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냐, 십자가냐?

    

 갈라디아서6장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직접 쓴 것 같다. 로마서 같은 서신은 더디오가 대서(代書)하였다(16:22). 바울이 본 서신을 친히 쓸 때 큰 글자로 쓴 것은 아마 그의 눈이 나빠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갈라디아교회 안에는 율법주의를 가르치는 교사들뿐 아니라, 단지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할례를 받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에 대한 어떤 신념 때문에가 아니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었다. 그들은 핍박을 피하려고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진리를 저버렸던 것이다.

 

[13]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언약의 내용인 율법을 지키겠다는 서약과 같다. 그러나 할례를 이미 받았고 또 믿는 자들에게 할례를 강조하는 그들도 실상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육체로 자랑하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에게는 할례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는 할례받은 육체가 아무런 자랑거리가 되지 않았다. 사실상, 그의 자랑거리는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그가 복음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세상의 것들이 그에게 크게 생각되었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었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는 빌립보서에서도 증거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3:7-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그토록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자랑거리인가? 그것은 대속(代贖)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대속(代贖)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죗값과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해 주신 일이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악된 세상과 함께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 속했던 과거의 우리는 구주의 대속 사역으로 끝났고 새로운 우리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구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셨기 때문에, 과거의 우리, 곧 죄악되었던 우리는 그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과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외에 세상의 그 무엇도 이제는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

 

[1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아무 유익이 없으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자뿐임이니라].

 

본문은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이유를 보인다. 우리에게 할례는 아무 효력이나 유익이 없다. 할례는 율법 준수의 의무를 보인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줄 뿐이며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고 무할례가 유익하다는 뜻도 아니다. 이방인들의 할례 없음은 그들이 본래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으며 소망 없는 자들이며 하나님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다. 새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새 자아(自我)를 가리킨다(고후 5:17). 그것은 새 생명을 얻은 자요 새 성향을 받은 자이다. 구원받은 영혼의 새 성향은 지식과 의와 거룩만을 향한 성향이며 범죄치 아니하며 범죄할 수도 없는 성향이다. 성도의 거룩하고 의로운 삶은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주신 구원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효력이 있고 유익이 있다. 그 외엔 아무것도 의미도, 가치도, 효력도, 유익도 없다. 그리스도 밖의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정죄된 자요 허무한 자이며 영원한 멸망 곧 영원한 지옥 불못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이다.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규례라는 원어(카논)규칙라는 뜻이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라는 말은 이 규칙을 따라 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 규칙은 은혜의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고 본다.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안에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은혜가 있고 그것이 구원이라는 진리이다. 그것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이 규칙을 따라 행하는 자는 복음 신앙을 가진 성도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 듯하다. 신약 성도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다.

 

[17-18]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이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가졌음이니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한 것은 그의 사도직과 권위를 부정하고 그의 전한 복음을 대항하고 이탈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런 도전 때문에 이 편지를 쓰게 되었다. 바울을 괴롭게 말아야 할 이유는 그가 그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흔적이란 채찍 자국같이 예수님과 그의 복음 때문에 그가 받은 고난의 흔적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사역자이었다. 고난의 흔적을 가진 자는 참된 종일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율법주의로 돌아가지 말자.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던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복음의 왜곡일 뿐 아니라 그 복음의 부정(否定)이다. 그것은 다른 복음으로 제시되었지만, 그것은 실상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외에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의 길이 없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자. 세상의 것들은 다 허무하다. 또 그것들은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주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찬송의 제목이어야 하며 우리의 감사의 내용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핍박을 겁내지 말고 각오하자. 고난과 핍박을 겁내는 교인들은 복음 신앙을 버리고 넓은 길로 가겠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가신 그 길, 사도들과 초대 성도들이 간 그 고난의 길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하며 담대히 걷자.

 

 http://www.oldfaith.net/01exposit/02nt/2-09갈라디아서.htm#6장: 자유자의 삶--선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