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 누가복음 19:28~44 -
샬롬선교회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사건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감람산 기슭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고 명하셨다.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고 묻는다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지시하셨다. 제자들은 지시대로 하여 나귀 새끼를 데리고 왔다.
1.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이 아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가랴서에 예언한 메시아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서 9:9)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아직 아무도 타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를 "주가 쓰시겠다"며 데려왔지만, 왜 그런 일을 명령하셨는지 제자들 중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또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제자들도, 그리고 예수를 환영하는 군중들도 실상은 알지 못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결말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베다니의 마리아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향유를 부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2:1~8). 이 베다니의 마리아와 제자들, 그리고 군중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으로부터 "인자가 반드시 거기서 많은 고난을 받고 관원들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는데,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늘 들었던 제자들 중 단 한 명도 예수님에게 일어날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단호하게, 예언된 메시아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날 메시아'로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갔다.
+이 구절을 우리는 나귀 새끼와 같은 작은 자에 불과하지만, 주님은 그런 자라도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주님은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를 사용하시지만, 이 시점에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필요로 하신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을 맞이한 많은 군중들은 구약성경이 계시하는 올바른 메시아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나라를 재건해 줄 왕 같은 존재로만 여겼다. 즉,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메시아상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며칠 후 예수님에게 실망하게 될 줄은 이 시점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실망은 분노로 바뀌었다.
2. 성경을 읽는 방식을 바꾼다.
+그런데 개신교회는 성경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서 읽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왔다. 그것은 성경을 읽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읽기에 치우치다 보면 어떤 성경 구절이든 자신에게 적용하기 쉬운 것들만 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성경 전체의 관점이 결여된 읽기가 되어 버린다. 그러다 보니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말을 들어도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읽다 보면 성경 전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역동성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그런 저 역시도 스가랴서라고 하면 스가랴서 4:6의 유명한 말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정도만 알고 있었다. 참고로, 스가랴서 9장 이후(14장)에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 많은 예언이 나온다.
스가랴서 9:9에서는 초림의 메시아를, 9:10에서는 재림의 메시아를 예언하고 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스가랴서 9:10)
+ 그리스도의 재림에서는 모든 전쟁 무기가 제거되고 의와 평화가 세워져 예루살렘에서 온 땅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두 가지 예언 속에 살고 있다. 전자는 이미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후자는 주님의 재림으로 성취된다. 전자가 성취되었으니 후자도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때 진정한 평화가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그 평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는 20세기 나치에 의한 대량학살(1/3의 사람들이라고 한다)을 훨씬 뛰어넘는 2/3가 죽고, 게다가 남은 1/3 중 정련의 불을 견뎌낸 자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가장 무서운 환난시대(3년 반)의 도래가 스가랴서 13:7~9에 예언되어 있다. 그 비참함은 이어지는 14:1~2에 기록되어 있으며, 온갖 폭압이 횡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벗어날 인간적인 수단이 완전히 끊어졌을 때 "여호와께서 나오실 것"(14:3)이다. 그리고 "주의 발이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감람산 위에 서시리라"고 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전모는 놀랍도록 완벽하게 모든 조각이 잘 맞물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놀라움에 대한 탐구와 감격이 희박해지는 것 같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다.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가 길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구약성경 전체를 풀어내어 메시아가 고난 후에 영광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성경 읽기가 더더욱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성경을 읽었던 읽기 방식을 스스로 의식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거기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고 믿는다.
3.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백성들로부터 '호사나'(구원을 베풀어 주소서)라는 환영을 받았다(단, 이 '호사나'라는 문구는 어찌된 일인지 누가복음에는 없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거절당하셨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이 예언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에게 복이 있을지어다'라는 회개와 함께 실현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3:38-39)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도 바울이 하늘의 강렬한 빛으로 회심했던 것처럼 '빛'이 필요한 것이다. 참고로 시편 118:27에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라고 예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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