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
16세기에 들어 로마 가톨릭이 신봉되던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여러 개신교들이 세워지는 종교 개혁이 있었다.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여 새로운 기독교를 세운 이유는 각 지역과 교회마다 달랐지만, 로마 가톨릭이 부정 부패에 대한 비판을 탄압하여 자정 능력을 상실하였고, 로마 교황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각 국 군주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주해 6]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사 신부였다.[75] 평소 그는 다섯 솔라에 의지하여 오직 성경과 믿음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76]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 수사들을 유럽 전역에 보냈는데, 이들은 기금의 대가로 면죄부를 발부하였다. 사실상 준조세였던 건축 기금에 대해 유럽의 군주들은 불쾌해 하고 있었고, 국왕의 통치력이 강하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면죄부 발부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탁발 수사들의 활동은 주로 독일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77]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지역에서도 면죄부 발급에 따른 부작용이 심해지자 작센 공국의 프리드리히는 자국에서 면죄부 발부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장사꾼 기질이 있었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탁발 수사 테첼은 작센의 국경인 비텐베르크에서 “동전통이 딸랑 거리는 순간 당신의 영혼은 천국으로 직행한다”며 면죄부를 팔았고[78], 주민들은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 교수였던 루터에게 면죄부의 가치를 검증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였고, 이후 종교 개혁 운동을 하게 되었다.[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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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년 6월 15일 레오 10세는 교황 칙서 《주님, 일어나소서 (Exsurge Domine)》를 통해 루터의 주장을 41개 항목으로 조목조목 반박하였다.[80] 또한 신학자 요한 에크를 교황 대사로 임명하여 이 회칙을 독일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1521년 1월 3일 레오 10세는 칙서 《로마 교황의 선언 (Decet Romanum Pontificem)》을 뒤이어 반포하여 루터를 공식적으로 파문하였다.[81] 아울러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황제에게 이단에 대해서 강력하게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하였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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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을 당한 마르틴 루터는 목숨을 위협받았지만, 당시 이미 정치, 경제적으로 로마 교황청에 불만이 가득했던 독일의 선제후들은 루터를 보호하였다.[82][주해 7] 특히, 작센 선제후인 프리드리히(Friedrich)는 그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비밀리에 루터를 납치하여 아이제나흐(바흐의 고향이기도 함)의 바르트부르크성(Wartburg Castle) 에 안전하게 머물도록 조치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융커 외르크'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숨기고 1521년부터 2년 동안 저술에 정진하여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일반신도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하여 발간하므로써, 신도들이 성서를 통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서도 신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되었고, 지금 만연한 면죄부 매매는 결국 성직자들과 교황청의 부패와 위선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80여년전인 1440년 독일 중부 마인쯔에서 구텐베르그가 개발한 금속활자가 그 동안 필사에 의존하던 성경책을 저가로 대량보급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새로운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되었다.
한편, 봉건제 아래에 피지배 계급인 독일의 농민들은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을 억압에 대한 '정당한 저항' 이라는 이념적 기반으로 여겼고, 토마스 뮌처와 같은 신학자들은 독일 농민 전쟁에 앞장 섰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주장이 현재 카톨릭 성직자들과 교황청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함이지 폭력혁명을 통한 기존교회의 전복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농민 전쟁에 반대하였고, 오히려 영주들에게 농민들을 진압하라고 요구하였다.[83]
루터의 이러한 행적은 자신의 주장이 당시 카톨릭과 교황청의 모순을 개선하려 하였던 성직자로서 활동이지, 새로운 종파를 만들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루터 사후에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들은 루터교 라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티즘 종교의 탄생을 알리게 되었다.[84]
츠빙글리
츠빙글리의 스위스 종교개혁은 1519년 1월 1일로 시작된다. 울리히 츠빙글리는 성경에 기초하며,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the inspired word of God)으로 받아들인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믿는자들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가르침을(taught by God through the Spirit) 받을때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85] 에큐메니칼 회의나 교부들과 같은 인간의 문헌들(Sources)보다도 성경의 배타적인 권위를 높게 두고 있다.[86] 츠빙글리는 정경인 복음서들(canonical gospels) 안에는 차이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영감론과 함께 인간적 요소가 있음 인정하였다. 츠빙글리주의(Zwinglianism)는 그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와 함께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 그리고 레오 쥬드(Leo Jud)가 1536년에 작성한 제 1 헬베틱 신앙고백서(the First Helvetic Confession)에서 가장 권위있는 형태로 서술되었다.[87] 1549년 장 칼뱅이 참여하여 작성한 제 2 헬베틱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에 근거한 개혁주의 신학이 형성되었다. 후에 2 두개의 신앙고백서에 관계된 츠빙글리파는 개혁신학의 전통과 함께 칼뱅주의 정통신학으로 속하게 되었다.[88]
장 칼뱅9C
프랑스 피카르디 출신의 신학자이자 라틴어 교사였던 장 칼뱅은 1533년 새로운 방식의 신앙체계를 확립하고 사실상 로마 가톨릭 신도이기를 포기했다.[89] 1536년 3월 칼뱅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90] 칼뱅은 이 책에서 이중예정설과 같은 칼뱅주의 신학을 정리하였다.
