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계관
1. 서론
인간이란
누구인가? 또는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역사이래로 꾸준히 제기되는 질문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을 깨닫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하는 인간의 실존과 자기 인식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철학적, 사회학적, 인류학적, 심리학적, 생물학적 등의 사유(思惟)를
통한 인간의 본질 찾기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자기이해를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시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재성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신학적 인간학에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으로
귀결된다.
신학적 인간학의 독특성 중의 하나는 인간이 인격적 존재라는 점이다. 근세 이전의 철학적 인간학에서는 경험과 관찰을 통한
과학적 보편진리 탐구를 통해 대상을 파악하기 때문에 인격 개념에 대한 정의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본성 연구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격개념이 도출되었고, 인간의 인간됨을 정의하는 독특한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2)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은 인간의
인격성의 정의를 깨달음으로 가능하게 되었고, 인간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인격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고에서는 인격
개념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배경과 현대 신학에서의 인격 이해를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인격 개념의 역사적 배경
교회사에 있어서
기독교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논쟁이 일어났고, 초기 변증가들은 기독교 진리의 정립과
변증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게 되었다. 특히 삼위일체 논쟁은 그 핵심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3) 삼위일체 개념에 대한 설명을 위해 교부들은 헬라 철학에 근거하여 로고스와 위격(또는 인격, person)의 개념을
도입했는데, 최초의 인물은 이레네우스(Irenaeus, 140-220)이다. 그는 성부의 위격이 로고스와 지혜(성자와 성령)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삼위일체 개념은 모호함과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지금의 신학적인 삼위일체론(Trinity)의 지평을 연 것은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이었다. 그는 하나님은 한 본질(substance)이시나 세 위격(persons)이라고 정의
내렸다.4) 세 위격이 한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는 개념이다. 구속사의 전개 속에서 하나님이 세 위격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신앙의
기본진리인 구속사를 하나님의 위격(인격) 개념을 사용해 설명하였던 것이다. 터툴리안이 사용한 위격(person)이라는 단어
페르소나(persona)는 본래 법정에 출석하지 않은 피고인을 대신하여 판결을 받는 대리인이었다. 그는 이 단어를 구속사의 과정에서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데 적당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인격이라는 단어가 신학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5)
어거스틴은 인격 개념에 관계성을 불어넣었다. 세 위격을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관계(relatio)로 본 것이다.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관계가 하나의 실체가 된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일체이지만 위격은 관계로서 하나님의 내적 생명이나 피조물과 관련되어 의미되어진다.6)
그는 삼위일체의 경륜적 의미에 커다란 통찰을 제공하고 삼신론적 가능성을 배제시켰다. 그러나 중세기로의 전환점에서 보에티우스(A.M.S
Boethius, 480-524)는 “위격은 이성적 본성의 개체적 실체이다”(the individual substance of the
rational nature)라고 주장함으로서 위격의 관계적 의미를 상실시켰다. 인격은 개별적인 하나의 실체로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7)
보에티우스의 정의를 통해 인격은 철학적 의미에서 인간에게 적용되는 전문 용어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개체성 또는 개인성을 관계성보다 중시하는
사조가 정착되었다.8)
중세기에 이르러서는 성 빅토르의 리차드(Richard von St. Victor)가 인격은 “지성적 본성의
직접적 실존”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인격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어가는 실존으로 파악하였다.9) 여기서 관계성의 의미는
상실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바탕위에서 중세기의 스콜라 신학자 스코투스(Duns Scotus, 1266-1308)는 인격체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찾아내려 하였다.10)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의 명저(名著) 신학대전에서 보에티우스의 인격 개념을 비평하면서 인격을
개별적 실체(essence)로 볼 수 없으며,11) 또한 인격의 정의에는 관계성이 필수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12)
근대에 오면서 인격 개념이 철학적으로도 본격적으로 해석되는데, 데카르트의 cogito(나는 생각한다)는 인간 이해와 인격 개념의
이해를 위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칸트에게는 인격이란 도덕성에 근거한 인격성 내지는 인간성으로, 헤겔에게는 관념적 정신으로서의 인격으로
해석되어진다. 포이에르바하(L. Feuerbach)는 인격을 인간학적 ‘나와 너'라는 인칭적 관계 속에서 해석하였다.13) 그에 따르면 인격은
나와 너의 정신적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포이에르바하의 인칭적 인격 해석은 큰 영향력을 끼쳤는데, 키에르케고르는 '나와 너'의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해석하였고,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유명한 「나와 너」라는 저술을 통해 나의 존재는 타자(他者)로 부터 실존을
선사받게 된다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즉, 그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인격이 될 수 없다”고 단정지었다.14) 부버의 이러한 “나와
너” 개념은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정립에 획기적인 사상적 기저(基底)를 제공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격
개념의 발전에 있어서 두 라인이 형성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하나는 어거스틴의 관계성으로서의 인격과 보에티우스의 개체성으로서의 인격이다. 후자가
철학적 인격 개념의 사조를 형성했다면, 전자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해석의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이런 단절성은 보이지
않고, 어거스틴이 제시한 삼위 하나님의 관계성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성으로 투영되는 인격 개념으로 발전되어 오게 됨을 볼 수
있다. 결국 신학적 인간학의 역사 속에서 인격은 인격 자체의 어떤 실체로서의 의미보다는 관계성을 통해 얻어지는 개념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3. 현대 신학의 인격 개념
3.1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
마틴
부버는 대표적인 유대계 실존주의 철학자이다. 그는 추상성에 대한 거절과 개인의 구체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철저한 실존주의자로서 시온주의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의 가장 두드러진 학문적 공헌은 1922년 독일에서 발행된 “나와 너”라는 저작을 통해서였다. 나와 너의 관계는
타자(他者)와의 대화를 유발한다. 대화 속에서 나는 단순한 조망자가 아니라 참여자이다. 나와 너의 관계는 개념적인 지식의 관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관계이다. 나는 너로 인해 비로소 내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관계성의 필수적인 부분인 개방성을 요구한다.15) 부버는
이런 ‘나와 너’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자의식을 인격이라 부른다.16) 한수환 교수에 따르면, 부버에게 있어서 인격이란 인간 내면에 있는
독특성도 아니고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특별성도 아니라 창조시 선물로 주어진 관계성에 의해 ‘나와 너’의 관계가 가능하며 거기에서 인간은 인격이
되는 것이다.17) ‘나와 너’의 관계성에서 인간은 실체적으로 인격 자체가 아니며, 인격을 가지고 있는 존재도 아니다. 다만, ‘나와 너’의
관계 도식 속에서 나는 너로 인해 인격이 되는 것이다.
