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1)
- 마태복음 27:31~36 -
샬롬선교회
[마태복음 27:31~36]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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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로 '찢긴 살'과 '흘린 피'는 '죄 많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고, 그것을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억하는 것'과 '주님을 먹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먹는 것'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깊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53~56]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6절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설령 그것이 예수님의 주변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시나리오 안에 잘 녹아들어 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어 갑니다. 또한 하나하나의 사건들 속에도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숨겨진 깊은 뜻을 이번 본문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7:31~36] (본문)
*본문은 예수님이 총독 관저에서 끌려나와 골고다라고 불리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군인들이 시몬이라는 이름의 구레네 사람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강제로 지게 한 것, 예수에게 쓴맛을 섞은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 그리고 예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준 것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필연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필연성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왜 시몬이라는 이름의 구레네 사람이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지게 하셨는가?
(2) '골고다'라고 불리는 곳은 어디인가?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3) 예수님은 왜 쓸개 탄 포도주를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않으셨는가?
(4) 로마 군인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눈 것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가?
+위의 네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시몬이라는 이름의 구레네 사람이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구레네'는 지중해에 면한 북아프리카의 한 대도시로 알렉산드리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시몬이 예루살렘의 축제에 참석하러 왔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구레네 사람'이 아니라 '시몬이라는 이름'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시몬'의 히브리어는 '시므온'(שִׁמְעוֹן)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야곱)의 둘째 아들의 이름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부모가 어린 예수를 주님께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데려갈 때,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어린 예수를 보고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그뿐만 아니라 '시므온'='시몬'(Σίμων)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에 숨겨진 깊은 뜻은 '아들에게 듣는다'는 뜻입니다.
*'듣다'는 '듣고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유명한 신명기 6:4의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힘 아도나이 에하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다. 여호와는 유일하시다"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중요한 신앙고백입이다. '쉐마'는 '샤마'(שָׁמַע)의 명령형인데, 여호와께 듣고 순종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본분입니다. 그것이 '시므온'(시몬)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시므온(시몬)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첫 번째 제자가 '시몬 베드로'였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어린 예수를 처음 품에 안은 늙은 시므온이 성령 충만하여 이스라엘의 위로(=구원)를 기다리던 인물인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어린 시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구원은 만민 앞에 예비된 것으로, 이스라엘의 영광뿐 아니라 이방인을 비추는 계시의 빛으로 보는 '새 노래' 그 자체였습니다. 거기에 시므온의 이름이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시므온(시몬)이라는 이름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스라엘 전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요충지에 반드시 등장하는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① 예루살렘의 늙은 시므온, ② 갈릴리에서 소명을 받은 제자 시몬 베드로, ③ 베다니의 바리새인 시몬, ④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진 구레네 사람 시몬=안디옥의 니겔이라 불린 시몬, ⑤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 ⑥ 요파(얍바)의 가죽 장이 시몬, 등입니다.
*이번 '시몬이라는 이름의 구레네 사람'도 억지로라도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① [마태복음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② [마태복음 10:38]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③ [누가복음 14:27]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시몬이라는 이름의 구레네 사람이 짊어진 십자가의 장면은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몬은 '억지로'(=강제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누가는 이 장면을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누가복음 23:2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들의 말을 듣고 따르라'는 시몬의 이름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를 그린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입니다.
2.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라는 장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골고다라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골고다는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곳이기 때문에 그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골고다라는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로 '골고터'(גָּלְגֹּתָּא)로 표기되는데, 원래 이 어휘는 히브리어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세다(인구조사)'라는 뜻의 '구루골렛'(גֻּלְגֹּלֶת)에서 유래합니다. 참고로 이 '구르고렛'에는 '두개골'과 '두개골을 세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히브리어 '구르고렛'이 아람어로 음역된 것이 '골고다'입니다. 그 '골고다'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골고다'(גָּלְגֹּתָּא)와 같은 뜻을 가진 어휘로 '미프카드'(מִפְקָד)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를 세다(인구조사)'라는 의미 외에 '정해진 장소', '일정한 장소'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정해진 일정한 장소'는 '죄를 위한 제물이 뿌려지는 곳'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은 '죄를 위한 희생양'으로서 자신의 피를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그 죄를 위한 제물을 불에 태우는 곳이 아무데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다른 제물은 성전 입구나 제단에서 불태우지만, 속죄의 제물은 반드시 성전 밖의 '정해진 장소'에서 뿌려서 불태워야 했습니다. 그 장소를 히브리어로 '미가다의 제단'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 동문과 올리브 산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예루살렘 성 서쪽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와 '성묘교회'를 방문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길이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골고다로 믿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지식인들은 가톨릭의 성지라는 장소가 아닌, 독수리 모양의 작은 산인 '동산의 무덤'이라는 곳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성묘교회는 동쪽의 올리브산과 정반대인 서쪽 방향에 있고, 게다가 성전에서 이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동산의 무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 동문에서 감람산 정상까지의 거리는 2천 큐빗이나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골고다'는 '올리브 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골고다는 동쪽 숙소 밖이어야 하고, 그곳은 성전에서 '이천 규빗'(약 구백 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십자가형을 받을 극악무도한 사람을 예루살렘에서 처형할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진영 밖'에서 형을 집행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것은 감람산에서 죽은 '붉은 암송아지'처럼 죄의 제물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민수기 19:2~5] “2.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3.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 것이며, 4. 제사장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그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고, 5. 그 암소를 자기 목전에서 불사르게 하되 그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고"
3. 왜 예수님은 쓸개 탄 포도주를 맛보시고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을까?
