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초대
- 마태복음 11:28~30 -
샬롬선교회
[마태복음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도)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본문의 예수님의 초대의 말씀에는 두 가지의 초대가 있다. 하나는 '내게로 오라'는 초대이고, 다른 하나는 '내게 배우라'는 초대이다. 각각의 초대에는 하나님의 안식이 약속되어 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어떤 사람인가?
*28절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맥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모두 원문은 복수)는 '예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왜 그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인지는 당시 사회를 알아야 한다.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두(예외 없이), 삶에 지친 사람, 병에 걸린 사람,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 취업이나 시험에 실패한 사람, 실연당한 사람, 자신감을 잃은 사람, 무언가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당시 '짐을 지게' 하고 '지칠 때까지' 짓누르는 사람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율법순수주의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종교인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고 짓누르려고'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암 하-아-레츠'(עַם הָאָרֶץ), 즉 '땅의 백성'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그런 사람은 '나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다'고 절망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속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초청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2. 예수님의 첫 번째 초대의 말씀과 약속
*28절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이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초청의 말씀이었다. "내게로 오라"('듀-테 프로스 메' Δεῦτε πρός με). 이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페누- 에-라이'(פְּנוּ אֵלַי)가 된다. 직역하면 '너희는 나를 향하여 돌이키라'가 된다. 히브리어 '파-나-'(פָּנָה)는 '돌이키다, 방향을 바꾸다, 얼굴을 돌리다, 돌아보다'라는 뜻으로 '회개하다'의 '슈-브'(שׁוּב)와 동의어이다. 예수님께 돌아서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3. 예수님의 두 번째 초대의 말씀과 약속
*예수님의 두 번째 초대의 말씀은 "(너희도)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이다. 먼저 '(너희도)'라는 말이 중요하다. '너희는'이 아니라 '너희도'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나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아들 예수님도 아버지의 멍에를 메고 걷고 있다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멍에를 메고' 있는 모습이 있고, '내게 배우라'는 초청의 말씀이 있다. '배우라'는 그리스어 '만사노-'(μανθάνω)의 아오리스트 명령형으로 주체적, 자발적 행위를 의미한다. 히브리어는 '라-마드'(לָמַד)의 명령형(남복) '라무두-'(לִמְדוּ)이다.
*'배우다'는 단순히 머리로 지식적으로 배운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몸으로 배운다는 의미가 강한 것 같다. 혹은 제자가 스승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내가 요구되는 수련이기도 하다. 스승에게 배운 자만이 비로소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세상이다. '내게 배우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스승은 예수님이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에는 반드시 기쁨이 따라온다. 그리고 이 기쁨은 인간에게 매우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것'은 삶의 기쁨으로 이어진다. 이 삶의 기쁨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복이 있다. '배움'은 어둠을 뚫고 미래를 밝히는 힘을 가져다준다.
*'배움'의 내용은 '멍에를 메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헬라어로는 '너희는 나의 멍에를 메고(αἴρω)'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로는 '나의 멍에를 너희에게 메고(קָבַל의 피엘태)'라고 되어 있어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르다.
*'멍에'('오-루' עֹל)는 두 마리의 소의 목에 매어 가야 할 방향으로 인도하는 막대 모양의 가로대를 말하는데, '멍에를 메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즉,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멍에를 목에 걸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에 '목덜미를 굳게 하라'(新共同訳)는 표현이 있다. 이전 新改訳에서는 '목덜미가 굳은 백성'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오로지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목덜미가 굳은 백성'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백성, 하나님께 반역하고 순종하지 않는 백성을 말한다. 목덜미가 굳다는 것은 하나님과 백성이 함께 멍에를 메지 못한다는 뜻이다. 멍에를 메는 예는 하나님이 맺어주신 결혼이 그 예이다. 그렇다면 멍에를 메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결혼한 부부가 각자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서로 '목을 조인다'면 '멍에를 메는 것'은 고통이 되고,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다.
*마태복음 11:29의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을 요한복음의 말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라'(요한복음 15:4)가 될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게로 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후자의 말씀은 사실 매우 중요한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요한복음 15:4~5]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님의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과 '멍에를 메고', 혹은 '예수님 안에 머무름'으로 약속된 것은 '안식'이다. 이 '안식'은 명사 '아나파우시스'(άναπαυσις)로, 히브리어로는 '말고-아'(מַרְגּוֹעַ)가 사용되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 초대의 배경에는 예레미야서 6:16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고-아'(מַרְגּוֹעַ)는 그 구절에만 쓰인 어휘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6: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에게 '옛적 길', 즉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 '영원('오-라-ㅁ' עוֹלָם)의 길'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즉,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영원히 변치 않는 길, 그것은 '복된 길'과 동의어다. "예레미야는 "그 길을 묻고 그 길로 걸어가서 평안을 얻으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우리는 그 길을 걷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결과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된 사연이 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살아 있는 율법사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게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마침내 평안을 얻으리라(מַרְגּוֹעַ מִצְאוּ)"고 말씀하신 것 같다. 이 안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통해,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첫 번째 초대에 의한 약속의 '안식'과 두 번째 약속의 '안식'은 어떻게 다를까? 첫 번째 '안식'('누-아흐' נוּחַ)은 예수님께로 돌아감으로써 회복된 영원한 안식이다. 그러나 두 번째 '안식'('말고-아' מַרְגּוֹעַ)은 스스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거나 예수님 안에 머물러 스스로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안식'이라는 것이다.
*30절의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는 말씀에 나오는 '쉽다'라는 말과 '가볍다'이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자 한다. 먼저 '쉽다'로 번역된 헬라어 '크레-스토스'(χρηστος)라는 형용사는 '편안하다'는 뜻도 있다. 히브리어 '나-임-'(נָעִים)은 '즐거운, 바람직한, 아름다운'이라는 뜻이며, '가볍다'로 번역된 헬라어 '엘라프러스'(ἐλαφρός)도 히브리어 '칼'(קַל)도 결코 피곤하거나 무거운 짐이 되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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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를 주의 어린아이로 선택하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본문의 예수님의 초대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자 한다.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늘 바라보며,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즐겁고, 아름다운지' 날마다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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