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예수님 (2)

-마태복음 27:46-

샬롬선교회 


[마태복음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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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7:35~46, 마가복음 15:24~32, 누가복음 23:33~43, 요한복음 19:18~30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말씀하신 일곱 말씀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리고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깊이 상고하여 보고 마음에 새기고 싶다.

 

1. 예수님은 왜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셨는가?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갑자기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무서운 침묵과 어둠이 온 땅을 뒤덮은 후,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였다. (실제로는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 예수님에게 일어났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경험이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다. 단순한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단순히 객관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과 어느 정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독생자 예수의 본래의 호칭이 아니다.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나의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2. 시편 22편 저자와 예수님과의 일체화

 

이 부르짖음이 시편 22:1에 있는 동일한 부르짖음이라는 것은 유명하다. 그 저자와 예수님이 일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편 22편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수난 사건 속에서 여러 번 인용되고 있다. 특히 마태는 예수님의 수난을 묘사하는 데 이 시편 22편에 있는 구절(1, 7, 8, 18)을 인용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의 심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고독 속에서,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발화된 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은 결코 절망이 아니라, 어둠의 심연 속에서도 신뢰의 끈이 이어져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신뢰의 끈이 끊어졌다면 이런 외침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시편 22편 자체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 시편 22편의 첫 구절을 외치셨을 뿐 아니라, 시편 22편 전체를 기도하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 시편의 전반부는 탄식으로 시작하지만, 후반부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으로 이어져 있다.

 

특히 시편 22:21'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는 시편 22편 전체를 볼 때, 이 구절부터 내용이 전환되어 '탄식''찬양'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가져다주는 승리

 

그리고 이어지는 22절부터는 완전히 찬양의 부분으로 바뀌고 있다. 히브리서 2:12에는 이 시편 22:22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전하며 회중 가운데서 주를 찬송하리이다"가 인용되어 있다. 형제들에게 전해야 할 그 이름은 시편 22:24"진실로 여호와께서는 곤고한 자의 괴로움을 경멸하지 않으셨으며, 그의 얼굴을 숨기지도 않으셨도다. 오히려 그가 도와달라고 부르짖을 때 들으셨다"는 말씀처럼 말이다. 이 사실을 무리 가운데서 찬송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바로 이 이름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 이름은 신뢰하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이름이다. 어떤 상황 속에 놓여 있더라도, 설령 그것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아버지를 신뢰하는 것이 사랑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은 그 신뢰의 끈을 끊으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예수님을 괴롭혔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은 내게 응답하실 것입니다."라는 확신을 지키셨던 것이다. 이 예수님의 진리, 예수님의 믿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본연의 관계를 회복시킨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고난의 목적도 모두 하나님과의 신뢰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애굽에서 구출되어 광야로 인도된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 다윗의 광야 방황이라는 부조리한 고통, 바빌론 포로라는 망국의 고달픈 경험, 그리고 십자가라는 완벽한 거절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 그리고 사도들의 고난으로 이어지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신뢰의 삶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때, 우리는 얼마나 큰 용기를 얻게 되는가? 고난의 극치 속에서 신뢰의 극치를 뚫고 내려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신뢰의 유대를 다시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찬양해도 다 찬양할 수 없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 '응답하다'로 번역된 'עָנָה'(--)는 구약에서 313, 시편에서 36회 사용되었는데, 대부분 'answer'이다.

원문에서는 'עֲנִיתָנִי'(아니--)로 되어 있는데, 이 해석을 둘러싸고 다양한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는 '당신은 내게 대답하셨다'라는 완료형인데, 신공동번역(新共同訳)은 완료형 동사를 소망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지만, 다른 번역에서는 완료형 그대로 '대답해 주셨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신개역(新改訳)에서는 '응답해 주실 것이다'라는 확신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확실히 실현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실제로 실현되지 않더라도 완료형(확신의 완료형)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아직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이미 그 응답이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로 인해 저자의 탄식이 찬송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인한 승리라고 할 수 있으며,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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