*마태복음은 '쓸개 탄 포도주', 마가복음은 '몰약을 섞은 포도주',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신 포도주'라고 표현하는 등 미묘하게 표현이 다릅니다. 이 차이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많은 주석가들은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는 포도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마태복음의 강조점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사건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편 69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메시아 시편입니다.
[시편 69:19~21] “19.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나의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20.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시편에 예언된 말씀이 예수님에게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맛보는(=맛본='구오마이' γεύομαι) 예수님이 마시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왜 마시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다음 구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2:9~15]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 구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성육신의 목적은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즉 마귀를 자신의 죽음으로 멸망시키고, 죽음의 공포로 인해 평생 노예로 묶여 있던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첫 아담의 죽음을 끝내는 속죄적 죽음이 필수적이었다. 동시에 여기서 예수님은 형제들의 맏아들이 되기 위해(그런 관계를 맺기 위해) 죽음의 고통을 제대로 맛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땅한 일이며,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경험한 '죽음'은 영원히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던 교제의 생명이 끊어지는 경험이었다. 우리가 그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맛봄'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형제들의 맏아들이 되어 영광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4. 로마 군인들이 예수의 옷을 찢은 것
*마지막 질문은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찢은 것에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시편 22편(이것도 메시아 시편입니다)에 다음과 같은 예언이 있습니다.
[시편 22:16~18]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첫 구절의 외침만으로도 이 시편이 메시아를 예언한 시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편 22편은 메시아의 전체상을 아는 데 매우 중요한 시편이며,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공부할 가치가 있는 시편입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나'(메시아)가 있고, 하나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완전히 버림받은 고립무원의 '나'(메시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16절에는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개'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이방인'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복수의 '개들'은 '로마의 병사들'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언대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는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은 어떤 망토보다 더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옷'으로 번역된 어휘는 헬라어로 '히마티온'(ἱμάτιον)의 복수형입니다. 왜 복수형인가 하면,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겉옷은 나눠 입었지만, 한 장으로 짜여진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뽑기를 한 것 같습니다. 마태는 그런 세세한 점에는 관심이 없고, 단순히 '제비를 뽑아 그 옷을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옷을 나누었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까? 그것은 '옷'이라는 어휘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 사람의 옷만 만져도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 9:21)고 생각했던 혈루증 환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옷자락이라도 만져달라고 간청"할 정도로 "만진 자마다 나음을 입었다"(마가복음 6:56)고 합니다. 그런 예수의 옷이 벗겨지고 수모를 당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옷의 히브리어는 '베게드'(בֶּגֶד)인데, 그 어원인 동사 '바가드'(בָּגַד)에는 '배반하다', '버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자기 나라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거부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빌라도는 "저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고 설득하려 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점점 더 격렬하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재판권을 포기한 빌라도를 향해 백성들은 모두 "그 사람의 피(의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있느니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포도원과 농부'의 비유처럼 하나님에 대한 배신행위일 뿐이었습니다. 또한 로마 군인들이 예수의 옷을 찢은 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을 상징하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메시아에 대한 배신행위도 하나님의 중요한 계획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거절당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수난이 의미하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그것은 "모든 입이 막혀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하기"(로마서 3:19) 위함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 하심"(로마서 3:24)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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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관련된 네 가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의 확실성과 필연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신기한 책입니다.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요한복음 5:39), "내가 장래 일을 처음부터 말하였느니라."(아사야 46:10)는 말씀처럼 시간적 연대를 초월한 계시와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의 시나리오가 역사를 초월한 하나님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진정한 시나리오 작가는 마태도, 마가도 아닙니다. 누가도 요한도 아닌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실현될 일이 창세기 1장에 계시되어 있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항상 역사의 끝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과 뜻을 자신의 음식으로 '먹음'으로써 맛있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달콤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육으로 먹고 육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육으로 먹으면 그것은 쓴 음식이 됩니다. 그러나 영으로 먹으면 달콤한 음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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