로 (주전 20-주후 40), 주후 1세기경 유대 사가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신약성서 그리고 랍비 문학에서 자주 언급이 되었다.

고고학은 회당의 기원과 관련된 초기 연대에 추가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1913-1914년, 프랑스 고고학자인 레이몬드 베일은 성전산 남쪽을 발굴하면서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회당 공동체의 삶을 묘사한 헬라 비문을 발견한다:

회당장의 손자, 회당장의 아들이며 현 회당장이며 제사장인 베테노스의 아들 데오도투스는 토라낭독과 율법 연구, 그의 선조들, 장로들 그리고 시몬이데스가 창설한 먼곳에서부터 온 방문객을 위한 방과 물 공급소가 있는 회당을 건설하였다.

주전 1세기말경부터 주후 1세기 사이에 헬라어를 구사하던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회당을 방문하였다. 예루살렘 회당은, 그들이 성전에서나 경험이 가능할법한 매우 독특한 방식의 종교적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이들이 성전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였을지를 상상해 보자. 유대 순례자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면서 그들은 미크베 (정결 의식을 위한 목욕탕)을 통해 그들 자신을 정결게 한다. 스페인, 흑해, 페르시야등에서 온 유대 순례자들은 헤롯이 확장한 위대한 성전으로 올라가서 희생제사에 참여하고 화려한 성전을 감동속에 바라본다.

하지만 회당에서의 종교적 경험은 매우 다른 것이다. 히브리어로 회당은 "베이트 하크네세트"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회합의 집"이다. 헬라어 "시나고고" 역서 거의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데오도투스의 회당은 성전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회당에 모인 무리들은 성서를 읽고 율법을 연구하였다. 이스라엘 전역에 많은 회당들이 존재하였고 이 시기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도 예루살렘의 회당은 성서를 읽고 연구하는 "호 노모스" (그 율법)이라고 불렸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광야 가운데 있는 맛사다 요새에서 발견된 성서 두루마리 조각에도 보면 회당이란 성서를 읽는 장소로서의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회당에 대한 필로의 증언에 의하면, 데오도투스의 비문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회중들틈에 앉아서 거룩한 책을 낭독하고 분명하지 않은 점들을 설명하고 고대 철학에 대해 토의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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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데오도투스가 도라를 읽는 회당을 건축하다": 헬라어로 기록된 주후 1세기경 비문

초기 랍비 문학은 제 2차성전 시대의 유대인들이 얼마나 쉽게 성전과 회당을 오고 갔는지를 묘사한다. 아래의 글은 숙곳 (장막절)절기중 성전 제단에 물을 붓는 의식을 표현한 것이다.


랍비 여호수아가 아들 하나니야에게 말하였다.
물을 제단에 붓는 의식을 행하는 모든날 우리는 결코 한 순간도 잠을 자지 않았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성전에서 모든 희생 제사를 드렸다.
그런후에 우리는 회당에 갈 수 있다.
그런후에 우리는 성전에서 다른 희생 제사를 드린다.
그런후에 우리는 먹고 마신다.
그런 후에 우리는 공부의 집 (회당)으로 간다.
그런후에 해질녘쯤 되어 우리는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린다.
그런후에 우리는 제단에 물을 붓는 의식을 행한다.

흥미롭게도 제 2차성전시대의 자료는 회당을 "기도의 장소"로 소개하지 않는다. 이는 현대 회당에 출입하는 이들에게는 놀랄만한 일이다. 분명히, 제 2차 성전시대에 기도는 회당에서 드려지지 않았으며 성서 연구를 위한 장소로만 사용되었다.

한편, 성전이 여전히 존재할 당시, 일종의 종교적 경험들이 회당내에서 발전하게 되는데 이는 그 동안 성전에서만 행해오던 종교적 경험과 병행하는 것이었다. 지역 공동체들은 정신적으로 심약한 유대인들에게 있는 영적인 존재와 대항하기 위해 회당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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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고대 이스라엘내에 세워진 회당들

회당은 그레코 로만 콜레게아의 양식에 가까운 유대교에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주전 332년 알렉산더 대제가 팔레스틴을 점령한 후에 이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주전 168-164년 마카비 봉기후에도 변화의 영향은 남아 있었다.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처럼 그레코 로만 시대의 유대인들은 그들 스스로 발전시킨 종교 의식을 행하는 자체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거대한 종교 의식보다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성전은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졌으며, 회당은, 비록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듣고 배우는 곳이지만, 성서를 연구하는 지역 모임장소로 여겨졌다. 따라서 성전이 존재할 당시 회당은 성전의 대체용 장소가 아닌 성서 연구 장소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성전이 파괴된 후는 어떠한가? 회당이 성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는가?


