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재시도
- 누가복음 4:1-13 -
샬롬선교회
'광야의 시험'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구절이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상고한다.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읽으면 그뿐이다. 하지만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읽으려고 노력하면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이 구절(누가복음 4:1-13)은 공관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마가복음 1:12)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으신 것이다.
+ 여기서 세 가지 질문을 한다. 물음은 묵상에서 중요한 행위이다.
(1) 첫 번째 질문
도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 예수를 광야에서 시험한 것인가? 이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이 구절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열쇠이다.
(2) 두 번째 질문
마태도 마가도 예수님의 세례 후 바로 '광야의 시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누가는 왜 그 사이에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수님의 계보를 삽입했을까? 이 부분도 매우 중요하다.
(3) 세 번째 질문
왜 예수님의 행동이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는가? 그것은 원어(헬라어)의 문제이다.
+ 아래 (1)-(3)은 위의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간결하게 제시한 것이다.
(1)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 아들을 시험하셨다. 마귀는 이 때를 틈타 아들을 유혹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그 유혹을 허용하는 형태로 아들을 시험하셨다.
(2) 아들 예수는 아담이 저지른 실패를 다시 한 번 '재연'함으로써 제2의 아담으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구세주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3)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자신을 비워 섬기는 자의 모습을 취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완전한 인간으로서 아버지께 순종의 길을 걸으심으로써 완전한 속죄(대속)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번역어의 문제 - '시험'과 '유혹'
'시험'과 '유혹'은 명사, 동사도 각각 원어에서는 똑같은 말이다. 영어로는 test, temptation이다. 헬라어 동사는 '페이라조-' πειραζω(누가복음 4:2/11:16), 명사는 '페이라스모스' πειρασμος(누가복음 4:13/8:13/11:4/22:28/22:40/22:46)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연단하기 위해 훈련시킬 때는 '시험'이라고 번역하면 이해가 잘 된다. 또한 마귀가 사람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 때,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할 때는 '유혹'이라고 번역하면 명확해진다. 하나님은 사람을 유혹하지 않으시고, 마귀가 이 사람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시련을 주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체로 쳐서 떨어뜨리기 위함이다. <욥기 2:4~5, 누가복음 22:31 참조.>
마귀의 유혹이 전제되었을 때는 '유혹', 하나님(아버지)의 훈련 목적이 전제되었을 때는 '시험'으로 이해하면 명확해진다. 따라서 사탄을 '시험하는 자'로 번역하는 것보다 '유혹하는 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쉽다. 이 점에서 新共同訳、塚本訳은 이를 명확히 하고 있지만, 다른 번역은 '유혹'을 '시험'으로 번역하고 있다. 오직 柳生訳만 마태복음에서는 '시험'으로, 마가복음에서는 '유혹이라는 시련'으로, 누가복음에서는 '유혹'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번역의 혼선을 볼 수 있다. 데지마 이쿠로(手島郁郎) 목사는 이 구절을 '광야의 유혹'으로 번역하고 있다.
제 개인적으로는 번역어로는 新共同訳、塚本訳역의 '유혹'이 깔끔하고, 의미로는 柳生訳의 (마가복음의 경우) '유혹이라는 시련'이 더 명확한 것 같다. 실로 번역이라는 것은 정말 힘든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주기도문' 중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라는 부분을 新共同訳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로 번역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겟세마네 장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시험에 들지 말고 기도하라"(누가복음 22:40, 46)는 모든 성경이 '유혹'(temptation)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번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페이라스모스' πιρασμος와 마귀로부터 오는 '페이라스모스' πιρασμος의 번역어를 명확히 함으로써 이해는 더욱 입체적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2. 첫 아담의 실패를 재시도
누가만이 예수의 세례와 광야의 시련 사건 사이에 예수의 계보를 삽입한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계보는 인류의 시작인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태복음의 계보는 아브라함에서 멈춘다. 그것은 유대인의 조상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경우 예수님의 세례는 이스라엘 백성과의 일체화이고, 예수님의 광야 시험은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방황 경험의 재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경우 예수님의 세례는 인간(인류)과의 일체화이고, 광야의 시험은 아담의 실패를 재시도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를 두어 예수님의 광야의 시도가 제2의 아담으로서 아담의 실패를 재시도하는 사건이었음을 암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아담은 단 하나의 명령도 따르지 못했다. 뱀으로 변신한 마귀의 유혹에 너무나 쉽게 굴복한 것이다. 그 결과 죄가 들어왔고, 사망이 온 인류에게 퍼져나갔다(로마서 5:12). 거기서 구출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생명을 가져오는 것이 그 사명이었다. 만약 여기서 아들이 실패한다면 전 인류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는데, 세례는 그 공적인 사역에 들어가기 위한 취임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실제 사역을 위해, 아들이 그 사역에 합당한 자로 준비되기 위해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으셔야 했다. 그 시험 속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의 빛에 계속 비춰지고,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계속 머물면서 신뢰의 끈을 놓지 않아야 했다. 온 인류를 위한 속죄, 즉 '대속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온갖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그 증거로 누가복음 4:13에는 마귀가 "유혹의 손길을 다 쓴 후에 잠시 동안 예수에게서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마귀는 세 가지 유혹뿐 아니라 모든 유혹을 다한 후에 잠시 예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28:16)라고 말씀하셨다. '시련을 겪은 돌'에 대해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라고 말한다. '시험을 만나셨다'는 말은 '고난을 만나셨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브리서 2:10)라고 말한다.
