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 마태복음 12:1~8 -

샬롬선교회 


[마태복음 12:7~8]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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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12장은 예수님에 대한 걸려 넘어짐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12장에는 종교 지도자로 불리는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의 실족,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들의 실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12장은 마태복음에서 처음으로 '안식일에 한 일'이 문제가 됩니다. 유대인의 역사를 통틀어 '안식일'은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단순히 쉬는 날에 그치지 않고, 거룩한 날로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안식일이 없었다면 유대교도 존속하지 못했을 것이고, 유대인의 역사도 사라졌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안식일이 중요했습니다. 유대인의 격언에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과 '안식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마태복음 12:1~8에서는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면서 이삭을 줍는 것', 9~14절에서는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행한 것'이 바리새인들의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을까? 이번에는 전반부(1~8)만을 다루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비유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행동 속에는 하늘나라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아버지의 계획과 뜻에 따라 행동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2:1의 예수님의 행동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예정된 일인 것입니다. , 그들의 비난을 미리 내다보시고, 이를 통해 '하늘나라'의 깊은 뜻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신 예수님

 

[마태복음 12:1~2]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 "그 때에"

 

마태복음 12:1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어휘는 '안식일'뿐만 아니라 '그 때', '밀밭',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에'[新改訳 2017]로 검색하면 8(신약)가 검색됩니다. 그러나 원어로 보면 12:1'그 때에'와 같은 원어로 표현된 것은 14:1뿐입니다. 헬라어로는 '엔 에케일로- 토- 카이로-'(Ἐν κείντκαιρῷ), 히브리어로는 '베-레-이트 하히-'( בָּעֵת הַהִיא)로 되어 있는데, 모두 특정 시기를 의미하는 '그 때'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그때'를 의미하는 '엔 에케이노스'(ἐν κενος)'어떤 특별한 때'를 의미하는 '호 카이로스'(ὁ καιρός)의 어휘가 결합된 표현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때''바로 그 때'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때' = '바로 그 때'일까? 그 때를 암시하는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문맥의 흐름'에서의 의미입니다. 11:28~30'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초청의 말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마태복음에서 '가장 값비싼 진주'라고 불리는 구절인데, 그 내용은 '하늘나라에서 약속된 안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로 오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안식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을 배움으로써 보장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멍에'는 피곤하지 않고, 무겁지 않고, 오히려 '편안함, 즐거움, 아름다움'을 동반하는 '안식'의 멍에입니다. 그 주제가 전개될 수 있는 적절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입호(立穂)'('카-마-' קָמָה), 즉 보리가 자라서 이제 추수할 수 있는 시기'를 뜻합니다. '카-마-'(קָמָה)의 어원이 되는 동사 '서-다'를 의미하는 '쿠-ㅁ'(קוּם)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과 '안식일'이 어떻게 관계되는지, 그것이 밝혀지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 그것은 '마지막 날'이 가까워지고 하늘나라의 추수 때가 가까워질수록 하늘나라의 비밀이 점점 더 가려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교를 시작하셨을 때부터 이미 그것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2) "이삭이 여물 때 안식일에 보리밭을 지나가시니라"

 

원문은 '보리밭'을 의미하는 '스포리모스'(σπορίμος)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 '수많은 보리밭'이라는 뜻이 됩니다. '밀밭'이 보리인지 밀인지 분명하지 않고, 또한 '밀밭'의 히브리어 '카-마-'(קָמָה)가 쓰였지만, 병행기사인 마가복음 2:23'밀밭''사-데'(שָׂדֶה)가 쓰여 있습니다. 따라서 명상의 내용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밀밭을 지나가신 '그 때'는 이삭이 여무는 시기이며, 이 시기인 안식일에(원문에는 관사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가시며', '이삭을 따서 먹기 시작'한 것이 문제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31:14~15]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여기고 어떤 노동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계명을 만들었다. 안식일에는 걷는 거리까지 정해져 있었다(사도행전 1:12). 아마도 안식일에 '수많은 밀밭'을 지나가신 것도 위반 행위로 여겨졌을 것으로 보이지만,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단수라는 점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문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음식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안식일 전날에 음식을 준비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다"는 말만 생각납니다. 그러므로 나도 일하고 있다." (요한복음 5:17)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기고 있다'고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내내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8:20)라는 말씀대로입니다. '인자'는 예수님이 자신을 표현하는 칭호입니다.

 

(3)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이삭을 따서 먹기 시작하였다."

 

제자들도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쉬는 시간 따위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배고픔'을 자주 느꼈을 것이고, 밀밭을 지나면서 이삭을 따서 배를 채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이삭을 줍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일로 간주되어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비난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라 예상했던 일로 보입니다.

