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갇힌 바울

- 에베소서 3:1 -

샬롬선교회

 

[에베소서 3: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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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의 서두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데, 3장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표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 3:1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 3:7 "복음을 위하여 ...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죄인 중의 괴수) - 자기소개 중에서 '그리스도의 일로 가친 자 된 나''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나'라는 자기소개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참고로 에베소서 4:1에도 "주 안에서 갇힌 내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갇힌 바울

 

본문에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라고 했습니다. '갇힘 자'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문자 그대로의 갇힌 자

'가친 자' 실재로 바울은 여러 번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이 투옥된 곳은 빌립보, 예루살렘, 가이사랴, 그리고 로마의 네 곳입니다. 특히 생애 말년의 4년 동안은 완전히 자유롭게 전도여행을 할 수 없는 상태(가택연금)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 기간에 '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목회서신'(디모데전서, 데살로니가전서, 베드로전서, 빌레몬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된 바울은 로마의 어느 한 곳에서 고요한 가운데 심오한 하나님의 진리를 편지의 형태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실제로 죄수라는 형태로 잡혀감으로써 옥중서신을 남겼다면, 죄수가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전 생애가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자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갇힌 자'가 된 진정한 의미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의 일생이 '그리스도에게 잡힌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5~1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니”...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갇힌 자가 된 이유이며, 동시에 그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추구한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바울이 바로 그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영적 탐구, 영적 갈망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갇힌 자의 참된 모습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인해 하늘이 열리고, 그곳에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우리에게도 그 사실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다.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고. 영적 갈급함을 가지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반드시 '하늘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얻게 하려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잡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잡힌 자, 잡힌 자'의 삶, 즉 그리스도에 의해 잡힌 바울이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잡으려고 추구한 삶에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영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도 주님이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성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나 바울

 

이제 에베소서 3:8에서 바울의 또 다른 자기소개를 살펴봅시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바울. 이와 비슷한 소개가 다른 구절에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전자(에베소서)'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소개하고, 후자(고린도전서)'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바울'이라는 자기소개에서 보면 한없이 겸손한 느낌입니다. 정말 같은 사람이 하는 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겸손한 자기소개입니다.

 

'성도들'이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을 의미합니다. 사도들 중에서도 가장 작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은 그 어떤 사도들보다 훨씬 더 큰 사역을 한 사람이며, 3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많은 교회를 세운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 사역을 통해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끝'(당시 로마)까지, 그리고 결국에는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토대를 열도록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천국까지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는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그리스도의 깊은 뜻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쓴 편지가 남아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이루신 일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는 원래 유대인 이름으로 '사울'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베냐민 족속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방인 전도에 나서면서 자신의 이름을 그리스어 이름인 '바울'로 바꿨습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작은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몸을 나타낸다는 말이 있듯이, 바울의 몸은 작았던 것 같습니다. 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했을까?

 

(1) 자신이 작은 자라는 깨달음

바울이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을 바꾼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누구보다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유대교의 젊은 지도자였습니다. 게다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실제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사람이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극악무도한 자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순수하게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터무니없는 이단이며, 이를 근절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천에 옮겼습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는 스데반이라는 사람인데, 스데반의 순교를 배후에서 지도한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바울(당시에는 아직 사울로)은 기독교인 사냥을 시작했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멀리 북쪽 다메섹까지 가서 기독교인들을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했던 인물입니다. 성경은 이 때의 바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 "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모습입니다. 마치 갱단 두목처럼 거친 인물처럼 보이지만, 원래 그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명문가 출신으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교사로서의 소양을 갖추고 있었고, 활동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그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해치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가 된 것은 그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성공자의 길을 곧장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자신감을 갖고 가장 힘을 쏟고 있는 일 속에 어떤 종류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위험성'을 가장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이 때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영웅 대접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다메섹으로 향하는 그 길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늘의 빛 가운데 나타나셨고, 강한 빛이 바울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목소리만 선명하게 들렸습니다. 그는 곧바로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여.” 왜냐하면 이 음성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은 지금까지 주님이신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왔는데, 그 주님이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묻는 것이 신기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질문에 대한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목수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고 완강히 부인하던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부정할 수 없는 사건에 그는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신이 해온 일, 더구나 옳은 일을 해왔다는 자부심이 근본적으로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정말 끔찍한 일을 저질렀구나. ... 죄책감으로 마음이 가득 찼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늘의 빛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요한계시록 3:17)

 

바울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할 때는 자신의 참모습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열심이 있더라도 그 열심이 잘못되면 그 열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빗나간 죄'라는 의미가 있는데,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바울이 했던 것은 '빗나간 죄'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그는 자신을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다른 구절에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 칭찬을 추구하는 삶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을 부풀리고, 자신을 위대하게 보이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자신의 비뚤어진 모습()을 알고 회개한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그의 새로운, 아니 하나님이 계획하신 본래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빗나간 삶의 모습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2)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한 깨달음

바울은 후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도 넘치나니라고 말합니다. ,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죄보다 크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깨닫게 된 것은 자신이 잘못한 죄인이라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만큼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기쁨을 바울만큼 잘 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이 에베소서에서도 '은혜'라는 단어가 전체 6장 안에 13번이나 사용될 정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달음은 바울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 바울에게 주어진 모든 사역의 동기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그의 사역의 원동력은 사람들의 칭찬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다시 한 번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되새기게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에게 계속 이야기해야 합니다.

시편 103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 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편 23편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 두 시편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이 두 가지 사실을 확실히 체득할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때라도 - 좋은 상황일 때나 나쁜 상황일 때나, [하나님이 환영하는 존재]라는 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작은 자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있는 자임을 믿읍시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생명의 날 동안 긍휼과 은혜가 여러분을 따라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위에 풍성히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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