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호수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다

- 요한복음 21:1-23 -

샬롬선교회 


1. 제자들이 갈릴리로 돌아온 이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곳은 예루살렘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무대가 갈릴리(디베랴 호숫가 #1)로 옮겨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두 제자, 7명에게 나타나셨다(요한복음 21:2). 14절에 보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번이 세 번째"라고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때 없었던 도마가 있는 곳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이다.

 

#1.

갈릴리 호수의 별칭은 게네사렛 호수.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왜인지 '디베랴 호수'라고 되어 있다. 빌라도가 유대 총독일 때 로마의 황제는 테베리우스였다. 당시 갈릴리의 영주였던 헤롯 안티파스는 이 황제를 기리기 위해 갈릴리 호숫가 서안에 도시를 하나 짓고, 이를 디베랴라고 이름 붙였기 때문에 갈릴리 호수에 디베랴 호수의 별칭이 붙게 되었다.

 

제자들은 왜 예루살렘에서 자신들의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갔을까? 물론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첫 번째로 나타났을 때는 '파송의 위임'을 받았고, 두 번째로 나타났을 때는 특히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나나타심에는 반드시 그 나름의 목적이 있다면, 세 번째 나타나심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묵상의 포인트가 될 것 같다. 참고로 사도행전 1장을 보면 그들은 적어도 오순절 10일 전, 즉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이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약속, 즉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실 것을 기도하며 기다렸다.

 

(1) 그 이유 - "주님의 지시였기 때문"

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자신들의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왔는지에 대한 해답 중 하나는 마태복음 28장에 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에 갔을 때, 사자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할 때, 예수님은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마태복음 28:7). 또한 예수님께서 직접 그녀들에게 나타나셔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라. 거기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마태복음 28:10). , 제자들이 갈릴리로 돌아가는 것은 주님의 지시였다는 것이다.

 

(2) 그 이유 - "베드로에 대한 특별한 소명을 위해"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셨을까, 어떤 목적이 있었을까? 그 점이 묵상의 포인트인 것 같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거기에는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두 제자, 7명만 있다. 왜 다른 4명의 제자들은 없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곳에 있던 정보는 나중에 제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갈릴리(디베랴 호숫가)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 이 세 사람은 항상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 이들이 어부로 살았던 곳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이 고기잡이 실패 사건과 예수님의 지시에 의한 대어 사건(요한복음 21:3~8)은 세세한 차이는 차치하고서라도 충분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누가복음 5:1-11에 기록된 첫 번째 소명 사건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때 예수님의 부르심의 말씀은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취하게 될 것이다."(누가복음 5:1)이었다. 베드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이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똑같은 일이 이 시점에서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그 첫 번째 소명을 상기시키는 것만이 예수님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 진정한 목적은 새로운 소명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하지만 그 전에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여 초대하셨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식사가 의미하는 것은 주님의 식탁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을 충분히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의 행위이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에 대한 특별한 부르심 때문이다.

 

2. 요한복음 21:15의 번역 문제

 

예수님의 "너희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新改訳)라는 번역에 대해 이 번역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주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가를 놓고 예수님이 굳이 경쟁을 부추기는 듯한 번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제자들은 서로 누가 가장 위대하냐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다고 볼 수 없다.

 

山岸登(yamagisi noboru) 목사에 따르면, 여기서 '이 사람들'은 남성명사이기도 하고 중성명사이기도 한 대명사로, '이것들'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이곳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예수님이 묻고 있는 것이 된다. '이것들'은 어부의 일이나 빵을 얻는 일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말 묘한 지적이다.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아가파오'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다. 조금은 인간적인 느낌이 드는 말이다. 이에 대해 베드로의 대답은 '필레오'로 답하고 있다. 원어가 다른데 새번역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은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곳을 여러 성경을 찾아보면 재미있는 부분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구하신 것은 진실한 사랑에 기초한 헌신이다. 거기서 다시 한 번 베드로를 내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헌신은 순교를 암시하는 것이었기에 베드로는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요한복음 21:18, 21).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분명하게 자신을 따를 것을 요구하셨다.

 

3. 예수의 치밀한 준비로서의 현현

 

이처럼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 지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치밀한 준비를 시키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 베드로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기시면서 다시 한 번 그가 부름 받은 지점, 즉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랐던 지점으로 되돌아가 '다시 밟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앞으로 맡게 될 사역은 지금까지의 그의 경험이나 지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부르시기 위해 베드로에게 어떤 의미의 '결별'의 의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장차 탄생할 교회의 리더적 존재로 세우기 위해 다시 한 번 소명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진정한 사랑에 기초한 헌신을 촉구하는 것이 요한복음 21장의 예수님의 나타나심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요한복음 21장은 나중에 덧붙여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단순한 덧붙임이 아니라 덧붙여야 할 것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덧붙여야 할 것은 부버가 말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라는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고, 요한복음의 큰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1장의 시몬 베드로에 대한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이보다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이야말로 '우상숭배를 피하는'(요한일서 1장의 가장 마지막 권면) 길이기도 하다.

주님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마저 느껴진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큰 질문이다.

 

-'나는 낚시를 하러 간다''낚시를 하러''낚시를 하다'라는 동사의 현재형 부정사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또한 '가다'도 현재형으로 '가려고 한다', 혹은 그 가는 행위가 상습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일시적으로, 단지 그때만 시간을 때우기 위해 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어부의 일로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예수님도 이 점을 간파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http://meigata-bokushin.secret.jp/index.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