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5장

[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의 대선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곧 율법의 정죄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은 로마서에서도 증거된 진리이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주 예수께서도 진리[하나님의 복음]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8:32). 죄로부터의 자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핵심이다. 이것이 의()요 구원이요 생명이다. 이 의, 이 구원, 이 생명을 받은 자는 율법과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와 오늘 우리에게도 복음의 은혜와 자유 안에 굳게 서고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교훈한다. 종의 멍에란 율법의 종으로서 짊어졌던 멍에를 가리킨다. 구약시대 곧 율법 제도 아래 있는 자들은 율법의 공포, 율법의 정죄, 율법의 형벌이라는 무거운 멍에 아래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그 멍에를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 복음의 자유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율법의 멍에 아래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2-4]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라디아교회는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할 것인가,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려 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갈래 길에 서서 혼란스러워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지 말고, 오직 복음 안에 거하며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행하라고 교훈한다.

 

율법 안에서라는 원어(엔 노모)율법으로라는 뜻이다. 할례를 받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는 같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할례 자체가 나쁜 것이어서가 아니라, 할례가 옛 언약의 표이기 때문이다. 옛 언약은 율법을 통해 맺어졌다. 율법의 요구 조건은 하나님의 모든 법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영원한 저주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 아래 속하여 율법을 다 지키겠다는 결심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가 될 것이다.

 

[5-6] [이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기다림이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믿음뿐임이니라].

 

본문은 신약 성도들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라는 말은 육체로라는 말과 대조되고, 믿음을 좇아라는 말은 행위를 따라라는 말과 대조된다. ‘의의 소망이라는 말은 의에 근거한 소망이라는 뜻이다. 죄는 죽음과 지옥 형벌을 가져왔지만, 의는 영생과 천국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이 의의 소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사심으로 우리에게 의가 되셨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도 무할례도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기 때문에 참된 믿음은 결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고,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는 믿음이다. 참된 복음 신앙이 그 믿음이다. 이 믿음은 우리에게 의와 생명이 된다.

 

[7-9]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받은 후 신앙생활을 잘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생들 때문에 복음 진리를 거역하는 자리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 권면은 잘못된 것이다. 복음 진리와 반대되는 권면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면은 항상 성경적이며 복음 진리에 맞는다. 사람의 권면은 성경말씀으로 분별되어야 한다. 잘못된 권면은 누룩과 같다. 비록 그 오류가 작게 보일지라도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이 잘못된 권면은 온 교회를 부패시키고 변질시킨다. 작은 오류가 점점 더 큰 오류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온 작은 오류를 작게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비록 큰 오류가 갈라디아교회 안에 들어왔고 심각한 탈선이 일어났지만,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교인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 확신하였다. ‘다른 마음은 복음 진리와 배치되는 생각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셨다(10:27). 갈라디아 교인들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라면, 그들은 사도 바울이 다시 강조하는 바른 복음 진리의 교훈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요동케 한 자들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11-12]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할례를 전하지 않고 오직 바른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 만일 그가 할례를 전했더라면,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핍박 때문에 진리를 변질시키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진리에 관한 한, 바울은 비타협적이었다. 이만큼 이 문제는 중요했다. 곡식과 가라지는 분명히 구별된다.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참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끊어져야 할 자들이었다.

 

 

본문의 요점은 할례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할례는 사람을 율법 지킬 의무 아래 두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으려 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복음 진리에 반대된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 의에 근거하여 우리는 영광스런 영생과 영광스런 천국을 소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신 모든 잘못된 이단사설을 버리고 오직 성경의 바른 교훈에 굳게 서야 한다.

 

 http://www.oldfaith.net/01exposit/02nt/2-09갈라디아서.htm#5장: 자유자의 삶--사랑