의심할 필요없이 헤롯 성전의 파괴는 종교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솔로몬의 성전이 주전 586년에 파괴된 후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초기 랍비 지혜자들은 이러한 충격에 직면하였으며 유대교의 요소들을 강조함으로써 성전 파괴의 충격을 완화하였다. 예를 들면, 랍비들은 유월절 식사를 강조하므로써 제 2차 성전시대 당시 중요한 제의적 의식이었던 유월절 희생 제의를 향한 초점을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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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메노라 모자이크 (벳샨)- 특이점은 메노라의 촛대가 5개이다. 이는 성전의 메노라 (7개의 촛대)의 유일무이한 독특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일수도 있으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회당에서 7개의 촛대가 새겨진 메노라 모자이크들이 있음 (베이트 알파, 벳샨 회당)

이와 비슷하게, 성전에서의 의식보다 성서 연구가 유대교내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행위로 간주되게 된다. 성서 연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게 되고 이런 관점에서 회당에서 행해지는 유대 공동체의 성서 연구는 더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회합의 집"은 랍비문학 시대에 유대교의 재건을 위한 기능을 지닌 장소가 된다.

점차적으로 회당의 종교적 기능이 중시되면서 제 2차 성전시대의 모임 장소 (주로 성서 연구)인 회당은 수세기를 지나면서 파괴된 성전의 대체 장소로서의 의미는 아닐지라도 거룩한 장소로 여겨지게 된다.

초기 랍비 문헌에 의하면 회당이 성전과 많은 부분에서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다. 성서에서 성전에 관해 언급을 할때는 회당 역시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레위기 26:31에는 "내가 너희 성전들 (미크다쉬헴)을 파괴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혜자들은 이 구절에 나오는 성전들을 회당과 연구의 집들 (바테이 미드라쉬)로 해석한다.

초기 랍비 문학의 자료들에 의하면 회당의 성전과의 관계를 매우 미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혜자들은 공동체의 과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회당이 파괴되었을때 그 회당을 매우 신성한 장소로 여겼다. 여기서 신성한 장소란 의미는 파괴된 성전에 표하는 신성한 장소와 동등한 위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지혜자들은 파괴된 회당일지라도 여전히 신성한 장소로 남아 있다고 여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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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주후 6세기경 엔게디 회당- 방문자들이 손을 닦는 정결 의식을 행하던 것으로 추정
사진2: 미크베 (정결의식용 목욕탕) 주후 70년 이전 성전산 남쪽에서 발견됨.

주후 1세기 후반부터 2세기 사이, 회당은 당순히 성서 연구의 장소가 아닌 기도의 장소로 여겨지게 된다. 기도는 성전에서 하루 세번 드리던 희생 제사 시간에 맞춰 세번 하도록 되어 있었다.

랍비 시대의 예배중 기도 (아미다) 는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는 성전이 유대인의 삶에 가장 중심에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어떤 전통에 의하면, 토라를 넣어두는 함 역시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를 마주보도록 놓는데 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 위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성전이 신의 임재가 있는 곳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기도 역시 회당에 신의 임재가 임하도록 하는 방편으로 간주되었다. " 10명이 모인 회당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다." 예루살렘 탈무드에 의하면, 3세기경 몇몇 지혜자들이 회당에서의 기도를 매우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당에서 기도하는 것은 순전한 화제를 성전에서 드리는 것과 같다."