1536년 5월 무렵 제네바를 들렸던 칼뱅은 파렐의 권유로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였으며, 이내 목사가 되었다.[91]
칼뱅이 제네바에서 활동을 시작한 1530년대 말 무렵, 서유럽과 북유럽에는 이미 루터가 불씨를 당긴 종교 개혁이 한창인 시기였다. 제네바 역시 다양한 새로운 신학 사조가 들어왔고 칼뱅은 이들과 논전을 벌여야 하였다. 칼뱅은 재세례파 등과 논전을 벌이면서 제네바 교회를 칼뱅주의를 따르는 개혁 교회로 이끌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는 베른에서 행해지는 보다 다양한 교회를 인정하는 조례를 재정하였고, 이에 반대하던 칼뱅은 1538년 추방당하였다.[92]
1541년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의 교회 제도 개혁안을 모두 수용한다는 조건으로 칼뱅을 다시 초빙하였다.[93] 이후 칼뱅은 죽을 때까지 제네바 개혁 교회의 목사이자 칼뱅주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1541년 이후 칼뱅이 활동한 시기 제네바는 일종의 신정일치 사회였고, 교회법을 어긴 자는 처벌을 받았다. 삼위일체를 부정하여 화형을 당하거나, 간음죄를 이유로 사형을 받은 이도 있었다.[94] 《삼위일체론의 오류:De Trinitatis erroribus libri vii》를 출간한 스페인 출신의 인문학자 미카엘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한 것은 신학적 차이를 토론을 통해 논파하지 않고 법률로서 처단하였단 점에서 칼뱅의 오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먼 훗날인 1903년 세르베투스가 처형 당한 자리에 칼뱅주의 신학자들은 속죄비를 세웠다.[95]
칼뱅주의는 루터교와 함께 종교 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 공동체나 교파로는 위그노, 청교도, 장로교 등이 있다.
잉글랜드의 수장령
1534년,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8세는 수장령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선포하였다.[96] 헨리 8세의 수장령은 같은 해 잉글랜드 교회 내의 주교에 대한 임명권이 국왕에게 있다고 선포한 주교서임법과 함께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을 공식화 한 것이었다.[97]
헨리 8세의 수장령은 잉글랜드 왕국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헨리 8세는 형수가 되어야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아내가 된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때문에 이혼을 원했고, 교황청과 오랫동안 이에 대해 협상을 벌였다.[98] 골육상잔이었던 장미 전쟁 끝에 세워진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던 헨리 8세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아들을 원했고, 로마 가톨릭은 원칙적으로 이혼을 금했기에 당시의 파혼 관례대로 로마 교황청에 결혼 무효화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은 스페인의 국왕이기도 하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혼 불가를 결정하고 만다.[99] 이에 격분한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을 결심하게 된다.
수장령 이후 잉글랜드 왕국과 그 뒤를 이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성공회를 국교로 삼았고, 국교도가 아닌 사람은 공직에 진출할 수 없도록 차별하였다. 페널 법이라 불린 이 차별 제도는 1661년 협력법이 통과된 이후 영국 내의 로마 가톨릭과 청교도를 비롯한 기타 개신교 교파를 억압하는 바탕이 되었다.[100]
한편, 평소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인문학자 토머스 모어는 “나는 국왕의 충신이지만 그 전에 하느님의 종”이라며 헨리 8세의 수장령에 반대하여[101] 대법관 직을 사퇴하였고, 결국 처형되었다.[102]
기독교의 역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