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 요한복음 15:12-17 -

샬롬선교회 


[요한복음 15:12-17]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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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머리와 꼬리 부분인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사이에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는 말씀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는 선언이 샌드위치처럼 끼워진 형태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사랑이 이 계명의 토대가 되는데, 예수님이 사랑하신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그것을 여기서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너희를 택하여'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거하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될 것이라 믿는다.

 

1.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다. - [주님과의 우정]

 

요한복음 15:12-15'친구'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온다. '친구'로 번역된 헬라어는 '필로스' φίλος(복수형은 '필로우스' φίλους)이다. 보통은 동료나 친구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예수님이 이 '필로스'''과 대비시키면서 이 단어를 정의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나는 더 이상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렸기 때문이다."(15)라고 말씀하셨다.

 

'''친구'의 차이는 분명하다. ''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알게 된다는 차이이다. ''은 주인을 위해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Doing이 강조되는 반면, '친구'는 상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관계, 즉 친밀한 관계의 존재 Being이 강조된다.

'주님과의 우정' - 이것은 요한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사상이다. '친구'라는 단어는 일상생활에서는 아주 평범한 단어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친구'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알려주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왜 아버지께 들은 것, 즉 하나님의 비밀을 포함한 모든 것을 알렸느냐 하면, 너희가 내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친구로서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자라고 하신다. 그 징표로 친구의 특권으로 하나님의 품 -secret place-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된 것이다. 그런 '주님과의 우정'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소망은 더 넓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더 깊어지고, 기쁨과 평안과 확신은 우리를 풍성하게 할 것이라 믿는다. 그 결과, 우리의 기도 생활은 본질적으로 달라진다. 자유를 느끼게 된다. 더 나아가 단호한 자세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될 것이다.

 

하루하루를 '예수님과 함께' 보내면서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형성하게 한다. 주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신다. 그 관계의 원천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우정이란 모든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자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인격을 가졌으면서도 결코 상대를 지배하지 않고,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자발적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우정'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이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2. 내가 너희를 택했다 - [주님의 선택받은 사랑].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선택'으로도 표현된다. 여기서 '선택'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선택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선택의 사랑'에서 볼 수 있다. '~이기 때문에 선택받았다'는 가치적 이유를 근거로 선택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택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곳에서 선택받은 것이다. , 주님의 '선택'이라는 행위는 '사랑'에 가까운 것이다. 선택하는 자의 일방적인 사랑에 의한 선택이다.

 

구약에서 '사랑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하브 אָהַב('ahav)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참고로 '언약의 사랑'은 헤세드 חֶסֶד(chesed)로 상호 사랑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선택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최고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접붙여진 이방인인 우리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이 원하셔서 그렇게 하셨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공없는 사랑' 때문이다.

 

-하브 אָהַב('ahav)는 본래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인데, 그것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실 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אָהַב)"고 요구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하브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 '사랑받고, 사랑한다', '선택받고, 선택한다'는 신앙의 주체적, 자립적 존재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발성을 수반하는 '계명'인 것이다.

 

'언약의 사랑'은 결혼의 사랑에 해당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합의 하에 결혼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것은 서로에게 책임과 성실함이 요구되는 관계이다. 만약 한 쪽이 계약에서 페널티를 범하면 파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에는 그것과는 다른 또 다른 차원의 관계가 존재한다. 바로 '선택의 사랑'이다. 이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변함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인 아-하브 אָהַב('ahav)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세우셨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하셨다. 만약 이 '선택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애정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레미야가 예언한 영원한 사랑으로 맺어진 '새 언약'(31:3) 안에 있음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다.

 

3. 예수님의 '사랑'은 일방통행이다.

 

요한복음 15장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동사는 '아가파오-' άγαπαω5(9, 9, 9, 12, 12, 17), 명사는 '아가페-' άγαπη4(9,10,10,10,13)이다. 참고로 요한복음 13-17장까지는 동사는 30, 명사는 6회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은 '아가페-', 혹은 '아가파오-'이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에로스적 사랑도 아니고, '주고받는'(give and take)으로서의 '필레오'의 사랑도 아닌, 각자 상대에 대해 '선택의 사랑'처럼 '일방통행'의 사랑으로 사랑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서로 사랑하는 것''상호간의 사랑'으로 오해할 때, 교회에서 대인관계의 얽힘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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