랍비-지혜자들은 성전의 이미지들을 회당에 끌여들였다, 하지만 회당은 예루살렘 성전과 동등하게 취급되지는 못했을 뿐 아니라 직접적인 비교 대상도 될 수 없었다. 이들에게 있어 진짜 위험한 일은 성전이 파괴된 후에 회당이 성전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었다. 물론 제 2차 성전 시대때에도 이집트의 헬리폴리스, 사마리아 그리고 벧엘에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하는 성전들이 존재하였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성전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상징적 요소인 7개의 촛대가 있는 메노라와 법궤위의 그룹을 회당에 장식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따라서 제 2차 성전시대때 성전과 회당은 그 기능이 완전히 구분이 되어 회당은 토라 연구를 위한 장소로서 강조가 되었으며, 성전은 회당과 비교할 수 없는 더 거룩한 장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가면서 회당은 "거룩한 장소", "거룩한 집" 심지어 "작은 성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초기 랍비 문학 당시, "테바"라고 불리는 것이 있었다. 성서에서 "테바"는 아기 모세가 담겨 있었던 바구니를 "테바"라고 한다. 하지만 주후 2세기경 "테바"는 여러 다른 목적들을 언급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토라를 넣는 함을 "아로나" (아람어로 "법궤")라고 하는데 시리아의 나베 (오늘날은 "나바"로 불린다)에서 발굴된 고대 회당을 헌당하는 비문에 의하면 토라를 넣는 함을 "베이트 아로나" (문자적으로 "법궤의 집")으로 불렀다. 성서에서 언약의 법궤는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의 중심이었으며 이를 "아론 하브리트" (언약궤)라고 불렀다. 문서 자료들과 토라의 법궤를 묘사한 장식을 보면, 회당의 토라 함은 크기가 큰 "함"이며 어떤 자료에 의하면 함이 두부분으로 나눠져 있기도 하였다. 함안에는 두루마리 성서가 놓여져 있었다. 토라를 넣는 함은 종종 "빌론" 혹은 "파로크타"라고 불리는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었으며 이 휘장은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한 고대 자료에 의하면, 회당의 "토라 함"과 성전의 법궤를 연관지으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한 금식일날 찌포리의 위대한 랍비 "후나"는 선조들이 언약궤를 황금으로 도색하였던 것처럼, 애도의 표현으로 재를 토라 함에 뿌리고 슬퍼하였다. 다른 한편 랍비들은 성전의 법궤와 회당의 토라 함을 동일한 것으로 혼동하지 않기 위한 주의를 기울이기도 하였다. 몇몇 전승에 의하면, 성전의 법궤는 메시야 시대가 도래할때 회복될 것이며 회당의 토라를 보관하는 함은 사고 팔수 있는 물건으로 취급될 것이라고 믿었다. 즉 토라함은 회당의 성물이지만 영구한 "하나님의 집"과는 비교 대상이 못되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점 더 많은 성전의 기물들이 회당에 도입된다. 카이로의 벤 에즈라 회당의 유명한 게니자에서 나온 흥미로운 문서 내용 (로마 시대 혹은 비쟌틴 시대의 문서로 추정되는 것) 회당 예배자들은 회당에 출입하기전 먼저 그들의 손발을 정결하게 씻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으며 회당 자체를 "작은 성전"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지혜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전산에는 지팡이나 신발을 신고 들어가서는 안된다 (미쉬나 베라호트 9.5). 우리의 죄때문에 성전산은 우리의 것이 더 이상 아니며, 우리는 "작은 성전 (회당)"을 소유하게 되었다. 우리는 회당을 거룩하고 두려워할 장소로 여겨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내 성소를 공경하라" (레 19:30)고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당의 뜰에는 손발을 씻을 수 있는 물이 항상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처럼 손과 발을 씻는 회당뜰의 수도 시설을 엔게디에 있는 6세기 경의 회당에서 발굴하였다. 손발을 씻고 성스러운 장소로 들어가는 것은 고대 종교의식의 일반적인 양식이었다. 오늘날 이슬람교에서도 이 행위를 볼 수가 있다. 또한 일부 유대인들 역시 회당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씻기도 한다.

하지만, 건축 구조상 회당은 전혀 성전과 그 건축 양식이 비슷하지 않다. 주후 3-8세기경 사이에 건축된 회당들이 이스라엘에서만 백여개가 발견되었다. 헤롯에 의해 지어진 성전은 성서와 제 2차 성전시대 초기의 전통 그리고 로마 제국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것이다. 한편 회당 건축 양식은 성전 보다는 로마와 비쟌틴 시대의 바실리카와 교회의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발굴된 회당들은 대부분 지붕에 방을 만들어 예배자들을 위한 숙소로 제공하였다.

