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보혜사

- 요한복음 14:12-24 -

샬롬선교회 


[요한복음 14:12, 16]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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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성부와 성자만큼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령에게는 성부와 성자처럼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경우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있다는 이미지가 있다.

 

예를 들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요"(요한복음 14:9),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한복음 10:38),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 14:10, 11)와 같은 표현이 그렇다. 그 너무도 친밀한 사랑의 관계 속에 어느 누구도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성령, 아들과 성령에게는 그런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이미지가 없다. 그러나 아들은 성령으로 성육신하시고,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성령으로 마음을 움직이시고, 성령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말씀하시고, 성령으로 아버지의 일을 행하신다(요한복음 3:34). 이처럼 '성령'은 성부와 성자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은 중요한 삼위일체 인격체이다.

 

우리를 성자에게로 향하게 하고, 또 성부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은 성령이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 가장 먼저 역사하시는 분이지만, 삼위일체 중 가장 마지막에 계시된 분이다. 성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혜사'(파라클레-토스)로 소개하셨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하나님의 선물'이자 '생수'라고도 말씀하셨다(4:10).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가 주시는 것으로도, 아들이 주시는 것으로도 표현된다.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의 관계는 참으로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 직관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말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 두 분만의 관계는 말로 설명할 수 있지만, 세 분을 동시에 설명하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요한복음 이해의 가장 큰 난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상고할 본문은 요한복음 13-17장 가운데서도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 이 부분을 알면 전체를 조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4:16-24은 아들이 아버지께 간구함으로써 아버지가 주시는 '또 다른 보혜사'를 통해 '아버지가 아들에게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께 계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고, 아들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아들에게 있는' 관계의 신비를 알 수 있다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사랑'(아가페)이다. 그리고 이 '사랑'의 관계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산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보혜사'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아들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위의 말씀이 실현될 때 비로소 요한복음 14:12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행할 것이요,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행하리라.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겠음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큰 일'은 눈에 보이는 자연계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큰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보혜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1. '보혜사(: 돕는 자, 구원자)'이신 성령

 

이번에 상고하는 구절은 요한복음 14:12-24이다. 처음으로 계시되는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성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또 다른 보혜사'라는 표현은 이미 성자 자신이 '보혜사(돕는 자, 구원자)'라는 뜻이다. 여기서 '돕는,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모든 필요한 '도움, 구원'을 의미한다.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 '보혜사'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이다. '곁에,라는 뜻의 '파라' παρα'부르다'라는 뜻의 동사 '칼레오-' καλέω로 만들어진 '바라클레오- 'παρακέω의 중성명사가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이며, 요한복음 14:16/15:26/16:7에 나온다.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단죄하려는 자에 대해 죄인 편에 서서 우리를 변호하시는 분으로서의 '보혜사'이지만, 성령은 우리 곁으로 부름을 받아 오신 분, 우리의 모든 도움을 위해 항상 곁에 계시는 분으로서의 '보혜사'이시다. 우리의 든든한 동역자로서 위로를 주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다. 신개역(新改訳) 성경의 각주에는 '도움을 위해 곁에 부름 받은 자, 도와주시는 분'이라고 적혀 있다. 이 분의 도움이 없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변함없는 사랑에 참여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아들이 아버지께 부탁하여 보내주신 분이 바로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시다.

 

이 둘도 없는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해 요한복음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주목하고자 한다.

(1) 14:16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다" - '함께'(메타 μετα, '동안에'라고도 번역됨)

(2) 14:17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너희 가운데 계시리라" - "함께"(파라 παρα, "옆에, 곁에, 가까이에"라고도 번역됨)

- '우리 안에'(έν)

 

'보혜사'이신 분은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곁에, 안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관계를 맺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버림받거나 고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성령께서 "내가 아버지께 있고 아버지가 내게 있는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14:20)라는 말씀이 가능케 하시고, 그 친밀한 사랑의 관계 안에 살게 하신다.

 

'알다'로 번역된 단어는 '알다'라는 동사 '기노-스코-' γιvωσκω이다.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기노-스코-' γιvωσκω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으로 알고, 느끼고, 믿을 수 있다는 의미로 '믿다'라는 '피스테노-' 'πιστεvω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쪽의 지각이지만, 이를 하나님 쪽에서 표현하면 14:21"내 계명을 지키고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 내가 나를 나타내리라"고 되어 있는 것같이. '나타나게 한다'는 뜻이다. '나타내다''엔파니조-' έμφανίζω, '분명하게, 눈에 보이게 나타내다'라는 뜻이다. 여기에 '보혜사'의 활동이 있다. , 하나님 편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의 놀라움을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셔서 우리가 이해하고, 느끼고,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로서 성령의 도우심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분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항상 민감하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2. 가롯인이 아닌 유다의 소박한 물음

 

요한복음 14:22에 나오는 가롯인이 아닌 유다의 질문의 의도와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가롯인이 아닌 유다의 질문은 매우 소박하다. 그 전에 말씀하신 예수의 마지막 말씀인 '나 자신을 그에게 나타내 보이겠다'에 대한 질문이다. 유다는 '제자들에게 그런 놀라운 일을 보여주실 거면, 세상에도 그대로 보여주셨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 사람의 집에 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느니라". , 후반부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라는 것은 '내 아버지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는 그 사람에게 와서 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세상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답하고 있는 것이다.

 

성자 예수님은 이미 13:35에서 이 점에 대해 말씀하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 ,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사랑이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있는지, 그 증거가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주제는 17장의 아버지께 드리는 성자의 기도에서도 기도하고 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한복음 17:23)

 

하나님은 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를 경험하고, 믿는 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분임을 세상에 분명하게 드러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와 그 메시지의 원천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가르치신 고별설교의 요점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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