3. '시험이라는 시련을 받으셨다'는 수동태의 의미
40일 동안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하신 주체는 하나님(아버지)이시다. 성령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수동적인 행동이다. 그리스어 본문이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누가복음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 Ἰησοῦς δὲ πλήρης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ὑπέστρεψεν ἀπὸ τοῦ Ἰορδάνου καὶ ἤγετο ἐν τῷ πνεύματι ἐν τῇ ἐρήμῳ
1절 후반의 '이끌리시며'로 번역된 헬라어 ἤγετο는 동사 '아고' αγω의 미완료 과거+수동태이다. 미완료형은 행위의 지속, 혹은 습관적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예수님이 항상 성령의 '이끌리심을 계속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4:1의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라는 부분을 다른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新共同訳 '이끌려(갔다)' / 岩波訳 '이끌려 갔다' / 柳生訳 '쫓겨서(광야로) 가셨다' / バルバロ訳 '이끌려 갔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완전히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시종일관 섬기는 자의 모습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생각으로 행동하거나 말씀하신 적이 없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부르심이었으며, 아버지의 음성을 대변하셨을 뿐이다.
참고로 마태복음 4:1에서 新改訳은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려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올라가셨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야마기시 노부(山岸登) 목사는 '마태복음 주석'에서 이 新改訳의 번역은 완전히 오역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아고-' αγω의 유사어인 '아나고-' αναγω의 부정과거(아오리스트)+수동태가 사용되고 있으며(참고로 마태복음에서는 여기 한 번만), 성령에 의해 '이끌리어 가셨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라갔다'라고 번역하면 동사는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가 되기 때문이다. 사탄의 시험을 받는 것도 자신의 의지라는 뜻이 된다. 다만 여기서는 부정 과거 수동태로 예수님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으로 아들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4. 마귀의 유혹의 의도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저는 '헨리 나우웬'이 그의 저서 '예수의 이름으로'(あめんどう社)에 기록한 내용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예수의 광야에서의 시험에 대한 훌륭한 상고를 알 수 있다.
+ 다음은 '나우웬'의 요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아들 예수는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인도되었다. 그 인도는 아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아들이 공생애 동안 어디까지 아버지를 신뢰하며 시련을 견뎌낼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시험의 내용은 세 가지다.
(1) 첫 번째 시험: 자신의 생존의 보장을 어디에 둘 것인가(빵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사람이 죄를 범한 이후 사람은 스스로 밭을 갈고 수고하여 빵을 얻어야만 했다. 빵은 생존을 보장하는 필수품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절실하다. 인간은 이 빵을 얻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움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빵 외에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들려주는 말씀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살아날 수 있다. 빵을 구하기 위해 허덕이는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탱되고 살아나는 삶으로 거듭날 수 있느냐는 오로지 예수의 삶의 방식에 달려 있었다. 예수님은 그러한 유혹에 대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하나하나로 산다"는 것을 그 생애를 통해 실천하셨다. 또한 제자들에게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2) 두 번째 시험: 사람을 지배할 것인가, 아니면 종으로 섬길 것인가?
예수님이 받으신 두 번째 유혹은 "내가 이 세상 나라와 그 영광을 다 네게 주리라"는 사람을 지배하는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이다. 구약의 하나님 백성의 역사, 혹은 기독교 교회의 역사는 사랑보다 권력, 십자가보다 지배, 인도받는 자보다 인도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 유혹에 노출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독교의 리더십은 권력과 지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겸손의 리더십이다. 사랑을 위해 권위를 포기할 수 있는 리더십이다. 또한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을 만큼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과 함께 있어 어디서든 생명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분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의 본체를 버릴 수 없다고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느니라."(빌립보서 2:6~8)
(3) 세 번째 시험: 사람의 칭찬인가, 하나님의 칭찬인가?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 천사의 품에 안기는 모습을 보여 주라"는 유혹은 바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큰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해보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욕망은 어느 시대에나 강하다. 특히 경쟁사회에서 이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사람들의 환심을 자신에게 돌리고 싶은 마음이 자신을 속이고 성과지향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예수님은 이런 유혹을 물리치고 철저하게 사람을 섬기는 길을 택하셨다.
+ 부록으로 이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범에 대해 「설교자와 QT 리더를 위한 '리빙라이프+PLUS'(두란노(Duranno)재팬, 2008.1)」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간결하고 훌륭한 지침이다.
(1) 아버지가 주시는 진실한 것만을 신뢰한다.
'돌이 떡이 되게 해달라'는 마귀의 유혹은 긴박한 필요를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유혹이다. 예수님은 육체적 필요만으로 살지 않겠다며 이를 물리치시고,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표현하신다.
(2) 아버지의 참된 통치만을 경배한다
사탄은 세상 모든 나라를 보여준 후 "내가 네게 주리라"고 유혹하며, 아버지 하나님만을 경배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을 선택하시고 승리하신다.
(3) 아버지의 진실한 보호하심만을 의지하다
사탄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한다. 예배의 장소라는 성전의 본래 목적을 망각하게 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장소로 오용하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신명기 6:16)라는 말씀으로 승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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