회당 건축에는 3가지 기본적인 건축 양식이 사용되었다:1. 넓은 집 모양 - 예루살렘을 향한 벽에 연단을 만들고 그 연단에는 토라함이 있으며 회중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는 회당 (상부 갈릴리의 키리베트 쉐마, 헤브론 남쪽 유대 산지에 있는 회당들), 2. 갈릴리 바다 북쪽의 "갈릴리안 바실레카" (대표적인 회당은 가버나움과 바람 회당). 회당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있으며 3개의 큰 입구가 있었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시리아에 있는 기독교 건축 양식과 매우 흡사하였다. 3. 요단계곡과 하부 갈릴리, 그리고 지중해 평야 지역에서 발견된 제단 뒤에 반원형의 둥근 지붕이 있는 바실리카 양식의 긴 집 형태이다. 회당 입구 맞은편에 토라를 넣는 함과 연단이 있으며 예루살렘과는 일직선상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건축 양식 역시 기독교 건축 양식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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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키르베트 쉐마 회당 (북부 갈릴리- 갈릴리안 바실레카 양식): 긴-집 양식을 갖추 회당

사진2: 하맛트 티베리야 회당
어떤 회당들은 법궤 모양의 모자이크를 회당에 장식하였다. 그 중 하맛트 티베리야 (4세기), 나아란 (5-6 세기, 벳샨 (6세기)에서 발견된 회당은 특별하다. 베이트 알파, 나아란 그리고 벳샨의 회당에는 모자이크 장식이 제단 뒤쪽의 둥근 반원형 아래 쪽에 있다. 모자이크에 새겨진 토라를 넣는 함은 두 마리의 새와 7개의 촛대가 있는 메노라 그리고 두 마리의 사자가 주위에 장식되어 있다.

학자들은 이 회당들에 있는 모자이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오랜 논쟁을 해왔다. 1920년대 베이트 알파 회당 발굴을 하였던 슈케닉 교수와 몇몇 학자들은 이 모자이크가 실제 베이트 알파 회당에 있던 장식물들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한 토라를 넣는 함이 나마르텐에서 에릭 메이어와 카롤 메이어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고라신에서는 큰 사자상이, 벳샨에서는 커텐을 묘사한 모자이크 발굴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랍비 문학에 언급이 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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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벳샨과 베이트 알파 회당의 모자이크 장식


자 이제 처음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팔레스틴에 있는 회당이 성전을 대체한 것인가? 카이로 게이자에서 발견된 다른 문서에 의하면 "성전이 존재하는한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와 제의적 행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제 회당들이 성전의 이 기능들을 대체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당에서 기도할때 그 기도는 영구한 희생 제사와 제의적 행위를 대신하는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찌보면 이 문서의 내용은 "대체" 교리의 원 모습을 보여주는 듯 싶다. 하지만 문서는 여전히 성전이 "속죄"를 위한 유일한 기준이 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일 회당에서의 제의가 적절하게 행해진다면, 전통적으로 논쟁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성전의 재건을 보게 될 것이며 영구한 희생 제사와 제의적 행위를 재건된 성전에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회당에서는 토라 연구와 기도만이 변함없이 남아 있게 된다. 카이로 게니자 문서에서도 회당의 성전 기능을 대체하는 것은 일시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문서가 밝히는 것처럼, 성전이 파괴되어 있는 동안 하나님과의 교제는 회당에서의 기도를 통해서 이뤄진다. 카이로의 게니자 문서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자들은 마음의 중심에서 나오는 기도를 올리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성전이 재건되고 영구한 희생 제사를 바치게 될 날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으이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 56:7).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였던 이는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리고 표현하였다. 이 표현은 현재의 회당이 기도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과거 성전 역시 기도자의 집으로 사용되었다는 공통점을 강조한 것이다.

회당이 성전을 대체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성전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와 거룩함을 회당이 위협하지 않은때는 없었다. 주후 70년 이후 성전 재건의 소망의 불씨가 점점 사그러지면서 회당은 그 존재 자체가 거룩한 영역이 되어버렸다. 유대인들에게 회당은 그들의 파괴된 우주적 중심(성전)과 그 성전의 재건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해왔다. 그들은 회당에서 종교적 소망을 유지해왔다. "우리 시대에 성전이 재건되게 하소서" 라는 고대 사가의 간절한 염원처럼 쉬지아니하는 기도의 장소로 회당은 존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