 

1절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따서 먹었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행위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예언적인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배고프다, 배고픔을 느끼다'라는 단어는 '페이나오-'(πεινάω)로 단순히 배가 고프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육체적, 영적으로 '굶주리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어휘는 이미 마태복음 4:25:6에 나옵니다.

 

전자(마태복음 4:2)'파이냐오-'(πεινάω)는 예수님의 배고픔으로, 문자 그대로 예수님은 40일간의 금식을 통해 배고픔을 느끼셨다. 그것은 사탄의 유혹의 기회가 되었지만,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씀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땅을 지배하는 사탄은 배고픔이라는 두려움으로 사람을 지배하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람을 살리고 다스리십니다. 후자(5:6)'파이냐오-'(πεινάω)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영적 배고픔입니다. 그것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그 사람들은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새 몸을 주셨기 때문에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고 오히려 배부르게 됩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이삭을 따서 먹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삭을 따서'라고 번역하면 매우 온화한 느낌을 받지만,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뜯어먹다'(티로- τίλλω)라는 뜻으로 배고픔, 목마름이 심상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삭은 빵의 원료가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배고픔, 제자들의 배고픔이 기록되어 있지만, 군중의 배고픔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들의 배고픔을 채워주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유대인의 성경(타나후), 우리가 말하는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어쨌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이며, 이를 통해 군중의 배고픔을 채우는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음식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먹고 배불리 먹어도 남을 만큼,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메시아이심을 이 사건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항상 전략적입니다. , 바리새인들의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을 미리 알고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따서 먹기 시작한 것"도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필연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전략과 행동은 하늘나라의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 왔다."(마태복음 5:17)고 말씀하셨고, 그 성취는 왜곡된 율법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라는 진리가 도출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에게는 놀라운 발언이었는데, 그 과정에 대해 이제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읽지 못하였느냐?"

 

[마태복음 12:3~6]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제자들의 행위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변론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성경(구약성경)의 두 사건을 예로 들며 "읽어본 적이 없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문가라고 불리며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의 '읽어본 적이 없느냐'는 두 번의 질문은 율법 전문가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을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의 구절은 사무엘상 21:1~6이고, 다음 질문의 구절은 '율법으로'라고 했으니 민수기 28:9~10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삼상 21:1~6

 

[삼상21:1~6] “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것과 네게 명령한 일은 아무것도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오라고 말하였나이다. 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다윗과 제사장들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신도 제사장도 먹어서는 안 되는 임재의 떡을 먹었는지, 다윗이 무엇을 했는지 읽어 본 적이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본문 6절에는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으로부터 떡을 받은 날은 안식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마다 묵은 떡을 거두어들이고 새 떡으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는 오래된 빵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상시에는 안식일에는 허용되지 않는 것도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난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변명은 여기에 '다윗보다 더 큰 자가 있다'는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다윗과 예수님이 겹쳐서 말씀하시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긴급한 상황이란 도대체 어떤 때일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며 선교를 시작하신 때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가 아닐까? 이 외에 다른 비상사태의 때는 없습니다.

 

(2) 민수기 28:9~10

 

[민수기 28:9~10] “9.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 10. 이는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 매 안식일의 번제니라."

 

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일을 쉬는 날이지만, 제사장은 성전에서 일하는 날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제물인 떡(임재의 떡)을 준비하거나 바꾸고, 여러 가지 제물을 준비합니다. 교회 목사들도 예배 전날에는 설교 준비를 하고, 예배 당일이 가장 바쁜 날입니다. 그들이 그 날 그들에게 주어진 일을 했다고 해서 누구도 그들을 죄로 규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일하게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안식일 규정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일하지 않으면 예배가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성전보다 더 큰 자'인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변명이었습니다.

 

3. 인자는 안식일의 주이니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진리를 말하기 전에 7절의 말씀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여기서 인용된 구약성경 호세아 6:6, 사실 마태복음 9:13에도 같은 말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자신과 제자들을 변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공적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실한 사랑'('헤세드' חֶסֶד)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마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율법 교사라고 자처하면서 율법의 중요한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에 대해 맹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新改訳 2017]에서는 '진실한 사랑'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구어체 번역에서는 '긍휼', 新改訳 3판에서는 '성실', 新共同訳에서는 '사랑', 성서공회 공동번역에서는 '자비'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마태복음의 '가장 값비싼 진주'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新改訳 2017] [마태복음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실제 이야기가 12장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규칙, 명령, 금지, 의무로 바꾸어 사람들을 구속하고, 피곤하게 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했습니다. 그런 잘못된 율법(하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쉬게 하고, 영원한 안식을 주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내게로 오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8절의 "인자는 안식일의 주님이시다"라는 결정적인 말씀에 대해 알아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자'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시다'라는 의미는 '모든 사람을 영원한 안식에 이르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라는 의미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을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안식일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에게는 매일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면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안식일을 둘러싼 싸움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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