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元順氏の描く十字架には、あえて顔が描かれていない。冠された荊冠の下に、イエスの表情は霧と影の中に沈められ、見る者はその御顔を確かめることができない。これは技法上の選択である以上に、神学的な選択であると筆者は見る。すなわち、十字架の出来事を「感情移入によって共感する物語」としてではなく、「客観的に成し遂げられた贖いの業(objective atonement)」として描こうとする意志の表れである。カルヴァンは『キリスト教綱要』第二篇において、キリストの受難を単なる同情の対象としてではなく、律法の呪いを身に負い、神の義なる怒りを満たすための代償的贖罪(satisfactio vicaria)として論じた。崔氏の絵の中で、イエスの顔が霧の中に隠れ、代わりに「ΒΑΣΙΛΕΥΣ ΤΩΝ ΙΟΥΔΑΙΩΝ/REX IUDAEORUM(ユダヤ人の王)」という罪状書きが画面上部にくっきりと浮かび上がっているのは、示唆的である。見る者の視線は、まず「誰が」ではなく「何が成し遂げられたか」へと導かれる。これは、十字架を人間的な悲劇の物語に矮小化することを拒み、あくまで神と人との間の法的・契約的な和解の出来事として提示する、改革派的な十字架理解と響き合っている。
同時に見落としてはならないのは、この絵が「父なる神の痛み」に焦点を当てている点である。ここに、改革派神学が伝統的に強調してきた三位一体の内的一致(opera trinitatis ad intra sunt indivisa)という教理との、豊かな緊張関係が浮かび上がる。父・子・聖霊は本来、分かちがたく一体である。だからこそ、子が十字架上で「わが神、わが神、どうして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叫ばれた瞬間は、教会史を通じて神学者たちを悩ませ続けてきた。カルヴァン自身は、この叫びを、神性が人性を見捨てたという意味にではなく、キリストが人としてわれわれの罪の刑罰ー神の御顔が隠されるという地獄的な絶望ーを真実に味わわれたしるしとして読み解いた。父が子を見捨てられたのではなく、子が、われわれの身代わりとして、父の御顔が隠されるという経験そのものを引き受けられたのである。崔氏の絵が「父の心の痛み」に想像力を向けるとき、それは教理からの逸脱ではなく、むしろこの逆説ー離れることのできない神が、あえてご自身のうちに深い痛みを抱えながら贖いを成し遂げられたという逆説ーを、絵筆をもって黙想した結果であると、筆者は理解したい。
그림은 사람의 마음에 수많은 정보를 한순간에 전달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그림이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바를 언어로 옮기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또한 이처럼 큰 힘을 가진 그림을 그리는 사람 역시 뛰어난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전할 가치가 있는 삶의 경험'과,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어 그들의 위로와 평안에 기여하고자 하는 강렬한 사명감이 없다면 이러한 사역을 계속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그림을 보시면서 여러분은 어떤 인상을 받으셨는가? 이 성화의 작가는 대한민국 대구 출신의 화가 최원순 씨이다. 이 그림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를 말하자면, 최 씨가 단지 화가일 뿐 아니라 기독교 개신교 칼빈주의 선교사이기도 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에게 묻는다면 "선교사가 본업이며, 화가로서의 활동은 선교의 일부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최원순이라는 여성은 복음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목사인 남편과 함께 두 딸을 데리고 한국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현지 일본인과 재일동포,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섬기며 선교사의 삶을 이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선교사의 삶은 말 그대로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섬기는 삶이다. 사생활도 거의 없이 오직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육신은 마치 해어진 걸레처럼 닳아가지만, 영혼은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빚어져 간다. 그것이 선교사의 삶이다.
슬프고 괴로울 때마다 최 씨는 영적인 눈으로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과 부어오른 눈을 겨우 뜬 채 자신을 향해 미소 지으시는 주님의 모습이 있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유일한 치유였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는 깨달았다. 피투성이가 된 독생자 예수를 하늘에서 바라보고 계셨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과연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그림의 접근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십자가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잠시 삼위일체의 교제를 멈추신 순간이기도 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다. 성경은 이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설명한다.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아버지께 버림받으셔야 했다. 그 절규를 들으셨을 때 하늘 아버지께서 느끼셨던 마음의 아픔, 그리고 일하고 싶어도 역사하실 수 없었던 성령의 고통. 최원순 씨의 작품에는 이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자신의 죄, 곧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그것을 인정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깨달을수록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쳐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히려 "약함을 자랑한다"고까지 말하였다.
최원순 씨는 몸과 마음을 모두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내어주며 살아왔다. 그럼에도 완전히 쓰러지지 않고 선교의 사명을 계속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선교사 역시 그리스도를 따라 잠시의 고난을 감당해야 함을 십자가의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이다.
이제 이 한 폭의 성화를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최원순 씨가 그린 십자가에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다. 가시면류관 아래에서 예수님의 표정은 안개와 그림자 속에 묻혀 있으며, 보는 이는 그 얼굴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한 화법상의 선택이 아니라 신학적 선택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곧 십자가 사건을 감정이입을 통해 공감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성취된 속죄(Objective Atonement)의 사건으로 묘사하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단순한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율법의 저주를 대신 짊어져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만족시키신 대속적 속죄(satisfactio vicaria)로 설명하였다. 최 씨의 그림 속에서 예수님의 얼굴은 안개 속에 감추어져 있는 반면, 화면 위에는 「ΒΑΣΙΛΕΥΣ ΤΩΝ ΙΟΥΔΑΙΩΝ / REX IUDAEORUM(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보는 사람의 시선은 먼저 "누가" 십자가에 달렸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이루어졌는가"를 향하게 된다. 이것은 십자가를 인간적인 비극 이야기로 축소시키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법적·언약적 화해 사건으로 이해하는 개혁주의적 십자가 신학과 깊이 공명한다.
동시에 이 그림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개혁주의 신학이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삼위일체의 내적 일치(opera trinitatis ad intra sunt indivisa)라는 교리와의 풍성한 긴장 관계가 드러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래 나눌 수 없이 하나이시다. 그렇기에 성자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순간은 교회사 내내 신학자들을 고민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칼빈은 이 절규를 신성이 인성을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 곧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지는 지옥 같은 절망을 실제로 체험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자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아버지의 얼굴이 가려지는 경험 자체를 담당하신 것이다.
최 씨의 그림이 '아버지의 마음의 아픔'을 상상력으로 표현하고 있을 때, 그것은 교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 친히 깊은 고통을 품으셨다는 역설을 붓으로 묵상한 결과라고 필자는 이해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십자가 이해는 단순한 신학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선교의 메시지로 이어진다. 개혁주의 신학이 끊임없이 강조해 온 것은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sola gratia)로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최원순 씨의 삶은 바로 이 은혜의 신학을 책 속의 교리로만이 아니라 매일의 선교 현장에서 살아낸 증거이다. 타국에서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때로는 이해받지 못하고 때로는 자신이 닳아 없어질 만큼 헌신하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의지 때문이 아니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는 것을 기꺼이 감당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끝까지 그녀를 붙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 그림 앞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순히 "아름답다", "슬프다"라는 감상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인정하고, 바로 그 연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임한다는 복음의 역설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먼 과거 역사의 한 장면 속에만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 가운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계신다. 최원순 씨의 붓이 증언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 은혜를 자신도 계속해서 받으면서, 그 은혜를 이웃과 함께 나누어 가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