나와 너의 관계는 세 가지 영역에서 가능하다: 자연, 인간, 그리고
하나님. 부버에게 있어서 나와 너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탁월한 방법인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조물로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격 자체이신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인간은 인격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18) 이러한 나와 하나님의 만남은 황홀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는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증케 하기 위함”인 것이다.19) 부버는 말하기를, “참다운 계시는 사람을 하나님에게로
불러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내어 보내는 특질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칫 하나님의 계시를 실현하지는 않고, 그저
하나님에게로 귀착(歸着)하려고만 한다.”20) 그 의미는 인간의 시선을 하나님께만 머물지 않고, 세상(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는 나로 하여금 세상을 향하게 만드는 통로가 된다.
3.2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칼 바르트는 초기에 쉴라이허마흐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자유주의
신학을 신봉했던 학자였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에서 종교적 도덕주의 또는 개인주의의 결점을 발견하게 되면서 인간 중심의 신학에 대한 심각한
문제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간학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신학은 기독론에 철저히 기초한 인간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 신학의 특징 중의 하나는 말씀의 신학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서 신학적
지식의 대상이 된다. 모든 창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되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계시되어졌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역사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적 인간학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신학적 인간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깊은 관계성에서 가능하다.21)
바르트의 신학적 인간학의 또 다른 특징은 철저히 기독론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는 참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으로 부터 출발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22) 바르트는 현대 신학의
가장 큰 오해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은 인간 본성 자체에 주어져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인간의 자의식 또는 인간의 도덕적 경험에 의해
하나님은 발견되기를, 그리고 만나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본성 자체가 하나님과의 조우(遭遇)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부터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고 중재적이고,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라 주장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가능하다.23)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내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참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인격으로 존재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절대적
연합을 이루고 있다. 구속사 속에서 인격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존재와 활동의 주체가 된다.2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구속사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삼위일체적 삶의 역동성을 바라볼 수가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본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에게
철저히 은혜로운 구주이며 보호자이시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이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인간됨은
철저히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그에 따른 책임성을 가지고 응답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25)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는 스스로의 인격적 책임 안에서만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바르트의 이런 인식은 하나님의 인격과 인간의 인격이 자유롭고도 동등한 공동의 참여가 전제될 때 가능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바르트의 신학을 기독론에 기초한 인간학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3.3.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
에밀 브루너는 변증법적 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칼 바르트와 에브너(F.
Ebner)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에브너의 철학은 브루너에게 인간의 책임성에 기초한 인간학을 개발하도록 하나의 동인(動因)이
되었다.26) 브루너는 그의 신학의 주된 임무를 인간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27) 브루너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이 주님로서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인간이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지식은 상호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다.28) 이것이 브루너의 신학적 인간학의 중요한 논거가 된다. “내가 창조자를 알기 때문에 내가 피조물인 것을 알고, 내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에 나는 창조자에 대해 안다.”29) 부르너에게 있어서 이러한 인간의 피조성은 자연스럽게 imago dei, 즉 하나님의
형상 개념과 연결이 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인간은 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해서 더 이상 소유하지 않고 있다.
imago dei 는 참인간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실재이기 때문에 그것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갈 때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된다.30) 여기에서의 하나님은 진실로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인간은 이 인격적인
하나님의 실재 속에서 인격이 되며, 인간은 인격이 될 때 실재성이 발견된다.31)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상실했는데, 인간이 죄인이 된다는 것은 전 인격적이다. 그러므로 브루너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은 인격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격을 죄의 영역에서 의의 영역으로 옮길 수 있다.32) 인간은 참 인간인 인격적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인간 스스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로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책임있는
인격적 존재이다.33) 브루너에게 이런 양상은 일종의 모순처럼 보여진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안에서만 이런 모순은 극복되고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4.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신학적
인간학에서 인격 개념의 형성 배경, 그리고 현대 신학자중 마틴 부버, 칼 바르트, 그리고 에밀 브루너의 신학적 인간학에서의 인격 개념을
살펴보았다. 인격은 인간의 가치와 맞물려간다. 왜냐하면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인격은 창조시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격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실체성을 가진다. 부버에게는 인격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주어지며, 바르트에게는 인간이 인격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한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있는 존재가 될 때 가능하다. 브루너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본질적으로 인격적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유지된다. 그러므로 타락은 관계성의 상실을 가져왔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야만 한다.
결국 신학적 인간학에서 인격은 전적으로 부버의 견해처럼 하나님의 선물,
즉 은혜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인격은 완전한 하나의 개체 또는 실체가 될 수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실재되어지는 인격이다.
결국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격이다. 그러므로 인격으로서의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노래할 줄 알며, 그에 따른 세상에서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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