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수난

- 요한복음 18:1-11 -

샬롬선교회 


[요한복음 18:3-9] "3. 유다가 군인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관원들을 이끌고,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곳에 이르렀더니, 4. "5.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다 εγώ εμι"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배반하려던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뒤로 물러서서 땅에 엎드렸다.7. 예수께서 다시 한 번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습니다"라고 대답했다.8.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바로 나라고 너희에게 말했지 않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을 그대로 두어라."라고 대답했다. 9. 이는 예수께서 '당신이 내게 주신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잃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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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예수 수난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명상을 위한 사전지식 - '예수 수난에 대한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의 관점 차이' 참조.

 

1. 요한복음이 그리는 예수님의 수난

 

+ 이번 사순절 마지막 묵상은 요한복음 18:1-11절입니다.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는 없는 요한복음만의 고유한 구절로, 요한복음의 '예수의 수난'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 이 구절에서 그 특징 몇 가지를 열거해 보고자 합니다.

(1) 공관복음서에서는 '겟세마네의 기도'가 장엄한 영적 전투로 묘사되지만, 요한복음에는 그것이 없고, 18:1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동산으로 들어가신 것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계셨다"(18:4)고 했기 때문입니다.

 

(2) 체포의 순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 스스로 "누구를 찾느냐"고 역으로 묻고 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 예수님의 적이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를"이라고.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나다'(에고- 에이미-)-新改訳'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입니다. 이 말씀으로 "병사들이 뒤로 물러서서 땅에 엎드렸다"(18:6)고 합니다. 예수의 위압적인 힘에 맞서 예수를 잡으려는 자들이 오히려 겁에 질려 땅에 엎드러진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빛을 발하는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 요한복음 18:1-11에 나오는 세 번의 '나는 나다' 에고- 에이미-라는 말 속에 지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에고- 에이미-' 선언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고- 에이미-'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주신 신비한 이름, 즉 출애굽기 3:14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하신 이름을 예수님이 자신에게 돌려주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나는 생명의 떡이다"(6:48) ἐγώ εμι ὁ ἄρτος τς ζως.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ἐγώ εμι τφς τοκόσμου

"나는 문이다"(10:9) ἐγώ εμι θύρα

"나는 선한 목자다"(10:11) ἐγώ εμι ποιμν καλός.

"나는 부활이다. 생명입니다"(11:25) ἐγώ ε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ἐγώ εμι ἡ ὁδ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 '에고- 에이미-' ἐγώ εμι라는 헬라어 현재형은 예수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기 선언입니다. 이 선언 속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언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다'라는 말씀에 병사들이 뒤로 물러서서 땅에 엎드린 것은 요한복음의 특징으로서 매우 상징적입니다.

 

(3)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예수님의 모습이 요한복음 전체에 흐르고 있는데, 요한복음 10:17-18에는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공관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수동태로서의 예수님의 수난이 아닌 능동적인 예수님의 수난을 볼 수 있습니다.

 

(4) 또한 요한이 그리는 예수님은 단 한 명의 제자도 잃지 않으려는 '선한 목자'로서의 모습입니다. 여기서도 제자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제자들을 지키려고 합니다.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18:8)라고 말씀하시며 당당하게 제자들을 보호하려 하십니다. 요한은 이 예수님의 행동을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8:9)"라고 했습니다.

 

+ 10:27-29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러한 예수님의 보호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높이 들림을 받아 아버지 우편에 앉으신 후에야 본격적으로 실현됩니다.

 

2.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 시몬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자른 사건은 공관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그 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일률적이지 않습니다.

(1) 마태복음의 경우(26:52-54) 

베드로에게 "칼을 내려놓으라. 칼을 잡는 자는 다 칼로 망하리라. 아니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12사단보다 더 큰 사자를 지금 내 밑에 두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그렇게 하면 성경에 이렇게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2) 마가의 경우(14:48-49)

군중을 향해 "마치 강도라도 잡으러 가는 것처럼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내가 날마다 궁전에서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가르쳤는데도 너희는 나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이다."

 

(3) 누가복음의 경우(22:51-53)

베드로에게 "그만하라. 그때까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고쳐 주셨다.

대제사장, 궁정수비대장, 장로들에게 "마치 강도라도 잡으러 가는 것처럼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느냐? 너희는 내가 매일 궁궐에서 함께 있는 동안에는 내게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의 때다. 어둠의 세력이다.“

 

(4) 요한의 경우(18:11)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라고 말했습니다.

 

+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공관복음서의 경우 "이렇게 된 것은 성경이 이루어지기 위함이다" 혹은 "지금은 너희 때라 흑암의 권세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실 것, 그것도 성경이 예언해 온 일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경우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번역을 살펴보면, 新共同訳'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新改訳에서는 '반드시 마셔야 한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잔은 마시지 않고는 끝낼 수 없는 것으로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고난을 짊어지시는 예수님의 수난이 공관복음서에서는 '지상적 현실의 관점'에서 기록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천상적 현실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시편 2편에서 볼 수 있는 구도입니다. 시편 2편에서는 이 두 가지,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라는 지상의 현실과,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라는 천적 현실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수난을 그리는 방식은 수난이 항상 영광을 위한 통과점일 뿐이라고 보는 방식입니다. 비록 수난 중에도 예수는 '천적 현실의 관점'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장 이후의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담담하고 당당합니다. 배신당할 때도, 재판을 받을 때도,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예수님은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참고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19:30)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신뢰는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 요한이 주장하는 영광,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도 아버지 안에 있다'는 증거가 드러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영광은 십자가 죽음의 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승천과 좌정, 그리고 거기서 보내시는 약속의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이라는 실체가 분명하게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는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영광'이라고 믿습니다.

 

+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인 '영원한 생명'을 제대로 받고 있는지 여부가 문제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생명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증인(순교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아들 예수를 믿는 자들 안에 풍성하게 살아 숨 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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