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동안 병든 사람의 치유

- 요한복음 5:1-9 -

샬롬선교회 


[요한복음 5:1-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니 2 예루살렘에 양문 근처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고, 다섯 개의 회랑이 있는데, 3 그 안에 큰 병자, 소경, 앉은뱅이, 다리 저는 자, 쇠약해진 자들이 누워 있었다.

5 거기에는 38년 동안 병에 걸린 사람이 누워 있었다. 6 예수께서 그가 엎드려 있는 것을 보시고, 오래 된 줄 아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여, 주여. 물이 출렁거릴 때 나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가려고 하면 이미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일어나서 걸어가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즉시 일어나서, 바닥을 들고 걸어갔다."

(5:3 후반부 -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5:4 - 주의 사자가 때때로 이 연못에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되, 물이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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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에는 '38년 동안 병든 사람이 치유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이 이야기를 사용하면서 38년 동안 병든 사람이 치유된 날이 뜻밖에도 안식일이었다는 점에서 유대인과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19절 이후부터는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영원한 생명'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설파하고자 한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영원한 생명'이다. 두 번째 표적에서도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간절히 애원하는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돌아가라. 네 아들이 나았느니라"(마태복음 50:50)라고 말씀하셨다. 新改訳'낫는다'로 번역되어 있지만, 新共同訳'살리라'로 번역되어 있다. '살다'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자오-' ζάω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히브리어로는 '--' הָיָה에 해당하는 단어이다.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살아간다는, 존재한다는 의미 이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성경 말씀처럼,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다. 그 관계는 요한복음 1:1'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말씀이 하나님을 향하여 계셨다)'는 말씀처럼 '영원한 생명'은 바로 '브로스(προς)의 신비'이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랑 그 자체이며, 창조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1. '베데스다' 연못의 다양한 광경

 

본문, 5:1에는 '그 후에 유대인의 축제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축제'가 어떤 축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대는 유대인의 종교적 총본산인 예루살렘으로 옮겨진다. '첫 번째 표적', '두 번째 표적'의 무대가 갈릴리였다면 '세 번째 표적'은 예루살렘이다. 그 예루살렘의 양의 문(12문 중 하나로 북쪽에 있다) 근처에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다. 그곳에는 병든 자, 눈먼 자, 다리 저는 자, 마른 자들이 누워있었다. 성경책에는 그들이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 모인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성경 각주를 보면 생략된 3절 후반과 4절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성경 각주: 5:3 후반 - 그들은 물이 출렁거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5:4 - 주의 사자가 때때로 이 연못에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되, 물이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이 출렁거릴 때'라는 것은 그곳이 간헐천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 '출렁거릴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물이 출렁거릴 때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고침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순한 미신이라면 많은 병자들이 그곳에 모여들었을 것 같지 않다. 확실히 연못의 물이 출렁일 때 그런 치유가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애초에 왜 축제 때 예수님이 그곳을 방문했느냐 하면,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연못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그리고 나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일부러 굳이 예수님이 그곳으로 나가신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셔서 관계를 맺으려고 하셨는데(관계의 선점성), 5장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베데스다 연못에는 중병에 걸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성경에는 "중풍병자, 소경, 앉은뱅이, 다리 저는 자, 마른 자들이 엎드려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병들어 '엎드린다'는 말은 유대인들이 식탁에 앉을 때 '누우다, 눕다'와 같은 '카타케이마이' κατάκειμαι라는 동사다.

 

이 사람들의 일상은 그저 물이 움직이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삶이다. 가끔 주님의 사자가 내려와서 물을 휘젓고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연못에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이라도 낫기 때문이다. 회랑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연못에 들어가려고 연못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저 사람이 나보다 병세가 더 심하니 먼저 들어가라는 따뜻한 마음은 없었다. 병자의 세계에도 우리 먼저라는 경쟁 사회가 있었던 것이다. 동병상련도 없고, 사람을 밀쳐내려는 추악한 모습만 있었다.

 

약함을 아는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를 위로하고 도와줄 수 있는 것 같다. 거기에는 약함을 아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공통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죄의 문제가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여기서 인간의 죄의 깊이를 느낀다. 몸의 치유도 절실하지만, 이 죄로부터의 치유야말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고로 베데스다는 '긍휼의 집'이라는 뜻이다.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단순히 몸이 아프거나 몸이 불편하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거기에 영적인 의미까지 포함해서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상태는 우리 인간의 네 가지 유형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1) 병든 사람 '아스세네오-' άσθενεω의 분사

'병자'는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옳지 않은 일을 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2) 맹인 '투플로스-' τυφλος(형용사)

보아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진리의 빛을 알지 못하는, 그래서 볼 수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의 빛으로 비춰지지 않고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세계이다. 어둠 속에 있는 상태, 그리고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이다.

 

(3) 다리 저는 자 '코올-로스' χωλος(형용사)

여러 번 결심하고 걷기 시작하지만, 항상 발이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과 실패를 반복하는 사람의 상태.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

 

(4) 쇠약해진 자 '크세-로스' ξηρος(형용사)

이것은 삶의 힘, 용기 같은 것이 결여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의욕이 없는 사람은 바로 '쇠약해진 자'라고 할 수 있다.

 

2. 삶의 의욕(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예수님의 부르심

 

38년 동안 병에 걸려 누워 있는 사람을 보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낫고자 하느냐"(新改訳). 원문은 '너는 건강해지기를 원하느냐'이다. 그러나 남자는 '낫고 싶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다. 대신 자신이 왜 치유되지 않은 채 여기 있는지에 대해 이상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주님. 저는 물이 출렁일 때 연못에 저를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려고 하면 이미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 버립니다."(7)

 

여기에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고독의 외침이 있다. 누구도 남의 눈치를 볼 수 없다는 고독의 외침이 있다! 내가 먼저 사람을 밀어내고 뛰어내려 버린다! 그리고 항상 자신은 마지막에 남겨져 있다!'라는 지긋지긋한 분노까지 느껴지는 말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핑계가 많고, 잘 안 되는 것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사람은 새로운 삶으로 탈출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지금 있는 불행에 계속 머물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에게 "너는 안 돼"라고 말하지 않으신다. 깊은 연민을 가지고 실망한 마음에 "낫고 싶으냐"는 말씀은, 희망을 반쯤 잃어버린 사람에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마중물 같은 말씀이었던 것 같다. 38년 동안 병든 사람은 자신의 그동안의 마음을 예수님께 쏟아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단 한 마디의 비난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자신이 정말 '낫고 싶다'는 희망을 가질 여지가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한 마음에 희망을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종종 그런 경험을 하곤 한다. 실망한 마음에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사람처럼 사람 탓, 환경 탓이라는 핑계만 돌아온다. 내 안에 희망이라는 힘을 가지고 나서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고 설명해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 '밀짚모자'... 아무런 반응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데 7절 말씀 이후 그의 마음속에 무언가 변화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생각이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질 때, 거기서 무언가 터져 나와서 바뀌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향한 두 번째 말씀을 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일어나'라는 말씀은 '에게이로-' έγείρω의 명령형이다. 이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부활용어', '다시 살아나다'라는 뜻이다.

 

"일어나 일어나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 새롭게 창조하는 용기를 가지라는 당부인 것 같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일어난'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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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말씀도 기억해 본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항상 새로운 것이 우리 안에 창조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사실을 믿고, 내 삶에 새로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라는 주님의 말씀을 내 마음을 향해 반복, 반복해서 들려주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어로 '--'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건'으로도 번역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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